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재생-윤회의 가르침 법륜 25
아신 옷따마 지음, 홍윤선 옮김 / 고요한소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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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제목: -재생-윤회의 가르침

지은이 아신 옷따마 / 홍윤선 옮김

 :  아비담바의 관점에서 본 업과 윤회의 통찰

 

<티벳트 사자의 서>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8세기 초 파드마삼바바’ 라는 티벳 밀교(密教)의 스님에 의해 저술된 사후세계 안내서로 알려져 있다.

책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그의 영혼은 49일 동안 바르도’ 라는 이승과 저승 사이 공간에 머무르며 다음 생을 위한 준비를 한다고 한다.

그 기간 동안  망자(亡者)에게 <사자의 서>를 독경을 하면 망자는 윤회에서 벗어나 해탈(解脱)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티벳에만 이런 망자를 위한 의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망자를 위한 의식이 있다바로 49재다

천도재라 부르며 우리나라에서는 사찰에서 의식을 진행한다.

<티벳트 사자의 서처럼 절에서는 망자를 위한 <무상계>를 독송한다

무상계는 망자에게 들려주는 부처님 설법이다

우리가 어떠한 과정으로 사람의 몸을 받아 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고 죽고 나면  육신이 어떻게 사대()로 흩어지는지 자세히 설명해준다.

죽은 망자(亡者), 즉 몸이 없는 영가를 위해 몸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부처님이 계시는 법의 세계로 인도(引导)하는 목적이 있다

<무상계또한 <티벳트 사자의 서>와 같은 맥락으로 돌아가신 영가들의 차원을 한 단계 높여주는 설법인 셈이다.


사람이 죽고 난 후 49일 동안 이승도 저승도 아닌 곳에서 머무르다 간다는 세계관은 아마도 불교 문화권에서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 진 것 같다.

다시 태어나는 환생을 바라거나 극락 세계로 가라고 명복을 빌어주는 풍토가 자연스럽다.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윤회나 환생을 언급하면 신비주의로 취급하는 경향이 많다

임종체험 혹은 사후 세계를 다녀 왔다 거나자신의 전생을 기억한다 같은 다소 오컬트적 인식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다고 본다.  

물론  요즘은 그러한 소재를 다룬 영화나 웹툰 ,소설드라마 는 흔해 졌지만 단지 흥미나 재미 위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하지만 불교의 세계관에서 죽음과 윤회는 단순한 흥미로운 소재가 아니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깨달음과 관련된 대단히 중요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익히 알려진 대로 태어나서 살다가 죽고 다시 태어나서 살다가 죽기를 무수히 반복하는 것을 윤회라고 한다

영가라고 불리는 망자들은 생전의 의식 차원에 따라 다시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난다.

이것을 환생이라고 하는데사실 윤회(輪廻) 는 인간이 죽어 다시 인간으로 환생하는 것 만을 의미 하지 않는다윤회의 작용은 사실 방대하다.


이번에 읽게 된 <-재생-윤회의 가르침>은 지금까지 내가 막연히 알고 있었던  윤회를 <아비담마라는 초기 불교의 경전의 통찰을 통해 좀 더 깊이 있게 배울 수 있었다.

저자 아신 옷따마’ 스님은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으로 미얀마에서 비구계를 받아 현재는 자신의 고국 체코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펴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을 통하여 알게 된 <아비담마>라는 경전은 그동안 구전되던  붓다의 가르침을 빠알리어로 기록한 경전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불교의 경전은 크게 산스크리트어와 빠알리어 라는 두 가지 언어로 전승되어 져 왔다.

빠알리어는 본래 부처님 당시 평민들이 사용했던 언어였고 산스크리트어는 귀족계층이 쓰는 언어 였다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당신이 왕족 출신이라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평민들에게는 빠알리어로 법을 전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빠알리어 경전은 부처님의 원음(原音)에 가장 가깝다고 전해진다

원래 부처님 초기 가르침은 전부 암송으로 구전되었다.

부처님 열반 후 제자들은 생전 부처님의 말씀을 전부 외워서 후대로 전승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붓다의 가르침은 인도에서 동아시아로 전파 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스리랑카에서 처음으로  빠알리어로 경전을 쓰기 시작하여 빠알리어는  주로 동남아시아 같은 남방 불교 경전에서 사용 되어졌다

반면에 우리 나라중국일본 같은 동북아시아는 산스크리트 언어를 기본 베이스로 한 경전이 북방불교에서 사용되어 졌다.  

한때 남방불교라 하면 소승불교라 하여 북방불교를 믿는 우리나라에서는 비교적 폄하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또한 분별이었다본래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높고 낮음이 없다

나 또한 지리문화적인 영향으로 인해 선불교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면이 강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선불교이든 교학 불교이든 부처님의 가르침은 본래 하나 였음을 알아 가고 있는 중이다.


이 책<-재생윤회의 가르침>은 <아비담바>의 경전에서 통찰한  업의 작동 방식과보 그리고 윤회의 실상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은 쉽게 전부 이해를 할 만한 내용은 아니다.

의미가 깊어 곁에 두고 앞으로도 자주 들쳐 보게 될 내용들이 무척 많다.

하지만 기본적인 맥락인 우리의 생과 사를 거듭케 하는 윤회의  원인은 바로 업 때문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 전체적 이해는 충분하다.

업이란 우리의 일상 생활 중에 종종 오르내리는 업보라는 단어로 자주 쓰이는 말이다

모든 행위에는 반드시 어떤 결과가 따른다는 것으로 팥 심은데 팥 나고콩 심은데 콩 난다는 식의 단순한 원인과 결과를 비유로 들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 업의 작동 원리는 앞의 비유처럼 단순하지 않다.


<아비담바에 따르면 업은  조건에 따라 24가지 종류로 나눠진다고 하는데 우리가 흔히 인연’(因缘이라고 부르는 것도 업과 과보의 한 종류라고 한다.

업과 과보를 합쳐서 우리는 업보’ 라고 부르는데 업이 원인이라면 과보는 결과이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인생 살이는 과거의 업의 작용이 무척 크게 영향을 받는다.

업의 작용에 대해서는24가지 조건에 따라 업은 작동하므로 인식할 수 있는 부분은 대단히 작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업이 작동 되는 조건은 보통 사람은 이해 할 수 없을 만큼 무척 복잡하다.


단순하게 예를 들어 어느 누군가는 착하지만 늘 불행하고어느 누군가는 무척  나쁜 사람이지만 항상 잘  사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착한 사람은 착한 과보를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선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는 한 생의 업보만으로 놓고 둘을 비교하면 이해가 안되는 점이 생긴다.

그런데 사람의 인생을 한 생()만을 놓고 헤아려 보는 것이 아닌 과거의 무수히 많은 생들의 인과(因果)로 따진다면 현생의 불합리성에 대한 설명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짓는 업은 분명 이 생에 과보를 받기도 하겠지만  그 중에 극히 일부만 이번 생에 반영 되며 대부분의 과보는 내생에서 받게 된다고 한다.

지금 내가 짓는 업의 과보가 다음 생에 라도 반드시 받게 되리라는 점과 현실에 처한 상황은 대부분 과거에서 왔다는 가르침은 새겨둬야 했다

나는 이점이 무척 흥미로 왔다


지금 내가 처한 환경예를 들어 나의 부모나의 자녀나의 처나 친척지인들은 모두 과거생의 인연과 업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러한 업력(业力)즉 업의 힘은 매우 강력하며 전생에서 이어져 다음 생의 조건이 되는 의식으로 재생(再生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윤회는 돌고 도는 재생이라고 라며 끊임없이 우리는 늘 육도를 헤메고 도는 것이다. (육도는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계를 일컫는다. )

이처럼 업의 작동 원리는 윤회하는 모든 존재가 따를 수 밖에 없는 우주의 실제 보편 법칙이란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윤회를 벗어나기 위해서 붓다는 수행을 한 것이다.

붓다의 깨달음을 얻는 수행도 단지 한 생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무수히 많은 전생을 통해 닦아 왔다는 것은 많은 불교 경전에서 언급 되어져 있다.

붓다 역시도 수 많은 생(속에 수행을 하였고 마침내 윤회를 벗어나고 해탈에 이른 것이다.


<아비담마에서 우리에게 한 생이란 정신과 물질이 빠르게 일어났다가 사라지며 형성해 가는 흐름일 뿐이라고 한다

이것은  심찰나라고 하는 마음의 연속 작용이다.

지금 우리가 어떤 사실을 알아 차리게 되는 것 조차도 과거 업의 과보라고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현대 심리학에서 말하는 무의식이 이성을 지배한다는 이론은 사실은 업이 우리의 이성을 지배한다는 말과 같은 뜻이 아닌가 싶다.

즉 현대 심리학에서 말하는 무의식은 불교에서의 업력과 같은 의미를 지녔다고 보여진다


불교에선  무아’ 를 깨닫는 것을 불법의 요체로 삼는다

본래 내가 없는데 윤회하는 나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이 선문답 (禪問答) 의 화두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철저한 무아의 깨달음이 없다면 업은 우리의 모든 생을 철저히 지배한다

지금 쌓고 있는 업과 과거에 쌓아왔던 모든 업을 처리하지 않는다면 나고 죽고다시 또 재생하는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니 윗빠사나 같은 수행은 나의 모든 의식과 행동을 관찰한다.

윗빠사나 수행의 핵심은 나에게 일어나는 생각과 의식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는 것이다.

즉 ’ 수행이다선불교에서 자신의 본래 성품을 비춰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망상에 가리워진 나의 본성품을 관하는 것이 바로 위빠사나이고 선불교의 참선이다.

과거로 부터 전해진 업과 현재 짓고 있는 내가 알게 모르게 짓는  업이 다시 또 재생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수행을 해야 하는 이유이다.


라는 것이 실체가 아닌 그저 원인과 결과가 이어지는 업의 덩어리라는 것을 통찰하게 되는 것 만으로 이 책을 읽을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빛나는 지성으로 한껏 고양된 존재, 가장 높고도 숭고한 존재계까지도

한낱 침 뱉는 타구(唾具)로 여기게 될 때, 그때 그대는 열반을 향할 준비가 된 것이다.>

  p. 126 <미얀마 큰스님 시 중에서>


모든 사물을 왜곡하지 않고 바르게 보려면 반드시 먼저 대상과 거리두기를 해야만 한다. - P43

마음 챙김만이 우리가 자유의지를 행사 하는데 핵심이다. - P56

궁극적 실재 차원에서는 물질은 물질적 성질을 띈 무리가 모인 집합체에 불과할 뿐이라고 깨닫게 된다. - P104

우리의 감각기관은 실재 세계의 전체 스펙트럼 가운데 살아남기 위해서 꼭 알아야 하는 아주 좁은 범위만을 감지 할 수 있다. 그렇게 좁은 범위 너머에는 우리 감각기관으로는 결코 감지할 수 없는 실재의 차원들이 있다. - P92

마음을 정화하고 청정하게 하려는 것이 윗빠사나 수행 체계의 핵심이 아니다.... 중략.....
망상을 꿰뚫어 보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은 깊은 고요와 정신적 몰입이 아니라 온갖 경험을 할 때 철저히 초연해 지는 것이다. 그리하면 갈애가 모두 뿌리째 뽑힌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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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년 112

오늘의정진: 摩尼珠人不識 (마니주인불식) 마니주를 사람들은 알지 못하니


- 100일 정진, 18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열일곱 번째 구절은 

<直截根源佛所印, 摘葉尋枝我不能(직절근원불소인적엽심지아불능)

근원을 바로 끊음이 부처의 도장을 받는 것이요.

잎을 따고 가지를 찾음은 내 할 바가 아니요.> 였다


눈에 보이는 현상만으로는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그 현상이 나타난 본질은 눈에 띄질 않는다

그러니 항상 현상의 본질이 되는 근원을 찾아내야 한다.

아니 근원이 보여져야 한다오직 근원만을 관할 뿐이다.

 

오늘은 열여덟 번째 구절

摩尼珠人不識 (갈 마중 니구슬 주사람 인아닐 불알 식  )

마니주인불식마니주를 사람들은 알지 못하니

如來藏裏親收得(같을 여올 래숨길 장속 리친할 친거둘 수얻을 득)

여래장리친수득 / 여래장 속에 친히 거둬 들임이라.

 

마니주는 신비한 빛을 발하는 구슬이다본래 마니주는 맑고 텅 빈 구슬이라고 한다

하지만 비추는 대상에 따라 색깔이 달리 나타난다고 한다

오색을 비추면 오색 빛을 발하고 푸른 색을 비추면 푸르게 발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보물 같은 구슬마니주의 속성이 우리의 참마음과 닮았다.

그러한 마니주를 사람들 마다 각자 다 가지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자신의 본성이 바로 부처임을 사람들은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중생들이 본래 부처가 될 수 있다’ 는 사상이 바로 여래장사상 (如來藏思想) 사상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을 지녔다.

깨달음의 가능성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그러한 본성이 바로 마니주와 같아서 내 안에 있음에도 사람들은 모른다

왜냐면 어제의 구절에서도 언급 되었는데 나무의 뿌리는 분명히 땅속에 묻혀 있다

그런데 흙에 가려 보이지 않듯이 우리 마음의 마니주 또한 그러한 것이다

우리의 참된 성품은 욕심과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으로 늘 가려져 있다.

이러한 무명으로 가리워진 나의 참 성품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감추어진 여래장을 발견하게 된다면 언제든지 꺼낼 수도 있고 다시 또 감춰둘 수 있게 된다

바로 내 마니주를 내가 마음대로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보배 구슬그 마니주를 이제는 꺼내야 할 때다.

 

<일일 소견>

찬란한 오색 빛이 바로 내 본성품이 아니다

오히려 빛 깔 없음이 본래 나의 색 이어라.

오묘하지만 오묘함이 없음 이여.

나의 본 마음은 그렇게 빛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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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1-12 2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니‘가 ‘옴마니반메훔‘의 마니인가요?
예전 네팔 여행할때 만난 불교인이 알려주길 ‘마니‘는 여의주를 의미하며 ‘반메‘는 원래 어원이 ‘파드메‘ 인데 연꽃을 의미한다고 하더군요. 진흙 속에서 피는 연꽃이며 어둠에서도 빛나는 여의주라 탐진치를 정화한다는 의미라고 하더군요.

마힐 2025-01-12 22:56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마니는 구슬 같이 빛나는이란 뜻 이에요.
이무기가 용이 되려면 여의주를 물어야 하늘로 승천한다는 전설도 있잖아요.
여의주는 뜻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보배 구슬이라는 거죠.
손오공의 여의봉이 크고 작고를 자유자재 하잖아요.
불교에서 여의주는 잉크냄새는 말씀 처럼 탐친치를 정화 하는게 맞지요.
그런데 사람들 누구에게나 마니주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 마니주가 바로 우리의 참 성품, 주인공, 불성, 참나 라고도 부른답니다.
내 안에 자비와 지혜를 가지고 있단 거지요.
옴마니반메훔도 결국 지혜와 반야가 온 우주에 충만하라는 뜻이 있어요.
내 안의 여의주를 자유자재하고 쓸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 모든 깨달으신 선지식들 께서 공통적으로 하시는 말씀이지요.
잉크냄새님도 자신에게 있는 마니주를 꺼내서 자유자재 하게 쓸 수 있으시길 기원 드리겠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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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년 111

오늘의정진: 直截根源佛所印 (직절근원불소인) 근원을 바로 끊으면 부처의 도장 받을 것이요.


- 100일 정진, 17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열 여섯 번째 구절은 

<決定說表眞承, 有人不肯任情徵 (결정설표진승유인불긍임정징 )

결정된 말씀과 참됨의 나타남을 따라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긍정치 않고 정에 따라 구하고 있다> 였다


확실한 진리의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따라 가는 사람과 그렇지 못하고 전혀 다른 길로 가는 사람들이 있다

아는 사람이 볼 때는 분명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그 또한 그 사람들에게는 필요한 과정일 수도 있다.

비록 헤매고 고생은 하겠지만 자신의 목적지만 결코 잊지 않는다면 결국 다 같은 목적지에서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헤르만 헤세가 말하지 않았던가?  모든 진리의 반대도 마찬가지로 진리라고


 

오늘은 열 일곱 번째 구절

直截根源佛所印 (곧 직끊을 절뿌리 근근본 원부처 불바 소도장 인  )

직절근원불소인근원을 바로 끊으면 부처의 도장 받을 것이요.

摘葉尋枝我不能 (딸 적잎 옆찾을 심가지 지나 아아닐 불능할 능)

적엽심지아불능 / 잎을 따고 가지를 찾음은 내 할 바가 아니요.

 

불교에서는 진리에 대한 비유를 나무로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나무는 땅 속 깊이 뿌리가 있고땅 위로 줄기를 따라 가지와 잎들이 뻗어 나와져 있다.

뿌리는 흙에 덮혀 눈에 보이지 않고가지와 잎은 눈에 보인다.

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위 세계와 눈에 보이는 유위 세계로 나눠서 설명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나무에 뿌리가 없다고 할 수 있는가?

눈에 보이는 것 만이 다가 아니라는 뜻이다.

무위법과 유위법이 함께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세계이다

어느 하나만으로 세계는 구성되지 않는다


나무 가지와 잎에다가 물과 양분을 준다고 나무가 자라는 게 아니다.

나무 뿌리에다 양분을 줘야만 나무의 가지와 잎에도 영양분이 공급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뿌리가 나무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이러하기 때문에 흙에 가려진 땅속의 뿌리를 내 보이지 않는 불성과 같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번 구절에서는 근원을 바로 끊으라고 한다

진리깨달음도를 얻으려면 바로 나무의 뿌리를 찾아 파고들어 캐어내 야지무슨 가지와 잎을 딸 것인가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을 찾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바로 뿌리를 찾지 않고가지와 잎을 따려고만 하는 것과 같다.

눈 앞에 보이는 가지와 잎이 진리가 아니란 말이다.

진리는 땅 속에 가려진 나무 뿌리와 같다

그러니 밖에서 찾지 말고 안에서 찾자고 선지식들 께서는 말씀 하신다.

내 몸 밖에서 헤매지 말고 내 안의 근원으로 바로 들어가라

바로 그것만이 부처에게 도장(佛印)을 받는 것 깨달음의 인증을 받는 것 이라고 영가현각(永嘉玄覺 665~713)스님은 말씀 하신다

 

<일일 소견>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마음의 눈이 어서 빨리 떠지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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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110

오늘의정진 :決定說表眞承(결정설표진승결정된 말씀과 참됨의 나타남을 따라야 함에도


- 100일 정진, 16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열다섯 번째 구절은

<諸行無常一, 卽是如來大圓覺 (제행무상일체공, 즉시여래대원각)

모든 행은 고정 됨이 없어 일체가 전부 공하였으니,

바로 이것이 여래의 크고 둥근 깨달음이어라> 였다.


무상(無常) 함은 헛 된 것이 아니라, 고정 되지 않고 돌아가는 것이 진리이다.

진리는 공() 하다. 공은 텅 비었다고 표현하지만 보이지 않는 충만함이다.

원자의 99.9% 가 빈 공간이지만 모든 물질을 구성 하듯이 공 또한 비어 있지만 세상에 충만해 있다

그걸 볼 수 있다면 깨달음이어라.

텅 빈 충만함이 보이는가? (군불견: jun bu jian)! 그대여 보여지는가?


오늘은 열여섯 번째 구절

決定說表眞承 (결단할 결, 정할 정, 말씀 설, 겉 표, 참 진, 따를 승  )

결정설표진승 / 결정된 말씀과 참됨의 나타남을 따라야 함에

有人不肯任情徵 (있을 유, 사람 인, 아닐 불, 즐길 긍, 뜻 정, 구할 징)

유인불긍임정징 / 어떤 사람은 긍정치 않고 정에 따라 구한다.


여래의 큰 깨달음은 제행무상(諸行無常) 하여 공()을 증득한 것임을 분명히 앞에서 밝혔다.

그래서 결정된 말씀, 결정설(決定說)이란 것이다.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참된 것이라 진표(表眞)이고 공부하는 수행자라 한다면 반드시  따라야 함()이다.

하지만 유인(有人), 즉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긍정하지 하지 않는다.

즉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래의 깨달은 바를 분명히 드러내 보였음에도 사람들은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사견(私見) 대로 법을 구한다는 것이다.

앞서 깨달은 분들이 하는 말씀에 대해서 믿지 못하고 자기 생각대로 도를 구하거나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경책(警策)의 말씀이.


원래 경책은 선방(禪房)에서 참선(參禪)하는 스님들에게 죽비()로 어깨를 가볍게 치는 것을 뜻한다.

화두를 참구()하다가 얼핏 잘못하면 졸음에 빠지거나 자세가 흐트러질 때가 생긴다.

그럴 경우 죽비로 경책을 하여  수행자의 자세와 마음을 다시금 잡게 한다.

그래서 이번 구절은 영가현각(永嘉玄覺 665~713)스님의 간곡한 경책에 해당하는 말씀이다.


決定說表眞承, 有人不肯任情徵 /결정설표진승, 유인불긍임정징

결정된 말씀과 참됨의 나타남을 따라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긍정치 않고 정에 따라 구하고 있다.


나도 역시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죽비 한방이 떨어진다.


<일일 소견>

큰 능력으로 나라를 돌보게 하옵소서.  둘이 아닌 한마음으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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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1-10 19: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스님이 휘두르는 죽비에 힘이 느껴집니다.
좀 감정이 섞인 것도 같고,,,맞고 나면 금방 깨우치실 듯 합니다.

마힐 2025-01-11 11:33   좋아요 0 | URL
하하하... 그러고 보니 스님께서 죽비로 내리치는 폼이 장난이 아닌 것 같네요.
죽비 한방, 깨달음 한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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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19

오늘의정진: 諸行無常一 (제행무상일체공) 모든 행이 무상하여 일체가 공하였으니


- 100일 정진, 15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열네 번째 구절은

<放四大莫把捉(방사대막파착) /사대에 놓아 붙잡으려 하지 말고

寂滅性中隨飮啄(적멸성중수음탁) /적멸한 성품중에 먹고 마실 뿐이다>  였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지,,,(地水火風) 사대(四大) 로 형성된 유위(有爲)의 세계와 적멸한 성품(寂滅性品)을 지닌 무위(無爲)의 세계가 함께 공존한다.

유위법과 무위법이 따로 있는게 아니다. 지금 이순간 함께 돌아가고 있다.


오늘은 열다섯 번째 구절

諸行無常一 (모두 제, 행할 행, 없을 무, 항상 상, 한 일, 온통 체, 빌 공)

제행무상일체공 / 모든 행이 무상하여 일체가 공하였으니

卽是如來大圓覺 (곧 즉, 바로 시, 같을 여, 올 래, 큰 대, 둥글 원, 깨달을 각)

즉시여래대원각/ 곧 바로 여래의 크게 둥근 깨달음이어라.


제행무상(諸行無常) 은 불교의 가장 기본 교리인 삼법인(三法印) 중의 하나이다.

() 은 도장이다. 법인(法印)은 법의 도장이다.

이것은 바로 붓다의 가르침() 이라는  도장() 을 찍어 보증한다는 뜻이 된다.

먼저 제행무상, 모든 행(諸行)하는 것은 무상(無常) 하다는 뜻을 살펴 본다.


무상에 대하여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성경의 전도서 구절에 나오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처럼 인생무상(人生無常) , 덧 없음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가 첫번째.

두번째 해석은 '없을 무()''항상 상()' 의 의미를  한자의 뜻 글자 그대로 항상() 함이 없다() 로 보는 것이다.

즉 우주의 모든 것은 변한다. 고정됨이 없이 항상 변화한다.

따라서 무상하다는 것은 모든 것이  덧 없음에 안타까워 하는 감정보다는 진리가 본래 고정됨이 없다는 관조적(觀照的)인 입장에 가깝다고 보여진다.

더구나 바로 뒤에 이어지는 일체공(), 즉 일체가 공하였다는 구절과 뜻이 맞으려면 역시 진리에 대한 관조적인 태도가 부합되는 것 같다.


<반야심경>에서는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도일체고액(度一苦厄)' 이라고 했다.

오온(五蘊) ,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물질, 감각, 형상, 행위, 지각 등이 모두 공() 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일체 고의 바다(苦厄)를 건널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곧 '우주 만물 모든 것은 본래 고정 됨이 없이 항상 변화하는 것이고 이는 곧 바로 공()하다' 는 뜻이다.


모든 인간은 생노병사(病死)를 피할 수 없다.

사는게 고()

아니 인간 뿐만 아니라 개나 소, 돼지 같은 동물들도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세상에 태어나 먹고 살기 위해서 인간과 동물의 의식 차원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일체개고(皆苦), 세상은 고통이라고 한 것이다.

고통의 세계, 우리가 사는 사바세계(娑婆世界)는 고통을 견디며 사는 곳이다.

육도(六道), 즉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계를 끊임없이 윤회를 하고 있다.

그러나 붓다는 고통에 잠식되지 않고 고통의 세상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려 주셨다.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고통이 되는 원인을 바로 보고 그 집착(執着)을 놓으라고 했다.

놓는 수행을 통해 결국엔 삼법인이란 깨달음을 얻으셨다.


세상엔 '' 라고 할 만한 고정된 법이 없음 (諸法無我 제법무아)을 알게 되었고, 모든 행하는 것엔 고정됨이 없음(諸行無常 제행무상)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모든 고통이 멸하게 되면 반드시 고요해진 열반에 이르게 됨 (涅槃寂靜)을 깨우쳤던 것이다.

고집멸도(苦集滅道) 고통은 집착에서 생기고, 그것을 멸하니 도를 얻었다.

이것이 바로 여래(如來)의 대원각(大圓覺) , 크게 둥근 깨달음 이란 것이다.


깨달음은 글로 어떻게 표현 할 수 없다.

그러니 깨치신 선지식(善知識)들께서는 깨달음을 일원상(一圓相)으로 표현 하신다.

모나지 않고 둥근, 진리가 돌아가는 형상과 의미를 함축한 뜻이라는 것이다.

그걸 이름하여 대원각이라 부른다.


諸行無常一, 卽是如來大圓覺 제행무상일체공, 즉시여래대원각

모든 행은 고정 됨이 없이 변하여 일체가 전부 공하였으니,

바로 이것이 여래(부처)의 크고 둥근 깨달음이어라.

<일일 소견>

생노병사는 피할 수 없지만, 고에는 잠식(蠶食)되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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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1-09 2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행무상이 여기서 나오는 구절이군요.
항상 상(常)은 불교든 도교든 영원한 화두군요.

마힐 2025-01-10 11:59   좋아요 0 | URL
사는게 화두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벌이고 행하는 게 다 화두죠.
그게 다 먹고 살기 위해서.... 꿈속을 헤메는게 우리 현실이란 거죠.
그래서 먹고 사는 걸 뛰어 넘는 마음을 먹는게 중요한 것 같아요.
마음을 먹고 마음으로 사는....
어제 보다 더 나은 오늘을 위해서 충만한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