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하는 테크놀로지 - 과학기술학자들 '기술'을 성찰하다
손화철 외 지음 / 동아시아 / 2009년 3월
절판


기술은 단일한 어떤 것으로 보지 않고, 그 안에 무한한 다양성 그리고 삶의 조건과 결부되는 다양한 조합 가능성이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이 책의 저자들이 공유하는 정신이다. 요약하자면 ‘기술은 어디에나 있으며 무수히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 삶과 관계한다’ 정도가 되겠다. -9쪽

하이데거에게 기술이란 인간이 세계를 특정한 방식으로 대하는 태도이다. 세상의 존재들을 인간에게 유용한 자산으로 변형시키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데, 이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과학이다. -16-17쪽

기술은 물질적 생산에 관련되어 있으며, 인위적으로 무엇을 만들고, 이를 통해서 인간의 가능성과 목적하는 바를 확장한다. (중략)
우리가 기술을 만들지만, 기술은 우리 경험과 인간관계 및 사회적 권력관계를 바꿈으로써 우리를 새롭게 만든다. 어떤 기술은 인간 사회를 더 민주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지만, 다른 기술은 독재자의 권능을 강화한다.-17쪽

근대 기술은 인간 몸의 연장이라기보다는 자연을 대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전근대 기술이 인간의 노동을 도와주는 ‘도구’였다면, 근대 기술은 인간의 노동을 종속시키는 ‘기계’의 외양을 지닌다. -20쪽

기술과 사회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면서 기술의 진보가 사회의 진보로 자동적으로 해석되기도 한다.-21쪽

어떤 노인이 밭일을 하고 있었다. 항아리를 안고 힘들게 물을 떠오고 있었다. 이를 본 젊은이가 왜 편리한 ‘기계’를 쓰지 않는지 물었다. 그러자 대답하기를 "기계는 기계로서의 기능과 효율이 있다. 여기에 마음이 사로잡히면 사람의 본성을 망치게 된다." (<장자>)-34쪽

현대 사회의 문제는 상징 능력과 기술 사이의 균형이 무너진 데에 있다. 말하자면 기술이 너무 빨리 성장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그 문화적 의미를 소화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36-37쪽

기술이란 그 자체로 인간과 세계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기술은 단순히 자연의 모방에서 그치지 않는다. 도구의 제작에서 그치지도 않는다. 인간이 세계에 존재하는 방식을 구현하는 매체로서 기술은 나름대로 세계에 대한 인식을 담고 있다. 그러니 인간의 지각에 영향을 주고, 예술을 보충해줄 수 있다.
-48쪽

현대 기술은 자연에게 에너지와 원자재를 내놓으라고 강요한다. -56쪽

기술은 인간에게 완전히 종속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새로운 무엇인가를 제시하고, 인간의 목적을 이루면서도 새로운 계기들을 만들어낸다. -51쪽

근대에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했던 결과로 자연의 다른 존재자들을 학문과 응용의 대상으로 만들 수 있었는데, 결국 스스로 대상으로 전락했으니 주체는 없어지고 지배하려는 의지만 남은 셈이다. -59쪽

전통 기술은 상위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간의 다른 활동들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취급되었는데, 현대에는 기술의 발전이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 되었다. 또 기술의 제작에 있어서는 자동화를 통해 인간의 개입을 배제하면서, 사용에 있어서는 사용하지 않을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61쪽

기술 사회의 현실은 기술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방식으로 발전하는 것이다.-68쪽

기술은 외부로부터의 어떤 간섭도 용인하지 않으며 어떤 제한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 도덕은 도덕적 문제를 판단하지만, 기술적 문제와 관련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오직 기술적인 기준들만 중요하기 때문이다. 기술적 판단은 인간 행위에 중요한 제약이 되는 윤리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 기술은 스스로를 선과 악의 기준 너머에 놓았기 때문에 더 이상 어떤 제약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오랫동안 기술은 중립적이라고 여겨졌다. 이제 그런 구분조차도 별다른 필요가 없다. 기술의 힘과 자율성은 너무나 공고해져서 이제는 무엇이 도덕적인지를 결정하는 재판관도, 새로운 도덕의 창조자도 기술이다. 그러니까 기술은 새로운 문명의 창조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 기술의 자율성에 직면했을 때 인간의 자율성은 없다. (자크 엘륄, <기술사회>)-69쪽

인간의 가치나 필요는 효율성의 논리 앞에 무력하다. 사실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주범이 사람이다. 모든 제조업에서 자동화를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는 기술의 생산뿐 아니라 소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더 빠른 컴퓨터와 더 얇은 휴대전화가 꼭 필요해서 구입하는 것은 아니다. 필요에 의해 기술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필요를 창출한다. 누가 지하철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것을 그렇게 간절히 소망했던가?-71쪽

기술시대의 인간은 기술과 맺는 다양한 관계들을 더불어 고려할 때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럴 경우 비록 인간 본래의 모습이 축소 혹은 왜곡될 가능성이 있지만, 반대로 전통적인 인간의 영역을 뛰어넘을 수 있는 새로운 인간의 가능성도 동시에 나타날 수 있다. 축소에 대한 반성적 자각이 있다면 그런 전제 위에서 인간의 능력을 확장시키는 기술과 공생을 모색해 볼 수 있다는 것이 아이디 기술철학의 중요한 함의가 아닌가 생각한다-83쪽

(라투르의 기술결정론과 사회결정론 모두에 대한 비판적 시각)
사람이 총을 가짐으로써 사람도 바뀌고 총도 바뀐다는 것이다. 총을 가진 사람은 총을 가지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달라지고, 마찬가지로 총도 사람의 손에 쥐어짐으로써 옷장 속에 있는 총과는 다른 존재가 된다. 즉 총과 사람의 합체라는 잡종이 새로운 행위자로 등장하며, 이 잡종 행위자는 이전에 사람이 가졌던 목표와는 다른 목표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원래는 다른 사람에게 겁만 주려 했는데 총이 손에 쥐어져 있기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식이다.-89쪽

축음기와 전화기의 경우는 기술의 예기치 못한 용도가 그래도 ‘생산적인’ 다른 용도로 전환된 것에 해당한다. 하지만 기술 연구의 결과가 항상 이렇게 행복한 결말을 갖는 것은 아니다. 플라스틱이 처음 등장했을 때 인류는 플라스틱의 내구성에 찬탄을 보냈다. 이 놀라운 문명의 이기가 가진 ‘썩지 않는’ 장점이 미래 환경문제를 일으키는 결정적 원인이 되리라는 점을 예상한 기술자는 거의 없었다. -105쪽

기술 연구 과정에는 기술 자체에 대한 지식만이 아니라 그 기술을 사용할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그 기술에 반응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문화적인 고려와 잠재적인 부작용에 대한 명시적 고려가 필요하다. -106-107쪽

기술 개발이 적극적으로 추진되는 과정에서는 기술이 가진 잠재적 혜택만이 부각되고 불확실한 위험은 축소되거나 무시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신기술이 가져올 위험이 불확실할 때조차 기술 연구자들은 사회적 수준에서 그 위험에 대해 설명하고, 그 위험에도 불구하고 기술 개발을 계속할 것인지 여부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확보하려 노력해야 한다. -108쪽

기술결정론이란 기술은 보다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기술이 그렇지 못한 기술을 대체하는 내부 논리에 의해 발전하는 데 비해 사회는 그렇게 선택된 기술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여러 변화를 겪게 된다는 생각이다. -167쪽

현재 수준의 유전공학은 이처럼 기대효과 이외의 예기치 못했던 효과에 대해 많은 불확실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런 예기치 못했던 효과가 항상 혹은 대부분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의 이미지에 상응할 정도로 끔찍할 것이라는 근거는 없다. …
하지만 긍정적 불확실성과 부정적 불확실성은 확률적으로는 동등할 수 있어도 그것에 대한 우리의 태도나 대응방식이 동등할 수는 없다. … 여기에 생명공학의 위험성을 과대평가하지 않고 냉정하게 판단하더라도 생명공학이 가지고 있는 내재적 불확실성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 그러므로 특정 기술의 사용은 거의 항상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혹은 개인의 수준에서건 사회적 수준에서건 그것이 가져올 유용함과 위험을 저울질하여 선택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계속)-270쪽

(이어서)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유전공학이 가져다 줄 수 있는 많은 잠재적 혜택과 그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많은 경우 미리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다양한 위험 사이에서 사회적 공감대에 기초한 적절한 선택을 수행하는 일이다. 생명공학이 우리에게 기술적인 도전만이 아니라 삶의 방식에 대한 선택을 제기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70쪽

기술의 사회적 책임은 이 사회가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도구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것이다. 그러나 기술이 다루기 쉬운 도구는 아니다. 높은 사회적 이상과 목표가 설정되고 이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희망적 열정이 있을 때 기술이 훌륭한 조력자가 되는 것이지 사회가 목표도 없이 표류한다거나 저급한 목표를 정해 놓고 그것을 따라 가려 한다면 거대한 기술의 힘에 사회가 오히려 휘둘리고 말 것이다. 기술이 자체의 힘으로 도덕적인 사회를 만든다거나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나갈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기술을 잘 선택하고 발전시킴으로써 도덕적인 사회, 행복한 사회를 건설하는 수단으로 활용하여야 한다. -310-311쪽

엔지니어는 어려운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엔지니어는 주어진 문제를 잘 푸는 데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그 문제가 만들어진 사회적 배경이나 역사를 파악하고 필요하면 직접 문제를 제기하거나 만들어내야 한다. 하는 일이 사회적 안전과 직접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 사회의 전문인 집단으로서 엔지니어는 자기가 속한 사회의 이상과 목표를 찾는 데 동참하며, 사회적 이상과 목표에 입각하여 자기가 하고 있는 프로젝트를 면밀히 분석하고, 프로젝트의 결과가 이에 어긋나지 않는지 고민해야 한다. … 기업에서 일하는 엔지니어는 기업이 지나치게 이윤만 앞세운 나머지 사회 안전을 해치지 않는지 견제하여야 한다. 엔지니어는 기업이 만들어낸 제품에 대해 일차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제일 먼저, 가장 정확히 그 잘못을 지적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31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언어의 달인, 호모 로퀜스 - 언어가 춤을 춘다 세상을 다 말하라!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3
윤세진 지음 / 그린비 / 2007년 5월
구판절판


책은 책의 속도와 기능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책은 다른 매체를 배척하는 게 아니라 다른 매체와 접속하는 능력을 증대시킨다. -15쪽

우리말의 ‘오염’을 개탄하는 지식인들 중에는 그 ‘오염’의 원인을 모두 외국어의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있다. 한자가 가져온 오염, 일본말이 가져온 오염, 영어가 가져온 오염…. ‘우리말 오염’을 개탄하는 ‘애국자’들의 비장한 글들을 보며 나의 지저분한 언어 사용을 반성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세계화 시대’가 될수록 우리말의 ‘순수’를 지킨다는 일이 너무나 힘겨워 보인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오염되기 이전의 순수한 우리말을 주장하는 것은 우리 민족이 태초부터 ‘순수한 단일체’였다는 발상만큼이나 근거가 없다. -118쪽

중요한 것은 지배적인 언어를 어지럽게 만드는 것, 즉 지배적인 언어 안에 낯설고 이질적인 언어들을 뒤섞고 그럼으로써 지배적 언어를 변형시키는 것이며, 한 언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언어를 넘나들면서 그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한글과 한자 중에 뭘 선택하는가’라는 사실 자체는 그리 중요치 않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가 쓰는 표현이 ‘영어식 표현이냐 일본식 표현이냐’ 하는 것도 중요치 않다. 그 표현들이 언어의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생성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언어를 ‘오염’시키는 것이 아니라 보다 ‘빵빵’하게 해줄 것이다. -125쪽

영어 공용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릴는 결국, 영어가 보편의 언어이므로 그것을 써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경쟁의 논리다. 전세계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수적으로 절대 소수지만, 세계 질서 속에서 권력을 쥔 제국들이 사용하는 언어이기 때문에, 그것은 ‘지배적인 다수어’가 된다. 영어의 보편성이란, 그런 의미에서 권력과 자본의 보편성인 것이다.-130쪽

브루노의 연구에 따르면, 프랑스의 언어 단일화는 절대국가의 형성과 함께 진행되었다고 한다. 즉 그 과정에서 부르주아 계급이 사용하던 언어가 고상하고 학식 있는 언어로 공식화되고, 상대적으로 민중들이 사용하던 여러 지역 방언들은 부정적이고 경멸적인 의미의 ‘사투리’로 격하된 것이다. 그리하여 원래 ‘이해할 수 없는 말’이라는 의미였던 ‘사투리’라는 단어가 1690년에 발행된 퓌르티에르 사전에서는 ‘보통 사람들의 비속하고 천한 말’이라는 의미로 정의되기에 이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르주아의 언어가 공식 언어, 즉 표준어로 승격함으로써 부르주아들의 정치적 독점을 보장해주었다는 사실이다. -134쪽

첫째, 굶주린 때에 책을 읽으면 소리가 배에 낭랑하여 그 이치와 취지를 잘 맛보게 되어서 배고픔도 느끼지 못하게 되고, 둘째, 차츰 날씨가 추워질 때 읽게 되면 기운이 소리를 따라 유전하여 체내가 편안하여 추위를 잊을 수가 있게 되며, 셋째,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 괴로울 땐, 눈을 글자에 마음은 이치에 집중시켜 읽으면 천만 가지 생각이 일시에 사라지게 되고, 넷째, 감기를 앓을 때에 책을 읽으면 기운이 통하여 부딪힘이 없게 되어, 기침 소리가 갑자기 그쳐버리게 된다. (이덕무, <이목구심서>)-176-177쪽

무릇 글을 읽을 때에는 높은 소리로 읽는 것이 좋지 않다. 소리가 높으면 기운이 떨어진다. 눈을 딴 데로 돌려도 안 되니, 눈이 딴 데에 있으면 마음이 딴 데로 달아난다. 몸을 흔들어도 안 된다. 몸이 흔들리면 정신이 흩어진다. 무릇 글을 욀 때에는 착란하지 말아야 하고 중복하지 말아야 하며 너무 급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너무 급하게 하면 조급하고 사나워서 맛이 짧다. (홍대용, <매현에게 주는 글>)-177쪽

소설가 베게트는 여행에 대해 멋진 정의를 내린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여행을 하는 이유는 꿈이나 영혼 등으로부터 나온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눈이 파란 사람이 세상에 정말 존재하는지, 꿈에서 본 그 황홀한 하늘빛이 어딘가에 정말로 펼쳐져 있는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아무런 목적지도 없이 무작정 길을 떠난다는 것, 그게 여행이라는 거다. -179쪽

텍스트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아직 건설 중인 건물 같은 것이다. 건축가는 자신의 설계도에 따라 건물을 짓지만, 사실 그 건물을 ‘건물’로서 완성시키는 사람은 건축가가 아니다. 건물을 완성하는 건 그 건물 안에서 생활하게 될 거주자의 몫이다. 거주자야말로 건물을 ‘사용’함으로써 건물에 ‘생명’을 부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중략)
그러므로 하나의 텍스트에 숨어 있는 ‘결정된 의미’ 같은 건 없다. 텍스트의 모든 가능한 의미들은 그 텍스트와 접속하는 독자에게 맡겨져 있다. 텍스트라는 건물이 만들어진 시대의 건축 양식에 주목할 것인지, 그 건물이 사용되어온 역사에 주목할 것인지, 아니면 내 나름의 기준으로 건물을 리모델링할 것인지, 그건 독자의 몫이다.-201-202쪽

텍스트를 읽는 것은 텍스트를 내 신체의 일부로 느끼는 것이며, 거기에 하나의 해석을 가하는 것이다. -225쪽

"하나의 텍스트를 이해한다는 것은 낙타가 사자로 변신해야 하는 것과 같다."(니체)-231쪽

나는 알고 있다. 사람들이 어떻게 공리니 정의니 하는 미명으로, 성인군자란 간판으로, 점잖고 성실한 체하는 가면으로, 유언비어와 여론이란 무기로, 구렁이 담 넘어 가는 식의 글로 사리사욕을 채우면서 칼도 없고 붓도 없는 약자들을 숨도 못 쉬게 하는지를. 나에게 이 붓이 없었다면 수모를 받고도 어디가서 하소연할 길조차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깨어났다. 그러기에 늘 이 붓을 들어 기린의 피부 속에 감춰진 마각(馬脚)을 드러내고 있다.(루쉰, <화개집 속편>)-247쪽

페이지(page)라는 말의 어원인 라틴어 ‘파구스’(pagus)는 농부가 일구는 밭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쓰여진 글들이 경작된 밭고랑을 닮은 것도 같다. 좋은 농부의 덕목이 토양과 기후, 경작물에 대한 앎과 성실함, 그리고 뿌린 것 이상을 탐내지 않는 정직함이듯이, 좋은 글을 쓰려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세상에 대한 앎과 자신에 대한 정직함이다. 물론 이때의 ‘앎’이란 추상적이고 단편적인 지식이 아니라 삶 속에서 터득한 직관적이고 구체적인 지혜를 의미한다. 글을 이루는 것은 어떤 법칙이나 현란한 수사, 잡다한 지식이 아니라, 그 사람의 걸음걸이와 세상에 대한 시각, 그가 사랑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 등이다. -247쪽

글은 자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떠날 수 있을 때 시작된다. -251쪽

글을 쓴다는 건, ‘언어’라는 ‘도구’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글쓰기는 자신을 뛰어넘는 실험이자,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모험이며, 다른 이들과 공감하기 위한 공명통이다. 자신의 신체가 공명할 수 있는 만큼 글은 풍요로워지고 자유로워지고 다채로워질 것이다. -293쪽

보통 책을 가지고 있으면 아무리 아끼는 것이라도 남에게 빌려주지 않으면 안 된다. 예전에 동춘 송준길 선생은 남에게 책을 빌려 주었는데 그 사람이 되돌려줄 때 종이에 보푸라기가 생기지 않았으면, 반드시 책을 읽지 않았음을 나무라고 다시 빌려주었다. (이덕무, <이목구심서>)-309-310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라리요 2009-09-14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맘에 드는데요. 아프님 소개라는 것만으로도...
저도 보관함에 담아두기 했어요.^^

마늘빵 2009-09-14 09:21   좋아요 0 | URL
내용 전개가 약간 어수선한 감이 있는데, 도입부를 좀 지나면서 점점 빠져듭니다. ^^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재미있게 읽는 방법 :  이 책에 관한 어떤 이야기도 듣지도 보지도 않고 책을 펼친다.

  가슴이 쿵딱쿵딱 거렸다. 이거 도대체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는거지? 때로는 몇 초의 간격을 두고, 때로는 몇 주의 간격을 두고 메일 놀이(?)를 하는 두 사람에게 빠져 책장을 덮을 수가 없었다. 단숨에 읽어버렸다. 주연 배우 레오와 에미 둘, 조연 하나. 내 부실한 기억력에 의하면 출연진은 이 셋이 전부지만 어쩌면 조연이나 엑스트라가 한둘 더 나올 수도. 

  지인의 추천을 받아 읽었고, 지인에게 추천해줬다. 이 책을 읽은 두번째 지인이 말하길, 너무 가슴이 답답하다, 라고 했다. 어쿠. "왜?" 라고 물어봤다. 들어보니 지인은 읽는 동안 바람난(?) 에미의 남편에게 감정이입했던 것이다. 아니 주인공인 레오와 에미에게 집중해야지 왜 하필 에미의 남편을 선택(?)한거야. 모르겠단다. 자기 남자친구가 에미같이 그러면 화가 날 거 같다,고 했던가. 그래도, 그래도, 이건 소설이잖아. 어쨌든 화가 났단다. 의도치 않은 반응인 걸.  

  서로 생김새도 알지 못하고, 우연으로라도 만난 적도 없고, 어떤 특정 목적을 가지고 익명의 남자(혹은 여자)에게 메일을 보낸 것도 아닌, 두 사람이 어쩌다 이렇게 사랑을 속삭이게 되었을까. 가끔은, 그들의 메일을 훔쳐 읽다가 얘네, 지금 사랑하는 거 맞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아니 어쩌면 지금 사랑이라고 결론짓는 내 생각에게 거꾸로 질문을 던져야 할지도. 호기심이든, 장난이든, 조건만남이든, 목적이 무엇이든 두 사람은 서로의 모니터를 앞에 두고, 서로를 그리워하는 사이가 되었다. 보고 싶어요, 레오. 잘자요, 에미.  

  굿나잇, 굿나잇, 굿나잇, 굿나잇, 굿나잇, 굿나잇, 굿모닝, 굿모닝. 그러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채팅창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상대에게 호감이 생겼을 때는 어떻게. 어린 시절 숱하게(?) 채팅을 하다가 아, 이 사람 참 궁금하다, 그 다음에 드는 생각은, 만나고 싶다, 이다. 이제 우리는 서로의 생김새를 묻는다. 키는 몇인가요, 몸무게는 몇인가요, 파마했나요, 생머리인가요, 어떤 옷을 즐겨 입으세요, 안경은 썼나요, 눈은 큰가요?  마음과 마음으로 오가던 두 사람은 이제 물음과 물음과 물음을 통해 어느새 서로의 몽타주를 그리고 있다. 마침내! 아, 우리 만나요.  

  그래서 만났다. 만났는데 이상하다. 그때 그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나도, 그 사람에게 그때 그 사람이 아닌가보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서로가 서로에게 반할 만한 외양이 아니어서였는지, 아니면 스타일이 문제였는지, 몽타주를 잘못 그린건지, 원인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만난 건 실수였다. 채팅창을 통해서만 계속 인연을 이어가는건데. 그렇게 오랜 세월 메일을 주고 받은 레오는 에미가 보고 싶지 않았을까, 에미는 레오가 보고 싶지 않았을까? 도대체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 건지 궁금한 건 '이들이 만났을까', '만났다면 서로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라는 물음에 닿아있기 때문인지도.  

  미리 이야기해버리면 재미없으니까 여기까지. 분명한 건, 나에게 에미는 무척 매력적인 인물이란 거. 어느날 나에게 이런 메일이 왔(으면 좋겠)다.

  "제목 : 구독 취소. 정기구독을 취소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이메일로 취소 신청을 해도 되겠지요? 그럼, 이만 줄입니다." 

 

댓글(24) 먼댓글(1)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책 선물은 아무나 하나
    from 남은 건 책 밖에 없다 2009-09-04 17:09 
    8월의 어느 여름 밤. 존경하는 B선배와 W를 이태원에서 만났다. B선배가 출판사를 운영하는 L님을 모시고 나왔다. 비록 수준이 좀 높지만(!!) 내가 무척 좋아라 하는 출판사. L님에게 처음 인사드리면서 "출판해주신 좋은 책들 덕분에 행복한 밤들이 꽤 있었다"는 인사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반응이었음에도 불구, 나 멘트가 넘 매끄럽구나, 빠다 바른듯...하면서 살짝 스스로 놀랐던..ㅋ ) 처음에 갔던 멕시칸+
 
 
반딧불이 2009-09-03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방문취소, 아프님의 서재 정기방문을 취소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댓글로 취소신청을 해도 되겠지요? 그럼 이만 줄입니다.>> 이런것도 되나요?

마늘빵 2009-09-04 09:15   좋아요 0 | URL
으흣. ^^

머큐리 2009-09-04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이 책 한 번 읽으려구요..ㅎㅎ 정말 괜찮으려나???

다락방 2009-09-04 08:22   좋아요 0 | URL
읽어보시라니깐요!! (이젠 막 화낸다 ㅎㅎ)

마늘빵 2009-09-04 09:15   좋아요 0 | URL
읽어보시라니깐요!! (이젠 막 화낸다 ㅎㅎ) 2

비로그인 2009-09-04 0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전 이 책이 너무 좋아서 리뷰를 못쓰겠어요. 정말 너무 멋진 연인을 만나 그저 하릴없이 그녀 얼굴만 쳐다보는 그런 사람의 기분이어요.

마늘빵 2009-09-04 09:16   좋아요 0 | URL
일곱번째 파도 리뷰를 쓰려다가, 쓰다가 책을 바꿨어요. 일곱번째 파도는 쓸 수 있으려나. 소설의 느낌을 살려 쓰고 싶었지만, 못 쓰겠더라고요. ^^

다락방 2009-09-04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를 재미있게 읽는 방법은 아프락사스님이 써주셨고,
[일곱번째 파도]를 재미있게 읽는 방법: 반드시, 반드시 새벽 세시를 먼저 읽고 읽는다.

후훗.
저 둘의 순서가 바뀌면 재미는 절반도 안될거에요, 정말.

마늘빵 2009-09-04 09:16   좋아요 0 | URL
딩동댕.

머큐리 2009-09-05 19:20   좋아요 0 | URL
참고로 이 책은 밤에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새벽이면 더 좋고...

또치 2009-09-04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이거 이제야 읽었는데...
레오, 에미, 베른하르트, 모두 다 내 곁 어딘가에 있는 사람들인 것 같아서 마음이 너무 아파요. 출근길에 그 생각하니까 살짝 눈물도 나려고 했어요...
암튼 이건 다 애초에 다락방님, "넛 때문이다" !

마늘빵 2009-09-04 09:46   좋아요 0 | URL
엇, 또치님도 설마 베른하르트에 감정이입한거에요? 그런거에요? ^^

또치 2009-09-04 09:52   좋아요 0 | URL
세 사람 모두에게 다 감정이입이 돼요. 휴, 힘들어.

다락방 2009-09-04 10:55   좋아요 0 | URL
어? 여기에 나 있네요 ㅎㅎ

마늘빵 2009-09-04 11:26   좋아요 0 | URL
여기에 나 없다.

무해한모리군 2009-09-04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so-so였지만,
가슴이 콩닥콩닥 뛰게하는 대목이 있었어요.

아프락사스님은 뵙고 제가 생각했던 이미지랑 너무 똑같아서 놀랐는데~

마늘빵 2009-09-04 09:46   좋아요 0 | URL
엇, 나를 만났을 때 상상했던 이미지랑 같았다고요? ^^ 이게 좋은 건가 나쁜 건가. 흐흐. <일곱번째 파도>보다는 이 책이 더 입이 바싹 마르고, 두근두근 거려요. 두 사람이 구사하는 언어들은 어떻고. 번역 참 잘한듯.

무해한모리군 2009-09-04 11:01   좋아요 0 | URL
목소리는 생각보다 조금 느끼했고 ^^
모습은 생각처럼 부드러운 가운데 단정한 모습이 보였어요~
금요일이니까 칭찬모드~~

마늘빵 2009-09-04 11:25   좋아요 0 | URL
휘모리님도 눈이 크고 맑고 다정다감한 인상이 딱 맞았어요. 금요일은 칭찬모드. ㅋㅋㅋ

레와 2009-09-04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당장 이메일 친구를 만들고 싶어 몸을 부르르르 떨었어요! ㅋㅋ

마늘빵 2009-09-04 11:25   좋아요 0 | URL
메일 주소 입력란에 아무 주소나 쓰고 시도해 보는 건 어떨까요? 스팸 메일이라고 지워버리려나. -_-

레와 2009-09-04 14:14   좋아요 0 | URL
음.. 그건 위험 부담이 너무 커요! ㅎㅎ

무스탕 2009-09-04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요, 아프님 페이퍼의 첫 줄, 붉은 글씨만 읽고 바로 요기로 마우스 내려버렸어요 ^^
아프님 권장대로 아무 소식도 접하지 않고 읽을거에요!!
(눈 감고, 귀 막고 앞으로만 가야지, 꼭!!)

마늘빵 2009-09-04 23:06   좋아요 0 | URL
아하하하, 네, 사전 정보 없이 읽으시는 게 제일 좋아요. 야심한 시각에 두 시간이면 다 보지 않을까 해요. ^^ 분위기 잡고.
 
놀이의 달인, 호모 루덴스 - 이제 베짱이들의 반격이 시작된다!
한경애 지음 / 그린비 / 2007년 5월
장바구니담기


<호모 루덴스> 즉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유명한 책의 저자 호이징가는 중세의 생활은 놀이로 충만했으며, 르네상스의 찬란한 문화 또한 놀이 정신의 산물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 시대는 노동과 생산, 발전을 이상으로 삼고 있다. 많이 만들고 많이 버는 것, 즉 물질적인 것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이러한 삶이 스포츠와 예술 같은 놀이마저 노동으로 만들고 말았다는 호이징가는 탄식한다. -33쪽

전통적인 삶의 방식이 모두 파괴되고 모든 것이 사고파는 상품이 되어버린 이곳에서, 아무도 나의 생존과 미래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공포는 끝없는 노동을 강요한다. 과거 어느 시대와도 비교할 수 없는 물질적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지만, 사람들의 삶은 훨씬 바쁘고 힘들어졌으며 노동은 고통스럽지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되어버렸다. 행복은 끝없이 연기되고, 미래에 대한 공포가 현재를 지배하고 있다. -55쪽

1900년대 초에 미국의 기업가 헨리 포드가 노동자들의 임금을 높여주며 영리하게 제안했듯이, 사람들을 착실한 노동자로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을 탐욕스러운 소비자로 만드는 것이다. (중략)
즐거우면서도 생산적일 수 있는 여러 활동, 그 자체로 예술이고 창조인 장인의 작업, 놀이와 섞여 리듬을 타던 노동은 사라졌다. 이제 ‘노동’은 목적을 향해 달리는 고통스럽고 맹목적인 과정이며, 추방되었던 ‘놀이’는 화려하게 포장된 ‘여가용 상품’이 되어 돌아왔다. -65쪽

자유의 왕국은 궁핍과 외부적인 편의에 의해 결정되는 노동이 끝장나는 곳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칼 맑스, <자본론>)-72쪽

놀이는 무엇이건 ‘노는 것’, 어떤 일을 할 때 취하는 특정한 태도이며, 움직임으로만 포착되는 동사이다. -73쪽

무엇이든 그 자체로 즐기는 태도는 인간의 가장 탁월한 능력이며, 인간은 이를 통해 생각하고 느끼고 반성하고 창조하고 배울 수 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무언가를 진심으로 즐길 수 있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수적이다. 헉, 노는 데도 교육이 필요하다고? 물론이다. 사실 무언가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즐기는 것은 그 자체로 학습일 수밖에 없다. 광장에서 인라인 스케이트를 연습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혹독하게 스스로를 훈련시키는지 생각해보라. 악기 연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피나는 연습을 거듭하던 어느 순간 전문가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칼 맑스가 말했듯이, "작곡과 같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일이야말로 동시에 가장 진지하고 가장 맹렬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에 여가를 뜻하는 그리스어는 ‘학교’(school)의 어원이기도 하다. -75쪽

니체는 놀이야말로 ‘어떤 세계에서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라고 말했다. (중략) 니체는 사는 게 원래 그런 거라고 믿으며 미래를 담보로 현재를 희생하는 자들이 미래마저 고정된 것으로 만든다고 말한다. -79쪽

삶을 노는 것은 삶의 규칙을 바꾸는 것, 규칙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고정된 규칙이 있다고 믿는 순간 놀이는 불가능해진다. 어떤 규칙이건 절대적인 명령이 되는 순간, 놀이는 멈추고 모든 움직임은 지루하게 반복되기 시작할 테니. 놀이는 무엇보다도 규칙을 넘나들고 변신시키는 ‘규칙의 놀이’다.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고정되는 순간 다른 틈새를 만들어 돌파하라. 삶의 규칙들을 놀이하는 것은 우리 삶에서 그 어떤 명령도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이해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즐거움으로만 만들 수 있는 그 틈새가 바로 새로운 흐름을 시작하는 물꼬가 될 것이다.-97-98쪽

행동은 반응이 아니라 창조다.(1968년, 프랑스 파리 벽의 낙서)
혁명이란 일상적이 아닌 것을 일상으로 바꾸어놓은 것이다.(쿠바의 한 건물의 낙서)-116쪽

현실의 규칙을 몸에 새긴 놀이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듯이, 우리가 ‘노동하거나 돈을 쓰라’는 욕망에 한없이 끄달릴 때 노동의 세계는 더욱 견고해진다. -117쪽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해한모리군 2009-09-03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문학 인생역전 으흐흐흐

마늘빵 2009-09-03 10:22   좋아요 0 | URL
로또로 안돼서 인문학으로 인생역전 해보려고... ㅋㅋ

머큐리 2009-09-03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탈주하라는 말인데...글처럼 쉬운일은 아닌듯해서...흠

마늘빵 2009-09-03 10:22   좋아요 0 | URL
말은 쉬운데 이게 참... 그쵸.
 
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 - 길고양이와 함께한 1년 반의 기록 안녕 고양이 시리즈 1
이용한 지음 / 북폴리오 / 2009년 8월
품절


아이가 쓰레기봉투를 헤집는 추냥이를 발견하고는 "와아! 고양이다, 고양이!"하면서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아이의 손을 잡아채면서 한마디 던졌다. "도둑고양이야, 도둑고양이, 도둑고양이는 나쁜 고양이야!"
졸지에 추냥이는 도둑 누명을 뒤집어썼다. 음식물 쓰레기는 엄연히 사람이 버린 것이고, 추냥이는 그저 그것을 헤집었을 뿐인데 도둑고양이란다. 고양이는 억울하다. 아무것도 훔친 적도 없는데, 도둑이라니.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길고양이를 ‘도둑고양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 최근에야 ‘도둑고양이’를 ‘길고양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늘고 있지만, 여전히 나이 많은 어른들은 집 밖에 있는 모든 고양이를 ‘도둑고양이’라고 부른다. 서양에서도 과거에는 고양이를 뒷골목을 배회하는 불량배에 빗대 ‘뒷골목 고양이’라고 불렀으나, 요즘에는 ‘방랑 고양이’로 고쳐 부르고 있다. -34-35쪽

옛말에 이슬 하나에도 신이 내린다고 했다. 수천의 인연이 모여서 하나의 생명이 된다고도 한다.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길고양이 하나 하나도 감정이 있는 생명이란 사실을 잊고 있다. 아무리 나이 드신 어르신이라고 해도 고양이를 죽일 권리는 누구도 부여한 적이 없다. 인간이라고 해서 고양이를 마음대로 죽이고 살리는 심판관이 될 수는 없다. 그리고 길고양이에게 사료를 주면 고양이는 쓰레기봉투를 뜯지 않게 되므로 거리를 오히려 깨끗해진다. 이는 미국이나 그리스, 스페인에서도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거나 종교적인 관점에서 고양이를 싫어할 수는 있다.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좋아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것처럼 고양이를 돌보고 먹이를 주는 사람도 비난해서는 안 될 일이다.
누군가는 고양이의 수가 늘어나면 인간이 피해를 입는다고 말하지만, 이것도 다분히 인간 중심적 사고방식일 뿐이다. 정작 이 지구상에서 개체수 조절에 실패한 건 인간이다. 이건 인간이나 고양이냐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고양이의 공존의 문제이다. 대상이 고양이라고 해서 모든 폭력과 살생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300-301쪽

고양이도 인간과 똑같이 지구의 생명체로 태어나 같은 지층 연대를 살아가고 있다. 고양이는 외계의 생명도 마녀의 동물도 아닌 존재로 그저 우리 곁에 살아갈 뿐이다. 잘못이 있다면 하필 전 세계에서 길고양이가 가장 천대받는 한국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는 것. 한국이란 곳에서 길고양이는 늘 두려움과 불안, 배고픔으로 떨고 있다. 사실 길고양이의 세계를 알기 전까지 나 또한 고양이가 두려움에 떨고 있든 말든 그냥 무관심했었다. 녀석들을 적으로 여기지도, 친구로 여기지도 않았다. 그저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고양이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자 녀석들이 한국이란 곳에서, 더구나 도심이란 공간에서 얼마나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하며 약자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32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