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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25

오늘의정진: 我師得見燃燈佛(아사득견연등불)나의 스승 부처님께서는 연등불을 만나뵙고


- 100일 정진, 42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마흔 한 번째 구절은

<縱遇鋒刀常坦坦, 假饒毒藥也閑閑 /종우봉도상탄탄, 가요독약야한한

창칼을 만나도 언제나 태연하고 , 만일 독약을 마실지라도 한가롭고 한가롭다.> 였다.


생사로 부터 자유로워지면 어떠한 사지(死地)에 있더라도 걸림이 없게 된다.

아무리 위험한 곳이라 해도 털 끝 만큼 해를 입힐 수 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탄탄한한(坦坦閑閑)한 마음이 저절로 들 수 밖에 없다.


오늘은 마흔 두 번 째 구절

我師得見燃燈佛 (나 아, 스승 사, 얻을 득, 볼 견, 불탈 연, 등잔 등, 부처 불)

아사득견연등불 /나의 스승 부처님께서는 연등불을 만나뵙고는

多劫曾爲忍辱僊  (많을 다, 위험할 겁, 거듭 증, 할 위, 참을 인, 욕 욕, 춤출 선)

다겁증위인욕선 / 다겁생 동안 인욕선인이 되셨다.


연등불, 즉 연등부처님은 석가 여래가 현세에 오기전 과거생에 존재했던 24분의 부처님 중의 한 분이시다.

붓다가 고타마 싯다르타로 환생하기 아주 오래전 '수메다(sumeda 한문으로는 선혜: 善慧)' 라는 수행자로 살았었다.

어느날 그 시대의 부처님이신 연등불이 자기가 머무는 지역을 지나간다고 하자 수메다는 곧바로 연등부처님을 뵙고자 뛰쳐 나갔다.

그런데 때마침 마주친 연등불 께서 지나는 길이 진흙 길이라 수메다는 자신의 머리를 풀고 땅에 엎드려 버렸다. 

연등부처님을 뵙자 저절로 올라오는 공경심으로 인해 차마 부처님으로 하여금 진흙 길을 밟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차라리  스스로가 진흙 땅 위에 엎어져 자신을 밟고 가시라고 한 것이다.

그런 후에 일곱송이 연꽃을 연등부처님께 바치자 이에 탄복한 연등불은 그자리에서 수메다에게 수기(受記)를 내리셨다.

수메다는 내세(來世)에 반드시 깨달음을 얻어 석가모니 부처가 된다는 예언이었다.


금강경(金剛經) 17분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 끝간데 없이 내가 없음이라) 에서 이러한 일화가 자세히 나온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아뇩다라 삼먁삼보리를 얻을 만한 법이 있었느냐?"

"있지 아니 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의 뜻을 이해하기로는, 부처님께서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만한 법이 따로 있지 않았습니다."

수보리야! 만약 법이 있어서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셨다면, 연등부처님께서 나에게 수기를 내리시면서, '너는 내세에 반드시 석가모니라 이름하는 부처가 되리라'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진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연등부처님께서 나에게 수기를 내리시면서, '너는 내세에 반드시 석가모니라 이름하는 부처가 되리라' 말씀해 주신 것이다.> (17 구경무아분 중에서)


금강경은 () 대한 핵심이 부처님과 제자 수보리 간의 대화 형식으로 담겨져 있다.

우리나라 조계종에서는 금강경을 소의경전(所依經典) 으로 삼았다.

이러한 금강경에서 과거 연등불과 현세의 석가 여래불의 인연이 언급된 것이다.

그런데 설사 연등불에게 내세에 석가모니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를 받았다고 해도 단박에 부처를 이룰 수는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없이 많은 생을 지나며 인욕선인이라 불려 만큼 몸이 찢겨지는 고통을 견디며  둘로 보지 않는 수행 했었기 때문이다.


금강경 14 이상멸적분(離相滅寂分 상을 떠나야 적멸함 이라)에서 이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내가 나의 뿌리 자성왕에게  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고행을 했어도 그때에 나는 모든 상을 무심으로, 정신과 물질을 둘로 보지 않았으며 나다, 내가 했다, 내가 위대하다든가 그런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나의 육신이 내면 부의 채찍에 사지가 마디마디 찢기는 듯 아파도 만약에 모든 상이나 물질에 치우쳐 둘로 생각했다면 자기 탓인줄도  모르고 남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행 스님의 뜻으로 금강경  중에서)


이러한 일화들을 보면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된다는 것은 단지 한 생의 수행만으로 얻어지는 성과가 아닌 것이다.

아득한 과거생에서 부터 이어져온 인과(因果) 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일일 소견>

모든 것이 나로 부터 벌어진 일이다. 내 탓이요, 내 탓이로다.

남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내지 않기를... 아직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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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05 22: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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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24

오늘의정진: 縱遇鋒刀常坦坦 (종우봉도상탄탄창칼을 만나도 언제나 태연하고


- 100일 정진, 41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마흔번 째 구절은 

<行亦禪座亦禪 語默動靜體安然 /행역선좌역선 어묵동정체안연

다녀도 참선이요앉아도 역시 참선이니 어묵동정에 본체가 편안하게 되리라> 였다

 

수레는 내 몸을 뜻하고 소는 내 마음 자리를 뜻한다.

내가 수레를 모는 마부라면 나는 수레를 쳐야 하는가소를 쳐야 하는가?

내 몸을 끌고 다니는 마음을 쳐야 한다.

앉아 있는 부처의 형상만을 따라하는 것이 참선이 아니다

음식을 만들고밥을 먹고차를 마시고오줌 싸고일을 하고누군가를 만나고책을 읽고운전을 하고빨래를 하고청소를 하고잠을 자는 모든 일들이 참선이 되야 한다

아니 본래 참선 아님이 없다.

자리에 앉아 가부좌를 트는 것만이 참선이 아니다.

글을 쓰는 이 순간도 참선이 되는 것이다.

나의 모든 일상이 깊어지면 선이 된다

생활이 곧 선이란 선지식의 말씀이 바로 그런 의미 이다

 

오늘은 마흔 한 번 째 구절

縱遇鋒刀常坦坦 (세로 종만날 우뾰족할 봉칼 도항상 상평탄할 탄평탄할 탄 )

종우봉도상탄탄 /창칼을 만나도 언제나 태연하고

假饒毒藥也閑閑 (거짓 가넉넉할 요독할 독약 약어조사 야한가할 한한가할 한)

가요독약야한한 / 만일 독약을 마실지라도 한가롭고 한가롭다.

 

행주좌와(行坐卧)에 구애됨이 없으며어묵동정(語默動靜)에 자유로운 사람은 곧 수처작주, 입처개진(随处作主,立处皆真) 한 사람이다.

즉 가는 곳 마다 주인이 되고서는 곳 마다 진리가 되어진다.

우리는 각자가 세상이라는 무대의 주인공이 되어 가는 곳마다 진리가 되게 하는 대자유인으로 살아야 한다.

이러한 이에게는  설사 창칼이 난무하는 곳에 가더라도 탄탄(坦坦하고또한 독약을 마시는 경우가 생길 지라도 한한(閑閑하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경우에서 걸림 없이 태연자약(泰然自若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노자(老子b.c 571~471) 의 도덕경(道德经)에도 이와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개문선섭생자(盖闻善摄生者)듣건네 섭생을 잘하는 사람은

륙행불피시호(陆行不避兕虎)육지에서 코뿔소나 호랑이을 만나지 않고

입군불피갑병(入军不被甲兵)전쟁터에서 창칼에 상해를 입지 않는다.

시무소투기각(兕所投其角)그 뿔로 들이 받을 곳이 없고

호무소조기조(虎所用其爪)호랑이의 발톱이 할퀼 곳이 없으며

병무소용기인(兵所容其刃)창칼이 파고들 곳이 없다.

부하고(夫何故)어찌 그러한가?

이기무사지언(以其死地焉)그에게는 죽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죽을 자리가 없다는 것은 본래 나고 죽음이 없는 생사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영화적 상상력을 동원하면 매트릭스에서 네오에게 무수히 많은 총알을 쏴도 전부 피하는 것처럼깨달은 도인에게는 전쟁터의 쏟아지는 화살과 찔러대는 창 끝을 전부 빗겨가는 것과 같다

걸림 없이 사는 주인공의 삶이란 그런 것이다.

 

<일일 소견>

설연휴도 이제 끝났다.

다시 시작하는 한 해걸림 없이 살기 위해오늘도 마음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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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23

오늘의정진: 行亦禪座亦禪 (행역선좌역선다녀도 참선이요앉아도 역시 참선이니


- 100일 정진, 40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서른 아홉번 째 구절은 

<自從認得曹溪路了知生死不相干 /자종인득조계로요지생사불상간

조계의 길을 인식하고 부터는 생사와 상관없음을 분명히 알았다.> 였다

 

영가스님(永嘉665713)은 마침내 혜능선사(慧能 638713)를 만나 본래 마음자리는 생사를 초월 하였음을 확실하게 인가를 받았다

이제 영가스님은 더이상 조계에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지체 없이 곧 바로 혜능선사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 떠나려 했다

혜능선사의 영가스님을 향한 마지막 점검이 시작되었다.


왜 그리 빨리 돌아 가려는가?”.

본래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데 어찌 빠름이 있겠습니까?”

누가 움직이지 않는 걸 아는가?”

남이 없음이 어찌 뜻이 있겠습니까?”

뜻이 있다면 누가 분별하느냐?”

분별하는 것도 뜻이 아닙니다.”

장하구나창과 방패를 들었구나하룻밤만 쉬어 가거라.” 하고 혜능선사는 만류했다.

그렇게 영가스님은 혜능선사의 문중에 딱 하룻밤을 묵고 가게 된다.


영가스님과 육조혜능과의 인연은 단지 하루 뿐이었다

이후 이런 영가스님을 두고 일숙각(一睡이란 별칭이 생겼다.

그후 두 스님은 세상에서 더이상의 연()은 없었다고 한다.

713두 분 모두 같은 해에 원적(圆寂) 하였다

 

오늘은 마흔번 째 구절

行亦禪座亦禪 (행할 행또 역고요할 선자리 좌또 역고요할 선 )

행역선좌역선 /다녀도 참선이요앉아도 역시 참선이니

語默動靜體安然(말씀 어침묵 묵움직일 동고요할 정몸 체안정 안그러할 연 )

어묵동정체안연 / 어묵동정에 본체가 편안하게 되리라

 

영가스님은 먼 길을 돌아 마침내 조계에서 스승을 만났다.

그리고 스승에게 확실한 깨달음에 대한 증명을 받았다

이제는 무엇을 해도 함이 없이 하게 된다

고요하고 깊어진 마음 자리가 바로 참선이다

행주좌와(行走坐卧), 어묵동정 (語默動靜의 상태즉 행하고 머물고 앉고 눕는 가운데에서 또 말하고침묵하고움직이고고요하든 어떤 상황에서도 도()를 떠나지 않는다

본체가 편안하니 아무 걸림이 없다


혜능선사 이후 수 많은 선의 대가들이 출현하였다

그 가운데 마조스님이 가장 출중 했다고 알려진다

마조도일(马祖道一 709~788 스님이 깨닫기 전에 아주 열심히 참선을 하며 수행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남악회양(南岳怀让 677744) 선사가 곁에 와서 보더니 물었다.

그대는 좌선을 해서 무엇을 하려는 가?”

마조는 답했다

부처가 되려고 합니다.”

그러자 그 답을 들은 남악회양 선사는 어디서 벽돌 하나를 가져 왔다.

그리고는 마조스님 옆에서 벽돌을 갈기 시작했다.

마조는 남악회양의 이상한 행동에 묻기 시작했다,.

스님은 지금 벽돌을 갈아서 무엇에 쓰시렵니까?”

이걸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네.”

아니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이 됩니까?” 하며 마조는 어이가 없었다.

벽돌을 갈아서 거울이 될 수 없다면그대는 어찌 좌선을 한다고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이 말에 마조는 깨닫는 바가 생겼다.

그럼 어찌 해야 합니까?” 마조는 물었다.

부처는 형상이 아니다앉아 있는 부처를 배운다면 그것은 부처가 아니다.

어느 것에도 마음이 머무르지 말아야 한 다네

행주좌와 어묵동정 속에 부처가 있는데 그대는 어찌 좌선에 집착하는가?

수레를 칠 것인가소를 칠 것인가?”


<일일 소견>

묵묵히 좌선을 한다고 깨달음을 얻는 게 아니다.

무엇을 칠 것인가스스로에게 자문자답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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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22

오늘의정진: 自從認得曹溪路 (자종인득조계로조계의 길을 인식하고 부터는


- 100일 정진, 39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서른 여덟번 째 구절은 

<遊江海涉山川 尋師訪道爲參禪 /유강해섭산천 심사방도위참선

강과 바다에 노닐고 산과 개울을 건너서 스승찾아 도를 물음은 참선 때문이라> 였다


눈 밝은 스승을 만나기 위해 물을 건너고 산을 지나는 여정을 거쳐야 했다.

스승은 내가 보지 못하는 곳을 볼 줄 안다

그래서 스승에게 점검을 받는 것이다

스승에게 도를 물을 때는 나의 모든 것을 내던져야 한다.


오늘은 서른 아홉번 째 구절

自從認得曹溪路 (스스로 자쫓을 종인정할 인얻을 득마을 조시내 계길 로)

자종인득조계로 조계의 길을 인식하고 부터는

了知生死不相干 (마칠 료알 지날 생죽을 사아닐 불서로 상방패 간 )

요지생사불상간 / 생사와 상관없음을 분명히 알았다.


드디어 증도가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에  도달했다.

조계의 길은 바로 육조 혜능선사(六祖慧能禅师638713)를 만나러 간 길이다.

육조혜능이 누구인가?

지금 선종(禅宗)이라 부르는 동아시아 불교의 주류 종파를 세운 인물이요.

일자무식 가난한 나무꾼 출신에서 일약 선종을 세운 조사(祖师)가 된 불세출의 인물이 아니던가?

혜능은 우연히 듣게 된 금강경의 한 구절응무소주이생기심(应无所住而生其心) 즉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는 한마디에 깨달음을 얻었다

그 뒤에 오조홍인(五祖弘忍601674)을 찾아간 혜능은 그의 문하에서 부처님으로 부터 전해 지는 의발(衣钵 가사와 바루)를 전수 받고 결국 육조(六祖)가 된다.


조계는 바로 육조 혜능이 만년에 머물렀던 조계(漕溪)라는 지역명을 일컫는다

한국불교의 가장 대표 종파인 조계종은 바로 육조대사가 거처했던 바로 이 조계에서 유래한 것이다.

조계는 선불교의 총본산으로 삼는다. 

그렇다면 대한불교 조계종은 바로 육조 혜능 선사의 선불교의 법맥을 이어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나라 조계사 또한 그런 의미에서 선종 사찰인 셈이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면서 당신의 의발 즉 입고 계시던 가사와 공양에 쓰시던 바루를 다음 후계자에게 전수 했다고 한다그것이 의발의 시초이다.

수행자에게는 사유 재산이 없다

바로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기 때문에 바루를 그릇 삼아 걸식을 한다

그러니 가사 장삼과 바루가 수행자에게 유일한 자산인 것이다.

의발 전수는 스승이 가진 모든 것을 제자에게 전하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녔다


그렇게 부처님의 의발은 인도에서 27대 까지 내려 온다

그후 28대에 이르러 그 유명한 달마대사에게로 전해지게 된다.

달마대사 시기에는 이미 불법은 인도에서 쇠망해졌고 결국 동쪽으로 법을 펼치기 로 결심 한다

여기서 달마서래의(达摩西来意)’ 라는 화두가 등장하게 된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바로 동쪽에서 다시 불법을 일으키기 위함이었다

그 동쪽, 중국의 소림사(少林寺)에서 만난 혜가(慧可 487593)를 시작으로 중국에서 선종(禅宗의 싹을  심게 되었다.

그래서 선종은 달마대사를 초조(初祖)로 삼아 이조혜가삼조승찬사조도신오조홍인의 전수를 거쳐 육조혜능에게 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제 혜능에 이르러 선종은 자라나 동쪽에서 완전히 만개하기에 이른다

혜능이후 수 많은 수행자들이 등장하였고 모두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혜능이후 선불교는 크게 융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선종의 맥은 우리나라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다시 영가스님의 시점으로 돌아가 보면 조계의 길은 영가스님이 육조혜능을 만나러 온 길이다

영가스님은 본래 혜능선사의 선종계열의 문하가 아니다

사실 불교에는 많은 종파가 있다

부처님 법은 하나이지만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이 다양하기 때문에 그 각각의 방식에 따라 종파가 나뉘어지게 되었다

또 종파안에서도 어느 스승의 가르침을 받았느냐에 따라 문중(门中)으로 갈라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기독교와 달리 이단 논쟁이 전혀 없다

정통이란 것이 본래 없기 때문이다모두가 부처님 법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가스님은 원래 천태종(天台宗계열에서 출가하여 유마경(维摩经)을 보다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우연히 만난 선종의 현책스님을 만나서 육조혜능에게 가서 깨달음에 대한 인가를 받으라고 권유를 받게 된다

그렇게 영가스님은 육조스님을 만나러 조계에 이르게 된 것이다.


영가스님과 육조스님의 첫 만남바로 선문답이 시작된다.

영가스님은 육조스님에게 절도 하지 않고 육조스님 주위를 세번돌고 떡하고 서 있는다.

그러자 육조스님은 묻는다.

사문은 누구이길래 이렇게 도도하고 아만이 높은가?”

그러자 영가스님은 답한다.

나고 죽는 일이 크고 무상은 너무도 빠르기 때문입니다.”

이에 육조스님은 어찌하여  ()이 없음을 체득하여 빠름이 없는 도리를 요달하지 못하는가?” 하고 다시 되 묻는다.

이때 영가스님은 곧 바로 답한다.

본체는 곧 남이 없고 본래 빠름이 없음을 요달 하였습니다.”

육조스님은 그래네 말이 맞다네 말이 맞다.”


<了知生死不相干 요지생사불상간>

바로 이때 본래 마음 자리는 생사에 상관이 없다는 것을 영가스님은 깨우친 것이다.

이후 영가스님은 육조스님에게 정식으로 지극한 마음으로 삼배의 절을 올리게 된다.

깨달음의 인가를 주고 받은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 아마 전체 증도가 구절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아닐까 싶다.

본래 나고 죽음이 없는 마음 자리를 깨닫게 되는 그 순간을 생각하면 감격스러워진다.

<일일 소견>

의발은 무를 증명하기 위한 유가 아닐까무는 유를 통해 증명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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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21

오늘의정진: 遊江海涉山川 (유강해섭산천강과 바다에 노닐고 산과 개울을 건너서


- 100일 정진, 38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서른 일곱번 째 구절은 

<香象奔波失却威天龍寂聽生欣悅 /향성분파실각위천룡적청생흔열

향기로운 코끼리 분주하게 달아나 위엄을 잃게 되나천룡은 고요히 들으며 희열을 내는도다> 였다

본래 코끼리처럼 신성한 나의 마음이지만 한번 폭주하면 다시 안정시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잡아 근본으로 돌려 놓으면 마침내 고요해지며 선정의 기쁨을 맛 볼 수가 있으리

 

오늘은 서른 여덟번 째 구절

遊江海涉山川 (놀 유강 강바다 해건널 섭뫼 산내 천 )

유강해섭산천 강과 바다에 노닐고 산과 개울을 건너서

尋師訪道爲參禪 (찾음 심스승 사방문 방길 도할 위간여할 참고요할 선 )

심사방도위참선 / 스승찾아 도를 물음은 참선 때문이라

 

이제 부터는 영가선사의 구도(求道)이야기가 펼쳐지는 구절이다.

()은 마음을 깨치는 수행이다.

마음을 깨우치는 수행은 혼자서는 이룰 수가 없는 수행이기도 하다.

반드시 깨우칠 수 있는 인연이 있어야 한다.

역대 수 많은 선지식들은 모두 스승을 만나고 깨우침을 얻었기 때문이다.

깨우침은 반드시 스승에게 인가(认可)를 받아야 한다.

자신의 깨우침이 정말로 바른 것인지문제가 없는 깨달음인지는 스승이 직접 보고 판단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이때 깨우침을 점검하는 수단을 선문답(禅问答)으로 사용한다.

선문답을 통해서 깨우침을 점검하기도 하지만 또한 선문답을 통해서 깨우침을 얻기도 한다.

오늘날 선은 중국에서 발달한 불교의 종파로 있지만 사실 선의 기원은 부처님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처님 당시에는 훌륭한 제자들이 아주 많았다

그중에서 가장 뛰어난 제자를 10대 제자라 부른다

지혜제일 사리자해공(解空)제일 수보리신통제일 목건련등 10대 제자들은 저마다 뛰어난면이 있었다.

그 10대 제자중에서도 마하가섭(摩诃迦叶마하카사파)은 두타(头陀)제일 이라 하여 의식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고행(苦行)과 걸식(乞食)을 하며 어느 한곳에 머물지 않고 떠도는 수행을 가장 잘했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 국악 곡조에도 있는 영산회상 당시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시려고 대중을 앞에 두고 자리에 앉으셨다.

그때 하늘에서 연꽃 한 송이가 하늘하늘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부처님이 허공 중에서 떨어지는 연꽃 한 송이를 잡아 들어 아무말 없이 대중들에게 내 보이셨다

(이걸 선에서는 염화시중 (拈花示众)이라고 한다.)

대중들은 부처님께서 치켜든 연꽃 한 송이가 무엇을 의미 하는지 몰라서 다들 모두가 어리둥절했다.

그 가운데 오직 마하가섭만 부처님을 향해 빙긋히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것을 선에서는 염화미소(拈花微笑라고 한다.)

그러자 부처님은 마하가섭의 미소를 보시고는 마하가섭만이 부처님의 뜻을 알았다며 인가를 해주셨다

이를 두고 이심전심(以心传心)이라 하여 오직 마음과 마음으로만 전해지는 선의 유래가 시작된 것이다

그외에도 마하가섭은 다자탑이란 곳에서 부처님과 나란히 앉을 수 있는 인가를 해주었다는 다자탑전분반좌(多字塔前分半座와 부처님 열반 후 부처님을 관에다 모셨는데 마하가섭이 도착하자 관 밖으로 부처님 발이 나왔다고 하는 곽시쌍부(椁示双趺)등의 삼처전심(三处心)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처럼 선은 부처님 당시부터 기원하여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졌다고 한다

 

깨달음에 대한 갈망은 스승을 찾는 갈망과 비례한다

강과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고 개울을 건너서 스승을 찾는 것은 참선 때문이라.

참선은 선이다이제 영가 스님의 깨달음을 구하는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일일 소견>

스승의 의미는 수행자에게는 부모와도 같으시다.

육의 부모가 아닌 법의 부모도를 구한다는 것은 법의 부모를 찾는 것이다.

제자가 스승을 알아보고 스승이 제자를 알아보는 것이것이 이심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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