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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녀의 세계 - 사랑한 만큼 상처 주고, 가까운 만큼 원망스러운
김지윤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11월
평점 :
나는 'K-장녀'다. 그중에서도 장손인 하나뿐인 남동생을 둔, 5형제의 맏이인 아빠를 둔, 어릴 적 엄마를 잃어 늘 좋은 엄마가 되고 싶어 하는 엄마를 둔, 그러나 남동생이 장손이라는 이유로 당연하게 차별을 받아온 'K-장녀'다.
어릴 적 우리 집은 바글바글 대가족이었다. 삼촌들 넷, 엄마와 아빠, 할머니와 할아버지, 증조할머니까지 우리는 한집에서 살았다. 아빠는 이미 20대부터 집안의 가장이었다. 아빠 혼자 벌어 10식구가 먹고살았단다.
엄마도 무척 고생을 했다. 어릴 적 엄마를 여읜 것도 모자라, 시집을 왔더니, 삼촌들은 백수요. 학생인 막내삼촌은 도시락을 싸 보냈어야 했단다. 심지어 시부모님에 시할머니까지... 엄마는 매일매일 10인분의 밥을 해내던 슈퍼파워!! 'K-장손 며느리'였다.
동생은 몸이 약한 아이였다. 그래서 나는 늘 찬밥이었고, 양보해야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의 관심은 늘 동생을 향했다. 나는 매일매일 평등을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우리집 삼남매에게만큼은 절대로 차별을 하지 않으려는 강박관념이 늘 나를 짓누르는 이유다.
그러나 어른이 되고서 조금은 알게 되었다. 차별은 말 그대로 대하는 모양새일 뿐, 사랑의 양은 같았다는 것을... 할머니는 참 차가운 분이셨는데, 동생이 아플 때도 울지 않으시던 분이, 처음으로내가 수능을 망쳐 괴로워하던 때 우셨단다. 엄마는 할머니가 그렇게 우는 건 평생 처음 보셨다고 했다. 어릴 적 차별이야 옛날 사람의 집안을 위한 본능적 감정이었을 뿐, 아픈 아이를 향한 안타까운 마음 때문이었다는 걸 이해하게 되었다.
엄마는 어릴 적 엄마를 일찍 여의셨다. 그래서 누구보다 내게 좋은 엄마가 되고 싶어 하신다. 그래서인지 늘 나를 아이처럼 대하신다. 아직도 혹시 사는데 모자랄까 도움을 주고 싶어 하시고, 옷에, 건강에, 눈썹 모양에, 머리 스타일에, 살까지 관심이 많다.
내가 김장을 혼자 다 하고, 요리도 곧잘 하는 걸 알아도, 엄마는 만날 때마다 늘 바리바리 흔한 멸치볶음 하나까지도 꼭 싸주려고 해놓는다. 몸이 아플 때에는 좀 안 했으면 좋으련만, 굳이 허리에 복대를 차고라도 뭔가 주시려고 잔뜩 해두신다. 시어머님은 쿨하게 맛봐라 하며 주시는 정도지만, 엄마는 그것도 늘 꽉꽉 채워 커다란 통으로 퍼부어 주신다. 엄마에겐 딸이 올 때 의식처럼 밑반찬 하나라도 꼭 직접 해서 주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자리하고 있나 보다.
아마도 엄마는 엄마의 자리를 못 느낀 채 자랐던 그 외로움을 나만큼은 느끼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닐까? 어느 정도까지가 적당한 건지 경험해 보지 못해, 힘에 부친 줄도 모르고 내게 퍼부어주시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어 어쩐지 마음 한편이 아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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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K-장녀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기 자신을 위해 많은 것들을 하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의 딸들에게는 K-장녀의 굴레 따위를 물려주어서는 안 된다.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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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은 엄마의 소유물이 아니다. 우린 서로에게 타인이다. 다만 매우 특별히 사랑하는 타인.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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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섭이냐 애정이냐 그 사이 어디쯤에서 세상의 많은 엄마와 딸들은 위태롭게 서로를 붙잡고 있다. 너무 사랑하고 축복하지만, 여전히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책을 읽는 내내 엄마의 이야기를 듣는 느낌이었다. 먹고살기 바빴던 시절의 몽실언니들, 아들을 위한 딸들의 희생, 딸만큼은 나처럼 살기를 바라지 않는 마음, 그러면서도 가장 가까운 딸과 서로 주고받는 상처에 "너도 꼭 너 같은 딸 낳아 키워봐!"라고 뱉어버릴 수밖에 없는 엄마의 아픔! 모든 것이 와닿았다.
엄마도 누군가에겐 딸이었다. 그 기간조차 나의 엄마에겐 너무 짧았다. 그러니 나에게 향하는 관심과 잔소리가 얼마나 큰 애정과 노력을 담은 결과물인지 책을 읽는 내내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엄마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도 떠올랐다. 엄마는 이미 충분히 좋은 엄마라고, 주고 또 주려고 더 좋은 엄마가 되려고 더이상 힘들지 않아도 된다고, 이젠 곁에 건강히 오래오래 계셔주시는 것이 최고의 선물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이 책은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런데 그 이야기 속에 나와 엄마의 이야기가 잔뜩 녹아있다. 엄마라면, 그리고 딸이라면 누구나 마음 한가득 공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제 진짜 엄마를 이해할 수 잇을 것 같다.
※위 리뷰는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