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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년 112

오늘의정진: 摩尼珠人不識 (마니주인불식) 마니주를 사람들은 알지 못하니


- 100일 정진, 18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열일곱 번째 구절은 

<直截根源佛所印, 摘葉尋枝我不能(직절근원불소인적엽심지아불능)

근원을 바로 끊음이 부처의 도장을 받는 것이요.

잎을 따고 가지를 찾음은 내 할 바가 아니요.> 였다


눈에 보이는 현상만으로는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그 현상이 나타난 본질은 눈에 띄질 않는다

그러니 항상 현상의 본질이 되는 근원을 찾아내야 한다.

아니 근원이 보여져야 한다오직 근원만을 관할 뿐이다.

 

오늘은 열여덟 번째 구절

摩尼珠人不識 (갈 마중 니구슬 주사람 인아닐 불알 식  )

마니주인불식마니주를 사람들은 알지 못하니

如來藏裏親收得(같을 여올 래숨길 장속 리친할 친거둘 수얻을 득)

여래장리친수득 / 여래장 속에 친히 거둬 들임이라.

 

마니주는 신비한 빛을 발하는 구슬이다본래 마니주는 맑고 텅 빈 구슬이라고 한다

하지만 비추는 대상에 따라 색깔이 달리 나타난다고 한다

오색을 비추면 오색 빛을 발하고 푸른 색을 비추면 푸르게 발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보물 같은 구슬마니주의 속성이 우리의 참마음과 닮았다.

그러한 마니주를 사람들 마다 각자 다 가지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자신의 본성이 바로 부처임을 사람들은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중생들이 본래 부처가 될 수 있다’ 는 사상이 바로 여래장사상 (如來藏思想) 사상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을 지녔다.

깨달음의 가능성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그러한 본성이 바로 마니주와 같아서 내 안에 있음에도 사람들은 모른다

왜냐면 어제의 구절에서도 언급 되었는데 나무의 뿌리는 분명히 땅속에 묻혀 있다

그런데 흙에 가려 보이지 않듯이 우리 마음의 마니주 또한 그러한 것이다

우리의 참된 성품은 욕심과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으로 늘 가려져 있다.

이러한 무명으로 가리워진 나의 참 성품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감추어진 여래장을 발견하게 된다면 언제든지 꺼낼 수도 있고 다시 또 감춰둘 수 있게 된다

바로 내 마니주를 내가 마음대로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보배 구슬그 마니주를 이제는 꺼내야 할 때다.

 

<일일 소견>

찬란한 오색 빛이 바로 내 본성품이 아니다

오히려 빛 깔 없음이 본래 나의 색 이어라.

오묘하지만 오묘함이 없음 이여.

나의 본 마음은 그렇게 빛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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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1-12 2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니‘가 ‘옴마니반메훔‘의 마니인가요?
예전 네팔 여행할때 만난 불교인이 알려주길 ‘마니‘는 여의주를 의미하며 ‘반메‘는 원래 어원이 ‘파드메‘ 인데 연꽃을 의미한다고 하더군요. 진흙 속에서 피는 연꽃이며 어둠에서도 빛나는 여의주라 탐진치를 정화한다는 의미라고 하더군요.

마힐 2025-01-12 22:56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마니는 구슬 같이 빛나는이란 뜻 이에요.
이무기가 용이 되려면 여의주를 물어야 하늘로 승천한다는 전설도 있잖아요.
여의주는 뜻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보배 구슬이라는 거죠.
손오공의 여의봉이 크고 작고를 자유자재 하잖아요.
불교에서 여의주는 잉크냄새는 말씀 처럼 탐친치를 정화 하는게 맞지요.
그런데 사람들 누구에게나 마니주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 마니주가 바로 우리의 참 성품, 주인공, 불성, 참나 라고도 부른답니다.
내 안에 자비와 지혜를 가지고 있단 거지요.
옴마니반메훔도 결국 지혜와 반야가 온 우주에 충만하라는 뜻이 있어요.
내 안의 여의주를 자유자재하고 쓸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 모든 깨달으신 선지식들 께서 공통적으로 하시는 말씀이지요.
잉크냄새님도 자신에게 있는 마니주를 꺼내서 자유자재 하게 쓸 수 있으시길 기원 드리겠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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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년 111

오늘의정진: 直截根源佛所印 (직절근원불소인) 근원을 바로 끊으면 부처의 도장 받을 것이요.


- 100일 정진, 17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열 여섯 번째 구절은 

<決定說表眞承, 有人不肯任情徵 (결정설표진승유인불긍임정징 )

결정된 말씀과 참됨의 나타남을 따라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긍정치 않고 정에 따라 구하고 있다> 였다


확실한 진리의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따라 가는 사람과 그렇지 못하고 전혀 다른 길로 가는 사람들이 있다

아는 사람이 볼 때는 분명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그 또한 그 사람들에게는 필요한 과정일 수도 있다.

비록 헤매고 고생은 하겠지만 자신의 목적지만 결코 잊지 않는다면 결국 다 같은 목적지에서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헤르만 헤세가 말하지 않았던가?  모든 진리의 반대도 마찬가지로 진리라고


 

오늘은 열 일곱 번째 구절

直截根源佛所印 (곧 직끊을 절뿌리 근근본 원부처 불바 소도장 인  )

직절근원불소인근원을 바로 끊으면 부처의 도장 받을 것이요.

摘葉尋枝我不能 (딸 적잎 옆찾을 심가지 지나 아아닐 불능할 능)

적엽심지아불능 / 잎을 따고 가지를 찾음은 내 할 바가 아니요.

 

불교에서는 진리에 대한 비유를 나무로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나무는 땅 속 깊이 뿌리가 있고땅 위로 줄기를 따라 가지와 잎들이 뻗어 나와져 있다.

뿌리는 흙에 덮혀 눈에 보이지 않고가지와 잎은 눈에 보인다.

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위 세계와 눈에 보이는 유위 세계로 나눠서 설명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나무에 뿌리가 없다고 할 수 있는가?

눈에 보이는 것 만이 다가 아니라는 뜻이다.

무위법과 유위법이 함께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세계이다

어느 하나만으로 세계는 구성되지 않는다


나무 가지와 잎에다가 물과 양분을 준다고 나무가 자라는 게 아니다.

나무 뿌리에다 양분을 줘야만 나무의 가지와 잎에도 영양분이 공급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뿌리가 나무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이러하기 때문에 흙에 가려진 땅속의 뿌리를 내 보이지 않는 불성과 같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번 구절에서는 근원을 바로 끊으라고 한다

진리깨달음도를 얻으려면 바로 나무의 뿌리를 찾아 파고들어 캐어내 야지무슨 가지와 잎을 딸 것인가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을 찾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바로 뿌리를 찾지 않고가지와 잎을 따려고만 하는 것과 같다.

눈 앞에 보이는 가지와 잎이 진리가 아니란 말이다.

진리는 땅 속에 가려진 나무 뿌리와 같다

그러니 밖에서 찾지 말고 안에서 찾자고 선지식들 께서는 말씀 하신다.

내 몸 밖에서 헤매지 말고 내 안의 근원으로 바로 들어가라

바로 그것만이 부처에게 도장(佛印)을 받는 것 깨달음의 인증을 받는 것 이라고 영가현각(永嘉玄覺 665~713)스님은 말씀 하신다

 

<일일 소견>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마음의 눈이 어서 빨리 떠지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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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110

오늘의정진 :決定說表眞承(결정설표진승결정된 말씀과 참됨의 나타남을 따라야 함에도


- 100일 정진, 16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열다섯 번째 구절은

<諸行無常一, 卽是如來大圓覺 (제행무상일체공, 즉시여래대원각)

모든 행은 고정 됨이 없어 일체가 전부 공하였으니,

바로 이것이 여래의 크고 둥근 깨달음이어라> 였다.


무상(無常) 함은 헛 된 것이 아니라, 고정 되지 않고 돌아가는 것이 진리이다.

진리는 공() 하다. 공은 텅 비었다고 표현하지만 보이지 않는 충만함이다.

원자의 99.9% 가 빈 공간이지만 모든 물질을 구성 하듯이 공 또한 비어 있지만 세상에 충만해 있다

그걸 볼 수 있다면 깨달음이어라.

텅 빈 충만함이 보이는가? (군불견: jun bu jian)! 그대여 보여지는가?


오늘은 열여섯 번째 구절

決定說表眞承 (결단할 결, 정할 정, 말씀 설, 겉 표, 참 진, 따를 승  )

결정설표진승 / 결정된 말씀과 참됨의 나타남을 따라야 함에

有人不肯任情徵 (있을 유, 사람 인, 아닐 불, 즐길 긍, 뜻 정, 구할 징)

유인불긍임정징 / 어떤 사람은 긍정치 않고 정에 따라 구한다.


여래의 큰 깨달음은 제행무상(諸行無常) 하여 공()을 증득한 것임을 분명히 앞에서 밝혔다.

그래서 결정된 말씀, 결정설(決定說)이란 것이다.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참된 것이라 진표(表眞)이고 공부하는 수행자라 한다면 반드시  따라야 함()이다.

하지만 유인(有人), 즉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긍정하지 하지 않는다.

즉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래의 깨달은 바를 분명히 드러내 보였음에도 사람들은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사견(私見) 대로 법을 구한다는 것이다.

앞서 깨달은 분들이 하는 말씀에 대해서 믿지 못하고 자기 생각대로 도를 구하거나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경책(警策)의 말씀이.


원래 경책은 선방(禪房)에서 참선(參禪)하는 스님들에게 죽비()로 어깨를 가볍게 치는 것을 뜻한다.

화두를 참구()하다가 얼핏 잘못하면 졸음에 빠지거나 자세가 흐트러질 때가 생긴다.

그럴 경우 죽비로 경책을 하여  수행자의 자세와 마음을 다시금 잡게 한다.

그래서 이번 구절은 영가현각(永嘉玄覺 665~713)스님의 간곡한 경책에 해당하는 말씀이다.


決定說表眞承, 有人不肯任情徵 /결정설표진승, 유인불긍임정징

결정된 말씀과 참됨의 나타남을 따라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긍정치 않고 정에 따라 구하고 있다.


나도 역시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죽비 한방이 떨어진다.


<일일 소견>

큰 능력으로 나라를 돌보게 하옵소서.  둘이 아닌 한마음으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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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1-10 19: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스님이 휘두르는 죽비에 힘이 느껴집니다.
좀 감정이 섞인 것도 같고,,,맞고 나면 금방 깨우치실 듯 합니다.

마힐 2025-01-11 11:33   좋아요 0 | URL
하하하... 그러고 보니 스님께서 죽비로 내리치는 폼이 장난이 아닌 것 같네요.
죽비 한방, 깨달음 한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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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19

오늘의정진: 諸行無常一 (제행무상일체공) 모든 행이 무상하여 일체가 공하였으니


- 100일 정진, 15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열네 번째 구절은

<放四大莫把捉(방사대막파착) /사대에 놓아 붙잡으려 하지 말고

寂滅性中隨飮啄(적멸성중수음탁) /적멸한 성품중에 먹고 마실 뿐이다>  였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지,,,(地水火風) 사대(四大) 로 형성된 유위(有爲)의 세계와 적멸한 성품(寂滅性品)을 지닌 무위(無爲)의 세계가 함께 공존한다.

유위법과 무위법이 따로 있는게 아니다. 지금 이순간 함께 돌아가고 있다.


오늘은 열다섯 번째 구절

諸行無常一 (모두 제, 행할 행, 없을 무, 항상 상, 한 일, 온통 체, 빌 공)

제행무상일체공 / 모든 행이 무상하여 일체가 공하였으니

卽是如來大圓覺 (곧 즉, 바로 시, 같을 여, 올 래, 큰 대, 둥글 원, 깨달을 각)

즉시여래대원각/ 곧 바로 여래의 크게 둥근 깨달음이어라.


제행무상(諸行無常) 은 불교의 가장 기본 교리인 삼법인(三法印) 중의 하나이다.

() 은 도장이다. 법인(法印)은 법의 도장이다.

이것은 바로 붓다의 가르침() 이라는  도장() 을 찍어 보증한다는 뜻이 된다.

먼저 제행무상, 모든 행(諸行)하는 것은 무상(無常) 하다는 뜻을 살펴 본다.


무상에 대하여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성경의 전도서 구절에 나오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처럼 인생무상(人生無常) , 덧 없음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가 첫번째.

두번째 해석은 '없을 무()''항상 상()' 의 의미를  한자의 뜻 글자 그대로 항상() 함이 없다() 로 보는 것이다.

즉 우주의 모든 것은 변한다. 고정됨이 없이 항상 변화한다.

따라서 무상하다는 것은 모든 것이  덧 없음에 안타까워 하는 감정보다는 진리가 본래 고정됨이 없다는 관조적(觀照的)인 입장에 가깝다고 보여진다.

더구나 바로 뒤에 이어지는 일체공(), 즉 일체가 공하였다는 구절과 뜻이 맞으려면 역시 진리에 대한 관조적인 태도가 부합되는 것 같다.


<반야심경>에서는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도일체고액(度一苦厄)' 이라고 했다.

오온(五蘊) ,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물질, 감각, 형상, 행위, 지각 등이 모두 공() 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일체 고의 바다(苦厄)를 건널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곧 '우주 만물 모든 것은 본래 고정 됨이 없이 항상 변화하는 것이고 이는 곧 바로 공()하다' 는 뜻이다.


모든 인간은 생노병사(病死)를 피할 수 없다.

사는게 고()

아니 인간 뿐만 아니라 개나 소, 돼지 같은 동물들도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세상에 태어나 먹고 살기 위해서 인간과 동물의 의식 차원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일체개고(皆苦), 세상은 고통이라고 한 것이다.

고통의 세계, 우리가 사는 사바세계(娑婆世界)는 고통을 견디며 사는 곳이다.

육도(六道), 즉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계를 끊임없이 윤회를 하고 있다.

그러나 붓다는 고통에 잠식되지 않고 고통의 세상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려 주셨다.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고통이 되는 원인을 바로 보고 그 집착(執着)을 놓으라고 했다.

놓는 수행을 통해 결국엔 삼법인이란 깨달음을 얻으셨다.


세상엔 '' 라고 할 만한 고정된 법이 없음 (諸法無我 제법무아)을 알게 되었고, 모든 행하는 것엔 고정됨이 없음(諸行無常 제행무상)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모든 고통이 멸하게 되면 반드시 고요해진 열반에 이르게 됨 (涅槃寂靜)을 깨우쳤던 것이다.

고집멸도(苦集滅道) 고통은 집착에서 생기고, 그것을 멸하니 도를 얻었다.

이것이 바로 여래(如來)의 대원각(大圓覺) , 크게 둥근 깨달음 이란 것이다.


깨달음은 글로 어떻게 표현 할 수 없다.

그러니 깨치신 선지식(善知識)들께서는 깨달음을 일원상(一圓相)으로 표현 하신다.

모나지 않고 둥근, 진리가 돌아가는 형상과 의미를 함축한 뜻이라는 것이다.

그걸 이름하여 대원각이라 부른다.


諸行無常一, 卽是如來大圓覺 제행무상일체공, 즉시여래대원각

모든 행은 고정 됨이 없이 변하여 일체가 전부 공하였으니,

바로 이것이 여래(부처)의 크고 둥근 깨달음이어라.

<일일 소견>

생노병사는 피할 수 없지만, 고에는 잠식(蠶食)되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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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1-09 2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행무상이 여기서 나오는 구절이군요.
항상 상(常)은 불교든 도교든 영원한 화두군요.

마힐 2025-01-10 11:59   좋아요 0 | URL
사는게 화두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벌이고 행하는 게 다 화두죠.
그게 다 먹고 살기 위해서.... 꿈속을 헤메는게 우리 현실이란 거죠.
그래서 먹고 사는 걸 뛰어 넘는 마음을 먹는게 중요한 것 같아요.
마음을 먹고 마음으로 사는....
어제 보다 더 나은 오늘을 위해서 충만한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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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18

오늘의정진 放四大莫把捉  (방사대막파착) 사대에 놓아 붙잡으려 하지 말고


- 100일 정진, 14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열세 번째 구절은

<喚取機關木人問 (환취기관목인문) / 기관목인을 불러서 물어 보아라

求佛施功早晩成 (구불시공조만성) / 부처를 구하고 공덕 베푸는 일을 조만간 이루리다>  였다

생명이 없는 기관목인을 불러서 물어 보아라는 선문답(禪問答)이었다.

그대는 기관목인이 답하는 무정설법(無情說法)을 들을 수 있는가?

군불청(君不聽)? 그대 들리지 않는가? 기관목인이 답하는 것을...


오늘은 열네 번째 구절

放四大莫把捉  (놓을 방, 넉 사, 큰 대, 없을 막, 잡을 파, 잡을 착 )

방사대막파착

사대에 놓아 붙잡으려 하지 말고

寂滅性中隨飮啄 (고요할 적, 멸할 멸, 성품 성, 가운데 중, 따를 수, 마실 음, 쪼을 탁)

적멸성중수음탁

적멸한 성품중에 먹고 마실 뿐이다.


어제에 이어 오늘의 구절은 도()의 작용을 말한다.

현대 물리학에서는 물질을 이루는 기본 단위가 원자(原子)라고 한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물질계를 이루는 기본 단위를 사대(四大)라고 보았다.

사대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을 뜻한다.  

즉 땅, , , 바람의 4가지가 우리의 물질계를 이룬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색깔은 삼원색(빨강, 파랑, 노랑)으로 다채롭게 나타낼 수 있듯이 우주 만물도 4가지 요소, 즉 사대로 형성 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무상계(常戒)>  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사대로 각각 흩어진다고 했다.

살과 뼈같은 육신은 땅으로, 피나 고름같은 것은 물로, 몸의 더운 기운은 불로, 활동하는 기운은 바람으로 각각 흩어진다는 것이다.


사대는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일 뿐만 아니라 물질의 성질(性質) 이기도 하다.

이처럼 사대는 우리의 몸 뿐만 아니라 이합집산(離合集散) 에 따라 물질계의 모든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생명이 있는 것, 없는 것 구분 할 것 없이 아주 작은 물질 단위에서 부터 광활한 우주의 별들 까지도 말이다.

따라서 사대의 조화에 따라 물질계 즉 유위법(有爲法)의 세계가 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물질이 아니다.  사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는가?

그래서 마음은 유위법에서는 붙잡을 수 없다.

잡을래야 잡을 수 없는 마음, 그 마음을 그저 사대에 방하착(放下着), 내려 놓을 뿐이다.


우리는 마음이 분명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분명히 있지만 실체가 없다.

실체가 없는 세계을 두고 우리는 무위법(無爲法)의 세계라고 한다.

우리의 본성인 적멸한 성품(寂滅性品)은 무위법(無爲法)에서 작용한다.

좀 전에도 언급 했듯이 무위의 세계는 물질적인 실체(實體) 있어 보고 듣고 만지질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그런데 적멸한 성품 가운데 먹고 마실 뿐이란다. 

아니, 먹고 마시는 것은 유위의 세계에서 작용인데 어찌 무위의 세계에서 가능 할까?

사대와 적멸한 성품, 놓는 것과 먹고 마시는 것의 대비.

유위법은 사대와 먹고 마시는 것, 무위법은 적멸한 성품과 놓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즉 서로 대칭이 되게 표현했다.

<사대에 놓아 잡지 말고, 적멸한 성품 가운데서 먹고 마실 뿐>


먹고 마시며 사는 것은 우리가 사는 물질 세계를 사는데 가장 필수적인 행() 이다.

놓는 것(), 즉 방하착(放下着)은 무위 세계를 공부하는데 가장 필수적인 행이다.

먹고 마시는 유위법과 놓아야 하는 무위법이 둘 아니게 함께 돌아간다.


<일일 소견>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이여 ,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다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태복음 중에서

무거운 짐을 놓고 쉬듯이, 내 근본 마음에 놓고 쉼을 얻는다. 방하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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