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2009년 4월 18일자(제83호) 기사에 소개된 내용입니다. 고장원 SF 평론가, 박상준 오멜라스 대표, 전홍식 SF&판타지 도서관 관장이 추천했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느끼는 생각, 즉 감상은 각자의 생활 범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감성은 일관되지 않고 혼잡한 것입니다. 하지만 철학은 체계적입니다. 모든 사물에 보편적으로 타당한 원리를 찾아내는 것이 철학입니다. 철학은 자신의 생활범위에서 오는 제약을 뛰어넘어 세상의 모든 사물에 타당한 법칙과 원리를 찾아내고자 합니다. -24쪽
모든 사물은 관련을 맺고 있는 동시에 상대적 독립 하에 존재합니다. 즉 관계하고 있음과 동시에 관계하고 있지 않으며 그것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한족은 다른 쪽에 관계없이 일정한 한계 내에서 변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상대적 독립을 무시하면서 일면적 사고 방식에 빠져 무시하면 사물을 올바르게 인식할 수 없고, 따라서 올바르게 행동할 수 없습니다. -58쪽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이 격화되면 새로운 생산력을 대표하는 진보 계급과 낡은 생산 관계를 고수하려는 보수 계급 사이에 투쟁이 나타나며, 이러한 투쟁으로 사회가 발전합니다. 사회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즉 계급 투쟁에 따라 운동, 변화합니다. -105쪽
과정과 단계 과정이란 일정한 모순에 의해 규정된 일정한 본질을 갖는 어떤 사물이 발생하고 발전하고 사멸해 가는 진행을 가리키는 말이다. 단계란 일반적으로 말해서 항상 무엇의 단계다. 이것을 무시해서 무엇의 단계인가를 명백히 하지 않고, 단지 단계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과정과 단계라는 구별을 결코 고정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과정과 단계라는 말을 함께 사용하는 경우에는 먼저 무엇을 과정으로 파악하는가를 명백히 해야 한다. (계속)-113쪽
(이어서) 과정이란 동일한 근본 모순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존재하는, 발전의 한 부분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물을 파악하는 경우에 이 점을 염두에 두면 무엇을 과정이라고 불러도 좋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단계가 구별된다. (중략)이와 같이 과정과 단계의 구별은 고정적이 아니라 상대적이기 때문에 동일한 것이 그보다 커다란 과정에 대해서는 단계로 되고, 그보다 작은 단계에 대해서는 과정으로도 되는 것이다. 다만 무엇을 과정으로 파악하는 것이 그 사물을 이해하는 데 가장 알맞을까 하는 점을 잘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근본 모순이 바뀌지 않는 한 동일한 과정이 계속되고, 근본 모순이 해결되어 새로운 근본 모순이 생기면 과정이 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사물을 이해하려는 경우에는 근본 모순이 무엇인가를 먼저 연구하고 그것을 정하고 나서 이 근본 모순에 의해 그 본질이 규정되는 과정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다. -113쪽
‘부정’이 갖는 이러한 성격을 단체 생활이나 조직 생활에서 중요한 ‘비판’이라는 문제와 결부시켜 생각해 봅시다. 보통 ‘자기 비판’, ‘상호 비판’이라고 표현되는 비판은 조직 생활에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입니다. 만약 자기 비판이나 상호 비판이 없다면 그 단체나 조직은 규율이 없어지고 원칙이 흐트러지며, 단체의 회원이나 조직원 각자가 발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비판은 일종의 부정입니다. 즉 자기 자신이 갖고 있거나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사상이나 옳지 못한 태도, 실천을 지적하여 고치는 과정이 바로 비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소극적인 사람을 적극적인 사람으로, 잘못된 견해를 옳은 견해로, 잘못된 실천을 올바른 실천으로 이끌기 위해 자기 비판, 상호 비판을 합니다. -170-171쪽
자유는 필연성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필연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우리들의 목적을 위하여 이용하는 데에서 성립합니다. 그러므로 필연성은 자유를 성립시키는 전제 조건이 됩니다. 즉 객관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성을 파악함으로써 거꾸로 객관 세계를 지배하는 데에서 진정한 인간의 자유가 성립하는 것입니다. -233쪽
자유의 이러한 본질은 단지 자연의 개조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인간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에 의한 개조는 사회적으로도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인간과 사회에 관해서도 거기에 작용하고 있는 필연성을 명백히 인식하고, 이 인식을 기초로 하여 사회를 더 나은 상태로 만들기 위한 활동을 벌여야 합니다. 여기에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자유가 있으며, 이를 위하여 노력하는 데에서 인간의 의식이 수행하는 위대한 역할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234쪽
어떻게 하면 가능성을 현실성으로 전화시켜 목적을 실현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가능성이 가지고 있는 모순의 한 측면, 즉 현실성으로 전화되지 않는 측면을 극복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합니다. 이러한 극복이 이루어지려면 한편으로는 객관적 조건이 필요하고, 또 한편으로는 주체적 노력과 실천이 필요합니다. 닭이 알을 품어 병아리를 까는 경웅에 알이 병아리로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닭이 품어 주지 않으면 알이 병아리로 될 수 없는 것처럼, 객관적 조건과 함께 주체적 노력과 실천이 있어야만 이러한 극복이 가능하며, 그럼으로써 가능성이 현실성으로 전화하여 목적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272쪽
"강자는 결코 절대적인 강자일 수 없으며 약자 또한 절대적인 약자일 수 없다. 운명에서 힘을 빌려 온 자들은 그 힘에 지나치게 의존해 파멸한다. 힘은 그것을 소유한, 또는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도 희생자에게만큼이나 냉혹하다. 후자는 힘에 억압되고 전자는 힘에 중독된다."(시몬 베유)-9쪽
부적절한 자부심을 뜻하는 '오만'이라는 개념은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지만, 유독 이를 강하게 비난한 이들은 그리스 인이었다. 자부심이 이렇게 대대적으로 비난을 받은 이유는 정치 질서를 유지하고 선한 삶을 가능케 하는 기본 선인 용기, 절제, 정의, 지혜가 자부심으로 인해 파괴된다는 이유에서였다. 호메로스, 헤로도토스, 아이스킬로스, 투키디데스, 플라톤 같은 여러 저술가는 자부심이 주요 악이며 도덕적 판단을 흐리게 하고 정치적 재앙의 근원이 된다고 보았다. 그리스 인뿐만 아니라 로마의 중세 사상가와 근대 초기의 사상가들도 자부심의 해악에 대해 한목소리를 냈다. -30쪽
각주12"롤스는 '자신의 가치에 대한 판단'은 '선에 대한, 인생 설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실천 가치가 있다는 분명한 확신'과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한 자존심이란 자신의 목표가 능력이 닿는 범위에만 있다면 그것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을 뜻한다고도 말한다. 이 주장을 비판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여기서 롤스가 기술하는 대상은 자존심이 아니라 자긍심에서 나온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자긍심과 자존심의 차이는 대단히 중요하다. 인간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의심치 않는 사람이 특정한 인생 설계의 가치는 확신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둘의 차이를 모르고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상황에 따라 인생 설계를, 또는 그 중 일부를 새로 꾸미거나 바꾸거나 포기하기도 한다. 자존심이 자긍심에 비해 더 근본적이고 더 견고하다. 자긍심(인생 설계에서의 자신감)이 자존심(자신의 가치에 대한 판단)과 다르다고는 해도 자긍심이 심각하게 저하된다면 자존심에도 치명타가 될 수 있다."(마이클 M. 무디애덤스, '인종, 계층, 그리고 자존심의 사회적 구축', <철학포럼>, vol.12, no.1-3, 1992-1993년 가을~봄, 254쪽)-166-167쪽
각주14 물론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의 주장대로 아퀴나스는 정의에 관한 도덕적 성찰의 전통을 놓고 아우구스티누스와 아리스토텔레스가 보여 준 대립을 극복하려 시도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보기에 로마 인들은, 미덕을 바라보는 그리스의 시각을 계승하면서 자부심이라는 죄악을 저질렀다. 이는 영광에 목말라하는 그들의 태도에서 분명히 드러나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자부심을 겸손이라는 그리스도교의 가치로 대체한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악으로서의 자부심은 찾아볼 수 없다고 매킨타이어는 지적한다. -168쪽
각주26"고대 그리스 사회는 사회적 지위에서 양극화가 심했다. 상류층 자손이나 부를 향유하는 사람들은 부나 지위 면에서 스스로를 존중했고 타인에게도 존경받기를 기대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현대적 사고방식 때문이 아니라 이들이 자신의 도덕적 자질이 아닌, 타고난 운명으로 획득한 그릇된 기반에서 존경받기를 기대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D.S.허친슨, 조너선 바네스 편집,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캠브리지 동료>)-169-170쪽
시민들의 자유와 평등, 박애와 연대를 실현하기 위해 정당성을 부여한 국가 권력이 자신의 궁극적인 권력 원천인 시민들을 탄압하는 기구가 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수용될 수 없는 모순이다. 그래서 시민들은 국가에 압력을 가하고자 타인들과 연합했고, 바로 여기서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시민 집단인 '시민 계급'과 이들의 연합체들로 구성된 근대적 '시민 사회'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50쪽
"우리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감행하길 원한다."(브란트)-74쪽
칸트는 토지나 화폐를 얼마만큼 소유하고 있는지가 정치적 권리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면 안 된다는 보편주의적 이상을 주장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프랑스어의 공민 또는 인간은 만인의 보편적 존엄성과 동등한 권리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수한 신생 지배 계급인 부르주아와 구분되는 의미를 가졌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칸트는 1780년대와 1790년대에 쓴 저작들에서 이러한 보편주의적 이념을 표현하기 위해 '국가 시민'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칸트는 그가 살던 당시의 절대주의 국가와 그 통치하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일종의 계약 관계가 성립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정치 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든 국가시민이 한 명의 시민으로서 권리를 인정받ㄴ는 한편 국가의 신민으로서 공적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고 보았다. -84쪽
"인류는 서로 맞대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집합체다. 이들에게 평화 공존은 불가결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항상적인 갈등을 막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들 자신에게서 유래한 법을 서로에게 강제함으로써 '세계시민 사회'로 연합하게 하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진다. 이 연합은 언제나 거기서 이탈하는 자들에게 위협받겠지만 전반적으로는 점차 발전해갈 것이다."(칸트, <실용적 관점에세 본 인간학>)-99-100쪽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길러야 한다."(소로우)-116쪽
"폭군은 순교자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지만, 그가 죽음도 불사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포피츠, <권력 현상>)-117쪽
아래는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사르트르, 리오타르가 직접 한 말이 아닌 이 책의 저자가 각 학자의 입장이 되어 새로 쓴 대화체 문장입니다. 각 학자가 직접 한 말은 큰 따옴표로 별도로 표기합니다. 이 책은 두 가지 논쟁-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도덕 논쟁, 사르트르와 리오타르의 지식인 논쟁-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밑줄그은 이 주) -0쪽
올바름에 대해 안다는 것은 단지 어떤 것을 이해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올바른 행위를 실천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진정 ‘안다’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안 그러면 안다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말일세.(소크라테스)-19쪽
"우리는 흔히 우리 자신을 넘어선 어떤 것, 우리가 헌신할 수 있는 어떤 것, 우리가 그것을 위해 희생해도 될 어떤 목적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따라서 그와 같은 어떤 것은 바로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임해야 할 집단적인 것임에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우리는 희생하라는 말을 듣게 되며, 동시에 그렇게 하면 훌륭한 거래를 한 것이라고 확신한다."(칼 포퍼,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것은 극소수 사람들만의 가치가 인정되고 평범한 사람들은 버림받는 시대의 미심쩍은 도덕률이요, 역사 교과서에 한 자리 차지할 기회를 가진 정치적 귀족이나 지적 귀족들의 도덕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도저히 정의와 평등주의를 찬성하는 사람들의 도덕률일 수가 없다."(칼 포퍼, 『열린 사회와 그 적들』)-86쪽
윤리적 의미에서의 복종은 개별적인 인간이 사회를 질서 있게 유지하기 위해 자유 의지로 선택한 자유로운 복종으로 이해해야 하네. 그리고 이를 어길 경우 사회적인 강제력을 행사하는 것도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가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억압적인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되네. 그러니 윤리를 특정 계급이나 집단의 이해관계의 산물로 바라보는 견해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참으로 어리석은 견해라고 할 수 있네.(소크라테스)-88쪽
지식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처한 위치와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사상이 어떻게 지배 계급에 봉사하는지를 인식하고 그러한 자신들의 처지에 불만을 가지며, 스스로가 지배 계급에 기꺼이 복종하려는 태도를 보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반성하며 지금까지 자신이 교육받아온 이데올로기 자체를 문제 삼을 때, 그리하여 자신이 지배 계급의 하수인으로서 일하는 것을 과감히 거부할 때, 바로 그때 전문 기술자인 실용적 지식의 공작요원에서 벗어나 참된 지식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자신만의 안위를 위해 일하지 않고 사회와 민중을 위해 일하는, 그런 지식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르트르)-124-125쪽
지식인으로 불리고 있는 사람들을 학교나 연구소에서 사회적으로 훈련시킬 때 그 목적은 그들의 역량 내에서 보편적 주체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최상의 수행성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여기서 수행성은 최소의 투입으로 최대의 산출을 만들어내는 것, 즉 최대한의 효율성을 실현하는 것으로 규정됩니다. 때문에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그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은 채 재정과 시간상의 이득, 손실, 작동 결과에 따른 평가 등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기술적 기준에 해당하는 지식만을 축적하게 됩니다. 그 결과 더 이상 사르트르 선생이 말한 진정한 지식인은 현실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리오타르)-128-129쪽
"지식인은 우리 시대의 모든 갈등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지식인은 억압당하는 자의 편에 설 수밖에 없다."(사르트르)-161쪽
레비는 대중의 의식에 기초한 집단 지성은 철학적인 인식의 전환이라고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에 따르면 집단 지성은 소크라테스가 말한 "너 자신을 알라"를 "함께 사유할 수 있도록 우리 서로를 아는 법을 배우자"로 확장시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데카르트가 제기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일반화시켜서 "우리는 생각한다, 고로 공동체로 존재한다"로 전환시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17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