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노트> 무조건 좋게 결정지어서 맡겨놓기
날짜:2025년3월9일
오늘의정진:一切數句非數句/ 일체수구비수구/ 일체의 수구와 수구 아님이여
- 100일 정진, 74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일흔 다섯 번째와 일흔
여섯 번째 구절은
<一地具足一切地/ 일지구족일체지/ 한 지위에 모든 지위 구족하나니
非色非心非行業 / 비색비심비행업 / 색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행업도 아니로다.
彈指圓成八萬門/ 탄지원성팔만문/ 손가락 튕기는 사이 팔만 법문 원만히 이루고
刹那滅却三祗劫 / 찰나멸각삼지겁/ 찰나에 삼아승지겁을 없애도다> 였다.
부처의 지위는 높은 위치에 있으며 권위와 권세를 누리는 자리가
아니다. 차원이 낮은 미생물에서부터 차원이 높은 인간 그리고 천상계에 사는 천인 까지도 모두 평등하고
동등한 지위를 가졌다고 여긴다. 아무리 미물이라 할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부처를 이루고 말 것이라는
서원을 담겨있다. 그래서 불자들은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 즉 나와 남이 모두 일시에 부처의 도를 이루자는 뜻을 항상 서원(誓願)하고 있다. 이러한 마음가짐 이야말로 수행자의 가장 기본이기 때문이다.
탄지(彈指), 손가락 하나 튕기는 그 단순한 동작 하나에서도 자비를 담고 있으며 그 자비가 바로 팔만 사천 법문에서 설하고
있는 지혜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비와 지혜가 한 찰나에 이루어지는 순간에 모든 시간의 존재는 무너져버린다. 과거도 미래도 현재의 경계가 모두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오늘은 일흔 일곱 번째와 일흔 여덟 번째 구절
一切數句非數句/ 일체수구비수구/ 일체의 수구와 수구 아님이여
與吾靈覺何交涉 / 여어영각하오섭 / 나의 신령한 깨침과 무슨 상관 있을 건가
不可毁不可讚/ 불가훼불가찬/ 훼방도 할 수 없고 칭찬도 할 수 없음이니
體若虛空勿涯岸 /체약허공물애안/ 본체가 허공과 같아서 한계가 없도다
불교에서 수(數)의 개념은 방대하다. 찰나라는 아주 짧은 시간부터 겁이라는 아주 긴
시간까지 포함한다. 그래서 불교는 숫자(數字)의 종교가 아닌 가 싶다. 경전을 보다 보면 수없이 많은 숫자와 연결된
불교 용어들을 보게 된다. 간단히 예를 들자면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오계, 육바라밀, 육근, 육식, 육경, 33천, 32호 80종상, 8만 사천 법문, 삼천대천세계 등 대부분의 불교용어는 숫자들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숫자가 가진 의미를 모르고 서는 그 뜻을 제대로 알 수가 없을 정도다. 그래서 불교는 우주의 일체 모든 것을 숫자로 나타낼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런데 깨달음에 이르는 순간 일체를 숫자로 표현하는 구절(數句)과 숫자가 아닌 구절(非數句)은 사라져 버린다. 숫자나 숫자가 아님은 깨달음과는 상관이 없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건 무언가 가 훼방을 놓거나 칭찬을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본성이 본래 비어져 있다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를 자각하는 순간, 그 없음이 단순히 텅 비워 있음이 아닌 텅 빈
충만임 알게 된 것이다. 본체가 허공과 같다는 것이 바로 이런 뜻이다.
그리고 그 본래 마음자리는 확 트여 있어 원래 제한이라고 할 것이 없기 때문에 한계가 없다고 표현했다.
<일일 소견>
한계가 없음은 무한(無限)이다.
체가 없으니
걸림이 없다. 걸림이 없으니 자유롭다.
그러니 무한은 자유(自由)의 또 다른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