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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된 언어 - 국어의 변두리를 담은 몇 개의 풍경화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199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땅에는 '진보주의자'나 '보수주의자' 많지만 '자유주의자'라 칭할 만한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미소양대국간의 이데올로기 논쟁이 사실상 끝났음에도 이 땅에서는 진보와 보수의 싸움이 계속되어 왔고, 그것은 한편 온당해 보인다. 이념논쟁은 종식되었지만 이념이 종식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들의 싸움은 온당하지 않다. 그들은 진보와 보수라는 이름으로 싸우고 있지만 실상 그들이 진보이고 보수인지는 의문이기 때문이다. 온건한 보수와 좀더 강렬한 보수와의 싸움으로 보는 것이 더 정직해보인다. 지금에 와서 그들 진보와 보수는 '실용주의자'라고 자청하고 있지만 실용주의에도 이념은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또한 이념은 종식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념은 언제까지고 종식되지 않는다. 실용주의는 단지 내용을 담아내는 도구일 뿐이지 내용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릇이 바뀐다고 내용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내용물은 언제고 그대로 있다.
잡설이 길었다. 이땅의 진보와 보수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양진영을 향해 쓴소리를 내뱉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이 '자유주의자'이다.
일본 가나안대 교수였으며 아마도 현재 서울대 객원교수로 와있는 재일교포 윤건차 교수의 저서 <현대 한국의 사상흐름>에서는 한국의 지식인 지도를 그리면서 비판적 자유주의 진영에 강준만, 김영민, 고종석, 진중권을 집어넣고 있다. 김영민은 누구인지는 모르나 나머지 세 사람은 구체적인 사회적 문제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며 활발한 논쟁을 하고 있는 대표적인 논쟁가들이다.
세 사람 모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기는 하나 그중에서도 고종석을 나는 주목한다.
<감염된 언어>는 고종석의 저서이다. 고종석은 성균관대를 비롯한 세 군데 대학에서 법학과 언어학을 배웠고, 영자신문사를 비롯한 언론기관에서 기자생활을 하다 어느날 갑자기 프랑스로 날아 그곳에서 어줍잖은 글쓰기(스스로가 말하길)를 계속하다 환란에 치여 한국으로 돌아와 이후 자유기고자 활동을 했다. 그러던중 한국일보의 편집위원이 되었고, 현재까지도 한국일보에 연재물 '오늘'을 비롯하여 칼럼쓰는데 힘을 바치고 있다.
그 스스로는 자신은 다른 언어로 글쓰기를 시도하다 실패하고 한국어만이 자신이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언어임을 깨닫고 평생 한국어만으로 글을 쓰려고 한다고 말한다. 프랑스어, 영어, 라틴어, 한자어, 일본어 등 그가 조금씩 기웃기웃댄 언어는 많지만 그는 오직 한국어만이 스스로가 잘 구사할 수 있는 언어라 한다. 그는 서문에 복거일, 장정일 등의 문필가들을 예로 들며 자신의 글쓰기는 아직 미숙하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고종석 또한 한국어를 잘 구사하는 글쟁이로는 최고의 위치에 올려도 된다고 본다. 나는 복거일과 장정일을 접하지 않은 채 고종석을 접했지만 그는 정말 글을 잘 쓴다. 고종석의 글에 담긴 생각들도 대부분 나의 그것과 일치하기도 하지만, 그의 글빨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그를 좋아한다. 내가 한국일보를 계속 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한국어에 대해 논하며, 한국어와 한자, 영어 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개진하고 있다. 한글전용인가 한글 한자 병용인가, 영어공용화는 무엇인가, 한국어란 무엇인가, 한국어는 어떠해야하는가 등에 대한 구체적인 사안들에 대해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책의 대부분의 내용에서 나는 그와 생각을 같이 하지만 오직 한 부분, 영어공용화 논쟁에 대해서 만큼은 그의 생각을 따를 수 없다. 그는 영어공용화를 유보적인 입장이긴 하지만 찬성한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그는 영어공용화에 대한 찬성 입장을 표명하고 있지만, 나는 그의 논리전개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면서도 한편으로 이건 아닌데 하는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영어공용화를 한다고 해서 한국어를 폐기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공용화가 이루어진다면 과연 한국어가 그 틈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소수의 민족주의자들만이 한국어를 사용하며 오직 박물관 언어로 보존하기에 급급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땅에서 영어과열현상은 지금으로도 족하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공용화를 선언해버린다면 한국 부모들의 교육열을 참고로 했을 때 이 땅에서 한국어는 쓰레기장 행이다. 고종석은 이 책에서 언어는 도구일 뿐 사고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나, 사고를 규정짓지는 않는다고 말하지만, 과연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사고를 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가 지금까지 이루어온 문화유산과 업적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가 라는 의문이 든다. 반드시 고전소설이 아니더라도 현대 소설을 영어로 바꾸어 읽을 때 사람들은 지금과 같은 소설속의 감정과 느낌을 그때에도 똑같이 느낄 수 있을까? 난 아니라고 본다.
<감염된 언어>는 이 땅을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한국어를 사용하는 이들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너무도 모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