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아이 1
토리 헤이든 지음 / 아름드리미디어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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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느날 필자의 지인이 필자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했다. 유아교육과에서는 필수독서 서적이라면서 덧붙여 이 책에 대해 설명하기를 어떤 헌신적인 선생님과 온갖 불행과 고통을 겪은 한 어린 소녀에 관한 실화라고 했다. 필자가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단지 이 설명이 다였다. 필자는 이 책이 유아교육과 필독서라는 것과 이 이야기가 실화라는 것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고, 본래 제 시간이면 잠이 드는 필자는 그 날 밤 이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눈에는 눈물을 머금은 채로...

<한 아이>(토리 L.헤이든 지음, 주정일, 김승희 옮김, 샘터, 1984)는 정상적이지 못한 여섯살 난 어린 소녀에 관한 이야기다. 아이의 이름은 쉴라. 그 아이는 누구에게든 절대 말을 하지 않고, 아무리 아파도 울지 않으며, 눈은 항상 분노로 이글거렸다. 어렸을 때 엄마로부터 길가에 버려졌고, 술주정꾼인 아버지에게 매를 맞으며 자랐다.

그 후 쉴라는 동네의 세 살 난 어린 남자아이를 유괴해 나무에 매어놓고는 불을 질러 커다란 화상을 입게 만들었다. 결국 이 아이는 정신병원이 지어지는 대로 그 곧에 들어간다는 조건하에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문제아 반에 배정되었다.

이곳에서 쉴라는 토리 헤이든 선생님을 만나며 서서히 변한다. 분노로 이글거리던 눈은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뀌게 되었다. 아이는 그동안 사랑이란 것을 받지 못하고 자랐기 때문에 그동안 엇나갔던 것이다. 토리 헤이든 선생은 쉴라와 함께 있으면서 쉴라가 여느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지능지수가 매우 놓은 천재아라는 것을 알았다. 쉴라의 지능지수는 180-190이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쉴라에게 사랑을 느끼게 해주고 쉴라의 재능을 가르쳐준 사람. 토리 헤이든은 이 책의 저자이다. 헤이든 선생은 머리말에서 어느날 신문 한 구석에서 어린 여자아이가 남자아이를 불태웠다는 기사를 스쳐지나가듯 읽었고, 그 사건의 주인공인 쉴라가 자신의 학생이 될 줄은 몰랐다고 밝히고 있다.

자신은 쉴라를 처음 봤을 때 어찌하면 좋을지 몰랐고 막막했다고 고백하며, 이 책은 결코 자신이 칭찬을 받기 위해서도, 사람들로부터 쉴라에게 동정을 구하기를 위해서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저 이 책은 "오직 한 아이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의 실제 제목 또한 'One Child' 이다. 한 아이... 그것은 자신이 경험한 특수한 상황도 그저 한 아이를 가르치는 평범한 일이며, 우리가 보기에 정상적이지 않은 아이 또한 그저 평범한 한 아이 일뿐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 아이는 내 학급의 다른 아이들이나 마찬가지 인간이고, 또 우리 모두 마찬가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살아남은 생존자일 뿐입니다."

세상의 '비정상적'인 것을 '잘못'된 것으로 보는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비정상적'인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저 그것은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할 뿐 그것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기 '비정상적'인 것을 '잘못'으로 보는 분들에게 쉴라가 토리 선생님께 시를 바친다.



사랑하는 토리 선생님께

많은 사람이 왔습니다.
그들은 모두 나를 웃게 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나와 게임을 했습니다.
더러는 재미를 위하여 더러는 승부를 위하여.
그러다가 다 가버렸습니다.
상처입은 게임 속에 나를 내버려 둔 채,
무엇이 재미고 무엇이 승리인지 알 수 없는 가운데
홀로 남은 내 귀에는
웃음소리가 메아리쳤지만
그것은 나의 소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이 왔습니다.
선생님은 아주 엉뚱했습니다.
사람도 아닌 듯했습니다.
그리고 나를 울게 하였습니다.
울어도 상관을 안했습니다.
단지 게임이 끝났다고 말할 뿐
그리고 기다려 주었습니다.
내 눈물이 모두 기쁨으로 바뀔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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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다고지 - 30주년 기념판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15
파울루 프레이리 지음, 남경태 옮김 / 그린비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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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파울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 영어원제는 'Pedagogy of the Oppressed'으로 번역하자면 '억압받은 자를 위한 교육학'이다. 이 책은 꽤나 오래된 교육학 고전으로 일컬어진다.

 1971년에 브라질에서 프레이리에 의해 씌여진 이 책은 2002년 <페다고지>가 출판된 지 30주년이 되어 미국에서 30주년 기념판을 찍었다. 그렇다고 내용이 크게 달라질리는 없고 단지 '30주년 기념판 발간에 부쳐' 정도가 더 덧붙여진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30주년 기념이라는 타이틀을 이용해 좀더 눈길을 끌고 팔아먹으려는 출판사의 상업적인 전략도 들어있다고 할 수 있겠다. 본래 10주년이네 20주년이네 100주년이네 하면서 10단위로 기간을 쪼개어 기념을 하는 것이 다 그런거 아니겠는가.

 <페다고지>는 상당히 유명한 책인가보다. 나는 이 책의 제목조차도 이번에 처음 접했지만 뭔가 있어보이는 학문적 냄새를 풍기는 제목이 일단 나의 눈길을 끌었고, 30주년 기념판은 부차적인 부분이었다. 교육학 쪽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저서로 생각되는 이 책의 저자 프레이리는 책의 전체적인 내용으로 볼 때 상당한 마르크스 주의자로 추정된다.

 나는 철학을 전공했지만 마르크스는 제대로 접하지 못했다. 유독 기독교 학교여서 그런건지 우리네 철학 커리큘럼에는 유물론에 관한한 별로 다루고 있지 않았고, 나 홀로 읽은 책은 <마르크스 평전>쯤이다. 그러니 내가 마르크스에 대해 알아봐야 그의 가족사나 생활부분 말고는 얼마나 알겠는가. 하지만 그는 책에서 마르크스와 레닌을 수시로 언급하며 인용하고 있다. 따라서 그저 그렇게 추정해볼 뿐이다.

 또한, 프레이리는 마르크스와 레닌을 제외하고도 실존철학자로 분류되는 장 폴 사르트르와 카를 야스퍼스도 언급하며, 훗설, 베르그송, 헤겔, 에리히 프롬 등의 철학자들도 등장시키고 있다. 더불어 마르크스 만큼이나 자주 나오는 체 게바라와 마오쩌뚱, 피델 카스트로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이 모든 사람들이 짬뽕되어 프레이리의 머리 속에 들어갔다가 결과적으로 나온 것이 <페다고지>다.

 그는 교육에는 중립이란 없으며, 모든 교육은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관계로 나타낼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억압자가 피억압자를 교육시키는 방법을 말하며, 피억압자가 억압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어찌해야하는지를 이 책을 통해 풀어내고 있다.

 억압받은 자는 자기 자신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의식화 과정을 통해서 억압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현재의 우리네 교육은 모든 것을 알고 행위하고 명령하는 교사와 이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학생과의 관계로 성립되어 있으며, 이는 양측이 서로 대화하는 것이 아닌, 교사 성명을 발표하고 예탁금을 만들면, 학생은 참을성 있게 그것을 받아 저장하고 암기하고 반복하는 '은행 저금식 교육'을 벗어나지 못한다.

 프레이리는 "인간화 교육의 방법은 교사가 학생을 조작할 수 있는 도구로 여기는 게 아니라 학생 자신의 의식을 스스로  표현하는데 있"으며, "지식은 창조와 재창조를 통해서만 생겨나며, 인간은 끊임없고 지속적인 탐구 정신을 통해 세계 속에서, 세계와 더불어, 또 타인과 더불어 살아나갈 있"다고 말한다.

 그는 양자가 대화하며 함께 행함으로써 서로에게 자극을 주며, 세계에 관한 개념과 견해를 형성함으로써 이 구조를 타파할 수 있다고 본다. 그 방안이 바로 문제제기식 교육이며, 이 교육의 골자는 '대화'이다.
 
 30주년 기념판 <페다고지>의 해제를 쓴 부산교육대학교 심성보 교수의 글은 프레이리의 대화에 대한 생각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대화는 객체를 주체로 변화시키고, 억눌린 자를 해방시키는 의식화 수단이다. 대화적 의식화는 억압사회를 해방시킨다. 대화를 한다는 것은 인간을 사회적, 정치적 존재로 동일시하는 존재, 사회의식을 가진 존재로 발전시킨다. 진정한 대화는 세계와 인간을 이분하지 않고, 양자가 분리될 수 없는 어떤 결합을 이루고 있음을 발견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대화는 의사소통, 협동, 일치, 투쟁을 동시에 필요로 한다.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마음이 요구된다. 대화 자체가 사랑이다. 대화는 사랑하고, 겸손하고, 소망을 가지고, 신뢰하고, 그리고 비판적이어야 한다."

  이 책은 생소한 마르크스식의 단어 사용으로 소설 읽듯 쉽게 넘어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끈기있게 읽어나간다면 프레이리가 주장하는 바가 뚜렷하게 눈에 들어올 것이며, 그 구조만 익힌다면 나머지는 부차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나로 하여금 오늘날의 교육을 다시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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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5-01-28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제가 학교 다닐때는 필독서처럼 읽혔지요.아마 그 전 세대에게는 금서였겠지요.프레이리가 빈민층,농민층을 상대로 학습 교육한 과정이 아직도 인상에 남습니다.아주 인내를 요하는 과정이었지만 결국 민중의 의식성장에는 시간과 인내..거기에 낙관적이 마인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던것 같아요.

마늘빵 2005-01-28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그의 교육방법에 존경을 표합니다. 그러한 인내를 감당할 교사가 얼마나 될지. 저도 자신없습니다.
 
페다고지 - 30주년 기념판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15
파울루 프레이리 지음, 남경태 옮김 / 그린비 / 2002년 5월
구판절판


"모든 사람은 각자 자신이 처한 세계에서 존재하는 방식을 비판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힘을 계발해야 한다. 즉 세계를 정태적 현실로서가 아니라 변화 과정의 현실로서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12쪽

"역사란 항상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가득하며, 미래는 숙명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여지가 충분하다."-15쪽

"이론을 위해 실천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이론을 순전한 탁상공론과 주지주의로 환원하는 행위다. 마찬가지로, 실천을 위해 이론을 부정하는 것도 잘못이다. 이것은 대화를 좌담으로 이용하는 경우에 흔히 나타나는데, 실천의 무연관성 속에 매몰되는 결과를 빚게 된다."-22쪽

"학생이 인식론적 호기심과 더불어 앎의 대상에 관한 어느 정도의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에는, 인식론적 호기심을 증대시켜 앎의 대상을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지적 도구를 계발하는 작업이 어려워진다. 학생이 자신의 체험을 지식으로 전환시키기 못하고 이미 획득한 지식을 이용해서 새 지식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학생은 엄밀히 말해서 배움과 앎의 과정으로서의 대화에 참여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23쪽

"우익분파와 좌익분파가 다른 점은, 전자는 현재를 길들여서 미래를 이 길들여진 현재로 재생산하고자 하는 반면, 후자는 미래를 예정된 것, 일종의 불가피한 숙명, 운명, 천명으로 간주한다. 우익 분파에게는 '오늘'이 과거와 연결되어 있고 불변적으로 결정되어 있다. 또한 좌익 분파에게는 '내일'이 사전에 정해져 있고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고착되어 있다. 이러한 우익과 좌익은 둘 다 반동적이다. 둘 다 허구적인 역사관에서 출발하여 자유를 부정하는 행위의 형태를 전개하기 때문이다." -47쪽

"이론적 지식이 당내의 소수 '학구파'의 특권으로 남아 있는 한, 학구파는 길을 잃고 헤맬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개혁이냐 혁명이냐>, 라이트 밀스 <마르크스주의자들>에서 인용-49쪽

"프락시스(이는 실천으로 번역되는 프랙티스와 동일한 어원의 말이지만, 실천이 이론 없는 행위로 협의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론적 실천의 의미를 갖는 프락시스라는 용어대로 사용한다)"-55쪽

"피억압자는 자유를 포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억압자는 억압할 '자유'를 잃을까봐 두려워한다."-57쪽

"명령이란 명령자가 자신의 선택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여 그 사람의 의식을 자신의 의식에 일치시키도록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이렇게 해서 피억압자의 행동은 억압자의 지침에 따르는 명령받은 행동이 된다."-58쪽

"헤겔은 주인의식과 피억압자 의식의 변증법적 관계를 분석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전자는 독립적이며, 그 자체로 존재하는 본질적 속성을 가진다. 후자는 종속적이며, 본질적으로 타자와의 관련 속에서 존재한다. 전자는 주인 혹은 지배자이며, 후자는 노예다." " 헤겔의 <정신현상학> 234쪽-61쪽

"객관주의란 객관성과 주관성을 분리한 다음, 주관성을 부정하면서 현실을 분석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물론 잘못이다. 그러나 분석이나 행동에서 객관성을 부정하고 주관주의를 취해 유아론적 입장으로 빠진다면, 객관적 현실을 부정하게 됨으로써 행위 자체를 부정하게 된다." -62쪽

"인간화 교육의 방법은 교사가 학생을 조작할 수 있는 도구로 여기는 게 아니라 학생 자신의 의식을 스스로 표현하게 만드는 데 있다"-87쪽

"방법이란 의식의 외적 형태가 행동으로 드러난 것을 가리킨다. 행동은 의식의 근본적 속성인 지향성이다. 의식의 본질은 세계와의 어울림이므로 행동은 영구적이고 불가피한 것이다. 따라서 의식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외부에 있고, 자신과 별개로 존재하는 것. 즉 자신의 주변에 있는 것을 특유의 관념화 능력을 이용해 '지향하는 방법'이다. 즉 의식은 그 정의상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알바로 비에이라 핀투의 과학철학에 관한 예비 연구에서 인용. -88쪽

"학생은 보관소이고 교사는 예탁자다. 양측이 서로 대화하는 게 아니라, 교사가 성명을 발표하고 예탁금을 만들면, 학생은 참을성 있게 그것을 받아 저장하고, 암기하고, 반복한다. 이것이 바로 '은행 저금식' 교육 개념이다."-90쪽

"지식은 창조와 재창조를 통해서만 생겨나며, 인간은 끊임없고 지속적인 탐구 정신을 통해 세계 속에서, 세계와 더불어, 또 타인과 더불어 살아나갈 수 있는 것이다." -90쪽

은행저금식 교육
1. 교사는 가르치고 학생들은 배운다.
2. 교사는 모든 것을 알고 학생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3. 교사는 생각의 주체이고 학생들은 생각의 대상이다.
4. 교사는 말하고 학생들은 얌전히 듣는다.
5. 교사는 훈련을 시키고 학생들은 훈련을 받는다.
6. 교사는 자기마음대로 선택하고 실행하며 학생들은 그에 순응한다.
7. 교사는 행동하고 학생들은 교사의 행동을 통해 행동한다는 환상을 갖는다.
8. 교사는 교육 내용을 선택하고 학생들은 거기에 따른다.
9. 교사는 지식의 권위를 자신의 직업상의 권위와 혼동하면서 학생들의 자유에 대해 대립적인 위치에 있고자 한다.
10. 교사는 학습 과정의 주체이고 학생들은 단지 객체일 뿐이다. -91-92쪽

"문제제기식 교육자의 역할은 학생들과 함께 독사 수준의 지식이 로고스 수준의 지참된 지식으로 바뀌는 과정을 창출하는데 있다."
"은행저금식 교육은 창조성을 마비시키고 금지하지만, 문제제기식 교육은 현실을 드러내고자 한다. 전자는 의식의 침잠을 유지하려 하지만, 후자는 의식의 출현과 비판적 현실 개입을 위해 노력한다."-102-103쪽

"아(我)는 비아(非我)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반대로 비아는 아의 존재에 의존한다. 의식을 존재하게 하는 세계는 의식의 세계가 된다."-104쪽

"말에는 성찰과 행동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이 양자는 근본적으로 상호작용하므로 부분적으로라도 하나를 버리면 다른 하나도 즉각 손상된다. 프락시스가 없는 참된 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참된 말을 하는 것은 곧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111쪽

"대화는 사람들이 세계를 매개로 하여 세계를 이름짓기 위해 만나는 행위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를 이름짓고자 하는 사람들과 그 이름짓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다시말해 다른 사람들의 말할 권리를 부정하는 사람들과 자신의 말할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간에는 대화가 있을 수 없다. 자신의 말을 할 수 있는 원초적 권리를 부정당한 사람들은 먼저 그 권리를 되찾아 비인간적 상황이 영속화되는 것을 막아야만 한다."-113쪽

"우스꽝스럽게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나는 참된 혁명가라면 누구나 사랑의 강렬한 감정에 이끌린다고 말하고 싶다. 사랑이 없는 진정한 혁명가는 생각할 수 없다."
<우리는 이길 것이다- 체 게바라의 연설과 글> 398쪽 -114쪽

"참된 교육은 A가 B를 위해, 또는 A가 B에 관해 행하는 것이 아니라 A와 B가 함께 행하는 것이다.양측을 매개하는 세계는 양측에게 영향과 자극을 주며, 세계에 관한 개념과 견해를 형성하게 한다."-119쪽

"대부분의 정책과 교육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이유는, 그 입안자가 교육 내용을 이수할 상황 속의 인간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즉 피교육자를 단순히 자기 행동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자신의 개인적인 현실관에 따라 프로그램을 작성했기 때문이다." -120쪽

"영어의 산다(live)라는 말과 존재한다(exist)라는 말은 인식론적 기원에서 대립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여기서 사용된 것처럼 '산다'는 것은 더 기초적인 의미로서 생존만을 뜻한다. 반면 '존재한다'는 것은 변화의 과정에 더 깊숙이 개입함을 뜻한다."-126쪽

"동물의 생산물은 자신의 신체에 직접적으로 귀속되어 있는 반면 인간은 자신의 생산물을 자유롭게 대면한다." 칼 마르크스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수고> 113쪽 -128쪽

"인간 없이는 역사가 없으며, 인간존재와 무관한 역사는 없다. 무릇 역사란 오직 민중이 만들고 거꾸로 민중을 만드는 인간성의 역사일 뿐이다. 다수가 주체로서 역사에 참여할 권리가 거부될 때 민중은 지배당하고 소외된다. 민중의 객체적 조건을 주체적 지위로 바꾸기 위해서는-이는 모든 참된 혁명의 목표다-민중이 변혁할 현실에 기반하여 행동하고 성찰해야 한다." -168쪽

"대화 행동과 혁명 행동을 나누는 이분법 같은 것은 없다. 대화의 단계가 따로 있고 혁명의 단계가 따로 있는게 아니라 오히려 혁명 행동의 본질이 대화다. 이러한 행동 이론에서는 행위자가 상호 주관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대상에게 향하며, 인간의 인간화를 목표로 삼게 된다. 반대화를 본질로 하는 억압적 행동의 이론에서는 앞의 구도가 단순화된다. 행위자는 현실과 피억압자를 한꺼번에 자기 행동의 대상으로 삼으며, 억압의 유지를 자신의 목적으로 삼는다."-175쪽

"자유로운 행동이란 오직 인간이 자신의 세계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행동만을 가리킨다. ...... 자유의 적극적 조건은 필연성의 한계를 알고 인간의 창조적 능력을 의식하는 것이다. ...... 자유로운 사회를 위한 투쟁은 개인의 자유가 더 큰 폭으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면 자유로운 사회를 위한 투쟁일 수 없다."
'인간과 자유' <사회주의적 휴머니즘>, 에리히 프롬 -177쪽

"참된 증명은 하나의 과정이므로 즉각적인 결실을 맺지 못한다 하더라도 절대적인 실패라고 간주될 수는 없다."-229쪽

"의식화란 '의식을 발달시키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현실을 변혁시키는 의식적 힘'이다. 의식화는 단순히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재성찰하는 의식이다. 의식화는 억압적 현실에 길들여져 있는 순종의식에 눈을 뜨고 각성하게 되는 의식이다." 해제 '왜 지금 <페다고지>를 다시 읽어야 하는가' (심성보)

-246쪽

"문자해독 교육은 체제 속에 머무는 교육이 아니라, 세계를 명명하고 변혁시키는 교육이며, 언어의 표현과 현실의 변혁을 연관시키는 과정이다. 변혁적, 정치적 성격을 띠는 문자해독 교육의 변혁성을 제거하고 이를 읽기 쓰기식 언어교육으로 협소화하는 것은 진정한 의식화 교육이 아니다. 왜냐하면 의식화 교육은 '교육이 중립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함으로써 시작되기 때문이다. 중립성이야말로 해방을 가로막고 민중을 길들이는 이데올로기적 기제다."
해제 '왜 지금 <페다고지>를 다시 읽어야 하는가' (심성보)-248쪽

"대화는 객체를 주체로 변화시키고, 억눌린 자를 해방시키는 의식화 수단이다. 대화적 의식화는 억압사회를 해방시킨다. 대화를 한다는 것은 인간을 사회적, 정치적 존재로 동일시하는 존재, 사회의식을 가진 존재로 발전시킨다. 진정한 대화는 세계와 인간을 이분하지 않고, 양자가 분리될 수 없는 어떤 결합을 이루고 있음을 발견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대화는 의사소통, 협동, 일치, 투쟁을 동시에 필요로 한다.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마음이 요구된다. 대화 자체가 사랑이다. 대화는 사랑하고, 겸손하고, 소망을 가지고, 신뢰하고, 그리고 비판적이어야 한다."
해제 '왜 지금 <페다고지>를 다시 읽어야 하는가' (심성보)-249쪽

"대화적 의식화는 친교의 과정이고, 주체화의 과정이며, 인간화의 과정이다."
해제 '왜 지금 <페다고지>를 다시 읽어야 하는가' (심성보)-249쪽

"대화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이성적 어법을 "우리는 생각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로 발전시킨다. 대화를 통해 우리의 형성은 가능하다. 혼자서는 생각할 수 없고, 잘 알 수도 없다. 따라서 "나는 안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피아제의 인지발달 심리학 어법은 "우리는 안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는 비고츠키의 사회적 구성주의 어법으로 발전한다."
해제 '왜 지금 <페다고지>를 다시 읽어야 하는가' (심성보)-2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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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에이스 문장사전
이어령 엮음 / 금성출판사(금성교과서)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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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뉴에이스 문장사전>은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이어령씨가 엮어냈다. 특별히 이어령을 좋아해서 이 사전을 구입하거나 한 것은 아니다. 이어령이라는 사람의 학문적 내공은 일단 인정하면서도 그가 주장하는 바의 것들에 대해서는 난 아직 그다지 접한 바가 없으며, 따라서 내가 그를 평하기에는 나의 내공이 턱없이 부족하다. 따라서 이어령에 대해서는 난 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문장사전은 굳이 이어령이었기 때문에 구입한 것은 아니며, 사전의 기획의도가 내가 바라던 그것과 부합했기 때문이다. <뉴에이스 문장사전>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국어사전이나 기타 다른 류의 사전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오히려 이 사전은 톨스토이의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책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뉴에이스 문장사전>은 국어사전식 단어나열법을 사용하고 있으나 그 내용에 있어선 판이하게 다르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본다면, 1. 아끼고 위하는 따뜻한 마음. 2. 남녀가 서로 애틋이 그리는 일. 또, 그 애인. 연애. 3. 동정하여 친절히 대하고 너그럽게 베푸는 마음. 4. 육정적, 감각적이 아닌 동정, 긍휼, 구원, 행복의 실현을 지향하는 정념. 이라고 되어있으나, <뉴에이스 문장사전>의 한 구절을 발췌하자면 이렇다.

 사랑은 교전의 일종이다. <오비디우스>
 사랑을 하는 것은 즐겁지만 사랑을 받는 것은 즐겁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논리학>
 사랑에는 연령이 없다. 그것은 어느 때든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파스칼>

 이런 식의 인용구들이 모인 장이 '사랑'에 관해서만 장장 9쪽에 걸쳐있다. 물론 사랑에 관해 언급한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다. 다른 단어의 경우에는 이보다 더 하기도 덜 하기도 하다.

 어쨌든 단지 유명인들의 문장을 끌어다가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지만 특정 주제에 대해서 그들의 말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사전은 매력적이다. 그래서 3만 9천원이라는 꽤 비싼 값에도 불구하고 구입할 의지를 가졌던 것이다.

 정작 사전을 활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사전 역시 기존에 내가 소개한 다른 류의 사전들과 마찬가지로 보고만 있어도 즐거운, 가슴 뿌듯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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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말 풀이사전
박남일 지음 / 서해문집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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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말 풀이사전>은 그야말로 글을 쓰는데 있어서 참고할 만한 현대의 우리가 잘 사용하지 않는 우리말을 사전으로 엮어낸 책이다. 이 책을 한장 한장 넘겨보고 있으면 내가 이렇게 우리말을 모르나 싶은 생각이 든다. 여기에 나오는 대부분의 단어들을 나는 처음 듣거나 들었더라도 기억도 안날 만큼 그 단어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서 이 책의 편집 의도를 내비추고 있다.
 
  "무작정 어휘 수를 늘리는 것이 말글살이를 풍요롭게 하는 것은 아니다. 쉽고, 편하고, 아름답고, 세련되게 다듬어야 한다. 그것은 글쓰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소설, 시, 수필 등의 문학작품에서, 신문이나 잡지의 기사에서, 또는 대중에 대한 파급력이 높은 방송 대본 따위에 우리말을 살려 씀으로써, 언중(言衆)의 의식에 우리말의 아름다움이 두루 새겨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말을 이렇게 모르면서 어찌 남의 말인 영어를 공부하고, 중국어를 공부하고, 일본어를 공부할 것인가? 나는 현대의 우리들에게 영어, 중국어, 일본어에 쏟고 있는 노력의 반만을 우리말을 아는데에 쏟자고 말하고 싶다. 영어를 못하고, 일본어와 중국어는 안녕이라는 단어조차도 모르는 것이 나다. 그나마 고등학교 때 잠깐 배운 독일어는 이제 시간이 많이 지나 데어, 데스, 뎀덴, 디, 데어, 데아, 디, 다스, 데스... 이런 정도 밖에 읊을 줄 모른다. 결국 난 일개국어밖에 할 줄 모른다. 그런데 일개국어 밖에 못하는 내가 이 책을 보고서 아는 단어가 없었다는 것은 오로지 나의 게으름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글에 그나마 관심이라도 있는 내가 아닌 우리글에 관심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자들은 어떨까 싶다.

  난 애국자는 아니다. 민족주의자도 아니다. 국가주의자도 아니다. 따라서 우리말만을 굳이 고집하며 한글이 세계 최고의 언어요, 한글을 공부하자 라고 외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난 어차피 이 땅을 벗어나 살 것이 아니고, 이 땅에서 말을 하고 글을 쓰며 살 것이기 때문에 이 땅의 말을 배우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물론 남의 땅에 가서 살 사람들은 그 나라 말을 더욱 열심히 배우는 것이 더 유용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땅에 살고, 이 땅에서 죽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굳이 바다 밖의 언어를 익히려 노력하지 말고, 이 땅의 언어를 익히려고 노력하는 것이 유용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난 영어열풍, 중국어열풍, 일본어열풍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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