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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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안 가결로 인해 직무정지된 노무현 대통령이 관저에서 열심히 보는 책이 김훈의 '칼의 노래'였다. 나는 '칼의 노래'를 산다는 것이 서점에서 잘못 집어 카운터에 올려놓고 계산 다 끝낸게 다시 바라보니 '현의 노래'였다. 웃지못할 실수를 하고 말았지만 이미 끝난 계산이야 어쩌랴. 돈은 한정되어 있고 '현의 노래'를 계산한 마당에 '칼의 노래'까지 살 수는 없지. 어쩔 수 없이 '현의 노래'를 먼저 읽기로 결정. 아직까지 '칼의 노래'는 읽지 못했다.

오랜 세월 기자생활로 글과의 끊임없는 소통을 해왔던 작가 김훈은 그의 수십년(?)의 글쓰기와는 다른 형태의 글쓰기인 소설로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칼의 노래'가 2001년 동인문학상을 받은 것인데, 그 전에도 김훈은 '너는 어느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밥벌이의 지겨움' 등으로 이미 주목을 받기 시작한 글쟁이였다.

어쨌건 그가 너도나도 다 아는 문학인 반열에 오른 것은 그의 소설 '칼의 노래'다. 더군다나 노무현 대통령이 이 책을 읽고 있다하여 더욱 유명해졌다.

'현의 노래'는 '칼의 노래'에 이어 김훈의 두번째 소설이다. 첫번째 것이 이순신을 다루었다면, 두번째 것은 가야의 악사 우륵을 다루었다.

제목은 '현의 노래'라고 했으나 이 책을 읽는 내내 듣는 생각은 왜 제목이 '현의 노래'일까 라는 물음뿐. 오히려 이 책에는 '현'보다는 '칼'이 더 많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칼의 노래2'인데... 글을 다 읽고 난 지금도 마무리가 현으로 끝났기 때문에 '현의 노래'라는 제목에 그저 고개를 끄덕끄덕 해줄 뿐이지 오히려 비중은 칼이 더 높았다는 생각이다.

한편, 책의 내용보다는 김훈의 문장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의 소설을 보면 문장을 이루는 단어나 어조가 마치 노자의 도덕경이나 장자의 장자를 읽고 있는 듯, 물 흐르는 듯한 구성을 갖추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는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가야의 악사 우륵과 대장장이 야로를 통해서 그대로 드러난다.

"소리는 본래 살아 있는 동안만의 소리이고, 들리는 동안만의 소리인 것이요. 집사장께서 이승과 저승의 사이를 헤아리지 못하시는구려. 살아있는 동안의 이 덧없는 떨림이 어찌 능침을 편안케 하고 북두를 전정시킬 수가 있겠소. 소리가 고을마다 다르다 해도 쇠붙이가 고을들을 부수고 녹여서 가지런히 다듬어내는 세상에서 고을이 무너진 연후에 소리가 홀로 살아남아 세상의 허공을 울릴 수가 있을 것이겠소? 모를 일이오. 모를 일이로되, 소리는 본래 소리마다 제가끔의 울림일 뿐이고 또 태어나는 순간 스스로 죽어 없어지는 것이어서, 쇠붙이가 쇠붙이가 소리를 죽일 수는 없을 것 아니겠소?" (우륵의 말)

"병장기는 본래 그러한 것입니다."
"흘러서 끝이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과 같은 것입니다."
(야로의 말)

그의 문장에는 힘이 들어가 있지 않고, 애써 무엇을 수사하려고 하지도 않으며, 그저 힘을 쭉 뺀 채 화선지에 붓을 흘리듯 하다. 꾹꾹 연필로 눌러 쓴 글이라고는 하나, 실제로 그의 문장엔 힘이 없다. 마치 소설속에서의 나라의 길과, 병장기의 길, 소리의 길을 보는 듯 하다. 글의 내용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할지라도 글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김훈의 문체를 보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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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된 언어 - 국어의 변두리를 담은 몇 개의 풍경화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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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는 '진보주의자'나 '보수주의자' 많지만 '자유주의자'라 칭할 만한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미소양대국간의 이데올로기 논쟁이 사실상 끝났음에도 이 땅에서는 진보와 보수의 싸움이 계속되어 왔고, 그것은 한편 온당해 보인다. 이념논쟁은 종식되었지만 이념이 종식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들의 싸움은 온당하지 않다. 그들은 진보와 보수라는 이름으로 싸우고 있지만 실상 그들이 진보이고 보수인지는 의문이기 때문이다. 온건한 보수와 좀더 강렬한 보수와의 싸움으로 보는 것이 더 정직해보인다. 지금에 와서 그들 진보와 보수는 '실용주의자'라고 자청하고 있지만 실용주의에도 이념은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또한 이념은 종식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념은 언제까지고 종식되지 않는다. 실용주의는 단지 내용을 담아내는 도구일 뿐이지 내용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릇이 바뀐다고 내용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내용물은 언제고 그대로 있다.

잡설이 길었다. 이땅의 진보와 보수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양진영을 향해 쓴소리를 내뱉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이 '자유주의자'이다.

일본 가나안대 교수였으며 아마도 현재 서울대 객원교수로 와있는 재일교포 윤건차 교수의 저서 <현대 한국의 사상흐름>에서는 한국의 지식인 지도를 그리면서 비판적 자유주의 진영에 강준만, 김영민, 고종석, 진중권을 집어넣고 있다. 김영민은 누구인지는 모르나 나머지 세 사람은 구체적인 사회적 문제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며 활발한 논쟁을 하고 있는 대표적인 논쟁가들이다.

세 사람 모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기는 하나 그중에서도 고종석을 나는 주목한다.

<감염된 언어>는 고종석의 저서이다. 고종석은 성균관대를 비롯한 세 군데 대학에서 법학과 언어학을 배웠고, 영자신문사를 비롯한 언론기관에서 기자생활을 하다 어느날 갑자기 프랑스로 날아 그곳에서 어줍잖은 글쓰기(스스로가 말하길)를 계속하다 환란에 치여 한국으로 돌아와 이후 자유기고자 활동을 했다. 그러던중 한국일보의 편집위원이 되었고, 현재까지도 한국일보에 연재물 '오늘'을 비롯하여 칼럼쓰는데 힘을 바치고 있다.

그 스스로는 자신은 다른 언어로 글쓰기를 시도하다 실패하고 한국어만이 자신이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언어임을 깨닫고 평생 한국어만으로 글을 쓰려고 한다고 말한다. 프랑스어, 영어, 라틴어, 한자어, 일본어 등 그가 조금씩 기웃기웃댄 언어는 많지만 그는 오직 한국어만이 스스로가 잘 구사할 수 있는 언어라 한다. 그는 서문에 복거일, 장정일 등의 문필가들을 예로 들며 자신의 글쓰기는 아직 미숙하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고종석 또한 한국어를 잘 구사하는 글쟁이로는 최고의 위치에 올려도 된다고 본다. 나는 복거일과 장정일을 접하지 않은 채 고종석을 접했지만 그는 정말 글을 잘 쓴다. 고종석의 글에 담긴 생각들도 대부분 나의 그것과 일치하기도 하지만, 그의 글빨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그를 좋아한다. 내가 한국일보를 계속 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한국어에 대해 논하며, 한국어와 한자, 영어 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개진하고 있다. 한글전용인가 한글 한자 병용인가, 영어공용화는 무엇인가, 한국어란 무엇인가, 한국어는 어떠해야하는가 등에 대한 구체적인 사안들에 대해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책의 대부분의 내용에서 나는 그와 생각을 같이 하지만 오직 한 부분, 영어공용화 논쟁에 대해서 만큼은 그의 생각을 따를 수 없다. 그는 영어공용화를 유보적인 입장이긴 하지만 찬성한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그는 영어공용화에 대한 찬성 입장을 표명하고 있지만, 나는 그의 논리전개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면서도 한편으로 이건 아닌데 하는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영어공용화를 한다고 해서 한국어를 폐기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공용화가 이루어진다면 과연 한국어가 그 틈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소수의 민족주의자들만이 한국어를 사용하며 오직 박물관 언어로 보존하기에 급급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땅에서 영어과열현상은 지금으로도 족하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공용화를 선언해버린다면 한국 부모들의 교육열을 참고로 했을 때 이 땅에서 한국어는 쓰레기장 행이다. 고종석은 이 책에서 언어는 도구일 뿐 사고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나, 사고를 규정짓지는 않는다고 말하지만, 과연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사고를 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가 지금까지 이루어온 문화유산과 업적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가 라는 의문이 든다. 반드시 고전소설이 아니더라도 현대 소설을 영어로 바꾸어 읽을 때 사람들은 지금과 같은 소설속의 감정과 느낌을 그때에도 똑같이 느낄 수 있을까? 난 아니라고 본다.

<감염된 언어>는 이 땅을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한국어를 사용하는 이들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너무도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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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얼단상 - 한 전라도 사람의 세상 읽기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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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된 언어>에 이어 고종석의 또다른 저서 <서얼단상>을 읽었다. 부제로 '한 전라도 사람의 세상 읽기'라고 달았듯 그는 이 땅에서 전라도인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이땅에서 전라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서얼'과 같은 삶이라고 한다. 아버지는 같으나 어머니가 다른, 즉 배다른 어머니를 둔 서자는 적자와는 달리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한다. 태생이 천한지라 그는 비록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기는 했지만, 이미 태어남과 동시에 사회적 불평등을 안고 있다. 이 땅에서 '전라도'가 그렇다. 반면 경상도는 그렇지 않다. 경상도는 이 땅에서 오랜 세월동안 주류였고 앞으로도 주류다. 경상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적어도 보통이상의 삶을 의미한다. 이 땅에서 개인의 삶에 학벌만큼이나 사회적으로 크게 작용하는 것이 지역주의다. 천박한 전라도인과는 달리 경상도인은 이미 태생과 함께 우월함을 지닌다.

고종석은 이 땅에서 전라도인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를 기본적으로 고찰한 후 이와 함께 자신의 삶과, 다른 전라도인의 삶의 경험에서 그 흔적들을 하나하나 찾아낸다.

선거 때면 이 나라에서는 평소에는 그나마 잠잠하던 지역주의가 기승을 부린다. 전라도와 경상도로 구분된 지역주의는 그들 각자가 지지하는 후보에게 몰표를 행사함으로써 막을 내린다. 해가 갈수록 조금씩 나아지는 양상을 보이고는 있으나 아직 멀었다. 고종석은 '신분제로서의 지역주의'라는 첫 글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한국의 지역주의는 영남과 호남의 '대립'을 큰 틀로 삼는다. 여타 지역의 지역주의는 이 큰 틀에서 파생된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또는 맥락에 따라 영남은 '비호남'으로 확장될 수도 있고, 드물기는 하지만 호남이 '비영남'으로 확장될 수도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종주의가 그렇듯, 영남 대 호남의 '대립'도 대칭적인 것은 아니다. 다시말해 두 지역 주민집단이 지닌 지역주의가 동일한 질의 것은 아니다.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여남의 지역주의는 패권적이고 적극적이고 공격적인데 비해 호남의 지역주의는 반작용적이고 소극적이고 방어적이다."

이어 그는 이런 말을 덧붙인다.

"그런데 인종주의라는 것이 우월하다고 인정되는 인종이 열등하다고 인정되는 인종에게 갖는 태도와 감정을 주로 가리킨다면, 지역주의도 우월하다고 인정되는 지역 주민집단이 열등하다고 인정되는 지역 주민집단에게 갖고 있는 태도와 감정을 주로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영남에 대한 호남의 지역주의보다도 호남에 대한 영남의 지역주의가 더 전형적인 지역주의다."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한국 사회의 지역주의에 대해 이보다 심정적으로 정확히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논리적인 명쾌함이 흐릿하기는 하지만 모든 것이 논리적 근거를 뒷받침으로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그의 해석은 저널리스트로써, 또 이 땅의 지식인으로써 오랜 세월 관찰해왔던 그의 시각을 통해 축적된 내공을 토대로 하고 있다.

이 글에서 뿐만 아니라 나는 고종석의 글을 보면서 새롭게 깨닫는 바가 너무나도-'정말로'로 표현되기에는 '너무나'많기에 '너무나'로 표현했다- 많다. 그는 새로운 지식을 내게 전달해주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보다는 내가 보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전달해준다. 그것은 아직 내공이 약해 볼 수 없는 무대 뒷면의 것들이다.

그는 스스로 '희미한 우파'라고 하고, '자유주의자'라고 하지만, 우파가 되기에는 그는 이미 태생적으로 자격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이미 서얼이기 때문이다. 자칭 우파라 하지만 사실상 그는 진보적 자유주의자로 분류되는 진중권이나 강준만과 오히려 닮은 꼴이다. 나는 스스로 '좌파 자유주의자'라고 생각하지만, 나의 생각이나 행동은 오히려 우파라 자칭하는 그에게 손톱만큼도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자신을 우파라 칭한다면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그는 우파이기에는 너무나 왼쪽으로 걸어왔다.

고종석의 글은 물 흐르는 듯한 자유연상적 글쓰기의 형태를 지니고 있고, 문장과 단어가 깔끔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 조심스럽고 약간은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김병익보다는 덜 방어적이지만, 거침없는 '전투적 글쓰기'-고종석은 이 단어가 껄끄럽다고 한다-를 하고 있는 진중권이나 강준만보다는 확실히 방어적이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 그의 글은 김규항의 글에서 느껴지는 비장미는 아니지만 김규항만큼이나 현실에 천착되어있다. 경험적인 내용들을 바탕으로 두고 있다는 말이다. 나는 그의 글쓰기가 좋다. 김규항, 진중권, 강준만, 고종석 네 사람은 나를 항상 질책한다. 너는 왜 그것밖에 안되느냐고. 군 입대전까지 하던 글쟁이 짓을 지금은 안하고 있다. 삶이 너무 힘겹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이런 핑계를 들어 나는 당분간 글쟁이 짓을 미루려고 한다. 기껏해야 읽은 책에 관해 끄적이는 정도가 다 일 터다. 하지만 내가 글쟁이를 그만둔 것은 아니다. 비록 못쓰는 글이지만 나는 적어도 잘쓰려고 노력은 하고 있기 때문이고, 나이 먹은 뒤에는 나만의 문체가 드러났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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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마르크스 - 그의 생애와 시대
이사야 벌린 지음, 안규남 옮김 / 미다스북스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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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책들에 비해 꽤 오랜시간에 걸쳐 읽은 책이다. 이 책은 쉽게 읽히지가 않아 한번 손에 잡으면 오래토록 쥐고 있을 수가 없었다. 칼 마르크스에 대한 평전임을 내세우고 있는 책이고, 실제로 평전의 내용을 담고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다른 사상가들의 평전보다는 어렵다. 그의 생애라는 것이 사상을 논하지 않고는 펼쳐보일 수 없기에 이책은 평전임에도 상당부분 사상이 들어가 있다.

저자는 77년에 쓴 책의 서문에서 이 책을 쓴지 40년 가까이 됐다고 한다. 그렇다면 37년에 이 책의 초판이 나온 것인데 당시 저자 이사야 벌린이 30살무렵이라고 하니 저자 또한 대단한 철학자였다. 그 젊은 나이에 마르크스를 꿰뚫고 그의 평전까지 쓸 정도였으니 말이다. 저자는 본래 이 책을 낼 때 마르크스의 경제, 정치, 사상에 대한 부분을 상당부분 집어넣으려고 했으나 출판사측의 요구로 지적전기에 중점을 두기로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도 500쪽 넘는 분량으로 꽤 두꺼운 편인-평전치고는 두껍다고 할 수 없지만-이 책이 두세배 가량 늘어날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이 책은 서론, 청소년기, 정신철학, 청년 헤겔학파, 파리, 역사적 유물론, 1848년, 런던에서의 망명생활, 인터내셔널, 붉은 테러박사, 황혼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르크스에 있어 사상적 전환점이 되는 시기를 기준으로 차례를 나눈 듯 하다.

이 책이 읽기에 어려운 것은 마르크스의 어렵고 딱딱한 사상때문만은 아닌 듯 하다. 저자 이사야 벌린은 평전쓰기로 유명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저자의 문체가 난해하기 때문에 책읽기가 퍽퍽한 것은 아닌듯하고 아마 번역의 문제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나의 무지함으로 비롯된 퍽퍽함을 일정부분 번역자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를 확신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원전과의 비교는 불가능하고, 번역체가 딱딱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마르크스에 관한 책들 중에서는 이 책이 그나마 쉬운 책에 속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르크스의 생애에 대해 알고 싶다면 다른 책도 읽기 힘든건 매한가지이니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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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야 미친다 - 조선 지식인의 내면읽기
정민 지음 / 푸른역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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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의 지식인들을 다뤘다는 점에서, 어려운 한자어구들이 등장하는 책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베스트 셀러에 오를만한 책은 아니었음에도 이 책이 그렇게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은 아마도 제목의 대담성 때문이리라.

'미쳐야 미친다'는 제목은 한자어 '불광불급(不狂不及)'에서 나온 말로, 세상에 미치지 않고서 큰 일을 할 수는 없다는 메세지를 품고 있다. 이책은 이래저래 취업도 어렵고, 살아가기 팍팍한 세상에 '성공'이라는 모든 사람들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소재를 건드렸다는 점에서 '잘 팔리는 책'의 잠재성을 갖고 태어났다.

물론 이 책은 최근 몇 년간 출판가, 서점가 불황에도 불구하고 잘 나가는 책인 '처세술'에 관한 책은 아니지만, 그것과 모티브를 공통분모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잘 팔리는 책'이 되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성공하기를 열망하고, 무엇엔가 미치기를 열망한다. 이 책은 무언가에 미침으로써 성공을 도모할 수 있다는 문구를 던진 것이다. 하지만 책에 등장하는 이들의 삶은 당대의 소외된 지식인들이라는 점에서-물론 그들의 이름이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있지만 당시에는 주류 지식인들이 아니었다-미침으로써 성공할 수 있다는 책의 제목이 품고 있는 메세지는 얼핏 책의 내용과 모순되어 보인다.

하지만 '큰일'이라는 것이 굳이 '성공'이라는 단어와 일치하지는 않다고 본다면, 이 책의 제목과 내용은 들어맞는다. 성공은 하지 못했지만 큰일을 도모할 수는 있었다?

허균, 권필,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정약용, 김득신, 노긍, 김영 등은 당대의 마이너리티들이었다. 책 속에 등장하는 이들의 에피소드는 '정상적임'과 '평범함'을 벗어난다. 어떤 이는 싸이코 기질이 있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들은 각자 무엇엔가 미쳐있음으로써 이 시대에까지 이어지는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죽은 뒤에 삶이 더 빛난 던 것이다.

내용언급은 이쯤에서 그만두고, 이 책을 읽은 뒤의 느낌을 말하자면, 아쉬움이 크다고 하겠다. 등장하는 인물들이 너무 많은데다 그 내용은 짧아 이들의 삶의 진수를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많다는 이야기다. 한시를 읽으면서도, 지식인들의 삶의 에피소드를 읽으면서도 나는 가슴에 뭔가 퍽 와닿기보다는 눈으로 흘려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무릇 고전이라는 것은 후대에 재차 읽음으로써 새롭게 다가와야하는 것인데, 이 책은 그저 고전의 겉모습만을 쑥~ 핥고 지나갔다는 느낌이다. 그다지 두껍지 않은 책에 많은 인물을 다루려한 것이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박 겉핥기라도 이들을 소개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지금으로썬 큰 수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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