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노트>    무조건 좋게 결정지어서 맡겨놓기


날짜:2025126

오늘의정진: 觀惡言是功德(관악언시공덕) 나쁜 말을 관함이 바로 공덕이 있으니


- 100일 정진, 32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서른 한번째 구절은

<我聞恰似飮甘露, 銷融頓入不思義 / 아문흡사음감로, 소융돈입불사의

내가 듣기에 마치 감로수를 마시는 것과 같아서, 녹여서 단박에 부사의의 경지에 들어 가리다.> 였다.

잘 들어야 한다. 밖에서 들리는 소리만 잘 들어야 하는 것만이 아니라 내 안에 울리는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진리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될 때 감로수를 마시는 것과 같이 바로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가게 된다.

감로(甘露)는 감로수를 뜻한다. 불교에서 감로수는 천상계 도리천(忉利天)에서 마시는 신성한 이슬과 같은 음료를 말한다. 한번 마시게 되면 모든 고통이 없어지게 되고 혹은 죽지 않는 불사주(不死) 라고도 불린다.

한 번 마심에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경지가 바로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깨달음의 맛이란 바로 감로와 같은 맛이란 것이다.


오늘은 서른 두 번째 구절

觀惡言是功德 (볼 관, 나쁠 악, 말씀 언, 바를 시, 공 공, 큰 덕 )

관악언시공덕/ 나쁜 말을 관함이 바로 공덕이 있으니

此則成吾善知識(이 차, 법칙 칙, 이룰 성, 나 오, 착할 선, 알 지, 알 식)

차칙성오선지식 / 이 법칙이 나에게는 선지식을 되었다


우리나라 조계종(曹溪宗) 사찰에서 예불(禮佛) 의식에서 빠지지 않고 독송(讀誦)하는 경전이  천수경(千手經)이다.

천수경의 첫 구절은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으로 시작한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를 외우는 것이다.

불교를 모르는 사람들은 마술사가 외우는 주문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천수경의 첫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정구업진언은 바로 '말로 짓는 업을 깨끗히 청정하게 만드는 참된 주문'이란 뜻이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는 "진실한 말을 하면 진언이 되고 하치 않은 말을 하면 구업이 되도다"는 뜻이 된다. (대행 스님 뜻으로 푼 천수경 중에서)


()은 불교의 세계관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내가 지금 존재하는 이유와 앞으로 내가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이 모두 업으로 인해 벌어지기 때문이다.

완전한 구경(究竟)의 깨달음에 이르러 열반에 들지 않고서는 윤회(輪廻)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육도윤회(六道輪廻)의 모든 원인은 업에서 기인(起因)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모든 업을 짓는 행위 중에서 가장 첫번째가 입으로, 즉 말로 짓는 구업(口業)이다.

그래서 수행을 하게 되면 자연히 침묵(沈默)을 중요시 하게 되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스님들께서 묵언수행(默言修行)을 통해 더 이상의 구업을 짓지 않고 오로지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는 것이다.


觀惡言是功德  관악언시공덕/ 나쁜 말을 관함이 바로 공덕이 있으니

此則成吾善知識 차칙성오선지식/ 이 법칙이 나에게는 선지식을 되었다

나쁜 말을 관한다 함이 더 이상 구업을 짓지 않고 바로 침묵으로 나의 내면의 소리를 듣겠다는 뜻이다.

이런 묵언수행이야 말로 내 구업을 더 이상 짓지 않고 공덕을 쌓는 수행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법칙을 따르는 것이 바로 나에게는 큰 가르침을 주는 선지식(善知識)과 다름 없다는 뜻이 된다.

구업만 더 이상 짓지 않아도 수행은 수월해 진다.

<일일 소견>

얼마나 나는 안밖으로 소음에 시달리는가?

그게 다 구업이다. 남들이 짓는 구업, 내가 짓는 구업.

침묵은 구업을 정화시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관노트>    무조건 좋게 결정지어서 맡겨놓기


날짜:2025년 125

오늘의정진: 我聞恰似飮甘露(아문흡사음감로) 내가 듣기에 마치 감로수를 마시는 것과 같아서


- 100일 정진, 31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서른 번째 구절은 

<從他謗任他非把火燒天徒自疲/종타방임타비파화소천도자피)

남을 비방에 따르고 남의 비난에 맡겨둬라불로 하늘을 태우려 하나 공연히 자신만 피곤하도다> 였다

남들이 하는 소리는 그저 남들의 소리일 뿐이다.

남들의 나를 향한 시선과 비난 혹은 관심 조차도 상관하지 말라는 뜻이다.

밖으로 끄달리는 것은 하늘에 불 지르는 것과 같아 그저 피곤함만 더할 뿐이다.

 

오늘은 서른 한 번째 구절

我聞恰似飮甘露 (나 아들을 문마치 흡같을 사마실 음달 감이슬 로 )

아문흡사음감로 /내가 듣기에 마치 감로수를 마시는 것과 같아서

銷融頓入不思義 (녹일 소화할 융조아릴 돈들어갈 입아닐 불생각 사뜻 의  )

소융돈입불사의 /녹여서 단박에 부사의의 경지에 들어 가리다.

 

나는 나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사실  나의 내면에 무슨 또 다른 목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내 안에는 수 많은 생각들로 가득 차 있다

실제로 머리 속에 한가지 생각만 하질 않는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잠시 딴 생각에 빠질 수도 있고또 그 생각에서 얼른 빠져 나왔어도 또 다른 생각이 다시 비집고 들어 온다

그러한 나의 모든 흩어진 생각의 상념들을 고요히 내려 놓는 작업이 필요하다.

올라오는 무수히 많은 생각들을 차분히 가라 앉아야 한다.

그렇다면 올라오는 생각들이 잡생각이라고 해서 억지로 생각하지 않겠다고 해도 생각이 안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모두가 각각이 아니고 내 마음 속에서 나온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예전 당나라때  무착문희((着文喜820~900) 스님이 계셨다고 한다.

문수보살을 직접 친견했다고 알려진 스님인데 무착스님이 공양간에서 팥죽을 끓이고 있을 때 였다.  

갑자기 팥죽을 끓이는 솥에서 신령스러운 기운이 나오며 문수보살(文殊이 나타났다

주위에 스님들은 모두 경탄을 하며 팥죽 속에서 튀어나온 문수보살을 보고 참배하고 솥을 향해 절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무착스님은 팥죽을 휘젖고 있던 주걱으로 문수보살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문수는 네 문수요무착은 내 무착이다.” 

무착스님에게 맞은 문수보살은 전부 팥죽 방울로 흩어져 버렸다

그러자 팥죽 솥의 팥죽 방울방울마다 전부 문수보살로 화()해서 계속 튀어 오르는 것이었다.

무착스님은 다시 주걱을 들고 우리가 오락실의 두더지 게임을 할 때 처럼 망치로 두더지를 잡듯이 사방팔방에서 올라오는 문수보살을 주걱으로 하나하나 내리쳤다.

요것도 문수저것도 문수여기도저기도”  방울방울 문수보살을 하나하나 주걱으로 내리치는 것이다.


한 팥죽 솥에서 올라오는 방울방울 수 많은 보살들은 사실 나의 내 마음 속의 무수히 많은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 팥죽 솥의 방울방울이 따로따로 올라 오는 것 같지만 모두 하나의 솥 안에서 올라온다

내 마음속의 상념들도 그러하다

따로따로 올라오는 소리들에 귀 기울이지만 거기에 홀리지 않는다.

그리고는 무착이 문수를 내리 치듯이 내 올라오는 마음들을 다시 내려 놓는다.

관여하지 말고 지켜보라그렇게 놓게 될 때 저절로 쉬어지게 된다.

녹아진다는 것은 들 끓던 마음들이 쉬어지는 것을 뜻한다

전부 잠잠하게 쉬어졌다면 이제 팥죽 솥의 팥죽들을 퍼내서 먹고 마실 수 있게 된다.

이제 감로수를 마시고 불사의한 경지로 들어갈 수 있으리

 

<일일 소견>

방울방울 올라오는 무수히 많은 내 안의 물거품들

관여하지 말고 그냥 지켜 보는 것그것이 관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잉크냄새 2025-01-26 1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명상학자 마이클 싱어는 저 솟아오르는 팥죽 방울방울을 내 귀에 끊임없이 들리는 속삭임으로 비유하더군요. 사람은 그 속삭임을 자신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는 그 속삭임을 듣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주체가 자아 라고 하더군요. 마음에 부림을 당하지 않으려면 그 속삭임에 현혹되지 말고 가만히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일정 부분 해결이 되지 않을까요.

마힐 2025-01-26 11:23   좋아요 0 | URL
네, 훌륭하십니다. 맞습니다. 가만히 들어주되 거기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는 거죠.
그저 관조하는 태도로 들끓고 있는 방울방울이 가라 앉기를 지켜 보는 거죠.
그 모든 마음의 속삭임들이 멈출 때 까지.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되면 그때 부터는 팥죽을 퍼서 먹게 되는 거겠죠.
설 연휴 잘 보내시고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ㅎㅎ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무한 - 지식과 지혜를 실천으로 이끄는 마음 여행서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개정판)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2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제목: 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무한

지은이 채사장

 : 혹시 당신도 혹등고래가 한번 되어 보고 싶은가요?

 

평균 몸무게 40길이 16미터일년에 8000키로 이상을 바다에서 헤엄치는 거대한 고래종그들을 우리는 흑등고래라고 부른다

거대한 몸집과 함께 엄청나게 큰 지느러미를 물 밖으로 솟구치면 폭우처럼 쏟아지는 흰 물결 속에 드러난 흑등고래

내가 만약 실제로 그들을 가까이에서 보게 된다면 그 압도적인 모습에 초라한 인간종인 나는 경외감에 빠질 것이다.

그들이 우리 인간종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은 과학자들의 연구 때문이겠지만 연구자들도 밝혀낸 사실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흑등고래가 우리 인간종을 아주 오랜 옛적부터 관심있게 지켜 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와 같은 포유류에서 진화된 아주 먼 친척 뻘로 말이다.

혹등고래의 특징으로 이타심이 많아 바다에서 만난 인간을 종종 돕기도 하며 수 백킬로 떨어진 동료들과  노래로 소통을 한다고 알려졌다.

그들은 왜 인간에게 우호적일까그리고 부르는 노래는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혹등고래가 아니고서는 그 모든 의미를 절대로 알지 못 할 것이다.

흑등고래가 심해의 바다에서 유유히 부유하듯 내 심연의 내면에서 유유히 부유하는 또 다른 존재가 있다

존재라고 하기에는 맞지 않겠지만 내면의 그것을 의식(意識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내면의 바다에서 노니는 우리의 의식에 관한 책이 나왔다.  

바로 채사장의 신간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무한>편 이다.

 

책 제목을 줄여서 <...얕>으로 알려졌는데 작가 채사장이 2015년에 처음 출간한 이후  일반인 이였던 그를 단숨에 스타작가로 만들어 준 시리즈 책이다

처음 내가 작가의 책을 알게 된 것은 10년 전 쯤 <...> 1편과 2편을 통해서 였다

그 당시 나는 막 40대로 진입했고 한창 직장생활에 지치고 가정생활에 허덕일 때 였다.

하루하루를 무기력하게 어쩔 수 없이 사는 듯한 건조한  생활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마치 갇힌 우리에서 쳇바퀴 돌리는 햄스터와 같았다

그러니 무슨 삶의 재미가 있었을텐가

당시엔 지금처럼 책을 읽는 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생각이란 걸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며 무료함을 달래려고 인천 공항 서점에서 우연히 집은 책이  <지대넓얕>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소 뒷발에 쥐를 잡은 꼴이다.

당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한정된 머리속 공간이 확장되는 듯한 경험을 하였다.

작가 채사장이 쉽게 정리한 세상과 인간에 대한 탐구가 내 성향과 제대로 맞았다

내 나이  40대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책을 읽는 재미를 느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 이후,  그가 펴낸 책들 <시민의 교양>, <열한 계단>,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지대넓옅 제로 편>를 비롯하여 소설 <소마>까지 모두 읽게 되었다.

한마디로 팬이 되어 버린 것이다.

 

<지대넓옆시리즈에서 보여준 채 작가의 특징은 복잡한 세상 구조를 아주 심플하게 이분화 시켜 쉽게 설명하는데 있다.

이분화는 분명 많은 오류가 있음에도 구조와 맥락의 핵심을 보다 빨리 간파하는 장점이 생긴다

만약 그가 책을 통해 알려준 핵심을 몰랐다면 아마도 세상의 구조를 파악하기는 커녕 접근할 생각조차 못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이러한 시도는 무척 신선했고 자연스레 좀 더 넓고 깊이 있게 세상을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자각하게 했다.  

작가 특유의 세상을 관조적으로 바라보면서도 진지하게 세상을 대하는 태도는 내게는 무척 공감이 되었다.

 

그가 이번에 출간한 <지대넓얕 , 무한>은 이 시리즈의 최종회에 해당한다.

<지대넓얕 1.2>편은 역사정치경제사회와 철학과학예술종교등 우리들의 현실 세상을 이루고 있는 거의 모든 지식의 영역들을 폭 넓고 얕게 다루었다.  

그리고 <지대넓얕 제로편에서는 우주의 탄생과 생명의 탄생 그리고 철학의 탄생까지 지금까지 다루었던 영역을 보다 근원적으로 접근하였다

그리고 이번 무한편은 더이상 지식의 영역을 넓히지 않고 자아(自我)라는 의식(意識)에 대해서만 아주 깊숙이 파고 들었다

나는 작가가 아마도 이번 무한편을 위해 지금껏 <지대넓옅시리즈를 빌드 업(Build-up)을 해왔다고 생각된다.

물론 내 생각이다작가의 말로는 이 시리즈는 원래 제로에서 끝내려고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무한편은 이 시리즈의 엔드 게임으로 확실히 마무리 짓는 것으로 보여진다.

 

우주의 탄생에서 시작하여 생명의 기원그리고 인류의 등장문명의 건설과 역사종교과학의 발전을 아우르며 지금까지 이어져 왔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번 무한편에서는 영속된 시간의 파노라마 속에서 우리는 지식을 넘어선 지혜와 실천을 통해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야 함을 알게 된다

지금껏 인류는 지식을 이용하여 문명을 발전시키고 진화하여 왔지만 물질문명은 분명히 위기를 맞고 있다

지식과 정보는 더이상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있다

과잉된 정보와 지식은 우리의 삶을 더욱더 옭아매며 고통속으로 밀어 넣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러한 지식을 넘어선 지혜를 가져야 할 시점이 온 것이다

 

지혜는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이러한 체험의 반복은 결국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책에는 깨달음의 과정을 모두 7장에 걸쳐 3개의 단계로 정리했다.

먼저 발심정비정진은 실천의 단계이고,  다음 견성은 지혜의 단계이고 마지막  출세조망정진은 삶의 단계로 구분했다

깨달음을 다루었다고 해서 현학적이거나 고리타분한 혹은 고행을 강조하는 그런 내용이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깨달음이란 것이 무슨 거창하고 대단한 경지인 것처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작가는 쉽게 이렇게 말한다

<의식이 곧 보는 자이고 관조이고 알아차림이다이것은 동일한 것의 다른 이름이다... 중략... 침묵은 보는 자를 보는 행위였던 것이다관조자를 관조하는 것이고알아차리는 것이다이것이 견성의 실제 의미이고 깨달음의 실체라 하겠다이것들은 모두 동일한 것의 다른 이름이다.> p. 163(견성 중에서)

 

작가는 깨달음이란 주제를 다루면서 의식이 어떻게 세상을 일으키며 그것이 어떻게 무한 반복이 되는지를 설명한다

특히 '의식(意識)이 세상을 일으킨다는 작가의 통찰은 이 책 무한편의 가장 핵심이자 알파요오메가 였다.

<모든 것은 의식이 지어낸다그 어떤 것도 의식이 지어내지 않은 것은 없다의식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기원이다당신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것과 당신 내면의 모든 것은 의식이 지어냈다그렇기에 의식의 다른 이름은 세상을 일으키는 능력존재의 근원집 짓는 자가 된다이들은 모두 의식의 특징이다.> p.178(견성 중에서)

 

작가가 규정한 의식은 불교의 관()과 아주 유사하다.

또한  공()과 색(), 무아 그리고 죽음윤회(輪廻같은 불교의 어려운 개념을 이 의식(意識하나로 대치하여 전부 쉽게 풀어 설명을 했다

 

<의식이 꺼지거나 단절된다는 것은 신체의 환상일 뿐의식의 관점에서 의식은 언제나 현재다그 영원히 이어지는 내면의 여행 동안 의식은 죽음이라 부를 많한 세계를 일으킨다.... 중략... 나는 죽지만 죽지 않을 것이다나는 돌아오고 돌아온다하지만 어디를 간 것이 아니니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나는 내면을 여행하는 자다. > p.222 (견성중에서)

 

깨달음 이후에 찾아오는 과정에 대하여 작가는 3가지 유형을 예상했다.

안주무기력자만인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세상의 다른 이들처럼 먹고살기 위해 다시 애쓰게 될 테이지만 당신은 이제 안다먹고살기 위해 애쓰는 것이 삶의 목적이 아님을 말이다이것은 수단이다수많은 삶을 여행하는 과정 중에 스스로의 선택으로 잠시 동안 세속에 깊게 몸을 담근 것 뿐이다.>

p.248(출세 중에서)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다소는 깨달음을 상징한다.

깨달음에 이르는 10개의 단계를  그림으로 표현 했는데 이를 십우도(十牛圖혹은 심우도(尋牛圖:소를 찾는 그림라고 한다.  

그림의 마지막 열번째 단계를 입전수수(入廛垂手) 라고 하는데 세속으로 들어가 손을 드리우는 경지’ 를 뜻한다.  

즉 깨닫고 난 후에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 중생을 구제한다는 뜻과 일맥 상통하다

결국 깨달음은 삶속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삶이 곧 깨달음이라는 것과 맞닿게 된다.

 

우리는 눈 앞의 세계만 인식할 뿐이다

작가의 통찰에 따르면 우리가 객관적인 세계라고 믿는 세계도 사실은 내 감각기관이 내 정신에 제공한 감각자료를 가지고 의식이 재구성한 세계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는 의식이 일어나고 다시 사라지는 무한 반복의 세상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무한의 세계의식의 세계는 나의 자아가 직접 체험하는 세계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실천이다지식만으로 심연에 있는 지혜를 얻을 수가 없다.

오직 실천만이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나의 깊은 내면의 바다에 닿을 수 있도록 스스로가 혹등고래가 되어 봐야 한다.

나의 육체는  비록 작지만 나의 자아가 의식의 바다에서 얼마나 거대해 질 수 있는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스스로 헤엄쳐 봐야 한다

그렇다면 무한한 시간속에서 흑등고래가 되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지 않을까?

(함께 흑등고래가 되어 내면의 바다에서 노래를 불러 볼까요?)

이제 지식은 지혜로 바뀌어 더 넓어지고 깊어지게 되리라.

 

지혜로운 이는 자신이 지지자가 아니라 선택자임을 안다. 추종자가 아니라 결정권자임을 알고, 노예가 아니라 주인임을 안다. - P41

모든 이념과 신념이 마음을 병들게 함을 바르게 알고 이로부터 멀어져야 한다. - P98

우리가 이성이나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관조하면 본질적 자아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너무 공하고, 본질적 자아가 아니라고 하기엔 너무도 명료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쩌면 그것은 그저 언어의 문제일 뿐, 실상은 동일한 것의 다른 표현일지 모른다. - P155

지혜가 섬세하지 않으면 극단적 사유에 쉽게 이끌린다. - P238

인류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세 가지다. 세계는 무엇인가? 자아는 무엇인가? 세계와 자아의 관계는 무엇인가?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시리즈는 이 심오한 세 질문을 가장 쉬운 언어로 깊이 있게 답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을 담아내었다. - P348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ookholic 2025-01-25 18: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망설이고 있었는데, 마힐님의 글을 읽기로 결심했어요~~^^
지대넓얕의 팬으로 그들이 다시 만나 시즌2를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마힐 님... 즐거운 설명절 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마힐 2025-01-25 21:24   좋아요 0 | URL
아, bookholic님도 팬이셨군요. 같은 팬으로 반갑습니다. ㅎㅎ
저는 채사장의 세상을 관조하는 듯한 담담한 시선과 그리고 그의 어투가 참 맘에 들었어요.
아마도 그가 죽음의 문턱 가까이 가봤던 경험 때문이 아닐까 싶었어요.
현실을 넘어선 또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 때문에 그의 이야기가 더욱 흥미로웠구요.
이제 한국은 본격적인 설연휴가 시작 되었군요.
여기는 춘절이라고 하는데 28일 부터 담달 4일 까지 연휴랍니다.
bookholic 님의 가족분 모두 새해 복 많이 많으세요. _()_
 

<관노트>    무조건 좋게 결정지어서 맡겨놓기


날짜:2025년 124

오늘의정진: 從他謗任他非(종타방임타비) 남을 비방에 따르고 남의 비난에 맡겨둬라


- 100일 정진, 30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스물 아홉 번째 구절은 

<但自懷中解垢衣誰能向外誇精進/단자회중해구의수능향외과정진)

다만 스스로 마음의 때 묻은 옷을 벗을 뿐누가 능히 밖을 향해 정진하는 것을 자랑 하는가> 였다

수행은 남에게 자랑하려고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또한 마음공부는 눈으로 책을 보고 이해하는 학문이 아니다.

내가 사는 동안에는 마음의 때는 한시도 쉴틈이 없이 끼게 마련이다

내가 이만큼 수행을 잘 했다고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이다.

오직 한걸음 한걸음 나의 길만 걸어갈 뿐이다

 

오늘은 서른 번째 구절

從他謗任他非 (쫓을 종다를 타훼방할 방임할 임다른 타아닐 비  )

종타방임타비 /남을 비방에 따르고 남의 비난에 맡겨둬라

把火燒天徒自疲(잡을 바불 화태울 소하늘 천무리 도스스로 자피곤할 피 )

파화소천도자피 /불로 하늘을 태우려 하나 공연히 자신만 피곤하도다

 

수행자는 남들의 시선과 남들이 하는 말에 신경쓰지 말아야 한다.

내 코가 석자인데 남이 뭐라고 하는게 들리는가?

내 집이 불에 타서 홀라당 다 태워버리게 생겼는데 남의 집 형편을 따질 틈이 없는 것이다.

수행은 철저하게 자신만을 바라봐야 한다.

남들에게 자비를 배풀고 중생을 구제하는 그런 거창한 일들은 내가 깨닫기 전에는 헛된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불쏘시개를 들어 하늘을 향해 불을 지핀다고 해도 하늘이 태워지는가

진정으로 태워야 하는 것은 내 안의 불성이 발현 되도록 내 마음에다 불을 지펴야 한다.


()의 공안(公案)중에 파자소암(婆子燒庵이라고 있다

어느 조그만 절즉 암자(庵子)에서 수행을 하는 스님이 계셨다

그 암자 아래 집에는 스님이 수행을 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부처님 모시듯 정성들여 시봉(侍奉)하는 노파와 아름다운 딸이 살고 있었다.

어느날노파는 자신의 딸을 불러 말했다.

"얘야오늘 밤에 네가 스님 암자에 가서 스님을 한번 끌어 안아보거라그리고는 스님의 마음 상태가 어떠하신가를 물어 보고 오너라스님의 공부가 어느 정도가 됐었는지 한번 알아봐야 겠다."

노파는 성숙한 여인으로 성장한 자신의 딸을 시켜 스님을 시험하려 했던 것이다.

그렇게 밤이 깊어 스님이 암자에 혼자 있을 때 느닷없이 등장한 딸은 스님을 껴안고 노파가 시킨대로 온갖 교태를 부려 시험을 했다.

그리고는 어머니가 전한 대로 물어 보았다

"스님소녀가 스님의 품에 안겼는데 지금 심정이 어떠하세요?

그러자 스님은 "목 나무가 찬 바위에 기대듯 추운 겨울처럼 아무런 온기도 못 느낀다

내 마음은 조금도 동요 되지 않는구나얘야." 

이에 탄복한 딸은 얼른 암자에서 집으로 내려와 노파에게 스님이 한 말을 전했다

이를 전해 들은 노파는 갑자기 화를 내면서 횃불을 들고 암자로 올라갔다.

암자로 올라 온 노파는 가지고 온 횃불로 암자를 태우기 시작했다.

"아니내가 여지껏 마귀 새끼를 키우고 있었구나당장 썩 나가라엉터리 스님아!" 하고 외쳐대면서 스님을 쫓아냈다.

아니 스님은 분명 딸 아이의 몸을 탐하지 않았는데 왜 노파는 화를 내고 암자를 태워 버렸을까

이게 바로 <파자소암의 공안이다.

스님은 분명히 색()에 집착하지 않았는데 노파는 분노했다.

도대체 스님이 무얼 잘못한 것 일까왜 노파는 암자를 태워버렸을까


從他謗任他非 (종타방임타비) /남들의 비방과 훼방에 신경쓰지 마라.

把火燒天徒自疲(파화소천도자피) /불로 하늘을 태우려 하나 공연히 자신만 피곤하도다.


증도가의 이 구절을 음미하면 파자소암의 화두에 대한 실마리가 보인다.

()은 죽은 언어의 끝을 잡고 화두(話頭)를 드는 것이 아니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활구(活句)가 나의 온몸에서 팔딱 거려야 한다

어째서 나는 남들의 비방에 신경쓰고고목나무 처럼 생기(生氣)가 없어야 하는가?

불타올라야 한다하늘을 태우는 헛 수고 하지 말고 내 자신을 태워야 한다.


<일일 소견>

노파가 태운 것은 과연 암자 였을까

노파가 태운 것은 암자가 아닌 자신 이였다파자소아(婆子燒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관노트>    무조건 좋게 결정지어서 맡겨놓기


날짜:2025123

오늘의정진: 但自懷中解垢衣 (단자회중해구의) 다만 스스로 마음의 때 묻은 옷을 벗을 뿐


- 100일 정진, 29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스물 여덟 번째 구절은

<上士一決一切了, 中下多聞多不信/상사일결일체료, 중하다문다불언)

상근기는 한번 결단하여 일체를 요달하고, 중하근기는 많이 들을 수록 더욱 믿지 않는다.> 였다.

공자(孔子 B.C 551~479)도 논어(論語) 에서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를 밝힌 적이 있다.


공자가 말한 상근기는 '생이지지자(生而知之者)'이다.

이는 태어나면서 부터 아는 경지의 사람을 뜻한다. 소위 신동(神童) 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어릴때 부터 이미 보통 사람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 주위에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

중근기는 학이지지자(學而知之者) 이며, 배워서 아는 경지의 사람을 말한다.

공자는 스스로 자신은 생이지지자가 아니고 학이지지자라고 했다.

공자조차도 학이지지의 경지라면 평범한 사람들은 더이상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물론 배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나온 겸손의 표현이라고 봐야 한다.

하근기는 곤이지지자(困而知之者) 로 곤란함에 부딪혀 어렵사리 경험을 통해 어쩔 수 없이 알아가는 사람을 일컫는다.

아마도 이 부류에는 평범한 사람들이 가장 많을 것 같다.

태어나면서 부터 미리 아는 경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공자처럼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부류도 아니고,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배워야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낮은 근기는 아예 알려고 조차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

즉 자기 자신에 대한 메타인지가 현저히 낮은 사람들 부류일 것이다.

그러나 유학의 이러한 분류는 불교와는 약간 차이가 있다.


유학이 근기(根機)의 기준을 현생(現生)에 두었다고 한다면 불교는 근기의 기준을 현생과 과거생까지 포함한 기나긴 시간속의 인과(因果)로 보고 있다.

불교의 세계관에서  상근기는 이미 수 없이 많은 윤회의 전생(前生)을 거쳐 쌓아 온 수행의 결과라고 한다. 태자 싯다르타가 한 생에만 국한되어 수행을 쌓아 부처를 이룬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부처님 전생담(前生談) <자타카>에는 과거 500생이 넘는 생애 동안 수행과 덕행을 쌓은 일화가 나온다.  부처가 되기 이전에 싯다르타는 과거생에 이미 토끼, 사슴, 코끼리 같은 동물의 생과 수행자, , 상인등의 모습으로 살았던 전생들을 겪어 왔던 것이다.

깨달음이란 단지 한 생애, 한 순간의 정진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상근기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이미 과거생 부터 무수히 닦아 온 것으로 여겨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하근기 부류의 수행자 역시 근기가 낮다고 무시 할 수 없다.

그들 역시도 원을 세우고 수 많은 생을 통해 공덕과 수행을 쌓아왔을 것이다.

상근기든, 중하근기든 모두 결국엔 깨달음의 길에 들어섰다는 것 만으로도 꼭 기필코 불도를 이룰 것이다.


오늘은 스물 아홉 번째 구절

但自懷中解垢衣 (다만 단, 스스로 자, 품을 회, 풀 해, 때 구, 옷 의  )

단자회중해구의 / 다만 스스로 마음의 때 묻은 옷을 벗을 뿐

誰能向外誇精進 (누구 수, 능할 능, 향할 향, 바깥 외, 자랑할 과, 정할 정, 나갈 진  )

수능향외과정진 /누가 능히 밖을 향해 정진하는 것을 자랑 하는가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이라 하여 닦을 것도 없다고 했지만 그 경지에 아직 이르지 못했다면 여전히 닦을 것이 남아 있는 것은 당연하다.

옷에 때가 묻으면 입었던 옷을 벗어내고 물로 빨래를 해야 깨끗히 씻어낼 수 있다.

마음의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때 묻은 옷을 벗어 씻어내듯 마음의 때도 씻어내야만 한다.

그런데 마음 닦는 다면서 마음이 아닌 다른 외부를 향한 수행과 정진은 다 헛수고 일 뿐이다.

자신의 마음을 벗어난 외부에서 찾는 것은 정진(精進)이 아니다.

오직 나의 마음 속에서 구해야 하는 것이다.

밖에서 구하지 말라는 영가스님의 경책이다.


<일일 소견>

우리는 이번 생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번 생에 집착하며 살아간다.

이번 생이 과거 생에서 부터 이어져 왔고, 다음 생에도 이어짐을 잊지 말기를...

본래 오고 감이 없고, 나고 죽음이 없음을 깨우치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