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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310

오늘의정진: 不離當處常湛然/  불리당처상담연/ 지금 있는 곳을 떠나지 않고 항상 담연(즐기는)하니


- 100일 정진, 75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일흔 일곱 번째와 일흔 여덟 번째 구절은

<一切數句非數句/  일체수구비수구/ 일체의 수구와 수구 아님이여

與吾靈覺何交涉 / 여어영각하오섭 / 나의 신령한 깨침과 무슨 상관 있을 건가

不可毁不可讚/ 불가훼불가찬/ 훼방도 할 수 없고 칭찬도 할 수 없음이니

體若虛空勿涯岸 /체약허공물애안/ 본체가 허공과 같아서 한계가 없도다> 였다.


강을 건넜다면 배는 더 이상 타지 않아도 된다.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했다면 그동안 도를 닦는데 필요했던 수구(數句)와 비수구(非數句) 같은 개념도 이제는 더 이상 필요가 없다. 그 또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여태껏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썼던 모든 수행법이 사실은 다 방편이었다. 방편이 좋았다 나빴다 평가하고 분별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깨달은 이의 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배가 없이 어찌 강을 건너고 수행 없이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을까? 방편이라고 하지만 그 또한 법이며 도가 아닐까?


오늘은 일흔 아홉 번째와 여든 번째 구절

不離當處常湛然/  불리당처상담연/ 지금 있는 곳을 떠나지 않고 항상 담연하니

覓卽知君不可見 / 멱즉지군불가견 / 찾은 즉 그대는 보지 못함을 알겠노라

取不得捨不得/ 취불득사불득/ 가질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으니

不可得中只麽得 /불가득중지마득/ 얻을 수 없는 가운데 이렇게 얻을 뿐이로다


담연(湛然)이란 맑고 청정하다는 뜻과 평안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진리는 항상 나를 떠나서 있지 않는다.

지금 내가 있는 자리가 진리의 자리이다. 그래서 선지식들 께서는 나 이외의 다른 곳 찾아 헤매지 말라고 경책하셨다.

이에 관련된 어느 선사의 탐춘(探春) 이란 시()가 있다.


<盡日尋春不見春 (진일심춘불견춘)-하루 종일 봄을 찾아다녔어도 봄을 보지 못하고

芒鞋遍踏朧頭雲 (망혜편답롱두운)- 신발이 다 닳도록 언덕 위의 구름 따라다녔네.

歸來偶過梅花下 (귀래우과매화하)- 이제 돌아와 우연히 매화나무 밑을 지나는데

春在枝頭已十分 (춘재지두이십분)- 봄은 이미 매화가지 위에 한껏 와 있었구나.>


나는 늘 분별 망상에 가려져 있다. 분별과 망상심은 언제나 항상 나의 마음에 꽉 차 있어 내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입으로는 내 본 뜻과는 전혀 상관도 없는 소리를 뱉고 야 만다.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사실이 그렇다. 어리석음을 자각하게 된다면 마음을 우선 쉬어야 한다.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분별심과 망상심에 끄달리지 말고, 밖으로 허덕이지 말며, 그저 나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보지 못하는 가운데 볼 수 있고, 가질 수 없는 가운데 가지게 되고, 얻을 수 없는 가운데 얻는 도리가 생긴다.


<일일 소견>

스스로가 어리석다는 것부터 아는 것, 담연의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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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39

오늘의정진:一切數句非數句/  일체수구비수구/ 일체의 수구와 수구 아님이여


- 100일 정진, 74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일흔 다섯 번째와 일흔 여섯 번째 구절은

<一地具足一切地/  일지구족일체지/ 한 지위에 모든 지위 구족하나니

非色非心非行業 / 비색비심비행업 / 색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행업도 아니로다.

彈指圓成八萬門/ 탄지원성팔만문/ 손가락 튕기는 사이 팔만 법문 원만히 이루고

刹那滅却三祗劫 / 찰나멸각삼지겁/ 찰나에 삼아승지겁을 없애도다> 였다.


  부처의 지위는 높은 위치에 있으며 권위와 권세를 누리는 자리가 아니다. 차원이 낮은 미생물에서부터 차원이 높은 인간 그리고 천상계에 사는 천인 까지도 모두 평등하고 동등한 지위를 가졌다고 여긴다. 아무리 미물이라 할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부처를 이루고 말 것이라는 서원을 담겨있다. 그래서 불자들은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 즉 나와 남이 모두 일시에 부처의 도를 이루자는 뜻을 항상 서원(誓願)하고 있다. 이러한 마음가짐 이야말로 수행자의 가장 기본이기 때문이다.

  탄지(彈指), 손가락 하나 튕기는 그 단순한 동작 하나에서도 자비를 담고 있으며 그 자비가 바로 팔만 사천 법문에서 설하고 있는 지혜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비와 지혜가 한 찰나에 이루어지는 순간에 모든 시간의 존재는 무너져버린다. 과거도 미래도 현재의 경계가 모두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오늘은 일흔 일곱 번째와 일흔 여덟 번째 구절

一切數句非數句/  일체수구비수구/ 일체의 수구와 수구 아님이여

與吾靈覺何交涉 / 여어영각하오섭 / 나의 신령한 깨침과 무슨 상관 있을 건가

不可毁不可讚/ 불가훼불가찬/ 훼방도 할 수 없고 칭찬도 할 수 없음이니

體若虛空勿涯岸 /체약허공물애안/ 본체가 허공과 같아서 한계가 없도다

  

불교에서 수()의 개념은 방대하다. 찰나라는 아주 짧은 시간부터 겁이라는 아주 긴 시간까지 포함한다. 그래서 불교는 숫자(數字)의 종교가 아닌 가 싶다. 경전을 보다 보면 수없이 많은 숫자와 연결된 불교 용어들을 보게 된다. 간단히 예를 들자면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오계, 육바라밀, 육근, 육식, 육경, 33, 32 80종상, 8만 사천 법문, 삼천대천세계 등 대부분의 불교용어는 숫자들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숫자가 가진 의미를 모르고 서는 그 뜻을 제대로 알 수가 없을 정도다그래서 불교는 우주의 일체 모든 것을 숫자로 나타낼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런데 깨달음에 이르는 순간 일체를 숫자로 표현하는 구절(數句)과 숫자가 아닌 구절(非數句)은 사라져 버린다.  숫자나 숫자가 아님은 깨달음과는 상관이 없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이건 무언가 가 훼방을 놓거나 칭찬을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본성이 본래 비어져 있다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를 자각하는 순간, 그 없음이 단순히 텅 비워 있음이 아닌 텅 빈 충만임 알게 된 것이다. 본체가 허공과 같다는 것이 바로 이런 뜻이다. 그리고 그 본래 마음자리는 확 트여 있어 원래 제한이라고 할 것이 없기 때문에 한계가 없다고 표현했다.


<일일 소견>

한계가 없음은 무한(無限)이다

체가 없으니 걸림이 없다. 걸림이 없으니 자유롭다.

그러니 무한은 자유(自由)의 또 다른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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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38

오늘의정진: 一地具足一切地/  일지구족일체지/ 한 지위에 모든 지위 구족하나니


- 100일 정진, 73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일흔 세 번째와 일흔 네 번째 구절은

<一月普現一切水/  일월보현일체수/ 한 달이 모든 물에 두루 나타나고

一切水月一月攝 / 일체수월일월섭 / 모든 물의 달을 한 달이 포섭하도다.

諸佛法身入我性/ 제불법신입아성/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 나의 성품에 들어오고

我性還共如來合 / 아성환공여래합/ 나의 성품이 다시 함께 여래와 합치하도다> 였다.

 

만 강에 떠 있는 달을 건질 수 있는가?

아무리 물 속을 헤집어도 달은 건질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은 여전히 물 속에 잠긴 듯하다.

본래 달은 물속에 있지 않았다. 단지 하늘에 떠 있을 뿐이다.

건질 필요조차 없었다.

하늘의 달이 본체이고, 물에 달이 비춰짐을 모른다면

물 속에서 달을 건지려는 헛수고만 할 뿐이라.

우리의 성품도 그와 같다.

나의 성품이 본래 부처임을 모르고 절에 모셔진 부처만을 모시려 한다면

물속에서 달을 건지려는 헛수고와 다를 바 없으리.


오늘은 일흔 다섯 번째와 일흔 여섯 번째 구절

一地具足一切地/  일지구족일체지/ 한 지위에 모든 지위 구족하나니

非色非心非行業 / 비색비심비행업 / 색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행업도 아니로다.

彈指圓成八萬門/ 탄지원성팔만문/ 손가락 튕기는 사이 팔만 법문 원만히 이루고

刹那滅却三祗劫 / 찰나멸각삼지겁/ 찰나에 삼아승지겁을 없애도다


부처를 이루면 그 세상 아니 우주의 그 어떤 지위도 포함하는 지위가 된다.

지위란 높고 낮음이 있다는 관념이 있는데 부처는 그러한 지위가 아니다.

차별이 없이 평등하고 모두가 두루하고 원만한 지위에 가진다.

그러한 지위는 형상이 있는 것도 마음에만 존재하는 것도 또한 행의 결과물도 아니다.

보살이 부처가 되기를 발심하고 수행하여 부처를 이루기까지의 시간을 삼아승지겁(三阿僧祗刧) 이라고 부른다. 그게 어느 정도의 긴 시간인지를 살펴보면 우리가 조()라고 부르는 숫자는 1012승에 해당한다. 아승지라는 숫자는 10 56승에 해당하는 숫자라고 한다. 불교에서 일 겁이란 사방이4000리나 되는 돌산에 100년에 한번씩 하늘의 천녀가 내려와 옷 깃을 한번 스치고 올라가길 반복해서 그 돌산이 전부 없어지는 시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삼아승지겁이란 시간은 그저 어마어마한 시간의 상징일 것이다. 하지만 선()에서는 부처가 되는 경지의 시간은 한 찰나에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단지 손가락 하나 탄지(彈指)만으로도 팔만 사천이나 달하는 경()을 통달하게 되며 삼아승지겁이라는 아주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 찰나에 없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일일 소견>

김용의 소설에 나오는 무공비급중에 탄지신공(彈指神功) 이 있다. 황약사가 자주 쓰던 무공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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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37

오늘의정진: 一月普現一切水/  일월보현일체수/ 한 달이 모든 물에 두루 나타나고


- 100일 정진, 72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일흔 한 번 째와 일흔 두 번째 구절은

<雪山肥膩更無雜/  설산비니갱무잡 / 설산의 비니초 다시 잡됨이 없어

純出醍醐我常納 / 순출제호아상납 / 순수한 제호를 내니 나 항상 받는도다.

一性圓通一切性/ 일성원통일체성/ 한 성품이 뚜렷하게 모든 성품에 통하고

一法徧含一切法 / 일법편함일체법/ 한 법이 두루하여 모든 법을 포함하나니> 였다.

  

제호관정(醍醐灌顶tí hú guàn dǐng) 이란 성어(成語)가 있다.

제호는 어제 언급했다시피 희말라야에서 자라는 비니초를 먹은 소()에서 나온 젖이 원료다.

즉 우유(牛乳)  말이다.  이 신성한 우유는 마치 성수(聖水)와도 같다.

관정은 본래 불교의 한 종파인 밀교(密敎)계통에서 행해지는 의식으로 알려져 있다. 제자가 스승에게 귀의 하면 스승은 제자의 머리에 물을 뿌린다. 이러한 밀교의 입문식을 관정이라고 한다.

   관정을 하는 의미는 '일체 중생에게 본래 갖추어진 불성이 부처님과 스승의 가피로 있는 그대로 드러나라'   염원이 담겨 있다. 제호관정은 관정의식에 사용하는 성수 대신 제호를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결국 제호관정이란 관정을 받는 사람이 부처와 같은 깨달음을 얻게 되리라는 희망이 담겨 있다. 굳이 꼭 깨달음이 아니더라도 평범한 사람이 관정을 받고 아주 빛나는 모습으로 변하게 된다는 뜻도 된다.

   관정의식을 언급하니 기독교 의식중에 세례(洗禮)의식과 상당히 비슷하지 않나 싶다. 세례는 물을 통해 죄를 씻고 영혼의 정화를 상징한다. 관정은 내 안에 본래 있는 불성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신성한 물로 인간의 영혼을 정화를 시키고 각성한다는 의미에서는 서로 통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된다.


오늘은 일흔 세 번 째와 일흔 네 번째 구절

一月普現一切水/  일월보현일체수/ 한 달이 모든 물에 두루 나타나고

一切水月一月攝 / 일체수월일월섭 / 모든 물의 달을 한 달이 포섭하도다.

諸佛法身入我性/ 제불법신입아성/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 나의 성품에 들어오고

我性還共如來合 / 아성환공여래합/ 나의 성품이 다시 함께 여래와 합치하도다


하나의 달이 수 없이 많은 강물에 비춰진다.

강물에 비춘 달들은 모두 하늘에 떠있는 달이 본체이다.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라.

부처의 법신이 나의 성품에서 나왔고, 나의 성품이 바로 부처이다.

성품이 각각 다르다 하지만 본래 성품은 하나.

세상은 본래 화엄(華嚴)세상이다.

두두물물 부처 아님이 없다.


<일일 소견>

관정과 세례는 서로 다른 종교 의식이지만 그 본질을 구하는 점은 놀랍도록 같다.

그런데도 종교의 참 뜻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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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36

오늘의정진: 雪山肥膩更無雜/  설산비니갱무잡 / 설산의 비니초 다시 잡됨이 없어


- 100일 정진, 71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일흔 번 째 구절은

<龍象蹴踏潤無邊용상축답윤무변 / 용상이 차고 밝음에 윤택함이 그지없으니

三乘五性皆惺悟삼승오성개성오 / 삼승과 오성이 모두 깨치는 구나> 였다.


   깨달음에 이르는 수레가 작은 것이 소승, 큰 것을 대승이라고 부른다.

남방 불교를 대표하는 소승은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고, 북방 불교를 대표하는 대승은 보살의 경지에 이른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소승은 대승 보다 못하다는 생각, 대승이 소승보다 우월하다는 차별적인 관념이 부지불식간에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대승, 소승, 그리고 삼승에 이르기까지 모두 깨달음의 세계로 가는 하나의 방편에 불과하다.

법화경(法華經)에서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삼승(三乘)은 결국 일승(一乘)으로 이끌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오직 걸림없이 자유자재한 참 성품, 본래 마음자리를 얻기 위한 과정이었다.


오늘은 일흔 한 번 째와 두 번째 구절

雪山肥膩更無雜/  설산비니갱무잡 / 설산의 비니초 다시 잡됨이 없어

純出醍醐我常納 / 순출제호아상납 / 순수한 제호를 내니 나 항상 받는도다.

一性圓通一切性/ 일성원통일체성/ 한 성품이 뚜렷하게 모든 성품에 통하고

一法徧含一切法 / 일법편함일체법/ 한 법이 두루하여 모든 법을 포함하나니


   만년설이 쌓인 설산은 희말라야 산을 뜻한다. 희말라야가 어떤 산인가? 신들이 사는 곳이라고 부를 만큼 신성한 산이다. 세속과는 멀리 떨어져 있으며 눈덮인 산봉우리는 경외의 대상이기도 하다. 비니초라는 식물은 희말라야에서 자라는데 비니초가 자라는 지역은 다른 잡풀들은 자라지 못한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설산의 비니초는 순수하며 신비롭다. 그런 비니초를 먹은 소가 젖을 짜서 만들어 낸 유제품(乳製品)을 제호(醍醐)라고 한다. 제호는 쉽사리 얻어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다. 희말라야 같은 높은 산과 그리고 그곳에서 자라는 비니초라는 식물, 또 그 풀을 먹는 젖소까지 모두 갖추어져야 한다. 그리고 젖소의 젖을 짜내야만이 세상에 나올 수 있는 유제품이라 보통 사람이 얻기는 참으로 어렵다. 마치 깨달음을 얻기가 순수한 제호를 얻는 것만큼 어렵다는 비유라고 본다.

   그런데 증도가를 노래하는 영가현각(永嘉玄覺665~713) 스님은 항상 받는다고 했다. 스님이 받는다면 누구가 에게 공양(供養)을 받는 것 이리라. 스님은 얻기 어려운 순수한 제호를 늘 항상 공양 받는다고 했다. 도달키 어려웠던 깨달음의 경지를 이제는 마음대로 오고 간다는 뜻이다.

   하나의 성품이 뚜렷해지니 모든 성품에 두루하게 통한다. 그리고 하나의 법에 일체의 모든 법을 포함한다. 법성계에 나오는 <일중일체다중일,일즉일체다즉일(一中一切多中一,一卽一切多卽一) 하나 안에 일체가 있고, 일체 안에 하나가 있으니,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인 경지가 바로 이 아닌가?


<일일 소견>

이제 100일 정진도 70일을 넘겼다. 오늘부터 남은 30일은 4구절씩 의미를 살펴봐도 무방할 것 같다.

숙능생교(熟能生巧shú néng shēng qiǎo), 단련이 될 수록 익어지고, 기교가 생겨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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