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배우는 시간 - 병원에서 알려주지 않는 슬기롭게 죽는 법
김현아 지음 / 창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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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죽음을 배우는 - 시간 (병원에서 알려주지 않는 슬기롭게 죽는 법)

지은이: 김현아

   : 우리 앞에 생이 끝나갈 때

 

국가통계포털을 검색하면 생명표라는 자료가 있다. 출생부터 시작하여 사망할 때 까지 연령별 생존율을 통계한 표이다. 생명표에서 지금 내 나이 기준으로 보면  나에게 앞으로 기대되는 수명은 32년 정도로 나온다.

물론 천지지변이 일어나거나,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급성 질병에 걸리는것 같은 변수는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돌연한 죽음을 맞이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럴 확율은 0.00314% 밖에 안 된다고 한다.  (생각보다 당장 오늘이나 내일 죽게 될  확률이 높지 않다. 이 정도면  로또 4~5등 정도 당첨 확률 정도는 되지 않을까?)

일단 기대수명 32년이 바로 눈 앞에 다가왔다고 가정하고 내가 곧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나는 어떤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 사고 실험을 한번 해봐야겠다.

 

', 여기가 어디지? 내가 방금 잠이 들어 있었구나. 그런데 앞이 잘 안보여... 뭐지

목말라...... 여기.. 어이..거기 누구? 아아아...뭐야.. 이런...... 목 소리가 안나와.

, 손도 안 움직이는데... 꿈쩍도 못 하겠어. 뭐야나 아직도 자는 중인가?

꿈인가옆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데... . . 삐 라니? 초음파 소리인가?

.  아니...  몸에 아무 힘도 안들어가...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건가?

가위 눌린 건가? 아무래도 여기 나 좀... 깨워줘. 으으으.... 눈 앞엔 희미한 건 뭐지?

희었다 개었다. , 입에 뭔가를 막아 놨구나. 코에도 뭔가를 끼웠어... ... 이게 다 뭐야?

아빠라니큰애 목소리? 맞다. 설이다. 설이야 아빠야. 나 좀 깨워죠. 내가 지금 움직이질 못해.... 왜 그래? 왜 나를 찾아나 여기 있다니까? 이리 좀 와 봐.. , 왜 울고 있냐?

작은 애 소리도 들리네.. 설해야. 아빠 여깄다. 나 좀 일으켜 줘봐라.

말이 안나와... 설해야. 아빠가 지금 힘이 없어서 그러는데 나 좀 일으켜 세워줘 봐..?

힘들다. 너무 힘들다. 눈에 눈물이 나오는데.  닦을 수 가 없네.... 방금 누가 내 눈물을 닦아 줬네... 누구지?

, 당신 이구나. 여보.. 나야, , 당신 나 보이는가? 나 당신이 보이는 것 같아...

내 손,  당신이 잡고 있었구나...나도 잡고 싶은데 힘이 안들어가..여보...

왜 들 다 시끄럽지왜 다 울고 있어?

나 괜찮아. 그런데 몸이 안 움직여져. 말도 못해. 그냥 듣기만 들을 수 있어.

희미하지만 누군지 대충 알 것 같애.

그런데... 허리가 너무 아픈데... 아파... 숨이 잘 안 쉬어져... 가만 지금 내가 지금 죽는 거야?

난 얼마전에 분명히 암 수술하러 들어 왔었는데... 암 수술이 끝났을 텐데... , 수술이 실패 했구나... 내가 지금 생각하는 것과 옆의 소리들 하고  서로 뒤 섞여서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잘 모르겠다. 난 지금 죽는 건가?

, 집에 가고 싶다. 나 좀 집에 보내줘... , . 다들 어디가?

가지마..... 여보... 얘들아... 

?  에크모(ECMO:멈춘 심장을 살리는 기계로 체내 산소공급이 어려울 때 사용) 를 창착해야 한다고?  안돼... 내가 분명히 작년에 '사전연명의향서' 를 쓴다고 했었잖아. 생명연장하지 않기로 했잖아.. 왜 에크모를 써서 심장을 뛰게 하는거야?  안돼,  Do Not Resuscitate(심폐소생술 하지마, 약자로는 DNR))  . 나 소생 시키지 마!

난 그냥 이대로 죽을래... 제발.. 나 좀 그냥 죽게 해줘...

난 그냥 편하게 가고 싶어. 제발 날 그대로 둬... 내 몸에 꽂은 것들 싹 다 빼빼 달라구..

... ,... 고통 스러워. 도저히 못 견디겠어...  나 좀 가만 내버려 둬...

. 죽고 싶다. 정말로 죽고 싶다나 좀 죽게 해줘! ... !'

 

방금 내가 사고 실험을 한 임종의 순간에서 나는 어느 병원의 중환자 실에  있었다.

실험대로 라면 아마도 난 죽지도 살지도 못한채로 누워있게 된다.

언제 죽을 지 아무도 모른다. 연장치료의 무한 루프에 빠진 것이다.

이 사고 실험은 오늘날 병원에서 이루어지는 죽음으로 가는 과정의 한 단면이다.

 

이번에 읽은 현직 내과 교수 김현아님이 쓴 <죽음을 배우는 - 시간>에서는 병원에서 알려 주지 않는 죽음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점들을  언급한다.

저자는 30년간 병원에서 의사로 재직하면서 겪었던 환자들의 죽음들을 통해 중요한  한가지 사실을 지적한다. 그것은 현대 의학의 발달이  죽음과 노화를 마치 치료해야 할 질병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노화와 죽음을 하나의 질병으로 바라보는 시각으로 인해  우리는  노화와 죽음에 대한 준비를 쉽게 놓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나라 병원 시스템 아래에서 내가 죽음을 선택할 권리는 없게 되었다.

죽음은 병원으로 외주화, 파편화 되어버렸으며 병원은 죽음으로 비즈니스를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는 뭐든 돈 벌이로 둔갑 시켜 벌인다. 과연 자본주의다)

병원에 온 이상 무조건 살려야 한다는 명목 아래 고가의 장비로 여러 검사와 치료를 병행하며 결국엔  엄청난 치료비를 청구하게 되는 구조가 되어버렸다. 또한 오늘날 건강 검진은  코스트  시프트(COST SHIFT: 수입을 이전해서  전체 수지를 맞추는 행위)를 할 수 있는 창구로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죽기전 마지막 한 달간의 병원비가 그 이전에 평생에 걸쳐 쓴 의료비 보다 많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녀가 정의하는 좋은 의사는 최선을 다 할때와 이제 그만 놓아 주어야 할 때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죽음을 말하기 싫어하는 의사와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환자 가족의 암묵적인 합의하에 중환자실에서는 임종을 맞이 하는 환자로 넘쳐난다.

환자가 중환자 실에 일단 들어가게 되면 그 다음 부터는 연명치료의 무한루프에 빠지게 된다. 병원에서는 이미 죽음을 질병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자연히 노화로 죽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살려야 하는 기본값을 설정해서 환자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무한반복의 연명치료를 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연명치료 무한루프에 빠지게 되면서  우리는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의 작별 할 수도 있던 아버지를 의식도 없이 억지로  육체만 세상에 붙들어 놓은 꼴이 되어 버렸다.

이것은 존엄스런 죽음을 맞이하는게 아니라 방치하는 죽음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렇게 된 원인에는1997 12 4일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보라매  병원 사건' 때문이라 저자는 말한다. 이 사건의 발단은  보라매 병원 응급실에 실려 온 50대 남성을 병원에서는 수술 끝에 살려 냈으나  그의 아내는 병원측에 곧 퇴원을  요구했다.

아내는 수술비와 앞으로 들어 갈 치료비를 감당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남편은 17년 동안 무직이며 숱하게 가족을 괴롭혀  왔었기 때문에 아내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죽는게 낫다고 생각했었다.  처음에는 병원 측 담당의사가  퇴원요청을 거부했으나 아내 측의 막무가내 요청으로 인해 결국 추후에 문제 삼지 않는다는 각서를 받고 환자의 퇴원을 허가하였다.

그러나 산소 호흡기를 뗀  5분 후 남편은 사망해 버린다. 그 후 남편측의 가족들이 아내와 병원 담당 의사들을 기소하게 된다. 그렇게 법정 싸움 끝에 아내와 담당의사에게  각각 살인죄와 살인죄 종범으로 징역을 선고 받게 되었다.

보라매 병원 사건은 그 당시 사회적, 법률적 논란을 야기했고 이후 병원에서는 환자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무조건 환자를 붙들어 놓게 되었다

그래서 이 사건은  현대 의료가 연명 치료를 할 수 밖에 없는 법리적 근거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처럼 병원의  연명치료 무한 루프에서 빠지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까?

이에 대한 대처 방법으로 저자는 우리가 의식이 있을 때 미리 사전연명의향서나 DNR(Do Not Resuscitate) 같은 소생 시키지 말라는 서류화된 근거를 남겨 둬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전연명의향서를 썼다고 그대로 진행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33만명이 사전연명의향서를 썼지만 실제로 그렇게 진행 된 것은 불과 1000명도 채 안 됐다고 한다.(0.3%)

그만큼 현실적으로 웰 다잉(Well dying) 은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과학이 영생을 이루게 하리라는 착각에서 빨리 깨어나야 하며 생노병사에는  답이 없다고 한 저자의 통찰에 깊이 공감한다. 책에는 죽음과 관련된 인문학 이야기와 저자가 작성한 엔딩 노트 같은 것을 익혀 두면 이후에 도움이 많이 될 것 같다.

우선 나는 이제 아직 요원한 죽음 보다는 지금 늙어감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겠다.

그렇게 늙음을 받아 들이고, 좀 더 멋지게 늙는다면 내 앞에 생이 끝나갈 때 난 지난 세월에 대해 뭐라 답할 수 있게 될까?


 

<세월이 흘러가고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누군가 그대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면
대답할 있나 지나간 세월에 후횐 없노라> 신해철. 우리 앞에 생이 끝나갈 때


오늘 아침 부터 흥얼 거렸다.


내과의 인기는 형편없이 떨어졌고 많은 병원들의 전공의 모집은 올해도 미달이다. 환자가 줄어들 일이 없는 과임에도 지원자는 계속 줄고 있다.
매 학년 제일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은 피부과, 성형외과와 같은 노동량 대비 수입이 만족스럽거나 영상 의학과 처럼 환자를 직접 대면하지 않는 과들을 선택한다. - P16

환자나 보호자가 전원을 요청해오면 나는 두말없이 해주려 하는 편이다.
환자나 보호자들은 똑같은 나쁜결과라도 대형병원에서 그 결과를 맞이 했을때 의심하지 않고 더 쉽게 굴복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 P58

의료기술이 향상됨에 따라 수명이 늘어났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수명 연장은 사실 식량의 안정적인 공급에 따른 영양 상태 개선과 근대 사회로 이행하면서 발전한 공중위생 덕분이다. - P85

사회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기 보단 극적으로 생명을 건질 수 있는지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점점 더 죽음을 준비하지 못하게 된다. - P89

결국 생로병사에는 항상 답이 있는 것도, 답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암도 노환이라는 사실이다. - P140

삶과 사랑, 그리고 현재의 순간들을 온 힘을 다해 껴안는 법을 배웠다.
인생은 붙잡고 있는 것과 놓아주는 것의 균형잡기이다. -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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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음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 어느 장례지도사가 말해주는 죽음과 삶에 관한 모든 것
강봉희 지음 / 사이드웨이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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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나는 죽음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지은이강봉희 

   :  죽음을 준비하라

 


8년전쯤에 중국 북경에서 내가 겪었던 일이다.

주말 오후에 집에서 쉬고 있는데  다급한 회사 사장님의 호출이 있었다.

북경에 있는 어느 병원으로 직원 몇 명을 데리고 빨리 오라는 사장의 지시로 영문도 모르게 급히 갔었다

병원에 도착 후 자초지종을 확인해 보니 사장의 아주 먼 친척 뻘 되는 4인 가족이 북경 자금성에  관광을  왔는데 그 가족의 아빠에게 갑자기 심장 마비가 온 것이었다.

자금성이란 장소도 문제 였지만 하필 시간대도 가장 붐비는 오후라서 구급차가 자금성 안으로 들어 오기 까지 너무나도 많은 시간을 허비해 버렸다.

겨우 구급차가 들어오고 환자를 가까운 병원으로 다시 옮겨 심폐 소생술을 진행 했지만 결국엔 사망하고야 말았다집안 가장의 황당한 죽음을  객지에서 겪게 된  아내분과 두명의 딸들은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병원에 대사관 직원이 뒤 늦게 도착했지만 별 다른 도움이 되 질 못했다

 

이때 중국 병원측은  응급실에서 사망을 하면 시신을 유족이 직접 영안실로 옮겨야 한다며 유족들에게 빨리 시신을 영안실로 옮기라고 했다영안실 안치와 영안실에서 화장장으로 이동하는 관()까지 유족이 손수 시신을 옮겨야 한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당시 우리는 당연히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따로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였다. (최근에 다시 안 사실이지만 당시에 우리는 외국인 신분이라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황당한 상황에 남겨진 유족들은 전부 여성 분들이고 중국어도 전혀 몰라서 우리가 직접 나서서 유족대신 뛰어 다녀야 했다

그렇게  본의 아니게 나는 난생 처음으로  영안실에 가보게 되었고 또 시신을 꺼내서 이동용 침상에 옮기는 일을 해봤다.(중국 병원의 영안실은 정말로 음침했다)

시신은 중국식의 화려한 천에 감싸져 있긴 했지만 시체라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그때 생에 처음으로 죽음을 가까이서 경험한 셈인데  그 이후로 죽음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다 올해 초 장인 어른의 장례를 치르면서 나는 죽음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얼마전에  읽었던 능행 스님의 <우리 봄날에 다시 만나면>을 읽으며  '나는 어떠한 죽음을 맞이 할 것인가'  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었다

이때 '잘 살아야 잘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점차 자리 잡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다 이번에 비슷한 주제를 다룬 <나는 죽음을 돌보는 사람입니다책을 통해서는 고독사와 우리나라 장례 문화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책의 저자 강봉희님은 현재 장례 지도사이며 소위 '시체를 닦는 일을 하시는 분이다.

한자어로 염습(殮 염할 염襲 염습할 습)’ 이라고 하는데  웬만한 담력으로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오늘날 무슨 상조 회사나 웬만한 장례식장에 들어 가는 비용은 대략 4~500만원 선으로 알고 있다그것도 최소한 이라고 하는데… 

저자 강봉희님은 이러한 염습과 장례를 돈을 받고 하는 처리하는 분이 아니다

스스로 자원 봉사단을 꾸려서 시청과 연계해서 관할 지역내의 기초 수급자 분들이나,가족이 없이 홀로 쓸쓸히 돌아가신 분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까지 무료로 해주고 있다즉 저자에게는 무연고로 고독사를 맞이한 사람들이 주고객이 되는 셈이다.

그 분들의 쓸쓸한 죽음을 마지막으로 외롭지 않게 지켜 드리는 일에 나름 자부심과 보람을 가지고 한다는 면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

 

저자 강봉희님은 40대 중반방광암 진단을  받고 5년 이상의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원래 강인한 정신을 가진 그였지만 장기화 되는 병 치료에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쳐 버렸다그 당시  병실에 누워 바라본 창문엔 병원 장례식장이 눈에 들어 왔다고 한다

그때 떠오른 생각은 자신이 만약 살아서 저 장례식장 옆의 병실 밖을 걸어 나간다면 무언가 인간 답게 살아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했다.

그 한 생각이 그를 죽음 문턱에서 벗어 나게 했고 결국엔 그는 죽음을 돌보는 사람이 되기로 선택 하였던 것이다

그 후 지금까지 20  동안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그 과정 중에서  코로나 초기 아무도 접근 조차 하지 않던 코로나로 돌아가신 환자분의 시신을 수습 했고그 외 수많은 고독사와 기초수급자들의 마지막을 돌봐 주었다.

현재 우리나라 고독사의 비율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2013년은 1280, 2017년은 2008, 2021년은 3603명을 기록 했다.

코로나 이후 2022년은 4822명이며  2023년은 이미 5천명을 훌쩍 넘어 버렸다

이미  사회 문제가 된 고독사는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본다.

고독사를 맞이 한 사람들은 그들이  본래 가졌던 구성원의  관계가 무너진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러한  무연고자들은 살아 있을 때부터 잊혀진 사람들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그들이 살아있을 때 그들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쓸쓸히 죽는 것을 막을 수 있었고홀로 저승으로 가지 않도록 돌볼 수 있었다그런 의무를 내  팽개친 채 고독사를 입으로 떠드는 우리 사회가 원망 스럽다라고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고독사에 대한 국가의 역할에 대해 많은 희망을 걸고 있다.

 

하지만 그런 그도 베이비 붐세대의 나쁜 아빠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비판적이다.

그는1950년대 중반과 1960년대 초반에 태어난  베이비 붐세대 남자들이야 말로 가장 나쁜 세대라고 규정 짓는다.

베이비 붐세대는 우리나라 경제 성장을 주도했던 세대이기도 하지만 그들 세대는 다른 세대에 비해 가정을 버리고 가장의 책임을 져버린 가장 나쁜 남자들의 세대 였다는 것이다.

베이비 붐세대가 지금의 나보다 윗 세대라 뭐라고 말은 못하겠지만 대략 내가 아는 이 세대 남자들을 떠올려 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되는 것 같다.

 

그 외  우리나라 장례 문화는 남에게 보여주는 관습이 많은데 이는 누군가의 돈벌이가 된다는 것이다.

죽을 때 입는 옷을 '수의(壽목숨 수 衣 옷 의)'라 한다원래 죄수들이 입는 '수의 (囚 가둘 수 衣 옷 의)'  에서 기인 된다고 보았다왜냐면 둘 다 삼베로 만든 옷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1890년대 에서 일제 강점기 때 죄수가 삼베 옷을 입는 것에서  부모가 죽으면 자식이 죄인이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원래 우리나라 조선시대 같은 전통 장례에서는 삼배를 입질 않았다고 한다.즉 수의로 삼베 옷을 입는 것은 잘못된 전통이란 것이다또한 본래 삼베는 대마초에서 재배해야 하는데 대마는 알다시피 마약이다우리나라에서 대마초 재배는 불법이며 또한 지금 유통되는 삼베는 모두 합성 섬유로 만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러니 시신에 굳이 삼베 옷을 입히는 것은 장례 업체들의 장삿속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이다또한 장례식때 고급 리무진에 시신을 태우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산자와 죽은자에 대한 예의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망자와 유족에게 행해지는 불필요한 장례의식은 장례업자에게 돈벌이가 되는  수단밖에 되지 않는다는 저자의 따끔한 충고는 새겨 들을 만 하다 

 

8년전에 겪었던 남의 갑작스런 죽음과 서서히 다가 오는 죽음죽음의 형태는 모두 다르다하지만 '메멘토 모리(memento moli), 죽음을 기억하라고 하는 라틴어 구절 처럼 이제 나에게 죽음은 점차 기억할 무언가로  다가오고 있다

지금의 나에겐 여전히  많이 낯설지만 급하지 않게 천천히 받아들이고 싶다.

죽음, 준비해야 한다.

죽은 이들에게 우리가 갖추어야 할 어떤 예우가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이 있다고 믿고 있다. - P28

쓸쓸한 죽음을 마지막으로 외롭지 않게 지켜 드리는 일, 나는 그 일에서 조그만한 자부심을 느낄때가 있고 그럴때면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자랑하곤 했다. - P32

돌아가신 분들은 저마다의 고통을 몸안에 품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죽은 몸에 그 고통의 흔적들을 다 담고 있다. - P38

태어나면 죽는다는 것은 하나의 이치인데도, 우리는 항시 생과 사를 철저하게 끊어놓는다. - P84

죽음을 준비하라. 마음으로 준비하고 몸으로도 준비하라. - P134

핏줄은 우리 인간의 괄호안과 같다.
괄호안은 무조건 먼저 계산해야 한다. 핏줄의 의무다.
서로 자주 연락을 나누고, 서로 자주 얼굴을 볼 수 있는 계기를 계속 마련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배려의 시작이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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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의 꿈 - 완결판
리처드 바크 지음, 공경희 옮김, 러셀 먼슨 사진 / 나무옆의자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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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갈매기의 꿈

지은이:  리처드 바크  / 공경희 옮김

   :  얼리 버드와 하이에나, 그리고 조나단과 킬리만자로의 표범

 


푸른 바다위를 날으는 갈매기는 넘실 넘실, 구름과 태양 사이를 날아 다닌다.

어릴때 나는 바다를 배경으로 하는 그림을 그리게 되면 항상 아라비아 숫자 '3' 을 뒤집어 쓴 모자 모양으로 갈매기를 그렸었다.

새중에 갈매기만 유독 편하게 그릴 수 있다.  '3' 만 넓게 휘휙 그리면 되니까... 

나 뿐만 아니라 다들 어릴 때 부터 미술 시간에 바다 위를 나르는 그림 속에 갈매기는 숫자 3으로 표현하는것 같다

그게  다른 새들에 비해 날아가는 갈매기를 표현하기가 가장 쉽기 때문이다

갈매기가 아닌 새들은 새에 대한 묘사를 대충이라도 해야 한다

새의 눈매부리날개발톱같은 부위 마다그리고 날아가는 모양 보다 그냥 땅이나 나무위에 서 있는 모습으로 그릴려면 갈매기 보단 어렵다.

나는 어릴때 부터 바닷가 근처에 살았기 때문에 갈매기는 많이 봐왔다.

하지만 그 갈매기들에 대한 특별한 감상이나 의미는 있는 것 같지 않다.

갈매기는 바다를 배경으로 사는 그냥 까치보다 좀 큰 회색빛 새 정도로만 생각했다.

왜 걔네들은 바다에서만 사는지 별로 궁금해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지금에 와서야 생각해 보니 왜 얘네들은 바다가 주변에서만 날아 다녔을까?

산이나 도시에는 왜 없었을까?  과학적으로 새는 본래 바닷 속 물고기가 진화했다는 설이 있던데  갈매기들이 거쳐온  진화의 특성상 바다를 생활 터전으로 잡았을 수도 있겠다.

얘네들도 먹고 살기  위해서... 그렇게 얼리 버드가 되어  바다 위를 부지런히 맴돌았다.

 

이번에  <갈매기의 꿈을 읽으며 예전에 생각지도 못했던 갈매기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오른다.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은 청소년 권장 독서에 오를 만큼 참으로 유명한 책이다.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는 구절이 나오는 책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꿈과 이상을 추구하며 살아가라는 뜻으로 인용된다.

이와 더불어 '가장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잡는다는 얼리 버드(early bird)  와 함께 중고등  학생들의 책상 앞에 붙혀진 격언 문구들 중 가장 대표적인 구절이 아닌가 싶다

그러고 보니 '하이 플라이 버드는 이상과 꿈을 쫓는 삶을, '얼리 버드는 현실성 있는 삶을 상징하는 것 같다.

이상과 현실이라는 두가지 의미를 합쳐 놓으면  '리얼리스트가 되자그러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라는 체 게바라의 명언 하고도 묘하게 통 하는 면이 있다.

이 책 <갈매기의 꿈은 리얼리스트 입장에서 보면 불가능한 꿈에 대한 이야기다

아니정말 황당하지만 현실성 있는 꿈 이야기 이기도 하다.

먼저 이 책은 45년만에 새로운 번역으로 완결된 최종판이란 선전 문구가 눈길을 끌었다원래 이 소설의 초판은 1970년에 미국에서 출판 되었다그 당시에는 지금 나온 책의 3장 까지 구성 되었던 것 같다우리나라에도 기존에 3장까지 출판이 되었는데 이번에 읽은 책은 4장이 추가 된 것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이 소설은 작가의 확장판 소설인셈이다

작가가 그려낸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은 우리 마음속의 잠재적 능력을 상징한다.

일반적인 갈매기들은 높이 날지 않는다바다에서 먹이를 잡는데 필요한 비행만 있으면 족 할 뿐이다그들에겐 오직 먹고 살기 위한 비행만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 갈매기 조나단은 그렇질 않다. 2400미터에서 급하강에 시속 344키로로 비행하며 온갖 곡예비행을 연습한다

그에게 비행은 삶의 의미를 가진 숭고한 배움이자수행이었다.

1장에서 조나단은 자신이 속 했던 갈매기 무리에서 쫓겨난다

조나단은 먹이만 찾고 사는 얼리 버드가 되길 거부했기 때문이다. 아무도 조나단이 왜 비행에 집착하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장에서 그는 완전한 비행에 가까워지고 결국 자신과 같은 성향을 가진 다른 차원의 무리와 함께 수행 하며 더 높은 경지에 이른다.  결국 그의 속도는 차원을 넘나들며 빛을 넘어서는 존재 (눈 깜짝할 새 ? )가 되어 버린다.

애초에 자기 계발류 같은 성장적인 우화로 생각하며 읽었던 내용이 갑자기 수행과 윤회를 의미하는 내용들로 이어져, ~ 이게 뭔가 싶다.

3장에서는 원래 쫓겨난 무리로 돌아온 조나단은 자신의 제자들을 양성한다.

자신과 같은 비행을 갈망하는  갈매기들에게 자신이 아는 바를 가르쳐 주는 것이다.

조나단은 수제자 플레처를 이끌면서 후에 부활의 경지까지 보여준다.

이는 조나단이 마치 신약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이 연상 될 정도로 묘사되는 장면이었다.

이후 4장은 추가가 된 장으로 수행 공동체에 대한 일화를 차지한다.

수행 공동체가 신격화가 되어 종교적 믿음으로 변질이 되는 순간원래 수행 공동체를 창시했던 창시자의 뜻과는 이미 멀어지게 됨을 알려준다.

다소 황당한 전개이긴 하나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대략 이해가 된다.

 

작가가 이 책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세지는 단순히 '우리 모두  얼리 버드가 되지 말고 높이 나는 새가 되자' 는 뜻은 아니다

꿈과 이상을 추구 하라는 뜻 보다는 자신의 잠재적 재능에 대한 믿음을 말하는 것 같다.

이 책엔 수행스승과 제자불교의 윤회기독교의 부활과 우상 경배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다

책에서 조나단의 비행술의 경지는 수행을 통한 득도(得道의 수준까지 보여준다.  

갈매기 조나단은 우리 안에 잠재된 힘을 뜻한다.

우리 안의 잠재된 힘은 본성이자진정한 참나를 뜻한다

왜냐면 책의 서두에 작가는 "모든 이의 내면에 깃든 진정한 갈매기 조나단에게 바칩니다." 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책 <갈매기의 꿈>은 단순한 자기 계발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잠재된 능력에 대한 믿음즉 자신의 마음 속 깊이 잠들고 있는 자성(自性), 자신에 대한 믿음을 일깨우는 책이었다.

 

갑자기 조용필의 <킬로만자로의 표범>  가사 구절이 흥얼거려진다.

갈매기 조나단과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평범하게 먹고 사는 것을 거부한다는 면에서 서로 공통점이 있다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는가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 다니는 산 기슭의 하이에나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서 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

자고나면 위대해지고 자고나면 초라해지는 

나는 지금 지구의 어두운 모퉁이에서 잠시 쉬고 있다

나는 야망에 찬 도시의 그 불빛 어디에도 나는 없다

이 큰 도시의 복판에 이렇듯 철저히 혼자 버려진들 무슨 상관이랴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흐라는 사나이도 있었는데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 둬야지

한줄기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져도 빛나는 불꽃어럼 타올라야지

묻지 마라 왜냐고 왜 그렇게 높은 곳 까지 오르려 애쓰는지 묻지를 마라

고독한 남자의 불타는 영혼을 아는이 없으면 또 어떠리

이상과 현실, 둘은 서로 같이 공존 할 순 없는 모순적 관계일까?


형제 여러분! 의미를, 삶의 더 숭고한 목표를 찾고 추구하는 갈매기보다 더 책임있는 갈매기가 누구란 말입니까? 천년간 우리는 물고기 머리나 쫓아다녔지만, 이제는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습니다- 배우고, 발견하고, 자유로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 P37

공간을 초월하면 ‘이곳‘ 만 남습니다.
시간을 초월하면 ‘지금‘ 만 남지요. 그러니 이곳과 지금의 한가운데서 우리가 한두 번은 마주치지 않겠습니까? - P76

눈에 보이는 것을 믿지 마라. 눈에 보여주는 것은 다 한계가 있을 뿐이란다. 너의 이해력으로 보고, 이미 아는 것을 찾아 내거라. 그러면 너는 나는 법을 알게 될 게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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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4-09-16 12: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갈매기의 꿈>을 너무 오래전에 읽어서 마지막으로 언제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네요. 110쪽 문장이 좋아요. 저는 눈에 보이는 책도 믿지 않거든요. ㅎㅎㅎ

마힐 2024-09-19 11:24   좋아요 2 | URL
맞네요... cyrus님에게 발각(?)되는 책들의 오타를 보면 그러실 것 같네요.. ㅎㅎ
 
오뒷세이아
호메로스 지음, 이준석 옮김 / 아카넷 / 2023년 10월
평점 :
일시품절



책 제목:오뒷세이아

지은이:  호메로스/ 이준석 옮김

   :  전능(全能)과 자유(自由),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지난달 8 20, 중국에서 PC PS5로 하는 게임 하나가 출시 되었다.

< WU KONG, BLACK MYTH: 悟空, 黑神话( 오공, 검은 신화)>  라는 중국 4대 기서중 하나인 서유기의 주인공 손오공을 모티브로 만든 액션 게임이다.

이게 지금 중국 대륙에서 대박이 났다고 관영 매체까지 호들갑을 떨길래 도대체 어느 정도길래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게임 동영상을 봤는데  ', 미쳤다' 는 한 마디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게임이라기 보다 마치  블록버스터 영화 한편을 보는 것 같았다. 출시하자 마자 동시 접속 100만명, 출시 3일만에 1000만장이 팔리고, 게임 개발비 10배 이상의 수익을 냈다는게 이해가 됐다. (제작 기간 6년에 총 개발비 4억 위안(한화 750억원) 투입,현재 수익은 9000억원 이상)  나는 이런 표면적 흥행 보다 <검은 신화> 게임에서 손오공에 대한 서사(敍事)부분에 가장 큰 흥미를 느꼈다.



돌원숭이로 태어나 72개 도술을 익혀 천계(天界)를 혼란에 빠뜨리고그 벌로 오행산에 갇혔다가 삼장법사를 도와 천축으로 가서 불경을 가져오는 서유기 줄거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하지만 게임은 그 이후의 이야기를 새로 쓰고 있다.

기존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를 넘어선 새로운 신화(神話)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손오공의 천명 (天命)을  이어 받은 손오공의 후손, 천명자(天命者)가 게임의 주인공으로 손오공이 죽을때  흩어진 육근(六根: 불교에서 말하는 안이비설신의(눈귀코혀몸뜻) 를 뜻함)을 찾는 여정이 게임의 주요 내용이다.

가장 압권은 엔딩 부분이다. 손오공의  흩어진 육근을 모두 찾은 천명자가 손오공의 상징인 머리에 긴고아를 쓰게 된다면  또 다시 윤회를 하게 되는 설정이다.

천명(天命) 과 자유, <검은 신화, 오공>의 주제는 윤회를 거듭하는 생을 살 것인가 아니면 자유 의지로 윤회의 생을  벗어날 것인가 하는 철학적 해석을  하게 만든다.

윤회를 벗어나 대자유인이 된 다는 것, 아주 심오한 뜻을 담아낸  수작으로 느껴졌다.


때마침  읽기를 마친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 오버랩 되면서  그리스 신화속의  주인공 오뒷세이의  모험 여정과  <검은 신화> 에서 오공이  자유를  위해 천명과 맞서는 장면이  서로 묘하게 겹쳐 보였다.

오뒷세우스가 귀향을 하는 과정은 역경의 연속이었다.

그의 여정은 크게 집으로 돌아오기 전의 방랑과 귀향 후 복수하는 걸로 나눠 볼 수 있다.

먼저 집으로 돌아오기 까지, 그의 모든 여정은 신들로 부터 벗어나는 것이 목적이었다.

키르케나 칼륍소 같은 여신들의 유혹에서 벗어 나야 했고, 식인 종족 퀴클롭스의 폴뤼페모스의 저주나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저주를 몸소 겪어야만 했다.

이 과정 중에 트로이 전쟁 시절 부터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동료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다.

한편  고향에서는 오뒷세우스가 20년이 되는 시간 동안 안 돌아오고 (사실 못 돌아오고 있었는데...)  행방조차 알 수 없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뒷세우스는 죽은 걸로 치부해버린다. 

오직  사랑하는 그의 아내  '페넬로페' 와 아버지 얼굴 조차 모르는 아들 '텔레 마코스' 만 오뒷세우스가 살아 돌아오길 애타게  기다렸다.

하지만 패악스러운 구혼자들은 오뒷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를 차지 하기위해 오뒷세우스 집에서  구혼(求婚)이란 명목으로 날마다  행패 짓거리를 일삼았다.

결국 아들 텔레 마코스는 아버지의 행방을 알아보기 위해  고향을 떠나 아버지와는 또 다른 모험을 시도 한다.


사실  나는 이 오뒷세우스의 이야기의 찐 주인공은 지혜의 여신 '아테네' 가 아닌가 싶다.

오뒷세우스가 겪는 모든 여정과  아버지를 찾아 나서는 아들 테레 마코스, 인내로 기다리는 아내 페넬로페에 이르기 까지 여신 아테네는 보이는 현실 세계와 보이지 않는 신의 세계까지 모두 주도적으로 관여하고 있다.

호메로스는 이러한 여신 아테네의 개입을 절묘하게 그려 냈다.

지나가는 행인의 모습으로, 아는 사람의 모습으로 혹은 누군가의 마음 속에 들어 간다 던지, 필요한 사람의 눈에만 띄는 방식으로 보이지 않는 신의 개입을 현실 세계에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호메로스에게  있어서 신이란 우리  현실속에 늘 함께 존재하는 것으로 여긴 것 같다.

어쩌면 올림푸스산에 사는 고대 그리스의 신들은 우리 인간들의 잠재된 무의식을 신이라는 모습으로 형상화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의 무의식은 육체를 조정한다. 내가 인식하는 것은 사실 무의식의 표면화다.

그래서 신화 속의 신은 인간의 모든 감정과 행동, 그리고 인간이 활동하는 모든 영역을 관여하고 갈등을 중재하며  함께 공존할 수 있었다고 본다.

신과 인간의 공존은 결코 신화가 아닌 것이다. 바로 현실속에서 공존하는 것이 된다.

무의식이 바로 신이고 그걸 의지화 시키는 것이 바로 인간이라 볼 수 있다.

신화 속의 신들은 마법적인 전능자는  아니었다.  그들도 바라는 바를 한번에 성취시키거나 한 순간에 뚝딱해서 만들어 내지 못했다. 늘 인간이 직접 경험과 체험을 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 곁에서 도와 주거나 또는 방해했다.   

신화 속의 신은 그 누구도 될 수 있고, 반대로  그 누구도 신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오뒷세우스는 포세이돈의 아들 폴뤼페모스에게서 빠져 나올 때 자신을 '노바디',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했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은 무엇이든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신들의 유혹과 시련을 '노바디' 가 된 오뒷세우스는 지혜롭게 빠져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우리는 운명을 따라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 운명을 극복해야 한다고 하기도 한다.

어느것이 맞는지는 나는 잘 모르겠다. 인간은 그래서 방황하는 것이라. 

그에 비해  우리는 신은 자유로울 꺼라 생각 한다.

하지만  가만히 보면 그리스 신화 속의 신들은 그게 자유일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자신의 영역에만 매달린다.

풍요의 신은 풍요를, 바람의 신은 바람을, 바다의 신은 바다에, 지혜의 신은 지혜에, 전쟁의 신은 전쟁에 등등 모두 한 가지 영역에만 권능을 지녔다.

자신의 영역에서는 인간보다 말 할 수 없이 전능하지만 그 외의 영역은 관여가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면 전지전능(全知全能)하다면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전지전능과 자유는 같지 않다.

손오공이 72가지 둔갑술로 천계를 묵싸발로 만드는 난리를 치는 경지에 이르렀어도 여래에 의해 오행산에 500년이나 갇혔다.

신으로 숭배되는  지닌 그리스 신들 조차 자기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전능을 넘어선 자유를 향한 의지에 대해 신의 권능은 미치지 못하는게 아닐까?

<검은 신화>  오공이 윤회를 벗어나려고 투쟁 하는 것과  오뒷세우스가 죽음을 무릎쓰고서라도 집으로 돌아 가려는 의지와 무엇이 다른가?

나를 규정하는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하나의 깨달음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호메로스를 진정 존경했던 <그리스인 조르바> 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   자신의 묘비 명에 이렇게 새겨 넣은것이 아닌가 감히 추측해 본다.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진정으로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무엇도 바라지 않고 그 무엇도 두려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유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그들은 결국 자유가 되었다.

그 어떤 신의 전지전능도 결국 인간의 자유를 향한 의지는 꺽지 못했다.


동양과 서양은 아주 오래전 부터 자유를 위한 투쟁 신화를 써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자유를 향한 마음은 계속 추구할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 인간의 참된 본성이 아닐까?

호메로스의 속뜻은 그렇게 독자들도 상상할 수 있는 것을 상상하도록 창의적으로 그 의미를 공유하려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그 의미를 캐내는 수고를 하면 호메로스의 속뜻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의 작품 세계를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P8

그녀는 그의 기백에 힘과 용기를 넣어 주었고, 이전보다 더더욱 아버지를 떠올리도록 하였다.
한편, 그는 심중에서 이를 알아차리고 기백으로 경악하였으니, 그가 신이라는 직감이 들었던 것이다. - P32

<오뒷세이아>는 오뒷세우스 대신 텔레마코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중략....
이제 우리는 그가 아버지의 귀향을 위해 어떻게 tele(멀리서) + machos(싸우는 이)가 될지 가만히 지켜볼 차례이다. - P59

그녀는 이렇게 기도하며 동시에 스스로 이 모든 것을 이루기 시작했다. - P64

모든 이방인과 거지들은 제우스에게서 오는 것이니, 보잘것없는 베풂이라 할지라도 사랑스러운 법이야. - P160

알키노오스의 궁전을 지키던, 황금과 은으로 맏는 개들과 달리 아르고스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 오뒷세우스는 물론이고 페넬로페, 라에르테스도 신의 도움으로 젊어지기도 하고 아름다워지기도 한다. 아르고스는 이 시에서 유일하게 실제 시간의 흐름을 가르켜주는 존재이다. - P428

제우스께 태어난, 라에르테스의 아들아, 허다한 계책에 밝은 오뒷세우스야. 그만두어라. 크로노스의 아드님, 두루 살피시는 제우스께서 네게 노여워하시지 않도록 모두가 겪는 전투, 그 다툼을 멈춰어라 - P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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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 삶을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글쓰기의 쓸모
김종원 지음 / 서사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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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글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지은이:  김종원

   :  삶과 글은 둘이 아니다.



작년 9월 중순 부터 알라딘 서재에 글을 올리기 시작했는데 이제 딱 일년이 되었다.

일년 동안 75권 정도 책을 읽었고 그중에서  독후감 69편을 올렸다.  (일주일에  평균 1.4권을 읽고 독후감을 쓴 꼴이 되네.)

애초에 중국에서 한국의 책을 어떻게 구매할 줄도 몰랐던 내가 이제는 알라딘을 통해 책을 주문하고 있다.

게다가 책을 읽고 또 서재에 글을 올릴 정도가 되었다면 장족의 발전을 이룬 셈이다.

내 글 뿐만 아니라 친구로 청한 21명의 알라딘 선배님들의 서재 글을 통해 어떤 책을 읽고 어떻게 글을 쓰는지 눈여겨 보고 배운 일년 이었다.(지금까지 내가 오프라인에서 만났던  친구들 보다도 훨씬 많은 숫자다.)

대신에  책에 대한 금전적, 시간적 소비가 많아졌다.

한달에 한번,  DHL  배송되는  책에 대해 아내에게서 이제 그만 좀 주문하라는 잔소리 성화를 들어야 하지만 그래도 욕 먹더라도 꿋꿋하게 눈치를 보며 구매를 한다.

(중국에서 하는 알라딘 책 주문은 인민폐 1000위안(18만원)을 넘지 않게 주문해야 한다. 금액이 넘으면 반송이 된다고 해서 매번 아슬아슬 하게 금액을 맞춘다. 운비는 대략 한화로 4~5만원이 나온다. )



구매는 보통 10권 좌우로 하는데  읽기는  반도 채 못 읽는 경우도 많다.

예전에 독서 하지 않았던 시기와 비교 하면 일주일에 평균 1권 이상 읽는 것은  결코 느린 속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 책 표지를 뜯지 않은 것도 수두룩 하다.

그래서 어느 순간 부터 나는 여러 책들을 동시 다발로 읽기로 했다.  사무실에 10권 정도 쌓아 두고 조금씩 따로 따로 읽고, 집에서도 전혀 다른 책들을  조금씩 건드려 보는 것이다.

그렇게 읽다가 재미가 있는 것은 그대로 쭉 읽어 버리고, 흥미를 잃은 책들은 그냥  휴독(休讀)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식으로 장기휴독에 들어간 책도 꽤 된다.

언제 다시 집어들게 될 지 요원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읽게 되겠지'  하며 마음 편히 먹기로 했다.

그런데 읽어 내는 것도 쉬운 문제가 아니지만 사실 제일 어려운 것은 글쓰기라 생각 된다.

글쓰기는 독서보다 훨씬 신경이 많이 쓰인다.

알라딘 서재 선배 이웃님들의 잘 썼다고 생각 되는 글들을 보면서  감탄도 하고 공감도 한다. 그걸 보며 나도 어찌 되었든 일주일에 한편은 꼭 쓰자고 다짐한다.

하지만 역시 글쓰기는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글이란 원래 쉽게 써지지 않는게 맞다고 동의 해주는 책이 있다.

사실 오늘 리뷰하는 책< 글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은 나의 일년간 독서 활동중 '내가 꼽은 최고의 책' 이라는 타이틀을 달아주고 싶다.

바로 이 책< 글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은 읽는 내내  나에게 많은 위로와 격려 그리고 용기를 주었다.

이 책은 작년 11월에 읽기 시작했는데 이제서야 다 읽었다.

책을 읽는 데만 거의 10개월이 소요가 된 셈인데 이는 나의 일년간의 독서 활동 내내 옆에 끼고 읽은 책이라 보면 된다.

하루에 천천히 몇 페이지만 읽거나 마음에 와닿은 부분을 포스트잇에 한자한자 또박또박 사경(寫經)하는 마음으로 읽고 새겼다.

농밀(濃密)한 글쓰기가 되야 한다는 저자 김종원 작가의 격언들은 독서와 글쓰기를 시작하는 내게 큰 지침이 되었다.



김종원 작가는 괴테(1749~1832)가 사용했던 글쓰기 방식을 적용하여 자신만의 글을 써야 함을 강조 한다.

그러한 글쓰기가 되려면  '글 하나에 심장을 이식 한다' 는 마음으로 쓰라고 한다.

글에다가 심장을 이식 시키라니?  글에다 심장을 달아 주라는 말인가?

전혀 생각 지도 못한 발상이다.

어떻게 글을 쓰면 글자 하나하나에 심장을 달아 주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는 생각을 하게 될까

또 심장이 파닥파닥 뛰는 글은 도대체 어떤 글인가?

참 멋지다. 글쓰기의 의미가 이처럼 멋있게 느껴지다니?

내가 쓰는 글 한자한자에 심장을 달아 놓는것과 같이  글이 생생하게 살아 숨쉬게 된다는 뜻일  것이다. 이는 글에다 생명을 부여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글쓰는 자들은 자신의 글에서 생명을 창조 하는 것과 같은 보람을 느낀다.

또한 자신이 잉태한 글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글은 쓰면 쓸수록 사랑하는 마음이 커지게 되리라.

그러니 왜 많은 작가들이 고통속에서도 글을 쓰고, 또 그들이 글을 쓰면서 자신의 삶을 구원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지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이러한 경지까지 이르려면 작가의 경험상으로는 최소한 30년의 시간이 걸리단다.

작가가 말하는 30년이라는 시간은 평범한 일상의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글쓰기의 시간을 뜻하는 것 같다.

일상속에서 글쓰기, 간절한 마음을 담은 글쓰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성장하는 글쓰기가 되는 과정의 시간의 총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일상의 순간순간을 놓치지 말고 보는 것을 그대로 쓸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된다고 한다.

화려한 문체나 근사한 주제가 아닌 나의 일상에서 사랑하는 마음을 가슴에 품어야 된다는 것이다.

작가는 글쓰기에 대해 이러한 위안을 준다.

<쉽지 않지만 그래도 버거운 일은 아니다. 할 수 있다. 쓰다가 쓰다 보면 글에 어느덧 생명력을 가지게 된다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



내가 품었던 마음이 글로 흘러나오는 순간, 그것은 단어가 되고 문장을 이루며 비로소 나의 글은 그렇게 써지는 것이란다.

남의 글을 보고 감탄하고 감동을 받기도  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나의 글을 쓰는 것이다.

이는  나의 글을 통해 내 삶의 주인공이 바로 나라는 것을 인식 해야 한다.

내 삶 속의 주인공이 바로 나임을 자각할 때  바로 곧 내 삶이 되는 글쓰기가 되는 것이다.

삶과 글은 둘이 아니다.

이렇게 보니 글쓰기는 참나를 찾는 구도(求道)의 여정과 비슷하다.

지난 일년간 또 다른 세상을 열어준 독서와 글쓰기는 문해력을 높이고 몰입의 즐거움을 안겨 주었다.

지금의 바램은 죽을 때 까지 이 즐거움을 누리고 싶다.

그렇게 글은 내게 삶이 되고 나를 변화 시키고 있다.




질문은 오직 생각하고 그걸 글로도 쓸 수 있는 인간만이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일상을 글로 남길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에서 시작한다. - P23

쓰는 일은 곧 사랑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일상에서 시작해야 한다. 잘 사는 사람이 잘 쓸 수 있다. ...중략....
그게 바로 글이 ‘마음을 쓰는 일‘인 이유다. - P35

당신이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쓴 글을 굳게 믿어라.
그건 당신이 도움을 주기로 생각한 그 사람을 향한 사랑과도 같으니까. - P69

나는 글을 쓰기 위해 생각을 요청하는 것이 아닌, 생각이 넘쳐서 흘러내린 것을 언어로 변환해서 글로 쓴다. .....중략.....
늘 사람을 생각하며 억지로 쓰지 말고 흘러서 넘친 것이 곧 글이 되도록 한다면, 그 글은 세상을 빛낼 수 있을 것이다. - P79

나를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벗어나 수 많은 그들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야 한다.세상이 나를 몰라준다고 비난하지 말고, 내가 세상을 모른다는 사실에 아파하라. - P117

가족도 당신의 글은 읽지 않으니 아무런 걱정하지 말고, 쓰고 싶은 글은 다 써라. - P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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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9-04 18: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힐님,
알라딘 서재 입성 1주년 축하드려요.
아, 중국에 거주하고 계시는군요~~

글쓰기가 쉽지 않다는 걸 매번 느끼는데
그래도 읽고 쓰다보면 조금씩 발전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어요.
글이 삶이 된다는 책 제목이 좋네요^^

마힐 2024-09-04 18:58   좋아요 2 | URL
네. 감사 합니다.
어쩌다 보니 중국에서 25년 째 살고 있네요....
네 저도 일주일에 꼭 한편 글을 쓰자고 다짐하고 있지만 쓰기는 정말 쉽지 않네요...
그래도 글이 삶이 되어 지리라는 희망을 품고 오늘도 책을 읽습니다.
페넬로페님께서 올려 주시는 좋은 글을 통해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행복한 하루 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