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은 각각의 사물 앞에 그보다 더 짙고 더 단단한 그림자를 늘어뜨리며 사물을 두 배로 확대하거나 뒤로 처지게 하면서, 마치 접혀 있던 지도를 펼치듯이 풍경을 작거나 크게 만들었다. - 66쪽



내게 새로운 책이란 그 책과 유사한 많은 것들 중 하나가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 이유가 있는 유일한 사람 같았다. 그렇게도 일상적인 사건들, 그렇게도 평범한 일들, 그렇게도 흔한 말들이 내게는 특별한 어조나 낯선 억양처럼 느껴졌다. - 81쪽



마들렌은 보통명사로는 과자를 의미하지만 고유명사로는 성녀 마들렌을 가리키는 단어로, 마들렌은 창녀이자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으로 목격한 성녀다. 이와 같은 마들렌의 양가성은 바로 어머니에 대한 어린 마르셀의 감정을 구현하는 것으로... - 86쪽 주석



흔히 ‘속물근성‘으로 번역되는스노비즘(snobisme)은 프루스트 소설의 핵심 주제 중 하나다.
이 말은 원래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그 대학 출신이 아닌 대학 출신의 낯선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하는데, 보다 일반적으로 명문가에서 유행하는 태도나 방식을 찬양하고 채택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 125쪽 주석



˝물론 제 집에는 불필요한 것밖에 없습니다. 여기 커다란 하늘 조각처럼 정작 필요한 건 하나도 없고 말입니다. 어린 친구, 언제나 그대 인생 위에 한 조각 하늘을 간직하게나˝ - 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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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자 선언 - 판사 문유석의 일상유감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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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자 선언‘에 대한 주제에만 국한해서 더 다양하고 깊이있게 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도입부에 쓰여진 강렬한 자기고백에 많은 독자들이 공감을 받았으리라. 헌데 중반 이후부터는 그냥 이런 저런 주제에 저자가 읽은 책, 영화, 단상들을 엮은 평범한 책이 되어 버린 듯.
특히 현실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고, 시니컬하게 비판하다가 어쨌든(?) 종합화,객관화해서 문제 해결을 제시하며 서둘러 문단을 마무리하는 느낌이 드는 글은..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사회를 바라보는 진지함과 때로는 팩트만을 잡아내는 통찰, 비주류에 대한 따뜻한 시선 등은 일관성이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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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주의 성향이 강한 한국사회에서 투사가 되기 싫으면 연기자라도 되어야 하는 거다. 나는 어릴 때부터 좋게 말하면 냉소주의였고, 정확하게 말하면 비겁했다. 불의를 질끈 잘 참는다. 타인들이 원하는 연기를 잠시 해주면 내 자유가 더 확보된다는 걸 일찍 영악하게 깨우친 거다. - 8쪽



이놈의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려면 견뎌햐 하는 것들이 지긋지긋하게 싫다고 말이다. 눈치와 체면과 모양새와 뒷담화와 공격적 열등감과 멸사봉공과 윗분 모시기와 위계질서와 관행과 관료주의와 패거리 정서와 조폭식 의리와 장유유서와 일사불란함과 지역주의와 상명하복과 강요된 겸손 제스처와 모난 돌 정 맞기와 다구리와 폭탄주와 용비어천가와 촌스러움과 기타 등등 기타 등등. - 9쪽



사회에 나와 지금까지 겪어온 사람들의 모습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누구나 자기 몫의 아픔은 안고 살고 있더라는거다. -13쪽



나는 감히 우리 스스로를 더 불행하게 만드는 굴레가 전근대적인 집단주의 문화이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근대적 의미의 합리적 개인주의라고 생각한다. 23쪽



‘개인주의‘라는 말은 집단의 화합과 전진을 저해하는 배신자의 가슴에 다는 주홍글씨였다. 나는 우리 사회 내에서가 아니라 법학 서적 속에서 비로소 그 말의 참된 의미를 배웠다. 그 불온한 단어인 ‘개인주의‘야말로 르네상스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문명의 발전을 이끈 엔진이었다. - 25쪽



약자는 자기보다 더 약자를 찾아내기 위해 필사적이다. - 32쪽



실제 사회에서는 예술이든 무엇이든 무엇 하나가 지고지선의 가치고 나머지를 희생시킬 자격이 있는 건 아니다. 사춘기를 사로잡는 선명한 매혹과는 달리 실제 세계는 지루할지 몰라도 균형과 타협, 다양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 43쪽



물론 노력은 소중하고 필요한 것이지만 맹목적인 노력만이 가치의 척도는 아니다. 무엇을 위해 노력하는지 성찰이 먼저 필요하고, 노력이 정당하게 보상받지 못하는 구조에 대한 분노도 필요하다. 가장 위험하고도 어리석은 건 ‘노력해야 성공한다‘를 넘어서 ‘성공한 이들은 다 처절하게 노력했기에 그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만큼 노력하여 성공한 이들이니까 괴팍하고 못되게 굴 만하다.‘ ‘강한 것은 아름답다‘ 등으로 끊임없이 가지를 치는 스톡홀름증후군이다. 스티브잡스가 매혹적이라 하여 그의 괴팍함과 못된 점조차 찬양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대체로 성공에는 재능과 노력이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실사회에는 그저 우연히 부모 잘 만나서 과분한 기회를 누리며 사는 이들도 많다. - 45쪽



행복에 관한 과학의 연구 결과 중 가장 씁쓸한 진실은, 개인의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큰 요소는 유전적인 외향성, 사회성이라는 점이다. 타고나길 남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사람 중독증 환자들이야말로 행복해지기 쉬운 우월한 유전자를 타고난 것이다. 그러나 문명은 과학이 밝혀낸 자연의 불편한 진실을 그대로 수용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한 문제를 극복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내성적이고 사회성이 떨어지는 이들도 행복할 수 있는 사회를 고민해야 한다. 내성적인 이들도 외향적인 이들과 마찬가지로 사람과의 관계에서 행복을 느끼지만 적절한 거리가 유지되어야 행복을 느끼는 체질인 것이다. (...) 이런 차이를 인정해주지 않고 무조건 집단이 요구하는 술 잘 먹고 윗분 잘 모시고 분위기 잘 띄우는 씩씩한 전사로 거듭날 것을 강요하는, 그래야 어른되었다고 취급하는 문화 속에서 예민하고 내향적인 사람들은 고통받을 수 밖에 없다.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서로 함부로 간섭하지 않고 배려하는 성숙한 개인주의 문화의 사회라면 이들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집단의 강요 없이, 자기가 스스로 선택한 취향이 맞는 작은 인간관계들의 고리 속에서 말이다. - 57쪽



직업적으로 그다지 도움이 될 것은 없고 오해받을 소지는 만은 글쓰기를 하고 있는 것은 내 나름대로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이다. 남들은 어떻든 나는 높은 자리에 올라가거나 변호사 사무실 개업하여 재벌 회장들 변호하며 큰돈 버는 일에 별 관심이 없다. 대단한 철학이 있어서가 아니라 체질이 소시민적이다. 야심도 없고 남들에게 별 관심이 없고, 주변에서 큰 기대를 받는 건 부담스럽고, 싫은 일은 하고 싶지 않고 호감 가지 않는 사람들과 엮이고 싶지 않다. 내 일을 간섭없이 내 방식으로 창의적으로 해내는 것에 기쁨을 느끼고, 내가 매력을 느끼는 소수의 사람들과 친밀하게 지내는 걸 좋아하고, 심지어 가끔은 가족으로부터도 자유로운 나만의 시간을 갖길 원한다. 정말이지 공부라도 잘했으니 망정이지 한국사회에서 먹고살기 힘들 뻔했다. - 59쪽



철없게 들려도 할 수 없지만, 내 개인적인 성향으로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은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다 그것도 지금처럼 거장이 되어 사회적 메시지가 담긴 말씀을 한마디씩 해줄 것을 요구받는 노벨상 만년 후보 하루키가 아니라, 일본사회에 매이지 않은 채 로마에 일 년, 크레사 섬에 일 년, 세계를 뿌리 없는 부평초처럼 자유롭게 떠돌며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소설과 소소하고 유치한 수필을 끝도 없이 써대던 에전의 하루키다. 뭐, 그 와중에 돈도 잘 벌었으니 더욱 부러울 뿐이고.... - 61쪽



대학 서열에 따라 인간의 능력, 태도 자체에 우열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가간다. ‘더 높은 곳‘에 있는 학생들이 자신을 멸시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스스로 자신보다 ‘더 낮은 곳‘에 있는 학생들을 멸시하는 편을 선택한다. - 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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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함무라비>, <쾌락 독서>로 유명한 문유석 판사의 에세이다. 글을 읽노라면 성향이 나와 일치하는 부분이 너무 많다. 딱 들어맞는 부분은 신기할 정도다.
매체나 출판문화가 ‘개인주의자‘들의 함성에 힘을 실어준다. 주류에서 소외되어온 자들이 커밍아웃하듯 당당하게 개인주의 성향을 밝히고 사회성 좋은 이들이 ‘선‘의 표준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한다.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것에 선과악의 프레임을 씌어 왔다.
따라서 지금의 청춘들에게 ‘세대‘의 잘못이 아닌, ‘시대‘의 고통이라고 다독인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라고..그렇게 귀에 박히도록 이야기하고 책을 읽어도, 여전히 대한민국에서는 ‘개인주의‘는 ‘이기주의‘로 통하고, 때로는 나조차도 상대방을 격하할 때가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문유석 판사의 성향과 생각 상당 부분이 자신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우린 충분히 위로받는다.
이 책의 성공은 나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다는 ‘공감‘ 덕분일 게다. 그렇다면 ‘개인주의자 선언‘이 ‘이기주의자 선언‘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사실 사회적으로 사랑받는 이타주의자보다 더 되기 힘든 것이 엄격한 ‘개인주의자‘일수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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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의 목적은 상대방을 설득하여 자신이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고 가기 위함이다.
그 대상이 이성이든, 직장 인간관계든, 대중이든간에 말이다.
과장하여 말하면, 우린 한 평생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상대방을 설득하며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혹자는 ‘난 그런 분야와 무관한 직종이나 삶을 살기 때문에 전혀 관계없다‘라고 할 수 있을 지 모르나 속을 들여다보면 유,무형, 직,간접적으로 벗어나기 어려운 게 인간의 삶이다.

유혹의 힘은 외모, 즉 객관적인 아름다움에서 나온다기보다는 심리 게임을 펼쳐나가는 능력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타고난 외모가 떨어진다고 실망할 일은 아니다.

이 책 1부에서는 유혹자의 9가지 유형에 대해 이야기하고, 2부에서는 상대방을 유혹하는 24가지 전술에 대해 거론한다.

사실, ~의 기술, ~하는 방법, ~가 되는 법...류의 제목과 그 엇비슷한 내용을 담는 책들에 알러지가 있는 편이라 잘 읽지 않는데, 이 책이야 뭐 한번쯤 읽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해서 시작한다.






˝유혹자가 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사랑이나 로맨스를 대단히 성스럽고 신비한 것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편견이다. 우리는 사랑이나 로맨스가 마치 운명처럼 저절로 다가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고방식은 참으로 낭만적으로 비친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우리가 게으른 데서 비롯된 생각이다. 누군가를 유혹하려면 그 사람이 얼마나 중요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인지를 보여주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사랑과 로맨스를 우연에 맡기는 것은 재난을 가져오는 지름길이자, 우리가 그런 일들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낼 뿐이다.˝ -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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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영혼은 육체라는 뻘 속에 갇혀 있어서 무디고 둔한 것이다. 영혼이 지각 능력이란 조잡하고 불확실한 법이다. 그래서 영혼은 아무것도 분명하고 확실하게는 예견할 수 없다.


그 친구가 나를 <책벌레>라고 불렀을 때, 불쑥 솟아오르던 그 분노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당시 내가 영위하고 있던 삶에 대한 나의 모든 역겨운 감정이 그 말로 형상화되었다. 그토록 강렬하게 인생을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책 나부랭이와 잉크로 더럽혀진 종이에다 자신을 그리도 오랫동안 내박쳐 둘 수 있단 말인가! 그 이별의 날, 내 친구는 내가 나 자신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게 해준 셈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오?˝ 그가 스스럼없이 물으며 큰 머리통을 흔들었다. ˝당신 역시 저울 한 벌 가지고 다니는 거 아니오? 매사를 정밀하게 달아보는 버릇 말이오. 자, 젊은 양반, 결정해 버리쇼. 눈 꽉 감고 해버리는 거요˝


언어,예술,사랑,순수성,정열의 의미는 이 노동자가 지껄인 가장 단순한 인간의 말로 내게 분명히 전해져 왔다.


우리의 지향이 고상할수록 우리가 묶이는 노예의 사슬이 더 길어지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훨씬 넓은 경기장에서 찧고 까불다가 그 사슬의 한계에 이르지 않은 채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자유일까?


우리는 베를린 박물관을 나오는 길이었다. 거기에서 친구는 가장 좋아하던 그림, 청동 투구 차림에 움푹 들어간 뺨, 비극적이지만 강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는 렘브란트의 <전사>를 마지막으로 돌아보고 온 길이었다.(...) ˝내가 내 평생에 사내다운 행동을 한다면 그건 저 그림 덕분일거야˝


두목, 사람들 좀 그대로 놔둬요. 그 사람들 눈뜨게 해주려고 하지 말아요! 그래, 눈을 띄워 놓았다고 칩시다. 뭘 보겠어요? 자기들 비참한 처지밖에 더 봐요? 두목, 눈 감은 놈은 감은 대로 놔둬요! 꿈꾸게 내버려 두란 말이에요!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타파해야 할 것이 무언인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폐허에 무엇을 세워야 하는지, 그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생각했다. 어렴풋하게나마 그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의 낡은 세계는 구체적이고 견고하다. 우리는 그 세계를 살며 순간순간 그 세계와 싸운다. 실재하는 세계다. 미래의 세계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환상적이고 유동적이며 꿈을 빚는 재료인 빚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은 광풍 - 사랑, 증오, 상상력, 행운, 하느님 - 에 휩쓸린 한 조각 구름이다. 지상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표어를 줄 수 있을 뿐이다. 그 표어가 막연할수록 선지자는 더 위대한 것이다.


조르바는 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했고 그 머리는 지식의 세례를 받은 일이 없다. 하지만 만고풍상을 다 겪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 마음은 열려 있고 가슴은 원시적인 배짱을 고스란히 품은 채 잔뜩 부풀어 있다. 우리가 복잡하고 난해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조르바는 칼로 자르듯,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자르듯이 풀어낸다.(...) 우리들 교육받은 자들이 오히려 공중을 나는 새들처럼 골이 빈 것들일뿐.


먹은 음식으로 뭘 하는가를 가르쳐 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말해 줄 수 있어요. 혹자는 먹은 음식으로 비계와 똥을 만들어내고, 혹자는 일과 좋은 기분을 만들어 내고, 혹자는 신을 만들어 낸다나 어쩐다나 합디다. 그러니 인간에게 세 가지 부류가 있을 수 밖에요.


˝두목, 내 생각을 말씀드리겠는데, 부디 화는 내지 마시오. 당신 책을 몽땅 쌓아 놓고 불이나 확 싸질러 버리쇼. 그러고 나면 누가 압니까. 당신은 바보가 아니고, 당신은 착한 사람이니까...뭔가 썩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나는 타락해 있었다.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과 사랑에 대한 책을 읽는 것중에서 택일해야 한다면 책을 선택할 정도로 타락해 있었다.


나이 먹어 가는 걸 인정한다는 것은 여간 창피한 노릇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걸 눈치채지 못하도록 별 짓을 다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우리가 길 잃은 영혼이며, 우리의 삶이 하찮은 쾌락과 고통과 헛소리로 소진되어 가는 중임을 깨닫는다. 그러면 부끄러워하면서 입술을 깨무는 법이다.


˝거룩하신 원장, 내가 한가지 청을 드립지요. 날 그 수도원 문지기로 취직시켜 주시오. 밀수도 좀 해먹고 이따금 그 성스러운 경내에다 괴상한 물건도 좀 들여놓게. 여자, 만돌린, 라키 술통, 애저구이. 그래야 당신네들이 허튼수작이나 부리며 인생을 우습게 살아 버리지 않을 게 아닙니까?˝


이게 사람이 자유를 얻는 도리올시다. 내 말 잘 들어요. 터질 만큼 처넣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금욕주의 같은 걸로는 안 돼요. 생각해봐요 두목. 악마를 이길려면 자기가 악마 한 마리 반은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두목! 이 세상에서 악마의 발명품이 얼마나 근사한지, 혹 생각해 본 적 있어요? 예쁜 여자, 봄, 애저구이, 술...이런 건 모두 악마의 발명품이라고요. 하느님은 수도승, 금식, 카밀러 차, 못생긴 여자 같은 걸 만들었고요...니기미!


˝그래요. 당신은 그 잘난 머리로 이해라는 걸 합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 이건 진실이고 저건 아니다. 그 사람은 옳고 딴 놈은 틀렸다...‘ 그래서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당신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당신 팔과 가슴을 봅니다. 그래, 팔과 가슴이 뭘 합니까? 침묵한다 이겁니다. 한 마디도 하지 않아요. 흡사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것 같다 이겁니다. 그래, 무엇으로 이해한다는 건가요? 머리로? 웃기지 맙시다.!˝


˝내 조국이라고 했어요? 당신은 책에 쓰여 있는 그 엉터리 수작을 다 믿어요? 당신이 믿어야 할 것은 바로 나같은 사람이에요. 조국 같은 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 그것도 앞뒤 헤아릴 줄 모르는 짐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여자도 그걸 알고 있으리라. 여자에게 사내란 얼마나 가련하고, 허풍선이고, 불합리하고, 무력한 동물일 것인가!˝


˝인간이란 참 묘한 기계지요! 속에다 빵, 포도주, 물고기, 홍당무 같은 걸 채워 주면 그게 한숨이니 웃음이니 꿈이 되어 나오거든요. 무슨 공장 같지 않소. 우리 대가리 속에 무슨 영화관 같은 게 들어있는 게 분명해요.˝


˝한줌의 흙이로구나˝ 조르바는 생각했다.
˝배가 고팠던, 웃기도 했던, 한 줌의 흙. 인간의 눈물을 흘리던 진흙 한 덩어리. 지금은...우리를 이 땅에 데려나 놓은 악마는 어느 놈이고, 이 땅에서 데려가는 악마는 또 어느 놈인고?


˝조르바, 사람이란 누구나 뱃속에 악마 몇 마리쯤은 갖고 있으니 그건 걱정 마세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지요. 중요한 건, 이 악마들의 최종목적이 같아야 한다는 거죠. 가는 방법은 다르더라도˝


인간이라는 불운한 존재는 작고 초라한 자신의 삶 둘레에 난공불락이라고 믿는 방벽을 쌓아 올린다. 그 안을 피난처로 삼아, 삶에 미미한 질서와 안정을 부여하려 애쓴다. 미미한 행복을 말이다. 거기에서는 모든 것이 밟아 다져진 길들을, 알 수 없는 것들의 무서운 침범을 막으려 요새처럼 방비한 그 테두리 안에서, 자잘한 확신들이 지네처럼 꼬물꼬물 기어다니며 누구의 도전도 받지 않는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적이 딱 하나 있다. 모두가 죽을 듯이 두려워하고 증오하는 그 적의 이름은 <거대한 확신>이다. 지금, 이 거대한 확신이 내 존재의 장벽을 뚫고 들어와 내 영혼을 덮치려 한 것이다.


생전에 그가 마련해 놓은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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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살끼와 고열로 1일 반차를 내고 코로나19 의심 증세로 드라이브 스루 선별진료를 받았다.
다행히 음성판정을 받았지만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불안과 고통으로 짓눌리고, 주말도 여전히 감기몸살 기운으로 무기력하게 보냈다.

혹시나 만에 하나 양성으로 판정되면 직장과 가족에게 끼칠 민폐는 이만저만이 아니라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내가 대구의 한복판에 있었구나˝를 절실하게 실감한 소중한 경험이었다. 이러다 또 열나고 감기몸살에 걸리면? 햐..생각만 해도 불안해진다.
코로나에 감염되고 안되고를 떠나 감기에 걸리는 것도 개인의 건강 관리를 제대로 못한다는...비난 아닌 비난을 들을 수 밖에 없는 요즘...참 심사가 복잡해진다.

이렇게 딱 3일하고도 반일동안 끙끙거리며 만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예전에 몇번 시도하다가 초반에 실패를 몇번 했었는데, 이번 기회에 완독할 수 있었다. 방에 처박혀 누워서 할 수 있는 게 책보고 음악 듣는 거 밖에. 컨디션이 엉망이라 썩 기분좋은 상태로 감상은 하지 못했지만.

<그리스인조르바>는 이렇게 내 인생에서 코로나19의 특별한 경험과 함께 했다.
특히, 육체와 정신에서 합일점을 찾아가려고 했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명문장들이 요 몇일간의 근육통과 함께 훗날 강렬하게 남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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