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루라도 원없이 책만 읽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을게다.

나 또한 고질병이라 틈만 나면 언젠가는 평소 버퍼링없이 읽고 싶었던 전집류나 세트도서를

한가방 가득 싸들고 가서 공기좋은 산사에 틀어박혀 유유자적 선비흉내를 내보리라 유쾌한 상상을 해보곤 한다.

 

올 한해 상반기는 유난히도 업무때문에 바쁘고, 육아, 집안일, 대소사 등으로 책 읽을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전자책을 구입하면서 틈틈이 짬을 내어 버려지는 시간 등을 활용한 게 나름 다행스럽다고 해야하나.

그래도 역시나 책은 한 자리에서 어느 정도의 분량은 읽어줘야 그 맛에 취하는 법이다.

잠시라도 짬이 날때 그 시간을 놓쳐버리면 언제 또 책을 들수 있는 기회가 올지 기약할 수 없다는 마음에 우짜든동 찔끔찔끔 읽는 습관이 과연 내가 추구하는 독서의 방향인가 하는 회의가 들때도 있다.

독서의 양과 질에서 볼때 내가 처한 현실을 감안하더라도 문어발식으로 이책 저책 찔끔찔끔 읽어대는 이 독서스타일이 때론 맘에 들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어쨌든 앞으로는 많은 책을 읽고도 싶지만, 좋았던 책을 깊이 고민하면서 다시 읽어보는 쪽으로 실천을 하고 싶다.

 

9권 중에 최고를 고르라면 고골의 <뻬쩨르부르그 이야기>를 꼽고 싶다.

 

 

 

 

1. 달콤쌉싸름한 초콜릿(라우라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사랑은 오감중에 미각과 닮아 있다라는 생각을 한 책

사랑은 미친 짓이다. 라는 경구가 사랑이란 건 해봤자 쓸모없다는 뜻이 아니고,

사랑할 땐 우리모두 반쯤 미쳐있는 것이다 라는 뜻으로 해석해 봄직한 내용.

야하고, 감각적이고, 무엇보다 자~알 읽힌다.

 

 

 

 

 

 

2. 빼쩨르부르그 이야기(고골리 지음, 조주관 옮김 / 민음사)

 

 

5편의 단편집 모음

코, 외투, 광인일기, 초상화, 네프스끼 거리

이 단편집에서 고골에 반해버렸다.

특히나 <코>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집에 실려있는 동명의 소설 스님의 <코>와 비교해 읽어보면 웃음속에 담긴 인간의 비루한 욕망이 짧은 소설속에서도 얼마나 길게 여운을 남기는지 알 수 있다.

류노스케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

 

 

 

 

 

3. 검찰관(니콜로이 고골 지음, 조주관 옮김 / 민음사)★

 

 

고골의 단편집을 읽고 반해서 바로 읽어버린 책

첫문장 "제 낯짝 비뚤어진 줄 모르고 거울만 탓한다"라는 러시아 속담으로 시작하는데,

우리 속담으로 하면 "똥 묻은 개, 겨 묻은 개 보고 나무란다"와 일맥상통한다.

그런데 역시 고골은 천재인가보다. 아래 글을 읽고 한동안 외우고 다닐 정도로 좋았었던 기억이.

 

"고골의 작품에서는 언제나 인류전체가 풍자의 대상이 되는 셈이나, 독자는 그 순간만은 그 풍자의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기이한 착각에 사로잡혀 풍자가와 더불어 자기자신이 소속된 인류를 비웃는 것이다"

 

 

 

 

 

4. 만화 박정희1,2(백무현 지음, 박순찬 그림)★★★★★

 

 

 

고(故) 백무현님의 시리즈 중 박정희 편

만화라는 재능을 현대사에 아낌없이 털어주고, 2016년 4월 총선 여수시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나섰다가 낙선한 후 위암으로 사망하신 안타까운 작가.

전두환, 김대중, 문재인,정주영,노무현 등의 세트도 읽어보고 싶은데,

언젠가는 연이 닿겠지.

평소에 알지 못했던 박정희의 출생부터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의 스토리가 공부가 된 책.

 

 

 

 

 

 

5. 일리아스(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그리스 문화의 원형이자 서양 정신의 출발점인 호메로스의 대표작으로, 그리스 문학이 전하는 가장 오래된 작품이자 유럽 문학의 효시이다. 신의 뜻에 따라 트로이 전쟁을 수행하는 그리스군과 트로이군의 비극적인 운명, 즉 전쟁과 죽음과 삶에 대한 인간의 통찰을 15693행에 담고 있다. 거대거대하지 않은가.

 

이 책은 유명세에 비해 완독한 사람이 많지 않을 듯

영화 <트로이>와 함께 하면 진도가 잘 나가지 않을까.

학창시절 셤 잘 쳤다는 예감이 들때 그날은 실컷 오락실에 가는 날(당시는 PC방이 없었다-_-)

바로 그날 마음처럼 다 읽었을때 큰 숙제를 해치웠다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워낙 다른 작품에 일리아스의 많은 문장들이 인용되기에 앞으로의 독서에 많은 도움을 준다.

 

 

 

 

6. 대머리여가수(외젠 이오네스크 지음, 오세곤 옮김)

 

 

아는 지인이 아끼는 책.

막말 대잔치

남성을 상징하는 대머리와 여가수를 결합한 역설적인 제목이 암시하듯 피상적이고 진부한 언어표현들을 비논리적으로 연결시킴으로써 진정한 대화가 단절된 인간관계, 인간들이 사물에 종속된 소외상황, 일상의 표면적인 평온속에 내재한 불안 등을 유머러스하면서도 비극적으로 폭로하고 있다.

이 책은 사뮤엘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연달아 읽으면,

입에서 욕좀 튀어나오지 않을까. 이거 뭐지?

 

 

 

 

7. 100도씨(최규석 지음 / 창비)

 

 

영화 <1987>과 함께 봐야 된다.

"사람도 100도씨가 되면 분명히 끓어,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네"

 

우린 지금 99도씨까지 끓어 있다는 걸 잊지 말고, 부당한 권력에 대해선 계속 싸워나가야 된다.

우리의 역사는 우리 손으로 만드는 것인데

그 "우리"에 내가 한번이라도 있었던가..라는 일깨움을 준 책

 

 

 

 

8. 공리주의(존 스튜어트 밀, 서병훈 옮김)★★★★★

 

 

요즘으로 치자면 밀은 타고난 엄친아다.

요근래 복면가왕에 김구라의 아들 MC그리가 나와서 "아버지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 것을 두고 시청자들의 반응이 각양각색이다.

아마 MC그리는 대견스럽다는 말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진정성은 차치하고서라도 아버지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그 뜻을 실천하자면 아버지를 뛰어넘고 싶다는 욕심뿐만 아니라 뼈를 깎는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애초에 아버지 그늘의 혜택을 받고 시작한 동현이가 과연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밟아왔는가를 생각해보면 글쎄다.

대한민국의 신음하는 수많은 청년들에게 가진 자들의 진정성 없는 공허한 다짐은 외면받는다.

 

 

그에 반해 밀은 아버지 그늘을 완전히 벗어났다.

아버지 제임스 밀과 벤담이 합작으로 이룩한 전통적 공리주의의 이론에서 벗어나려는 그의 노력이

아버지 이름은 몰라도 존 스튜어트 밀은 영원히 역사에 남았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자기 발전을 도모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을 지녔다고 주장하며 행복의 필수적인 구성 요소로 파악한 그의 이론은 그의 저서 <자유론>과도 뿌리를 같이 하며, 말년의 <여성의 종속>에 가 닿는다.

 

고전사상같은 책은 아무래도 선뜻 손이 가질 않는다.

하지만 고통의 시간을 투자하면 반드시 그 이상을 돌려준다.

 

 

 

 

9. 에티카(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조현진 옮김)★★★★★

 

 

 

 

 

 

 

  

 

 

 

 

 

이 책은 강신주의 강의와 함께 했다.

무신론자이면서 동시에 신에 취한 유대인 철학자. 게다가 유대교에서 파문당하며 바티칸 최고의 금서목록이기도 한 책

전공자가 아니라면 이 발췌본 정도로만 읽어도 괜찮다.

욕심을 부리고 싶다면 라틴어 원본을 번역한 유일한 판본이 서광사에서 나왔다.

이 책은 에티카(윤리학)를 쓴 스피노자의 사상을 알 수 있다.

특히나 당시에 신을 부정하고 인간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점은 가히 놀랄 만하다.

니체가 300년 후에 "신은 죽었다" 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도 스피노자의 선물 때문 아니었을까.

 

철학은 건물을 짓기위해 시작하는 기초공사일 것이다.

땅이 잘 다져지면 건물은 수월하게 올라간다. 독서에서 철학은 튼튼한 지반구실을 한다.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선, 영화의 프리퀄처럼

그 원류를 짚어나가는 일이 우선일 것이다.

 

 

 

 

 

첨엔 포스팅을 상반기 전체로 할려고 했는데, 백만년후나 완성될 것 같아서 1월에 읽은 책으로 했다.

늘 느끼는 거지만 열심히 쓰시는 분들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2월에 읽은 책을 포스팅하는데는 50만년 후나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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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09-08 2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프리쿠키님은 얼마나 찰진 책만 읽으시는지~옛날에 초딩때 오락실이 50원이었는데 울동네 20원이어서 엄청 많은 애들이 방문해줬다는...ㅋ 보고 도전받고 가요 ^^

북프리쿠키 2018-09-09 00:00   좋아요 1 | URL
ㅎㅎ 찰져보이나요.
카알님 예전에 읽으신 책들 이제서야 읽는데요~
오락실 50원ㅎ 그땐 겔라그도 엄청 재미있었지요. 물결공격에 딸려올라가면 그거 살려내야한다는 ㅋ

2018-09-15 14: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9-20 2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정신병원에 수감된 오스카가 자신의 생애를 서술하기 위해 조부모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나의 이야기는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시작된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말하기 이전에, 적어도 조부모님 중의 한분이나마 기억하려는 인내심을 가지지 않은 자라면 누구든 자신의 생애를 서술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13쪽


65페이지에 들어와서야 드디어 주인공 오스카는 태어난다.

˝나방은 계속 날개소리를 냈다. 마치 자신이 가진 지식을 떨쳐버리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발광체와 이야기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며, 또한 나방과 전구 사이의 대화가 나방에게는 하여간 최후의 참회이며, 일잔 그런 식으로 전구를 무죄 방면하고 나면 다시는 죄를 짓고 열광할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듯이 날개 소리를 냈다.(중략)
나방이 북을 두들겼다.˝- 63쪽

서재 화이트보드에 등장인물의 관계도를 그려가다보니 왠지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 가계도의 악몽이 떠오르긴 하지만 그 복잡함에 비하면 뭐 ~

과연 양철북의 의미가 언제 나올까 궁금해 하면서 읽으면 초반의 지루함을 견뎌내는 힘이 되지 않을까 한다.






* 민음사에서 나온 귄터그라스의 책(4종 총6권)





* 다섯살배기 혠니의 아빠 따라하기
미니북에 언제 저렇게 색칠을 해놓았는지~
피는 못 속이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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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8-09-08 16: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화이트보드 이런 관계도 너무 좋아요ㅋ
통통한 아가 손♡

북프리쿠키 2018-09-08 17:42   좋아요 1 | URL
귀찮고 시간걸리지만 책 초반에 이렇게 그려놓으면,
도움 많이 되는 것 같아요.
공감 감사드립니다 나와같다면님^^;

겨울호랑이 2018-09-08 1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양철북」은 족보가 필요한 책이었군요. 저는 북프리쿠키님처럼 이렇게 정리하질 못해서 참 부럽습니다^^:)

북프리쿠키 2018-09-08 20:18   좋아요 1 | URL
기억력이 딸려 어쩔 수 없지요.흐
정리도 대충대충 하는 편이라 일목요연하질 못하네요.
겨울호랑이님처럼 체계적으로 깊이있게 못쓰니 이렇게라도 찔끔거려야 뭔가를 남긴다는 생각에
지분거립니다.
오늘은 토요일 밤이군요..책 진도빼기에는 선선하고 아주 딱입니다.
좋은 밤 되시고, 늘 좋은 글 많이 올려주세요.^^

카알벨루치 2018-09-08 2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이트보드판~야! 이거 획기적입니다 출연진도 좋고! ㅎㅎ

북프리쿠키 2018-09-09 00:02   좋아요 0 | URL
큼직하니 좋아요ㅋ 출연진 실시간 밑줄 긋고 있는데ㅎ 좋아라하네요^^♡
 

자서전 <양파껍질을 벗기며>에서 소년시절 나치 친위대에 복무한 사실을 양심고백하고 작고한
권터그라스의 세계적인 작품.

˝그래, 사실이다. 나는 정신병원에 수용된 환자다.˝라는 첫문장으로 시작.


♣️단치히3부작
- 양철북, 고양이와쥐, 개들의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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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02 2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9-08 17: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침묵을 지키는 것이 여자에게 최고의 미덕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자가 남자에 비해 이성적 사고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가정이나 국가를 포함한 모든 조직에는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가 있기 마련이며, 이러한 조직에서는 이성적 사고 능력을 더 많이 가진 자가 지배하는 위치에 서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노예는 아예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아이들의 능력은 아직 미숙하다. 여자는 가지고 있지만 그 권위가 부족하다˝<정치학>. 따라서 여자가 남자의 지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여자의 침묵을 미화한 고대 그리스의 시인 소포클레스를 좋아했다는 말에 수긍이 된다.




이 책이 페미니즘에 관한 최고 권위를 지닌 고전으로 자리를 굳힌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어떤 주장이 사람들의 감정 속에 깊숙하게 뿌리는 내리고 있는 한, 비판이 제기되면 될수록 완강하게
버티는 힘 역시 더 커지는 법이다.
(....)
그리고 야만적인 습속이기는 하나 현재까지 오랜 세월 이어왔다고 해서, 그것이 앞서 털어버린 다른 야만적인 것들보다 한결 참을 만하다고 상정해서도 안된다.




우리는 정치적 해방을 얻기 위해 투쟁에 나선 사람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뇌물 공세에 무너지고 또 테러 위협에 주저앉고 마는지 잘 안다. 종속 상태에 있는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하나같이 뇌물과 협박이라는 만성적인 두 사슬에 묶여 꼼짝을 못한다.




전체 인류의 반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어이없는 불이익을 주는 경우를 제외하면, 태어나면서부터 짊어져야 하는 치명적 장벽 때문에 - 아무리 노력하고 환경을 바꾸더라도 소용없다 - 중요한 사회적 기능을 담당하지 못하게 되는 일은 어디에도 없다.




오늘날 여성의 본성이라도 알려져 있는 것들은 확실히 인위적으로 - 특정한 방향을 향해 강압적으로 몰아가고, 또 어떤 방향으로는 부자연스럽게 자극을 준 결과 -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분명히 말하지만, 아주 친밀할 뿐 아니라 동시에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면 서로에 대해 충분히 잘 알기만 매우 어렵다. 여성이 남성의 지배 아래 놓여 있을 뿐 아니라, 그가 좋아하고 원하는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맞춰가야 한다고, 그리고 남성의 마음에 드는 것을 제외하고는 여성이 아무것도 보여주거나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고 오랫동안 교육받아 왔다면, 이 경우만큼 남성과 여성 사이를 가로막는 것이 또 있을 것인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완전히 말살시킬 수 있는 힘을 가졌지만 그 사용을 자제하는 권력자들에 대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한 고마움을 느낀다는 것은 인생에서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 중 하나이다.




흔히 이상적인 형태의 가정은 동정심과 친절한 마음, 그리고 자기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마음을 길러주는 학교과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한 집안의 우두머리 입장에서 본다면, 가정은 분명 제멋대로 살며 무서울 정도로 횡포를 부리고, 끝없이 방탕한 생활을 하며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이기적인 사람이 똬리를 틀 수 있는 온실과도 같다.



집안일을 감독한다는 것은 설령 육체적으로 그다지 힘이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찬찬히 사색하기에는 여간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다.




여성은 통장적으로 주어진 일상적인 일 말고도 언제나 자신의 시간과 능력을 다른 사람을 위해 써야 한다.
(....)
상황이 이러한데도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끈질기게 집중해야 하는 일에서 여성이 최고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해서 이를 가볍게 볼 수 있겠는가? 철학,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술이 바로 그런 분야이다.
생각과 감정을 집중해야 할 뿐 아니라 고도의 기량을 갖추기 위해서는 손도 늘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공부깨나 한다는 남성을 포함해서 세상 사람들이 사회적 환경의 영향력을 애써 무시하고 외면하는 가운데, 여성의 지적 능력에 대해 근거없이 폄하하는 한편 타고난 도덕성에 대해서는 엉뚱하게 찬사를 늘어놓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짓은 없다고 확신한다.




현대의 도덕과 정치 운동을 관통하는 중요한 원리는 오직 행위만이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이 어떤 존재냐가 아니라 어떤 일을 하는가에 따라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출신이 아니라 능력이 모든 권력과 권위의 유일한 원천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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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그렇듯이 설익은 깊이로 어느 한 분야, 특히나 요즘같이 남혐,여혐의 극한으로 치닫는 남녀갈등에 대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공개적인 포스팅에 자신만의 명확한 주관으로 썰을 풀기란 여간 어려운게 아니다.

더군다나 오랫동안 접근이 제한된 교육의 기회와 남성적 권력이 주가 되는 가부장적 제도하에서 세뇌되다시피 자연스럽게 체화된 여성들의 모순된 입장을 이해한다는 것은 쉬울지 몰라도,
지극히 자연스럽게 누려웠던 남성 권력이 얼마나 여성들에게 실패의 고통을 가져다 주었던가? 라는 걸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직시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이 책은 밀의 사상 전반 <자유론>의 기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밀 사상의 종합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인간의 삶에서 각자가 최대한 다양하게 자신의 삶을 도모하는 것 이상으로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라는 말이 자유론에 나오는데 <여성의 종속>은 이런 정신에서 잉태된 것이다.

여성들이 정치에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 불과 20세기 전반인 것을 볼 때 19세기에 살았던 밀이
당시의 기득권을 상대로 이런 글을 썼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밀의 저서 <대의정부론>의 핵심메시지가 ˝무식과 지식이 동일한 정치권력을 향유한다는 것은 원칙상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훌륭하고 현명한 사람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더 커야한다˝라는 것처럼 남성들에게조차 전부 1인1표를 주어야 한다는 발상도 매우 급진적인 사람이 아니면 하기 어려운 생각인 걸 감안했을때 말이다.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또 다른 프랑스의 천재 루소가 해내지 못한 ˝인류의 평등˝이라는 가치를 밀이 멋지게 이 책을 통해 드러낸 것이다.
마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상반된 입장처럼.


하지만 이 책에서도 지적하고 있다시피
안타까운 한계점을 드러내고 있다.
근대 서구 여성주의 이론사의 출발점이라고 할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고, 1702년에 나온 메리울스턴크래프트의 <여권옹호론>의 뒤를 잇는다는 평을 듣지만, 시대적인 한계를 고려한다고 해도 전반적으로 원론 수준을 맴돌고 있다는 것이다.
즉 잘못된 점을 비판하고 향후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지만, 그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행위‘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방향을 제시하지 못한점일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남녀가 정신적인 능력이나 평균적인 힘 또는 소질 면에서 천성적으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거듭 천명하면서도 여성이 실용적인 재능을 더 많이 타고났다고 하는점이나, 사변적 능력은 남성의 몫에 가깝다고 서술한 점, 그리고 나아가 여성 개개인의 성격에 따라 편차가 있을 수 밖에 없음을 전제하면서도, 여성이 자기 가족의 사적인 이익에 도움을 주지 않는 일에 마음을 쏟거나 나서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정의에 대한 문제인식을 폄하한 점은 매우 안타깝다.




그때로부터 또 20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대한민국은 그 견고한 남성의 권력을 시대의 변화에 맞게끔 되돌리기 위해 몸살을 앓고 있다.
하지만 치열하게 고민하고 행동하지 않는 남성들이나, 같은 여성을 배제하고 폄하하는 또 다른 냉대와 차별은 문제해결의 걸림돌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성이 탁월하다거나 형편없다고 남녀평등의 문제에 혜안이 깊거나 얕다고 무시하는 것 또한 바람직한 행동이 아닐 것이다.
현 시대의 고통과 신음을 바라보는 문제해결의 실마리는 물줄기의 원천인 고전에서 찾는 것도 또 다른 방법중 하나일게다.
너무나 많은 자극적인 책들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나를 포함한 침묵하는 대다수의 남성, 그리고 여성들이 시대의 진통을 바라보고 모순된 체제의 변화를 갈망한다는 점을 가슴에 끌어안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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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09-02 19: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유부녀인 해리엇을 20년간 기다렸다가 남편이 죽고 7년반동안 결혼생활을 한 밀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해리엇을 만나 밀의 사상은 더 성숙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북프리쿠키 2018-09-02 19:48   좋아요 2 | URL
자유론 서문에 해리엇의 죽음 이후 감수없이 출간되었다고 안타까워한 글이 떠오르네요.
성인이 된 이후 나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서글프네요.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처럼, 밀과 해리엇처럼 남녀의 조화는 이렇게 위대한가봅니다^^
요즘 벨루치님 읽으시는 것보니 따라가는 건 고사하고 근처도 못갈듯ㅠ
아주 가랑이 찢어집니다ㅎ

카알벨루치 2018-09-02 19:59   좋아요 1 | URL
요즘 전 잘 읽지 못해요 그냥 글쓰는것에 우선순위를 두다 보니 읽기가 더딥니다~글은 흘러넘쳐야하는건데 쥐어짜내면 안되는데 고갈이 예상됩니다 ㅋㅋ밀이 많이 아쉬웠겠습니다 더군다나 주제가 <여성의 권리>에대한 건데... 밀의 마음이 느껴지네요
 

삶이란 나는 남고 내게 의미있는 관계자들은 떠나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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