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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백
노나미 아사 지음, 이춘신 옮김 / 서울문화사 / 2011년 4월
평점 :
품절

너무나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사건들, 혹은 그 사건을 추적하는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놀라운 추리력으로 뒷받침된 소설들, 그런 책들을 너무 많이 읽었던 것일까? 경찰 소설의 백미이자 노나미 아사의 신작이라는 이 책에 대한 기대가 컸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최근의 그런 자극적인 사건들보다는, 분명 살인사건들임에도 소소한 일상과 관련되어 있는 것 같은 평범하면서도 따뜻한 수사를 진행하게 하는 어릴 적에 봤던 "수사반장"이라는 프로를 떠올리게 하는 그런 소설이었다.
책의 배경 또한 1965년부터 1986년까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하였는데, 그래서인지 도쿄 디즈니랜드가 새로 생겼다는 둥, 말로만 듣던 공중전화카드가 이렇게 생겼냐라는 등의 지금 접하기에는 너무나 생경한 그런 표현들이 나온다. 너무나 과거의 일이기에 당연시 하고 있던 그런 일들이 그때는 사회적 이슈가 될만큼 충격적인 변화였던 것. 당시의 수사 방법 또한 (책 속의 도몬 형사가 인간적이라 그랬던 것일 수도 있지만.) 지나친 폭력을 이용한 죄인 심문 등이 이뤄지지 않고, 피의자들을 편안하게 대해주어 그들 스스로 자백하게 만드는 묘한 분위기의 소설이었다.
거의 날마다 오미야 씨 집에 찾아가 이웃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탐문 수사를 벌이고 있는 나가우치와 나카자토 콤비는 점차 오미야 하루기치라는 남자의 인생까지 파악하기에 이른 것 같았다. 118p 돈부리 수사
피해자와 피의자의 입장을 모두 고려하는 입장의 글인지라, 어이없게 살해당한 기구한 처지의 피해자의 슬픈 인생사도 흘러나오고, 가해자의 상황이라던지, 자백을 하게 만드는 배경 등이 자연스럽게 이뤄져 읽는 이로 하여금 부담없이 편안하게 읽을 수 있게 하는 그런 책이었다. 사실 좀 무서운 내용이 될 수도 있었고, 피를 부르는 끔찍한 내용이 될 수도 있었는데, (낡은 부채는 좀 섬뜩했다. 정신이상자 같은 주인공 때문에 읽고 나서도 아니, 어째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끔 이야기가 진행이 되어서 읽는 이에게 부담이 덜하게 씌여진 듯 하였다.
소위 돈부리 수사라고 일컬어지는게 있다.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장면으로, 형사들이 취조 중에 피의자에게 가스돈이나 오야코돈 등을 시켜 주며 수사를 하는 것이다. 아직 일본이 가난해서 먹을 것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일이 지금보다 비일비재했던 시절, 돈부리 수사는 꽤 큰 위력을 발휘했다. 물론 전과가 쌓이면서 나쁜 쪽으로만 머리가 돌아 돈부리를 먹고 나서도 여전히 거짓말을 해대는 놈들도 있었다고는 하지만, 대개는 완고했던 용의자들의 마음을 풀어지게 했다는 것이다. 149p 돈부리 수사
우리나라에서도 피의자 심문 시 자장면을 사주거나 설렁탕을 시켜주는 장면들을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본 것 같은데 일본에서는 그것을 돈부리 수사라 불렀나 보다.
도몬 역시 어느 정도 베테랑 형사가 되자, 마음을 움직일줄 아는 그만의 실력을 발휘한다.
아무리 극악무도한 범죄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부모, 형제, 처자식에게는 애정을 품고 있게 마련이다. 그들의 앞날이 걱정된 나머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 피의자를 도몬은 지금까지 몇명이나 만나봤다. 상대방의 마음을 열게 하기 위해서는 일단 안심을 시켜야 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신뢰를 느끼게 할 필요가 있었다. 305p 아메리카 연못
네 가지 사건이 프롤로그, 본문, 그리고 에필로그로 진행이 되는데, 사건과 더불어 도몬의 가족이야기도 같이 흘러나온다. 피해자, 가해자들의 아이와 자신의 아이가 비슷한 연령대거나 할 적에 더욱 가슴아파하면서 그래도 동정심으로 객관성을 흐리지 않으려 노력하고, 어린 자녀를 대신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따뜻하게 전해지는 것이 이 소설의 백미라면 백미라 할 수 있겠다. 틀에 박힌 형사라면 아마도 그냥 넘어갔을지 모를 어린 자식 걱정까지 하게 되는 그는, 형사이기 전에 따뜻한 가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자극적인 재미는 없었지만, 오랜만에 아날로그 풍의 따뜻한 경찰 소설을 읽은 느낌은 참으로 좋았다. 그래, 항상 숨막힐듯 조여오는 긴장감으로 충만한채 살아갈 필요는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