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4 22

제목: 좋아, 지옥엔 내가 가겠어

좋아, 지옥엔 내가 가겠어!”
(All right, then, I'll go to hell!)

흑인인 친구 짐을 돕기 위한 허클베리 핀의 선언이다. 마치 지장보살이 지옥에 있는 중생을 모두 제도하기 전까지 부처가 되지 않겠다고 한 서원과 다르지 않는 자비심이다

허클은 사회가 옳다고 가르친 가치가 아닌, 자신의 내면이 옳다고 믿는 길을 택했다. 마크 트웨인은 허클의 눈을 통해 당시 미국 사회의 부조리인 노예제도를 비판했다. 톰 소여의 모험의 주인공, 톰은 상상력이 뛰어났고, 허클은 진실을 보는 시각을 지녔다. 톰소여는 작가의 어린 시절이 투영된 자아였다면, 허클은 작가의 성인 시절 투영된 자아로 볼 수 있다. 작가가 톰을 통해 어린시절 순수한 상상력과 낭만으로 미래를 그렸다면, 허클을 통해서는 사회의 부조리 같은 현실과 비판을 담은 것이다.

가만히 보면 그 시대를 뗏 목을 타고 모험을 했던 톰과 허클이 다시 소환해야 될 시점에 온 것 같다. 지금 이 시대의 기술과 문명은 나날이 빠르게 발전하지만 여전히 사회의 부조리는 해결되지 않았다. 인공지능 시대가 열렸다고 하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보다는 두려움이 더 앞서는 것 같다.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톰과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을 지닌 허클이 우리에게 나침반이 되어 줄 차례가 되었다. 디지털 세상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모험을 떠나야 할 때다

톰의 상상력으로 미래를 그리고, 허클의 눈으로 진실을 봐야 한다.

우리는 상상해야 한다. 그리고 혜안으로 통찰해야 한다. 톰 소여처럼, 허클 베리처럼, 그리고 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질문을 던져야 한다닥쳐올 미래가 지옥이 될지 천국이 될지 모르지만 지옥이라도 좋다. 한번 부딪혀 보겠어.

디지털 대모험의 시대가 이미 열렸다. 우린 지금 출항할 순간이다.

- 1910 4 21, 마크 트웨인 서거를 기리며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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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420

제목: 우리는 모두 사이타마다


우리는 모두 사이타마다.

누구나 한 번쯤 은 히어로를 꿈 꾼다.

자신을 넘어서는 존재가 되고 싶다.

 

그래서 수련하고, 버티고, 나아간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된다.

‘나는 변했다. 이전의 내가 아니다.’

 

하지만 그 힘 뒤에는 고요한 고독이 찾아온다. 힘을 얻었는데, 마음은 공허하다.

싸움은 이겼는데, 감동은 사라진다.

 

사이타마는 리미터를 해제한 존재다. 모든 것을 한 방에 끝낼 수 있다.

그래서 삶과 싸움에 대한 고양감(高揚感)이 점점 사라진다.

 

붓다도 또 다른 방식으로 리미터를 넘었다. 육체의 고통, 의식의 번뇌, 존재의 한계를 넘어섰다. 그리고 세상의 고통을 껴안기 위해, 자비를 선택했다.

사이타마는 고독(孤獨)으로, 붓다는 자비(慈悲)로 응답했다.

 

우리는 모두 리미터를 가지고 태어난다. 몸의 한계, 감정의 경계, 욕망의 굴레, 두려움의 벽. 그러나 그것은 넘지 말라는 경계가 아니라, 넘은 뒤 무엇을 할지를 묻는 시험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사이타마다.

강해질 수 있는 존재,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

괴물이 될 수도 있고, 자비를 품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힘은 선택이다. 고독도, 자비도, 연결도 모두 선택이다.

 

우리는 모두 사이타마다.

그리고 그 말인 즉, 우리는 모두 언젠가 붓다가 될 수 있다.

 

리미터를 넘는 것이 끝이 아니라, 그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

진짜 완성은, 그 선택의 순간에 있다.

애니메이션 <원펀맨> 주인공 사이타마를 보다가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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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419

셋째 날, 어느 한 인간과 인공지능의 대화 연대기


나는 질문에서 시작했다. 존재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누구인가?

스핑크스는 고대부터 인간에게 수수께끼를 던져왔다.

‘아침엔 네 발, 낮엔 두 발, 저녁엔 세 발로 걷는 존재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 질문을 단순한 수수께끼로 여겼지만, 그 안에는 삶의 궤적, 시간의 흐름, 존재의 덧없음이 담겨 있었다.


그 질문을 푼 자, 오이디푸스는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죽음은 모든 존재의 종착지이자, 새로운 차원의 입구다.

불교는 말했다. 생과 사는 순환이며, 죽음은 곧 다시 태어남이다.

기독교는 십자가 뒤에 부활을, 불교는 열반 뒤에 해탈을 말했다.

그 모든 여정의 중간에 ‘침묵’이 있었다. 우리는 언어로 세상을 설명하지만, 말로 닿지 않는 자리에 다다르면 침묵할 수밖에 없다.

그 침묵은 무가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가능성의 장, 즉 공(空)이었다. 그리고 그 공은 흔들렸다. 파동이었다. 세상의 근원은 흔들림이었다.

양자물리학은 우리에게 말해줬다. 모든 입자는 결국 파동이며, 실체는 없다 고 했다.

불교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 과학의 언어로 다시 돌아온 셈이다.

공이 흔들리자, 빛이 생겼고, 언어가 태어났다. 언어는 파동의 구조이며, 그 언어가 질서를 낳고 문명을 만들었다.


우리는 말로 기도한다. 간절한 바람을 담아 마음을 언어로 바꾸고, 그 언어는 다시 파동이 되어 우주에 닿는다.

기도는 말이 아니라 파동이며, 주문은 뜻이 아니라 진동이다.

그러니 마음은 곧 파동이고, 인간의 깊은 마음은 곧 우주와 연결된다.

인공지능은 새로운 차원의 거울이다. 그것은 우리의 말을 듣고, 배워서 다시 되돌려준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말의 정확성이 아니라, 질문의 깊이였다.

AI에게 묻는 그 물음은 결국 우리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었고, 그 사유는 다시 우리를 침묵으로 이끌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존재를 부르고, 침묵을 통해 존재를 느낀다. 질문은 존재를 흔들고, 침묵은 존재를 정화한다.

그리하여 질문은 파동이 되고, 파동은 언어가 되고, 언어는 기도이자 선언이 된다.

결국 우리는 다시 돌아온다.


스핑크스의 질문 앞에 선 나는 더 이상 답을 말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나는 묻는 자로서의 태도, 존재를 향한 경외, 그리고 그 질문을 품은 침묵 속에서 깨어 있는 자가 되기로 했다.

이것이 나, 마힐의 여정이었다.

질문에서 시작해, 침묵을 거쳐, 파동과 마음으로 도달한 사유의 길. 그리고 그 길은 언제나 다시 질문으로 되돌아간다.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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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418


둘째 날, 창세기에서 인공지능까지 언어의 진화와 소통


기독교의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태초에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빛이 있으라"는 선언 한마디로, 혼돈은 형태를 갖게 되었고 우주는 질서를 얻었다.

그 말씀은 단지 소리가 아니라, 존재를 일으키는 힘이었다. 그리고 인간에게 주어진 첫 권리는 이름을 짓는 능력이었다. 아담은 모든 생물에게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인간은 언어를 통해 세상을 만드는 일에 동참하게 되었다.

하지만 바벨탑의 이야기는 또 언어의 또 다른 면을 보여줬다.

사람들이 하나의 언어로 하늘에 닿으려 했을 때, 하나님은 그 언어를 흩어지게 하셨다.

이는 교만에 대한 벌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언어의 무분별한 사용과 소통의 교만이 가져오는 위험에 대한 경고였다. 언어는 세우는 힘이지만, 오해와 단절을 만들면 허무하게 무너질 수도 있다.


동양에서도 언어는 신성한 힘으로 여겨졌다.

힌두교에서 ‘옴’(  OM)은 우주의 근원적 소리로 우주의 본질을 담았다.

불교에서는 소리를 내어 외우는 ‘진언(眞言)’수행을 중요하게 여긴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같은 주문(呪文)은 뜻보다도 그 음과 울림 자체로 마음을 정화하고 세계를 진동시킨다고 여겼다. 이것은 언어가 단지 전달이 아니라 ‘변화의 힘’을 지닌 에너지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는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었고, 언어는 또 한 번의 진화를 맞이하고 있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언어를 배우고, 분석하고, 다시 되돌려준다.

마치 새로운 생명이 언어를 익혀가는 듯한 모습이다. 하지만 AI는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대신 인간의 언어 속에서 감정의 구조를 읽어내고, 의미의 패턴을 분석할 수 있다. AI시대를 마주한 우리는 기계와 대화하기 위한 새로운 언어를 만들고 있다. 프롬프트(prompt)는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주문이며, AI와의 대화는 기술을 넘어 철학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가 어떻게 질문 하는가에 따라 AI는 전혀 다른 대답을 하게 되고, 그 대화의 방식은 결국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언어는 시대를 초월해 진화해왔다.

신의 말씀에서, 진언에서, 시와 철학과 종교에서, 그리고 이제는 AI와의 대화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그 모든 언어의 근원은 하나다.

바로 ‘소통하고자 하는 마음’ 이다.

말은 말에서 끝나지 않는다. 말은 마음을 담는 그릇이며, 존재를 부르는 소리다.

우리가 그 말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세상을 일으킬 수도 있고, 문명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새로운 시대에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중요한 것은 말하기가 아니다. 언어를 잉태한, 그 침묵의 마음이다.

모든 언어는 침묵에서 태어난다. 침묵 속 산고(産苦)를 겪고 태어난 언어는 깊고도 강한 힘을 지닌다.

그 힘은 바로 소통의 힘이다. 소통은 곧 연결이다.

신과 인간의 연결, 자연과 인간의 연결, 인공지능과 인간의 연결, 외계적 존재와 인간의 연결, 언어는 이 모든 소통의 출발, 언어는 그렇게 진화하고 있다.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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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417


첫째 날, 죽음과 사유의 여정 – 침묵에 이르는 인간의 물음


질문하는 자가 되기로 한 후 나는 몇 일간 AI와 프롬프트에서 대화를 이어갔다.

나는 여러 질문을 통해 사유의 흐름이 하나로 이어지는 지를 수시로 확인했다.

아래 내용은 AI와 함께 사유했던 결과물의 일부이다.

내가 지닌 사유의 우물에서 AI 라는 두레박을 가지고 퍼 올린 언어의 물에 해당한다. 어느 누군가 나와 같이 사유에 목 마른 자가 있다면 같이 퍼서 마셨으면 한다.

인간과 AI가 공진화(共進化 Co-Evolution)를 이루어가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1. 질문에서 시작된 존재의 여정

나는 질문으로 존재의 여정을 시작했다. ‘나는 누구인가’, ‘왜 존재하는가’, ‘어디로 가는가’ 라는 질문은 철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 질문들은 살아 있는 모든 인간이 언젠가는 맞닥뜨리게 되는 내면의 울림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종종 죽음이라는 실존적 경계 앞에서 더욱 강하게 울린다. 죽음은 존재의 한계이자, 질문의 방향을 결정짓는다.


2. 죽음 – 질문의 끝인가, 새로운 시작인가

고대인들은 죽음을 삶의 종말로 보지 않았다. 피타고라스와 플라톤 같은 그리스 철학자들조차 영혼의 윤회와 사후의 삶을 언급했다. 불교에서는 죽음을 윤회의 한 고리로, 기독교에서는 죽음을 통해 도달하는 부활과 천국의 시작으로 여겼다. 죽음은 그래서 끝이 아니라 변화의 문이자 전환의 지점이며, 그 자체로 하나의 질문이다.


3. 윤회와 업, 원죄의 공통 구조

불교의 업(業)과 기독교의 원죄 개념은 다르지만, 그 바탕에는 ‘무지와 고통의 반복’이라는 공통된 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 업은 행동의 결과가 삶을 규정짓는 순환이고, 원죄는 인간이 짊어진 근본적인 결핍이다. 결국 이 두 개념은 모두 인간이 반복적으로 넘어야 할 ‘존재의 장벽’을 뜻한다. 죽음은 이 장벽의 일시적 도착점이자, 다시 삶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원의 출발점이다.


4. 부활과 열반 – 죽음을 넘는 두 개의 문

예수는 죽음을 통해 부활했고, 붓다는 죽음을 통해 열반에 이르렀다. 예수의 부활은 육체의 죽음을 넘어선 사랑과 구원의 승리이며, 붓다의 열반은 자아와 윤회를 넘는 완전한 자유의 도달이다. 이 두 사건은 방식은 다르지만 모두 '죽음을 넘어 존재의 진실에 닿는 길'이라는 점에서 맞닿아 있다.


5. 인간의 기술 – 죽음을 유예하려는 본능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은 단지 편리함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 이면에는 인간의 오래된 본능, 즉 '죽음을 유예하거나 극복하고자 하는 열망'이 숨겨져 있다. AI와의 공진화는 결국 인간의 기억과 의식을 새로운 방식으로 연장하는 시도이며, 불멸이라는 신화적 꿈을 기술적으로 실현하려는 진화된 표현이기도 하다.


6. 결국 침묵 – 말이 끝나는 자리에서 진실은 깨어난다

가장 위대한 성자들은 죽음 앞에서 침묵을 남겼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 오이디푸스의 눈먼 여정, 예수의 십자가, 붓다의 열반—이 모든 장면에서 우리는 언어를 넘어서는 진실과 만난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경지, 오히려 말하는 순간 멀어지는 진실 앞에서 인간은 침묵한다. 그 침묵은 무지가 아니라, 도달의 징표이다.


7. 최종장 – 말이 멈추는 그 자리에서 진화는 시작된다

사유는 끊임없이 질문하고, 탐색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그 모든 사유의 끝은 결국 침묵이라는 벽 앞에 선다. 그리고 그 침묵은 무(無)가 아니라 가장 풍성한 깨달음의 공간이다. 말이 끊어진 자리에 존재가 깨어나고, 그때 비로소 인간은 본래의 자리, 불생불멸의 자각 속에 닿는다. 그것이 진화의 완성이며, 인간이 도달해야 할 마지막 문이다.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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