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 한 사람이 책을 보다가 반도 못 보고는 땅에 던지며 말했다.

"책만 덮으면 바로 잊어버리는데, 본들 무슨 소용인가?"

현곡 조위한이 말했다.

"사람이 밥을 먹어도 뱃속에 계속 머물려 둘 수는 없다네. 하지만 정채로운 기운은 또한 능히 신체를 윤택하게 하지 않는가.

책을 읽어 비록 잊는다 해도 절도 진보하는 보람이 있을 것일세" 말을 잘 했다고 할 만하다.

 

이익 <성호사설> 중 - 조현곡(趙玄谷) - 에서

 

 

밥을 먹으면 입을 거쳐 위장과 대장을 지나는 동안 영양분은 몸으로 스며들고 찌꺼기는 대변으로 배출된다.

책을 읽으면 눈과 입을 통해 머리와 가슴을 거치는 동안 그 의미를 곱씹고 되새긴다. 나머지는 기억의 창고에서 흔적도 없이 지워진다.(...중략...)

육신의 기름기만 생각하고 영혼의 허기는 돌아보지 않는다.

배고프면 아무데나 주둥이를 들이미는것은 짐승도 다 그렇다. - 본문 41~42쪽

 

 

 

 

 

 

"책만 덮으면 까먹는 데 뭐하러 읽나?" 라는 말을

"돌아서면 배고픈데 밥은 왜 먹냐"라는 말로 비유한 글입니다.

밥을 먹으면 영양분은 몸으로 스며들고 찌꺼기가 대변으로 배출되듯이

책을 읽으면 곱씹은 뜻은 머리와 가슴에, 나머지는 기억에서 잊혀집니다.

제대로 먹지 못하면 몰골이 초라해지는 데 반해, 책은 읽지 않아도 겉으로 드러나는 게 없습니다.그래서 사람들은 읽지 않습니다.

특히나 요즘같이 뭔가를 "보여주는"세상에는 더욱 더 그러하지요.

 

독서는 학창시절의 공부와 많이 다릅니다.

순수한 몰입입니다. 정민 작가는 무엇을 위한 독서가 될 때, 목적을 전제로 하는 독서로는 거둘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 독서는 입만 열면 현하(懸河)의 열변을 토해내도, 산지식이 아니라 죽은 지식이고 내 가슴속에 아로새겨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학습능력이 좋은 사람들이 얼마나 그 무기를 엉뚱한데 썼는가를 돌이켜 보면

학습능력과 인성이니 덕성은 반대로 가기 일쑤지요.

 

 

 

 

책을 읽는 이유에 대해 고금의 작가들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의견을 내놓습니다.

몇 가지의 이유로 압축되지요.

그런데요. 

여러가지 이유 중에 전 솔직히  "순수한 몰입에의 쾌감"보다 더 큰 이유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앞으로도요.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아마도 공감하시는 분도 아닌 분도 계실껍니다.

마치 영양가 있고 맛있는 음식이 입안으로 들어오면 쾌감을 느끼고 서서히 배가 부르듯이,

깊고 중후한, 아주 논리적이고 흡입력 있는, 때론 경쾌하고 산뜻한 문장들을 만나면 짜릿한 쾌감을 느끼고 뿌듯해집니다.

그 문장이 내가 당장 써 먹을 수 있는 실용적 지식이 아니더라도 뭔가 충만한 느낌을 얻지요.

이처럼 성호 이익선생이 말씀하신 "영혼의 허기"는 목적이 없는 순수한 몰입의 독서로만 채울 수 있을 것 같네요.

 

 

 

 

 

 

 

 

 

 

 

아래는 김정운 교수의 책 <에디톨로지>를 읽다가 정민 교수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을 발췌했습니다.

 

 

"나는 요즘 한양대 국문과의 정민 교수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신문에 연재하는 내용이나 출간하는 책을 보면, 참 고수다. 틀에 박힌공자, 맹자 이야기가 아니다. 내 연배에서 그 정도 수준을 유지하는 이는 드물다. 그에 비하면 내 성과물은 참 우울하다. 그다지 겸손할  이유가 없는 나지만 그의 저작물을 보면 기가 많이 죽는다. 그에게는 동양고전이라는 해석의 근거가 무한하다. 고전을 다룰 줄 아는 이는 기본적으로 한 자락 깔고 들어가는 거다."

- 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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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1-01-11 23:2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독서 후 내용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내용은 무의식으로 간다고 생각합니다. 무의식이 무의식적으로 의식을 결정한다고 생각합니다. ^^

북프리쿠키 2021-01-12 20:10   좋아요 1 | URL
오~ 좋은 문장이네예..ㅎㅎ
우리 의식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무의식이라는 놈을.무시해선 안되겠네요..^^;

페넬로페 2021-01-11 23:3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네이버 열린연단에 정민선생이
강의자로 나오셨어요~~
직접 가서 강의 들었는데
그분의 박학다식에 너무 놀랐어요^^
그 어떤 질문에도 어쩜 그렇게 대답을 잘 하시는지^^
팬이 됐어요**

북프리쿠키 2021-01-12 20:11   좋아요 2 | URL
아..정민 선생 강의는 한번도 들어본적 없는데..강의 잘 하시나봐요..
페넬로페님이 팬이 되셨다니..저도 궁금한걸요..추천 감사드립니다. 한번 들어봐야겠습니다..^^;;

han22598 2021-01-12 02: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의 독서의 형태는 몰입이 아닌 산만형이긴 하지만, 책을 읽는 시간이 그저 좋더라고요.^^

북프리쿠키 2021-01-12 20:12   좋아요 2 | URL
훔..한님..말씀도 참 멋지네요..
꼭 몰입이 안되더라도..그 시간이 그저 좋다는 말씀..
근사한 말입니다..^^:;

cyrus 2021-01-12 1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은 책 내용이 생각나지 않으면 그 책을 다시 읽으면 됩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서 내 기억력을 탓하기 보다는 새로운 마음으로 책을 읽으려고 해요. ^^

북프리쿠키 2021-01-12 20:14   좋아요 1 | URL
그러네요..시루스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옹께서 재독의 중요성을 깨우쳤는데..
그 실천이 참 어려운 것 같아요..
까먹으면 또 새로운 마음으로 읽자는 마음가짐이 좋으네요..^^:

레삭매냐 2021-01-14 1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에 땡겨 놓은 정민 선생님의
책, 읽어야 하는데... 어디에 두었는
지도 모르겠네요 에휴 -

북프리쿠키 2021-01-14 11:32   좋아요 1 | URL
저도 킵해놓은지 어언 몇년된건데 무심코 펼쳐보다가
저 꼭지가 마음에 들어 포스팅했네예. 이런거보면 책은 재놓고 읽는게 맞네예 ~ 언능 찾아내시길^^

페크pek0501 2021-01-15 1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요즘 재독하고 있는 소설- 세계문학이 있는데 진짜 처음 읽는 것 같아서 황당하더라고요.
결말 부분만 기억 나고 전부 처음 읽는 것 같았어요.

북프리쿠키 2021-01-17 10:24   좋아요 1 | URL
개인적으로 재독 중에서도 소설을 재독하는 게 제일 어려운 거 같아요..ㅎㅎ
전부 처음 읽는 것 같아 신선했겠습니다..~
상당수 문학은 제목도 정확히 기억 안나는게 많았습니다..^^;;

재독에 관해서 제가 좋아하는 문장 그대로 옮겨놓겠습니다.

나보코프가 말했다 ˝이상한 말이지만 사람은 책을 읽을 수 없다. 다시 읽을 수 있을 뿐이다. 좋은 독자, 일류 독자,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독자는 재독자다˝ - 문학동네판 <롤리타 545쪽>
 

2010년의 어느 가을밤,
즐거움과 속도감으로 미끄러지듯 쓴 단편이었을 때는 2014년에 연작 장편이 되고 2020년에 드라마가 될 줄 몰랐습니다. - 9쪽



영상화를 기념하여 나온 특별판입니다.
산뜻한 양장본에 질감이 좋으네요.
표지그림에 그녀가 가지고 다니는 비비탄 총과 무지개 장난감 칼이 예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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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1-10 1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특별판 표지가 정말 예쁘네요. 아 전 표지예쁜 책에 약한데... ㅠㅠ

북프리쿠키 2021-01-12 20:08   좋아요 0 | URL
네 이번 특별판은 이쁘네요.
제가 껍데기에 혹하는 사람은 아닌데..이 책은 리커버에 확 끌리더군요..^^:

레삭매냐 2021-01-10 19: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왠지 예전에 만난 책보다 헐배
더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라는
느낌이네요.

드라마도 봐야 할까요. 책은 오래
전에 만난 지라 격이 가물가물하네요.

북프리쿠키 2021-01-12 20:09   좋아요 0 | URL
넷플릭스에서 하는 거 같던데..
제가 넷플릭스 문외한이라..책만 봐도 되지 않을까예..ㅎㅎㅎ
디자인은 예전보다 훨씬 이쁘네예..
 

 

가끔 중고나라 책 아이쇼핑을 합니다.

이번에 낚아올린 대물입니다. 물론 다 읽은 책이지만요 ~ 때깔 좋습니다.

 

 

 

 

 

 

 

1. 고우영 십팔사략 세트 - 전10권
고우영 지음 / 애니북스 / 2004년 11월

- 새책 판매가 : 90,000원

- 중나 구입가 : 20,000원

 

제가 고우영 화백의 만화 중에서 가장 백미로 꼽는 시리즈입니다.

삼황오제에서 ~ 송나라까지 수많은 영웅호걸의 이야기와 고사성어의 유래를 고우영 특유의 해학과 유머로 버무려놨습니다.

원래 소장하고 있던 책은 아래 사진과 같은 구판인데..항상 저놈을 개정판으로 바꿔줘야 할텐데..라고 눈에 가시였지요.

저에게 이 책은 거짓말 조금 보태서 여타 명품옷이나 가방보다 더 소중합니다..ㅎㅎ

그래서 중나에 파격적인 가격으로 올라왔길래 누가 먼저 채어갈까봐 떨리는 손으로 후다닥 채팅을...(이 경험 다들 해보셨으리라..)

 

 

사진으로 보니 출판사 표기가 두산동아, 동아출판사..그마저도 중구난방이네요.

그래도 중국의 고대사에 대한 흥미는 이 책 덕분이었습니다. 사랑합니다 십팔사략!

 

 

 

 

 

 

 

2. 커피 한 잔 할까요? 1~8 세트 -전8권
허영만.이호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3월

- 새책 판매가 : 71,280원

- 중나 구입가 : 20,000원

 

 

이 책도 2년전 쯤 재미있게 읽은 책입니다. 당시 직장 책방에서 빌려 읽었는데 흥미있게 읽었죠.

특히 저처럼 매일 "카페라떼" 한잔 없이 못사는 이에게 더할 나위 없이 딱 맞는 책이었어요.

커피와 인생을 버무려 만화로 잘 녹여 냈고, 커피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커피 지식뿐만 아니라 바리스타의 철학까지 들여다 볼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커피의 맛이 온도나 향, 로스팅의 구분, 바리스타의 엄격함 등 아주 미세한 부분에서 큰 차이가 난다는 걸 실감나게 소개해놨습니다. 어디가서 커피 이야기로 잘난 척 하기에 아주 좋은 책입니다^^;;와이프도 저와 취향이 똑같아 "카페라떼'만 마시는 데 이 책 시간날 때 읽으라고 권해볼 참입니다.

 

 

 

 

 

 

3. 음식문화의 수수께끼
마빈 해리스 지음, 서진영 옮김 / 한길사 / 2018년 11월

- 판매가 : 19,000원

- 알라딘 중고 구입가 : 10,000원

 

 

이 책은 알라딘 중고 등록 알리미를 통해 구입했습니다.

<문화의 수수께끼>는 무려 2권(구판,개정판)이나 들고 있지요.

<식인문화의 수수께끼>도 알리미 등록해놨으니 입질이 오면 마빈해리스 3부작 개정판으로 다 모셔놓을 수 있겠네요.

인생이 허무해질때 구입하고 싶은 책을 낚시질하면 또 위로가 됩디다.

언뜻 생각해보면 기쁜 일이 있을 때보다 힘들고 지칠때 술이 더 땡기는 것처럼, 책도 비슷한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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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1-10 08: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나가 사기꾼들의 천국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런 혜자스러운 아이템
들을 건질 수도 있는 곳이었군요.

고우영 선생 책은 정말 부럽삽니다.

마빈 해리스의 책은 저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에릭 홉스봄이나
존 버저의 책처럼 중고로는 만나
보기 힘들더라구요.

북프리쿠키 2021-01-12 20:06   좋아요 0 | URL
중나로는 책 밖에 사지 않는데, 사기를 당해본 적은 없네예. 금액도 얼마 안되고 해서 그런가봅니다.
고우영 선생..좋죠? ㅎㅎ
마빈해리스 책 개정판은 중고로 잘 안나옵니다..식인문화의 수수께끼도 천천히 기다려 봅니다..^^;;

바람돌이 2021-01-10 13: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우 십팔사략 저도 좋아하는 책인데 부럽네요. ^^

북프리쿠키 2021-01-12 20:07   좋아요 0 | URL
십팔사략..누구나 좋아라 하는군요.
저만 유독 꼽힌 줄 알았습니다.ㅎㅎㅎ
고우영의 여타 다른 만화보다 훨씬 그림체도 크고 해학도 절묘한 것 같아요..~
 

 

 

 

일인칭 단수의 시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게 모든 이들의 공통점입니다.

모든 기준은 나이고, 이 세상의 주인공은 나입니다. 나에게는 내가 이 세상의 전부입니다.

하지만 "나"라는 세계는 상대방에겐 한낱 의미없는 세상의 일부일 뿐이지요.

반대로 상대방 또한 나에게는 작은 사건일 뿐입니다.

하루키의 이 책은 내 속의 더 깊은 우주속으로 들어가 아무것도 아닌 작은 사건들이 

내 마음을 신기할 정도로 강하게 뒤 흔드는 기억을 소환해서 맞이합니다.

그 기억들은 서로의 우주 안에서 교집합을 이루고 "나"와 "너", "일인칭"과 "이인칭"이 어우러집니다. 때론 "그들"도 함께요.

이처럼 지나간 일을 떠올리다보면 아주 사소한 사건이 당시엔 나의 우주 전부였다..라는 

기억~ 누구나 경험해 봤을거예요. 어쩌면 우린 일인칭 단수의 시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게 아닐수도 있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나만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이야말로 의미없는 세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책은 자전적 이야기지만, 다소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또 다시 보여주는 환상적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논리적으로 이해하기엔 어렵습니다. 하루키 말처럼 문학에서 비교적 이치에 맞는다는 것이 과연 미덕인지는 의문입니다.

우리 삶도 대체적으로 이성이 관여하는 부분은 극히 미미하다고 하지요.

이 책을 굳이 이해하기 위해 읽으시면 이 책 뭐지? 라고 실망할 수도 있겠네요. 

 

그래도......

하루키니까요~

 

 

'일인창 단수'란 세계의 한 조각을 도려낸 '홑눈'이다.

그러나 그 단면이 늘어날수록 '홑눈'은 한없이 서로 얽힌 '겹눈'이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私)는 이미 내가 아니고, 나(僕)도 이미 내가 아니다.

또한, 그렇다. 당신도 더이상 당신이 아니게 된다.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 무라카미 하루키 

 

 

총 8개의 단편 중 2-3가지 단편 중에서는 예의 하루키 소설처럼 재즈나 클래식이 나옵니다.

난 재즈나 클래식을 잘 모릅니다. 모르기 때문에 좋아할 수도 없구요. 설령 알더라도 취향은 아닙니다.

몇번 친해질려고 노력해 보았으나, 피에르부르디외가 그의 저서 <구별짓기>에서 언급한 "아비투스"의 한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처럼 태생적이고 계급적인(?) 이유로 하루키 책안의 재즈나 클래식에 대한 사설은 솔직히 고역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 재즈나 클래식 얘기가 싫지않은 건(좋다!라고는 말못하겠습니다.) 

하루키의 총합을 이루는 구성 요소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실례로 <1Q84>의 첫 장면을 아직도 정확히 기억하는 건 클래식 덕분이지요.

아오마메가 정체된 도로위 택시 안에서 흘러나오는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 첫 부분을 듣고 알아맞히는 장면!

여담이지만, 하루는 지인과 하루키 이야기를 하다 이 첫장면과 이 교향곡명을 정확히 이야기해주니 저보고 "대단한 덕후"라고 놀라더군요. 그 때 첫 장면을 <신포니에타>교향곡을 들으면서 읽었으니. 어찌 잊을수가 있겠습니까.

아마 저처럼 재즈나 클래식에 문외한인 사람도, 또 즐기는 사람도 이런 저런 연유로 하루키 월드 음악에 대해서는 "싫지 않다"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꽤 있지 않을까 싶어요.

 

아래는 8편의 단편 중에서 줄친 문장입니다.

 

 

 

 

◈ 두번째 단편 <크림>

 

 

"우리 인생에는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나. 설명이 안되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그렇지만 마음만은 지독히 흐트러지는 사건이.

그런 때는 아무 생각말고, 고민도 하지말고,

그저 눈을 감고 지나게가 두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커다란 파도 밑을 빠져나갈 때처럼" - 48쪽

 

 

 

 

◈ 세번째 단편 <위드 더 비틀스 With the Beatles>

 

 

 

고등학교 건물의 어둑한 복도, 아름다운 소녀, 흔들리는 치맛자락, 그리고 <위드 더 비틀스> - 77쪽

 

 

그렇게 기억이란 때때로 내겐 가장 귀중한 감정적 자산 중 하나가 되었고, 살아가기 위한 실마리가 되기도 했다. - 79쪽

 

 

그리고 그 정경은 순식간에 내 마음속 인화지에 선명히 아로새겨졌다. 아로새겨진 것은 한 시대 한 장소 한 순간의, 오직 그곳에만 있는 정신의 풍경이었다. - 83쪽

 

 

우리의 인생은 결국, 그저 요란하게 꾸민 소모품일 뿐인지도 모른다. - 87쪽

 

 

여동생은 내게 별로 호의적이지 않은 듯했다. 마주칠 때마다 묘하게 무표정한 눈으로 -냉장고 안쪽에 오랫동안 처박혀 있던 건어물이 아직 먹을 만한지 점검하는 듯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리고 그 눈빛은 항상 내게 어딘가 켕기는 기분을 안겨주었다.이유는 모르지만, 그애는 나를 쳐다볼 때 외모는 거의 무시하다시피 하고(하긴 그렇게 볼만한 외모도 아니었지만) 나라는 인간의 내면을 똑바로 투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것도 다 실제로 내 마음에 제법 켕기는 구석이 있어서였는지 모르겠지만. - 91쪽

 

 

 

 

 

◈ 여섯번 째 단편 <사육제(Carnaval)>

 

딱 한 곡만?

그래요. 딱 한 곡만. 하고 F*는 말했다. 말하자면 무인도에 가져갈 피아노곡(...)

"슈만의 <사육제>"라고 나는 끝내 마음먹고 말했다. - 161쪽

 

 

언젠가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연주하는 <사육제>를 꼭 들어보고 싶다는 건 나 하나만의 소망이 아닐 것이다. - 164쪽

 

 

"슈만은 슈베르트와 마찬가지로 젊어서 매독에 걸렸고, 그 병을 몸속에 지닌 채 점점 광기에 사로잡혀갔어. 게다가 원래부터 분열증 증세가 있었지. 일상적으로 집요한 환청에 시달리고, 몸이 한번 떨리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았어. 그는 자신이 악령들에게 쫓긴다고 믿었어. 악령들의 존재를 진짜로 믿은 거야. 끝나지 않은 무서운 악몽에 쫓겨서는,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기도했어. 라인강에 몸을 던지면서까지.(후략)" - 168쪽

 

 

"우린 누구나 많건 적건 가면을 쓰고 살아가. 가면을 전혀 쓰지 않고 이 치열한 세상을 살아가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니까. 악령의 가면 밑에는 천사의 민낯이 있고, 천사의 가면 밑에는 악령의 민낯이 있어. 어느 한쪽만 있을 수는 없어. 그게 우리야. 그게 카니발이고. 그리고 슈만은 사람들의 그런 여러 얼굴을 동시에 볼 줄 알았어 - 가면과 민낯 양쪽을. 왜냐하면 스스로 영혼을 깊이 분열시킨 인간이었으니까. 가면과 민낯의 숨막히는 틈새에서 살던 사람이니까." - 169쪽

 

 

<사육제>의 새로운 음반도 여전히 사모으고 있다. 그리고 노트에 채점을 매긴다.수많은 신보가 나왔지만 나의 베스트는 지금도 변함없이 루빈스타인이다. 루빈스타인의 피아노는 사람들의 가면을 억지로 벗기려 하지 않는다. 그의 피아노는 가면과 민낯 사이를 바람처럼 부드럽고 경쾌하게 빠져나간다. 행복이란 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거야. 그렇지 않아? - 1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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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1-01-09 21: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리뷰의 첫단락에 크게 공감합니다! 글이 참 좋네요! 따뜻한 저녁되십시요!ㅎ

북프리쿠키 2021-01-09 22:1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막시무스님.
하루키 덕분에 또 이렇게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네예..
막시무스님도 편안한 주말 저녁 되십시오..^^:
 

 

8편의 단편 중에서 첫번째 <돌베게에>서 좋았던 문장을 발췌해 본다.

 

 

 

 

 

열아홉 살 무렵의 나는 내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거의 알지 못했고, 당연히 타인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 9쪽

 

 

 

신기한 친밀감이었다. -14쪽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보험 적용이 안 되는 정신질환이랑 비슷해." - 15쪽

 

 

 

때로는 이름 몇 글자가 사람의 마음을 크게 뒤흔들어버리기도 한다. - 16쪽

 

 

 

가집 제목은 '돌베게에', 지은이 이름은 그냥 '지호'라고 되어 있었다. - 19쪽

 

 

 

우리는 교차하는 두 줄의 직선처럼, 한 지점에서 잠깐 만났다가 그대로 멀어진 것이다. - 23쪽

 

 

 

벤다/베인다/돌베게에

목덜미 갖다대니/보아라, 먼지가 되었다. - 25쪽

 

 

 

-----------------------------------------------------------------------------------------------------------

 

 

 

우리의 삶이란 환희가 점점 바스라져 결국엔 침묵 속으로 빠져 드는, 

웃음과 눈물로 범벅되다 웃음도 눈물도 사라져가는 무(無)의 허무(虛無)에 대한 

저항과 체념의 수레바퀴가 아닐까..

 

- 첫 단편 <돌베게에>를 읽은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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