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론 - 어떻게 마주 앉아 대화할 것인가
최재천 지음 / 김영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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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숙론(熟論)

지은이:  최재천

   : (hell)조선에서 힐(heal)조선으로. 숙론은 답이 될 수 있을까?



 

'최재천'하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과학자 이면서 학문 간의  경계를 허물고  통섭(統攝) 이란 용어를 만들어서 서로 다른 영역의  학문을 통합 발전 시킨 분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상아탑에만 갇혀 있지 않고 현실 속으로 뛰어 들어 사회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 다양한 활동을  펼치시는 분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최교수님을 좋아하는 것 같다.

나 역시도 팬심을 가지고 이분을 존경하면서 이 책<숙론>을 읽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이상하다.

최재천 교수님을 좋아하는 독자로 이 책<숙론>을 읽고 난 후 뭔가 떠오르는 감응이 있을 줄 알았다.

, 숙론이란 바로 이런 거였구나. 그래, 교수님의 뜻은 잘 알겠는데...

그런데 뭐 어쩌라는 거지한편으로는 그래서?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의  현실적인 많은 문제와 갈등을 소통으로 풀어내야 하고 우리 시대엔 숙론이 꼭 필요하다건 알겠는데 그런데 왜 난 공감이 안되는 거지?



 

책의 주요 요지는 숙론(熟論)으로 우리시대 사회적 갈등의 문제를 풀어내자고 한다.

숙론은 토론(討論)의 동의어로 최교수가 이 책에서 처음으로 소개하는 신조어이다.

10만 제곱 킬로 평방 면적에 약5100만명의 인구가 사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엔 이념 갈등, 지역 갈등, 계층과 빈부 갈등, 남녀갈등, 세대 갈등, 환경 갈등, 다문화 갈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다양한 갈등은 점점 심각해지고 급기야 대한민국을  (hell:지옥) 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언제 부터인지 대한민국을 소위 '헬조선'이라 부르는 것이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헬조선이 싫어서 대한민국을 떠난다거나 빨리 망해 버려야 한다는 사람도 일부 있지만 대한민국이 정말 걱정 스럽다면 얼른 헬조선이란 처지에서 벗어 나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대한민국에서 '갈등' 은 반드시 풀어내야만 하는 숙제(宿題)이기도 하다.

숙제가 되어버린 갈등의 문제를 저자는 '숙론(熟論)'으로 풀자고 제안한다.

숙론이란 '누가 옳은가? who is right? 가 아니고 무엇이 옳은가? what is right? 를 찾는 과정' 이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토론은 '누가 옳으냐' 는 말싸움에 가까웠다 

끝장 토론, 100분 토론 같은 시사 프로그램에서 토론은 나와 다른 입장의 상대 의견을 깨부수어야 하는 도구 역할을 했다.

내가 옳다, 너는 틀렸다는 식의  내 주장을 관철시키는 것만이 최고의 토론으로  여겼다.

, 말로 상대를 이기는 것이 토론이라고 우리는 은연중에 이해해 왔다.



 

원래 토론(討論)<논어, 헌문편>에서 '자세히 살펴 의견을 제시하는' 뜻이라고 했다.

() 라는 글자는 '치다, 공격하다, 두들겨 패다. 비난 하다, 정벌하다.'등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토론 한다고 하면 말로 상대로 이기는 것을 연상 시킨다는 것이다.

이처럼 토론이란 뜻이 변질이 되어버린 시대에서 저자는 '토론'이란 단어 보다 '숙론' 이란 표현을 쓰자고 제안한다.

'심사숙고해서 의견을 제시하자' 는 뜻으로 토론이 가진 본래의 뜻을 되 찾자는 것이다.

상대의 의견을 깨부수는 전투적인 말 싸움이 아닌 평화적으로 상대와 의견 차이를 조율하는 것을 뜻하는 셈인 것이다

나와 다른 상대의 견해를 무시하거나 제압하는게 아닌 경청을 하며 왜 나와 상대의 생각이 다른지 숙고해 보면서 자기 생각을  다듬는 숙론을 벌이자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에게 소통은 협력의 수단이 아닌 밀당의 과정으로 본다.

숙론에 대한 저자의 주장은 참으로 일리가 있다.

저자는 소통이란 원래 안되는 게 정상이며 소통이 잘 되길 바라는 게 오히려 착각이라고 한다

그래서 숙론을 통해서 조율이 될  때 까지 소통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하버드 시절어떻게 숙론을  배웠고 교수 시절, 숙론을 어떻게 체화(體化) 시켰으며  학생들에게는 어떻게 숙론을 해야하는지 자신의 숙론 경험을 들려 준다.

또한 돌고래 제돌이를 야생으로 돌려 보낸 과정, 기획재정부 시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치적 개혁을 어떻게 개입해서 풀어냈는가 하는 경험등 숙론을 통한 이루어낸 성취들을 보여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자의 숙론에 대해 의아한 감정이 드는 것은 숨길 수 없다.

과연 숙론이  수많은 갈등을 해결하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을까?

어쩌면 최재천 교수님은 과학자 출신이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과학은  하나의 가설을 세우고 무수히  많은 실험을 통해 검증을 해야 한다.

그러한 검증은 수 천, 수 만번 반복을 거쳐야만 하나의 학설을 세울 수 있 게 된다.

검증의 습관이 몸이 벤 과학자인 최교수님은 인내가 필요한 숙론을 할 수 있는 자세가 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과학자가 아닌 나 같은 일반 대중은 숙론의 방식을 최교수님께 원포인트 레슨으로 배운다고 해도  최교수님 처럼  멋지게 해결 할 수 있을까?

특히 대한민국 국회위원 300명에게 이 책을 건네 줘서 읽게 만들어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많은 갈등과 문제를 풀고 싶다고 하는 저자의 희망 사항은 그저 순진한 동심의 바램처럼 느껴진다.



 

아마도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알면 사랑 할 수 있다'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 라는 구절 처럼 저자에게 갈등은 좀 더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필요한 하나의 과정으로 여겼으리라 생각 된다.

하지만 갈등 해결을 위한 숙론의 스킬보다 더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이 있지 않을까?

우리에게 숙론의 숙련 보다 필요 한 것은 무지(無知)를 깨닫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무지는 소크라테스와 공자가 말했던 그 무지, 불교에서 언급하는 탐진치 삼독을 알지 못하는 무지의 마음을 뜻한다.

존재하는 모든 갈등은 서로가 서로를 모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르는데 어떻게 상대를 알 수가 있는가?

알면 보이고 알면 사랑 한다고 했는데 참으로 알아야 되는 것은 상대를 억지로 알아야 되는게  아니라 나 부터 우선 알아야 하는게 자연스럽지 않을까?

상대를 안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사실 착각이며, 그 착각이 바로 무지하다는 것이다.



 

좋은 책이란 '독자를 생각하게 만드는 책' 이라는 기준으로 보면 이 책은 좋은 책이 맞다.

그런데  독서후 독자를 변화 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기준으로 보면 이 책에서 전하는 숙론에 대한 메세지는 공허한 울림처럼 감응이 없다. 



 

헬조선에 대해 최교수님은 '재미있는 지옥'이라 표현했다.

지옥은 지옥이지만 재미있는 지옥인 대한민국, 어쨌든 헤븐(heaven:천국)조선은 못 되더라도 힐(heal: 치유)조선은 될 수 있지 않을까?

힐조선이 되려면 나부터 마음을 힐링해야만 되는 것이다.

나로 부터 시작하는 세상, 갈등도 나로 부터 시작 된다.

그렇다면 해결도 상대가 아닌 나로 부터 시작해야 한다.

내 마음 부터 힐링하는 것. 그것이 헬조선을 벗어나는 길이 아닐까?

숙론은 그 다음이다.


우리 삶에는 모든 갈래마다 그 끝에 결국 글쓰가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중략...
내가 모르는 분야의 책을 붙들고 씨름하는 독서가 진정한 독서다. - P79

다윈의 자연선택론은 철저하게 ‘상대성‘ 이론이기 때문이다.
자원이 풍족하면 아무도 도태하지 않는다. - P86

평생 생물학자로 살며 깨달은 결론은 자연이란 손잡은 생물이 미처 손잡지 못한 것들을 물리치고 사는 곳이라는 점이다. - P116

질문에는 순진한 질문, 지루한 질문, 부적절한 질문, 지나친 자기비판을 앞세운 질문들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질문은 다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이 세상에 멍청한 질문이란 없다.
진짜 멍청한 질문은 묻지 않는 질문이다. - P180

이청득심(耳聽得心), 즉 귀 기울여 경청하는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최고의 지혜다.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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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 - 활자중독자 김미옥의 읽기, 쓰기의 감각
김미옥 지음 / 파람북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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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활자중독자 김미옥의 읽기.쓰기의 감각)

지은이:  김미옥

   :   공감()에서  깨달음( )으로



작년 부터 독서를 시작하면서 늘 가졌던 의문이다.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고, 또 글은 어떻게 써야 하는지?

처음에는 읽고 싶은 책을 어떻게 해서든 읽어 내기만 하면 독후감은 그냥 써질 줄 알았다.

그런데 일년을 해보니 전혀 그렇게 되질 않았다.

우선 내가 읽어야 할 책들이 너무도 많았고 , 또 아직 읽기엔 부담이 되는 경지의 책도 참 많았다.

그리고 또한 내가 글을 참으로 못 쓴다는 것도 새삼 알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독서법이나 글쓰는 법에 대한 책들에 대해 좀더 관심을 갖게 되어졌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잘 읽고 잘 쓸 수 있을까?

그래서 접하게 된 책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 이다.

제목만 봤을 땐  어떻게 읽으란 건지, 어떻게 쓰란 건지 얼른 이해가 잘 안됐다.

그런데 책 제목의 원뜻은 <感으로 읽고 覺으로 쓴다>     커버 뒤에 숨겨져 있다.

감각이라... 아이디어가 돋 보인다. 제목 부터가 의미 심장하다.

감정으로 읽으면 깨닫는게 있을 것이고 그 깨달음을 글로 쓰란 뜻인가?



이 책은 자칭 '활자중독자' 라 일컫는 저자 김미옥님의 독서 서평글이다.

얼마전에 읽었던 장영희 교수의 <문학의 숲을 거닐다>와 같은 결의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에게 두 책의 분위기는 완연히 다르다고 느껴졌다.

둘 다 책을 소개하고 서평을 다룬 점은 같지만 장교수님이 보다 밝은 느낌의 서평이라면 김미옥 작가의 서평은 뭔가 '다크(Dark)' 한 것 같다.

아마 이 다크한 면이 미국 히어로 영화 <배트맨>의 다크한 분위기와 흡사한 것 같다.

이것은 어두워서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그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먼저 저자가  소개한 책들의 범위는 영미 문학에 한정했던 장교수님과는 달리 거론 되는 분야가 광범위하다.

저자는 문학뿐만 아니라 과학, 철학,음악, 미술, 정치, 사회에 이르기 까지 한정된 분량의 글 속에 폭 넓게 다룬다.

정말 '활자중독자' 란 별칭에 걸 맞게 이것 저것 가리질 않는 듯 하다.

내가 그녀의 글에서 감탄 했던 점은 소개하는 다양한 책들의 서평속에는 그녀 자신이 힘들게 지나온 어린 시절의 삶의 흔적이 곳곳에 뭍어 나온다는 점이다.



특히 <물푸레나무 아래> 라는 글은 작가 개인사이지만 슬픈 단편 소설을 읽는 것 같았다.

가난하고 못 배운 오빠들 속에서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 했던 저자는 둘째  오빠의 폭력을 연민하고 또 맞으면서 이해 되는것이 슬펐다고 한다.

자신은 늘  부끄러워 했던 둘째  오빠였지만 정작 오빠는 오히려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겼었다

이처럼 가족에 대해 모순 되는 감정은 줄곧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훗날 죽은 둘째 오빠를 위해 물푸레나무 아래에 묻게 해주고 남은 가족들과의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며 마음속의  응어리를 풀어 낸다.

어쩌면 감추고 싶은 개인사일 수도 있지만 저자가 들려주는 진솔한 이야기에 무척 연민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인지 저자가 소개하는 책들 속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아픔이나 절망, 그리고 고독한 일생을 산 인물들이 많았다.



노쉰의 본처였지만 유물 취급 당하며 일생을 살았던  주안(朱安) 이란 인물을 다룬 <주안 평전>,  러시아의 한국인 디아스포라(Diaspora: 본토를 떠나 타국에서 살아가는 공동체) 였던 '김 알렉산드라' 이야기, 만주 윤동주 묘지옆에 있는 벗 '송몽규' 의 짧았던 일생이나 체로키족의 비애를 다룬 <에코타 가족>  같은  책들에 대한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이 책에는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주목 받지 못하고 화려하지 않은 삶을 살다가 생을 마감 한 안타까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어쩌면 작가는 자신의 소개한 인물들에 무척이나 동질감과 연민을 느꼈던 것 같다.

그들의 아픔과 자신의 아픔이 둘이 아니였음을 느꼈던 것이 아닐까?

작가가 일찍이 경험했던 어렵고 힘들었던 삶과 책을 통해 소개 하는 주인공들의 삶이 같이 투영된 듯 하다.

이점이 나는 그녀의 서평이 '다크' 하다고 느껴진 이유라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소개한 책들중 읽어 봐야 할 몇 권은 바로 주문을 했다.

<낯선 경험: 陌生的经验> <시간의 압력: 时间的压力>    중국 작가들의 책이라 중국에서 바로 원서로 읽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낯선 경험> 에는  송나라 때  <천리강산도> 12미터 짜리 회화를 그린 왕희맹(王希孟)이란 18살 소년의 작품을 소개 한다.

김미옥 작가의 책속에서는 <천리강산도> 의 그림 작품이 어떤 것인지 설명만 있지 그림이 없어서 아쉬웠다.

작가가 간절히 말하려고 하는 목소리를 찾아내는 것이 작가는 독자의 몫이라고 했지만..  (사실 그정도 찾는 것은 인터넷이 발달된 지금은 별 어려움도 아닌데......)

그래도 작가가 소개한 책속에 나오는 그림들을 소개하면서 중간중간 사진이나 그림을 삽입이라도 해줬었으면 나같은 독자들이 이해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점이 조금, 아주 조금 아쉽다.

(북경 고궁 박물관의 <천리강산도> )



그녀에게 위태했던 청춘은 독서로, 숨쉬기 조차 힘들 때는 오직 글쓰기로, 그렇게 자신을 일으켜 세웠다 한다.

저자에게 독서와 글쓰기는 옭죄는 삶의 해방구 였던 셈이었다.

자신이 살기 위해 읽고 쓰기를 했던 것이 삶의 열망으로 바뀐 것 처럼, 나 같은 독자에게도 독서와 글쓰기는 지금의 나를 미래에서 구원해 줄 희망이 되리라 믿는다.



그녀의 서평을 읽고 난 후, 그녀가 말하는 감으로 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타인의 이야기 속에 가슴이 뭉클해지면 남의 인생은 남의 인생만이 아니게 됨을 느꼈다.

전혀 상관없던 상대의 삶이 내안에서 상대의 삶이 그대로 느껴지면  내가 곧 남이 되어진다.

그래서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했던 상대를 나한테 하나로 합쳐 내는 의미가 담긴 것이 아닐까?

나와 상대가 둘이 아님을 느끼는 것. 그것을 공감(共感)이라 하지 않던가?

바로 그것이 결국은 깨달음과 다르지 않은 것 이었다.

감은 온 마음으로 공감하고, 각은 온 몸으로 깨쳐야 한다.

읽기와 쓰기는 그렇게 둘이 아니었다.

그 둘은 연결이 된다.


아무도 당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때, 세상에 혼자 남겨졌다고 느낄 때, 나는 글을 쓰라고 말한다. 잘 쓰고 못 쓰고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 P5

고통이 글을 쓰게 한다. - P30

책도 사람처럼 운명이 있어 인연이 닿는 것 같다...중략...
인연이란 강철보다 강하고 고무줄보다 유연하다.
잊었다고 잊힌 것이 아니고 버린다고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나의 의지와 관계 없이 항상 내곁에 있었다.단지 모를 뿐. - P58

어떤 구호를 외치든 궁극의 목적은 권력이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어떤 대상을 ‘쥐‘ 로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갈등을 조장하는 ‘보이지 않는 손‘에 휘둘리지 않는 방법은 깨어있는 수 밖에 없다. - P92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여러 상념으로 몇 번씩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내가 살아온 어느 지점과 맞물린 기억 때문이었다.우리집은 왜 가난한가.나는 그 해답을 책에서 찾으려 했다. - P147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이나 숙련도가 아니라 직관과 본능이다.
그러니 ‘고귀한 무지( 無知)로 표현된다. -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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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가는 자 - 익숙함에서 탁월함으로 얽매임에서 벗어남으로
최진석 지음 / 쌤앤파커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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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건너가는 자

지은이:  최진석

   : 건너가기는 나를 벗어나는 것



지난주 큰아이가 상해에 있는 외가댁으로 갔다.

아들이 18년동안 커오면서 생애 처음으로 스스로 마음을 내서 떠나는 여행이다.

대학 입학 결과가 나올 때 까지 몇 개월간 혼자 자유롭게 보내겠다고 한다.

올 초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묘소도 갔다 오고, 어릴 때 함께 해주셨던 외할머니, 외가쪽 친척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단다.

나에게 상해는 첫 직장을 통해 아내를 만난 곳이고, 그곳에서 태어난 아이에게는 동년(童年)의 추억이 담긴 곳이다.

앞으로 나와 아내는 두 아들과 함께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내 경험을 비추어 보면 대학 들어가는 순간, 비로소 자기 인생을 살기 시작하는 것 같다.

가족 보다는 대학 친구, 선후배랑 가까워 지고, 그러다 군대 갔다 와서 복학하고, 대학 졸업후 사회에 진출 하게 되는 단계를 겪게 된다.

내가 그랬으니 말이다.



때 마침 읽게 된 <건너가는 자>는 익숙한 이곳에서 새로운 저곳으로 건너가는 삶의 태도를 말한다.

<건너가는 자>의 저자 최진석 철학교수는 <반야심경>의 지혜를 철학적으로 통찰했다.

최진석 교수는 세상의 수많은 경전중 하나만 선택하라고 한다면 <반야심경>만을 선택하겠다고 한다.

<반야심경>은 불교의 방대한 경전중에서 글자수  260자로 구성된 짧은 경전이다.  

비록 짧은 경이지만 <반야심경> 안에는 불교의 핵심 사상이  농축 되어 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불교 신자라면 대부분은 <반야심경>을 외우고 있다.

그러나 최진석 교수는 불교 신자의 입장이 아닌 철학자의 입장에서 <반야심경>을 통해 인생 전체를  통찰하는 사유의 틀을 제시 한다.

저자의  철학적  시각으로 불교를 관계의 종교라고 보았다.



<차유고피유, 차생고피생,차무고피무, 차멸고피멸.

(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없음으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진다.>



이는 불교의 연기법을 설명한 것이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존재 형식은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관계에 기반해서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의자를 예를 들어 설명한다.

의자를 구성하는 나무 판자나 받침, 나사, 못 혹은 바퀴 같은 것을 따로 떼어 내어 보면 의자라고 할 수  없다.

의자를 구성하는 여러 부품을 조립하여 의자의 형상을 완성 시켜야만 의자가 된다.

하지만 형상 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의자가 가진 성질을 우선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의자를 '앉음' 이라는 성질을 가질 때에 의자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의자를 형성 하는 각각의 부품들이 합쳐져 의자라는 성질을 가질때 의자가 되는 것이다.

, 의자는 인연에 의해 잠시 부품이 모여 의자로 존재 할 뿐 따지고 보면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존재는 인연이란 관계를 통해서만 드러난다.

그래서  세상은 본래 본질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관계를 통해서만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다.

이는 곧 '' 라는 존재의 실체가 없다는 '무아(無我)' 하고도 상통하는 것이다.



대행 큰스님께서도 하신 비유중에 내가 버스를 타면 승객이 되고, 식당에 가면 고객이 되고, 아버지 앞에서는 아들이 되고, 아들 앞에서 아버지가 되는 '' 란 존재를 어느것이 진짜 '' 라고 고정 시킬 수 있냐고 하셨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고정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는 뜻이 이해가 쉽게 된다.  

인연생기(因緣生起)에 의한 관계를 통해 우리는 존재를 드러 낼 뿐이다

그래서 인연은 소중한 것이다.



저자는 이를 본무자성(本無自性: 본래 자기 성품이란 없다)이라 표현하며 불교의 핵심 사상인 공()을 노자의 유무상생(有無相生: 있음과 없음에서 서로 나옴) 과 주역의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謂之道: 음과 양이 도에서 나왔다)으로 그 뜻이 같음을 설명한다.

공이란 없음이나 텅빈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자꾸 공 이란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서  공을 잘못 이해 한다고 밝힌다.

<공은 단지 기호 일뿐 실체가 아니며 세상이 인연으로 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논리적인 개념일 뿐> 이라 말한다.

이 표현은 저자가 북경대학 박사학위 과정을 밟을 때 학기말 과제에 쓴 답안이라고 했다.

공이 단지 기호 일뿐 실체가 아니라는 통찰에 당시 지도교수 탕이지에 (汤一介:1927~2014) 교수에게 극찬을 받았다고 한다.

, ()나 공() 이란 것은 본질이 아니라 단지 기호에 불과한 것이란 것이며 이는 관계를 통해서만 드러난다는 뜻이다.

기호를 붙힌다는 것은 부르기 쉽게 이름을 갖다 붙힌다는 뜻과도 같다.

글자 그 자체에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닌 단지 부르는 이름에 불과 하다는 것이다.

마치 '의자'  라는 이름이 의자와 아닌 것과 마찬가지 이다.



저자는 <반야심경>의 참뜻은 바라밀다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바라밀다' 란 본래 파라미타(Paramita) 라는 어원에서 나온 것으로 '저쪽으로 건너가게 되다' 는 뜻이다.

인간은 건너가도록 태어난 존재이며 멈추지 말고 사람이 사람으로 완성되는 길을 걷기 위해 건너가기를 실천해야 한다고 말한다.

스위스 조각가, 자코메티(1901~1966)의 작품 <걷는 사람> 이 책의 표지가 된 이유 이기도 하다.



저자는 또한 자신의 고삐가 무엇인지를 스스로에게 묻고 고삐를 잡고 건너가라고 한다.

자기만의 고삐를 쥔다는 것은 남들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닌 자신의 삶에서 자신의 길을 당당히 걸으라는 뜻이다.

붓다가 선언했던 '천상천하 유아독존' 은 비단 붓다만이 할 수 있는 선언이 아닌 것이다.

남이 보는 것을 내가 보는 것이라 착각하지 말고 나만의 심안(心眼)으로 세상을 볼 수 있을때 자신의 무대에서  진정한 주인공이 되어  당당히 걸을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우리 아이들이 엄마의 나라 중국에서, 아빠의 나라 한국으로 건너가서 자신만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되길 바란다.

그런 의미 에서 이 책은 큰 아이가 대학 입학 하기 전에 꼭 읽었으면 하는 책으로 추천해야 겠다.


공에 관한 공부 역시 양자역학처럼 감각과 직관으로 쉬이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습니다. 또 재미있게도 <반야심경> 과 양자역학 사이에 상당한 유사점이 발견되기도 하고요. - P10

즉 manage, 경영이라는 단어의 근원은 ‘고삐를 잡고 무언가를 하는 것‘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다른 무엇보다 고삐라는 말 자체입니다.
여기서 고삐가 내포한 의미를 다른 말로는 철학philosophy 혹은 이상vision 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P32

무언가를 알고 싶어하는 마음이 사라진다는 것은, 영혼의 성장판이 닫힌다는 뜻입니다.이런 상태에서는 어떤 지식도 그다지 쓸모가 없습니다. 모든 창의성, 삶의 생기, 친절,용기, 절제 등과 같은 지적인 활동은 지식에서 오지 않고, 알고 싶어 하는 의지로 가득 찬 자신만의 욕망에서 나옵니다.
- P42

세계의 진실을 진실로 아는 것, 이것이 해탈의 가장 근본적인 조건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업이 계속 쌓이고, 결국 윤회의 순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세계의 진실한 모습, 실제 모습을 실상이라고 합니다. - P64

붓다도 브라만들의 비방과 폄훼를 견뎌야 했고, 예수도 율법주의자들이 가하는 치욕을 견디며 자신만의 진리의 세계를 구축하였습니다.
치욕에 무너지면 건너가지 못합니다. 건너가려면 치욕을 견뎌내야만 합니다. - P136

반복은 리듬이고, 리듬에는 감동을 일으키는 힘이 있습니다. 반복하고, 반복하면, 감동이 일어나고, 감동이 일어나면 변화가 일어납니다...중략..
지금의 내가 ‘이곳‘에서 벗어나‘저곳‘으로 건너가면서 나는 나 이상이 됩니다. -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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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과 팔정도 소리 시리즈 7
활성 지음, 김용호 엮음 / 고요한소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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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참선과 팔정도

지은이활 성엮은이 김용호 /고요한 소리

   :  한 여름 밤의 꿈에서 깬 후 지르는 고요한 소리

 



교실의 뭔지 모를 적막감.

긴장감 오지게 흐르는 군대의 점호 시간.

나의 힘들었던 첫 직장 생활에서의 인간 군상들.  이곳에서 벗어 나야 돼.

밖은 컴컴하다. 길을 찾아 헤멘다. 가야 할 곳이 어딘지 모르겠다.

어딘지 모르지만 너무 덥다눈에 익은 곳인데... 어디지? 여기서 벗어 나야 돼.

, 어디로가?  안돼!



, 꿈. 꿈이 였구나다행이다.

그런데 나이  50먹고서도 이따위 꿈을 꾸다니.... 이거 악몽아닌가?

땀은 왜 이리 많이 흘렀냐? . 너무 덥다보니  이런 꿈도  꾸는 구나.

이제 다시 눈 감기가 두렵다. 또 꿈을 꾸면 어떻하지?

그저께 한의사가 몸에 열이 많고 내 몸 상태는 허한게 아니라 너무 실해서 문제라고 했는데, 복날이라고 몸 보신 한다고 삼계탕 먹지 말라고 했는데...

진짜 몸이 열이  많긴 많으가  보네.

안되겠다.

일어나야 겠다. 참선이라도 해야지.

지금 한 30분 정도 흩어진 마음을  좀 모아야 겠다.

그래, 30분만 마음을 지켜보자.

오른발위에 왼발 올리고, 허리 곧게 펴고, 양손 살며시 포개고, 턱 당겨 눈을 내리 깔고. ~.

 



그런데 왜, 그런 꿈을 꿨을까?

요즘 회사일이 잘 안풀려서 그런가?  지난주에 큰애가 고3 원서 냈다고 나도 고 3때로 돌아간 건가? 회사에서 속썩이는 애들 한테는 군대식으로 군기를 잡으란 뜻인가?

꿈에서 어떤 암시가 있나? 해몽이나 해 볼까?

아 참,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참선 한다고 자꾸 이런 생각이나 하면 어쩌나?

이런 저런 생각을 말자.

그래, 내 마음 중심을 지켜 봐야지.

...

() 한 곳으로 마음을 몰아서 지켜 봐야지.

, 그런데 지켜 보는 것을 요즘은 다른 말로 '마음 챙김'이라고 하던데.

, 얼마전에 본 <참선과 팔정도> 에서 참선이 바로 팔정도(八正道)의 정념(正念)에 해당 된다고 하네.

정념이 곧 바른 마음 챙김이 되는 거 였다구.

그럼 내가 지금 이렇게 관(: 볼 관)을 한다는 것은 팔정도의 정념과 같은 거 였구나.

부처님께서 초전법륜(初轉法輪: 깨달으신후 최초의 설법) 때 가장 먼저 설하신 것이 팔정도 였다고 하는데, 팔정도 너무 쉬운 법문 아닌가?

바르게 보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생각하고, 뭐든 바르게 하라는 건데.

그런데 이게 왜 대단한 거지?

아차여기서 또 내가 놓치는게 있었네.

뭐든지 안다고 생각 하는 순간 좀 쉽게 보는 경향이 생기지.

쉽게 보는 순간 이미 어긋나게 되는건데... 아직도 내 마음이 그렇네.

(: 계율), (: 선정),(: 지혜)  3()이 곧 팔정도라고 했어.

맞아, 계에 해당되는 것이 정어(正語: 바른 말), 정업(正業: 바른 행위), 정명(正命 바른 생계), 정정진 (正精進 바른 정진) 이고 정에 해당되는 것이 정념(正念: 바른 알아차림),  정정(正定: 바른 집중), 혜에 해당하는 것이 정견(正見: 바른 견해 ), 정사유(定思惟: 바른 생각)가 된다고 하던데.

부처님 께서 팔정도에 바로 불교 수행의 핵심이 다 담겨 있다고 했는데.

그런데 솔직히 나는 팔정도를 거의 무시 하지 않았나?

오직 참선과 관만 하면 된다고 생각 하지 않았나?

모든 도는 통하니까 참선과 관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것도 어쩌면 고정된 생각 이었구나.

이제 보니 기본이 없이 바로 테크닉만 바로 추구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거였구나.

요새 '도인병(道人病)' 걸린 사람들이 많다더니만 어쩌면 내가 그중 한 명이 될 수도 있었겠구나.

공부 좀 하면 편안해지고 뭐든지 한번 보면 대략 스캔이 다 되어서 다 안다는 생각이 올라오지. 이런 현상이 어쩌면 아집 (我執: 나라는 집착), 아만(我慢: 나의 교만함 ),아상(我相: 나라는 고정 관념)의 시초인데 나도 모르게 또 빠질 뻔 했네.

맞아. 계를 뛰어 넘고 바로 정과 혜로 들어 가면 이런 병폐를 유발하게 되지.

계를 지키지 않는 기본도 안 된 상태에서 어떻게 수행이 더 깊어 지겠나?

결국 팔정도에서 도()'' 을 뜻하는 것 이고 길이 곧 ''인데  도라는 관념을 너무 거창하고 높게 잡고 있는 게 아니 였을까?

맞아. 어쩌면 중국어 중에서 '안다' 는 말을 '知道,不知道', (지도 zhi dao 쯔다오: 안다, 불지도 bu zhi dao 뿌쯔다오: 모른다) 라고 하는데.  얘네들은 노자의 후손 답게 '' 를 그냥 일상 생활어로 쓰고 있었구나.

도를 안다. 길을 안다 라... .

, 그런데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도를 도라고 말하면 도가 아니라 했는데...

도는 그냥 이름에 불과 한 것이란 뜻이겠지. 금강경에도 그런 비슷한 말이 나오지 않나?  

역시 도는 길이 맞나 보다. 노자와 부처가 서로 통하는 걸 보니....

결국 팔정도가 가장 기본이면서 가장 핵심이 되는 수행인 것은 확실한데 나는 왜 그동안 너무 쉽게 생각했지?

아휴, 내가 또 망상을 피우고 있구나.

어쨓든 지금 부터 라도 다시 근본으로 돌아 가는거다.

바르게 지켜보기(정념) 를 하려면 먼저 지금 처럼  들떠 있는 마음을 놔야 겠다.

그래야 고요하게 하고 청정하고 맑아지도록 해야 겠지?

생각이 많다는 것은 내 지금 상태가 아직 고요하지 않다는 증거야.

그래, 다시 또 내 근본을 비추어 지켜봐야지.

그래서 이걸 회광반조(回光返照)라고 하지 않았던가?

공부가 깊어지면 세밀해 진다고 하던데.... 현미경으로 보듯이 샅샅히 톺아 보는 경지까지 이르면 좋겠다.

, '좋겠다' 고 바라는 마음도 욕심이다. 이것도 놓아야지.

아직도 난 너무 놓치고 있어. 놓치는게 많다구.

에이? 또 이것도 놓지를 못하고 놓치고 있네.

것과 놓는 것. 한 글자 차인데 천지차이가 되어 버리네.

'털끝만치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사이 만큼 벌어지나니   

 (毫厘有差天地懸隔  호리유차,천지현격)'증도가(證道歌)에서 한 말이 이거 였구나.

, 이제 다리가 저려온다.  보통 20분 지나면 다리 저리는데 20분은 지나겠지?

그나저나 30분 다 된 거 아니야?

, 다시 주. . . 모으자.

아니, 벌써  40분이나 지났네?

30분만 앉아있으려고 했는데 어느새 이렇게 시간이 훌쩍 지나 버렸지?

, 망상만 피다가 시간 보낸 것 아닌가?

에휴,  오늘 공부도 또 헛 탕인가?

그나마 참선이라도 하니 잠깐 더위는 피한 것 같네.

, 이제 다시 자러 가야 겠다.

이제 악몽을 다시 꾸진 않겠지?

 



* 고요한 소리는 내면으로 지르는 치열한 소리다

   나 처럼 고요한 망언이 되어서는 안된다.

부처님은 교주가 아니셨고 불교 역시 교주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 P14

에베레스트에 남이 다 올라가니까 덩달아 도전장을 던지고 오르는 겁니다.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고 에베레스트 끝까지 올라갈 수 있습니까? 그래서 도중에 엄청난 사고를 내고 심지어 조난을 당합니다. 그런데 눈 안보이는 이 공부길에서는 에베레스트보다 더 많은 조난자들이 속출하고 있어요 - P28

왜 계 공부를 먼저 해야 하는가? 계가 어느 정도라도 이루어져야 정에 들어가도 순조롭고 장애나 위험이 적기 때문입니다. 불교 공부를 하는 정신세계의 길은 물질세계의 길보다 더 위험천만합니다. - P38

소위 도인 바람 때문에 계를 안 지켜요. 전부 도인이 되어버려서 첫걸음부터 계를 초월해서 놀려고 합니다. ‘계 같은 것은 하근기 중생들이 닦는 것이지 우리 도인들은 그런 데 구애되면 안된다‘하는 식의 병이 있지요. 이 병은 단연 고쳐야 합니다. - P50

정신세계의 욕심은 일종의 확신이 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일단 확신이 자리 잡으면 고칠 방법이 없으니 그야말로 지옥에 가도 안 고쳐진단 말입니다. - P56

계를 통해 청정을 얻고, 그것을 바탕으로 바른 집중을 통해서 고요를 얻고, 그 청정과 고요가 기반이 되어서 참으로 찬란한 지혜의 밝음이 나옵니다.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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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 Philos 시리즈 27
사이토 고헤이 지음, 정성진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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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 (DAS KAPITAL 資本論)

지은이:  사이토 고헤이 지음/ 정성진 옮김

   :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사회를 상상할 수 있는 힘 되찾기






마힐: 안녕하세요. 저는 마힐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자본론>이란 책을 펴낸 원작자 칼 마르크스(1818~1883)님을 모시고 가상 인터뷰를 진행 하도록 하겠습니다.

원래는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을 쓴 사이토 고헤이 상()을 모셔 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원저자를 모시는게  더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이토 고헤이 상한테는 아쉽겠지만 나중에 별도로 한번 모실 기회가 있으니 그때 까지 참아 주세요.



칼 마르크스: , 그렇지. 아무래도 원조가 가장 근본이 되는게 아닌가? 사이토 고헤이 군 보다야 내가 더 박식하지.



마힐:, 저도 선생님 처럼 생각 하는데요. 근데 마르크스님의 책을 접하기가 쉽지 않아요.  생각 보다 훨씬 진입장벽이 높아요. 특히 우리나라 대한민국에서는 선생님 책은 거의 금서나 다름 없었어요.



칼 마르크스: 금서? . 나도 지하세계에서 대략 알고 있어. 그럴만도 하겠더구만. 그래도 지금은 많이들 읽잖아?  자네 같은 사람도 읽을 정도면 대중적인 책이 된거지..  



마힐: , 예전에 비해선 대중적이 된게 맞긴 하죠. 선생님이 자본론이란 책을 1867년에 쓰셨잖아요. 저희는 거의 100년이 지나서  1970년대가 되어서야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 몰래 보기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때는 독일 원서가 아닌, 미국이나 일본 이런데서 몰래 입수해서 봤데요.  지금은 선생님 책을 읽으라고 해도 않 읽는 시대가 됐었지만요... 먼저 선생님 소개 좀 간략히 부탁드려도 될 까요?



칼 마르크스: , 칼 마르크스라고 하네. 독일의 트리에르 지역  출생으로 8남매중에 셋째, 장남으로 태어났어. 원래 집안은 유대인이고 대대로 랍비 노릇을 했다고 해. 그런데 기독교로 개종 했지. 부모들도 먹고 살아야지. 유대인이란 사회 시선을 가지고 당시 유럽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은 쉬운게 아니야.



마힐: , 제가 보면 좀 천재적인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많던데... 역시 선생님도 유대인 출신 이였군요.



칼 마르크스: 유대인은 우리 조상님 이였고, 난 독일인야.

내 아버지는 당시에 아주  잘 나가는 변호사 였어. 그래서 소싯적엔 돈 걱정 없이 살았지. 난 원래 시인이 되고 싶었어. 그런데 아버지가 법학를 전공해야 된다고 하는 바람에 마음에도 없는 법대에 들어갔지. 그땐  맨날 아버지 용돈으로 놀기만 하고 시()만 주구장창 써댔지.



마힐: , 원래 마르크스님은 시인이 되고 싶었군요. 시를 쓰셨다면 감수성이 되게 예민 하셨나봐요?  그런데  제가 궁금 한게 하나 있는데요. 선생님 초상화나 남겨진 사진을 보면요. , 아래 할 것 없이 전부 곱슬 머리,곱슬 수염으로 더부룩 하거든요.

그때도 그랬나요? 항상 늙은 노인의 이미지만 있어 가지고 서요.

같은 19세기를 살았던 찰스 다윈(1809~1882)  이나 레프 톨스토이(1828~1910) 도 보면 또 비슷하게 흰 수염을 엄청 길렀거든요. 그런 스타일이 그 시대에는 먹혔나 보죠?



칼 마르크스: 난 다윈이나 톨스토이 보다 머리 숱이 많아. 비교하지마. 나도 왜 사람들이 내 이미지를  배불뚝에 덥숙룩한 머리와 수염을 기른 모습만 상상하는지 이해가 안돼.

난 그 사람들 보다 훨씬 잘 생겼다고. 안 믿기나 보지?



마힐: 죄송합니다만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서.



칼 마르크스: 이 친구 참 뭘 모르네. 내 외모와 나의 재능에 반한 사람이 내 와이프야.

내가 베를린 대학시절에 '제니 폰 베스트팔렌(1814~1881)' 양과 비밀 약혼을 했었지.



마힐: . 낭만이 넘치셨군요.  그런데 한가지 의문은 선생님은 남부럽지 않은 가정환경에서 자랐고  부인이 되신 제니 양의 집안도 명문가의 딸이라고 하는데요.

그냥 선생님 아버지가 원했던 변호사가 되거나 혹은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는데도 왜 굳이 힘든 삶을 사셨는지 이해가 안가는데요.

자본론도 따지고 보면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 하고 있지 않나요?



칼 마르크스: 난 말이야. 인류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어. 진짜로 말이야.

나는  편안한 삶을 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고. 내 성격을 아는지 모르겠지만 난 뭐든지 한 곳에 꽃히면 그것만 깊이 파고드는 경향이 있었지. 내가 학창시절에 결투도 여러번 하고, 나중엔 총 까지 들고 다녔었어. 죽는 것? 두렵지 않았어.  안 믿겨?

나의 투쟁적 성격은 본능이야. 전사의 피가 흘렀다고...



마힐:  ......... 마르크스님이 전사의 피가 흐른다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칼 마르크스: 아마도 내 자신도 몰랐지만 유대인들 피 속엔 저항이라는 DNA가 있을 꺼야. 비록 내 아버지가 기독교로 개종 했고 나도 무신론자라고 해도 말이야. 결국엔 본능이란 게 있단 말이지.

어릴적 난 유복하게 살았고, 난 내일은 생각지도 않았어, 늘 오늘만 있었지.

그런 내 성향 깊숙이  또 기존 체제의 불합리한 것들에 대한 반감이 자리 잡고 있었어.

특히 법을 공부 하면서 말이야. 법이란게 사실 보면  없는 사람들를 위한게 아니라 가진자를 변호하는게 무척이나 많았단 말이야.

그래서 내가 한때 신문사의 저널리스리트로 활동 하면서 만났던 아래 계층의 사람들이 받는 부당한 처우에 대해서 분개 할 수 있었던 거야.

난 그들이 받는 불평등에 대해 그 원인을 사회 구조 문제라고 봤던 거지.



마힐: , 그럼 자본론은 불평등에 관한 내용 인가요? 제가 사이토 상의 책을 보면서 선생님 자본론의 핵심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노동과 상품, 가치로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 했거든요.



칼 마르크스: 그걸 이해라고 하면 안돼. 물론 틀리진 않아. 하지만 내 사상은 훨씬 심오해.

이봐. 공부 좀 더 해 보라구. 그건 너무 수박 겉핡기 식이야. 

자네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 말하자면 자본주의는 상품을 팔아야 돌아가는 구조야.

그 상품은 노동을 통해 만들어 지고, 그 상품은 가치가 있어야 팔 수 있는 거지.

난 이윤이란 말을 쓰지 않지. 이윤은 자본가들이 하는 말이고 나는 '잉여 가치' 라고 부르지. 

이 과정중에 노동자는 노동력을 팔아 즉,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화해서 자본가에 파는 거지.

자본가는 정당하게 노동의 댓가로 임금을 줬다고 여기지만 노동자는 노동력을 통해 가치 있는 상품을 만들고 , 그 상품의 가치는 잉여 가치가 되어 자본가의 자산을 불리게 만들지.

여기서 노동자는 잉여 가치에 대한 어떤 지분도 얻지 못해.

자본가는 노동의 댓가로 얻어낸 잉여 가치를 노동자 한테서 착취를 한 거잖아.

노동을 한 노동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 되고 있는거야.

세상에 이런 불공평하고 불평등한 관계가 어디 있나?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는 모순 된 것이라고 본 거야.

난 그걸 면밀하게 관찰하고 또 파헤쳤지.

어떻하면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해결 할 수 있을 까?



마힐: ,  그래서 < 공산당 선언> 의 명 구절, "만국의 노동자들 이여 단결하라!", 고 하신 것 아닙니까? 불평등한 대우를 개인이 항의하는 것 보다 단체 행동을 통해 하는게 더 효과적이라서 단결하라고 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구절 때문에 우리나라는  파업이나 시위가 너무 많아서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질렸어요.

제가 어릴 때 80년대만 해도요. 근로자 아저씨들하고 전경 아저씨들 하고 화염병을 던지고, 최류탄을 쏘고 온 도시가 숙대밭이 된 게 한 두번이 아니었거든요.



칼 마르크스: 결국 그래서 노동자들은  자기들 권리를 챙취 했잖아.

그 당시 그들은 인간적으로 대우 받길 원했던 거야. 자네가 당시에 어려서 몰랐던 거고.

시위는 질린다고 생각 해선 안돼. 모두가 엄청난 댓가를 치루는 과정 이었던 거야.

자네 나라 얘기를 해 보자면 내 사후의 일인 셈인데... 나도 지하 뉴스를 보면서 알았지만.

근로기준법에 명시된 노동 시간 준수 하라고 청년 전태일이 청계천에서 분신을 한 게 1970년이야. 자본가의  시각으로 노동자는 부려먹는 존재에 불과 했던 거야.

그런데  그전에 이미  18865 1일 미국에서는  8시간 근무시간을 요구하며 총 파업을 했었던 적이 있었지. 이때 시위중에 많은 사상자가 났었어.

그 뒤 1890 5 1일에도  프랑스에서는  노동자 단결의 날 로 정하고 8시간 노동 쟁취를 위한 시위를 했었지.

이후 5 1일은 메이데이MAY DAY로 불리고 한국, 중국, 유럽에서는 노동자의 날이라 정하게 되었던 거야.

내가 1848년에  '만국의 노동자들 이여 단결 하라' 고 했어도 실제로 근무시간 8시간 준수 되기 까지는 150년이 훨씬 넘는 시간이 걸렸어.

내가 자본론에서 노동시간을 줄여야 하는 이유를 설명을 하잖아?

그런데도 지금은 8시간 준수는 지킬지 몰라도 자본가들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잉여 가치를 쌓고 있어.



 

마힐: 그렇군요. 전 무척 선동적인 문구라 금방 다 이루어 진게 아닌가 했는데 정말 많은 시간에 걸쳐 이뤄낸 거였군요.



칼 마르크스: 내가 프랑스 파리에서 내 친구 프리드리히 엥겔스(1820~1895)와 공산당 선언을 발표한게 1848년 인데 그때 내 나이 30살이야. 한창 젊은 혈기 였지.

그땐 프롤레타리아 계층 즉, 무산계급, 노동자층의 주도로 사회를 변혁 시켜야 된다고 생각 했어. 

가진자들 즉, 자본가들은 순순히 자기들 기득권을 내놓지 않을 꺼라고 봤지.

그래서 공산당 선언에서는 무력으로 권력을 뺏앗자고 했었지.

아마도 이 부분 때문에 공산당은 과격하다는 오해를 불러 일으킨거라고 봐.

그런데 나는 1849년 그 다음해에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망명하게 돼.

여기서 잠깐 나의 이력을 좀더 살펴 봤으면 해.

왜냐면 내 자본론이 그냥 나온 책이 아니거든.



마힐: 아마도 선생님의 마르크스 사상도 단계별로 이루어 지는가 보죠?



마르크스 : 그렇지. 일단 나의 시기는 크게 3단계로 나눠진다고 보면 돼.

독일 시절, 프랑스 시절, 영국 시절까지 이렇게 3개국을 거쳐 가며 살았어.

독일 시기때 당시에 유행했던 헤겔(1770~1831) 철학에 영향을 받았지. 헤겔의 변증법 알지?

정반합으로 유명하잖아. 그 당시  헤겔의 사상은 독일 젊은이들에게 크게 영향을 줬어. 나도 한때 헤겔의 사상에 심취했으나 그의 사상은 절대정신 이라는 관념론적 성향과 나의 유물론적 성향은 맞질 않아. 난 헤겔의 영향을 받았지만 난 철저한 유물론자야.

이후 프랑스 시절에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면서 확고 해졌지.

그러다가 결국 영국으로 망명해.  그곳에서는 조용히 지내.  아니 홀로 도서관에서 수련했어. 나는 수도자들이 도를 닦는 심정으로 도서관에서 아침 저녁까지 앉아서 책을 보고 분석하고 나의 생각들을 정리하는 과정을 거쳤지. 사상을 숙성 시켰다고나 할까?

그렇게 완성 된 것이 1867년에 발표한 자본론 이야.

 



마힐: 선생님이 발표한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 사이에 19년의 시간의 갭이 있었군요.



마르크스: 나의 자본론은 공산당 선언과 같이 선동과 과격한 논리로 자본주의를 전복 시키자는 내용이 아니야. 나는 그 시간 동안 정말로 당시 자본주의가  돌아가는 구조를 면밀히 분석했어. 사회주의니 공산주의 같은 내용은 나오지도 않아. 그런데 사람들은 종종 오해를 하지.



마힐: 저도 그랬습니다. 사이토 상의 책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 을 읽지 않았다면 저도 마르크스 사상은 공산주의 사상이다 라고 생각 하면서 평생을 살 뻔 했으니까요.

칼 마르크스: 난 자본론을 총 3권으로 구성 했었는데 1권은 1867년에 출판 됐지만 2권과 3권은 내 사후에 출판 됐어. 사실 엄밀히 따지면  미완성의  작품인거지.

친구 엥겔스가 내 원고를 정리 해서 2,3권을 모두 출판 시킨 거야.

사실 2권은 7번에 거친 수정을 거쳤기 때문에 거의 완성을 했다고 봐. 그런데 3권은 사실 내가 1권을 쓸 때 구상은 했지만 제대로 방향을 잡았다고 볼 순 없어.

엥겔스가 3권을 집필하면서 내 본래 사상은 희석 되었지만  오히려  자본론은 대중화가 된 셈이지.



마힐: . 그런 비하인드가 있었군요.... 그런데 선생님 정말 죄송한데요.

제가 사실 선생님과 여쭤 볼 께 많았거든요. 자본주의 사회와 코뮤니즘의 차이 같은거나 공산주의 사회의 문제점, 그리고 케인즈라는 경제 학자와 선생님 사상 비교 같은것 등등. 또 가쉽거리로 혼외자 사건 같은 이슈 같은 것도 좀 물어 볼까 했는데요. 또 강철의 연금술사에 나오는 등가 교환의 법칙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  등등...

그런데 지면 관계상 더 진행 할 수 없게 되어 아쉽 습니다.

혹시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 있으시면 간략하게 좀 부탁 드립니다.



칼 마르크스: 자네 지금 장난 하나?  좀 거창하게 물어 볼 것 처럼 하더니만 이렇게 끝내 버리자구?  에이... CX... 부루주아 돈 앂는 소리 하고 있네... 내 예전 성격 같으면 그냥 확...

,  한마디만 하고 가겠네.

내 사상의 유통기한이 끝났다고 지금 사람들은 말 하고 있지만 난 아직도 무덤에서 살아 있네.

난 예언자가 아니야. 난 내가 생각하고 숙고한 것을 저술 했을 뿐이야.

어쩌면 요즘 시대에서 말하는 시나리오중 하나를 말 한 거야.

그런데 나의 시나리오를 맹신하거나 아예 무시하는 사람들은 문제가 있어.

자신의 생각과 관점으로 보는건 자유지만 내 의도가 뭔지는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냥 봐. 내가 뭘 얘기 했는지.

사이토 상이 아주 좋은말을 했더군.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사회를 상상할 수 있는 힘 되찾기 위해서라도 자본론을 읽어야 한다' .

일본인을 비롯한 동양인을 별로 내가 좋아 하진 않는데 난 이 말엔 박수를 쳐주고 싶네.

무덤으로 돌아가겠지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죽지 않았네. (연기만 솔솔..)



마힐: 선생님 말씀 감사 합니다. (한마디가 아니 시군요.... 욕도 프롤레타리아식으로하시네요. )

저는 이번 인터뷰를 진행 하면서 저의 부족한 점을 많이 느꼈습니다.

다음번 다른 기회로 만난다면 선생님과 설전을 펼칠 수 있도록 공부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무덤에 있는 사람 다시는 깨우지 말아야 할 텐데...)



자본주의는 인위적으로 ‘희소성‘을 만들어 사람들의 삶을 가난하게 만드는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P33

국제 NGO옥스템에 따르면, 세계 부호 상위 26명의 자산 총액은 인구 절반에 해당하는 약 38억명의 자산과 맞먹는다고 합니다.
.....중략....
반면 서민들은 장시간 노동, 불안정 고용, 저임금 등을 강요 당하며 점점 가난해져만 갑니다. - P39

이 착취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자본론>의 목적이 아닙니다. 이 점은 종종 오해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우리가 오히려 물어야 할 것은 착취의 존재가 드러났는데도 왜 노동자들은 묵묵히 일을 계속하는가 하는 문제 입니다. - P70

노동 과정에서 극히 비열하고 혐오스러운 전체 지배에 노동자를 복종시키며, 그의 생활시간을 노동 시간으로 전환시키고 그의 처지를 자본이라는 저거너트의 수레바퀴에 던져 넣는다.
<저거너트: 사람들에게 절망적인 희생을 강요하는거대한 힘> - P122

우리는 코뮤니즘이라는 유토피아를 상상하기 위해 <자본론>을 읽어야 합니다. - P199

각자는 그의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그의 필요에 따라! -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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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7-19 2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답식으로 리뷰 써 주시니
머리에 쏙쏙 들어오기도 하고
재미도 있어요^^

마힐 2024-07-20 01:05   좋아요 1 | URL
실제 책의 내용은 광범위 한 것 같아요. 처음 봐서는 정말 수박 겉 핡기 밖에 이해가 안되는 것 같더라구요. 마르크스가 생전에 차라리 제자들을 길렀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봤어요.
마르크스는 글만 남겼는데 후에 공산주의자들이 자기들 멋대로 해석한게 아닌가 싶기도 했어요.
우리 조선은 사대부들이 유학을 받아들여 성리학의 나라로 600년을 지탱했는데 마르크스 사상으로 세운 나라들은 모두 한세기 만에 실패하는 걸 보면 사상의 문제라기 보다는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수준 문제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기도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