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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엄마 1 - 영주 이야기, 개정증보판
최문정 지음 / 다차원북스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처음 이 책을 손에 들었을 때‘SBS-TV 주말특별기획 원작소설’이라는 커다란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이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솔직히 한국 드라마의 뻔하디 뻔한 스토리 전개나 협소한 스케일 등에 대해 별 감흥이 없는 나로서는 몇 년 동안 해외드라마에 몰입하고 있던 터였기 때문일 것이다. 불륜의 관계에서 뒤얽힌 남녀의 사랑이나 출생의 비밀을 안고 살아가는 주인공, 혹은 찢어지게 가난한 여주인공이 재벌2세 남자를 만나 신분상승을 하게 되는 신데렐라 스토리 등을 조금씩 비틀고 뒤섞은 막장 드라마 식의 프레임에 질릴 대로 질린 상태이다. 또한 의학, 범죄, 역사, 정지, 코미디 등의 장르적 다양성을 꾀하는 한국드라마이지만 역시 한국적 정서라는 플롯 안에서만 움직이고 있는 느낌이어서 새로울 게 없다는 생각을 가진 나였다.
그렇기에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서도‘엄마랑 딸이랑 지지고 볶다가 죽고 사는 스토리가 되겠군...’하는 생각이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책의 절반 이상을 읽어 내려가도록 변함이 없었다.
15살 때 강간을 당한 ‘김선영’은 그 충격으로 온전한 정신에서 벗어나게 되어 미친년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간다. 어리숙하고 바보같은 그녀에게는 15살 차이나는 딸‘김영주’가 있다. 영주에 대한 선영의 모정은 일종의 신앙과도 같다. 유일신과도 같은 딸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헌신한다.
선영을 언니라고 여기며 살아왔던 영주는 어느날 우연히 선영이 언니가 아니라 엄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할머니를 엄마로, 할아버지를 아빠로, 외삼촌들을 오빠로, 선영을 언니로 부르며 살았던 영주는 그날 호칭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영주의 10살 난 딸 ‘이닻별’. 상처의 굴레에서 탈출을 갈망했던 영주는 결혼을 했고, 태어나게 된 아이가 닻별이다. 천재로 태어났지만 할머니와 엄마의 모진 삶을 이어받아 우울증을 앓던 중 부모의 이혼과 아빠의 재혼소식에 힘겨워하다 자살을 시도한다.
이러한 선영, 영주, 닻별이의 기구한 삶을 계속해서 읽어가도록 눈물을 흘리기에는 뻔한 스토리 아닌가? 하는 느낌이었다. 오래전 <가시고기>라는 책을 읽으며 눈물을 펑펑 쏟아내었던 기억도 물씬 떠올랐기 때문일까?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아들을 위해 모든 재산을 탕진하여 골수이식수술을 하였지만, 아들의 백혈병은 또다시 재발한다. 병원비 마련을 위해 아버지는 자신의 간을 팔기로 결심했지만 검사를 받던 중 자신이 간암 말기임을 알게 되고, 간 대신 망막을 팔아 아들의 병원비를 감당한다. 그리고 병을 이겨낸 아들을 타국에 살고 있는 전처에게로 보내고 아버지는 홀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다는 내용의 <가시고기>가 오버랩 되었다. 그리고 <바보엄마>에서 영주가 심장병으로 죽게 된다는 대목에서 ‘역시나 그렇군!’ 하며 벌써 소설을 다 읽은 기분까지 들었다. 그래서 책의 마지막 3분의 1정도를 남겨놓은 시점에서는 커피를 마시며 다른 것에 잠시 집중하기도 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 그렇다 할 별 감정 없이 <바보엄마>를 다시 읽어 내려갔다.
그러나 <바보엄마>를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이상하리만치 나의 심장은 두근거리고 눈에 힘이 들어갔으며 인상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헉...!! 영주가 심장병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세상에 남겨진 선영은 닻별에게 또다시 바보엄마 역할을 해주며 살게 될 것이라는 나의 예상이 처참히 무너졌던 것이다. 남아있던 내용들을 읽어가는 내내 놀라움이 섞인 숨소리가 내 귀를 맴돌았다.
‘사람은... 자식을 낳으면 죽어도 진짜 죽은 게 아니다.’ 라는 <가시고기>의 대사가 생각났다.
자신이 뇌종양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임을 예견하고 있었던 선영은 자신의 심장을 딸 영주에게 준다. 그리고 선영은 딸의 고장 난 심장을 자신의 가슴에 들여놓고 죽음을 맞이한다.
‘ 그 사람 때문에 제 심장이 뛰는 겁니다.
그 사람을 위해서 제 심장이 뛰는 겁니다.
그 사람이 있기에 제 심장이 뛰는 겁니다.
그 사람은 제 심장의 진짜 주인입니다.
이제 진짜 주인에게 제 심장을 돌려주고 싶습니다.‘
이 짧디 짧은 몇 문장의 글은 딸 영주의 것이 아니다. 바로 <바보엄마> 선영의 것이다. 강간의 사건을 통해 태어나게 된 딸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늘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선영은 그 마음을 자신의 심장을 주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바보엄마> 선영의 마지막 편지를 읽으며 터져 나오는 뜨거운 눈물은 어느새 밤잠을 못 이룰정도로 내 어깨를 들썩였다. 어미의 또 아비의 사랑에 무거움을 느끼는 눈물방울들이 쓰디 쓴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