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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36

오늘의정진: 雪山肥膩更無雜/  설산비니갱무잡 / 설산의 비니초 다시 잡됨이 없어


- 100일 정진, 71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일흔 번 째 구절은

<龍象蹴踏潤無邊용상축답윤무변 / 용상이 차고 밝음에 윤택함이 그지없으니

三乘五性皆惺悟삼승오성개성오 / 삼승과 오성이 모두 깨치는 구나> 였다.


   깨달음에 이르는 수레가 작은 것이 소승, 큰 것을 대승이라고 부른다.

남방 불교를 대표하는 소승은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고, 북방 불교를 대표하는 대승은 보살의 경지에 이른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소승은 대승 보다 못하다는 생각, 대승이 소승보다 우월하다는 차별적인 관념이 부지불식간에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대승, 소승, 그리고 삼승에 이르기까지 모두 깨달음의 세계로 가는 하나의 방편에 불과하다.

법화경(法華經)에서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삼승(三乘)은 결국 일승(一乘)으로 이끌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오직 걸림없이 자유자재한 참 성품, 본래 마음자리를 얻기 위한 과정이었다.


오늘은 일흔 한 번 째와 두 번째 구절

雪山肥膩更無雜/  설산비니갱무잡 / 설산의 비니초 다시 잡됨이 없어

純出醍醐我常納 / 순출제호아상납 / 순수한 제호를 내니 나 항상 받는도다.

一性圓通一切性/ 일성원통일체성/ 한 성품이 뚜렷하게 모든 성품에 통하고

一法徧含一切法 / 일법편함일체법/ 한 법이 두루하여 모든 법을 포함하나니


   만년설이 쌓인 설산은 희말라야 산을 뜻한다. 희말라야가 어떤 산인가? 신들이 사는 곳이라고 부를 만큼 신성한 산이다. 세속과는 멀리 떨어져 있으며 눈덮인 산봉우리는 경외의 대상이기도 하다. 비니초라는 식물은 희말라야에서 자라는데 비니초가 자라는 지역은 다른 잡풀들은 자라지 못한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설산의 비니초는 순수하며 신비롭다. 그런 비니초를 먹은 소가 젖을 짜서 만들어 낸 유제품(乳製品)을 제호(醍醐)라고 한다. 제호는 쉽사리 얻어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다. 희말라야 같은 높은 산과 그리고 그곳에서 자라는 비니초라는 식물, 또 그 풀을 먹는 젖소까지 모두 갖추어져야 한다. 그리고 젖소의 젖을 짜내야만이 세상에 나올 수 있는 유제품이라 보통 사람이 얻기는 참으로 어렵다. 마치 깨달음을 얻기가 순수한 제호를 얻는 것만큼 어렵다는 비유라고 본다.

   그런데 증도가를 노래하는 영가현각(永嘉玄覺665~713) 스님은 항상 받는다고 했다. 스님이 받는다면 누구가 에게 공양(供養)을 받는 것 이리라. 스님은 얻기 어려운 순수한 제호를 늘 항상 공양 받는다고 했다. 도달키 어려웠던 깨달음의 경지를 이제는 마음대로 오고 간다는 뜻이다.

   하나의 성품이 뚜렷해지니 모든 성품에 두루하게 통한다. 그리고 하나의 법에 일체의 모든 법을 포함한다. 법성계에 나오는 <일중일체다중일,일즉일체다즉일(一中一切多中一,一卽一切多卽一) 하나 안에 일체가 있고, 일체 안에 하나가 있으니,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인 경지가 바로 이 아닌가?


<일일 소견>

이제 100일 정진도 70일을 넘겼다. 오늘부터 남은 30일은 4구절씩 의미를 살펴봐도 무방할 것 같다.

숙능생교(熟能生巧shú néng shēng qiǎo), 단련이 될 수록 익어지고, 기교가 생겨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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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35

오늘의정진: 龍象蹴踏潤無邊 용상축답윤무변 / 용상이 차고 밟음에 윤택함이 그지없으니


- 100일 정진, 70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예순 아홉 번 째 구절은

<震法雷擊法鼓 진법뢰격법고 / 법의 우레 진동하고 법고를 두드림이여

布慈雲兮灑甘露 포자운혜쇄감로 / 자비의 구름 펴고, 감로수를 뿌리는도다.


가뭄에 단비는 생명수가 되듯이, 수행자에게 법비는 감로수가 된다.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승천하는 이무기가 용이 되듯이, 고된 수행 끝의 구도자에게 깨달음은 부처를 이루게 한다. 수행의 결과가 눈 앞에 보이는 듯하다.


오늘은 일흔 번 째 구절

龍象蹴踏潤無邊/ (용 용,코끼리 상, 찰 축,밟을 답, 윤택할 윤, 없을 무, 가 변 )

용상축답윤무변 / 용상이 차고 밟음에 윤택함이 그지없으니

三乘五性皆惺悟/ ( 석 삼, 탈 승, 다섯 오, 성품 성, 다 개, 영리할 성, 깨달을 오)

삼승오성개성오 / 삼승과 오성이 모두 깨치는 구나


승천하는 용은 하늘을 마음대로 날으면서 비와 바람으로 온갖 조화를 부린다.

성난 코끼리는 땅 위를 박차며 눈 앞의 장애물을 짓밟아 버린다.

진리의 품성은 천지에서 거침없는 용과 코끼리처럼 아무런 걸림이 없다.

삼승(三乘)에서 탈 승()’은 대승(大乘), 소승(小乘)에 나오는 '' 과 같은 의미 이다.

승이란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수레를 말한다.  대승이 큰 수레라면, 소승은 작은 수레를 일컫는다.

여기서 삼승은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세가지 수레를 뜻한다.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을 삼승이라 부른다. 먼저 성문성은 부처님께서 깨달은 사성제(四聖諦)를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을 지칭한다. 혹은 부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물었다는 제자들을 지칭하기도 한다. 다음으로 연각승은 12 연기법에 의해 깨달음에 이른 것을 일컫는다. 혹은 스승없이 홀로 깨쳤다고 하여 독각승(獨覺乘) 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 보살승은 보살의 6바라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를 의지하여 대승과 같이 많은 사람들을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오성(五性)이라 하면 보통 오성은 가지 성정(性情). 기쁨 희(), 노여움 노(), 욕심 욕(), 두려움 구(), 근심 수()를 말한다. 다만 불교에서 오성은 다섯가지 깨달음에 이르는 성품을 뜻한다. 성문정성(聲聞定性), 독각정성(獨覺定性), 보살정성(菩薩定性), 부정정성(不定定性), 무성유정(有情)을 일컫는데 성문, 독각, 보살은 방금 언급했던 삼승의 깨달음의 성품이고, 부정정성과 무유정성은 삼승에 속하지 않는 성품이다. 그중 부정정성은 선도 악도 아닌 성품으로 선악의 가능성을 지닌 성품을 말하고 무성유정(有情)은 아예 성품이 없어서 성불할 수 없는 성품을 뜻한다.

결국 삼성과 오성은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을 뜻한다.  본래 마음 성품은 걸림이 없으니 삼승이든 오성이든 구애(拘碍) 받지 않는다. 용과 코끼리가 삼승과 오성을 전부 차고 짓 밟고 다니듯 그냥 다 깨진다는 것이다.

깨진다는 것은 깨달음이 확 열렸다는 뜻이다. 


<일일 소견>

마음 가는 대로, 걸림 없이용처럼 코끼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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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34

오늘의정진: 震法雷擊法鼓진법뢰격법고 / 법의 우레 진동하고 법고를 두드림이여


- 100일 정진, 69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예순 여덟 번 째 구절은

<非但能摧外道心 비단능최외도심/다만 외도의 마음만 꺾을 뿐 아니요.

早曾落却天魔膽 조증락각천마담 / 일찍이 천마의 간담을 떨어뜨려도다.


   보리수 아래 싯다르타가 정각을 이루기 전에 마왕파순(魔王波旬)의 끈질긴 방해가 시작 되었다.

마왕의 군대를 보내 싯다르타를 공격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자신의 딸들을 보내 유혹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결국 마왕의 온갖 방해를 물리치고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게 되었다.

이때 등장하는 마왕파순을 다른 말로 마라(Mara) 또는 천마(天魔)라고도 부른다.

파왕파순은 정각을 이룬 붓다를 향해 깨달음을 증명해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붓다는 결가부좌 상태에서 왼손은 그대로 두고 오른손바닥을 오른무릎에 포개고 오른손가락 을 땅을 향하게 한다. 이러한 손동작을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이라는 수인(手印)이라고 한다.

붓다가 항마촉지인을 행하자 땅속에서 과거 칠불, 즉 과거 생의 일곱 부처님이 나타나 싯다르타의 깨달음을 증명했다고 전해진다.

   사실 천마는 우리들 마음 속에 존재하는 번뇌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헤메게 하고 정신 못 차리게 하며 마음을 괴롭히는 번뇌가 바로 마왕파순이자 천마이다.

넓게 보면 마음의 또 다른 형태인 것이다. 외도의 마음이든 천마의 마음도 내 본래 마음의 또 다른 모습이다. 그러니 본래 마음을 찾는 것, 번뇌를 녹이는 길이요, 천마에게 항복 받는 길이다.


오늘은 예순 아홉 번 째 구절

震法雷擊法鼓/ (진동할 진, 법 법, 우뢰 뢰, 칠 격, 법 법, 두드릴 고 )

진법뢰격법고 / 법의 우뢰 진동하고 법고를 두드림이여

布慈雲兮灑甘露/ ( 베 포, 자비 자, 구름 운, 어조사 혜, 뿌릴 쇄, 달 감, 이슬 로)

포자운혜쇄감로 / 자비의 구름 펴고, 감로수를 뿌리는 도다.


구름이 하늘을 가리자

하늘은 북이 되었다.

두들겨 울려 퍼지는 북 소리에

흩 뿌려지는 물방울들

감로수가 되어 대지의 생명들을 일깨운다.

떨어지자 솟아난다.

생명이란 그런 것이다.

번쩍이자 울린다.

깨달음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하고 그러하니 그리되어지다.

, 우르르 쾅 이다.


<일일 소견>

3월 봄 비는 언제 쯤 내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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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33

오늘의 정진: 非但能摧外道心 비단능최외도심 / 다만 외도의 마음만 꺾을 뿐 아니요.


- 100일 정진, 68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예순 일곱 번째 구절은

<大丈夫秉慧劍대장부병혜검/대장부가 지혜의 칼을 잡으니

般若鋒兮金剛焰반야봉혜금강염/반야의 칼날 이요, 금강의 불꽃 이로다.>


깨달음의 열매를 맺기 위해 지혜를 기르고 자비를 키우는 것이야 말로 수행의 전부라 할 수 있다.

지혜를 기르지 않고, 자비를 키우지 않는 수행으로는 도를 이룰 수 없다.

그래서 지혜와 자비가 없는 가르침은 모두 외도에 불과하다.  


오늘은 예순 여덟 번째 구절

非但能摧外道心/ (아닐 비, 다만 단, 능할 능, 꺽을 최, 바깥 외, 길 도, 마음 심 )

비단능최외도심 / 다만 외도의 마음만 꺾을 뿐 아니요.

早曾落却天魔膽/ ( 일찍 조, 거듭 증, 떨어질 락, 물리칠 각, 하늘 천, 마귀 마, 쓸개 담 )

조증락각천마담 / 일찍이 천마의 간담을 떨어뜨려도다.


수행자가 지니는 검은 지혜와 자비의 쌍검이다.

진리의 길을 가다가 만나는 대상이 무엇이든 전부 베어 버린다.

지혜의 칼로 무명업식을 단칼에 베어 버리고, 정도(正道)를 벗어난 외도의 마음까지 썰어 버린다.

살불살조(殺佛殺祖),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

부처나 조사를 만나도 베어 죽이는 데 하물며 외도나 천마를 가만히 놔 두겠는가?

지혜의 칼과 자비의 칼은 그렇게 쓰는 것이다.


<일일 소견>

본래 외도(外道)는 부처님의 가르침 이외의 가르침을 일컫는다.

하지만 선지식들 께서는 외도에도 걸리지 않아야 한다고 전하신다.

세상에 불법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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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32

오늘의정진: 大丈夫秉慧劍 대장부병혜검 / 대장부가 지혜의 칼을 잡으니


- 100일 정진, 67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예순 여섯 번째 구절은

<是以禪門了却心시이선문료각심/그러므로 선문에서 마음을 물리치고

頓入無生知見力돈입무생지견력/태어남이 없는 지견의 힘에 단박에 들어가도다.


()에서는 말이나 글자가 그다지 필요가 없다.  그래서 불립문자(不立文字) 라 한다.

직지인심(直指人心), 즉 사람의 마음을 곧 바로 가리킨다.

견성성불(見性成佛), 즉 마음의 성품을 바로 보면 부처를 이루게 된다.

그렇게 마음 하나 깨우치면 바로 태어남이 본래 없음을 단박에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선은 마음으로 곧장 들어가는 문() 이다.


오늘은 예순 일곱 번째 구절

大丈夫秉慧劍/ (큰 대, 어른 장, 사내 부, 잡을 병, 지혜 혜, 칼 검  )

대장부병혜검 / 대장부가 지혜의 칼을 잡으니

般若鋒兮金剛焰/ ( 돌릴 발, 반야 야, 칼끝 봉, 어조사 혜, 쇠 금, 굳셀 강, 불꽃 염 )

반야봉혜금강염 / 반야의 칼날 이요, 금강의 불꽃 이로다.


불자라면 오계(五戒)를 수지(受持) 하도록 하고 있다.

오계는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 불사음(不邪淫), 불음주(不飮酒), 불망어(不妄語) 이다.

오계중 첫번째가 불살생(不殺生)의 계이다. 남의 소중한 생명을 앗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불교의 첫번째 계율이 불살생인 이유는  생명의 소중함을 실천하는 것이고  이 생명들이 r곧 부처의 또 다른 모습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동체대비라고 한다.

동체대비(同體大悲)는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한 몸인 듯 함께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는 것을 뜻한다즉 나와 남을 둘로 보지 않고 하나의 생명으로 여기며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자비(慈悲)이다.


칼은 남의 생명을 헤치는 도구이다. 날카로운 금속의 예리함으로 닿는 모든 것을 동강 내버린다. 고대 전쟁터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살상을 저지른 도구가 바로 칼이었다. 장수는 칼로 적들을 베어버린다. 생명이 따뜻함을 상징한다면 죽음은 차갑다. 전장에서는 죽음처럼 차가운 칼의 속성에 빗대어 냉병기(冷兵器)라고 부르기도 한다. 칼은 따뜻한 생명의 기운을 차갑게 만들어 버리는 도구인 것이다.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이 되지만, 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가 되듯이, 칼도 마찬가지로 남을 해치려 한다면 살인 무기가 되지만 의사가 칼을 쓰면 남의 생명을 살리게 된다. 이누야사에 나오는 셋쇼마루가 쓰는 칼 천생아(天生牙)는 한번 휘두르면 백명의 목숨을 살린다.


이처럼 불교에서 칼은 생명을 죽이는 칼이 아니라 깨달음을 가로막는 무명(無明)을 베어버리는 용도로 쓰인다. 탐진치(貪瞋癡), 즉 탐욕과 성냄 그리고 어리석은 마음이 지배하는 나의 업식을 지혜의 칼로 베어버리는 것이다. 이때 수행자는 대장부가 되는 것이다. 대장부가 쥔 지혜의 칼로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만나는 모든 장애물들을 거침없이 베어 버린다.

금강은 다이아몬드처럼 가장 강한 물질을 상징한다. 반야는 지혜를 상징한다. 금강경(金剛經)의 원래 제목이 금강반야바라밀다경(金剛般若波羅密多經)이 바로 이런 뜻에서 나왔다. 금강경의 영어 제목이 바로 ‘Diamond Sumatra’ 이유도 바로 이와 같다. 그래서 불교는 지혜와 자비를 함께 추구하는 종교라고 하는 것이다.


<일일 소견>

길가에 서있는 메마른 나무 가지에 연두 빛이 보인다. 봄은 이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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