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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요모타 이누히코 지음, 한정림 옮김 / 정은문고 / 2024년 10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이 책이 궁금했던 건 일본인 작가가 1979년 한국의 군사정권 하에서 계엄령을 목격하고, 그것을 소설로 그려냈다는 설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망설임도 컸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그 시대를, 외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이 어쩐지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장을 넘기며 이내 깨닫게 된다. 이 소설은 누군가의 외부적인 시선이 아니라, 철저히 안에서 겪어낸 이야기에 가깝다는 것을 말이다.
작가는 서울의 어느 대학교에서 1년간 일본어를 가르쳤고, 매일 학생들과 얼굴을 맞대며 대화를 나눴다. 그런 그가 포착한 시대의 온도는 놀라울 만큼 정확하고 생생하다.
『계엄』은 격동의 1979년을 배경으로 한다. 일본 유학생 세노는 한국에서 어학 강사로 지내며 대학생들과 교류하고, 극단의 연습생으로 연극 무대도 함께한다.
그는 연기 연습 중 만난 학생들과 우정을 쌓고, 연극 무대에서 청춘을 소비하며, 일상을 공유한다. 그러다 어느 날, TV 뉴스 자막으로 마주한 계엄령 선포.
사회는 순식간에 얼어붙고, 친구들은 하나둘씩 연행되거나 사라진다. 불안과 감시, 의심과 침묵이 일상에 들이닥친다. 계엄은 단지 정치적 명령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공기를 무겁게 누르는 또 하나의 이름이 된다.
작가는 군부 통치 시절의 서울을 단지 배경으로만 두지 않는다. 학생운동, 연극 무대, 대학가의 분위기, 심지어 서울의 거리 풍경까지도 구체적으로 묘사되며, 이야기는 거의 다큐멘터리처럼 전개된다.
특히 세노가 학생들과 함께 공연을 준비하는 장면이나, 명동에서 누군가를 뒤쫓는 추격 장면은 극적인 리듬감마저 있다. 정치의 격랑 속에 놓인 개인들의 서사, 그것도 타지인의 시선으로 본 한국의 민낯은 우리가 잊고 있던 시대의 기억을 되살려준다.
흥미로운 점은 이 소설이 외국인의 관찰기에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세노는 점차 외부인의 위치에서 내부인으로 이동한다. 학생들의 고민에 귀 기울이고, 용산에서 함께 술을 마시고, 연극 대사를 함께 외우며 웃고 싸우는 과정에서 그는 분명 한국의 현실 속으로 깊이 들어간다.
3학년이 되면 일본어로 대화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학생들과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게 됐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 작품은 언어를 넘어선 공감의 기록이기도 하다. 작가는 그 시대 한국 청춘의 얼굴에 녹아 있던 불안과 저항, 그리고 잠재된 희망을 예리하게 그려낸다.
11장의 제목인 계엄령 발동은 이 작품 전체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평범했던 일상이 조용히 무너지는 순간, 이 소설은 급격히 달아오른다.
뉴스 자막 속 단 한 줄의 문장이 한 도시를, 한 세대를 멈춰 세운다. 계엄령이 선포되었다는 말은 총성이 아니라 침묵으로 사람을 묶는다.
그 이후로 세노가 마주한 세계는 완전히 달라진다. 경찰의 심야 연행, 친구의 실종, 수업 도중 들이닥친 검문, 그리고 어디서든 감시당하고 있다는 압박감. 소설 속의 서울은 갑자기 온통 그늘진 무대로 바뀐다.
『계엄』은 한 시대를 기억하는 방법에 대해 묻는 작품이다. 그것이 반드시 한국인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본인이라는 외부자의 위치에서 서사를 풀어간다는 점이 더 신선하다.
그의 시선은 냉정하지만 차갑지 않고, 객관적이지만 무관심하지 않다. 시대의 온도에 온몸으로 맞서는 사람들의 얼굴을 그는 마주 보며 기록한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정치 소설이라기보다는 감각의 소설에 가깝다. 시대가 사람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섬세하게 따라가며, 그 안에서 개인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책 뒤표지에 적힌 문장 "여러분, 한국에 가본 적이 있나요?"라는 질문은 단순한 궁금증을 넘어서 이 소설의 정수를 꿰뚫는다. 가 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공기, 그 시간 속에 있었던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침묵의 무게. 『계엄』은 그 시간을 견뎌낸 누군가의 기록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아직 꺼내지 못한 기억의 열쇠가 된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한 시대의 비극을 연민 없이 그려냈다는 점이다. 감상에 젖지도 않고, 가해자를 명확히 지목하지도 않는다. 그저 사실을 그리고, 목격한 장면을 담담히 보여줄 뿐이다. 그 속에서 독자 스스로가 질문하게 만든다.
『계엄』은 과거의 사건을 재현하는 소설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방식에 대한 질문이다. 외국인의 눈으로 본 1979년의 서울은 놀랍도록 낯익고, 동시에 낯설다. 이 소설은 누군가의 고통을 빌려 쓰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서 끝까지 바라보며 기록한다. 그 진심이 지금 우리의 시간에도 유효하게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