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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 언덕의 집
타카도노 호코 지음, 치바 치카코 그림, 서혜영 옮김 / 미래엔아이세움 / 2011년 6월
절판
어렸을 적부터 이런 소설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환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 그 문을 통과하면 소녀의 앞에는 놀라운 세계가 펼쳐진다.
어른이 된 지금 읽어도 무척이나 재미가 나는 그런 책이었다. 아마 또래 아이들이 읽으면 더욱 열광하며 읽게 될 그런 책.
열두살 후코는 7년만에 외사촌 마리카로부터 편지 한통을 받는다. 미기와다테에서 보고 싶다는 말. 바로 후코의 외가이자 마리카의 친가인 할아버지가 계신 곳이었다. 후코의 엄마는 외가를 좋아하지 않았고, 덕분에 후코도 거의 외가에 간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도 대하기 어려웠고, 외사촌인 마리카와도 거의 만난 적이 없어 (후코의 기억으로는 다섯살때 한번) 낯설기는 했지만 이번 편지는 특히나 후코를 설레게 했다. 내키지않는 듯 보내준 엄마덕에 후코는 혼자서 미기와다테에 도착한다.
'멋진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것이 후코의 은밀한 즐거움이긴 했지만, 후코를 유혹하는 그 정원은 소녀다운 꿈과는 왠지 모를 거리가 있었다. 38p
아주 우연히 낡은 할아버지 저택에서 회중시계가 시계풀로 바뀌며 비밀의 정원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 후코.
그 놀라운 경험을 마리카와 비밀로 공유하고 싶지만, 마리카는 심드렁한 반응을 보일 뿐이다. (후코는 외가에, 마리카는 자신의 외가에 따로 머물면서 가끔 만났다.)
자신에게 딱 들어맞는 환경 속에서 홀로 경험하는 세계, 그것이 가져다주는 해방감. 마치 어른이 된 것 같았다. 그동안은 어른이 되는 걸 두려워했지만 어른이란 건 어쩌면 부모의 자식이나 가족의 한 구성원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으로만 존재하여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잇는 것일지도 모른다. 211p
독특하면서도 아름다운 마리카, 자신처럼 평범한 아이가 아닌 마리카만이 그 비밀의 정원의 주인이라는 생각에 후코는 실망감도 커졌지만, 그럼에도 마리카에 대한 호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또한 마리카의 사촌인 에이스케오빠까지 친하게 되어 오히려 마리카보다도 더 많은 비밀을 공유하게 되었다. 후코 할머니의 죽음, 비밀의 문과 관련이 있는 듯한 할머니의 죽음에 두 사람은 마치 탐정이 된 듯, 후코가 경험한 비밀의 세계를 조사하기 시작한다.
소년에게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한 장치를 만드는 기술을 물려준 것은 물론이고 기묘한 삶의 지침도 함께 심어줬던 것이다.
"남에게 도움이 되는 짓 따위는 하지마라." 229p
시계탑, 회중시계, 아주 우연히 그 시계에 얽힌 사연을 알게 되었다.세계 제작자 체르누이쉐프.
그는 값비싼 시계를 세공하는 러시아 기술자이자, 동시에 마술사이기도 했다. 체르누이쉐프의 시계, 그리고 후코의 할머니 스기노
"그 세계는 아직 있어. 완벽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하지만 잃어버려야 하는 것이 너무 많아...위험한 도박에 손을 댄 셈이야." 236p
수십년이 지나 체르누이쉐프에 대한 기록을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후코는 특히나 에이스케의 도움으로 (그는 아주 열렬히 후코에게 도움을 준다. 직접 발로 뛰어 오래전 신문을 조사하고, 몇십년전 전화번호까지 찾아가면서 조금씩 그 당시의 기록을 찾아내기에 이르른다.) 비밀의 세계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기 시작한다.
환상과 현실.
책을 덮으면 끝이 나버리는 소설이 아니라, 책 속의 환상의 세계는 엄연히 존재하는 또다른 문이었다.
아이들에게는 그래서 더 놀랍게 다가올 그런 책이 아닐까 싶다.
어릴적 보았던 이상한 나라의 폴, 그 만화가 어릴적에 무척 신기하게 느껴졌던 것이, 마법세계에서 금방 현실로 돌아와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이상한 나라에 갇혀버린 니나를 구출하기 위해 폴이 고군분투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게만 느껴졌는데, (당시엔 왜 아이들에게 이렇게 시련을 주는 만화를 그렸을까 싶었는데) 아무런 긴장, 갈등 구도 없이 그대로 풀려버리는 대부분의 만화가 오히려 더 재미없는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시계 언덕의집.
마리카가 보았어야 할 비밀의 정원을 자신이 대신 본 것에 참담한 기분이 든 후코.
중학생이지만, 어른 못지않은 성숙함과 깊은 이해심을 지닌 에이스케.
그리고 사차원 소녀같은 마리카.
그들의 놀라운 이야기를 아이책 치고는 제법 두툼한 단행본 한권으로 멋지게 만날 수 있었다.
평범해보이는 어른들의 세계도 결코 그렇지 않음까지 느낄수있는 매력만점의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