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잊었겠니? 생각해보렴. 정기간행물실에서 그 사람의 활동사진을 얻기 위해서 2000권도 넘는 잡지를 뒤적인 나야. 그런 사람이 바로 내 눈앞에 있는데 너라면 어떻게 하겠니?
그래. 이미 20년전에 모든 걸 다 그만둔 사람이었지. 하지만 그 커피숍에서 커피잔을 들고 있는 모습만으로도 난 예전의 모든 걸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단다.

알아. 네 말대로지. 매체에 개차반으로 소문난 사람이었다는 거 알고 있었지. 더더군다나 내 직업을 알면 그는 더욱 거칠어질 수도 있었을 거고.
그래서 난 조용히 그의 옆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단다. 그리고 잠깐 다른 자리로 곁눈질한후 그의 자리를 봤을 때.
없었어! 사라지고 없었단다!!
몰래 나간거라고 할 수도 없었어. 문이 열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거든. 더욱 놀라운 건 그가 들고 있던 커피잔도 사라지고 없었던거지.
자아, 한 시대에 아줌마 팬으로써 이쯤 되면 이렇게 원통할 떄가 어디 있겠니.

너는 날 비웃는구나. 아줌마가 이 나이에 와서 그래 40가까이 되어서 옛날의 스타를 그리는 게 웃기겠지.
그래서 그날은 그가 그 카페에 오는 것을 알게 된 걸로 만족하기로 했단다.
그 사람 성격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거든. 한번 정한 자리는 없어질 때까지 자기 자리라고 생각한댔으니까.
그리고 지금은 인기도 없으니까 아는 사람도 별로 없으니까 계속 올거라는 믿음도 있었어.
사랑이라고? 음...글쎄다.

-------------------------------------------------------------------------------------------------------------------
그 다음날에 가봤지 그는 없더구나. 항상 시계처럼 정확한 사람인데 말이야.
근데 재미있는 건 그날 모인 사람들의 모습이었지. 조금 구시대같은...흑백영화시대에나 볼법한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있지 않겠니? 외모도 표준 한국인같지는 않았어.
그래, 굳이 표현하면 ...넌 알려나? 신성일이나 엄앵란 같은 사람들 말이야.
분위기도 고즈넉한 것이, 마치 앵란이! 이 다방 코히 맛나지 않아? 라고 서로에게 묻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지.  저 한구석에는 강부자가 앉아 있을 것 같고 이쪽 편에는 김창숙이, 왼쪽편에는 사미자가 전성기의 외모를 가지고 앉아 있는 그런 모양새 말이야.
다들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난 그만 압도되고 말았단다. 그러고 있는데 마스터가 내 앞에서 똑똑하고 손가락 노크를 하지 않았겠니?

 

"주문은 뭘로 하시겠습니까?"

 

"아...아메리카노로 주세요."

 

"네에."

 

마스터는 능숙하고 조용하게 뒤로 돌아서서 아메리카노 한잔을 뽑더구나. 난 그제서야 안심했단다.
그렇잖아. 난 설마하니 다방 커피라도 마시는 줄 알았으니까. 아니면 타임머신이라도 타서 되돌아가지 못하면 어떻게 해?
근데 또 내 옆자리에서 달그락하는 소리가 나지 않았겠니? 마음을 추스르고 옆을 보니 그래, 또 그 사람이 앉아있더라.
문소리도 못 들었는데 언제 온 거지?
아메리카노를 받고 나서 그에게 뭐라고 말을 붙이려고 했는데 그는 그냥 깊은 눈매로-그래, 날 한눈에 사랑에 빠지게 한 그 눈동자로-커피잔을 깊이 응시하다가 한잔을 홀짝 마시더니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말더구나.
기겁할 노릇이지 뭐니? 유령도 그렇지는 않을 거야!
내가 입도 떼지 못하고  어버버 거리고 있자, 마스터가 한마디 하더구나.

 

"리필해드릴까요?"

 

그제사 주변을 둘러보니 그 많던 사람들이 소리도 없이 사라지고 난 후였어.

 

"유...유령."

 

내 말에 마스터는 고개를 한번 저었어.

 

"리필해드리죠."

 

그걸로 그날의 괴기담은 끝나고 말았단다.

---------------------------------------------------------------------------------------어린 시절에 들은 이야기인데, 요즘처럼 홍차나 커피나 널리 퍼지기 전의 일이었단다.
커피라면 원두를 떠올리는게 아니라 자판기 커피나 떠올리던 그 시절 말이야.
그러니까 요즘 흔히들 말하는 홍차점이나 커피점인들 생각이나 했겠니?
어쨌든 궁금한 건 끝장을 내는 내 성격이라, 몇번이고 그 카페에 들락거리기 시작했지.
그 미스터리한 카페에 가 보고 싶다고? 아, 하여튼 더 들어봐. 그게 작년말쯤의 이야기니까.
하여간 점 이야기 하다 말았는데, 한 3개월 이상 매일매일 다니기 시작하니까 마스터도 조금은 날 생각하기 시작했단다. 요즘 젊은 남자들이 보면 늙은 된장녀라고 욕하고도 남겠지만, 알다시피 내가 궁금한 건 못참잖니.

 

"포츈쿠키라도 드셔보시겠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난 커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스타벅스? 커피빈? 시애틀의 잠 못이루는 밤?
이름은 많이 알지. 왜냐하면 내 동네에는 그 커피집들이 줄 지어 있으니 말이야.

 

"커피점도 재미있을 겁니다."

 

난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사람이라 그런 건 별로 필요가 없었지. 그래서 정중히 사양하고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는데, 또 그가 나타나지 않았겠니?
이번에는 욕을 얻어먹더라도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지. 까칠한 성격이라 여자 상대로 주먹질은 안 하겠지만 절대로 좋은 소리는 안 하는 사람이니까.
홀짝. 한 모금 마시고, 잠시 인기있었던 예전을 생각하는 것처럼 앞을 보다가 다시 홀짝 한모금 마시고...
한 커피를 한 30분은 마셨을 거야. 그리고, 마지막 한모금, 잔의 가장 마지막 부분, 찌꺼기 있는 부분까지 나왔을 때, 그는 전에 봤던 대로 갑자기 사라지고 말았지.

 

"유...유령!"

 

피식. 하고 마스터가 웃었어.

 

"아직도 그 사람은 예전이 그리운 모양입니다. 사모님, 다시 한잔 리필해드리죠."

 

"......"

 

그제서야 알 수 있었지. 그 사람이 여기 온 건 바로 그 커피때문이었던거야.
그 사람뿐만 아니라 그 흑백영화에 나오는 것 같은 배우들도!

 

"사모님은 뭔가 알고 싶거나 보고 싶거나, 예전에 돌아가고 싶었던 적이 없으셨나요?"

 

마스터의 말에 난 잠시 고민했지.

 

"......"

"간단합니다. 커피 찌꺼기가 약간 남아있다면 그걸 보고 잠깐 다녀올 수도 있죠. 혹은 과거에서 이쪽으로 오거나."

 

"...과거에서?"

 

"네. 몇달전에 몇분 보셨었죠? 그 분들은 미래에 자기가 어디에 있게 될지 알고 싶어서 오신 분들이죠."

 

"알아보고 가나요?"

 

"뭐, 굉장히 정확하니까요. 점쟁이의 거짓말도 아니고, 여긴 확실한 미래니까요.  단지 점의 형식을 빌리고 있을 뿐이지만."

 

"......"

 

"사모님이 좋아하는 배우도 자신의 미래를 보려고 간 거랍니다. 커피속에서 자기의 미래를 본 것이죠."

 

"근데 왜 꼼짝을 안 하죠?"

 

"저도 잘 모르겠군요. 미래의 그 사람이 오신 건지, 아니면 과거에서 이곳으로 오신 건지. 잘 모르겠거든요. 항상 손님들이 왔다갔다 하시니까요. 과거에서 미래로, 미래에서 과거로."

 

난 하도 어이 없고 정신 없어서 조용히 있었더니 마스터가 조용히 말을 하는거야.

 

"사모님 정도면 어느 정도 재력도 있으시고 하니까 저랑 동업을 하셔도 괜찮으실 것 같은데요..."

 

마스터는 날 딱 3개월 봤을 뿐이야. 난 농담으로 치부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사람들이 사라진 걸 벌써 몇번이나 봤으니까 안 믿을 수도 없고 그런 곤란한 상황에 빠졌지.

 

"...커피 잘 마셨습니다."

 

그렇게 일어서려고 하는데 마스터가 손을 꽉 잡더구나.  소름이 쫙 끼쳤지.

 

"커피 찌꺼기가 좀 남았군요. 잠깐 보고 가시죠."

 

그래서 보았지. 그러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단다.
보고나서의 기억이 전혀 없단다. 돌아오고 나니 30분 뒤에 네가 들어왔고. 그러고나서는 난 몸이 아파서 한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했었지.
네가 병구완을 했었고...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어. 왜 그때 진작 이야기를 안 했느냐고?
무서우니까. 무슨 일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고?

갑작스럽게, 아주 갑작스럽게 그 카페는 어느날 무너지고 말았단다. 그래 작년에 말이야.
내가 병원에 있었을 적에.

그리고 내게 포춘쿠키 하나가, 그래 딱 하나와 커피콩 한개, 그리고 찻잔 한개가 도착했단다.
마스터가 마지막으로 내게 준 선물이었지. 마스터도 손님들도 그 카페에 깔려죽었거든.
왜 그가 내게 그걸 선물했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포춘쿠키를 열어보니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더라,

 

[미래와 현재는 이어져있지만 언젠가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이 생기면  끝나야 하는 순간이 온다.]

 

이제야 기억이 나는구나. 그래, 마스터는 그저 장소만 제공할 뿐 미래를 볼 수는 없는 사람이었던거야. 사람들은 그의 카페를 이용해서 과거로 돌아가거나 미래로 잠깐 떠날 수 있었던 거고.
그제사 알았지. 마스터는 내가 마신 잔으로 미래를 본 거지. 카페는 무너질 수 밖에 없었던 거고. 난 다시는 그 카페로 갈 수 없었던 거고. 기억이 없었던 건 바로 그것때문이었단다.

 

거짓말이라고? 거짓말일 수도 있겠지. 본래 작가란 그런 존재니까 말이야.
가끔 한 시대가 저물어가는 가게가 보이면 이렇게 덧붙여주고 싶은 게 사람 마음 아니겠니?
그리고 더욱 중요한 건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이 지금 TV에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지!
요즘은 카페인 중독때문에 머리가 아파서 대신 수국차를 마신다고 하더라.

복귀하면서 거친면이 많이 줄었들었대. 다행이지 뭐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