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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학문하기 - 새 천년을 맞이하는 진통과 각오
조동일 지음 / 지식산업사 / 2000년 1월
평점 :
이 땅에서 학문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우리는 그동안 어떤 학문을 해왔고, 학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어떠해야 하는가? 우리네 학문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등등...
<이 땅에서 학문하기>(조동일 저, 지식산업사, 2000)는 우리 학문에 대한 전반적인 반성과 성찰을 시도하고, 문제점을 지적하며 대안을 제시한다.
필자가 이 책의 저자 '조동일' 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조동일씨의 책을 통해서가 아닌, 다른 책을 통해서였다. 그 다른 책은 바로 지난 2월부터 지금까지 대형서점의 인문학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머물며 지속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탁석산 선생님(조동일은 '씨'라는 호칭을 붙이고, 탁석산은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것은 개인적으로 탁석산 선생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의 저서 <한국의 정체성>과 <한국의 주체성>이다.
탁석산 선생님은 지난 학기 필자가 다니는 대학 철학과에 출강하시며 매 시간마다 책선전(?)을 하셨고, 학기가 끝날 무렵 필자는 결국 탁석산 선생님의 화려한 장사꾼(?) 언변에 넘어가 책을 구입하고 말았다. 그것도 두 권 다. 그러나 탁월한 선택(그것이 선택이었나? '무의식적 강요', '암묵적 강요'라고 함이 더 옳을 듯하다)이었음을 느낀다.
<한국의 주체성> 의 책 맨 뒤에 '더 읽어야 할 자료들'에서 탁석산 선생님은 조동일씨의 <이 땅에서 학문하기>를 소개하며 조동일씨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미 강의시간 중 선생님의 조동일씨에 대한 신랄한 비판에 익숙해 담담하게 읽어내렸지만, 조동일씨가 학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알았을 때, 일개 소장 철학자(지금은 소장철학자가 아니지만)가 학계 거물을 물어뜯었다는 것에 적잖이 놀랄만한 일이다.
<한국의 주체성>에서 탁석산 선생님은 조동일씨를 향해 이렇게 비판한다. "거의 자아도취에 빠진 지은이가 자신의 포부를 다시 한번 밝힌 책이다.", "자신이 뭔가 대단한 업적을 세웠다고 계속 주장하는데, 그거야 남들이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누가 인정했지? 나는 아닌데."
이렇게 필자는 탁석산 선생님의 신랄한 비판을 받은 조동일씨가 누구인지 알고싶어 거의 저서 중 하나인 <이 땅에서 학문하기>를 읽게 되었다. 조동일씨는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로 그동안 <우리 학문의 길>, <독서, 학문, 문화>, <인문학문의 사명>등의 수많은 저서를 남겼고, <이 땅에서 학문하기>는 저자 자신이 근래 있었던 자신의 학문에 대해 시비한 두 글(강준만 교수와 홍윤기 교수의 비판)에 대한 답으로써 책을 썼노라고 머리말에 밝히고 있다. 저자는 책이 전체적으로 기존의 저자의 책에서 발췌하고 기타 신문 기고 글이나 새로 첨부한 글로서 엮어져있다고 말한다.
책은 전체적으로 제1부 새로운 출발(위기 이겨내기, 글읽기와 글쓰기, 신명풀이와 창조정신), 제2부 탐구의 내역(동아시아문명권의 공동유산, 민족해방을 위한 자아각성, 남북분단을 넘어서는 지성, 세계학문의 새로운 지평), 제3부 학문 정책(선진학문을 위한 학술진흥, 국제학술회의를 통한 세계 진출, 학문을 죽이는 정책과 살리는 정책)의 3부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글이 독립적이면서도 상호 연관되어 있고, 모든 글에서 저자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의지, 국가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지키고자 하는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글을 통해 저자의 정신을 느꼈다고 하면 지나친 것일까? 여타 다른 책을 읽으며 느끼지 못했던 저자의 열정이 이 책에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많은 글들에서 몇몇가지 중요하다 생각되는 점을 끄집어낸다면, 저자는 '세계학문의 지평'에서 자신이 저자 자신만의 독특한 학문이론인 생극론(生克論)을 전면에 내세우며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제1세계의 학문은 조화로운 생성을 뜻하는 '生'에 치우쳐있고, 러시아를 중심으로하는 제2세계의 학문은 투쟁을 통한 발전을 뜻하는 '克'에 치우쳐있음을 주장하며, 그래서 둘 다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고, 둘을 합쳐서 넘어서야 한다고 말한다. '생'에 치우친 결함은 '극'으로 시정하고, '극'으로 해결책을 삼기만 하는 편향성을 '생'의 실현을 통해 바로잡아 '생'과 '극'을 둘 다 온전하게 하는 '생극'을 이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이 무엇인지는 알겠으나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관념론적인 이야기만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또한 저자는 '동아시아문명권의 공동유산'에서는 유럽문명에 맞설 수 있는 동아시아문명을 이룩하자고 한다. 유럽에는 라틴어를 바탕으로 한 라틴문명권이 있고, 이는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기독교문명권과 상통하며, 그들은 인권과 자유를 문명의 기준으로 삼는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도 이에 대응할 수 있는 문명권을 형성해야하며, 동아시아에서 이는 언어로는 한문문명권, 종교로는 불교문명권, 더 자세히는 대장경문명권이라고 하며 유럽의 인권, 자유에 대한 동아시아의 대안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유럽문명권에 맞서 동아시아문명권을 형성하고, 이를 대장경문명권이라 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대장경을 중심으로 동아시아가 정말로 문명권을 형성할 수 있는지는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도 의문이다. 조동일씨가 생각하는 만큼 우리나라가 그 대장경이라는 것에 그만큼 큰 비중을 두고 있는지도 의심스럽고, 우리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중국이나 일본이 그러한지는 또 의문이다.
저자의 이러한 몇몇 주장으로 볼때 국가의 학문적 체계를 세우고자 하는 그의 의지와 열정, 시도는 높이 사지만 그것이 정말 가능한 것인지, 실제 그러한 것이 있는지, 실체가 존재하는지를 생각해 볼 때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논의라 생각한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헤겔의 '역사철학강의'가 생각나는 것은 왜인가?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언급하자면 제3부 학문정책에서 저자가 우리네 대학의 학문정책이 잘못됐음을 실랄하게 비판하고 그 대안까지 확실하게 제시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마지막 3부는 1,2부에서의 추상적인 논의와 달리 현실의 문제점을 정확히 지적하고 이에 대한 대안까지 마련한 지극히 '현실적'인 장이었다. 정말 지금의 학문정책이 그의 주장대로 실현된다면 우리나라의 학문적 성과를 극대화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