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궁녀 - 궁궐에 핀 비밀의 꽃, 개정증보판
신명호 지음 / 시공사 / 2012년 5월
평점 :
품절
나는 근래 드라마 ‘여인천하’, ‘장희빈’, ‘대장금’, ‘동이’, ‘선덕여왕’, ‘인현왕후’, ‘인수대비’를 통하여 수많은 궁중 여인들을 만나왔다. 역사 교과서에서조차 만나볼 수 없었던 그녀들의 이야기는 많은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열광적인 관심을 이끌어내고 있다. 하지만 드라마를 통하여 우리가 만나온 궁녀는 왕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하여 음모를 꾸미는가 하면 후궁이 되기 위해 요염한 자태로 왕을 유혹하기도 한다.
어렸을 때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는 ‘의자왕과 삼천궁녀’ 이야기가 있었다. 의자왕의 궁녀였던 3,000명의 여성들이 사비성이 함락되자 낙화암에 몰려가 뛰어내리는 장면이 마치 꽃잎이 흩날리는 것 같았다는 전설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당시 사비성의 인구가 5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또 조선시대에도 궁녀의 수가 최대 600명 정도였다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사비성에 3,000명의 궁녀가 있었다는 건 믿기 어렵다. 또한 당시 기록 가운데 삼천궁녀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 책은 조선 시대사를 전공하고 오랫동안 조선 시대의 왕과 왕실 문화를 연구해온 저자 신명호는 왕과 왕실에서 소외되었던 계층과 인물들과 역사를 발굴하는 데 많은 관심을 갖고 관련 책을 집필해오던 중 궁녀의 출신 성분부터 궁녀의 자격 요건, 선출 방법, 권력을 둘러싼 그녀들의 암투와 체계적인 조직 구조, 금기된 성, 목숨을 건 뜨거운 스캔들까지, 수천 년간 역사의 뒤안길에 숨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그녀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국사에서 궁녀는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2,000년 가까이 실재했다. 하지만 궁녀에 대한 자료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왕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사사건건 간섭하고 시비를 걸었던 관료들도 궁녀 문제만은 언급하지 않았다. 궁녀는 왕에게 역린과 같은 존재였고, 궁중의 비밀뿐만 아니라 왕의 온갖 버릇과 약점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왕의 사랑을 정처 없이 기다리며 살아간 궁녀들의 삶은 처량할 수밖에 없다. 어떤 역사책에도 궁녀들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보기 힘들다. 왕의 실정에 대해서는 가혹할 정도로 ‘통촉하시옵소서’ 하던 신하들도 이 부분에 관한 한 입을 굳게 닫고 있다.
왕이 절대 권력을 가진 신비한 존재로 남아있기 위해서는 왕의 내밀한 일상을 아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만나면 왕이 여색을 탐한다거나 국사를 소홀히 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먹이게 되므로 왕의 일거수일투족이 낱낱이 드러나게 되고, 왕도 별 수 없이 동물적 욕망에 몸부림치고 일하기 싫어하는 그렇고 그런 인간 존재라는 사실을 공포하는 셈이 된다.
이런 이유로 궁녀에 대한 기록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궁녀 문제를 건드리려는 것은 왕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것을 알려는 시도이고, 그것은 곧 무언가 역심을 품은 의도로 간주 될 수 있었기에 천년을 넘는 궁녀의 역사가 우리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시대 궁중 여성들이 남긴 기록과 모반 대역 죄인들을 조사한 ‘계축일기’, ‘인현왕후전’, ‘한중록’ 등의 궁중 문학 작품과 ‘추안급국왕’이라는 법정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왕의 프라이버시로 치부돼 역사책에도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그녀들의 이야기는 다양한 문헌에 조각조각 나타난 정보들을 씨실과 날줄처럼 연결되어 있다. 이 책을 통하여 2,000년간 알려지지 않았던 궁녀들의 사생활을 자세하게 알게 될 것이다. 읽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