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가 민들레끼리 텔레파시를 주고받듯이 - P59
사랑하는 문장에 샤프로 0.3 굵기 밑줄을 그으면 위태로워 보였다. 허공에 걸린 줄 위에서 묘기를 부리는 아이처럼 왜 저기에서 왜 저렇게 높은 데서 그곳에 두지 않기 위해 그날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속에 품고 있다가 부러질 때마다 조금씩 내미는 심(心) - P60
빛이 난다 눈을 감았을 때 빛이 난다
때 묻은 발길 사이 지팡이로 타닥타닥 때리면 때릴수록 더 빛이 나는 길
민들레가 민들레끼리 텔레파시를 주고받듯이 광산의 어둠 속에서 황금이 빛나듯이 노랑에서 노랑으로 노랑에서 노랑, 노랑 노랑, 노랑······
한밤중에 모닥불을 지펴 놓은 듯 타닥타닥 소리로 앞 못 보는 사람들 앞이 환해져 얼굴까지 환히 피는 꽃길이 있다 - P61
탁,탁 탁 탁 탁탁,탁 탁! 탁을 따라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아껴가며 걷습니다
달에 처음 착륙한 우주인의 속도로요 빨리 걸으면 몸이 붕 떠 버릴지도 모르니까요 - P62
모를 거예요, 당신은 달의 뒷면처럼 캄캄한 선글라스 뒤에 어떤 눈빛이 숨어 있는지를 신호등 옆에서 들리는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사람들의 숨소리를 - P62
그들 사이를 지나쳐 걷는 우주인의 표정으로 보이지 않는 눈마저 꼭 감고 있는 그 얼굴을 지구인들은 모를 거예요 눈이 먼 사람의 눈이 머나먼 저 우주의 어둠을 보고 있는 것을 - P63
일교차가 크다는 말은 하루 중 더울 때와 추울 때의 온도 차가 크다는 말이다
그런 때는 감기에 잘 걸린다. 지금의 나처럼
잘 먹고 잘 쉬어야 약이 잘 듣는다고 약국 선생님이 말했다
아프다고 몸이 내는 소리를 약이 듣나 보다
엄마의 왼손이 엄마 이마를 짚고 엄마의 오른손이 내 이마를 짚고 일교차를 잴 때 열이 많이 내린 거 같네, 하는 말까지 이 약이 - P64
성호는 오늘도 그림자와 얘기하나 보다
바나나도 가만히 놔두면 스스로 어두워지잖아
손을 뻗어서 저 어두워지는 껍질을 다섯 손가락처럼 쫙 펴 주고 싶은데
누구에게도 눈길 한번 안 주는 성호 옆에서 나는 낮달처럼 연해지고 있어 - P66
면도를 했다 흰 거품 묻혀 쓱싹쓱싹, 턱 밑에 지우개를 대고 박박 문지르고 난 것처럼 면도한 자리가 파릇파릇했는데
다음 날 턱수염이 새싹처럼 돋은 아침, 쑥쑥 자란 낮, 시커먼 덤불숲이 된 저녁이다
올해는 가뭄도 심하다는데 턱수염은 물 한 방울 안 줘도 잘도 자랐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턱 밑에는 ㄷ을 심어 놓은 게 틀림없다 - P67
봄날 수업에 집중이 안 된다 숨 좀 쉬자고 책에 있는 글자들 중 모든 ㅇ을 까맣게 칠하자 ●이 되었다 콧구멍이 되었다 책에도 숨 쉴 구멍이 생겼다 아니다 이제 보니 엎드린 아이들 뒤통수다 한둘이 아니다 - P68
네도 아니고 응도 아니고
ㅇㅇ 이라는 대답은 동그랗게 뜬 두 눈이다, 아니 한숨 쉬는 콧구멍이다, 아니 데굴데굴 굴러오는 구슬 두 개다
뭐든 물어보면 대답 대신 언제나 ㅇㅇ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려 보는 사춘기 - P69
언니는 손가락 허물을 뜯는 버릇이 있어
번데기처럼 주름진 손가락이 빨갛게 부풀어 오른 건 원래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마음이 열 손가락 열 가지 끝에서 열리는 날을 나비가 될 날을 기다려 온 건지도 몰라
꼭 화가가 될 거야 화가가 아님 안돼 스스로에게 한 말들 듣는 일이 뜯는 일이 되었는지도 몰라
언니의 손가락이 화가 난 것처럼 붉어서 눈처럼 흰 종이 위에 - P70
식혀 주고 싶어 눈이 다 녹을 때까지 붓 끝에서 노랑을 간질이는 나비 한 마리, 나비 두 마리 훨훨 화가가 아니라도 화가 나지 않은 손가락 끝에 앉을지도 몰라 멋진 그림이 될지도 몰라 - P71
얼음이 뻘뻘 땀을 흘려 제자리에 있으면서 운동하는 것도 아니면서 여름도 아닌데
전학생, 자기소개해 볼까요? 안녕 나, 나는 그러니까 나는, 나는 입도 못 떼고 나는,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그림자가 되었어 - P72
수많은 검은 머리카락 속에 있는 흰 머리카락 한 가닥처럼
뭐든 특별한 데가 있어야지 뽑히는 세상 - P73
공을 던졌다 공이 저 멀리 날아가고 개가 공을 따라갔다
한참 있다가 개가 공을 물고 내게로 왔다
달린 건 개인데 공이 땀을 흠뻑 흘리고 있었다 개한테 물린 채 울상을 짓고 있었다 개가 공을 이겼다 언제나 개가 이긴다
오늘도 그럴 줄 알았는데
힘껏 던진 공을 따라 달려간 개가 돌아오지 않았다
공이 하늘까지 올라가서 개도 하늘까지 따라갔나 봐 둘이 사실 되게 친했나 봐 - P7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