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름발이, 병신, 애꾸눈, 반쪼가리는 위그노들이 우리 외삼촌을 부를 때 쓰는 몇가지 별명이다. -55쪽

 

 

 

"온전한 것들은 모두 이렇게 반쪽을 내 버릴 수 있지" (....)

 

"그렇게 해서 모든 사람들이 둔감해서 모르고 있는 자신들의 완전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거야. 나는 완전해. 그리고 내게는 모든 것들이 공기처럼 자연스럽고 막연하고 어리석어 보여. 나는 모든 것을 볼 수 있다고 믿었는데 그건 껍질에 지나지 않았어. 우연히 네가 반쪽이 된다면 난 너를 축하하겠다. 얘야, 넌 온전한 두뇌들이 아는 일반적인 지식 외의 사실들을 알게 되거야. 너는 너 자신과 세계의 반쪽을 잃어버리겠지만 나머지 반쪽은 더욱 깊고 값어치 있는 수천 가지 모습이 될 수 있지. 그리고 너는 모든 것을 반쪽으로 만들고 너의 이미지에 맞춰 파괴해 버리고 싶을꺼야. 아름다움과 지혜와 정당성은 바로 조각난 것들속에만 있으니까."-60쪽

 

 

 

두 존재가 세상에서 만나면 언제든지 한 사람은 부서져 버리게 마련이다.-65쪽

 

 

 

"아, 파멜라, 이건 반쪽짜리 인간의 선이야. 세상 모든 사람들과 사물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야. 사람이든 사물이든 각각 그듣ㄹ 나름대로 불완전하기 때문이지. 내가 성한 사람이었을 때 난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귀머거리처럼 움직였고 도처에 흩어진 고통과 상처 들을 느낄 수 없었어. 성한 사람들이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도처에 있지. 반쪼가리가 되었거나 뿌리가 뽑힌 존재는 나만이 아니야, 파멜라. 모든 사람들이 악으로 고통받는 걸 알게 될거야. 그리고 그들을 치료하면서 너 자신도 치료할 수 있을 거야." -88쪽

 

 

"반쪽을 사형하기 위한 교수대다"(....)

"처벌을 내리고 또 처벌을 받을 단 한사람을 위한 거란다. 반쪽머리 머리로 바로 자기 자신에게 극형을 언도해서 다른 반쪽이 흔들거리는 끈의 고리 속으로 들어가 마지막 숨을 내쉬는 것이지. 나는 그 둘이 섞이길 원한단다." -104쪽

 

 

 

"그래게 해서 외삼촌은 사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은, 사악하면서도 선한 온전한 인간으로 되돌아왔다."- 119쪽

 

 

 

현실을 기록하고 고발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비슷한 작품들을 썼지만 칼비노는 이에 만족할 수 없었다.(....)

이러한 그의 고민은 <반쪼가리자작><나무 위의 남작><존재하지 않는 기사> 3부작으로 이뤄진 '우리의 선조들'에서 해결된다.

 

 

 

 

 

 

 

 

 

 

 

 

 

 

 

 

 

 

칼비노는 환상적인 소설을 쓰게 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 역사적인 현실이 우리에게 전해 준 긴장은 곧 풀리게 된다. 오래전부터 우리는 죽은 물위에서 항해를 하고 있다. 우리들이 맨 처음 현실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역사적 현실에 대한 신뢰성이나 그 현실의 표정, 책임감, 에너지에 대한 신뢰성을 회복하려고 애썼지만 점점 더 힘을 잃어 가기만 했다. 환상적인 소설을 통해 나는 현실의 표정, 에너지, 곧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것들에 활기를 주고 싶었다. -124쪽

 

 

 

"극단적인 '악'처럼 극단적인 '선'도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기는 마찬가지다" -125쪽

 

 

자신이 만드는 도구들이 살인에 사용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피에트로키오도, 탐미적이며 무책임하고 하루하루의 삶을 쾌락에 바치며 방탕한 행복을 추구하는 문둥이들, 진정한 종교가 무엇인지도 모르며 종교 윤리만을 강조하는 위그노들, 이들은 겉모습으로는 완전하지만 자작처럼 반쪼가리 인간들에 불과하다. -126쪽

 

 

 

칼비노는 문학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을 '즐거움'에 두었다. 동화라는 방식을 택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탈리아의 한 비평가는 칼비노의 작품은 겉으로 보기에는 밝게 빛나는 따뜻한 남빛 바다 같지만 한번 그 속에 뛰어든 사람은 금방 바다 깊은 곳으로 내려가 검은 협곡들과 어두운 동굴과 괴물 같은 물고기들과 해초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듯 다양하고 깊이 있고 변화무쌍한 칼비노의 작품을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 읽는다면 그건 정말 반쪽짜리 독서가 되고 말 것이다. -127쪽

 

 

-------------------------------------------------------------------------------------------------------

 

 

 

처음부터 강렬한 임팩트로 나를 끌고 가더니 한 순간도 딴 짓을 할수 없게 만들만큼 매력적이었다.

내 안에 선과 악이 공존해 있는데, 만약 그 육체를 선과 악으로 정확하게 쪼개서 나눴을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라는 질문에서 이 작품은 출발한다. 참신하지 않은가.

마을에서 주인공 자작의 반쪼가리는 악을 행하고, 반쪼가리는 선을 행한다.

이야기는 과연 선과 악을 극단적으로 행했을 때, 말하자면 최고의 악과 최고의 선을 각각 행했을 때

어떤 기준에서 그것이 악이고 선이라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다소 난해한 탐구를 시작한다.

 

우리 마음속에는 항상 악마와 천사가 공존한다.

불쑥 튀어나오는 악마때문에 큰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고, 때론 한없이 착한 천사가 왕림하기도 한다.

속에 악마를 숨기고, 천사의 모습을 지닌 채로 살기도 한다.

반대로 속은 천사같은데, 악마같이 살 수 밖에 없는 처지로 살아지.기.도 한다.

 

한 사람의 선함이 자신의 악함을 미워하고, 악함이 선함을 괴롭히는 묘사는

우리 마음속에서 수백번, 수만번 반복되는 자아와의 싸움을 그린 것이리라.

반쪼가리가 되어 비틀거리는 삶을 살아온 자작이 서로의 결투에 의해 단 하나의 온전한 육체로 합쳐지고 완전한 정신을 갖게 되는데..이렇게 온전히 합쳐진 하나의 몸뚱아리가 바로 인간의 불완전한 존재를 더욱 더 뚜렷이 나타내는 기이한 결말로 가고 있었다.  

 

우린 불완전한 존재다.

선과 악이 대립하는 세계라 생각하지만 그 어떤 선도, 그 어떤 악도 서로의 존재가 없다면 빛을 잃어버린다.

내가 악을 행했더라도 그 결과가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내가 선을 행했더라도 본의 아니게 고통을 안겨다 주는 일도 더러 있다.

선과 악은 공존한다. 그 무질서속에서 때론 섞이기도 하고 선악에 대해 여러가지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 불행하게도 그 판단의 마법봉을 쥐고 있는 것도 불완전한 인간이다.

악만이 지배하는 세상이거나, 선만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도

상대적으로 그 속엔 선악이 공존해 있으리라.

 

이 책은 나에게 또 하나의 질문을 던져준다.

 

내 삶속에서

"나의 생각, 나의 행동, 이 모든 것들이 과연 반쪼가리였지는 않은가."

 

 

* 이탈로 칼비노 전집(11권)

 

연대순으로도, 또는 난이도 순으로 읽어보면 무난하지 않을까.

 

 

 

 

 

 

 

 

 

 

 

 

 

 

 

* 레지옹 도뇌르 훈장

 

1981년에 칼비노는 이 훈장을 수상한다.

 

 

취소되어야 할 인간들이 좀 있지 않은가? 반쪼가리 인간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08-20 0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09 1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8-08-20 1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쿠키님도 육필 노트를 올리셨군요.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그전에도 올리셨나...?ㅋ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우리나라 사람도 꽤 탓네요.
프랑스가 우리나라 사람들에 대해 뭐 그리 잘 알겠습니까?
그저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판단할 뿐이겠죠.ㅉ

북프리쿠키 2018-08-20 17:30   좋아요 1 | URL
육필이라 하시니 온몸으로 쓴 거 같아서 .. 고기육 짜를 쓰는데 ‘손으로 쓴 글씨‘로 설명이 되어 있네예..
나름 한 무식합니다ㅎㅎ.

레지옹 도뇌르 훈장은 마담보바리 등장인물 중 오메(?)인가 하는 인물이 그 상을 받은 걸로 기억해서 무척 반가웠어요. 그놈도 제 기억엔 상받을만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ㅎㅎ
 

전쟁에서 투르크인 대포에 맞아 세로로 반쪽이 쪼개진 자작의 이야기. 반쪼가리는 선, 반쪼가리는 악이 되어..


이탈로 칼비노의 우리선조 3부작 시리즈
(반쪼가리 자작, 나무위의남작, 보이지 않는 기사)
중 첫번째 작품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08-19 1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19 16: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각자의 여행엔 각자의 빛이 스며들 뿐이다.
분명 같은 곳으로 떠났는데 우리는 매번 다른 곳에 도착한다.(...) 결국 나는 내 깜냥만큼의 여행을 할 수 있을 뿐이니까 - 프롤로그 중에서

느낌 좋은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히로시마 내 사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9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쟁은 끝이 없었다. 내 젋음도 끝이 없었다. 나는 전쟁에서도, 젊음에서도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175

 

독일군 병사를 사랑한 죄로 프랑스 여자인 리바는 집의 지하실에 감금된 채로 머리를 삭발당한다. 죽은 것으로 기억되야 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경험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나에게 먼저 돌을 던져라. 내게는 오로지 사랑만 있었을 뿐 더 이상 조국은 없었다.- 179

 

그녀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이렇게 사랑하는 독일군 병사가 강둑에서 총을 맞고 죽어가고 있을 때 루아르 강둑에서 같이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 이후 히로시마에서 평화에 대한 영화를 찍으며, 거기서 만난 일본남자와의 하룻밤 사랑으로 그 기억을 되살린다.

 

그녀는 단 9분만에 사망자 20만명, 부상자 8만명을 낸 히로시마의 원폭참사도,

한 몸이듯 사랑했던 독일병사의 죽음의 기억도 망각의 무차별적 위력앞에서 희미해지는게 두려운 것이다.

 

인간은 기억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한다. 프랑스 여자는 자기 인생의 어떤 결정적인 사건을 통과하며 절대 잊지 못하리라 여겼던 것이 희미해지는 체험을 한다. 그녀는 잊지 않기 위해서 사투를 벌인다. 그러나 망각의 막강한 힘은 그 너머에 있다. 잊지 않으려는 대상만이 문제가 아니다. 가장 끔찍한 것은 왜 그것을 기억해야만 했는지 그 이유마저 기억에서 사라진다는 것이다. -193

 

그녀가 히로시마에서 그 일본 남자에게 내어주는 것, 그것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진 가장 귀한 것, 현재 시점의 그녀 표현을 따르자면, 느베르에서 자신의 사랑이 죽고도 살아남았음이다. -186

  

 

 

 

 

 

  

인생에서 가장 힘든 일은 망각하기 어려운 법이다. 그리고 가장 사랑했던 순간도 말이다.

평소에는 잠자코 있지만, 그 트라우마는 각자의 내면속에서 울고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그것조차 시간의 세례에 당해낼 재간이 없다. 인간의 기억은 우리네 인생이 석양빛으로 저물어가는 순간까지도 버티지 못한다. 그래서 죽음으로써 그 기억을 끌어안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이젠 영화에서의 내레이션을 볼 시간이다  

 

 

 

* 1959년 영화작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인과 바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8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낚싯줄은 서서히 올라오더니 배 앞쪽 수면이 부풀어 오르면서 마침내 고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쉬지 않고 계속 올라오자 고기 주위에서 물이 쏟아져 내렸다. 햇볕을 받은 고기는 번쩍번쩍 빛이 났고, 짙은 자줏빛의 머리와 등, 옆구리의 연보랏빛 넓은 줄무뉘가 햇살에 드러났다. 주둥이는 야구방망이만큼 길쭉하고 결투용 쌍날칼처럼 끝으로 갈수록 뾰족해졌다. 고기는 다이빙 선수처럼 온몸을 물 위에 드러냈다가 유연하게 다시 물속으로 가라앉아버렸다. -64쪽

해조가 잔잔한 파도에 너울거리며 흔들거리는 모습은 마치 바다가 누런 담요 아래에서 뭔가와 사랑의 행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74쪽

상어는 가끔 냄새를 놓쳐 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냄새를 찾아내고 아무리 희미한 기미라도 발견해 내어 빠른 속도로 맹렬히 배를 뒤쫓아 왔다. 덩치가 아주 큰 마코상어(청상아리라고 부르는 상어의 일종)로 바다에서는 가장 빨리 헤엄칠 수 있는 놈인 데다 주둥이를 제외하고는 나무랄 데 없이 아름답게 생긴 놈이었다. -101쪽

코끝에서 꼬리까지 무려 5.5미터나 되는군.-123쪽






백조는 일생 동안 울지 않다가 죽기 직전에 단 한번 아름다운 소리를 내어 울고 죽는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흔히 예술가들의 마지막 작품을 ‘백조의 노래‘라고 일컫는다. <노인과 바다>(1952)는 미국의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남긴 백조의 노래이다. 이 소설은 1961년 7월 그가 미국 아이다호주 케첨에서 엽총으로 자살하기 전 출간한 마지막 작품이기 때문이다. (...) 마지막 작품이라는 점으로 보나, 훌륭한 작품이라는 점으로 보나 이 소설은 가히 헤밍웨이 문학세계를 장식하는 최후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129쪽



<노인과 바다>는 출간되자마자 비평가들과 동료 작가들 그리고 일반 독자들에게서 폭넓게 찬사를 받았다. 가령 같은 시기에 활약한 미국 작가 윌리엄 포크너는 ˝시간이 지나면 우리 시대 작가가 쓴 작품 중에서 아마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인정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이 작품을 높이 평가했다. 헤멩웨이 연구가 필립 영은 ˝헤밍웨이가 말해야 했던 것을 바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으로 말한, 가장 훌륭한 단 한편의 작품˝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135쪽


헤밍웨이의 작품이 대개 그러하지만 특히 <노인과 바다>는 주제가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 고전의 반열에 올라와 있는 작품이 흔히 그러하듯이 이 작품도 마치 거울과 같아서 비평가들이나 독자들은 이 작품을 읽으면서 저마다 서로 다른 모습을 발견한다. 또한 고전이 흔히 그러하듯 시대마다 새로운 의미로 읽히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이 소설은 보편적 의미 못지 않게 지리적 차이에 따른 특수한 의미를 지닌다. 이 작품만큼 보편성과 특수성, 일반성과 구체성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과 조화를 꾀하려는 소설도 찾아보기 힘들다 -146쪽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에서 무엇보다 소설가로서 자신이 느낀 고뇌를 심도 있게 다룬다.
따지고 보면 이런저런 방식으로 작품에 자신의 삶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작가란 하나도 없다. 영국 소설가 D.H.로렌스가 일찍이 ˝작가란 원고지위에 자신의 피를 쏟아 놓는다˝라고 말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146쪽


이 소설에서 산티아고가 죽음을 무릅쓰고 거대한 청새치를 잡아 올리는 행위는 곧 자신에게 닥쳐 온 늙음을 물리치려는 상징적 행위로 보아 크게 틀리지 않는다. 허먼 멜빌의 <모비딕>에서 주인공 에이해브 선장이 목숨을 걸고 추적하는 흰 고래가 이 우주의 악을 상징한다면, 길이가 무려 5.5미터나 되며 산티아고가 타고 있는 어선보다도 60센티미터도 넘게 긴 이 청새치는 노령이나 노쇠를 뜻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어느 소네트에서 노래하듯이 ˝미인의 이마에 밭고랑 같은 주름살을 파 놓는˝것이 시간이요 세월이다. 또 그는 ˝시간의 낫앞에 베어지지 않는 것 없어라˝라고 노래하면서 시간이나 세월을 풀을 베는 낫에 빗대기도 했다. 이렇듯 서양에서는 풀을 베는 낫은 흔히 노령을 상징한다. <노인과 바다>의 화자는 산티아고가 잡은 청새치에 대해 ˝노인은 커다란 낫처럼 생긴 꼬리가 물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고, 낚싯줄이 빠른 속도로 다시 풀려나가기 시작했다˝라고 말한다. 낫처럼 생긴 꼬리는 곧 시간이요 세월이다.-148쪽


이 무렵 헤밍웨이는 육체적 쇠퇴 못지않게 예술적으로도 소진 상태에 놓여있었다. 앞에서 이미 밝혔듯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출간한 이후 그는 이렇다 할 작품을 출간하지 못하고 있었고, 비평가들은 헤밍웨이가 작가로서 이미 종말을 고한 것과 다름없다고 선언했다. 예술을 종교의 경지로까지 생각해 온 헤밍웨이에게 훌륭한 작품을 쓰지 못한다는 것만큼 치명적인 고통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아직 예술적으로 건재하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다. 청새치는 바로 그가 되찾으려는 화려한 예술적 경지를 상징하고 , 필사적으로 청새치를 잡으려고 하는 행위는 곧 예술적 재기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고 할 수도 있다.-149쪽



<노인과 바다>의 주제와 관련해 노벨 문학상 선정 위원회는 ˝폭력과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현실 세계에서 선한 싸움을 벌이는 모든 개인에 대한 자연스러운 존경심˝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여기서 말하는 ‘선한 싸움‘이란 물질적 또는 육체적으로는 파멸당해도 정신적으로는 패배하지 않는 산티아고의 모습을 가리키는 말로 받아들여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산티아고는 결과보다는 과정, 목표보다는 수단과 방법에 무게를 싣는 인물이다. 죽음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는 인간에게 삶이란 어쩔 수 없이 ‘승산 없는 투쟁‘일는지 모른다.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싸움이 곧 인간실존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패배를 좀처럼 인정하고 않고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백절불굴의 정신이다. -156쪽.


마지막 작품인 <노인과 바다>에 이르러 헤밍웨이는 단순히 인간의 문제를 뛰어넘어 자연의 문제에까지 관심을 기울인다. 초기 작품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와 <무기여 잘있어라>에서 보여 준 개인주의는 <유산자와 무산자>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는 공동체 의식으로 발전하고 <노인과 바다>에서는 이제 마침내 우주의 모든 개체와 종을 함께 아우르는 최고의 단계에 이르게 되었던것이다. -176쪽.


빙산 이론에 입각해 감정을 응축하고 억제해서 표현하는 ‘언더스테이트먼트‘수법, 간결하고 박진감 있는 문장을 구사하는 하드보일드 스타일, 그리고 사실주의 전통에 굳건히 서 있으면서도 이미지와 상징을 효과적으로 구사하는 방식 등 헤밍웨이의 문학적 상표라고 할 특징이 이 작품에서 더욱 찬란한 빛을 내뿜는다.(....) 헤밍웨이는 빙산을 예로 들면서 8분의 7이 물속에 잠기고 나머지 8분의 1만이 수면에 떠오르는 빙산처럼 훌륭한 소설가라면 감정을 헤프게 드러내지 않고 그 일부만을 드러내어 나머지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177쪽.


-------------------------------------------------------------


솔직히 헤밍웨이의 작품은 <노인과 바다>가 처음이다.
헤밍웨이의 작법에 대해서는 수 많은 경구를 통해 익히 들어왔지만,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던 이 소설을 이제서야 읽었다는 것은 좀 부끄러운 일이다.
언젠가 읽어야지 하면서도 그 줄거리와 결말이 너무 뻔한지라 당장 손이 가는 책들에 뒤로 밀렸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 예상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TV에서 가끔 방영해주던 영화의 내용과 소설의 느낌도 크게 다르지 않았고, 무엇보다 책속에 줄 한줄 그을 곳이 없을 만큼 감탄스럽거나 특이한 심리묘사를 한 부분이 없을만큼 평이했다.

작품해설을 통해 이 작품이 왜 그렇게 위대한지 설명을 늘어놓았지만, 적어도 헤밍웨이에 대해서 내 자신이 무르익을때까지는 <노인과 바다>는 그저 이작가에 다가서기 위한 모든 마중물에 지나지 않으리라.
빙산의 8분의 1만큼만 표현해서 나머지 숨겨진 부분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라는 헤밍웨이의 말처럼 보여지지 않은 부분을 볼 수 있는 눈은 그의 또 다른 작품들을 접하면서 서서히 뜨이지 않을까 한다.

얼마 전 타개한 그리스로마신화를 쓴 고 이윤기님이
그 무더운 태양아래 신전의 돌 무더기 하나를 보자고 30여 km를 왔다갔다 한 것처럼,
˝알고나면 보이고, 보이는 것만큼 사랑하게 될지니
그 때는 전과 다르리라˝는 기대를 해봐도 좋지 않을까.























댓글(5)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18-08-14 20: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몇년 전 문동판으로 읽었는데 좋더군요.
너무 좋아 다른 책도 사 보려고 했는데 여태 못 읽고 있네요.ㅠ

북프리쿠키 2018-08-15 21:55   좋아요 0 | URL
아~문동판도 있었는데 그건 팔아먹었네요. 민음사로 서재꾸며서ㅎ 텔라님이 좋아하시니 뭔가 점점 호감이 가는 책이 될려구 합니다.ㅎ
헤밍웨이의 다른 책도 언능 읽어보고 싶네요.^^

카알벨루치 2018-08-14 20: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웃님들 땜에 노인과 바다로 저녁를 나야겠습니다! 북프리쿠키님 탓입니다! ㅎ헤밍웨이 자신을 투영한 주인공 노인의 모습이 굉장히 다가옵니다 학창시절에 읽었는데 또 다시 읽고 싶네요~헤밍웨이의 단편들도 참 인상적이었는데...좋은 스토리가 너무나 많은 세상입니다!

카알벨루치 2018-08-15 10:34   좋아요 1 | URL
북프리쿠키님 고마워요 님 덕분에 이거 읽고 심장이 벌렁거려 한참을 흥분했더랬어요 ㅎㅎ

북프리쿠키 2018-08-15 21:59   좋아요 1 | URL
ㅎㅎ 심장이 ~ 학창시절과 또 다른 감흥을 느꼈으리라 기대되는걸요. 저야 독서 경력이 짧아 겨우 뒤따라가는 처지입니다만
항상 재독의 그 맛을 기대하며 차곡차곡 첫경험하고 있습니다.
댓글로 이렇게 느낌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