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옳다는 착각 - 내 편 편향이 초래하는 파국의 심리학
크리스토퍼 J. 퍼거슨 지음, 김희봉 옮김 / 선순환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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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나만 옳다는 착각

지은이: 크리스토퍼 J. 퍼거슨 / 김희봉 옮김

   :  파국(破局), 막으려면

 

 

 

'헤드라이트 앞의 사슴' 이란  용어가 있다.

한밤중에  도로 가운데에서  차의  헤드라이트를   보고  순간  얼어버린 사슴을  일컫는다.

이처럼  사람들이 판단 불능의  공황 상태에  빠졌을  경우에 '헤드라이트 앞의 사슴'이란   비유를 쓴다.

사슴 입장에서는  자동차  헤드라이트의  눈부신 빛  때문에 달려오는  차를  순간적으로  피할 생각조차  못하게 된다.

운전자 입장에서도  눈 앞에 나타나  서있는  사슴을 보고  역시 똑같이  사고가 정지 될 것이다.

양쪽  다  순식간에  당황을 해서  피하지도   못하고  끔찍한  위기를  맞게 된다.

'헤드라이트  앞의 사슴' 처럼  우리는  때때로 삶에서  판단 불능이나 공황으로  인해 위기의 순간을 빠져 나오지 못할 때가 있다.

 

 

 

이와는  반대로 위기의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재빨리 판단을 내리긴 하는데  오히려  비정상적이고  비효율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마음만 급해지고  정신적인  압박감으로 인한 패닉 상태에 빠져 비정상적인 행동만 반복적으로 하게 되는 경우이다.

'이렇게 하면 될 꺼야, 돼야 돼' 하고  중얼 거리면서  비효율적인 행위를  계속  반복하면서   자기에게 닥친 위기를  벗어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는 아무런 변화도 이끌어 내지 못하고 결국 최악의  결과를 맞이 하게 된다.

 

 

 

파국(Catastrophe: 破局= 깨뜨릴 파, 판 국). 즉  판이 깨지는 걸 말한다.

모든 파국의 상황을  시간이 지난후 다시 돌이켜 보면 당시엔 왜 저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갈 정도로  최악의 상황만 골라 선택한 상황들을 마주하게 된다.

신이 의도적으로 개입하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제 정신으로는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이해가 가질  않는 면이 있다.

이러한 파국들은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 내는 것 일까?

이 모두가 어쩌면  단지 심하게 운이  좋지 않아서 일까?

 

 

이 책<나만 옳다는 착각>'크리스토퍼 J. 퍼거슨' 이라는  미국 스텟슨 대학의  심리학 교수가 쓴 파국에  관한 심리학 책이다.

 

책에는  에어 프랑스 477편  항공 사고를  비롯하여 코로나 19 펜더믹   발생후 초기의  화장지 대란 사건,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의 파국, 체르노빌   원자력 사태와  후쿠시마 원자력의  재난 과정 , 학교내 총격 사건, 이민자 문제, 인종차별 같은  이슈들을 다루고 있다.

또한  2020년 백인 경찰관에  의해 숨진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건과 2021년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들의  의사당 폭동 까지  최근  미국에서  발생했던 굵직한 사건들을 통해 파국의 심리를 파헤친다.

 

 

저자는  심리학 교수 답게  광범위한 분야를 넘나들며 많은 일화와   자료를 통해 파국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위트가 넘치는 언어로 독자를 몰입 시킨다.

 

 

결론부터  말하면  저자는  대부분의  모든 파국은  인간의 감정이 개입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감정이  이성을 앞도하는  상황에서는   서로간에 의사 소통이 단절되고, 판단력이  흐려지며  충동적으로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위기의 순간에 닥친 항공기 조종 오류, 팬더믹 사태에서  사재기에 대한 욕구, 이민자와  인종 차별에 이르기 까지 인간은  알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불안한 감정이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분석 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내가 관여하는 모든  상황을 잘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 하지만 이런 판단은  다 착각 이란 것이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편향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으며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는 상황이  벌어지면 그때 부터  우리는  불안 해지며  심해지면  급기야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러다  결국엔  파국의 전조인  판단 불능과 공황 상태에 돌입하게 된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이 특수한 상황이 아니며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본성에 기인한 파국을  맞이하게 되는 상황은  우리 주위에서 늘 발생하며  내 주위에도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확실한  자신의 생각 보다는   전문가의 말에 더 귀기울이게  되거나  나보다 주관이  확실한 사람을 따르게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미디어가  몰아가는 여론이나  정치인의 확신에 찬 주장에 쉽게 우리는 선동되기도 하는 것이다.  

정치인들이  군중에게  값싼  사탕을 던지며 퍼레이드를  벌일때 군중들은 사탕을 받으며  기뻐하고  열광 했지만   수레가 지나간 후 애초에 사탕 따위를 원한적이  없었다는걸 깨닫게 된다는  작가의  통찰에 깊이 공감이 되었다.

 

 

그러나 책의  후미에 저자가 제시하는 파국을 막기 위한 해결책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좀 아쉬운 면이 있다.

저자는  해결책으로  개인적인 조치와  사회적 조치를 제시 하는데  비교적 원론적인 대답에 지나지 않았나 싶다.

 

 

위기의  순간에 당황하지 말 것, 미리  연습을 통해  위기에 대한 경험과 훈련을 쌓을 것, 여론을   몰아가는 미디어나  편향된 과학자들의 주장 보다는  객관적인  데이터를 따라야 한다는 것, 음모론 같은 주장에 반박하기 보다는  음모론에 대해  보다 깊게 이해 하여  다각적인 시각을 갖춰라 는  정도의 비교적 진부한 제안을 제시한 것이  아닌가 싶다.

 

 

다양한  파국의 실례를 살펴 보는면에서 도움이 되지만  저자가 말한 파국의 원인이  되는 불안한 감정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 하지 못한 것 같다.

저자의 주장대로 라면 파국의 원인이 되는  인간의  불안한 감정을 통제 하는 것을 해결책으로 제시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내가  생각해 보건데 불안한 감정에  대한 해결책은  현대의 심리학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이 라고 본다.

뇌 과학이  발전하면서 뇌 과학과  진화적인   측면에서  방안을 제시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우선  동양의 정신 수양면에서 답을 찾고 싶다.

보이지 않는 세계, 무의 세계의 영역까지 확장 시켜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

 

 

동양의 정신 세계는 아마 이런 면에서 가장   좋은 답들을  가지고 있지 않나 싶다.

유불도(儒佛道) 의 스승들 께서는 자신의 참성품을 깨달으라 하셨다.

물론  '' 를 깨닫는 것은 무척 어렵다.

그래서 스승들 께서는  수행을 강조 하신 것이다.

수행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고 전하셨다.

내가  '나' 를 잘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보이는 세계에  집착하고 끌려 다니고 산다.

눈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란  것을  짐작 할 수 있다면  보이지 않는  부분을 볼 수 있도록  심안(心眼: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어떤  상태 인지, 내 주위 에서 벌어지는 일 들에 대해 내가 먼저 본능적인 반응하기 보다 좀더  근원적인 관찰이 필요한 것이다.

 

 

결국 내가 옳다고  착각 하는 것도 나의 정확한 상태를 모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니 파국이란 것도 근본적으로는 나를 정확히 보지 못해서 벌어지는 것이다.

양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는 마음, 어느  한쪽을 고집하지 않는 마음, 그러한 마음은  모두 '중도' 를 지켜야만  할 수 있는 것이다.

파국이란  중도를 지키지 못하고  나와 상대의 겉모습에 집착하는 편향된 마음을 가질때 벌어지는  결과가 된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지만  금세   알고 있는 것을 잊어 버린다.

그래서 항상  우리는 끊임없이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상태로 돌아 가고자 해야 한다.

큰스님 께서는  본래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자꾸 그걸 까먹는다.

 

 

, 그럼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미디어나 정치인들이 말하는 것들에 우선 바로 반응하지 말고 내  마음을 지켜 보는게 우선일 것 같다.

내가 원하지도 않은 사탕을  주는 사람을 조심하고 내가  진정 바라고 원하는게 무엇  이었는를 잊지 말고 지켜 봐야 된다.

보이고 들리는 남들의   행동과 말에 반응 하지 말고  나의 상태만 끊임없이 돌이켜 보는것을  항상 염두해야 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파국이란 것은 이제 앞으로 결코 일어 날 수 없는 일이 되지 않을까?

최소한 '' 앞에서 파국이  일어날 일은  막을 수 있을 것 같다.

 

'헤드라이트 앞의 사슴' 은  이제 내게는 없을 것이다.

 

물론 나만의 희망 사항이다.

 

 

 

 

<사랑하면 참으로  알게 되고, 알면  참으로  보인다.

             (愛卽爲眞知, 知卽爲眞看)

  알면 참으로 사랑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이다.  

             (知卽爲眞愛, 愛卽爲眞看)

  보이면 모으게 되지만 , 그저 쌓아 두는 것은 아니다

             (看卽蓄知而, 非徒蓄也)>

 - 유한준(1732~1811) 정조시기 문인

다른 사람의 잘못이 더 잘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그 일에 감정적으로 매달리지 않기 때문이다. - P11

자기가 소속된 집단 내의 태도와 신념이 의심스러워도 어느 정도는 순응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거의 누구나 느낀다는 것이다. - P37

누군가의 신념을 지적하고 비웃으면 그 사람은 신념에 더 가까워지고, 멀어지려고 하지 않는다. - P64

정치적 좌파나 우파에 속한 사람들은 누구나 과학이 마음에 들면 믿고, 그렇지 않으면 거부한다. 그들이 과학을 들먹일 때는 말 그대로 과학을 하겠다는 뜻이 아니며, 자신이 떠받드는 사회, 정치적 세계관을 위해 ‘과학‘을 편리한 몽둥이로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올바른 정보는 없고 불안하기는 하니까 명백한 답을 찾아 헤멘다. 어설픈 관찰에서 존재하지 않는 상관관계를 찾아낸 다음, 일단 마음을 정하면 공격적인 행동을 취한다. 그 결과는 비극적일 수 있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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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읽고 쓰고 버린다 - 손웅정의 말
손웅정 지음 / 난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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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나는 읽고 쓰고 버린다

지은이: 손웅정의 말

   : 나는 슈퍼맨 이야 (아버지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영화 <슈퍼맨>에서   슈퍼맨의 고향  클립톤 행성이 폭발을 앞두고 있다.

이때 그 별의 지도자급이자 과학자 였던 아버지 '조 엘'은  자신의 아들 '칼 엘'   홀로 우주선에 태워  탈출 시켜 버리고  자신은 행성의 운명과 함께 한다.

행성을  탈출한  우주선은  지구에 떨어 졌지만  다행히도  스몰빌에 사는  마음 착한 양 부모님 밑에서 '클라크 켄트' 로 자라나게 된다.

그리고 클라크 켄트는  하늘을 나는  슈퍼맨이 되어  지구가 위기에 빠질때 마다  지구를 구한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슈퍼맨 줄거리 이다.

하지만 나에게 슈퍼맨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따로 있다.

클라크 켄트가  친부 조 엘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되는 장면이다.

우주선  프로그램에  입력된 홀로그램을  통해  슈퍼맨의 친부 조 엘은 클라크 켄트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겨 놓았다.  

"아버지   눈으로  아들을  보고, 아들은  자라서  아버지가 되어  다시 아버지  눈으로 아들을 본다. 아들은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는   곧  아들이 된다."

내게는 '아들이   아버지가 되고  다시 또  아버지가 아들이  된다' 는 말은  참으로 의미 심장하게 느껴진다.

 

 

나는 아들 둘을 키우는 아빠인 동시에 나는 또 우리 아버지의 아들로서 살고 있다.

내가  우리 아버지의 아들로  또 지금 내가   기르는  아들들의 아빠로서 역할을  잘 하고 있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이 부분에  대해 예전에 읽었던  동국대 '황수경 교수님' 이 쓴 칼럼(한마음 저널 57이 생각난다.

칼럼에서  황교수님은 어느  남자들만  있는 집단에서  설문 조사를 한 적이  있다고 했다.

'당신은 진정으로 바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세요? '  라고 묻고 답을 적게  했더란다.

그때  나온 답들이 '좋은 아빠', '믿음직한 남편', '신뢰를 주는 아빠', '존경 받는 아버지', '효도 하는 아들' 등등.

그들이  제출한 답들 대부분은  가정에서 좋은 가장이자 아버지, 아들이   되고 싶은  사람 이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은 보통 우리 아빠들이 바라는 가장 전형적 이고 이상적인 대답이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대답을 한 사람들은 전혀 생각도 못한 사람들의 답이었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런 답을 적은 집단은 우리나라 최악의 범죄자들만 모여 있는 '청송 교도소' 에 복역중인 사형수 같은 흉악한 재수자들의 답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이 경험은 권수경  교수님이 청송교도소의 사형수들을 매주 10년간 만나서 상담을 하며 겪은 일이라고 했다.

교수님 칼럼 글에서 우리의  시각으로 보는 그 흉악한 사형수들도 결국 자식을 가진 아버지 였고  그 자식들 에게  한번이라도  따뜻한 사랑을 전해 주고  싶어 했고  하루라도 좋은 애비 노릇을 하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즉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은 것은 평범한 사람이든  죄를 지어  감옥에 갇힌 사람이든  그 바램은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그들은 결국 그렇게 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들의 바램을 이루게 되지  못한 그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이에 대한  답으로 이번에 읽게  된 손웅정 감독의 책 <나는 읽고 쓰고 버린다>가   올바른 방향을  제시한다고 생각 된다.

책을 읽기전에  그동안 메스컴을 통해 접한 손웅정 감독의  이야기들은 이미  내가 책에 흥미를 끌기에 충분  했었다.

나도 그와 같은  아버지로서, 손감독이 자신의 아들들을 키우면서 느끼고 경험한 내용을  배우고 싶었다.

그런데 읽고 나니  이 책은 단순히  누구의 아버지가  아닌 인간  손웅정이 가졌던  체험 철학에 대하여  깊이  매료가 되었다.

이 책은 손웅정  감독과 김민정  시인이 일년 동한 대화  녹취한 인터뷰를 기반으로  만들어 졌다.

처음엔  손웅정이  직접 손으로 쓴 책이 아니라   실망할 뻔 했지만 오히려   두사람간의  일상적이고  진솔한 대화가 자연스럽게 손감독이 가진 철학을  끄집어 냈다.

그의 철학은 단순함을 기본으로 삼고  그 단순함을 섬세화  하는 과정을 충실히  반복 한다는 점이다.

아버지로서 아들들과의 관계, 감독으로 자신의 선수들과의 관계, 그리고 스스로 자신에 대함에 있어 늘 기본이 되는 단순함과 섬세함(책에는 '디테일' 이라 표현)을 반영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책에서 가장 놀라 웠던것은 그는  결혼한 큰 아들 집에 여지껏 한번도  간적이 없다는 것이다.

"걔들 공간에  왜  제가 부모라는  이름으로 침범하냐고요?"

이 말만 들어 보면 어찌 그리  부모 자식간에 냉정한가 싶을 정도로  생각되었지만

'자식은 부모 곁에 잠시 머물다 가는 귀한 손님으로 여긴다' 는 그의 말에는  고개가 끄덕여 졌다.

"자식이 이름나고 애비가 어깨 힘주고 다니면서 꼴깞 떨지 마라"는 그의 말에는 내 마음속  은연중에 감춰진 자식 덕 보려는  심리를  들춰보게 해줬다.

또한  그는 독서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으며 수양 (修養)하는 아버지 상을 내게 제시했다.

손감독은  책을 읽으면서  그 책 내용중  가슴을 울리는 대목들은  항상 메모를 하고  외운다고 했다그리고 읽은 책은 쓰고 난후 버린다고 했다.

참으로 모든 일에 미련없이 간결 하게 처리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그가 나눈 인터뷰중에 나오는 대화들은 손감독 자신에게 체화된 어록들로 도배 되어 있다.

<어디서든 나이 부터 들먹이는 사람은 꼰대다.

자식에게  마침표를  주는게 아니라   물음표를 던지는 부모가 되야 한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육신을  키우는게 아니라 아이의 마음을 키워야 한다.

자식을  위해 자기를 지우고 희생하는게  아니라 자식을 위해 오히려 자신을  키워야 되는 부모가 된다.> 는 그의 어록에선  깊이 공감이 되었다.

<몰입은 단순함에서 오고 단순함은  버림에서 온다. 그리고  버림은 마음이  풍족한 상태에서 온다. 또한 토끼와 거북이 경주 일화를 통해 토끼는 상대, 즉 거북이만 보고 쉬었지만  즉 거북이는  목표만 봤기 때문에 승리 했다면서  봐야될 대상을 제대로 볼 줄 알아야 한다> 는 그의 말은 어느 한 분야에서 경지에 오른  일류 대가의  풍모가 느껴졌다.  

 

그의  발 밑에는 축구공, 손끝에는 책이 있다고 한다.

그가  좋아하는 축구를 위해  늘  쉼없이 운동하고   단련하며 또 시간을 내어  부지런히 독서를 하는  그의 모습에서  인간 손웅정은 이미 누구의 아버지로  사는게 아니었다.

그의 이러한 면에서 깊이 공감이 되며 내 자신을 다시금 채찍질 하게 되는 것 같다.

그를 보면  좋은 아버지는 만들어 지는 것이라 생각 된다.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하고 수 양(修養)을 쌓는 수행자와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든다.

 

 

 

그렇다면  다시  청송 교도소의 아빠들은 왜 훌륭한 아빠가 아닌 범죄자 될 수밖에  없는가를  살펴 보면 결국 차이는  그들은 자기 수행을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업식대로  산 행위의 결과였다.

결국  좋은 아빠가 되는 것도  하나의 수행이라고  여겨야 되는게 아닐까 싶다.

 

 

 

이제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어린 아들들의 입장에서는 슈퍼맨이란 생각이 든다.

(아버지가 범죄자이든 훌륭한 사람이든 다 누군가에게 한때는 멋진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아들들의 눈에도  자기 아빠가 세상 최고의 슈퍼맨 이었을 것이다.

한때 내 아버지도 내게는 슈퍼맨이었고 또 내 아들들에게도 나는 슈퍼맨 이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세상을 보는 시선이 올라가자 내 아버지는 어느덧 백발의 노인으로 변했고 나역시 아이들 눈으로 보면 중년 아저씨로 변했다.

하지만 우리의 겉모습이야 변할지 언정 진짜 슈퍼맨의 모습은 겉모습에 항상 우리 안에 감춰져 있다.

내 아버지도 슈퍼맨 이었고 나도 슈퍼맨 이었고 이제 곧 내 아들도 슈퍼맨이 될 것이다.

 

 

 

한때  내 자신이 슈퍼맨 이었음을 잠시 망각 했지만  다시 슈퍼맨으로 변신해서  살아가기 위해  오늘도 나는 이렇게 독서를 하고 글을 쓴다.

영화속  클라크 켄트는 태양 에너지로  힘을 보충하지만  현실속에 사는 우리의  모든 슈퍼맨들은 자식들과 아내의 격려로 힘을 얻는다.

비록 얻어 내는 격려가 생각보다 충분하진 않지만 그래도 좋다.

내가 슈퍼맨 이였음을  자각하고 다시  내가 좋아 하는 일로 스스로 값지게 만들어야  하는 세상에 살게 됨에 감사 할 따름이다.

세상의 모든 슈퍼맨들이여 !

힘내고 다시 날아 오르자.

우리 위의 창공은 우리가 다시 떠오를 때를 기다리고 있다.

 

 

 

 

결국 불편함은 노력이에요. 내가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그런데 이 불편함이 지속 된다는 건 한편으로는 내 몸에 좋은 습관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얘기잖아요. - P20

흔히들 자식에게 친구 같은 부모가 되어 줘야 한다고들 하는데 저는요, 그거 직무유기라고 봐요... 중략...
친구가 지적은 할 수 있어도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끝끝내 말해줄 수 있는 건 부모뿐이에요. - P24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니까 부모가 제 틀에 제 자식을 딱 끼워 맞춰버리는 거예요. 좀 비약해서 말하자면 그건 부모가 자식을 안 보고 자기를 본다는 거거든요. - P41

지식을 얻고자 한다면 하루하루 무언가를 더하고, 지혜를 얻고자 한다면 하루하루 무언가를 버리라고 그랬어요... 중략...
이 가운데 버려야 할 것을 안다는 것은 내가 집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안다는 얘기도 되거든요. - P104

그 순간 나는 내 가치를 어디에 뒀지? 하고 묻는거예요.
내가 지금 돈을 잃게 생겼어. 그런데 나는 내 가치를 건강에 뒀어. 그러면 그 순간 뭔가 좀 심플해지지 않나요?... 중략...
그 순간 뭔가 아주 선명해진다니까요 - P130

제목의 한 줄 메시지가 크고 확실한 책에 꽂혀요. 가슴을 때리는 그 타격감이 있나 없나, 그거 없으면 절대로 안 집어요. - P192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가질 수 있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를 수 있다.
樹木等到花谢, 才能結果
江水流到捨江, 才能入海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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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허락이 필요치 않은 삶 - 하나의 경계선이 당신을 자유롭게 합니다
조세프 응우옌 지음, 박영준 옮김 / 서삼독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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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타인의 허락이 필요치 않는 삶(하나의 경계선이 당신을 자유롭게 합니다)

지은이: 조세프 응우엔/ 박영준 옮김

   : 삼반견해(三般見解)중 두번째 견해

 

 

 

조세프 응우엔의 신작<타인의 허락이 필요치 않는  삶>은 '바운더리 (Boundary)  가  곧  자유'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타인과  나 사이에  경계선을  세운다.

상대가 불편해 할  수도 있겠지만 상대를  향해 나는 '' 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하고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한다' 는 내용만 보면.

마음을  닦아 내면을 수행하고자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언뜻 이해가 안갈 수 있는 내용이다.

보편적으로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남과 나를 차별 하지 말고 항상 둘로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상대와 나를 둘로 보지 말고, 항상 내 탓으로 돌리는 삶이 수행이라 여긴다.

하지만 조세프 응우엔은  경계선을  세우는 것이 오히려 나를 자유롭게 만든다고 말하다.

무념의 전도사를 자처했던  저자는 이런 모순을 어떻게 극복할 것 인가?

 

 

 

저자의 전작인  <당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을 믿지 말라>를   읽었다면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대략 감이 오리라 생각 된다.

'조세프 응우엔' 은  전작<당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을 믿지 말라> 을 통해서  '생각하기(사고 하기:Thinking) 를 멈추고  무념(non-thinking) 속에서  떠오르는  직관을 믿어라' 고 했었다.

우리가 인위적으로 짓는 모든 생각하기,  사고하기를  멈춰야만 비로소 내 안에 본래 있는 근원적인 무념에 이를 수 있다고  말했었다.

저자는 무념에 대하여 '인더존(in the zoon)' , '(zoon) 안에 들어 간다' 는 스포츠 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통해  무념무상의 경지를 설명하였고 이때  무념의 상태에서 떠오르는 직관의 힘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는 것이 작가 조세프 응우엔이  전하고자 하는 요지 였다.

즉 억지로 지어내는 생각이나   알음알이가 아닌  무념의 상태에서 떠오는 직관을  따르라는 뜻이다.

작가가 말하는 '무념' 은 우리가 본래 지니고 있는 근원적인 생각과 같은 의미이다.

이는 '신성(神性)'이나 '불성(佛性)' 이라 불러도  무방할  용어라고 생각 된다.

그런데  이번 신작에서 작가는 무념과 동떨어진 선긋기를 말하고 있다.

 

그럼 그는 이번의 신작에서는 왜 경계를 세우는 것, 바운더리를 치는것을 내세웠을까?

왜  바운더리가 곧  자유라고 했을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운더리, 내안의 경계는 '내 중심' 을 지키라는 말과 상통하는것이 아닐까 싶다.

내 중심이라면  내 근본 마음을 말한다.

즉 내가 남에게서 의견을 구하고 남의 말에 따르는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근본 마음에 귀 기울이고 그 소리에 따르라는 뜻이다.

작년에 읽었던 남들이 믿고 있는 상식에 대하여 'Say No' 라고 할 수 있어야 된다고 했던 <세이노의 가르침> 의  구절과도 같은 의미라 볼 수 있다.

내 중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오직 나에게   좀더 집중을 해야 한다.

 

 

 

듣고 보고 행하는 모든 것을 주체가 되는 나에게로 돌려야지 타인의 말과 소리, 뜻에 맹목적으로 쫓아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책의 제목 <타인의 허락이 필요치 않는 삶>이 되는 것은 곧 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야 된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는 내 인생, 내 삶의 주인은  내가 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작가는 남이 소중하고 귀하듯이 나도 귀하고 소중하다고 했다.

남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게 아니고 또 나를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논리가 아닌 남은 남대로 소중하고 나는 나 대로 전부  다 소중하는 뜻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가 말하는 바운더리, 경계선은  사실 내  안의 참나를 오롯이 세우는 것을 뜻한다.

결국 남과 나를  구분 하고자 했던 '분별' 이 아니라 사실은 오히려 '나 다운 나' 로 살기 위한 '방편' 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전작에서 언급 했던 '무념'과 이번  책에서 언급한 '경계선' , 모두 참나를  알기 위한 과정을 담아내기 위한 방편이라 여겨진다.

 

 

이 처럼 독자의 마음을  깨닫게 위해 저자가  이끌어주는 방법을 보면 유명한 선어록 구절이 떠오른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이 법어중 마지막 구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는 성철 큰스님(1912~1993)께서 1981년 조계종 종정으로 취임 하실때  남기신 어록으로 너무나 유명하다.

원래는 중국 선어록에  나오는 말로 송나라때 '청원 유신 선사(?~1117)'가 남긴 어록이다.

 

 

<견산시산 수시산(見山是山 見水是山)

견산불시산 견수불시수(見山是山 見水是水)

견산시산 견수시산(見山是山 見水是水)

이 세가지 견해(三般見解)가 같은것 인가? 다른 것인가?

누가 이것을 가려 낼 수 있는가? >

 

청원 선사는 산과 물을 보는  시선(見)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단계를 설(說)해 주었다고 한다.

선사는 깨닫기 전에는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보였다고 말한다.

그런데 깨닫고 보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게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좀더 확철대오(廓撤大悟: 큰 깨달음)를  해보니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로 보였다는 것이다.

이 세가지 견해가 과연 같은 것인가다른 것인가를  대중들에게 물은 것이었다.

진정한 깨달음의  세계를 보는 단계의  마지막 단계는  첫번째 단계와 다르지 않지만  다르다.

중요한 것은 두번째 단계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를 반드시 거쳐야지 만이 세번째 단계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헤겔의 변증법 처럼 정() 다음에  반()이 있어야  합()이 되는 것과 같다.

 

조제프 응우엔이 이번 책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세번째 단계로 가기 위한 반(反): '분별' , 즉 삼반견해중 두번째 견해에  해당 된다고 본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

바운더리는 곧  주체적으로  살기 위한 참나인 '주인공' 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주인공은  곧 자유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자신만의 간결한 어조로 담아내는 작가의 통찰에  공감하며 그래서 그의 다음 책이  더욱 기대가 된다.

 

남들의 기준에 맞춰 모든 일을 올바르게 했는데도 왜 과도한 일에 시달리고, 스트레스를 받고, 불안함을 느끼고, 불만족스러운 감정에 시달리는지 스스로 의아해합니다.
그것이 바로 경계선이 없는 삶을 살아갈 때의 우리의 모습입니다. - P21

오직 직관에 따라,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경계선을 정하는 것부터 시작 합니다. - P41

다른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아도 아무렇지 않을 때 당신은 비로소 평화를 얻게 됩니다. - P62

한 분야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경험한 사람은 그 변화를 다른 분야에서도 적용하여 삶을 개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P71

당신이 사랑하는 삶을 창조하는 일은 자신을 파악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중략...
우리는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세계가 아닌 이것도 저것도 소유할 수 있는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 P103

예전의 경계선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경계선을 설치해도 당신에게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것은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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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믿음
헤르만 헤세 지음, 강민경 옮김 / 로만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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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나의 믿음

지은이: 헤르만 헤세/ 강민경 옮김

   : 믿음의 씨앗은 나무로 자란다

 

 

 

이 책<나의 믿음>은  헤르만 헤세(1877~1962)가  가졌던 종교와 그 믿음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은  헤세가 생전에 소설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그의 믿음을 엿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집과 같다.

1910년대 에서 1960년대 에 걸쳐 헤세가 남긴  기고문과  편지글을 통해서 그가 어떤 믿음을 가졌고 그가 추구했던  영적인 삶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이었다.

 

 

 

나는 헤세가 그의  자전적 작품들속에서  전하고 싶었던 메세지는 '사랑' '구원' 이 아니였을까  짐작해 본다.

나는 그가 신실한 믿음을 가진 기독교인 이였기 때문에 사랑과 구원이라 말하는 것은 아니다.

헤세는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나서 신학교에  진학해 성직자의  길을 걷고자 했을 정도로 그는 평생을  종교 없이 산 적이 없으며 종교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교회라는 테두리안에  갇혀 있길 거부 하였으며 오히려 일생을 교회 없이도 살아 왔다고 고백 한다.

즉 헤세는 교회를 중요시 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보다 영성() 생활을 중요시 하는 그리스도 인이 되고자 했다.

그가 생각했던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통한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보편적으로 말하는 기독교식의 구원이 아니었다.

 

 

 

그의 영적인 삶에 대한 추구는  탈무드에서 부터 시작하여 성경과  우파니 샤드, 붓다의 가르침을 거쳐서 공자와 노자에 이르기 까지  진리에 이르는 길을 탐색 했다.

그에게 있어 진리에 이르는 길은 하나가 아니였다.

헤세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붓다의 깨달음을 같은 경지라 여겼고, 공자의 덕()을 이해한 후에는 공자와 소크라테스가 형제처럼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어릴때 부터 외할아버지와 부모님이 가진  경건주의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교회 단체나 교회 종파 하고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고 생각 했다.

그의 집안 어른들이 인도에서 선교 생활을 통해 인도의 종교를 접한 후 결국 종교에는 우열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반면에 그가 믿었던 개신교를 탄생시킨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1483~1546)에 대한 헤세의 평가는 가차 없다.

<그가 그저 개신교 신자 였다면, 성직 제도를 반대 했거나 교회와 국가에 맞선 개인의 대변자였더라면 그를 나쁘게 탓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예전의 교회보다 그 무엇하나 나은것 없는 새로운 교회를 스스로 세웠지요. 또한 국가와 지배자들을 적극적으로 보좌했고 농민들을 져버렸습니다.>

 

또한 또 다른 종교 개혁가 칼뱅(1509~1564)에 대한 평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칼뱅의 초상화를 자세히  들여다봐도 그가  은총의 신비를 아주 잘 알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저는 은총이란  이름은  다를지라도 그러한 것이 항상 우리를  에워싸고 있다고 생각 합니다. 그것은 빛이자  신 그 자체요. 우리가  잠시 마음을 열면 그것이 우리 안으로 들어옵니다. 어린아이든, 현자든  상관 없이 말이지요.>

 

이처럼  헤세는 단지  기독교 울타리 안에서의 사랑과 그리스도 인만 구원을 받는 다는 식의 경직되고 편협한  믿음은 받아 들이지 않았다.

그의 믿음은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성장해 가는 믿음 이었다.

이를  헤세의 세계관 작품속에선  어린시절 순수함을 지나 사춘기 시절의 절망과 타락을 거쳐 결국 어른이 되면서 구원을 얻는  패턴으로 구조화 시켜 표현 했다.

이것은 곧 그가 체험했던 영적 성숙의 단계를 작품속 세계관에 반영한 것이었다.

 

 

 

그의 소설  <싯다르타> 에서 언급 했던 붓다의 '깨달음' 은 곧 '사랑' 이였다.

이는 기독교의 사랑과 다르지 않고 그 '사랑' 을 불교에서는 '자비' 라고 부른다.

그는 이처럼 그에게  사랑과 구원은 맹목적인 종교적 가르침이 아닌 오로지 체험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깨달음과 같은 것이라 생각한 것 같다.

 

 

 

그에게 믿음은  '진리는 둘이 아니다' 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비록 교회에 대한 실망은 가졌지만 자신의 개신교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즉 개신교를 버리지 않고 불교적이며 유교적이고 또 도교적인 믿음을 갖춘 신앙인으로 살고자 했던 것이다.

마치 원효가 대승기신론에서 주창했고 유마거사가 삶을 통해 보여줬던 불이 ( : 둘이 아닌)의 경지에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던게 아닐까?

 

 

 

이 책에서 내가 가장 흥미롭게 주목한  것은 헤세가 1944년 발표했고 1946년 노벨 문학상을 안겨준  소설 <유리알 유희>의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와  그의 친구 '카를로 페로몬터' 에게  보낸 가상의 편지글 이다.

1960년에 쓴 편지글 엔 헤세가 나이 83세라는 고령의 나이에 접한 선불교(禪佛敎)에 대한 이해를 흥분된 마음으로 전하고 있다.

편지글에서  <벽암록> 제 1칙을 비롯한 스승과 제자간의 선문답을 통해 그가 생이 얼마 남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 하고 매력적인 깨달음의 순간에 대하여  어린이 같은 호기심을 가졌던 것이 느껴졌다. 

이는 자신이 80 평생 추구 했던 모든 영적인 삶이 '' 이라는 진리의 큰바다로 흘러 들어 간 것을 기뻐한 게 아닌가 싶다.

 

 

 

본래 불교에서 ''은 혁명과 같은 의미를 지녔다.

혁명은 기존의 모든 관념을 전복 시켜버린다.

소승불교라는 작은 수레를 던져 버리고 큰 수레에 중생들을 태워 모두 함께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고자 했던 대승불교의 가르침은 '' 이라는 정신 혁명을 통해 불교는 또 다른 차원으로 들어 서게 되었다.

그렇게  선은 기존의 형식적이며  기복적인 불교를 뒤엎고   깨달음의 불교로 진화 시킨것 이다.

 

 

 

이 책을 통해 헤세가 추구했던 영적인 삶이 어떠 했는지 잘 알았지만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수행을 했고  어떤 경지에  이르렀는지는 알 수가 없다.

또한 그가 향한 믿음은 밖으로가  아닌  자신의 안을 향한 것 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헤세가 종교간에는  우열이 없고  모든 종교가 결국은 하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 만으로도 그가 분명 편협된  믿음을 가진  개신교인은  아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성경의 고린도 전서에 나오는  잘 알려진 용어  '믿음, 소망, 사랑' 을  불교식으로 바꿔 보면 믿음은  신심(信心)으로, 소망은 발원(發願)으로, 사랑은 자비(慈悲)로 부를 수 있다.

그 중에 제일이  사랑이라 했는데 사랑은 곧  자비이다.

자비는 지혜를 모체로 삼는다.

그래서 지혜는 다른말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반야 바라밀' 이라고  부른다.

결국 육바라밀의 마지막 반야 바라밀이 바로 지혜이다.

그러니 성경에서  사랑이 제일이라  했듯이 불교에서도 자비가 곧 지혜요, 지혜가  깨달음이니 사실상 두 종교 모두 다 같은 뜻을 나타낸 것이다.

 

먼저  믿음을 굳게 가져야 발원을 세울수 있고  결국엔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믿음은 모든 공덕의 어머니' 라고 한 옛 선사(禪師)들의 말씀은  틀림 없다.

 

헤세가 이렇게 까지 상세히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믿음이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확실하다.

 

헤세에게 심어진 믿음의 씨앗이 개신교의  뿌리에서 위로 싹이 터져 나와 힌두교, 불교, 도교, 유교 거쳐 마지막   불교에 이르는 줄기와 가지 이어져 뻗어  믿음의 나무 보이는 듯 하다.

 

 

 

 

 

이 책을 덮고 난후 나에게 헤세는 마치   독일에 태어난 유마거사 처럼 느껴진다.

 

 

 

 

 

 

 

 

 

 

일상적인 대화에 자신의 영혼을 담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영혼을 담아 말하는 사람은 시인이 아니면 성인에 가깝다. - P30

나에게 삶은 이 세상의 양극 사이를 오가는 것, 즉 이 세상의 가장 근본적인 기둥 사이를 오가는 것이다. - P43

중국인도 이렇게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자신들의 훌륭한 성품과 재능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 P97

무의미해 보이더라도 결국 삶에는 의미가 있다.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것을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면 기꺼이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 - P167

저는 앞으로도 계속 살아 있는 신을 믿을 겁니다.
신이 직접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은 형태로, 그림으로, 언어로 나타났기에 신이 존재한다고 확신할 테지요.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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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모모 2024-05-31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가는 내용이라 유익했어요. 마힐님^^

마힐 2024-05-31 18:13   좋아요 0 | URL
구름 모모님, 저에게 한 분의 지음(知音)을 뵙는 것 같습니다.
감사 합니다.
 
일류의 조건
사이토 다카시 지음, 정현 옮김 / 필름(Feelm)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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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일류의 조건

지은이: 사이토 다카시 / 정현 옮김

   : 사무라이 문화와 장인 문화

 

 

얼마전 부터 유튜브 알고리즘으로 인한 쇼츠에서 일본의 여배우 (모리카와 아오이) 가  달인(: 통할 통 人: 사람 인 )이라 불리는 사람의 기술을 따라 하는 방송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카드를 던져 촛불 끄기, 주사위를 컵으로 흔들어 컵안에서 일렬로 세우기, 부메랑 던지기, 돌을 모서리로 세우기 등등 별 희한한 재주를 가진 달인들이 나온다.

모리카와는 생전 처음 접하는 달인의 기술들을 몇번 시도한 후 금방 습득을 하여 숙달의 경지에 도달한다.

일반인이라면 몇년을 해야 하는 경지를 방송에서 여배우는 믿기지 않을 속도로 달인을 기술을 습득한 후 바로 그 기술을 시연해 버린다.

정말 말도 안되는 재능을 가진 그녀는 한,두 종목에 한해서 특화된 게 아닌 여러 잡다한 종목인 매번 새로운 달인들의 기술을 습득해 버린다.

방송 주작이 아니라고 하는데 보면서도 이게 말이 되나? 할 정도다.

방송에 나온 기술을 시연하는 달인 조차도 그녀의 신기(神技)에 허탈한 표정을 지는게 웃음 포인트다.

자신들은 몇 년 혹은 한평생을 갈고 닦은 기술을 옆에서 그냥 쓱싹 보고 난후 그대로 따라 해버리니 달인의 입장에서는 허탈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모리카와의 '달인의 재능 훔치기' 는 정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좋은 예술가는 베끼고, 훌륭한 예술가는 훔친다.' 고 파블로 피카소는 말했다고 전해진다.

'훔치기' 관련 하여 일본의 베스트 셀러 작가  '사이토 다카시' 가 쓴 책<일류의 조건>은 참고가 될만한 책이다.

원래 이 책은 오래 전에 나왔다가 (2006) 이미 절판된 상태였다.

그런데 최근에 유튜브에서 '박문호' 박사가 정말 좋은 책이라고 이 책을 추천하였다.

그러자 시중에서 구할 수가 없는 책을 갑자기 독서 시장에서 찾는이가 많아진 것이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의 수요와 공급의 법칙으로 인해 마침내 이 책을 다시 복간하게 되었다.

 

 

 

내용에 앞서 우선 이 책의 겉디자인과 내용까지 전부 일본 스럽다.

(즉 닛뽄 스타일이 강해 보인다.물론 내 개인적 생각임)

검은 바탕에 흰 글자로 제목과 저자가 찍힌 양장본인데 겉면에 초록색 테두리 표지를 감싼 것을 보니 <귀멸의 칼날> 의 주인공 '카마도 탄지로' 가 입고 다니는 초록색 하오리(상의)가 연상 된다. (위 사진 참조. 순전히 개인적 관점일 뿐.)

 

책의 핵심 내용은 마치 사무라이가 한 칼에 베는듯 간단 명료한데 일류가 되는데 필요한 조건은 딱 세가지 힘을 기르라고 말 한다.

첫째, 요약하는 힘 키우기,

둘째, 훔치는 힘 키우기

셋째, 추진하는 힘 키우기.

책 제목에서 말하는 '일류' 란 어느 분야든지 그 분야에서 가장 능통한 '달인(達人)'을 말한다. 우리로 치면 '고수(高手)' 가 되는 방법인 셈이다.

즉  무슨 분야든지 그 분야의 일류 즉, 달인이 되기 위해서는 위의 3가지 요령을 숙달 시켜야 된다는 게 책의 요지이다.

이외에도 '집중력이 곧 초능력이다' , 숙달론의 기본서가 되는 <쓰레즈 레구사>에 대한 소개와 고시하라 문화(腰 허리 요 肚 배 두 文化) 같은 저자의 통찰이 돋보이는 내용이 훌륭한 내용들이 많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약간 아쉽게 느껴 지는게 있다면 이러한 숙달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 설명할 때 저자는 수 많은 일본인들을 예시로 든다.

저자가 일본인 인지라 당연히 일본의 운동 선수를 비롯하여 예술인, 문학가 등 많은 장인의 경지에 도달한 인물들이 일본인일 수 밖에 없긴 하다.

 (많은 사람들 중 내가 아는 사람은 메이저 리그 선수 '스즈키 이치로', 아톰의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 정도뿐 나머지는 생소 (生疏) )

물론 저자가 언급한 장인의 경지에 이른 일본인들에 대해 잘 모른다 해도 전체 맥락을 이해하는데는 전혀 문제가 되진 않는다.

다만 잘 모르는 일본 장인들이 다수라 일본 문화나 인물들에 대한 이해도가 그다지 높지 않으면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뜻의 깊이가 좀  다르지 않을까 싶다.

 

 

특히  책의 말미에 '무라카미 하루키' 에 대한 분량이 한 챕터를 차지 하도록 많은 지면을 할애 한다.

하지만 그 유명하단 소설가의 책을 유감스럽게도 나는 여지껏 한권도 읽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독서를 통해 얻어가는 지식도 중요하지만 '무지의 지'(알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를 깨닫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 책은 언젠가는 꼭 한번 읽어 봐야 겠다. 아직은 끌리질 않는다.)

 

장인이 많은 나라 일본.

일본은  왜 장인이 많은 나라가 되었을까?

일본에 달인이라 불리는 장인들이 많은 이유는 일본 사회가 가진 특수성 때문이다.

폐쇄적인 사회 문화.

다시 말해 일본의 폐쇄적인 사회 문화 분위기에서는 오늘날 '오타쿠' 같은 문화가 생겨날 수 밖에 없는 듯 하다.

일본이라 나라는 지리적으로 같은 동북아시아에 속하고 또 유교 문화권이라 우리와 비슷한 것 같지만 서로 전혀 다른 문화 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런 폐쇄적 분위기의 출발점을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 의 영향 때문이라고 보기도 하는데 전통 일본 사회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 였다.

보통 우리 동양권에서는 신분제 하면 유교적 신분제인  '사농공상(士農工商)'을 떠올린다.

여기서 우리는 '()'  '선비'로 생각하는데 일본에서 '' '무사(武士)' 를 지칭한다.

일반적으로 일본의 무사는 모두 '사무라이(: 모실 시)' 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무라이' '무사' 는 엄연히 다르다.

일본에서 '사무라이 ( 모실 시)' '위 사람을 모시는 사람'을 뜻 하는 것이다.

즉 본래 '무사(武士)' 는 일본의 지배 계층 '다이묘(大名主: 영주)' 를 뜻하고 사무라이는 '다이묘를 경호하는 사람' 을 뜻한다. 

쉽게 말해 사무라이는  다이묘의 경호원인 셈이다.

여기서 '모실 시()' 자를 파훼 해보면 절에 계시는 '스님' 이 연상된다.

(사람 인 '' + 절 사 '' 가 합쳐진 글자 이기 때문이다.)

'절에 있는 사람' 이란 곧 '스님' 이 되고 , '스님'  '부처님을 모시는 사람' 이란 뜻이 된는 것이다.

 

이걸 통해 보면 아무래도 일본에서 사무라이 의  '모실 시'와  '스님' 의 관계는 어떤 연관성이 많지 않나 싶다.

또 사무라이가 입는 갑주 복장을 자세히 보면 스님들이 입는 오조가사와 닮았다.

 

일설에 의하면 백제의 무사 '싸울아비' 가 일본으로 넘어가 '사무라이' 가 됐다는 설도 있긴 한데 우리 한반도에서 고대 일본으로 불교가 전파 될 때 스님이 곧 사무라이 가 됐을 수 도 있지 않을까? (이 부분에 대해 한번 연구해 볼 만하다.)

 

아무튼  역사가 진행될 수록 오늘날에 이르러 '무사''사무라이' 는 같은 뜻으로 쓴다. (둘 다 양민은 지닐 수 없는 칼을 차고 다닌 지배 계층에 해당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은 고대에서 부터 '덴노'라 부르는 천황이 있지만 천황이 직접 정치에 관여한 것은 드물었다.(야스카 시대:우리나라 삼국시대와 메이지 유신이후 약간 시대만 관여)

대부분의 역사에는 각 지방의 호족이나 영주가 그 지역을 다스렸다.

영주가 다스리는 영지를 '' 이라고 부르는데 그 번에 속하는 모든 백성들을 영주가 통제해야 했다.

'' 의 계급, 즉 무사 계급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전쟁 준비를 해야 했고, 나머지 농,,상 계급은 자기 신분에 맞는 역할을 해야 했다.

농민, 기술자, 장사꾼은 일생동안 자신의 신분에 맞게 살지 않으면 그냥 사무라이 한칼에 죽음을 맞이 할 뿐이다.

신분제는 사회의 근간이 되는 것이고 계급 사회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는 칼을 찬 사무라이들이 엄격히 통제를 한 것이다.

엄격한 신분제에 대해서 일반 백성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서 따돌림은 곧 죽음이다.

일본인들이 단합이 잘 된다고 하는게 이런 문화 때문이다.

 

 

우동집 아들은 대를 이어 우동을 만들어야 하고, 두부를 쪄야 하는 사람은 대를 이어 두부를 쪄야 하고, 대장장이는 하기 싫어도 대장장이 노릇을 대를 이어가며 해야 했다.

자신은 업종이 안맞아 하기 싫다고 어디로 도망을 칠 수도 없다.

자신이 속한 번 외에는 허가 없이 다른 번으로도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어기면 바로 사무라이 한테 한칼에 제거 된다.

그러니  뭐든 대를 이어 한 업종만 파고 드는데 장인이 안 될 수가 있나?

예전엔  목숨을 담보로 한 분야의 달인이 되는 것이 이제는 전통이 되어 버렸다.

 

사무라이한테  칼 맞아 죽기 싫으니 당연히 사무라이 앞에서 '하잇! 스미마셍! ' 외치며 머리 숙이고 바로 납짝 절을 할 수 밖에 없다.

일본인이 예의범절을 잘 지키는 이유도 칼 맞아 죽지 않을려고 어쩔 수 없이 나온 행동이다.

물론  메이지 유신 이후 신분제는 없어졌지만 지금 까지도 달인이나 장인들의 명맥을 이어 오고 있는 것이다.

이게  다 사무라이 문화 때문이다.

 

 

얼마전 작고한 일본 만화가 '도리야마 아키라'의   드래곤 볼을 보면 등장 인물들의 '전투력 측정' 이 나온다.

먼저 싸우기전에 스카우터 라는 전투력 측정기를 끼고  상대편의 전투력을 측정하는 장면들이 나오는데 내가 학창시절 처음 접했을 때는 굉장히 신선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만화 속의 이런 모티브도 일본 계급사회의 산물인 것이었던 것이다.

 

 

전국시대 다이묘들은 실력의 강함을 쌀 생산량으로 나타내었는데  예를 들어 도쿠가와 이에야스 400만섬, 마에다 가문 102만섬, 모리 가문 100만섬 ,다테 마사무네 100만섬 영주라 표현했다.

1섬은 현대의 기준으로 150키로, 만섬은 약 200~250명 규모의 병사를 키워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쌀 생산량이 곧 전투력이 되는 것이다.

이걸  통해 보면 전투력 측정은 만화에만 나오는게 아니라 이미 센코쿠시대(전국시대) 부터 존재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일본의 사무라이 계급제는 장인 문화와 예절 문화을 탄생 시켰고 오늘날 오타쿠 문화 까지 탄생시킨 셈이다

그  사무라이 문화의 근간은 어쩌면 불교 와도 관계가 있을 것 같다는 내 개인적인 견해이다.

 

이번에 읽은 책<일류의 조건>은 닛뽕색이  강한 자기 계발서 이지만 일본인들의 장인 문화와 연결해서 생각해 보니 나름 재미 있게 읽었다.

책을 덮고 생각해 보니 일본에서는 장인 정신을 나중에 불교의 선에서 말하는 선의 경지로 승화 시킨면이 있는 것 같다.

다도(茶道)'다선일체(茶禪一體)', 검도(劍道)'검선일체(劍禪一體)'  같은 그런 말들이 괜히 나온게 아니다.

달인이 된다는 것은 숙달의 깊이가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도달하는 것을 뜻하고 그것은 평상시 수행과 관련이 깊은 것이다.

()에서는 '무엇이든지 깊어지면 선이 된다' 고 했다.

그들이 추구하는 달인의 경지는 그래서 선의 경지와 통하는 면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모리카와 아오이가  예능에서 보여주는 달인의 경지를 훔치는 능력은 새삼 참 부럽다.

 

훔치려면 가치를 알아 볼 수 있는 보는  눈이 먼저 있어야 한다.

당나라때 한유(韓愈:768~824) 라는 사람이 쓴 글에 이런 문장이 있다.

<世有伯樂,然後有千里馬 (세유백락,연후유천리마 ) 세상엔 백락이 먼저 있고 난후 천리마가 있다.

千里馬常有,而伯樂不常有(천리마상유,백락불상유) 천리마는 항상 있지만 백락은 항상 있지 않다.>

 

백락은 천리마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을 말한다.

천리마는 일반말과 달라서 똑같은 양식을 줘서 키우면 안된다고 한다.

일반말의 몇배에 해당하는 먹이를 먹이고 공을 들여야 한번에 천리를 뛸 수 있는 말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천리마를  볼 줄 아는 사람이 없다면 천리마는 일반말과 섞여 있어 어느게 천리마 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천리마는 항상 있어 왔지만 그 천리마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은 항상 있질 않다는 뜻이다.

어쩌면 훔치는 능력 보다 가치를  알아보는 눈을 가지는게 우선 순위에 둬야 하지 않을까?

진정한 일류가 되기 위해서는 메뉴얼을 넘어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부분까지 훔쳐서 체화해야 한다. - P35

요약의 기본은, 핵심을 남기고 그 외의 주변 요소는 과감히 ‘버리는 것‘ 이다... 무작정 쳐내는 것이 아니라, 남겨둔 핵심 속에 어떤 형태로든 녹여,버려지는 요소에도 가치를 부여 하는것, 이것이 요약의 가장 이상적인 요약이다. - P62

전혀 다른 상대의 기술을 경험하면서 상대를 제압해 나가는 관계는 단순히 주고받는 관계 이상으로 창의적인 관계다. 이 관계 속에서는 서로의 스타일이 더욱 명확해진다. - P167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을 선명하게 의식하면 숙달에 이르는 데 가속도가 붙는다. - P219

집중력이라는 것은 ‘의식 조각‘의 양, 즉 의식이 많고 적음이라고 생각한다..... 초능력이란 집중력. - P222

달리기와 식사와 글쓰기, 그 모든 것들이 ‘크로스‘해 있다는 사고방식이 있으면, 실제로 그것들이 가지는 연관성 이상으로 숙달을 촉진하게 된다... 움직이든 달리기든 반복해서 그 리듬을 몸에 스며들게 만들어 그것을 글쓰기에 활용한다. 독자의 신체가 작가의 신체에 동조 하기도 하고 호응하기도 한다. -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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