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10~11

"가즈코, 엄마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맞혀 보렴."

"꽃을 꺾고 계세요"

내가 대답하자 나직이 소리내어 웃고는, 

"쉬 했어."

전혀 쪼그리고 앉은 폼새가 아니어서 놀라웠지만, 나 같은 사람은 도저히 흉내 내기 힘든 참으로 사랑스러운 느낌이었다.



p 23

아아, 돈이 없다는 건 얼마나 두렵고 비참하고 희망 없는 지옥인가, 하고 난생처음 깨달은 양 가슴이 미어지고 너무나 괴로워 울고 싶어도 울 수 없었다. 인생의 엄숙함이란 이런 느낌을 말하는 걸까.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심정으로 똑바로 누운 채 나는 돌덩이처럼 가만히 있었다.



p 29

아아, 무엇이건 숨김없이 솔직하고 쓰고 싶다.

이 산장의 평온은 죄다 거짓이고 허울에 불과하다고, 속으로 생각할 때조차 있다.

이것이 우리 모녀가 신께 받은 짧은 휴식 기간이라 해도, 이미 이 평화에는 뭔가 불길하고 어두운 그림자가 소리 없이 다가와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p 52

다른 생물들에게는 절대로 없고 인간에게만 있는 것. 그건 바로 비밀이라는 거죠. 어때요?



p 63

역사, 철학, 교육, 종교, 법률, 정치, 경제, 사회, 이런 학문 따위보다 한 처녀의 미소가 숭고하다는 파우스트 박사의 용감한 실증.

학문이란 허영의 또 다른 이름. 

인간이 인간답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p 66

전쟁. 일본의 전쟁은 자포자기다.

자포자기에 휩쓸려 죽는 건 싫어. 차라리, 혼자 죽고 싶어.


인간은 거짓말할때 으레 진지한 표정을 짓는 법이다. 요즘 지도자들, 그 진지함이란. 쳇!


남한테 존경받으려 애쓰지 않는 사람들과 놀고 싶다.



p.67

결국 자살하는 수밖에 도리 없지 않은가.

이렇게 괴로워한들 그저 자살로 끝날 뿐이라는 생각에, 소리내어 엉엉 울고 말았다.



p, 76

'불량하지 않은 인간이 있을까?' 라고 그 공책에 쓰여 있었는데, 

그러고 보면 나도 불량, 삼촌도 불량, 어머니조차 불량하게 여겨진다.

불량하다는 건 상냥하다는 뜻이 아닐까.



p 94

제게 적당히 무슨 사상 같은 걸 갖다 붙이지 말아 주세요.

저는 사상이 없습니다.

저는 사상이나 철학을 앞세워 행동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칭찬받고 존경받는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이고 가짜라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저는 세상을 신용하지 않습니다.

딱지 붙은 불량만이 제 편입니다.

딱지 붙은 불량. 저는 오직 그 십자가에게만은 달려 죽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만인에게 비난받는다 해도, 저는 되묻고 싶습니다.

당신들은 딱지 없는, 훨씬 더 위험한 불량이 아니냐고.


(....)


가로막는 도덕을, 밀쳐 낼 수 없나요?



p.119

죽어 가는 사람은 아름답다.

산다는 것. 살아남는다는 것.

그건 몹시 추하고 피비린내 나는, 추접스러운 일처럼 느껴진다.



p.125

어째서 '연애'가 나쁘고 '사랑'이 좋은 건지, 나는 모르겠다.

똑같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랑을 위해 연애를 위해 그 슬픔을 위해, 몸과 영혼을 나락으로 내던질 수 있는 사람.

아아, 나는 나 자신이야말로 그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p.137

살아 있다는 것. 살아 있다는 것.

아아, 이 얼마나 버겁고 아슬아슬 숨이 넘어가는 대사업인가!



p.144

노력. 그런 건 그저 굶주린 야수의 먹잇감이 될 뿐이지.



p.147

나는 천박해지고 싶었습니다.

강인하게, 아니 난폭해지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소위 민중의 벗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술 정도로는 도저히 안 되겠더군요.

늘 어찔어찔 현기증을 느끼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자면 마약 외에는 없었습니다.

나는 집을 잊어야 한다.

아버지의 피에 반항해야 한다.

어머니의 상냥함을 거부해야 한다.

누나에게 차갑게 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민중의 방에 들어갈 입장권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p.150

누나.

믿어주세요.

나는 놀면서도 전혀 즐겁지 않았습니다.

쾌락의 불감증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다만 귀족이라는 자신의 그림자를 벗어나고 싶어 몸부리치며 놀았고 황폐해졌습니다.



p.151

누나.

나는 죽는 게 낫습니다.

내겐 소위 생활 능력이 없습니다.

돈 때문에 남과 다툴 힘이 없습니다.

나는 남을 우려먹을 수 조차 없습니다.



p.154

정직함이란 이런 느낌의 표정을 말하는 게 아닐까, 하고 문득 생각했습니다.

정직이라는 단어로 표현된 본래의 미덕은 도덕 교과서처럼 엄격한 게 아니라, 이처럼 사랑스러운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p.154

하지만 나는 그날 그때, 그 사람의 눈동자에 아픈 사랑을 하고 말았습니다.

고귀함이라고 말할 수 있을 지.

내 주변의 귀족 가운데 어머니를 제외하고 그토록 경계심 없고 '정직'한 눈을 지닌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만은 단언할 수 있습니다.



p.160

그리고 한 가지, 아주 쑥스러운 부탁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유품인 삼베 기모노. 그걸 내년 여름에 내가 입을 수 있게 누나가 수선해 주셨잖아요?

그 기모노를 내 관에 넣어 주세요. 입어보고 싶었거든요.

(...)

간밤의 취기는 말끔히 가셨습니다. 나는 맨정신으로 죽습니다.

한번 더, 안녕.

누나.

나는 귀족입니다.



p.163

혁명은, 대체 어디서 일어나고 있을까요?

적어도 우리들 주변에서 낡은 도덕은 여전히 그대로 털끝만큼도 바뀌지 않은 채,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바다 표면의 파도가 아무리 요동친들 그 밑바닥의 바닷물은 혁명은커녕 꿈쩍도 않고 자는 척 드러누워 있을 뿐인걸요.



p.165

작가 다자이 오사무(본명 쓰시마 슈지)는 태평양 전쟁 중에 가족을 데리고 고향 아오모리현 쓰가루에 있는 생가로 소개(疎開)를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종전을 맞이했다. 전후 새로운 농지 개혁이 발표되면서 대지주였던 쓰시마 집안은 급속도로 쇠퇴의 길에 접어들었고, 그 모습을 직접 지켜본 다자이는 평소 애독하던 러시아 작가 체호프의 <벚꽃 동산>을 떠올렸다.




p.166

주인공 가즈코의 모델이자 당시 다자이의 애인이었던 오타 시즈코의 일기를 다자이가 빌려 부분적인 에피소드를 차용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오타 시즈코의 <사양일기>는 다자이의 <사양>이 발표되고 나서 1948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p.166

<사양>은 다자이 문학의 전모를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등장인물들 가운데 나오지에게는 다자이 삶의 전기 모습, 우에하라에게는 후기 모습이 투영되어 있고

어머니에게는 다자이의 이상형, 그리고 가즈코에게도 힘든 시기를 경험한 다자이의 생활이 투영되어 있다고 보는 연구자도 있다.



>>>>>>>>>>>>>>>> 감상.


한편의 시같다.

봇물이 터지면 감당할 수 없는 인간의 내면만 골라서 건드린다.

죽음이 아름답다라고 했는가. 말도 안되는 개똥철학, 허영으로 가득찬 문장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말이다. 

이 작품을 읽고 과연...그럴 수 있겠다..처음으로... 그럴 수 있겠다..라는 실감을 느꼈다.

나오지의 유서 마지막처럼 

나도 죽을 때 '나는 귀족이다'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허영, 거짓말, 탐욕, 이기심.. 죽기 전에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내가 안고 있는 것들.

더 많은 탐욕과 이기심을 채우고 또 그것을 덮기  위해 오늘도 내일도 분주히 뛰어다닌다.

그래 죽음은 아름다운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던가. 철학이란 '죽어가는 방법'이라고.


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고,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릿한 것처럼.

<인간실격>과 <사양>은 아버지같고, 어머니같다.

영혼을 매료시킨다는 말.. 그 말 

<사양>에서 꼭 느껴보시라 권하고 싶다.


* <사양>과 함께 읽을 책

안톤체호프 <벚꽃동산>



쓰시마유코 <웃는늑대>

- 다자이 오사무의 딸, 쓰시마유코가 1살때 자살함. 그녀도 2016년도에 타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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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2019-11-06 0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정말 좋았던 책인데, 호불호가 많이 갈리더라구요. 적어주신 구절들을 보니 다시 생각이 나네요. 잘 읽었습니다 :)

북프리쿠키 2019-11-06 21:52   좋아요 0 | URL
이스페셜리_유님도 좋으셨나 봅니다. 저도 정말 좋더라구요.^^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재 놀러갈께요..!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열린책들 세계문학 54
볼테르 지음, 이봉지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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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테르는 자신의 철학을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고자 <철학적콩트>라는 분야를 창조했는데, 그 대표작이 이 책이다.
콩트형식을 빌려 우회적으로 사회를 비판하는 이 작품에는 볼테르 특유의 아이러니가 잘 드러나 있다.
또한 볼테르의 고백록이라고 불릴 정도로, 작품 곳곳에 그의 개인적 체험이 녹아있기도 하다.


>>>>> 본문 발췌

은밀한 불행은 공공연한 재난보다 더 잔인한 법이니까요.


모두들 쾌락을 추구하지만 내가 보기엔 아무도 그걸 얻지 못하는 것 같아요.


어리석은 자들은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라면 무엇이든지 높이 평가하죠. 하지만 내 독서는 나만을 위한 것이고 그래서 나는 내 취향에 맞는 것만 좋아합니다.


일은 권태, 방탕, 궁핍이라는 3대 악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줍니다.



본명 : 프랑수아마리 아루에, 볼테르는 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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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프리모임에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9번

# 표지그림
알렉스 케밍커 [여름들판(아침)](2015)

자신의 집안이 고리대금업으로 부자가 된 신흥 졸부라는 사실에 평생 동안 부끄러움을 느낀
다자이 오사무.

그가 패전 직후 걸작을 쓰겠다고 호언하며 일본판 <벚꽃 동산>을 쓰겠다..제목은 기우는 해로 정했다.는 책이 바로 <사양>이다.
몰락해가는 상류 계급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사양족‘이라는 유행어를 낳았고 그의 생가는 ‘사양관‘으로 이름 지어져 기념관이 되었다.

<인간실격>에서 요조가 보여준 ‘익살‘이
<사양>에서 어떤 식으로 내 가슴을 아련하게 만들지
아이보리 빛깔의 사박사박한 종이에 손바닥을 비벼 본다. 그리고 그의 성공한 5번째 자살 시도 직전 탄생한 걸작을 만진다.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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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가 사람들을 끄는 매력은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이 세상 모든 가치의 원천이라고 주장하며 세상의 중심에서 주인으로 살라는 그 메시지일 것이다.-7쪽






리라이팅클래식 시리즈-05 번이다.
읽은 책으로 따지면 이번이 4번째 책이다.
맹자..에 대해 말해보라하면 대부분 성선설, 왕도정치, 맹모삼천지교 정도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근데 그마저도 잘못 오해하는 분들도 꽤 있으리라.

이 시리즈의 장점은 무엇보다 역량있는 저자들의
뚜렷한 주관이다.

이런 점이 곧 단점으로 작용해 비판의 초점이 된다는 걸 알기에 가급적 원문을 인용하여 이해를 돕는 균형도 마음에 든다.

모호하게 해석의 책임을 전가하는 것과 열린 해석으로 독자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판단하게끔 논지를 단단하게 이끌어 주는 것은 다른 차원이기 때문이다.


매주 일요일 오전에 만나는 북프리모임은
책으로 사람을 만나는 시간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진정한 보수주의자, 서로의 말을 이해하면서 기분 좋게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설사 내가 급진적인 진보주의자라도 그 만남은 축복이고 기쁨인 것을.

얼마전 홍준표와 유시민의 100분 토론을 보며
많은 것을 느꼈는데..볼테르가 말했다고 거론되는 (실제로는 아니라고 함) 명문이 떠오른다.

˝나는 당신이 하는 말에 찬성하지는 않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할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면 내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놓겠다.”

혹 내가 추구하는 진보가 진정성 있는 것인지, 누군가의 퇴보를 혹은 희생을 딛고 있는 것이 아닌지
관용하지 않고 떠들어 대는 ˝나˝의 모습에서 흔히들 말하는 ˝수구꼴통˝의 불통이 보이지 않는지..

그 비판의 회초리는 항상 자기 자신에게 먼저 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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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리라이팅 클래식 3
고병권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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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하는 모든 것들은 그 자신의 능력만큼 실존한다.˝

리라이팅클래식 시리즈 중
지금까지 읽었던 책중에 최고였다.
명문장들이 너무 많아 줄긋기 바빴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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