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봄날에 다시 만나면 - 나는 죽음을 돌보는 수행자입니다
능행 지음 / 김영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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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우리 봄날에 다시 만나면(나는 죽음을 돌보는 수행자입니다.)

지은이:  능행 지음

   : 죽음, 일생에 단 한번 뿐인 소멸. 그러나 다시 또 생(生)으로




우리에게 탄생과 죽음은 일기일회(一期一會)이다.

즉 평생을 걸쳐 딱 한번만 맞이 하게 된다.

탄생도 딱 한번이고  죽음도 딱 한번 밖에 없는 것이다.

이번에 읽은 <우리 봄날에 다시 만나면> 에서는 잘 살아야 잘 죽는다는 도리를 일깨워 주는 책이다.

당신의 수행의 길에서 인연으로 만났던 임종을 앞둔 사람들의 생의 마지막 자락 이야기가 담겨 있다.

책의 저자 능행 스님은 비구니 스님으로 우리나라 불교계에서 최초로 호스피스 전문병원을 지으신 분이다.

능행스님은 충주 정토마을 호스피스 돌봄 센터에서 시작하여  지금은 울산 언양에 호스피스 전문 자재병원을 건립하였다.




이책은 남들이 있는 곳에선 절대 읽어서는 안 될 책이다.

나는 읽는 내내 눈에서  눈물이 끊이지 않고 흘러 내렸다.

내 가족이 죽는 것도  아닌데도 책 속에 등장하는 여러 사람들의 임종 사연 하나하나에 눈물이 맺혔다.




한평생을 장사를 하며 바쁘게 살던 노 부부가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부인이 위암 말기 판정을 받게 되었다.

남편은 부인을 살리기 위해 항암 치료를 받게 하고 백방으로 몸에 좋다는 약을 구하는  노력을 했지만 그 모든 노력은 소용 없었다.  

결국 마지막으로 정토 마을로 오게 되었는데 거기에서도 남편은 부인 곁에서 6개월 동안 아픈 부인 간호를 정성을 다해 했다.

남편은 그렇게 해서라도 부인을 곁에 두고 싶어 했지만 부인 입장에서는 아픈 몸이 괴로워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부인은 얼른 몸을 벗어 던지고 싶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에 대한 애착이 강한 착한 남편을 홀로 두고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부인은  살짝 잠이 들었다가 꿈을 꾸게 된다.

꿈에서 부인은 극락을 본 것이다. 그곳에서는 고통도 없고 자기 몸이 다시 젊은 소녀 시절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거기 남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남편에게 작별 인사를 안 했다는 생각이 났다.

그때 그녀는 남편에게 돌아가 마지막 인사를 하고 3일 뒤에 다시 오겠다며 다짐하고 꿈에서 깨어난다.

꿈을 깬 부인은 남편에게 꿈 얘길 했다. 자신이 가야 할 곳, 그 곳엔 아픔도 고통도 없는 곳이고 또한 다시 젊을 적 예쁜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고, 그러자 남편이 그제서야 납득을 하기 시작 했다.

아픔과 고통이 없는 곳이라면 이제는 놔줘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는 3일 동안 부부는 함께 살아 왔던 순간 순간, 병으로 함께 힘들었던 순간들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마지막 날 부인은 남편의 품 속에서 잠들듯 편하게 저 세상으로 건너 갔다고 한다.

남편은 그때 밖에 허드러지게 핀 진달래 꽃을 따와 부인 가슴에 안기며 말했다.

"잘 가, 아픔 없는 곳이라 하니 이렇게 보내준다. 난 이제 안 운다다시 꼭 그곳에서 만나자."

남편은 그렇게 아내의 죽음을 통해 죽음 다음에 대한 배움을 시작했다고 한다.

<죽음은  그 죽음을 딛고 더 아름다운 삶으로 떠나는 여행과 같다. p.25>





흔히들 목숨이란 목에 숨이 걸린 것이라고  말한다.

삶은 숨을 들여 마시고 내쉬는 순간에 있는데  목으로 숨이 들어가기만 하고 내 쉬어지지 않으면 숨은 목에 걸려 버린다. 즉, 숨 들여 마시고 내쉴 수 없는 상태.

그때 우리는 그것을 죽음이라 부른다.

그러나 육신의 죽음은 끝이 아니다.

죽음 다음에 있는 문은 육체를 가지고 들어 갈 수 있는 문이 아니다.

그래서 생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사람들은 죽음의 문으로 들어 가는 것을 두려워 한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받아 들이지 못한다.

죽는 순간에도 너무나 고통스러워 하며 떠난다.

그러나 죽음을 준비한 사람들이나 수행자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염불 수행만 30년을 한 어느 보살님은 죽음의 순간에 아미타불을 염 하자 아미타불이 오시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아미타불을 만나서 손을 잡으려는 순간 엄마를 부르는 아들의 간절한 목소리에 그만 다시 이승으로 돌아 오셨다던 보살님, 그 보살님은 아들에게 다시 돌아와 잘 있으라 하고 48시간 뒤에 다시 임종을 맞았다. 임종의 순간 몸에서 나는 향 내음이 온 병실에 퍼졌다고 한다.

보통 아픈 사람의 몸에서는 냄새가 난다고 하는데 수행자의 몸에서는 향기가 난다고 하니 수행을 안 할 수가 없음을 다시 한번 여실히 느끼게 되는 일화다.





그리고 스님의 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는 자재병원을 짓게 되는 계기가 된 일화일 것이다.

30년 전쯤 스님께서 자신의 공부를 할 려고 호스피스 일을 접기로 마음 억었을 때 전에 호스피스일을 통해 알았던 어느 수녀님 한테서 연락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수녀님이 돌봐주시는 환자 중에 아무래도 스님인 듯한 분이 계시는데 도통 말도 안하고 몸에 손도 못 대게 해 씻기지도 못하는 환자가 있다는 것이다.

머리가 길어서 스님인 줄은 겉으로 보고는 알 수 없지만 환자가 지닌 배낭이 스님들이 쓰는 바랑과 같은 것이라 스님이라 짐작하고 자신이 아는 능행 스님께 연락을 했다는 것이다.

스님은 그 얘길 듣자 마자 곧 그 병원으로 갔다고 한다.

몸의 냄새 때문에 통풍이 되는 창가 쪽에 놓인 침대에 누워있는 환자는 도저히 스님이라 볼 수 없는 몰골로 머리도 길고 씻지도 않은 모습이라 당황했다고 한다.

그런데 보는 순간 그냥 느낌으로 그냥 스님이라고 확신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스님' 하고 부르자 자신이 스님인 줄 어떻게 알았냐고 묻더란다.

스님이 맞다는 걸 확인하고 이후에 누워 계신 스님의 사연을 듣게 된다.

원래 그 스님은 선방에서 수행을 하시던 비구 스님이셨는데 어느 날 폐렴이 심해져 도저히 공부를 지속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 당시 스님 도반들을 통해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했는데 도반 스님들은 그 사이에 공부 하러 선방에 들어 가시고 그 스님 혼자만 병원에 남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병은 심해지고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가 마지막 카톨릭계가 운영하는 호스피스 병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자신이 스님이라는 것을 왜 안 밝혔냐고 하니 그 스님께서는 당신이 도저히 부끄러워서 말 할 수가 없 었단다.

공부를 잘해서 도통(道通)한 것도 아니고 자신의 병 때문에 공부하는 도반 스님들에게 누를 끼치면 안 되고 또 스님이 되어 가지고  타 종교의 도움을 받는 것이 너무나 창피한 일이라 차라리 입을 다물었다는 것이다.

이때 능행 스님은 불교계에 제대로 된 병원 하나 없다는 현실을 자각 하게 된다.

능행 스님은 선방 스님의 목욕을 시키며 몸을 닦아 주는데 하염 없이 눈물이 나더란다.

수행자의 존엄이 지켜지지 않는 비참한 현실  때문인지, 비록 병든 몸이지만 수행자의 몸에서 느끼는 수행력에 감동해서 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눈물의 의미는 스님만이 알 것이다.

그리고 머리도 다시 삭발하고 승복을 구해와 스님에게 다시 입혀 드리니 온 몸에서 빛이 나더 란다.

그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고 씻지도 않아 알게 모르게 무례하게 대했던  병원 관계자 모두가 놀랐고 스님께 사과를 했더란다.

그리고 그전에 그 비구스님을 위해 기도를 올려 주었던 신부님과 수녀님들 까지 와서 사과를 했다고 한다.



그렇게 비구스님은 임종을 앞두고 능행 스님에게 자신의 유언을 말한다.

불교계에서도 호스피스 전문 병원 하나만 지어 달라고, 능행 스님은 자신은 능력도 안되고 돈도 없는데 어떻게 짓냐고 못한다고 했단다.

<원만 세워, 원만 세우면 돼.p.96>





(: 원할 원), 불교의 원은 소원과는  차원이 다르다. 소원은 자신이 바라고 소망하는 일이 이루어 지게 바라는 것이다. 어쩌면 비는 것 같은 기복적인 성향이 있다.

하지만 불교에서 원은 세우는 것이라고 표현 한다.

원은 되게 해 달라고 비는 행위가 아닌 것이다.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는 근본 마음을 일으켜 세우라는 것이다.

아마도 원은 세우는 순간 무위법이 자동으로 작동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자신의 육체가 지수화풍으로 점차 흩어져 가는 순간까지 선방 스님은 능행 스님에게 원만 세우라고 하셨다.




이 대목에서 그 당시 상황이 생생하게 느껴 졌다. 원만 세우라는 말씀에 가슴을 때리고 눈은 더 이상 눈물을 담을 수 없게 했다.

능행 스님은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지만 자신이 어떻게 지을 수 있는지 확신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자 비구스님은 자기가 죽어서 라도 스님  곁에서 도와 줄 테니 꼭 지어야 된다고 했단다.

수행자는 그렇게 마음을 내고 몸을 벗었다.

또한 스님이 세우라고 한 원은 실제로 능행스님이 세우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나중에 유튜브에서 조현 기자와 이때의 상황을 말씀 하시는 능행스님 인터뷰를 따로 보았다.

책에는 안 나오지만 그때 선방 스님은 자기가 죽어서 라도 곁에서 돕겠다며 자신은 병원을 지을때 까지 몸 받는 것을 미루겠다고 했단다.

나중에  병원을 세우게 되면 자신은 의사로 다시 태어나겠다고 했 단다.

자기가 비록 타종교의 병원에 있었지만 그 병원에서 만난 의사들이 너무나 훌륭해서 다음 생에는 꼭 의사로 태어나겠다고 발원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은 꼭 의사가 되어서 다시 돌아오겠다고 능행 스님께 말 했다고 한다.

생과 사를 둘로 보지 않는 게 불교의 생사관 이지만 현실적으로 존엄한 죽음에 대해  불교계가 좀 더 고민해 봐야 하는 대목인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자재병원을 지으신 능행스님 원력에 두 손 모아 합장을 드리게 된다.





우리나라 불교는 선불교(禅佛教)가 대세라 공부하다 죽는 것을 최고로 삼는다.

그러나 이것도 치우쳐서는 안되는 것 같다. 고정된 게 없는데 수행자라고 해서 죽음을 다 초월해야 하는 것인가? 삶이 중요하듯 죽음을 대하는 것도 초월이란 말로 포장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수행자가 여법(如法)하고 존엄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필요한 게 맞는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스님이 지켜 봤던 많은 죽음의 사례 중에서  일반인일 수록 죽음에 대해 미리 생각해 놔야 된다는 것을 느꼈다.

스님들이야 수행자이니 죽음을 생과 더불어 하나의 관문으로 여기지만 일반인들은 그렇 질 못하다. 그러니 그럴수록 더욱 수행자 같은 마음으로 살아야 된 다는 것이 느껴졌다.

떠날 때 잘 떠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사는 것도 잘 살아야 잘 떠날 수 있을 것이다.





탄생과 죽음을 한 단어로 표현 하면 삶이 된다.

삶이라 해서 사는 것 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사는 것이 곧 죽으러 가는 것이니  삶 속에 이미 죽음도 포함 된 것이다.

그래서 옛 선사들 께서는 생사는 하나라고 하신 것이다.

내 나이 50, 죽음이 언제 올지 어찌 알 겠 는가?

지금 당장 죽는다 하면 나는 여여(如如)하게 죽음을 맞이 할 수 있을까?

잘 죽을 수 있게 지금 이 순간, 잘 살아야 겠다.

아니 잘 살기 위해 잘  죽어야 겠다.

맞다. 원을 세워야지.

살고 죽는 것에 끄달리지 말자.

여여하게 살다 여여하게 돌아 가자.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일체 물질 세계는 환상 같고 물거품 같고 이슬 같고 번개 같으니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응당 내가 있어서 상대가 있음이라. 용도에 따라 닥치는 대로 내면에 놓고 관 할 지어다.>

 

대행 스님의 뜻으로 푼 금강경 중에서 ...

 


내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생의 마지막을 맞게 될지 미리 생각해두어야 한다. - P100

우리는 이생에서 뜻을 가져야 한다. 열심히 수행하고 죽음에 대해 배우면서 지금 이 순간을 최고의 기회로 삼아야 할 뿐만 아니라 죽음 역시 최고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 P105

죽음 앞에 당당하려면 자신의 삶 앞에 당당해야 한다.
어떤 이유로 죽는냐가 아니라 어떻게 죽는냐가 더욱 중요하다. - P126

용서는 아름다운 선물이다... 중략...
죽음 앞에서 하는 용서야 말로 진정한 자기 수용의 과정이다. - P149

윤회를 통한 재생의 삶은 선택이다.
다음생에 어떤 존재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욕망을 일으키는 순간 자신이 살아온 습기에 따라 그대로 이 세상에 재현 되는 것이다.

삶의 질이 곧 죽음의 질이며
죽음의 질이 곧 그 다음 생의 질적 기반 입니다.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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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숲을 거닐다 - 장영희 문학 에세이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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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문학의 숲을 거닐다

지은이:장영희 문학 에세이

   : 문학의 힘으로 일어서다

작년 9월 부터 시작한 독서 활동이 이제 곧 일년이 다 되어 간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책을 읽으며 책으로 많은  인물들을 만났다.

내  50평생 동안에 사회에서 직접 만나서 감흥을 받은 사람들 보다 책을 통해 알게 된 인물들이 앞으로는 내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 같다.

이번에 읽었던 <문학의 숲을 거닐다> 의 저자 장영희 교수님(1952~2009)도  그럴 것 같다.

책을 읽을 때는 너무나 좋아서 읽고 난 후 쉽게 독후감을 쓸 줄 알았는데 막상 글을 쓰려니  여러가지 생각이 일어나서  쉽게 쓰질 못하겠다.

왜 그런지, 상당히 당황 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후감을 써야 한다면  맘에 들었던 것 부터 시작 해야 겠다.

먼저 이 책은 장영희 교수가 2001년 부터 조선일보에  영문학  고전을 소개했던 칼럼들을 모아 출판을 한 양장본 책이다.

책은 고전이라 불리는 영문학 작품들과 장교수님이  겪었던 일상 들이 조화롭게 구성 되어 있고 중간중간 여백의 미처럼 사색하게 되는 그림들의 배치가 너무나 잘 어울렸다.

여지껏 읽었던 다른 책들에 비해 이 책 만큼은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조심스레 책을 넘기며 보게 되었다.

마치 책이 장영희 선생님의 분신이나 되는 듯  책을 아주 조심 스럽게 대하게 된다.

아마도 책을 읽는 내내 작가 장영희 교수님의  입장에 서서 감정 이입이 되었던 것 같다.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은 후 평생 목발에 의지한  채 살았지만 항상 밝은 모습으로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지도 했다는 장영희 교수.

그녀가 소개한 영문학 작품들 대부분은 내게는  생소 했지만 나중에 읽어 보고 싶을 만큼 사랑과 희망을 말하는 작품들이 많았다.

그 작품들중 내가 가장 흥미로웠던 칼럼은  에밀리 디킨스 작품과 작가의 일생을 소개하는 구절이다.

사랑은- 생명 이전이고

죽음- 이후 이며-

천지창조의 시작이고

지구의 해석자             -p.78 중에서

이 시를 쓴 에밀리 디킨슨(1830~1886)  에 대하여 알고 싶다며 어느 청송 교도소의 재소자가 장영희 교수에서 편지를 보냈단다.

장교수는 영미 문학 전공자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미국의 어느 여류 시인을 청송 교도소 재소자가 언급했다는 것에 놀랐었다며 에밀리 디킨스의 일생을 간략히 소개한다.

1886 5 , 55 5개월 5일을 살고 나서 죽을 때 까지 표면적으로는 평범했지만 내면적으로는 가장 열정적인 삶을 살았던 시인 이였다고  소개한다.

에밀리 디킨슨은 일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흰색 드레스만 고집해 입었고  30세 이후는 죽을 때 까지 자기집 밖으로 한번도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생전에  몇 편의 시가 그녀 몰래 발표가 되긴 했지만 디킨슨 사후에 그녀의 책상 서랍 속에서 그녀가 썼던  2천여점이 넘는 시가 발견 되었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디킨슨 시에는 제목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시의 첫 구절을 제목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디킨슨의 시중에서 가장 알려진 시.

장교수가 생전 자신의 홈페이지 에 적어 놓았다는 시.

나에게는  어디선가 본 듯한 시. 그러나  꼭 외우고 싶은 시 하나가 생겼다.



내가 만약 누군가의 마음의 상처를

막을 수 있다면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내가 만약 한 생명의 고통을 덜어주고

기진맥진해서 떨어지는 울새 한 마리를

다시 둥지에 올려놓을 수 있다면

내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나는 이 시에서 장교수의 삶과 디킨슨의  삶이 서로 오버랩이 되는 것 같았다.

디킨슨은 한평생 은둔 생활을 했지만 그녀가  쓴 시 처럼 헛되이 살지 않으려고 내면으로 치열한 삶의 태도를 보여줬다.

그녀가 은둔을 했다고 해서 그녀의 삶의  철학 마저 감춰지진 않았던 것이다.

장교수 또한 신체적으로는 자유롭지 못했지만  그녀는 스승이 되어 자신의 제자들을 지도했고 희망을 주었다.

디킨슨과 장교수가 겪었던 외부적 육체의  속박은 그녀들에게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보다 정신적인 자유와 내면으로 성찰하는  삶의 태도가 그녀들의 삶을 더욱 가치있게 빛나게 한 것이 아니였을까?


이외에도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 소개와 장교수가 가르쳤던 멋진 제자들 과의 일화도 좋았지만 그녀의 스승인 브루닉 신부님(1917~1980)과의 일화도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우리나라  70년대는 장애인은 대학에 입학 할 수가 없었단다.

이런 정책이 있었다는게 지금은 이해가 안 가지만 그때는 그랬단다.

그녀의 아버지 장왕록 교수가 혼자 대학들을 찾아 다니며 딸의 대학 입학 시험이라도 치루게 해달라고 사정했지만 모든 대학들이 거절했다고 한다. 그때의 절망감이 느껴졌다.

그런 부모의 절실한 마음이 결국엔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게 된다.

그후 찾아간 서강대 영문과 학과장이었던  브루닉 신부님은 "아니,  대학 시험은 머리로 치는 것이지 다리로 보는게 어디 있냐?" 면서 그녀의 대학 입학 시험을 승낙하게 된다.

열려있는 마음을 지닌 신부님의 감동적인  말씀이다.

만약 그 당시 브루닉 신부님께서 우리나라의 폐쇄적인 정책대로 처리 했다면 이후 장영희 교수는 '교수 장영희' 가 아닌 평생을 '장애인'이란  굴레를 벗어나지 못 했을 것이다.

아찔 하다.  한순간의 결정이 한 평생을 좌우 하게 된다는 게...

그렇게 그녀는 서강대 영문과에 진학을 하게 되고 후에 뉴욕 주립대 영문학 박사를  받게 된다.

그리고 결국엔 그녀는 자신을 받아준 서강대의  영문과 교수가 된다.

책의 마지막은 그녀가 척추암 진단을 받고  투병중에 쓴 칼럼인데 그냥 먹먹하다.

<뒤돌아 보면 내 인생에 이렇게 넘어지기를 수십번, 남보다 조금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가기에 좀 더 자주 넘어졌고, 그래서 어쩌면 넘어지기전에 미리 넘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 뜨린다고 나는 믿는다. p.334> 는 그녀의 고백에서 눈물이 맻힌다.

그녀는 책의 말미에 <문학은 인간이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나가는가를 가르친다>라고 했단 윌리엄 포크너말을 인용한다.

문학의 힘이 결코 허상이 아님을 보여주려고  넘어진 가운데 또 다시 일어나려는 그녀의 몸짓에서 진정 그녀의 강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범접할 수 없는  각오와 의지로 살아가고자 했던 작가가 믿었던  문학의 힘에 압도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내가 아마도 이 때문에 독후감을  쓰기가 어려웠던게 아닐까?



장영희 교수의 삶을 생각하니 중국의 작가  한명이 떠오른다.

중국의 현대 작가중에 '모엔''위화'의 명성 보다는 못하지만  사철생(史铁生:1951~2010) 이란  작가가 있었다.

장영희(1952~2009) 교수와 비슷한 연령대로 같은 시간대에  비슷한 장애를 가지고 살다 갔던 작가이다.

사철생은 중국의 문화혁명 시기 때 뜻하지  않게 하반신 불수가 되어 버린다.

이때 부터 자신의 뜻하지 않은 운명을 원망하고  늘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그는 늘 휠체어를 타고 자신의 집에서 가까운 지단 공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 시절 그는 아무일도 없지만 늘 공원 구석 구석 돌며 관찰하고 사색 했다.

그의 대표작인 '나와  지단(地坛은 '디탄' 이라 발음,  지단은 청나라 시기 북경에서 토지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을 말함. 참고로 천단은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을 말함 )(我与地坛) 에서 이런 말을 한다.




<나는 몇 시간 동안 진심으로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또한 그와 같은 인내심과 사유의 방식으로 내가 왜 태어 났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이렇게 몇 년을 생각한 후 마침내 깨달았다.

한 사람이 태어난다는 것, 이것은 변론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였던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이 주신 하나의 사실이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생명을 주는 동시에 순리에 따른 그 결과까지도 보증한 것이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것은 급하게 바래서 되는 일이 아니였던 것이다.  죽음은 반드시 오게 되는 명절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 졌다.  눈앞의 모든 것이 다시는 두렵지 않게 되었다.....>  나와 지단 중에서.



그는 그에게 닥친 시련과 운명을 거부 하지 않고 그 운명에 따른 삶을 선택한 셈이다.

그도 역시 어쩌면 장영희 교수가 생전에 가졌던 문학의 힘을 믿었으리라 짐작 되어진다.

장영희 교수의 목발과 사철생의 휠체어.

그들에게 있어 목발과 휠체어는 평생 동안 장애를 상징하는 도구 였지만 동시에  장애를 극복하는 용기와 희망의 상징이 아니였을까?


그래 문학의 힘, 나도 한번 믿어 보자


문학은 삶의 교통 순경이다. 문학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진정 사람답게 제대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지킨다. - P43

애지,욕기생(爱之,欲其生)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살게끔 하는 것이다. - P71

애당초 글을 쓰지 않고 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꼭 써야 한다면 무조건 써라.
재미없고 골치 아프고, 아무도 읽어주지 않아도 그래도 써라.
전혀 희망은 보이지 않고 남들은 다 온다는 그 ‘영감‘이라는 것이 오지 않아도 그래도 써라.
기분이 좋든 나쁘든 책상에 가서 그 얼음같은 냉혹한 백지의 도전을 받아 들여라 -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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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7-04 22: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알라딘에서 첫 구매한 책이 장영희 교수의 이 책 입니다.
이 책, 너무 좋죠!
언젠가 재독할 책입니다^^

마힐 2024-07-05 11:31   좋아요 0 | URL
저도 두고두고 볼려고 책장 넘길때 조심조심 넘겼어요.
다른 책들은 온통 형광펜에 밑줄 끗고 난리도 아닌데...
 
삼국지 세트 - 전10권 삼국지 (민음사)
나관중 지음, 이문열 엮음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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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삼국지

지은이: 나관중 지음/ 이문열 평역

   : 불멸의 시간 동안 불려질 의()를 위한 노래

 

 

 

 

'마크  트웨인(1835~1910)' 이란 작가는  '고전은 누구나 잘 알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책' 이라고 했다.

아마도 그 비유에 들어 맞는 책중의  하나가   삼국지(三國志)가 아닌가 싶다.

삼국지 덕후들에게는  동의가  안되겠지만  적어도   나에게 삼국지는 너무나 잘  알지만 50이 다 되도록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는 책중의 하나였다.

 

 

 

나에게 삼국지는 살아오면서 인형극이나  만화 그리고  드라마, 영화 속의 장면들을 통해 머리통 속에 짜집기 된 이야기들이 전부였다.

그래서 책으로 굳이 읽지 않아도  삼국지의   거의 모든 내용을 대충 다 안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솔직히 책으로는  읽어볼 엄두가 안났다고 하는게 맞다.

왜냐면 책으로 읽기에는  삼국지는 진입 문턱이 너무나 높기 때문이다.

일단 요약본이 아닌 제대로 된 삼국지는  한 두권만으로 전 내용을 담아 내질 못한다.

이번에 읽은 <이문열 평역 삼국지>만 해도 10권이다.

제대로 편역, 번역한 다른 작가들의  책도 거의 10권 정도 수준이 기본이다.

내용이 방대하고 등장 인물도 일반적인 다른 소설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일단 주인공으로 치는 유비, 관우, 장비를 비롯해서 제갈량, 조조, 손권 같은 역사 속의 주인공 급 인물만 해도 수십명이나 된다.

게다가 매 에피소드 마다 등장하는 조연급   인물도 수십명이 훨씬 넘는다.

또한 잠깐 등장 하는 조연이라도 캐릭터의 서사 까지 있어서  정독하지 않으면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된다.

아마도 이런 높은 진입장벽 때문에 제대로  된 삼국지를 읽어 보려는 엄두가 안났던 것 같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일단 삼국지를 제대로  한번 정독을 하게 되면 삼국지 덕후로 거듭 나게 되는 것 아닌가 싶다.

왜 삼국지 덕후들이 삼국지를 고정된 한가지   판본만 읽는게 아니라 여러 버젼으로 읽게 되는지 이해가 되는 것이다.

내가 이번에 어쩌다 이문열  평역 삼국지를  읽어 보니 '왜 이제서야 읽게 되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삼국지의 가치가 새롭게 느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대부분 삼국지 하면   '삼국지'라고   부르지만 삼국지의 본토, 중국에서는 '삼국연의(三國演義)' 라고 부른다.  

'삼국' 뒤에 '' 를 빼고 '연의' 를 넣는 것이다.

원래 연의(: 멀리 흐를 , : 옳을 ) 란  말은 역사적 사실을 대중들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는 소설이란 뜻으로 썼다고 한다.

 

 

 

내가 25년 전 처음 중국에 왔을 때 어느날  TV를   보는데 어느 한 프로에서 사람 혼자 나와서 삼국지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이야기꾼 한명이 부채 하나를 들고 나와서  삼국지의 각각 에피소드를 마치 구연동화 (口演童話) 하듯이 들려주는 것 이었다.

이야기꾼은 삼국지의 모든 내용을 혼자서   상황 연기와 말빨로 풀어내는 것 이었다.

그때 그걸 보면서 '와  대단하다. 저걸  어떻게 다 외워서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식으로 연의란 뜻은 '어려운  역사적 사실을 쉽게 풀어서 대중들에게 알기 쉽게 공연(?) 해주는 데서 유래 된 것' 이라  이해하면 되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연의' 라는 말이 들어 가게 됨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항우와 유방의 천하 쟁탈전인  '초한지(楚漢志)' 는 왜 '초한연의' 라고  부르지 않는 것 일까?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니 삼국지와 초한지는 서로 같은 류의 전쟁 소설이지만 초한지는 삼국지에 비해 역사적 사실의 비중이 더 크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마천(BC 145~86)이 사기(史記)에서 정사(正史)로 확실히 자세히 남겨 놨기 때문에 초한지를 소설적 허구라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결국 유방과 항우의 이야기는 '7푼 사실, 3푼 허구' 로 불리는 삼국지 보다 허구가 거의 없기 때문에 '초한연의' 란 제목을 쓰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중국에서는 삼국지 하면  '위나라 진수(233~297)'가 쓴 실제 역사 삼국지, 즉 정사(正史) 삼국지'를 가르키고 '나관중(1330~1400)'이   쓴 소설은 '삼국연의'라 구분하여 부르게 되는 것이다.

 

이번에 이문열 삼국지 평전을 읽으면서 삼국연의를   쓴 작가 나관중이야 말로 진짜 천재라는 생각이 읽는 내내 들었다.

이문열 작가가 평역이란 형식으로 잘 풀어냈고  1990년대 출간 이래 오랜 시간 동안 여러 삼국지 판본들 중 가장 대중적으로 읽힌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데  내게는 약간의 아쉬운 점도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인데 이문열 작가가   평역을 하며 쓴 문장들은 그의 명성에 비해 너무 평범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예전에 읽었던 일본 소설가 '야마오카 소하치(1907~1978)' 가  쓴 도쿠가와 이에야스 일대기인 <대망> 하고 자꾸 머리 속에서 비교가 되었다.

대망속의 일본 작가의 문장력에 감탄을 하며   필사하고 싶을 정도로 너무 좋았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물론 이문열 작가는 원본인 한문을 그대로   번역해야 하는 점 때문에 자신의 문장력을  표현 하려면 분명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단순히 그런식으로 두 작가의 비교  자체가 당연히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평역은  원문 번역을 작가적 역량으로 재해석 하는 것이라 작가 명성에 맞는 필력으로  독자의  마음을 파고 들 수 있는 구절이 눈에 띄지 않다는 것에 살짝 아쉽긴 했다.

어쩌면 그만큼  원전을 뛰어 넘는 다는 것은 무척 어렵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나관중이 더 대단하게 느껴진 것   같다.

아무리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썼다고 해도   어떻게 이런 방대한 내용을 소설이란 형식에 다 담아 낼 수 있었을까 하는 감탄만 들었다.

 

 

 

 

소설속에는 충()과  의()라는 대의명분과 전쟁를 이기기 위한 전술과 병법  그리고 그 과정중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온갖 권모술수가 등장한다.

인간 관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이해관계가 얽히고 섥혀 있다.

이러한 내용을  어릴때 봐서는 이해가 안되는 것이 당연하다.

고전이 어렵다는게 고전을 읽을때 나이와   경험치에 따라 이해의 정도가 달라 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국지 같은 고전을 제대로 이해 하려면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읽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게 아닌가 싶다.

 

 

 

 

삼국지를 가장 간단히 시간적으로 정리한다면  한나라 말기 183년 부터 282년 까지 딱 100년의 역사를 담아낸 것이다.

전체 100년의  역사는 183년에 발생한 황건적의 난에서 부터 삼국지는 시작된다.

그로부터 50년의  시간안에 우리가 잘 아는 유비,조조,손권을 중심으로 소용돌이 처럼 휘몰아 치는 삼국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러다가 232년에  제갈공명이 6번째 북벌중에 오장원에서 큰 별이 되어 지고 만다.

여기에서 삼국지 내용의  90프로가 끝이 나버린다.

이후  50년의 시간을 나머지 10퍼센트  이야기로 채운다.

그 나머지 내용은 제갈량이 죽은 시점 232년에서 30년 후 서촉(西蜀)이 망하고(262) 다시 2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북위(北魏)와   동오(東吳) 282년에 망하면서 삼국지의 100년  이야기는 끝이 난다.

어찌 보면 뒤의   50년은 앞의 50년과 비교하면 허탈하단 생각 마저 든다.

삼국지의  무대가 되는 실제 역사속 시간(183)은   지금으로 부터 약 1800년 전이다.

나관중이 소설로 쓴 시점(650년 경)은 실제 역사에서 이미 1200년이나  지난 시점이다.

1800년전의  역사적 사실과  그 이후 1200년 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민간의 설화가 나관중에 의해 첨부 삭제등의 과정을 거치며 연의가 완성이 된다.

결국 시간적 차이로 인해  실제 역사와 소설은 당연히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때문에 많은 삼국지 덕후들은   실제 역사 즉 진수의 정사와 나관중 소설의 차이를 비교 분석해 가며 읽는데 집착하게 되는 것같다.

 

 

 

이문열 평역에서도 차이가 있는 부분들에 대한  비교 설명이 되어 있다.

연의에서 말한 내용은 실제 역사에서는 있다, 없다 , 혹은 맞다, 틀리다로 비교 부연 설명을 한다.

바로 이 점이 바로 수많은 작가들이 삼국지를   번역하고 평역을 시도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 예로 유비의 촉한 정통론이란 시점에서는  한 황실의 정통을 잇는 유비는 좋은 편, 그에 반에 조조는 간웅으로 보는 편향된 시각이 대세 였었다.

그런데 현대 시대에는 시대의 가치관이 변하자   과거의 편협된 시각에서 벗어나 조조에 대한 재평가나 손권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세월이 지날 수록  수 많은 삼국지 덕후를 양산해 내는 것 일지도 모르겠다.

 

 

 

삼국지는 어쩌면 내용을 몰라서 읽는 책이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더 큰 의미가 있는게 아닐까?

그 내용을 넘어선 어떤 가치, 즉 삼국지에 등장 하는 수많은 영웅들의 이야기나 인간 관계 ,처세술, 전략 같은 것을 넘어서는 더 큰 가치가 있는 것이다.

내가  조심스레 살펴보니 삼국지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의()가   아닌가 싶다.

삼국지가 1800년 동안 끊임없이 재생산 하는 이유는 에   대한 가치를 부여한 작품이란 것이다.

 

 

 

이에 대해 삼국지 보다 약 700년 앞선 2500년전에 나온 <논어>를 먼저 거론 해야 겠다.

논어에서 말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시 하는 사상은 '()과 의()' 사상 이다.

물론 충효예(忠孝)도   공자가 강조 했지만 그럼에도 유교의 핵심은  '인과   의'를 가장 중시한다.  '인과  의' 안에 충효예가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공자가 말한 인은 수양(修養)을 통해 성인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그래서  ( 어질 인)은 다분히 개인적으로 갈고 닦아야 하는 영역에 속한다.

하지만 의( 옳을 의)는 개인의 영역 보다 남들과의  관계에서 더 중요시 된다.

우리가 만약 의리를 지킨다 한다면 그것은   남과의 신의를 지킨다는 뜻이고 , 의를 저버렸다는 것은 남을 배신  한다는 것을 뜻한다.  

나의 는   즉, 나의   옳음은 반드시 타인과의 관계에서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의는 관계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항상   옳은 것 끼리 뭉쳐서 집단을 형성 하는 경향이 있다.

각자의 옳음은 서로 비슷한 옳음끼리  뭉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비를 중심으로 모인 집단, 조조를 중심으로 모인 집단, 손권을  중심으로 모인 집단이 형성이 되는 것이다.

그들 모두는 각자 옳음의  대의명분(大義名分)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삼국지의 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의리(義理)를 말한다는 것인가? 나는 그렇다고 본다.

 

 

 

내가 본 삼국지의 (옳을 의)는 즉 '옳다는 가치' 를 내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 였던 것이다.

유비도 조조도 손권도 모두가 각자가 옳다는  를 가지고 천하를 다투었다.

아니 삼국지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각자의  옳음 , 즉  를 지니며 등장했다.

누구는 도원결의로 의를 지켰고 누군가는 의를 저버리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 했다.

관우는 유비에 대한 의리 때문에 조조를  떠나기도 했고, 조조와의 의리 때문에 죽여야 할 조조를 살려 줬다.

제갈량은 삼고초려한 유비와의 의리를 지키고자   여섯 번이나 북벌을 추진 했다.

조조 또한 자기 나름의 옳음()을 가지고 쓰러져 가는 한() 황실을   지키고자 했다.

 

 

 

이러한 관점으로  삼국지를 본다면 덕후들이 집착하는 삼국지 내용 중 어떠 부분은  사실이네, 지어낸 허구 였네 같은 비교 평가에서 벗어 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의를 지키는가 지키지 못한 것인가의  시점으로 보면 좋은 놈, 나쁜 놈의 구분은 없어진다.

이는  각자의 신념에 따라 자신의 옳음 ()을  믿었기 때문이다.

 

 

 

 

결국 삼국지는 를 위한 노래와 다름 없다.

삼국지가 부르던 의()의   노래는  1800년전   과거에서 부터 현재를 거쳐 다시 미래에 까지 불려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삼국지는 불멸의 작품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演義연의, 멀리 흘러 가는 !

인걸은 이미 가고 없지만, 시간만이 멀리서 부터 끝 모르게 흘러 간다.

도도히 시간속에 함께 흐르던 는 노래가 되어 되돌아 흘려 부른다.

시공간을 하나로 잇는 演義 !

과연 어떤 영웅들이 새로 태어나 다시 이어 부를까?

 

 

조조는 일생을 남에 대한 의심으로 고통 당했지만 자신을 향한 믿음에는 결코 흔들림이 없던 사나이 였다. - P84

유비를 힘으로 이기고 말 재간으로 속이고 학식으로 억누른 뒤에도 항상 그 상대로 하여금 정말로 지고 속고 밀린 것은 자기자신 이라는 느낌에 젖게 하는 어떤 것이 유비의 크고 환한 정신에서 우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 P129

정의일지라도 지나치게 독선에 흐르면 화가 따른다. - P230

대저 가장 못한 치자는 주식과 재물을 탐내고, 그 윗 길은 땅을 탐하며 가장 나은 치자는 사람을 탐한다고 한다. - P290

대저 영웅이란 간교함(奸)과 흉폭함(凶)과 꾀많음(計) 과 표독스러움(毒)을 다 품어야 한다던가

사고 팔았던 사람들의 사이는 거래가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난다.
그러나 주고 받았던 사람들의 사이는 그 주고 받음이 끝나도 이어지는 그 무엇이 있다.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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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노인과 바다 (양장) - 1952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수정 옮김 / 더스토리 / 202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책 제목: OLD MAN AND THE SEA

지은이: HEMINGWAY

   :  헤밍웨이와 가상 인터뷰

 

마힐: 안녕하세요. 헤밍웨이(1899~1961) 작가님, 전 마힐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선생님의 <노인과 바다> 를 읽었는데요. 독후감을 쓰려다 차라리 선생님을 초빙해서 가상 인터뷰를 진행 하고자 합니다. 괜찮으시겠지요?

 

 

헤밍웨이: 물론요. 상상속에서 존재하는 인터뷰인데 뭐가 어렵겠어요?

 

 

 

마힐: 그럼 오늘은 몇가지 작품 속의 내용과 관련해서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작품 배경이 쿠바 이던데요. 왜 하필 쿠바로 배경을 정하신 건가요?

우리에게 쿠바는 체 게바라의 나라, 공산 국가, 야구 최강의 나라로 알려 졌거든요.

전 작품속 배경이 쿠바라는 걸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어요.

 

 

헤밍웨이: 체게바라(1928~ 1967)와 피델 카스트로(1926~2016)가 쿠바에서 공산 혁명을 한 것은 1953년 이후 일이에요.

전 그전에 1939년에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 살았었죠.

내가 <노인과 바다>를 내놓은 것은 1952년 이에요.  

작품속 배경은 공산 혁명 하기전의 시기 쿠바 배경이라 보면 되고요.

쿠바는 미국의 플로리다주 바로 아래에 있는   섬나라예요. 아마 대한민국 면적하고  비슷 할 꺼예요.

원래 쿠바가 스페인 식민지 였어요. 그런데 1898년에 미국이 도와줘서 쿠바가 독립을 하게 돼요. 그래서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50년대 전까지는 미국과 쿠바 사이가 지금 처럼 적대적 관계가 아니였어요.

그래서 그 시기의 쿠바는 미국 본토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제 작품속에 메이저리그 경기 소식이 나오는 것이 다 그 때문이죠.

그 당시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 리그의 인기가 쿠바에서도 최고였죠.

나중에 쿠바 혁명을 성공한 피델 카스트로도   혁명 전사가 안 됐었다면 야구선수가 되었을 거라고 하지 않았나요?

아마도 그 때문에 쿠바가 나중에 아마추어 야구 최강이 된 이유가 되기도 하는 거죠.

 

 

 

마힐:, 그래서 작품속에 '양키스는 지는 법이 없어. 양키스를 믿어라.  위대한 디마지오가 있잖니 ? 하는 대사가 나오는 군요?

 

 

 

 

헤밍웨이: 맞아요. 노인이 가장 우상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 양키스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1914~1999)'예요.

조 디마지오는 1936~1942년 과 1946~1951년 동안 모두 13시즌을 뛰는데 원클럽 맨이라고 해서 은퇴할 때 까지 줄곧 뉴욕 양키스, 한팀에서만 뛰었죠.

그가 있는 동안 양키스는 월드 시리즈 우승 9번 과 자신은 리그 MVP 3번을 받았고 지금 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 56경기 연속 안타 기록을 세운 대단한 선수였죠.

그래서 디마지오가 있는 이상 양키스는 절대로  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생긴거죠.

 

 

 

마힐: 아 그렇군요. 디마지오가 당시 시대에선 엄청난 선수였군요. 그래서 노인이 그렇게 우상화한 것 이였군요.

 

 

헤밍웨이: 우상화란 표현 보다는 존경을 넘어선 경배하는 마음이 강했다고 하는게 좋겠어요. 사실 우리 주위에 어떤 영역에서도 독보적인 성취나 경지를 보여 주면 우리는 그사람을 경외하고 존경 하잖아요. 아마 노인에게 디마지오는 그런 사람 이었던 겁니다.

또 노인을 존경하는 소년도 노인을 그렇게   존경하잖아요.

누구든 누군가를 존경하면 또 경배 하게 됩니다.

 

 

마힐: , 맞습니다. 누군가를 존경한다는 것은 나도 그 사람을 닮고 싶다는 마음도 같이 있는 것 같아요. 소설에서 소년이 노인을 존경하는 마음이 참 지극해서 마치 스승과 제자와 같이 느껴지더라구요. 소설에서는 노인이 84일동안 물고기를 낚지를 못하는 얘기로 시작 하는데요. 그래도 소년은 노인이 꼭 물고기를 잡게 되리라고 믿더라구요.

그런데 왜 하필 노인은  84일 동안   물고기를 잡지 못했을 까요?

 

 

 

헤밍웨이: 그래요. 사실 84일에 뭐 특별한 의미는 없어요.

그전에 노인이 소년과 함께 87일 동안 물고기를 잡지 못한 적도 있었죠. 그러다 88일째 대박을 터드려 3주 내내 만선이 됐고요.

우리 인생도 순조롭지 않잖아요. 꼬일때로 꼬이는 것도 정상 아닌가요? 맨날 바다에 나가 만선을 채울 수 있나요? 그렇게 안좋다가 또 좋아지기도 하는게 인생인거죠.

그래서 노인은 삶의 경험치가 있으니 조급하지 않죠. 소년도 그런 노인을 믿는거죠.

 

 

 

마힐: , 그렇군요. 그런데 노인은 왜 어부라는 직업을 가지게 되 건가요?

 

 

 

헤밍웨이: 어부 라는 직업은 태생 부터 정해지는 직업중 하나가 아닌가 싶어요.

쿠바는 섬나라 예요.  그곳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바다와 맞닿을 수 밖에 없죠.

책에는 어부라는 직업이 예수님 제자 베드로도 어부 출신이고, 디마지오 아버지도 어부 출신이라고 표현해서 미화 했지만 우리 인류가 수렵 채집 시기 때부터 시작해서 가장 원시적 직업으로 현재까지 남은게 어부라는 직업이 아닌가 생각 됩니다.

제가 쿠바에 살때 바다를 보면 제 남은 인생을 어부로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그래서 내가 만약 어부가 되었다면 어땧을까 생각해 본거죠.

 

 

 

마힐: 그럼 노인은 작가님 자신의 분신으로 작품속에 투영 시킨 건가요?

 

 

 

 

헤밍웨이: , 사실 그렇죠.

당시  내가 쿠바에 살 때는 40대 였거든요.

사실 제 실제 노년은 62살에 끝을 맺죠.

작품속의 노인은 대략 60대라 보면 돼요. 내가 만약 쿠바에서 어부로 태어나 생을 마감하게 된다면 소설속 노인 산티아고 처럼 살게 되리라 생각 했어요.

젊을적 산티아고는 능력있는 어부였어요. 아마 행복 했을 거예요. 결혼도 했지만 자식은 없었죠. 그래서 이웃의 소년을 아들 처럼, 또 손자 처럼 사랑했던 거죠.

노년이 되면 참으로 외로워 지죠. 더구나 젊을 적에 '엘 캄페온(EL CAMPAON: 참피온 스페인어 )' 으로 불렸던 강했던 몸도 쇠해지게 되죠.

그럴때 모든 것이 변했다고 느끼겠죠.  이때 또 84일 동안 고기를 한마리도 잡지 못 하잖아요?

그렇지만 노인은 희망을 버리지 않죠. 

그러다 마지막 자신의 삶의 불꽃을 일으켜줄  강력한 동기가 나타난 거죠.

그렇게 노인은 티뷰론(TIBURON: 상어 스페인어) 을 잡아내죠.

제 실제 삶도 같아요. 저도 이 작품을 쓰기전에 이미 능력있는 작가라 칭송 받았죠. 하지만 늘 새로운 작품을 쓰지만 그게 다 히트 합니까? 저도 혹평을 당하기도 했었죠.

그렇게 저도 나이를 먹고 있었던 거죠.

그러다 <노인과 바다> 란 티뷰론을 잡아낸 것 아니겠어요? 

 

 

 

 

마힐: 저도 그점에서 감동 했어요. 특히 티뷰론을 잡아내는 장면들 묘사에서 노인 혼자 고군분투(孤軍奮鬪) 하잖아요. 그것도 잠도 못자면서 힘겹게 낚시대를 들어 올리면서 소위 밀당 하는 것 처럼 낚은 고기를 낚시줄로   풀어주고 다시 당기고 내가 직접 고기를 잡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몰입감이 상당하더라구요.

특히 낚시줄에 손이 베여 피가 나오는 장면은 내 손이 베인 것 처럼 손이 쐐~ 했어요.

 

 

 

 

헤밍웨이: 맞아요. 원래 인생은 외롭지요.  고군분투 하는거죠.  홀로 낚시대를 잡고 물고기와 다투는 거와 뭐 다를게 있나요?

 

 

 

 

마힐: 그렇게 물고기를 잡아낼 때 노인은 늘 소년을 생각 하잖아요. '그 아이가 옆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아이가 여기 있으면 좋을텐데... ' 하면서 낚시대를 잡고 있으면서 여러번 떠올리잖아요? 그것도 외로워서 그런거죠?

 

 

 

 

헤밍웨이: 노인이 외롭다기 보다는 , 사실 늙으면 다 외롭습니다.

그보다 소년과 노인은 서로 무한한 신뢰와 믿음으로 연결 되어 있어요.

작중 초반에 노인이 살라오(SALAO: 불길한 스페인어) 가 됐다고 믿는 소년의 부모에 의해서 소년을 노인에게서 떼어 놓게 되죠.

소년은 어쩔 수 없이 노인과 헤어지게 되는 거죠. 하지만 소년도 그렇고 노인도 서로 굳은 신뢰와 믿음을 가지고 있었죠. 소년이 5살때 부터 노인을 따라 다녔잖아요?

소년은 노인을 최고의 어부로 믿었고 늘 배워야 된다는 마음이었던 거죠.

또 노인에게 있어 어부 인생 최대의 대어를 낚는데 같이 있어 지켜 봐주고 도와줄 소년이 절실했겠죠. 또 자신이 별난 노인이었음을 입증 하고 싶었죠. 그리고 함께 그 영광을 보고 누렸으면 했겠죠. 그래서 더욱 찾은 것 이고요.

 

 

 

 

마힐: 그런데 그렇게 힘겹게 잡은 티뷰론을 왜 다른 상어떼 한테 전부 뺏았기게 되나요? 결국 노인이 집으로 돌아오지만 남은건 뼈 밖에 없잖아요? 너무 아쉽지 않나요?

이점은  소설적 장치 인가요?

제가 노인 이었다면 참으로 억울 할 것 같아요.

 

 

 

헤밍웨이: 이건 소설적 장치라기 보다는 현실을 담아 낸 거예요.

노인이 물고기를 무사히 잡아와서 제대로   팔면 큰 돈을 벌 수 있으리라는 순진한 생각은 하지 마세요.

오히려 성한 물고기를 팔아 돈을 버는 것은   재미도 없구요. 또 피 냄새 맡아 쫓아오는 상어떼가 없다는 게 더 비현실적이에요.

현실은 바다 한 가운데서  상어떼와  사투를 벌이는 겁니다.

물론 상어떼에게 모두 다 뺏았겼다고 생각 할 수도 있죠. 또 실제로 그렇구요.

 

'인간은 패배하게 만들어지지 않았어. 인간은 파괴당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 않아.'

작품속에서  잡은 물고기를 지키기 위해 상어떼와 사투를 벌이며 노인이 이렇게 말 하잖아요? 하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던 건 아니었죠.

잡은 물고기 뼈는 남게 되잖아요.  5.5미터 대형 물고기의 뼈 잔해.

노인이 젊을 적 팔씨름으로 하루 날밤을 새우고 '참피온' 이란 칭호를 사람들에게 받게 되잖아요?

노인의 본래 참피언이었음을 말년에 다시 한번 증명 한 셈이 된거죠.

비록 뼈만 남았지만 뼈를 통해서 우리는 그 노인이 얼마나 고군분투하며 잡아낸 것이라고 믿게 되잖아요?

그러니 소년은 그 뼈를 보지도 않고 알죠. 그리고 눈물을 흘리 잖아요.

이 눈물에서 진심어린 노인에 대한 존경이 느껴지죠.

 

 

 

마힐: 동화 같은 결말은 아니지만 충분히 현실적으로 가능한 얘기 였네요.

그런데 작품 제목이 왜 <노인과 바다> 인가요? 노인이 주인공이라서 노인이 들어 가는건 이해가 가는데 왜 바다를 넣었을 까요? 노인과 소년, 혹은 노인과 티뷰론, 노인과 상어떼 , 어부와 물고기, 또 디마지오를 사랑한 노인등등 같은 제목도 지을 생각은 없었나요?

 

 

 

헤밍웨이: , 좋은 질문 입니다. 소설에서  한번 설명이 되어 있는데요. 노인은 바다를 라 마르(LA MAR) 라고 여성형 스페인어로 바다를 좋게 표현할 때 쓰는 말로 부르죠.

바다를 남성형 엘 마르(EL MAR)라 부르는 부류도 있지만 노인에게는 바다는 여성을 상징하죠. 바다는 만물이 기원(起源)하는 생명의 공간이죠. 바닷속에 얼마나 많은 생명이 살고 있나요?

바다는 생명을 잉태하는 공간이자 또 죽음의   공간이기도 하죠.

여성 처럼 변덕을 부릴 때도 있죠. 파도가 치고 폭풍이 불고, 그래서   바다를 속셈을 알 수 없는 여성 처럼 대하는 거죠. 게다가 바다는 달에 영향을 받잖아요. 우리 여성이 월경을 하는 것 처럼 바다와 달, 그리고 여성은 하나로 이어지는 거죠.

바다에서 노인이  상어떼와의 사투에서 패배했나요?

노인이 이러잖아요. '아무것에도 패하지 않았어.', '그저   내가 멀리 나갔을 뿐이야'  

바다의 입장에서 노인이 티뷰론을 잡았든, 상어떼에 다 뜯겨 먹었든, 다   자신의 몸에서 벌어진 일 입니다. 파도가 치고, 폭풍이 몰아쳐도 다 바다에서 일어난 일이죠.

파도가 폭풍이 바다를 지배할 수 있나요?

바다는 큰 의미를 담고 있죠.

노인이라는 인간과 바다라는 거대한 공간, 그 공간에서 노인은 태어나고 자라며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포함하는 공간이 되는거죠.

 

 

 

 

마힐: <노인과 바다> 단순한 제목이라 생각 했지만 뭔가 좀 더 심오 한 면이 있네요.

마지막 질문인데요. 작가님이 작품을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뭔가요?

노인의 마지막 불꽃 같은 열정을 보여 주고자 한 건가요?

 

 

 

 

헤밍웨이: 전 사실 노인이 바다에서 마딱드린 고난과 역경을 이기는 그런 의미 보다는 믿음을 이야기 하고 싶었어요.

작품속에는 많은 믿음들이 있어요.

자신이 은퇴할 때 까지 양키스에서만 뛴   디마지오의 팀에 대한 믿음,  양키스는 절대 지지 않는다는 노인의 믿음, 오늘도 디마지오가 안타를 치리라는 믿음, 디마지오가 발 뒤꿈치 가시 뼈가 아픔에도 견뎠듯이 자신도 왼손의 고통을 이겨내리라는 믿음, 그리고   노인 산티아고 에 대해 소년 마놀린의 순수한 존경의 믿음 들이 있죠.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이끌어 가는 셈이죠.

시련과 고통도 다 믿음을 시험하는 거잖아요.

노인이 한평생 쿠바 바닷가를 벗어난적이   없는데 아프리카의 사자를 본 적이 있나요?

그러나 꿈속에서 백수의 왕 사자를 보잖아요. 사자는 노인 자신인거죠.

자신에 대한 믿음을 뜻하는 거죠.

그래서 전 역경 고난을 극복한 노인의 서사보다 바다에 벌어지는 믿음에 대한 서사라고 봅니다.

전 노벨상을 운 좋게 받았지만 사실 많은   위대한 작가들은 은연중에 믿음을 말합니다.

제 작품속 노인과 비슷한 연령대 주인공으로 나오는 작품을 예를 들면요.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에서 싯다르타를 보면요,

싯다르타의 말년은 제 작품의 노인 산티아고와 비슷한 나이 대에요.

그 작품 마지막 부분에서 말년의 강가에서 싯다르타와 뱃사공간의 믿음은 어떤가요? 서로간의 믿음이 곧 자신의 믿음이지 않았나요?

또 니코스카잔차 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와 주인공인 '두목' 과의 믿음은 어땠었나요? 광산을 말아 먹었어도 그 둘의 서로에 대한 믿음은 끝까지 가지 않았나요?

결국 인간에게는 서로간의 믿음과 자신에 대한 믿음이 가장  절실하지   않나 싶습니다.

 

 

 

 

마힐: , 그렇게 이해 할 수도 있겠군요.

앞으로 작가님의 다른 작품도 기회가 된다면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이렇게 독후감 인터뷰 소환에 응해 주셔서 감사 합니다.

 

 

 

헤밍웨이: , 문학은 주관적인 세계를 표현한 겁니다. 객관적일 수가 없어요. 해석은 각자의 영역입니다. 맞고 틀리고가 없는 거죠. 제가 표현한 서사는 제 생각을 벗어난 영역이 되면서  독자는 달리 해석 할 수 있는 겁니다.

어찌 이 우주에 똑 같은 별이 있을 수 있나요? 같은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것 같아도 결국 다 다른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나를 떠나서 존재하는 세계는 없습니다.

 

 

 

마힐: 해밍웨이님. 저의 지면 관계상 이렇게 아쉽게도 끝을 맺어야 하네요.

다음번에 소환해서  좀더 깊은 대화를 나누는 걸로 하겠습니다. 오늘  인터뷰 감사 했고요. 저승에서 잘 지내시고요.  안녕...

 

 

<디마지오의 56경기 연속 안타 기록. 불멸의 기록이 되었다.>

 

 

 

양키스는 지는 법이 없어. 양키스를 믿어라. 위대한 디마지오가 있잖니 - P17

퀘바(Que Va) 천만예요. 고기 잘 잡는 어부도 많고 실력이 월등한 어부들도 있긴 있어요. 그래도 할아버지는 독보적이에요. - P26

사자들은 황혼 녘이면 새끼 고양이처럼 뛰놀았고 노인은 소년을 사랑하듯 사자들을 사랑했다. - P28

나는 자신감을 가져야 해. 발뒤꿈치 가시 뼈가 몹시 아플 텐데도 모든 걸 완벽하게 해내는 위대한 디마지오 처럼 나도 훌륭해져야 한단 말이지. - P82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게 만들어지지 않았어. 노인이 말했다.
인간은 파괴당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아. - P127

"그놈들 한테 내가 졌어,마눌린" 노인이 말했다.
"놈들에게 제대로 지고 말았어"
"그 물고기 한테 지신 건 아니예요. 그 물고기는 아니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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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6-25 16: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힐님!
가상 인터뷰 기사 잘 읽었어요😄😄
저도 7월엔 ‘노인과 바다‘를 한 번 정독해볼까 생각하고 있는데
인터뷰 내용, 참조하겠습니다^^

마힐 2024-06-26 16:51   좋아요 1 | URL
전 ‘양키스를 믿어라‘ 에서 꽂혔는데요. 페넬로페님은 어느 부분에서 꽂힐까 기대가 됩니다.
 
낭송 전습록 낭송Q 시리즈
왕양명 지음, 문성환 풀어 읽음, 고미숙 기획 / 북드라망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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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낭송 전습록

지은이: 왕양명/ 문성환 풀어 읽음/ 고미숙 기획

   :  저는 감히 소인의 마음으로 주자를 섬기지는 않았습니다.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이 사용했던 멸칭 중에  '사문난적' 이란  표현이 있다.

사문난적(: 이 사 文: 글 문 亂: 어지러울 난 賊: 도둑 적), 지금 시대로 말하면 '쌍놈의 시키'  와  비슷한 뜻일 것 이다.

 

 

유학(儒學)은  본래 2500년전 공자(b.c 551~479) 에게서 나왔지만  당시엔 혼란한 춘추전국시대의  수많은 사상, 즉 제자백가 사상들 중의 하나에 불과 했다.

그러나 유방에 의해  통일된 한나라가  유학을 국가  통치이념으로 삼게 된 이래로 역대 중국의 왕조에서는 유학을 국가의 공식 학문, 즉  관학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특히  공자 시대의 유학을 송나라 때 주자(1130~1200)가  재해석한 신유학을 만들어 내는데 이것이 주자학이 된다.

 

 

 

주자학은 곧 고려말기 우리나라의  신진 사대부들에  의해  받아들여져 급기야는  성리학의 나라인 조선을 세우게 된다.

조선의 유학은 학() 이라는  배움을 넘어서 교() 의  수준으로 격상하게 되는데 이때 부터는  거의 종교와도 같은 수준으로 믿게 되어진다. 

그렇게  조선의 유교는 주자학을  신봉했고  사대부들은  주자가 해석한 유교 경전 해석외에  다른 식의 해석은 용납하지 않았다.

그렇게 주자가 달아 놓은 사서(四書)의   해석서 외에는 전부 이단이라 칭했다.

그때 그런 이단의 학설을 멸시하는 호칭이 '사문난적' 이었던 것이다.

 

 

 

이번에 읽게 된 <낭송 전습록>은  조선 시대 성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사문난적과 같은  성리학의 이단 학설 '양명학' 에 관한 책이다.

양명학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전습록은 '왕양명' 과  그의 제자들 간 서로 나눈 대화들이  기록된 책이다.

공자의 <논어>와 같은 형식이라고 볼 수있다.

논어는 공자가 저술한 게 아니고 그 제자들이  스승 공자와의  일화나 대화를 공자 사후(死後)에 엮어 편집 했듯이  전습록 또한 왕양명이 직접 저술 한 책이 아니다.

 

그렇다면 전습록을 왜 성리학에서는 이단으로 보는 것인가?

사실 조선 시대 주자학을  종교 수준으로   신봉한 조선 사대부들의 변태 같은 믿음이 이단으로 규정한 것이지 양명학이 탄생한  명에서는 그런 분위기는  없었다고 보여진다.

 

 

 

왕양명(王陽明: 1472~1528) 의  본래 이름은 수인(守仁) 이고  자()가 양명이 된다.

양명학의 시조가 되는 왕양명을  깊이 알기  위해  나는 그의 시간과  공간을 우선 이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간적으로는 15세기후반과  16세기에 걸친 명나라와 세계 상황, 공간적으로는 그가 태어나고 자란 절강(浙江) 지역을  살펴 봐야 된다고 본다.(단지 내가 좀더 알기 위해서)

우선 공간적으로 보면 그의  출생지는  지금의 중국 절강성 '여요 (余姚) ()' 으로  현대 중국의 행정 구역상  영파(寧波: '닝보' 라 읽음) 시에  속한다. 이곳은  근대 국민당의  대만 총통 '장제스' (1887~1975) 태어난  지역이기도 하다.

 

 

 

영파 라는 지역은 지금의  상하이(上海) 하고  바다 사이를 두고 있는데 항주만 대교(杭州灣跨海大橋)가 놓여 있어  바다위에 35킬로가 넘는 다리로 연결 돼 있다.

이곳은 중국의 따뜻한  강남지역으로  삼국지에 나오는 옛 오나라 지역이 바로 이곳이기도 하다.

산과 벌판뿐인 북방에  비해 이곳 절강 지역은   따뜻하고 바다를 끼고 있어 농사뿐 아니라 해산물도 쉽게 얻어 역사적으로 부유한 지역에 속한다.

닝보는 중국의  동해에 위치하고 우리 나라 서해, 즉  황해와 마주보고 있다.

그래서 고대때 부터 무역을  발전 시켰고  신라시대 때에 교류했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우리 나라 심청전에 나오는  중국쪽 뱃사람들이   바로 이 지역 닝보 지역 사람을 말한다.

(  10년전 내가 닝보를 여행할 때 우연히  지나친 기념비속에 맹인 아비를 둔 신라에서  넘어온  여인이 아버지를  그리워 했고 그것이 심청전의 모티브가 됐다는 내용을 모고 깜짝 놀란적이 있다. )

또 이 지역 근처 주산(舟山)이란  곳이   있는데 그곳은 중국 불교 4대 성지인 보타산(普陀山)  관세음보살 성지(聖地)라 불린다.

관음보살이 그곳에서 중국 동해를  보살펴 준다고 그 지역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이처럼 왕양명이  자랐던 절강지역은  물질적으로는 부유한 지역 이였고 정신적으로는  개방적으로 교류하는 분위기의  풍토에서 양육 되었다고 보아진다.

또한 그 지역 신앙인  관세음 보살을 믿는   불교 신앙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짐작 되어진다.

물론 그가 정통 유학자를 자처 했기  때문에  불교도라고  보진 않지만 어느 정도 자신의  학파를 세우는데  적잖은 영향을 받은 것은 틀림 없다고 본다.

 

 

 

내가  이 책<전습록> 에서 주목한 것은 양명과 제자들과의  선불교적인 문답과 당시 자신이 느낀 불교의 한계를  유학으로 극복한다는  점이다.

그의  사상이 불교, 특히 선불교와 비슷해 보이지만 그는 확실히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양명학의 무엇이  선()과  비슷하고 무엇이 다른 것인가?

그것은 알기에 앞서 당시 시대 상황을 살펴 봐야 한다.

 

 

 

시간적으로 보면 양명이 살았던  시기는  15세기 말 16세기 초기로 서양에서는 한창 창발의 시대(1490~1530)라  불리는 시기와 겹친다.

이 시기 유럽은 신대륙 발견,  인쇄술이 보편화 되고, 전쟁의 기술이 발전하였고, 루터에  의한  종교 분쟁이  시작 되었던 시기였다.

이 시기 조선은 비교적 성군이였던  9대 성종과  개 망나니 였던 10대 연산군을 거쳐 11대 반정을 일으킨 중종 시기와 겹친다.

또 이웃 일본은 이때  오닌의 난을 시작으로  센코쿠 시대, 100년 전국시대에 돌입 했다.

이때는 한마디로 유럽은 아메리카까지  세력을   확장 하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조선은  그냥 우리끼리 볶닦거리며 정체 되고 있었고,  일본은 아예 나라 전체가 싸움판이 된 시기였다.

그나마  명나라는 그에 비해 큰 문제 없이 나름 평화로운 시기를 보낸 것 같다.

 

 

양명이 태어나고 자란 시기의 명() 왕조는  9대 황제 홍치제(재위 기간1470~1505)로 명나라 시기 몇 안되는 현군의 시대였다.

이후  10대 정덕제(재위기간 1505~1521)는  역대 중국 황제를  통털어 진짜 독특한  4차원의  사고를 가진 황제 였었다.

역대 황제중  가장 놀기를 좋아했다고 하는데   표방(豹房)이라고  불리는  자신의 놀이터를  만들어  표범이나 호랑이를 키우고  자신은 시녀들과 놀거나, 마음이 내키면  몰래 황궁을 빠져나와  몽고족하고 싸우러 전쟁터에 나가 직접 전투에 참여 했다고 한다.

 

원래 명이란 나라는 원()말 시기에  몽고족을  북방으로 내쫓은 탁발승 출신의 주원장(1328~1398)이 세운 나라였지만  명나라 시기 내내 몽고족은 완전히 멸망하지 않았다.

() 왕조가 후에 명을 정복하기전 까지  명나라 시기에는 끊임없이  명과 몽고는 충돌 했었다.

그 세력 다툼은 한때는 명의 황제(정통제)가   몽고 부족에게 사로 잡히는 수모( 토목의 변:1449)를  당하기도 하는 등  당시의 명나라는 북쪽으로는 몽고와 남쪽으로는  왜구들로 인해 골치가 아팠다.

 

 

 

따라서 정덕제가 전쟁터에 직접 나가서 뛸  정도로  명나라 국경은 항상 전투 대비 상태 였는데  곧 이 시기가  왕양명이 무장(武將)으로  전장(戰場) 을 떠돌 때의 시기 였던 것이다.

왕양명은  유학자 출신이지만  만명의 군사로  10만의 반란군을 진압했을 정도로  천재적 군사적 재능을 지닌 명나라의 선봉 장군이기도 했다.

 

 

정리 하자면 왕양명은 명나라 전장을 누비는  장수이긴 했지만 당시 나라 안의 분위기는  비교적 자유로왔고  그 속에서 그의 유학은 독창적인 사상으로 발전 된 것이라 보아진다.

적당히 긴장하고 또  적당히 평화로운 분위기 라는 독특한 환경속에 그의  양명학이  완성 되지 않았나 싶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의 양명학은 주자학과는 구별이 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모든 사물과 뜻을 마음에다 바탕을 두었다.

마음 이란 것은  본래 주관적인 것이다.  

그래서 양명학은 이 점에서 본질을 객관적으로   따지고 드는 주자학과 구별된다.

 

 

좀더 들어가 보면 양명학은  심학(心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양명은  (), 즉 마음을 학문을 하는데 가장 바탕이  되고 중요한 것으로 보았다.

심즉리(心卽理), 마음이  바로 이치다.  심즉신(心卽身), 마음이  바로 몸이다.

그에게 마음은 어떤 의미 였는가 하면  우리가 가진 몸이 라는 것도 마음이 물질화 된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몸과 마음을 분리 시키는  서양 철학과는 달리 몸과 마음을 하나로 보았다.

또한 그는 더 나아가 마음에서  앎()과  뜻(), 물질(), ()이 전부 나온다고 보았고  그들 모두가 하나라고 여겼다.

이 점이 불교의  불이사상(: 둘이 아닌)  과  유사한 점이라 할 수 있다.

 

양명의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치양지( 致良知) 양능(良能) 에 대한 것이다.

치양지는 양지에 이른다는 뜻으로,   양지는  배우지 않아도  알  수 있고 양능은 배우지도 않아도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그래서 양능은 양지를   활용하는 능력으로  이해 해도  될 것 같다.

 

 

양지는 누구나 지니고 있으며 없앨 수도   없는 것이고 그는 양지를  알고  따라야 된다고 했다.

보통 사람들도  양지가 있지만 욕심이  우선이고  양지를 따르지 않기 때문에 도()와는 멀어진다는 것이다.  양지가 곧 도 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양명의  양지 개념은  우리가  본래  지닌 능력을 말하는데 이것은 불교에서의  불성(佛性)과 같은 개념으로 보인다.

양명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 했는데 이것은 양지와  양능이 체현되는 것이다.  

또 다른 말로 지행일치(知行一致)라고도  한다.

알면 행 할  수 있다는 뜻인데  행 할 수 없으면 아직 진짜로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앎이 곧 실천이 되야 한다. 실천이 없다면  참된 앎이 아닌 것이라 볼 수있다.

그가  강조한 실천은 주자가  학문적으로 알기 위해 파고드는 것과  대비가  되는 것이다.

 

 

 

그는 공자로 부터 이어지는 유학의 근본이  되는  정신을  자신이 제대로 이행하고 있다고 여겼다.

비록 그가 주자를 따르지 않는다는 당시  성리학자들의 비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학문은  마음으로 터득하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마음에서 구했는데 아니라면  비록  그  말이   공자님에게서 나왔다 해도 감히 옳다고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공자를 믿는다.

주자는 무슨 이유로 공자의  문장을  개정하고 보충하고 편집하는 것인가?

도는 천하의 것인데 어찌 주자가  터득했다고 사사로이 소유할 수 있고 공자가 터득 했다고  사사로이 가질 수 있는가? 

비록 내가 주자와 논의가  다르더라도  나는  감히  소인의 마음으로 주자를 섬기지는 않았다.">

이 구절,  나는 감히 소인의 마음으로  주자를 섬기지는 않았다! , 감동이다.

주자학 외엔  사문난적이라 칭했던  조선 사대부들에게 일갈을 던지는 것 같은 후련함이 느껴진다.

 

 

주자학만이 최고이며 거의 광신적으로  변해가는 성리학 풍토에서 양명학이  나온 것은 진화적으로 돌연변이 같은 일이 발생 한 것 같다.

이때 어쩌면 성리학 수준을 한단계  더 올려 놓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든다.

조선에서는 강화학파(江華: 강화도에  은퇴하며 연구) 라 하여 양명학을 연구했던 소수의 학자들이 있었지만  성리학에 비해 인지도는 아주 낮았다고 한다.

그렇게 양명의  사상은 이후에 까지 호응을 이어가지 못했지만 아직도 간간히 그의 진면목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다.

나 역시 그런 사람중에 한 사람이 될 것 같다.

 

논어  선진편에 보면 공자와  제자들이 나눈 문답이 있다.

공자가 자로, 염유, 공서화, 증점에게  각자의 품은 뜻을 말해 보라고 한다.

그러자 자로와 염유, 공서화는 각자의 포부를 공자 앞에서 밝힌다.

자신에게   3년의 시간을  주면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들을 교화 시킨다는 둥 제후국들의 예악(禮樂) 을 맡은 벼슬아치가 되고 싶다는 대답들을 한다.

그들의 대답에 공자는 단지 미소를 짓는다.

그때 그들 곁에 있던  증점은 홀로 비파를 타고 있다.

그들과  공자의 문답에 아랑곳 하지 않고  증점은  여여하게  비파를 탄 후 자신은 봄이 오면 기수에 가서  목욕을 하고  무우대에서 바람을 쐬며 노래 한 곡조 뽑은 후 돌아오겠다고 대답한다.

이에 공자는 증점을  찬탄한다. '나도 점과 뜻을 같이 한다.'

 

전습록에도 이들의 문답에 대한  제자가  양명에게  묻는 질문이  있다.

증점이 노는 듯 한 대답에 공자는 왜 칭찬을 했을까그것은  무슨 의미 였을까?

그에 대한 답은 왕명이 그랬듯이 내 스스에게 묻고 내 마음 속에서 찾아야 하리라.

 

이 책<낭독 전습록>은 왕양명의  사상에 대한 입문편으로 이해 하면 아주 좋은 책인것 같다.

이 책을 기획하고  출판한 출판사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양명은  자신의 심학이 불교의 마음을 닦는 것과 다르다고  했지만 나는 그 차이를 잘 모르겠다.

앞으로 이 책과  왕양명에 관련된  책을  곁에 두고 꺼내 보며 무엇이  다른지 곰곰히 따져 볼 것 같다.

 

 

공무와 송사 처리 같은 관아의 일을 수행하는 가운데서 학문을 이루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격물(格物) 공부인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 될 수 있어야 비로소 사람들에게 학문을 강의할 수 있다. - P54

주자가 자신으로부터 먼저 절실히 수양했다면 자연히 그 밖의 것에 미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중략.....
주자는 젊은 시절부터 많은 책을 저술하였지만 만년에는 오히려 그 일들을 후회했다. - P61

광자는 비록 성인은 아닐지언정 그 자신이 품은 성인을 향한 열정을 포기하거나 굽히지 않는다. 나는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나의 행동과 말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비웃을지라도 나의 뜻을 포기하거나 굽히지 않을 생각이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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