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말은 검은 것과 흰 것 사이에서 고민한다. 나는 어느 쪽일까?
얼룩말은 검은 창살에 갇힌 걸까. 흰 창살에 갇힌 걸까?
둘 중에 하나면 좋겠다고 이도 저도 아닌 얼룩말은 마치
내와 네
내가 좋아 네가 좋아
이 둘의 발음이 잘 구분 안되는 것처럼
얼룩말은 미로처럼 수많은 길을 가진 무늬 때문에 고민한다 그러다 알게 되었다 - P42
저 멀리서 얼룩말 무리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보고 모두 같은 고민을 가진 무늬들이 함께 다니며 힝힝, 먼지를 일으키는 것을 보고
나는 검은 말도 흰 말도 아니어도 좋은 말이라고 앞으로는 그런 말을 하겠다고 - P43
잘못 놓은 바둑돌처럼 앉아 있는 사람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흰 상복을 입은 사람들 모두들 툭툭, 주저앉는다 바둑 두는 사람들처럼 조용히 툭
툭 툭 눈물 떨어지는 소리마저 점점 어두워지는 시간 누가 봐도 흰 돌이 질 것 같지만 누가 보든 말든 툭, 툭 알파고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을 슬픔으로 툭, 툭 - P44
비행기가 흰 줄을 그어요 종이컵 전화기를 잇는 실처럼 길게 뻗은 줄
줄이 떨리는 건 아빠 목소리가 떨려서 그래요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아빠 잘 있어? 잘 있어 몇 달 후에 언제 와 언제 나 보고 싶다, 다음에 다시 툭
툭 통화는 끊어진 줄처럼 축 늘어져서 나는 하려던 말을 감아요 - P46
피가 안통하게 손가락이 노래지도록 연필을 쥐고 남은 말을 편지로 써요
잘 지내는 줄 행복한 줄 곧 올줄 줄줄 흐르는 눈물 두 줄
다음 비행기를 기다리느라 나는 늘 해바라기처럼 까맣게 탄 얼굴이에요 - P47
흑백은 어쩌면 모든 색이 다 빠져나간 뒤에도 남아 있으려는 마음 오랜 시간 바닥 생활을 하던 그림자의 영역 흰머리가 나고 책의 옆면처럼 서로를 오래 읽은 흔적처럼 바랜다 해도 이 세상에 남으려는 마음 - P48
꽃잎과 뿌리의 장거리 통화를 엿들었다 - P49
"거기는 낮이니? 여기는 밤이란다." 뿌리가 말했다 "아니 여기도 밤이에요 엄마, 오늘은 좀 춥네요." 꽃잎이말했다
꽃잎이 떨면 뿌리도 떨었다 밤새 울었던 흔적이 잎에 맺혔다
둘의 대화에서 물소리가 났다 - P49
자꾸 발을 내려다보는 습관이 뿌리를 내려요
흔들리지 않아요
이곳을 힘주어 말하면 이 꽃이 되듯이
남으로 살지 않고 나무로 살래요 - P50
찌이익 앙다문 베개 입을 열어 보았다
흰 베개 속에 내가 그동안 꾼 꿈이 잔뜩 묻어 있다
아닌 척 이를 악물고 참았지만 속이 상했던 거다 - P51
수채화처럼 세상이 연해질 때까지 비가 왔으면 좋겠다
피아노를 치듯 톡, 톡 비가 왔으면 좋겠다
길고양이에게 물을 주고 초록을 더 진한 초록이게 노랑을 더 빛나는 노랑이게 해 주기를
사람들이 저마다 알록달록한 우산을 날개처럼 펴고 웅덩이를 건널 때는 띄어쓰기하듯이 새처럼 톡, 톡 건너면 좋겠다
비닐우산을 쓰고 빗방울이 움직이는 걸 봐도 좋고 - P52
우산 없이 흠뻑 젖을 수 있어도 좋겠다
연못과 호수와 웅덩이가 동글동글한 입을 벌리고 달팽이가 두 눈을 느리게 내밀고 새들이 젖은 속눈썹을 들고 하늘을 바라본다면 좋겠다
비가 그치고 나서 세상이 더 맑고 분명해 보인다면 좋겠다, 좋겠다 - P53
어느 날 컴퓨터가 말을 걸었다
"업데이트하시겠습니까?" 자기도 이제 좀 크고 싶다는 거다
나는 "예"라고 적힌 버튼을 눌렀다
모니터의 파란 화면에 메시지가 떴다
업데이트 작업 중 75% PC를 끄지 마세요. 이 작업은 시간이 걸립니다. PC가 여러 번 다시 시작됩니다.
아, 벌써 두 시간째다
좀 있으면 학원에 가야 하는데 그 전에 저녁도 먹어야 하는데 - P54
컴퓨터는 계속 업데이트 중 친구들이 모두 연락을 안 받을 때처럼 할게 없어
나도 이참에 좀 커 볼까 하며 소설책 한 권을 펴고 읽기로 했는데, 뭐지? 생각보다 훨씬 재밌어 어느새 업데이트가 끝난 컴퓨터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도 나는 책장을 넘긴다. 펄럭펄럭 어린 새가 처음 날갯짓하는 기분으로
업데이트 작업 중 75%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이 작업은 시간이 걸립니다. 이야기가 여러 번 다시 시작됩니다. - P55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하늘 아래 물결 밑줄 화자의 양심을 드러내는 절대적 기준이라고 적어라
잎새에 이는 바람 바람에 동그라미 치고 시련과 고난 내면을 흔드는 존재라고 적자
별에는 별 그리고 순수 그리고 이상이라고 써
모든 죽어 가는 것에는 네모 이게 뭘까? 일제 강점기의 고통받던 우리 민족이겠지? 그래 그렇게 적자 - P56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밑에 밑줄 자, 이 바람은 앞에 나온 바람과 달라 내면이 아니라 바깥에서부터 오는 시련과 고난 그 바람에 빛이 흩날리면서도 버티고 있는 저 별에다가 별 하나, 별, 별셋
동그라미 네모와 함께 수많은 별과 함께 수평선처럼 바른 밑줄 출렁거리는 명중과 함께 빨간 펜 파란펜 글씨 형광펜 밑줄에 묶인 윤동주의 시가 빛나는 거 보여? - P57
사람들이 내게 원하는 면은 6 나를 세상에 던져 놓고는 6이 나오길 기대한다
1이 나온다면 혼자 친구도 없이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나를 사랑할 사람이 있을까?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남들보다 앞서가지도 못하고 겨우 한 걸음이 전부지만 내 모든 면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는 사람들이 함부로 나를 굴려도 괜찮았다 6이 나와도, 4가 나와도, 2가 나와도 때로 혼자여도 좋았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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