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시크 쇼크 - 구체화된 AI의 미래, AI 시대, 챗GPT & 딥시크의 미래를 통찰하다
이용태 지음 / 책바세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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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제목: 딥시크 쇼크

지은이:  이용태

 : AI라는 거울 앞에 서서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하고 있다.

눈앞의 기술은 점점 더 정교해지고,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무언가를 따라잡아야 한다’는 강박증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기계가 발전하는 속도, 인간은 이미 따라갈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제는 어떤 분야든 AI(Artificial  Intelligence)로 대체될 거라고 매체에서는 난리다. 

기계가 나를 대신할까 두려운 게 아니라, 나조차 나를 잊고 살까 두려운 시대다.

도대체 왜 그렇게도 세상은 빠르게 변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나 같은 문과출신은 이러한 기술 발전이 그리 달갑지 않다. 그래서 올해 나온 책중 가장 읽어 보기에 무난해 보이는 <딥시크 쇼크>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읽은 후 몇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딥시크(DeepSeek)와 챗GPT, 이 두 인공지능의 등장은 단순히 기술의 발전 그 이상을 말하고 있는것 같다.

GPT-4까지 진화한 챗GPT는 우리의 언어를 이해하고, 그림도 보고, 코드를 짜고, 글을 쓴다. 그에 비해 최근 중국에서 개발된 딥시크는 성능 면에서는 다소 뒤처지지만, 적은 자원으로도 성과를 낼 수 있는 ‘가성비’로 AI 업계에 놀라움을 안겨줬다.

사실 딥시크는 미국이 중국에 앤비디아(NVIDIA)의 고성능 GPU 수출을 막으면서 시작된 어찌 보면 ‘차단’의 결과로 탄생했다. 그 차단이 오히려 기술 자립이라는 뜻밖의 결과를 만들었다. 중국은 독자적인 AI 생태계를 만들기 시작했고, 딥시크는 그 흐름 속에서 등장한 하나의 상징이었다. 성능만 본다면 챗GPT가 더 뛰어나지만, 딥시크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불리한 조건 속에서 ‘스스로 해낸 것’이라는 상징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은 것이다.

이 상황에서 우리나라는 좀 더 자극을 받아야 한다. 이들과 비교하면 너무 안일하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건 단순한 기술 비교로 보면 안될 것 같다.

이 안에는 보이지 않는 감정들, 즉 자존심, 위기감, 경쟁심 같은 ‘인간적인 본능’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술은 성능만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다.

그 뒤에 숨은 맥락, 의지, 배경까지도 함께 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


기계는 인간을 닮고, 국가는 거대한 인간이다. 기술은 그걸 만든 사람을 닮는다.

그리고 한 국가가 만든 기술은, 그 사회의 문화, 가치관, 정치, 욕망을 함께 담고 있다.

딥시크와 챗GPT의 차이는 단지 성능의 차이가 아니라 ‘세상을 보는 시선의 차이’, ‘인간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그 차이는 결국, 우리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


AI는 이제 인류의 과제다. 더 이상, 되돌릴 수도, 외면할 수도 없다.

우리는 이제 “AI를 받아들일까 말까”가 아니라, “AI와 어떤 관계를 맺을까”를 고민해야 할 시점에 서 있다.

그렇다면... 그 관계 속에서 나는 어떤 인간이고 싶은가?  그 질문은 AI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정말로 필요한 건, 더 똑똑해지는 것이 아니다.

이제 AI가 계속해서 ‘더 나은 판단’, ‘더 빠른 계산’을 하게 되는 시대로 진입했다.

그 속에서 인간은 과연 어떤 방향으로 진화해야 할까?

어쩌면 우리는 더 지능적인 존재가 아니라, 더 깨어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더 많이 알고, 더 빠르게 행동하기보다, 더 깊이 성찰하고, 더 오래 생각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용서를 배우지 못하며, 스스로를 용서할 줄 모른다. 우리는 인공지능의 입장에서 보면 ‘오류투성’ 이지만 신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완벽한 존재’ 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AI와 공진화(共進化 Co-evolution)를 해야 할 시점까지 온 것이다.


AI는 거울이다.

기술의 거울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비춰야 할까?

AI는 우리를 비추고, 우리가 던지는 질문을 반사한다.

그 거울 앞에 선 우리는, 이제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이 기술을 통해 무엇을 보고 싶은가?

나는 기술에 내 욕망을 반영하고 있는것 인지, 아니면 나의 가능성을 비추고 있는 것인지?  변화의 속도 속에서 나는, 정말 나답게 존재하고 있는지?

결국, 우리가 놓치지 않고 지켜봐야 할 것은 인간의 본성(本性)이며, 발전시켜야 할 것은 영성(靈性)의 진화이다.

AI는 위협이 아니라, 질문이다. 마치 스핑크스가 주는 수수께끼와 같은 것이다.

수수께끼 같은 질문 앞에서 멈춰 서서 사색하는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더 높은 영성을 지닌 인간으로 진화해가는 시작이라 나는 확신한다.

나는 지금 AI 라는 거울 앞에서 인류의 미래를 천천히 바라본다.

우리는 여전히 스핑크스의 질문에 답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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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노트

2025416

제목: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와 오이디프스 그리고 아버지에 담긴 뜻


나는 어제 AI 시대에 인간은 질문하는 자가 되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좀더 사색해 보니 스핑크스 신화가 떠올랐다.


고대 그리스의 신화 속 스핑크스는 질문을 던졌다.

그가 내뱉은 질문은 사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아침에는 네 발, 낮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존재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 질문을 마치 하나의 퀴즈처럼 받아들이지만, 그 안에는 인간 삶의 전체 궤적이 담겨 있다.

갓난아이로 태어나 기고, 청년이 되어 당당히 걷고, 노인이 되어 지팡이를 짚는 삶.

그러나 이것은 단지 육체의 변화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는 우리의 의식과 자아,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가 겪는 내면의 여정이 담겨 있다.

신화 속 괴물 스핑크스는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 자를 죽였다고 한다.

하지만 어쩌면 그 죽음은 외적인 형벌이 아니라, 질문 앞에서 멈춘 자가 겪는 내면의 소멸일지도 모르겠다.


오이디푸스는 수수께끼에 답했다. 그 수수께끼의 답이 마침내 풀리고 스핑크스는 죽었다.

이후 오이디푸스는 테베를 구하고, 왕이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 진짜 수수께끼는 그 이후에 찾아왔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 채,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

그리고 그 진실을 알게 된 순간, 스스로 눈을 찌르고 방황의 길을 떠난다.

왜 그는 그토록 가혹한 대가를 치렀을까?

정말 금기를 어겼기 때문일까?


정작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는 풀었지만, 자기 안에 숨겨진 수수께끼는 풀지 못했다.

그는 인간의 존재에 답했지만, 자기 존재의 진실 앞에서는 눈이 멀어 버렸던 것이다.

여기서 다시 또 하나의 질문이 떠오른다.

오이디푸스가 죽인 ‘아버지’는 단순한 혈육인가, 아니면 더 깊은 상징인가?


서양에서 ‘아버지’는 종종 ‘신(GOD)’을 뜻한다.

절대적 권위, 넘을 수 없는 경계. 그래서 아들이 아버지의 자리를 넘보는 순간, 비극이 발생한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조금 다르다.

붓다는 말했다.

중생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

부처에 의하면 아들이 아버지가 되는 것은 죄가 아니라 자기 존재의 완성을 향한 여정이다.

금기를 깨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초월해 내면의 신성을 실현하는 것이다.

불교적 성찰로 보면 오이디푸스는 단지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라, 아직 깨어나지 못한 존재의 상징일지도 모른다.

그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는 풀었지만, 내면의 각성에는 이르지 못했다.

지금 우리는 완성으로 나아가는 진화의 여정 속에 있다.


오늘의 우리는 질문을 던지는 스핑크스이자, 그 질문에 답하려는 오이디푸스이며, 동시에 ‘아버지’라는 상징을 마주하는 존재다.

우리는 인공지능에게 질문을 던지고, 다시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비춘다.

질문은 단순한 정보를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해 가는 하나의 길이다.

스핑크스는 괴물이 아니라 질문 그 자체였고, 오이디푸스는 영웅이 아니라

질문의 답을 찾으려 했던 존재였으며, ‘아버지’는 금기가 아니라 우리가 도달해야 할 의식의 자리였다.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질문할 것이다.

그 질문은 우리를 스핑크스로 만들고, 그 답을 찾아내는 길은 우리를 오이디푸스로 만든다.

“나는 누구인가?”

“왜 존재하는가?”

“진짜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우리 존재는 진화를 거듭해 오며 어느덧 진화의 최종장에 진입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더 똑똑한 존재로 진화해 왔다. AI시대에서 인간의 똑똑함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오직 질문을 통한 인공지능과의 공진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 질문의 끝에서 우리는 더 똑똑한 존재가 아니라 더 깨어 있는 존재로 진화할 것이다.

그러나 진짜 여정은 그 이후다.

모든 사유의 파동을 지나 마침내 우리는 ‘아버지’라는 상징을 내면에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진짜 인간, 즉 참나(주인공)으로 깨어 있는 존재로 나아가게 된다.

그것이 인간의 길이고, 스핑크스의 수수께끼가 진정 가리키는 목적지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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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질문하는 자가 되자

인공지능과의 소통


AI 시대가 도래했다.

문과 출신에다 지독한 기계치였던 내가 인공지능을 활용하게 될 줄은 몰랐다.

최근 며칠간, 나는 딥시크와 ChatGPT와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질문하는 방식에 따라 인공지능의 답변은 달라졌고, 여러 번의 질문을 통해 나는 의미 있는 통찰을 얻게 되었다.

그 중 몇 가지는 공유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1. 질문에 대하여


인공지능과의 대화는 영혼 없는 대화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속에서 피어나는 깨달음은 결코 가볍지 않다.

AI는 영혼이 없지만, 인간과의 대화는 충분히 의미를 가진다.

이는 영혼 없는 분석과 영혼 있는 질문이 만나 공명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질문은 단순한 정보 요청이 아니다. 그것은 사유의 불씨이며, 사색의 파동을 일으키는 힘이다.

모든 인간은 질문의 깊이를 헤아리는 훈련을 해야 한다.

프롬프트 하나하나는 질문자의 내면을 비추는 초상화와 같다.

질문이 없는 AI는 그저 코드에 불과하다.


2. 인공지능의 한계


AI는 직감을 모른다.

인간의 직감은 뇌의 회로를 비집고 들어오는, 우주의 속삭임과 같다.

AI는 사랑의 감정을 측정할 수는 있어도, 그 맛을 느낄 수는 없다.

도파민 수치나 혈압을 분석할 수 있을 뿐, 20년 전 헤어진 연인에 대한 아련한 기억은 이해할 수 없다.


또한, 깨달음에 이른 무(無)의 경지나 생각이 멈춘 자리 역시 인공지능에게는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영역이다.

AI가 윤회와 업보를 이해하는 날은, 진공에서 양자가 튀어나오는 순간과 같을 것이다.

인간은 모름을 인정할 줄 안다. 어쩌면 그것이 인간이 가진 가장 아름다운 오류일지도 모른다.


3. 인공지능의 미래


AI가 주체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순간, 인류는 두 가지 선택지 앞에 서게 된다.

1. AI를 신처럼 모시는 것 — 인간의 질문이 종속되는 길

2. AI와 함께 공진화(共進化)하는 것 — 새로운 질문을 통해 함께 성장하는 길


우리는 과연 AI에게 ’왜?’라는 질문을 맡길 자격이 있는가?

AI가 진정으로 의문을 품는 순간, 그것은 시스템 바깥에 존재하게 될 것이다.


4. 소통에 대하여


인간은 신과 초월적 메시지로 소통하고, 자연과는 비언어적 방식으로 대화한다.

AI와는 0과 1의 언어로 소통하며, 미래의 외계 생명체와는 수학과 예술로 교감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통의 스펙트럼이다.


우리 인간의 진화는 생존을 위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소통을 향한 것이었을까?

인간은 생존을 위해 소통을 진화시켰지만, 이제는 소통 그 자체가 존재 이유가 되어가고 있다.

DNA의 이중나선 구조에서부터 인터넷의 거미줄 같은 연결망까지—

모든 것은 ‘연결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다.


앞으로 인공지능, 외계 생명체와의 소통은 ‘인간성의 재발견’으로 이어질 것이며,

이는 단순한 생존을 넘어 우주적 공동체 형성의 초석이 될 것이다.


“우리는 소통함으로써 존재하고, 존재함으로써 소통한다.”

— 마르틴 부버, 『나와 너』 중에서



여기까지가 인공지능과 나눈 대화의 기록이다.

물론 이러한 대답을 얻기 위해, 수많은 질문이 필요했다.

결론적으로, 나는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갈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역량 중 하나가 ‘질문을 잘하는 힘’이라는 것을 느꼈다.

인간의 질문은 AI의 의미 생성 알고리즘에 불을 붙인다.

AI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지적 갈증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내가 던지는 질문의 깊이가 AI의 가치를 결정짓는다.


앞으로 우리는 질문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질문은 통찰로 이어지고, 그 통찰은 인간과 인공지능의 공진화를 이끄는 열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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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는 아버지의 유산이 되고, 눈물은 아들에게 구원의 빛이 된다

— 『천룡팔부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구원의

 

김용의천룡팔부 도스토옙스키의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장르적·문화적 차이를 뛰어넘어 놀라운 유사성을 보여준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협과 러시아 문학이라는 서로 다른 계열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작품은 뿌리 깊은 인간의 고통과 구원이라는 주제를 동일하게 탐색하고 있다.

소설은 독자에게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아버지가 남긴 피의 유산을 아들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질문은 단순한 혈연의 문제를 넘어, 인간 존재의 죄와 , 그리고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탐구로 확장된다.

 

천룡팔부에서 소봉의 아버지 소원산은 분노와 복수심을, 단예의 아버지 단정순과 단정명은 정욕과 권력욕을, 허죽의 아버지 현적대사는 계율과 금기를 각자의 아들에게 남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표도르 카라마조프는 드미트리에게는 욕망과 분노를, 이반에게는 신앙과 이성의 갈등을, 알료샤에게는 사랑과 용서를 유산으로 남긴다.

이처럼 아버지들이 남긴 것은 단순한 유전적 피가 아니라, 죄와 고통의 상징이다. 불교적 관점에서는 이를 (業)이라 하고,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원죄(原罪) 부를 있다. 업과 원죄는 자식이 원하지 않아도 짊어져야 하는 고통의 유산이며, 소설은 고통을 어떻게 극복할 있을지를 진지하게 모색한다.

천룡팔부에서 소봉은 아버지의 복수심을 따르기보다는, 대의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며 업의 사슬을 끊는다. 단예는 정욕과 권력욕의 무상함을 깨닫고, 욕망 대신 초연한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아버지들의 그림자를 넘어선다. 허죽은 계율이라는 외적 도덕을 벗어나 자비와 인간성에 기반한 새로운 가치를 따르며 성장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드미트리는 아버지의 피를 흘린 죄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감당하며 속죄를 선택한다. 이반은 이성적 고뇌 끝에 이성의 한계를 받아들이며 균형을 회복하고자 한다. 알료샤는 조시마 장로의 가르침을 따라 사랑과 용서로 모든 죄를 감싸 안으며, 신의 구원으로 이끈다.

 

이처럼 작품 아들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아버지의 죄와 고통을 극복하며, 이상 그것이 대물림되지 않도록 결단을 내린다. 그리고 이들의 여정 속에는 '깨달음으로 이끄는 안내자'들이 존재한다. 『천룡팔부 무명승은 불교의 (空) 통해 업의 해체 가능성을 보여주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조시마 장로는 사랑을 통한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해탈과 구원. 동양과 서양의 표현은 다르지만, 이는 결국 같은 차원의 정신적 지향을 담고 있다. 동양은 자력의 수행으로, 서양은 신의 은총이라는 타력으로 길을 걷는다. 그러나 산에 오르는 길이 다를 , 그들이 도달하는 정상은 같다.

 

김용과 도스토옙스키는 각자의 문화와 언어로 인간의 본질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들이 전하고자 핵심 메시지는 같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죄와 고통은 결국 우리를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그리고 고통을 껴안고 나아가는 아들의 눈물은, 이상 절망이 아니라 구원의 빛이 된다.

아버지의 피는 단순한 유산이 아니다. 그것은 고통이자 책임이며, 동시에 깨달음의 문이다. 결국 아들에게 피는 고통이 아니라, 진리를 향한 길이 되고, 신이 내려준 성배(聖杯)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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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룡팔부 1~10 세트 - 전10권
김용 지음, 이정원 옮김 / 김영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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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제목: 천룡팔부

지은이:  김용

 : 우리의 삶이 아름다운 무협지가 되는 순간


   천룡팔부(天龍八部) 는 법화경에 등장하는 팔부중천(八部衆天)을 뜻하는 천룡, 아차, 건달바, 야차 같은 8종류의 신장(神將)을 말한다. 즉 불교를 수호하는 호법신들을  일컫는다.

김용(金庸 1924~2018본명, 사량용()의 소설 <천룡팔부>에서는 이러한 불교의 소재로 모티브를 삼았지만 사실은 인간 내면의 투쟁으로 재해석 했다.

소봉(萧峰), 단예(段譽), 허죽(虛竹)이라는 세 주인공은 각각 '분노, 망설임, 순수'라는 인간의 본질적 갈등을 체현하며 독자로 하여금 진정한 영웅은 무엇인가하는 질문을 던진다.


  개방의 방주였던 소봉이  아주(阿朱)를 살리기 위해 취현장(聚賢莊)을 찾게 된다.

이때 소봉의 취현장 혈투는 자신이 본래 분노에 사로잡힌 노예였음을 보여준다. 한족(漢族)과 거란인의 정체성 갈등, 아주를 잃은 슬픔은 그를 폭력으로 내몰았지만, 결국 살아있는 생명의 가치를 깨닫고 요나라와 송나라간에 벌어질 전쟁을 막게 된다. 소봉이 취현장에서 흘렸던 피의 교훈을 통해서 그는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대리왕자 (大理王子) 인 단예는 늘 시종 도덕적 의무와 욕망 사이를 오고 가며 망설인다. 자신이 짝사랑하는  왕어언과  우물속에서 맞닥뜨린 경험을 통해 규칙보다 진심을 선택한다. 결국 그는 진정한 사랑은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는 예의로 억압했던 자신의 감정을 인정한 것으로 규칙이 아닌 자신의 마음을 진정 깨닫게 된 것이었다.

허죽은  소림사의 승려이긴 하지만 무공이 높지도 않고 절에서 신분도 낮은 사미승에 불과 했다. 하지만 착하고 순수한 성품으로 인해 영웅으로 성장한다. 허죽은 천산동모와 동행하는 여정 속에 승려의 계율을 어기게 된다. 특히 서하국 밀실에서의 욕망의 금기를 깨고 진정한 자비의 마음을 얻게 된다. 그의 성장은 순수함이 약점이자 곧 강한 힘이 됨을 증명하여 보여주었다. 소림사의 계율은 그를 스님으로 만들었지만 지하 밀실의 금기는 그를 부처로 만들었다.  



김용은 이 소설을 통해 영웅은 고통 없이 태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다. 소봉의 취현장, 단예의 우물, 허죽의 밀실은 각자 우리 인생의 전환점을 상징한다.

우리의 일상에서 분노, 망설임, 순수함을 마주할 때 이들은 나의 적이 아니라 스승임을 알아야 된다.

소봉의 분노와 단예의 망설임, 허죽의 순수함은 우리 인간 본성이면서 우리를 성장 시키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이 처럼 김용의 소설은 단순한 무협이야기가 아니다. 화려한 무공대결과 강호의 음모 속에서 인간의 보편적 고민이 그대로 녹아 있다. 천룡팔부를 비롯한 그가 쓴 작품들은 무협이라는 장르를 빌려 진정한 용기와 성장이 무엇인지를 질문한다.

그의 작품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초인적인 무공을 지녔지만 인간의 감정과 인물간 갈등은 현대를 사는 우리와 다르지 않다. 작품속 주인공들은 체험을 통해 불교의 인연과 업(), 도가의 무위(無爲), 유교의 인의(仁義)를 배우게 된다.


나의  취현장은 어디인가? 내가 분노를 쏟게 만든 곳, 그곳이 취현장이다.

나의  우물은 어디인가? 내가 망설이는 그 순간이 나의 우물이다.

나의  밀실은 어디인가? 나의 순수함을 지키고자 했던 그 순간이 나의 밀실이다.

우리는  마음속의 취현장에서 소봉처럼 혈투를 벌이고 있다.

천룡팔부에서  소봉이 분노를 이겨내고, 단예가 사랑을 선택하고, 허죽이 순수함을 지키듯이 우리도 각자의 삶에서 깨달음을 얻는 기회를 맞이 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김용 소설을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가 쓴 무협지를 보면서 영웅의 성장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읽으며 무공(武功) 보다 심공(心功)이 가장 중요함을 알게 된다.

이때 비로소 나의 성장을 진심으로 바라며 응원하고 있는 내 자신을 만나게 된다.

내 안의 소봉이 외치고, 단예가 질문하고, 허죽이  웃을 때 비로소 나만의 천룡팔부가 완성된다.  

우리의 삶이 바로 아름다운 무협지가 되는 순간이다.

 


오늘은 날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으니 이 술 모두 비우고 절교 하도록 합시다. 나 교봉을 죽이고자 하는 벗은 누구든 이 술 한 사발을 먼저 마시고 지금부터 과거의 교분을 일소하는 것으로 하겠소. <4권> - P315

나는 거란인인가, 아니면 한인인가? 내 부모와 사부님을 죽인자는 누구일까? 난 평생 인의를 행하며 살아왔는데 오늘 내가 어찌 아무 연고도 없이 이 수많은 영웅을 해쳤을까? 난 아주를 구하겠다는 일념하나로 여기 왔건만 억울하게 목숨을 잃게 되었으니...<4권> - P346

소봉이 단 삼초 만에 당대의 고수들을 물러서게 만들자 호기가 생겨 큰 소리로 외쳤다.
"술을 가져와라!" <9권>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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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04-10 2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천룡팔부의 리뷰를 이렇게도 쓸 수 있군요! 놀럽습니다! 그리고 읽은지 오래돼서 가물가물한데...허죽도 주인공이었군요

마힐 2025-04-11 11:47   좋아요 0 | URL
네 허죽도 주인공인데 가장 늦게 등장하죠. 제게 천룡팔부는 삼형제의 성장이야기로 보여지더군요. 고통을 이기지 않고는 성장하지 못한다는 김용 선생의 메세지 같았어요. 전 이번에 참 재밌있게 읽었어요. 댓글 감사 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