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 인문학의 눈으로 본 신자유주의의 맨 얼굴
엄기호 지음 / 낮은산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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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참으로 가혹한 말이다. 철저히 자신의 욕구와 욕망에 충실해 사적 이익을 추구하라는 의미다. 굳이 이와 같은 정언 명령 형태로 지침(?)을 내리지 않더라도 이 시대의 사람들은 충분히 제 이익에 충실하고, 자기 이외에 남을 돌보지 않는다. 그러니 이 말은, 현실이 그렇지 않으니 앞으로 그리해라, 라는 의미가 아니라, 있는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는 동시에, 정반대의 정언 명령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봐야 한다.

  혹 어떤 사람들은 이 책의 제목을 보고, 이 시대에 개인이 살아가야 할 철학을 제시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자기계발, 처세술의 차원에서 제목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래, 맞다. 이 책은 '이 시대에 개인이 살아가야 할 철학'에 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다만, 남을 돌보지 않고 제 이익을 추구함으로써가 아니라, 남을 돌보며 함께 살아가는 길을 모색한다는 차원에서 그러하다. 단지 '입으로'가 아닌 '행동으로' 그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신자유주의. 최근 몇년간 참 많이 들은 용어다. 정확히 뭘 의미하고, 어디서부터 기원했는지까지는 몰라도, 적어도 사람들은 우리가 신자유주의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며, 이 책의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들이라면 신자유주의가 개인의 삶을 파탄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사실 또한 이미 알고 있다. 이 책 곳곳에는 몸으로 체험한 이들의 사례가 실려있다. 여학생들은 제 몸값이 가장 높은 나이에 성매매에 나서며, 일제고사에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한 아이는 모든(?) 서민들의 꿈이자 희망인 고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린다. 

  지금은 또 달라졌지만, '교육인적자원부'로 명칭이 바뀌었을 때 알아봤어야 했다. 교육을 받는 아이들은 국가에 경제적 부를 가져다 줄 미래의 인적 '자원'이며, 매달 꼬박꼬박(?) 월급 받으며 한달살이 하는 직장인들은 단지 회사의 부품일 뿐이다. 부품은 고장나거나 낡으면 버리고 다시 갈면 된다. 직장에서 생활하는 시간은 하루의 절반 이상이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하나의 부품으로서 존재한다. 그나마라도 이들이 노동자로 인정을 받으면 다행이다. 신자유주의의 시대에 이들은 노동자인 동시에 자영업자다.  

  "그전까지 노동자는 언제나 개별 노동자로서만이 아니라 집단으로 존재해 왔다. 노동자는 사용자와 개인적으로 계약을 맺지만, 그 노동 계약은 노동자 개인이 아니라 노동조합을 통하여 전체 노동자 집단이 책임지면서 보호해 왔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에서 노동이 자영업화하면서 노동자는 자기 노동의 질과 성과에 대해 혼자서 책임을 지게 된다. 집단으로 존재할 수 없는 노동자는 그저 자기 몸에 대한 자영업자일 뿐이다." 

  회사는 개인이 내는 성과에 주목하며, 성과를 내지 못한 직원은 쫓겨난다. 개인이 자영업자임을 알 수 있는 좋은(?) 사례가 '연봉제'이다. 개인은 제 몸을 자원으로 회사와 몸값을 책정하고 계약을 맺는 작은 경영자이며, 이들은 (나이들어서도) 회사와 계약을 맺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계발을 해야 한다. 직장에서 하루 절반(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보내고, 남은 시간엔 영어 공부를 하든, 컴퓨터 자격증을 따든, 뭐든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회사는 더이상 이들을 '써주지' 않는다. 지속적으로 '쓰임을 당하기 위해서는' 개인은 제 몸에 대한 '경영'을 체계적으로 잘 해줘야 한다. 일용직 노동자나 계약직 노동자나 정규직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두 계약을 할 수 있고,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얻었지만, 우리의 자유는 그들에게 종속되어 있다. 과거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통제한데 비해 지금은 개인의 자유가 널리 보장된다. 하지만, 우리의 자유는 '국가'에서 '기업'으로 주인을 바꾸었을 뿐이다. 국가가 우리를 기업에 팔아넘겼다. 겉으로 보기에 사람들은 억압과 통제로부터 해방됐지만, 국가에 의한 노예 상태에서 '기업을 향한 자발적 노예 상태'로 바뀌었을 뿐이다. 알아서 각자가 삶의 방식을 선택하라. 하지만, 그 책임은 너희들 몫이다. 국가는 그렇게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단 하나의 선택지를 따르며, 그에 따른 결과를 몸으로 받아내고 있다.

  암울한 시대를 살고 있다. 선택할 자유는 있되, 선택지는 하나인 시대를 살고 있다. 물론 이러한 흐름을 피해 작은 공동체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국가와 사회에서 마이너리티로 간주된다. 그 또한 하나의 선택이지만, 장기적으로 나 이외의 대다수 사람들이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워야 한다. 암울한 현실을 깨고 나오기 위한 방법은, 우리가 수없이 들어온 '연대'와 '투쟁'이다. 우석훈이 <88만원 세대>를 쓰고, 제일 많이 들은 질문이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텐데, 그 대답도 '연대'와 '투쟁'이었다.  

  우리의 현실이 앞이 깜깜하다는 것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 여기까지 오는 것도 힘겹다 - 언제나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원한다. 연대와 투쟁이라니까 그럼 어떻게 하냐고 묻는다. 그건 질문하고 고민하는 자들의 몫이다. 저자는 교육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앎을 추구하게 하고, 진리를 향해 나아가며,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도록 북돋우며, 질문하기를 그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저자와 독자는 이 책을 통해 교육에 동참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 대답은 간단하다.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정확히 그 반대로만 하면 된다. 그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힘겨운 시대를 살아가며 방황하는 사람들이 읽어야 할 삶의 지침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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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엄기호 지음; 낮은산
    from Aromatic, Delicious Scalpel 2009-09-15 22:03 
    신자유주의에 대해서는 나름 많은 책을 읽고 느끼고 실제하는 현상들을 보아오기에 독후감이라는 제목아래 또다시 이야기하기가 조금 서먹하긴 하다. 자꾸 되풀이되는 듯한 내용에 가만히 앉아 자판만 두드리며...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 인문학의 눈으로 본 신자유주의의 맨 얼굴
엄기호 지음 / 낮은산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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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감치 학교를 때려치우고 원조 교제 비슷한 성매매를 하는 아이였다. 돈도 꽤 번다는 그녀는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것들은 못생긴 것들이에요."라고 주저 없이 말했다. 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하고 못생긴 것들은 어디 가서 제대로 밥벌이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럴 경우 발이 퉁퉁 붓도록 편의점이나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나마 자기는 예뻐서 다행이라고 했다. -68-69쪽

모든 것이 시한부가 되어 버린 시대에 시한부를 넘어서려는 인간의 노력인 사랑은 간단하게 무시된다. 여기에 관계에 대한 존중이 있을 리 없다. 우리 모두는 서로의 정서적 안정에 필요한 일시적인 소모품이 되어 버렸고, 우리 모두는 다 외로워졌으며, 그 외로움을 인간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어리석은 짓이다. 신자유주의에서 깨져 버린 것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가장 소박한 꿈, 사랑이다. -76쪽

이렇게 노동을 자영업화하면 모든 책임은 개인에게 부과된다. 그전까지 노동자는 언제나 개별 노동자로서만이 아니라 집단으로 존재해 왔다. 노동자는 사용자와 개인적으로 계약을 맺지만, 그 노동 계약은 노동자 개인이 아니라 노동조합을 통하여 전체 노동자 집단이 책임지면서 보호해 왔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에서 노동이 자영업화하면서 노동자는 자기 노동의 질과 성과에 대해 혼자서 책임을 지게 된다. 집단으로 존재할 수 없는 노동자는 그저 자기 몸에 대한 자영업자일 뿐이다. -81쪽

이런 사회에서 노동자 개인이 탈락하지 않기 위해 노동조합을 결성하거나, 사회보장 강화를 주장해 사회를 통해 보호받으려 한다면 어리석은 짓이다. 신자유주의는 줄곧 이야기한다. 노조나 국가로부터 어떤 보호를 받으려는 나약한 생각을 깨뜨려야 한다고. 무엇보다 노동자 개인은 자기 관리, 자기 계발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노동자 개인의 경쟁 상대는 국가나 기업이 아니라 내 옆의 동료이기 때문이다. 자기 계발을 못하고, 자신의 몸과 시간을 잘 관리하지 못한 사람은 탈락할 테고, 그것은 전적으로 그의 책임이다. -83쪽

대신 이 아이들은 현재 이 순간에 즉각적으로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자신의 자본, 즉 몸에 주목한다. 영계에 대한 신화가 있는 한국 사회에서는 어리면 어릴수록 몸이 더 잘 팔리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어렸을 때 한시라도 빨리 사업에 뛰어들어야 한다. 이 아이들에게 자기 관리란 현재 즉시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자신의 몸을 관리하는 일이다. 아이들은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단식원에서 몇 달씩 지내기도 한다. 일찍부터 자기몸에 대한 자본가이며 투자자가 된다. -85쪽

이 기만이 가장 끔직한 이유는 "살아가기 위해서는 살아남기 위한 ‘자격’이 필요한 것"처럼 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즉, 자신이 경제적으로 효용 가치가 있음을 끊임없이 호소하며 살아야 한다. 이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일이든지 감수하면서 다른 좋은 일자리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볼품없는 일자리를 두고 탈락한 자들끼리 아귀다툼을 벌여야 한다. 그러나 그 아귀다툼 속에서도 좋은 일자리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이용당할 기회"마저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포레스테는 이런 상황에서 "노동의 시대"에 집착하지 말고 "노동의 부재에서부터 출발하여 새롭게 조직하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촉구하고 있다. -90쪽

인간의 시간이 노동과 여가, 공적 시간과 사적 시간으로 나뉘지 않고 24시간 늘 일하고 자기 계발하는 존재가 된 것은, 단지 경쟁이 가속화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연봉제는 겉으로 보기에는 무한 경쟁의 산물이며 그것을 가속화시키는 임금 체계의 변화인 듯하지만, 사실은 노동자 자신의 경제적 삶을 주체화하는 방식이 극적으로 변했음을 뜻한다. 달리 말하면, 노동자가 자기 삶을 경영하는 일종의 자영업자, 경영자가 된 것이다. 우리들 모두의 시간과 공간, 관계는 이제 투자와 관리의 대상이 되었으며, 우리는 그것을 "자유"라고 부른다. -91쪽

신자유주의에 의해 학교와 가정 밖으로 내쳐진 아이들은 이 과정을 통해 역설적으로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학습하고 신자유주의적 개인으로 성장해 가고 있다. 이 아이들에게는 몸도 팔릴 만한 몸과 팔리지 않는 몸으로 나뉘며, 팔릴 수 없는 못난 몸을 가진 아이들이 겪는 고통과 차별, 배제는 그 개인의 탓이 되어 버린다. 다시 한 번 신자유주의는 자신이 버린 이들의 마음속에서도 승리를 구가하게 된다. -94-95쪽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의 말을 빌린다면, 과거에는 육체가 영혼을 감싸고 있었다면 우리 시대에는 겉모습이 육체를 감싸고 있다. 과거에는 육체에 갇힌 영혼을 구하고 육신의 부활을 도모하는 일이 종교의 신성한 의무였다면, 요즘 시대에는 성형외과가 겉모습을 뜯어 고침으로써 육신을 부활시켜 인간을 구원하는 종교의 역할을 대신한다. 이제 구원받아야 할 대상은 영혼이 아니라 육체가 되었다. 이 신성한 구원의 행위에서 제외된 사람에게는 사회로부터의 영원한 탈락이라는 지옥불만 기다리고 있다. -130쪽

그 아이(일제고사를 치르고 자살한 아이)는 죽어서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스스로를 죽일 수는 있었지만, 타인으로부터 추모될 수는 없었다. 추모가 금지당한 존재라는 의미에서 그 아이는 살아서는 경쟁에서 뒤처져 잊힌 존재였고, 죽어서는 아예 존재가 말살된 존재이다.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이런 존재를 일컬어 "신성한 인간"이라고 부른다. ‘신성한 인간’은 로마 시대에 "죽여도 아무도 처벌을 받지 않지만, 절대 제물로는 바쳐질 수 없었던"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들은 인도의 불가촉천민과 비슷한 존재이다. 불가촉천민 역시 예전에 상위 카스트로부터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살해를 당했지만, 불결하다고 하여 이들이 힌두교 사원에 들어갔다 나오면 그 자리를 반드시 물로 씻었다. -152쪽

국가가 나서서 이들을 도덕적으로 공격하는 동안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격과 혐오 범죄 역시 늘어났다. 미국과 영국 같은 서구에서 신자유주의가 가속화될수록 노숙자나 성 소수자, 이주 노동자에 대한 범죄가 증가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회적 약자도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고 내가 돌보고 연대해야 하는 이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좀먹고 등쳐 먹는 기생충으로 바라보는 일을 국가가 정당화해 주었기 때문이다. 단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남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혐오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의 눈에 공격받는 사회적 약자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169-170쪽

인간의 형상을 하고 인간의 말을 한다고 해서 다 인간이 아니다. 이처럼 특정한 인간을 인간이 아닌 기생충으로 바라보게 하고 그들을 그렇게 취급해도 된다고 허용하는 것은 바로 신자유주의이다. -170쪽

인간은 인권을 가지기 위해서는 순수한 인간이 아니라, 어디에 소속된 무엇인가가 되어야만 한다. 즉, 인권의 실체는 시민권이다. 우리는 한 국가의 시민이 됨으로써만 비로소 인권을 가지게 되며, 소속 없이 순수한 인간일 때는 아무런 권리도 가지지 못한다. (아렌트로부터)-174쪽

(오늘날) 국가의 가장 주된 임무는 더 이상 국민을 돌보고 훈육하고 규율하는 일이 아니다. 국가는 시장이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법과 제도를 맏늘고 그것을 보호해야 한다. 국가가 국민을 위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은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서 기업을 최대한 유치하고, 시장을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는 일일 뿐, 직접적으로 일자리의 문제에 관여하는 일은 반시장적인 행위이다. 또한 과거에 국가는 시장으로부터 축출된 ‘잉여인간’을 국민이라는 이유로 복지 제도를 통해서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 ‘잉여인간’이 스스로 구직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에서만 제한적으로 돌본다. -188쪽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전 지구적 불평등 구조에 도전하기 위해 민족과 민족주의에 의지하는 일은 오히려, 자신을 억압하는 지역의 불평등을 강화하는 데 힘을 보태는 꼴밖에는 안 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사회적 약자의 도전은 지구적 수준에서의 착취와 불평등 구조뿐만 아니라, 지역적 수준에서의 착취와 불평등 구조에 대해서도 도전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 사회적 약자는 민족이라는 실패한 위안을 거부해야 한다. 대신 사회적 약자가 선택해야 하는 공동체는 바로 주변부 간의 연대인 것이다. 우리는 그 단초를 촛불 시위에서 볼 수 있었다. -216-217쪽

랑시에르에게 민주주의는 "합의와 동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말이다. 다수결, 합의나 동의는 그 사회에서 이미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 협상하고 타협하는 과정이다. 이에 반해 민주주의는 그 협상의 테이블 바깥에 놓인 이들, 그 사회에서 자신의 몫을 가지지 못한 "아무개들"이 자기 몫을 주장함을 뜻한다. 이렇게 본다면 민주주의의 주체는 국민이 아니라 "아무개들"이다. -227쪽

교육은 누군가를 계몽하고 훈육하는 의미에서의 교육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앎을 추구하게 하고, 진리를 향해 나아가며,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도록 북돋우며, 질문하기를 그치지 않게 하는 교육이다. 사유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에게 사유하는 힘이 있음을 긍정하도록 힘을 북돋우는 그런 교육이다. 이런 점에서 교육은 그 자체로 사유이며, 활동이다. -237쪽

상대주의는 쿨함이라는 이름으로 사유하기를 거부한다. 너도 나도 다 다르다고 선언함으로써 그와 내가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얼마만큼 다른지에 대해 생각하기를 포기한다. 생각하여 진리에 나아가는 일은 현실의 조화를 깨고 사회에 불화를 다시 불러들이는 무모한 짓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조주의가 폭력적으로 보수적이라면, 상대주의 역시 딱 그만큼 패배적으로 보수적인 태도이다. -238쪽

사유를 방해하는 교조주의와 상대주의의 밑바닥에는 진실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 진실 가운데 하나는 우리 사회가 봉합이 불가능한 불화와 적대에 기초해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적대와 불화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데 두려움을 느끼는 우리의 마음은 확실히 냉소와 공포로 가득 차 있다. -240-241쪽

윤리적으로 성장했다는 말은 그저 타자를 '인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 속으로 나를 밀어 넣는 '몸과 마음'의 문제이다. 바우만은 우리 시대의 윤리에서 '자유, 평등, 박애'라는 근대적 윤리는 폐기되고 그 자리를 '자유, 다양성, 관용'이 차지하였다고 했다. 바우만은 특히 관용이 무관심으로 타락한 것이 우리 시대의 윤리적 위기의 핵심이라며, 그 자리를 연대로 채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관용이 고통받는 타자를 어떻게 인식하는가라는 태도의 문제라면, 연대는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꾸는 문제이다. -247쪽

"나로서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모르겠다.'라는 말만이 진실한 답변인 경우가 매우 많다. 나는 있는 것을 엄격하게 분석하려고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점에서 사람들은 나를 책망한다. 당신이 비판을 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더 낫게 만들지 말해 줄 의무도 있지 않냐고. 내 생각에 이것은 논란의 여지없이 부르조아적 편견이다. 역사에서는 순수하게 이론적인 목표만을 추구한 작업이 의식을 바꾸고 그럼으로써 사회적 현실까지 바꾼 사례가 아주 많다."(<지젝이 만난 레닌>에서 아도르노의 말 인용)-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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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1 12: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01 14: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 - 곁다리 인문학자 로쟈의 저공비행
이현우 지음 / 산책자 / 2009년 5월
품절


"세상과의 연애를 통해서 제가 깨우친 바가 있다면 삶의 의미는 끊임없는 배움에 있으며, 그 배움은 공경하는 마음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보다 더 자세하게 살피자면 배움은 다름 아닌 공경하는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 앞도 뒤도 알 수 없는 막막한 세월 속에서 구원도 해탈도 아닌 막막한 걸음걸이, 우리는 모두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 막막함을 함부로 제 멋대로 제 편한 것으로 바꾸어버리지 않고 그 길을 끝까지 가는 것, 모든 공부는 입을 틀어막고 우는 울음 같은 것입니다. (이성복, <세상과의 연애>)-20쪽

‘고귀한 자’는 고전을 통해서 자신의 의무를 상기할 필요가 있고 ‘나약한 자’는 자신의 처지를 극복할 용기를 얻을 필요가 있다. -29쪽

지금까지 우리의 인격을 형성해온 책읽기란 대개는 순응하고 따르는 책읽기라기보다는, 무언가에 반하고 맞서는 책읽기였다. 즉 이제껏 우리가 책을 읽어온 것은, 마치 세상과 등지듯 현실을 거부하고 현실과 대립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때론 우리가 현실 도피자처럼 여겨지고 현실마저 우리가 탐닉하는 독서의 매력에 가려져 아득해질지언정, 어디까지나 우리는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도망자,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탈주자인 것이다. 모든 독서는 저마다 무언가에 대한 저항 행위이다. (다니엘 페나크, <소설처럼>, 문학과지성사, 103-104)-30쪽

어떤 책을 ‘작품’으로 간주하는 건 간단히 말해서, 그걸 산출한 ‘주인’ 혹은 '아버지‘로서의 저자를 상정하고, 그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을 작품 읽기의 목적으로 삼는 태도다. 따라서 신학적이며 형이상학적 태도다. 반면에 어떤 책을 ‘텍스트’로 간주하는 건(‘교재’란 의미의 ‘텍스트’가 아니다.), 더 이상 그런 의미 작용의 중심으로서의 저자를 고려하지 않는 태도다. 그래서 ‘저자의 죽음’이다. 이건 반형이상학적이며 탕아적인 태도다. (바르트의 경우 中)-32쪽

문체를 뜻하는 영어 단어는 스타일인데, 스타일은 표준이나 규범으로부터 일탈된 자신만의 ‘독자적인 표현 방법’을 말하며 그래서 ‘품위’란 뜻도 갖는다. 즉 ‘스타일이 없다’는 말은 ‘품위가 없다’ ‘평범하다’란 뜻이 된다. 문체란 그러므로 ‘평범하지 않은 것’ ‘일반적이지 않은 것’ ‘정상적이지 않은 것’을 뜻한다. 그래야 눈에 띌 테니까. 다르게 말하면, 문체란 글쓰기에서 ‘무엇’이 아닌 ‘어떻게’에 주목하는 것이며, ‘달’이 아닌 ‘손가락’에 주의를 두는 것이다. 보통 작가로서의 자질이 말하는 ‘내용’보다는 말하는 ‘방법’에 있다고 할 때, 작가에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이 문체이고, 그의 손가락이다. -72쪽

내 삶과 내 글은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순환한다. 내 삶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나라는 인간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내 글은 아무 것도 아니다. 결국 문장에 대한 내 태도는 삶에 대한 내 태도와 같다. (김규항의 ‘문장론’ 中)-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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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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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우리에게 올바로 살기 위해 고통과 헌신을 감수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삶을 즐기라고 더 많이 행복하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에게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 실은 인생의 진짜 즐거움과 진짜 행복을 좇는 일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려 준다. 예수의 별명은 ‘먹고 마시길 즐기는 자’였다. -11쪽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무리 천하고 막돼 먹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품위 있게 살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루에도 몇 번씩 악다구니를 쓰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가. 반대로 1년 내내 얼굴 한번 찌푸리지 않고도 충분히 안락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굳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품위를 잃을 행동을 할 이유가 있겠는가. 사람은 품위 있는 사람과 품위 없는 사람으로 나뉘는 게 아니라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과 유지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나뉘는 것이다. -59쪽

운동이란 기존의 사회체제를 변화시키는 것이지만, 운동이 갖는 숙명적인 모순은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 또한 기존의 사회체제와 그 사고방식에 이미 깊이 물들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운동하는 사람들도 운동의 외형적 성장, 즉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세상에 널리 알려지며 조직이 커지는 것을 운동의 성장과 등치시키는 경향이 있다. 물론 운동이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려면 그런 외형적 성장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운동의 외형적 성장은 두 가지 위험을 수반한다. 하나는 외형적 성장과 운동의 정체성의 훼손이 비례하는 경향이다. 또 하나는 운동의 외형적 성장은 기존의 사회체제에 포섭되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결국 운동의 껍데기는 커졌지만 정작 운동의 알맹이는 어느새 사라져 버린, 비대한 운동 조직이 사회에는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운동 조직 스스로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61-62쪽

평화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어떤 무작정하게 조용하고 온순한 상태가 아니다. 평화란 ‘온 세상이 잃어버린 조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억압과 착취와 불평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유지되는 조용하고 온순한 상태는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악랄한 형태의 폭력이다. 평화는 바로 그 억압과 착취와 불평등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인간적인 조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때론 평화를 위한 노력이야말로 때론 가장 소란스럽고 가장 사나울 수 있다. "열혈당원 시몬"은 예수와 하느님 나라 운동에 ‘당연히’ 그런 소란스러움과 사나움이 포함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66쪽

하느님을 섬긴다는 건,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려 힘닿는 데까지 노력하면서도 미처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음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태도이지, 앙상한 교리와 신학을 내세워 자신이 하느님의 권한을 완전히 위임받은 양 구는 태도가 아니다. -69쪽

세상의 변화를 위해 싸우고 헌신하는 사람이 싸우고 헌신하는 그만큼 세상이 변화하는 걸 확인할 수 있다면, 그래서 시시각각 보람과 기쁨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세상은 늘 그대로이거나 오히려 더 나빠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낙심하며 또 포기하곤 한다. 지금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성미가 급한 사람이라면 이미 그 문턱에 다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바로 그걸 염두에 두고 예수는 말한다. 씨를 뿌린 사람도 못 알아차리는 사이에 어느새 싹이 돋고 이삭이 패고 마침내 알찬 낟알이 맺힌다고. -78-79쪽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대다수의 인민들이 자신의 삶이나 계급적 처지에 걸맞은 정당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은 당장 뒤집히고 말 것이다. 그래서 지배체제는 언제나 제 가치관과 세계관을 인민들에게 주입한다. 그런 주입에도 역사의 어느 한순간에 혁명의 불길이 타오르기도 하지만, 그 짧은 순간을 빼면 인민들은 거의 언제나 지배체제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물들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편에 서는 사람들에게 종종, 아니 기본적으로 적대적이다. 20세기에 횡행한 ‘레드 콤플렉스’를 가까운 예로 들 수 있다. -97쪽

무소유는 영적 자유를 위한 것이다. 물질의 부와 영혼의 부는 한 사람에게 동거할 수 없다. 물질적으로 가진 게 많을수록 영적 자유는 적어진다. -98쪽

사람들의 의식은 견고한 껍데기를 쓰고 있고 그 껍데기를 벗으려면 금이 가고 깨트려진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껍데기를 벗을 가능성이 없는 사람에게, 마음의 귀를 닫아 놓은 사람에게 매달려 내내 시간만 보내는 건 현명하지 않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것은 성실한 활동이 아니라 자기만족에 가깝다. -103쪽

진정한 나눔은 적선이나 자선이 아니라 적선과 자선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나눔은 ‘불쌍한 사람’과 그 불쌍한 사람을 돕는 ‘훌륭한 사람’으로 역할을 나누어서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쇼가 아니라, 누구든 제 능력과 개성에 맞추어 정직하게 일하는 것만으로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품위와 자존심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 가려는 노력이다. 나눔은 자연도 자원도 돈도 식량도 집도 땅도 모두 하느님의 것임을 깨닫는 것이며, 하느님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고루 나누어 쓰라고 한 것이기에 누구에게도 사적으로 소유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며, 또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모두 함께 풍요롭고 만족할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110쪽

사람은 어떤 불의하고 모순으로 가득한 사회체제에서 살아갈 때 그 체제를 완전히 거부하지 않는 한 자기도 모르게 그 체제에 감염된다. 권위주의 체제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아이와 여자와 하급자에게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보이며, 오늘과 같은 극단적인 자본의 체제에 사는 사람은 저도 모르게 돈과 물질적인 가치를 인생의 중심에 놓는 사람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 사회체제에 얼마간 불만이 있거나 비판적인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그 사회체제를 완전히 거부하지 않고 사랑가는 모든 사람들은 그 체제의 일부인 것이다. 그래서 권위주의 체제나 자본의 체제와 싸울 때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면 설사 그 싸움이 승리를 거둔다 해도 결국 내 안에 숨어 있는 권위주의 체제와 자본의 체제가 되살아나기 때문에 세상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대개의 혁명이 그렇다. 세상을 바꾸려면 내 밖의 적과 싸우는 동시에 내 안의 적과도 싸워야 한다. -121-122쪽

예수는 우리로 하여금 약자의 편에 선다는 것이 유별나고 특별한 행동이 아니라 ‘단지 당연한 공평함을 회복하려는 노력’일 뿐이라는 사실을 되새기게 한다. -156쪽

불의한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더 근본적인 힘은 바로 인민들의 비굴과 무기력이다. 사실 제아무리 포악하고 강한 사회체제라고 해도 대다수 인민들이 한꺼번에 거부의사를 표시하면 당장이라도 맥없이 무너지게 되어 있다. -181쪽

지나친 이상주의는 현실적 조응력을 잃고 소수 지식인들의 관념놀이가 되어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보다 심각한 것은 이상주의가 사라지는 것이다. 꿈을 잃은 사람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듯, 이상주의가 사라진 세상, 모든 사람이 불가능한 것에 대해 꿈꾸길 중단하고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해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세상엔 아무런 희망이 없다. 예수는 우리에게, 현실에 대한 비평에는 능하짐나 새로운 세상의 창조에는 한없이 무력한, 여전히 좌파를 자처하면서도 새로운 세상에 대한 신념과 벅찬 희망이 아니라 지독한 우울과 무력감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에게 당부하고 또 당부한다. ‘하느님이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에 당신이 함께하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세요.’ -186-187쪽

우리는 끝내 용서하되, 먼저 분명히 분노해야 한다. 진정 분노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 용서할 줄 모르며, 진정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 분노할 줄 모른다. -189쪽

나와 내 식구가 충분히 먹고살면서 여력이 되는 대로 불쌍한 사람을 돕는 것은 끝없이 더 가지려는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사람들에게 비추어 선량한 행동임에 틀림없지만, 그것이 예수가 말한 이웃 사랑은 아니다. 돈을 많이 벌어 그 돈으로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겠다는 생각 역시 예수가 말한 이웃 사랑은 아니다. 예수가 말한 이웃 사랑은 예수의 말 그대로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203쪽

비폭력주의의 목표는 ‘비폭력’이 아니라 ‘저항’이라는 걸 잊어선 안 된다. 예수는 결코 안온한 예배당이나 연구실에서 비폭력론을 주장하지 않았다. 예수는 언제나 폭력의 현장에서 그 폭력을 몸으로 감당하며 비폭력으로 저항했다. ‘20세기 비폭력주의 운동의 대명사’라 일컬어지지만 일각에서는 인도 ‘민족’에 집착하여 인민들의 정당한 투쟁을 훼방한 사람으로 비판받기도 하는 간디조차 ‘무기력하고 비굴한 비폭력보다는 차라리 정당한 폭력이 낫다’고 말했다. 비폭력주의는 폭력적인 투쟁 방법을 넘어서는 투쟁 방법이지 폭력적인 투쟁 방법에도 못 미치는, 투쟁의 정당성은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유약한 인텔리들의 요사스러운 말장난이 아니다. 진정한 비폭력주의자들이 결국 폭력에 희생당하는 운명을 갖는 건, 지배체제가 그들에게서 무장투쟁을 선택한 운동가들보다 오히려 더 큰 위협을 느끼기 때문이다. -238-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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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09-05-26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폭력으로 저항하는 것과 비폭력으로 정하는 것의 차이가 궁금합니다. 혹 답변 가능할까요?

마늘빵 2009-05-26 11:55   좋아요 0 | URL
김규항의 책에 관해서라면, 저보다는 김규항의 블로그에서 질문을 하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다 여성이 세상을 바꾸다 3
최세희.전성원.손동수 지음 / 낮은산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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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나는 기형 사진을 많이 찍었다. 그들은 내가 처음으로 사진에 담은 대상 가운데 하나이며, 그들을 찍는 일은 몹시 흥분되는 일이었다. 물론 나는 그들을 존중했고, 아직도 그들 가운데 몇몇을 좋아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들이 나의 가장 친한 친구랄는 뜻은 아니다. 그들은 나에게 부끄러움도 경외심도 함께 준다. 가던 길을 멈추고 수수께끼의 답을 요구하는 신화 속의 인물처럼 그들에게는 특징적인 전설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신적 외상을 입을까 두려워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기형인들은 애초부터 이런 외상을 지닌 채 태어났다. 그들은 이미 인생의 시험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그들이야말로 삶을 초월한 고귀한 사람들이다."(다이앤 아버스)-113-114쪽

"내 예술이 목적을 가졌다는 데 동의한다. 나는 인간이 이토록 어쩔 줄 모르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 시대에 영향력을 미치고 싶다."(케테 콜비츠)-213쪽

"'씨앗들을 짓이겨서는 안 된다.' 이제 이것은 나의 유언이다. 요즈음은 무척 우울하다. 나는 다시 한 번 똑같은 것을 팔고 있다. 망아지처럼 바깥을 구경하고 싶어 하는 베를린의 소년들을 한 여인이 저지한다. 이 늙은 여인은 자신의 외투 속에 소년들을 숨기고서 그 위로 팔을 힘 있게 뻗치고 있다. 씨앗들을 짓이겨서는 안 된다. 이 요구는 <전쟁은 이제 그만!>에서처럼 막연한 소원이 아니라 명령이다. 요구다."(케테 콜비츠)-2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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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이] 2009-05-17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이트도 많이 해봐야겠어용ㅋ

마늘빵 2009-05-19 09:41   좋아요 0 | URL
네, '그냥 데이트'도 많이 해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