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플러 & 엘륄 : 현대기술의 빛과 그림자 지식인마을 4
손화철 지음 / 김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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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인 마을 시리즈를 읽다보면 관심이 없던 인물에게도 관심이 생긴다. 이 책의 주인공인 두 사람 중 한 명은 이름은 들어봤지만 그닥 관심이 없던 사람이고, 한 명은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듣보잡이었다. 전자가 제1의 물결인 농업 혁명과 제2의 물결인 산업 혁명에 이어 지식정보사회가 도래한다며 빨리 그 물결을 타라고 주문했던 엘빈 토플러이고, 후자가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이 되어버린 현대 기술 속에서 인간 역시 기계가 만들어놓은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자율적으로 뭔가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상실했다고 본 자크 엘륄이다. 이 책을 읽은 후 익히 알고 있던 토플러보다는 듣보잡이었던 자크 엘륄에게 더 매력이 느껴졌다.

  이 책은 외견상 동일한 비중을 두고 두 사람을 양극단에 놓고 바라보지만, 실질적으로 책장을 넘기다보면 저자는 토플러보다는 엘륄에 무게를 두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과학 기술에 대한 엘륄의 극단적인 주장이 나오고, 엘륄의 시각을 이어받은 이후의 학자들이 하나씩 얼굴을 내민다. 울리히 베크나 허버트 마르쿠제, 포스트먼, 보르크만, 밴더버그 등은 엘륄과 비슷한 선상에서 과학 기술의 폐해를 지적한 인물들이다. 또 앞선 철학자로는 나치스에 가입했다고 하여 마르쿠제가 등을 돌린 스승 하이데거가 등장하는데, 과학 기술 철학은 하이데거에서부터 시작했다고 봐야 할듯 하다.  

  "근대 사상가들은 존재자들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신비롭고 초월적인 질서나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진리가 있음을 부인하고, 이성적인 인간 주체를 절대화했다. 존재자들이 진리를 인간이 밝혀내고, 그 상호연관성과 전체적인 질서까지 인간이 부여한다고 보기 시작한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처럼 존재의 드러냄을 망각한 결과가 현대 기술이라고 보았다. 현대 과학 기술에 대한 비관적인 시각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근대 이후 인간은 과학 기술을 통해 모든 것을 지배하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자연뿐 아니라 인간 스스로도 과학 기술에 지배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엘륄과 마르쿠제의 기술 시스템이 인간의 자율성까지 지배했다는 주장과 닿아있다. 마르쿠제는 창의성이 희생된 이 같은 사회를  '일차원적 사회'라고 칭했다.  

  또, 포스트먼이라는 학자는 엘륄과는 조금 다른 견해를 내놓는데, 엘륄이 현대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사회나 문화, 윤리 등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한 데 비해, 그는 기술이 인간의 사회, 문화, 경제 등의 영역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주목한다. 엘륄의 부정적인 견해와는 달리 포스트먼은 현대 기술의 영향력이 어떤지 깨달으면 인간이 과학 기술에 지배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주장하는 것이 '인간성의 상승'이다. 우리는 새로운 기술을 접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해당 기술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가 무엇이고, 누가 피해를 입는지, 그것을 통해 권력을 잡게 되는 사람은 누구인지 등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도 아직, 해결책 치고는 추상적이다. 보르크만은 우리의 삶과 괴리된 과학 기술을 가지고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 수 없으니, 단순 반복적인 일은 기계에 의존하되, 창조적인 행위는 인간이 직접하게 하는, 포스트먼보다는 좀더 현실적인 이원적 시스템을 제안한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창조성와 의미를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만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에도 사회 구성원 모두가 여기에 동의를 해야 보르크만의 공동체가 형성된다는 난점이 있다. 어떤 일을 창의적인 일로, 어떤 일을 단순 반복적인 일로 볼 것인지 결정하는 것도 사회 구성원의 몫이다.  

  사람들은 새로운 기계가 나올 때마다 그것을 체험하려고 한다. 우리는 과거에 통화 음질이 좋고, 문자만 제대로 가면 만족했다. 하지만, 이제는 누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휴대폰으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MP3를 듣고, 휴대폰을 네비게이션으로도 활용한다. 근대까지의 기술이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발명된 것이라면, 현대의 기술은 사람들의 욕구와 의지와는 상관없이 기술 자체가 스스로 업그레이드하는 경향이 있다. 기술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사람들은 그 기술을 따라가느라 힘겹다. 새로운 기술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회에서 도태된다. 과학 기술은 이미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이건 명확하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앞서 과학 기술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관한 여러 철학자들의 견해를 들어봤지만, 여기엔 아직도 답이 없다.  

  "전문가들은 기술 발전의 방향 설정에 있어 남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이상적인 사회가 어떤 모습일지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하고, 자신들의 일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규명해보아야 한다. 나아가 필요에 따라서는 자신의 생각을 남들에게 설명하고 그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이 경우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상상은 요순시대나 성경에서 묘사하는 천국의 모습보다는 훨씬 더 구체적이어야 할 것이다." 저자의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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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 - 길고양이와 함께한 1년 반의 기록 안녕 고양이 시리즈 1
이용한 지음 / 북폴리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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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도 우리집 창문가에서는 고양이들이 울었다. 아기 울음 소리 같았다. 가끔 혼자 있을 때 고양이들이 창가에서 이렇게 아기 울음 소리를 내면 무섭기까지 하다. 아마도 그 울음 소리가 사람 소리에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에는 정말 아기가 어디서 우는 줄 알았다. 너무 가까워서 집앞에 누가 아기를 버렸나 의심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게 고양이임을 확인하고서 소름이 끼쳤다. 주택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이라 이런 고양이들이 많다. 저자에 의하면 고양이가 아기 울음 소리를 내는 건 발정이 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발정기가 되면 이들은 이성 고양이를 꼬시려고(?) 크게 소리를 내는데, 그게 아기 울음 소리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분명 집앞에서 매일 마주치는 그 녀석들일 것이다. 매일 마주친다고 해도, 나는 고양이들과 매일 마주치지만 내가 마주치는 고양이가 매일 같은 고양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놈이 그놈 같이 생겼고, 날카로운 눈빛을 빤히 쳐다보는 것도 무섭고 해서, 자세히 들여다보지는 않는다. 언제나 녀석들은 음식 쓰레기통을 뒤지거나, 주차된 승용차 아래에서 놀다가 나를 보고 도망가곤 한다. 우리집 주변에는 몇마리의 길고양이들이 있을까. 저자는 동네에서 1년 4개월 동안 20여 마리의 고양이와 만났다고 한다. 그 중 자신이 일일히 이름을 붙인 일부 고양이의 탄생과 죽음을 목격하기도 했다.    

  이 책을 읽으며 알게 된 사실인데, 길고양이들은 자기들의 영역을 설정해놓고 해당 구역에서만 논다고 한다. 다른 고양이가 영역을 침범해도 너그럽게 봐주는 고양이도 가끔 있는 반면, 제 영역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고양이들도 있다. 저자와 동네 세탁소 주인처럼 정기적으로 밥을 챙겨주는 사람들을 만나면 이 길고양이는 적어도 생존을 위해 위험한 짓은 하지 않아도 된다. 나도 책을 읽고 시간을 내어 고양이 밥을 한번 챙겨봐줄까도 생각했지만, 아침 일찍 나가 늦은 저녁이나 밤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오는 나로서는, 그들에게 시간을 내어 밥을 주기가 어려웠다.

  이 책은 단순히 주변의 길고양이를 관찰한 글이 아니다. 아주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살아왔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길고양이와 만나고 부대낀 과정을 글로 묘사하고, 그들을 동네 주민으로 인정한다. 사람들은 마땅한 이유없이 고양이를 싫어하고, 고양이의 수가 늘어나면 인간이 피해를 입는다고 생각한다. 고양이를 마녀나 악의 상징으로 여기기도 한다. 모두 근거 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길고양이를 '도둑 고양이'라 부르는 것도 억울하다. 기껏해야 사람들이 먹고 버린 음식물 쓰레기를 뒤적거리는 것이 다인데, 도둑 고양이란다. 아무 것도 훔친 적이 없고, 훔칠 줄도 모른다. 그들은 누군가 먹다버린 음식물을 찾아 배를 채우며 생을 연명한다.  

  "고양이도 인간과 똑같이 지구의 생명체로 태어나 같은 지층 연대를 살아가고 있다. 고양이는 외계의 생명도 마녀의 동물도 아닌 존재로 그저 우리 곁에 살아갈 뿐이다. 잘못이 있다면 하필 전 세계에서 길고양이가 가장 천대받는 한국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는 것. 한국이란 곳에서 길고양이는 늘 두려움과 불안, 배고픔으로 떨고 있다. 사실 길고양이의 세계를 알기 전까지 나 또한 고양이가 두려움에 떨고 있든 말든 그냥 무관심했었다. 녀석들을 적으로 여기지도, 친구로 여기지도 않았다. 그저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고양이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자 녀석들이 한국이란 곳에서, 더구나 도심이란 공간에서 얼마나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하며 약자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길에서 아무렇게나 퍼질러 있어도 마냥 좋던 계절이 갔다. 이제 아침, 저녁으로 제법 쌀쌀하다. 곧 추운 겨울이 온다. 고양이도 추위를 탄다. 털이 있는 동물이라고 추위를 타지 않는 건 아니다. 많은 고양이들이 길거리에서 로드킬을 당하지만, 추워서 덜덜 떨다 먹을거리를 구하지 못해 죽는 경우도 많다. 이 책을 통해 동네 길고양이들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매일 그들을 만나지만 길고양이의 세계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날부턴가 그들의 생김새를 좀더 자세히 관찰하고, 눈을 마주치고 있다. 저자처럼 오랜 시간 고양이와 함께 놀아주지는 못해도, 길고양이 한 마리 데려다 키우지는 못해도, 통조림 하나, 소세지 하나 사다주면서 만남을 시도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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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리요 2009-09-14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샀는데..
밀린 책들이 많아서 언제 읽게 될지는 모르겠네요. ㅎ

가끔 아프님 올리는 글, 눈팅만 하다가 오늘은 안부겸 짧은 인사 겸해 남기고 갑니다.
좋은 한주 시작하세요.^^

마늘빵 2009-09-14 09:18   좋아요 0 | URL
^^ 저도 밀려있는 책들도 많고, 리뷰 안 쓴 책들도 많고... 이 책,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집니다.

카스피 2009-09-14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양이들이 주인한테 버림받아서 길 고양이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요놈들 스스로가 발정기떄 집을 나가 안돌아오면 길 고양이가 됩니다.흔히들 고양이는 주인 얼굴 3일만 안보면 주인 얼굴을 잃어버린다고 하니까요.
저도 요렇게 몇놈 잃어버렷지요 ㅜ.ㅜ

마늘빵 2009-09-14 22:19   좋아요 0 | URL
네, 주인한테 버림받은 길고양이는 더 살기 힘들대요. 야생을 겪어보지 않아서, 알아서 쓰레기통 뒤지거나 먹을거 구하는 방법도 모르고, 영역다툼에서도 밀리고. 어쿠. 카스피님도 고양이를 잃어버리셨군요. 그냥 그 놈들이 나가버리다니...
 
세계시민주의 - 이방인들의 세계를 위한 윤리학 우리 시대의 이슈 총서 1
콰메 앤터니 애피아 지음, 실천철학연구회 옮김 / 바이북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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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고 영향을 줄 수 있는 개개인이 있다면 우리는 그에게 책임의식을 느껴야 한다. -18쪽

모든 인간은 동일하다.(아우렐리우스)-20쪽

세계시민들은…지구의 모든 사람을 단일한 가계의 자손으로 간주하고 세계를 하나의 국가로 간주한다. 다른 수많은 합리적 존재와 더불어 세계시민들은 한 국가의 시민들로서, 자연의 일반 법칙에 따라 전체의 완전성을 함께 도모하면서도 각자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복지에 몰두한다.(<토이체 메르쿠어>지에 게재된 ‘독일의 볼테르’라 불리던 크리스토프 빌란트의 1788년 논문에서)-21쪽

전쟁을 없애려면 애국주의를 없애라.(톨스토이)-23쪽

세계시민주의는 다음과 같은 단순한 생각에서 출발한다. 민족 공동체에서처럼, 인류 공동체 차원에서도 공존의 습성을 길러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때 공존의 습성은 함께 살아가기와 연대하기를 위한, 전통적 의미에서의 대화다. -27쪽

친절이라는 개념 그 자체는 가치를 담고 있으며, 따라서 행위 지침이 된다.-76쪽

나는 자신의 믿음과 욕망에 따라 행위하는 개인에서 출발했다. 거기에서 출발했다면, 그런 한 개인으로서 내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가치들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인으로서의 우리를 이끄는 것이라고 가치들을 파악할 게 아니라, 자신의 삶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이끄는 것이라고 가치들을 파악해야 한다. -77쪽

의미란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힐러리 퍼트넘)-77쪽

사람들은 흔히 상대주의가 우리를 관용으로 이끌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주의를 권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행하는 것이 옳은지 서로에게서 배울 수 없다면, 우리 사이의 대화는 무의미할 것이다. 그와 같은 상대주의는 대화를 장려하기는커녕, 단지 우리를 침묵하게 할 뿐이다.
-83쪽

실증주의자는 다음과 같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즉 우리가 사실에 관해 의견을 달리할 때 우리는 사물의 존재 방식을 통해 해결할 수 있지만, 가치의 경우에는 우리 주장을 일치시켜 줄 아무런 근거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생각을 인정한다 해도, 어떤 식으로든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세계의 존재 방식에 대해 우리가 합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증해 준다고 생각할 자격을,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얻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최종적인 합의를 상정하지 말고 이웃이 됐든 이방인이 됐든 모든 사람과 대화해야 한다. -102-103쪽

우리는 가치를 평가하는 언어를 공유하지 못할 수 있고, 동일한 언어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으며, 동일한 가치에도 무게중심을 달리 둘 수 있다. -138쪽

주체나 시민으로서 우리들이 정치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이유는 어떤 관행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하더라도 적어도 관행 자체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143쪽

우리는 왜 그것이 옳은지에 관해서는 동의하지 않더라도, 무엇을 해야 할지에 관해서는 동의할 수 있다. -145쪽

우리가 직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을 옳은 것으로 간주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들이 우리에게 익숙하기 때문이다. -147쪽

수학에서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익숙해질 뿐이다.(폰 노이만)-165쪽

대화는 어떤 것에 대한 합의, 특히 가치에 대한 합의에 도달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익숙해지도록 도움을 주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166쪽

신뢰할 수 있는 세계시민주의라면 차이에 대한 존중을 실제의 인간에 대한 존중과 조화시킨다.-207쪽

당신은 내가 당신이 좋아하는 일에 대해 단순히 참견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걱정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좋아하는 일이 옳다면 나는 당신을 따라 할 것이고, 그르다면 그른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크레메스)-207쪽

우리 세계시민주의자들은 모두가 이미 보편적 진리를 갖고 있다고 확신하지 않더라도 보편적 진리를 믿고 있다. 그것은 우리를 안내하는 진리 이념에 대한 회의론이 아니라,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한 실재론이다. 그러나 우리가 고수하는 하나의 진리는 바로 모든 인간은 다른 모든 인간에 대한 의무를 가진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소중하다. 이것이 우리의 핵심 이념이다. 그리고 이것이 관용의 범위를 명확하게 한정한다. -252쪽

도덕은 철학자들의 발명품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거의 모두의 전망이거나, 전망의 일부다.(버나드 윌리엄스, <윤리학, 그리고 철학의 한계>)-263쪽

사회에서 자신이 속한 작은 집단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공적 관심을 표현하는 제1원리다.(에드먼드 버크)-265쪽

세계시민주의에 대한 진정한 도전은 다른 사람들이 결코 중요하지 않다는 신념이 아니라, 그들이 특별히 중요한 존재는 아니라는 신념이다. 우리가 이방인들에게 ‘어떤’ 의무를 가진다는 것은 쉽게 합의할 수 있다.-266쪽

3억 명의 인간들이 하루 2달러로 살아가는 반면, 유럽의 소는 하루 평균 2.5달러의 특별세로 살고 있다.(전 세계은행 총재 울펀슨)-292쪽

만약 우리가 세계시민주의의 도전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우리의 대표자들에게 그런 이방인들을 기억해 달라고 말할 것이다. 이방인들이 겪는 고통에 우리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이 아니라, 스미스가 "우리 가슴속에 자리 잡은 이성, 원칙, 양심"이라 부른 것들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가장 부유한 나라의 국민들이 실천을 더 잘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한 도덕적 요구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문명을 더욱 세계시민주의적으로 만든다면 더 넓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그런 도덕적 요구가 될 것이다.-2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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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플러 & 엘륄 : 현대기술의 빛과 그림자 지식인마을 4
손화철 지음 / 김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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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 기술과 현대 기술의 차이 요약
첫째, 전통적인 기술은 다른 상위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만들어지고 사용되었다. 이에 반해 현대에는 기술 발전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둘째, 전통적인 기술 활동에서는 도구보다 장인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현대에는 좋은 기계를 가지는 것이 좋은 결과와 직결된다.
셋째, 전통적 기술은 그 당시의 문화적, 종교적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한 지역의 기술이 다른 지역으로 옮겨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반면에 현대 기술은 문화와 종교를 뛰어넘어 빠른 속도로 퍼진다.
넷째, 전통 사회에서는 특정 기술의 사용이 필수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현대 기술은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을 이루어 거기에 맞지 않는 자를 배척하는 경향이 있다. -84-85쪽

현대 기술의 특징들
1. 기술 선택의 자동성
2. 자기 확장성
3. 일원주의
4. 개별 기술들의 필연적 결합
5. 보편성
6. 자율성-86쪽

(기술의 자율성은) 기술 발전의 속도와 규모가 너무 커져서 사람의 주체적인 결정이 별로 의미가 없어졌다는 뜻이다. 기술 개발자에게는 시장의 상황과 경쟁의 논리에 휩쓸려 자기가 왜 그 기술을 개발하는지 생각할 여유가 없다. 게다가 최첨단 기술은 수많은 세부 기술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개별 공학자가 수행하는 연구나 작업은 전체 프로젝트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렇게 개발된 기술을 사용하는 소비자 역시 자신에게 그 기술이 필요한지 아닌지를 결정하기도 전에 이미 그 기술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89쪽

현대 기술이 자율적이라는 주장은 기술이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을 이룬다는 주장과 연결되어 있다.-92쪽

그(엘륄)의 주장에 따르면, 기술 시스템은 인간의 자율성에 반하는 방식으로 점점 공고해진다. -93쪽

위험 사회(Risk Society)라고 해도 모두가 똑같이 위험에 노출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전기에 심하게 의존하는 사회에서 정전이 일어났을 때, 부자들은 상대적으로 대비를 잘할 수 있으나 가난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따라서 재산의 보유 정도에 따른 불평등뿐 아니라 위험에 노출되는 정도에 따른 불평등도 고려해야 한다. 또 일단 그 위험이 현실로 드러나게 되면, 그것이 초래할 결과의 끝이 어디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울리히 베크의 주장)-99쪽

엘륄은 기술 발전은 과거에 종교들이 가졌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과거에 종교가 모든 문제에 궁극적인 해결책이 되었던 것처럼 현대에는 기술을 궁극적인 해결책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질병이나 육체적인 고통의 문제가 기술을 통해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은 물론이고 세계 평화와 인류의 공존을 위해서는 기술의 발전이 필수적이라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다. 이러한 믿음은 인류의 진보와 기술의 진보를 동일시하는 데서 비롯된다. 기술의 진보가 필연적인 이유는 그것을 포기하면 더 나은 세상을 이루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101쪽

"전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하라(Think Globally, Act Locally)!"
(환경주의자인 르네 두보스가 1972년에 개최된 UN 인간환경회의에서 말했다는 설과, 역시 환경주의자인 브로어가 환경 보호 단체 ‘지구의 벗’을 설립하며 내건 슬로건이라는 설이 있고, 이것을 엘륄이 사용하며 널리 알려짐.)-103쪽

근대의 사상가들은 존재자들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신비롭고 초월적인 질서나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진리가 있음을 부인하고, 이성적인 인간 주체를 절대화했다. 존재자들이 진리를 인간이 밝혀내고, 그 상호연관성과 전체적인 질서까지 인간이 부여한다고 보기 시작한 것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렇게 존재의 드러냄을 망각한 것의 최종 결과가 바로 현대 기술이다. (중략) 문제는 이 닦달의 대상이 자연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술 사회에서는 사람들 역시 부품으로, 에너지의 출처로 전락하고 만다. 기계 부속처럼 인간도 잔뜩 쌓아놓고 필요하면 가져다 사용하고 시간이 지나면 버린다. 근대 이후의 인간은 모든 것을 지배하려 하지만, 그 지배의 대가는 자기 자신의 철저한 대상화다.

닦달 : 하이데거 용어로 현대 기술이 존재하는 것들의 특성과 다양한 측면들을 무시하고 그들 각각의 의미를 기술적 맥락에서만 한정하는 경향 -108-109쪽

후기 산업 사회에서는 기술적 합리성이 인간 삶의 모든 부분에 적용되게 되기 때문이다. 효율성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는 모든 요소들이 계산되어야 하고 계산될 수 없는 것들은 없는 것으로 치부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의 창조성이나 자율성은 시스템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희생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창의성이 희생된 개인들을 ‘일차원적 인간’이라고 부르고, 이런 사람들을 양산하는 사회를 ‘일차원적 사회’라 부른다.(마르쿠제의 주장)-112쪽

엘륄이 자율적 기술 개념을 통해 현대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사회, 문화, 경제, 윤리 등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면, 포스트먼의 테크노폴리 개념은 기술 사회의 현 상황, 즉 기술이 인간의 사회, 문화, 경제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서술하고 있다. 포스트먼은 사람들이 현대 기술의 영향력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으면 현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고, 예술과 역사 교육을 통한 ‘인간성의 상승’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114-115쪽

(포스트먼이 말하는) 새로운 기술을 접할 때 던져야 할 질문들
1. 이 기술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가 무엇인가?
2. 그 문제는 누구의 문제인가?
3. 그 해결책으로 피해를 받는 개인이나 집단이 있다면 그 중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누구인가?
4. 그 문제를 해결하면 생길 수 있는 또 다른 문제는 무엇인가?
5. 그런 기술적 해결을 통해 부나 권력을 가질 것으로 보이는 개인이나 집단은 누구인가?
6. 새로운 기술 때문에 생기게 되는 언어의 변화는 어떤 것이 있으며, 그 변화를 통해 얻는 것과 잃는 것은 무엇인가?-115쪽

보르크만은 삶의 맥락과 동떨어진 채 효용만을 제공하는 현대 기술을 가지고는 이상적인 공동체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기술과 그 혜택이 우리의 삶을 둘러싸 결국은 삶의 맥락 자체가 없어지게 되는 셈이고, 따라서 인간 고유의 의미와 가치는 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보르크만은 단순 반복적이고 노동 집약적인 작업들은 기계에 의존하되, 창조적인 행위들은 되도록 인간이 직접 할 수 있는 이원적 시스템을 제안한다. 기술은 인간의 창조성과 의미를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117-118쪽

왜 기술의 민주화가 필요하고 어떻게 정당화되는지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 즉, 현대 기술은 워낙 돈이 많이 들어서 기업이나 국가가 개입하지 않고서는 개발되기 힘들고, 그 규모도 크기 때문에 만약 문제가 발생하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힐 가능성이 많다. 따라서 국민은 세금을 내는 사람으로서, 혹은 일정한 위험(risk)에 노출되는 사람들로서 자신들의 의지와 의견을 밝힐 권리가 있는 것이다.-130쪽

기술의 경제학에서는 한 가지 기술을 개발할 때 처음 목표한 단기간의 경제적 가치가 확보되기만 하면 그 기술 때문에 생기는 여러 가지 다른 문제들은 차후에 다른 방식으로 처리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을 취한다. 전기가 필요하면 일단 발전소를 짓고, 그로 인해 생기는 문제는 문제가 발생한 다음에 해결하면 된다는 것이다. (중략)
밴더버그는 기술의 경제학이 정기적인 안목에서 볼 때 결코 경제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보다 폭넓은 시각으로 기술을 발전시키고 경제를 성장시킨다면 당장은 발전의 속도가 느려 보이더라도 궁극적으로는 훨씬 더 적은 비용으로 효율적이면서도 인간적인 기술, 쾌적한 사회, 그리고 건강한 생활권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기술 발전에 있어 인간적, 사회적 가치까지를 모두 고려한 예방적 접근을 시도해야 한다고 역설하는데, 이러한 입장을 기술의 경제학과 대비시켜 기술의 생태학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152쪽

지식은 주어지는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반성하는 것은 그 정보를 보다 폭넓은 식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157쪽

전문가들은 기술 발전의 방향 설정에 있어 남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이상적인 사회가 어떤 모습일지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하고, 자신들의 일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규명해보아야 한다. 나아가 필요에 따라서는 자신의 생각을 남들에게 설명하고 그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이 경우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상상은 요순시대나 성경에서 묘사하는 천국의 모습보다는 훨씬 더 구체적이어야 할 것이다. -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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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9-11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고삼때 제삼의 물결 읽고 눈물을 흘리며 새세상을 알았다고 뛰어다녔으나..
그 이후 이 아저씨가 아무리 봐도 사기꾼 같더라는 ㅎㅎ

아프님도 재미없어보이는 책을 잘도 읽는다.
신기해요.

마늘빵 2009-09-11 22:55   좋아요 0 | URL
제삼의 물결은 대학1학년 때 그 두께에 놀라서 한번 들었다 놓고, 몇장을 넘기다 재미없어서 다시 들었다 놓고 결국 안 읽었다지요. ^^ 알게 된지 얼마 안된 엘륄이 토플러보다 훨씬 매력적입니다. 둘은 극단에 있어요. 그래서 저 둘을 비교한 거고요.

나는 재미없어 보이는 - 보기에만 - 이 책이 무지 재밌었다지요. ^^ 엘륄과 마르쿠제를 더 읽어 보고 싶어요.

무해한모리군 2009-09-12 00:54   좋아요 0 | URL
응 나도 마르쿠제를 더 읽고 보고싶어요. 생각보다 재미있나봐요

마늘빵 2009-09-12 17:41   좋아요 0 | URL
재미없을 수도 있어요. :p
 
과학기술과 사회윤리
홍경남 지음 / 철학과현실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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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그 지식으로서의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나타내고 체계화하는 방법에서 민족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과학을 체계화하고 교육하는 길은 민족에 따라 서로 다르게 구성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10쪽

한국의 과학 기술은 극도로 전문적이고 폐쇄적이며 비사회적인데, 이는 전통적인 한국 사회에서 과학 기술 담당 계층의 의식 구조를 차지한 ‘중인 의식’의 잔재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중인은 양반과 상민의 중간 위치에서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고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지위를 누리면서 전문적이고 폐쇄적인 집단을 형성하였고, 그래서 스스로 사회와는 유리된 존재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식들이 우리 학문 사회에 ‘문과’와 ‘이과’라는 두 가지 문화를 형성하게 하였고, 이 두 가지 문화는 다만 상상 속에 존재하는 허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저자가 [김영식, ‘한국 과학의 특성과 반성’, <근현대 한국 사회의 과학>, 창작과비평]을 옮기며) -10-11쪽

우리의 언어는 다만 세계를 기술하거나 서술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종류의 가치를 가지고 세계를 평가한다. 이렇게 사실과 가치가 얽혀 있음을 직시할 때야 (사실에 관한 지식은 가치에 관한 지식을 가정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우리는 좁은 과학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과학적 실천의 모습을 제대로 그리고 합당하게 그려낼 수 있다.-19쪽

도덕 내지 윤리는 인간 사회의 유지를 꾀하는 것이기에,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인 옳음(정의, 공정)의 기준과 좋음(행복, 선)의 기준을 담아낼 수밖에 없다. 또한 그러한 기준 설정은 특정 사회에만 적용되는 관습을 넘어서 누구나 합리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보편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인간은 누구나 좋음을 추구하고, 이러한 좋음을 보편적으로 실현하기 위하여 옳음은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윤리학은 바로 이러한 좋음이나 옳음의 보편적 기준에 대한 반성적 학문이다. -50쪽

나는 그들과 수많은 대화를 나누고 그들을 이해한다. 이러한 대화와 이해가 가능한 것은 우리 모두가 자유로운 존재임을 서로 알고 있다는 뜻이다. 자유가 없다면 모든 일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질 것이요, 우리의 행위에 대한 근거나 이유를 찾아 대화하고 이해하는 일은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의 자유를 기초로 하여 좋고 나쁜 것과 옳고 그른 것을 가리고 판별하게 하는 삶의 지혜를 찾는 것이 바로 윤리학의 기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6-57쪽

도덕다원주의자는 모든 상충하는 도덕적 체계를 평가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이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도덕다원주의는 여러 다른 도덕적 입장들을 존중하면서도 그것이 모두 똑같은 지위를 갖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중략)
도덕 규범은 그것이 나온 사회 역사적인 맥락에 의거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을 고려하면서도 인간의 가치와 관련하여 어떤 종류의 합리적 평가나 비판도 있을 수 없다는 도덕상대주의의 견해와는 달리 도덕다원주의는 객관적인 가치의 세계가 있음을 받아들인다. -92쪽

도덕상대주의자와 도덕다원주의자는 둘 다 도덕적 다양성과 차이를 인정하면서 좋은 삶을 위한 단일한 포괄적 기준이나 가치 체계나 도덕적 기준이 있을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무리 극악한 도덕 체계라도 받아들이는 이가 있다면 그것을 배제하지 못하는 도덕상대주의와는 달리, 도덕다원주의자는 공통적인 인간성의 측면에 비추어 그러한 것을 배제할 수 있다. 도덕상대주의는 상충하는 도덕적 주장을 판정할 수 없게 하지만 도덕다원주의에서 그러한 충돌의 정도는 완화될 수 있고 상충하는 도덕적 주장들을 저울질하여 합의에 이르게 할 수 있다. 도덕적 가치들은 우리의 공통적인 인간성의 측면에 비추어 서로 비교할 수 있다. 보편적 가치는 없지만 인간 사회를 존속하게 하는 최소한의 가치는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는 인간의 한계 안에 있는 것이다. -92-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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