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만 - 당당한 나와 오만한 너 우리는 무엇이 다른가? 우리를 지배하는 7가지 욕망의 심리학 7
마이클 에릭 다이슨 지음, 이창신 옮김 / 민음인 / 2007년 5월
절판


"강자는 결코 절대적인 강자일 수 없으며 약자 또한 절대적인 약자일 수 없다. 운명에서 힘을 빌려 온 자들은 그 힘에 지나치게 의존해 파멸한다. 힘은 그것을 소유한, 또는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도 희생자에게만큼이나 냉혹하다. 후자는 힘에 억압되고 전자는 힘에 중독된다."(시몬 베유)-9쪽

부적절한 자부심을 뜻하는 '오만'이라는 개념은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지만, 유독 이를 강하게 비난한 이들은 그리스 인이었다. 자부심이 이렇게 대대적으로 비난을 받은 이유는 정치 질서를 유지하고 선한 삶을 가능케 하는 기본 선인 용기, 절제, 정의, 지혜가 자부심으로 인해 파괴된다는 이유에서였다. 호메로스, 헤로도토스, 아이스킬로스, 투키디데스, 플라톤 같은 여러 저술가는 자부심이 주요 악이며 도덕적 판단을 흐리게 하고 정치적 재앙의 근원이 된다고 보았다. 그리스 인뿐만 아니라 로마의 중세 사상가와 근대 초기의 사상가들도 자부심의 해악에 대해 한목소리를 냈다. -30쪽

각주12
"롤스는 '자신의 가치에 대한 판단'은 '선에 대한, 인생 설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실천 가치가 있다는 분명한 확신'과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한 자존심이란 자신의 목표가 능력이 닿는 범위에만 있다면 그것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을 뜻한다고도 말한다. 이 주장을 비판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여기서 롤스가 기술하는 대상은 자존심이 아니라 자긍심에서 나온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자긍심과 자존심의 차이는 대단히 중요하다. 인간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의심치 않는 사람이 특정한 인생 설계의 가치는 확신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둘의 차이를 모르고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상황에 따라 인생 설계를, 또는 그 중 일부를 새로 꾸미거나 바꾸거나 포기하기도 한다. 자존심이 자긍심에 비해 더 근본적이고 더 견고하다. 자긍심(인생 설계에서의 자신감)이 자존심(자신의 가치에 대한 판단)과 다르다고는 해도 자긍심이 심각하게 저하된다면 자존심에도 치명타가 될 수 있다."(마이클 M. 무디애덤스, '인종, 계층, 그리고 자존심의 사회적 구축', <철학포럼>, vol.12, no.1-3, 1992-1993년 가을~봄, 254쪽)-166-167쪽

각주14
물론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의 주장대로 아퀴나스는 정의에 관한 도덕적 성찰의 전통을 놓고 아우구스티누스와 아리스토텔레스가 보여 준 대립을 극복하려 시도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보기에 로마 인들은, 미덕을 바라보는 그리스의 시각을 계승하면서 자부심이라는 죄악을 저질렀다. 이는 영광에 목말라하는 그들의 태도에서 분명히 드러나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자부심을 겸손이라는 그리스도교의 가치로 대체한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악으로서의 자부심은 찾아볼 수 없다고 매킨타이어는 지적한다. -168쪽

각주26
"고대 그리스 사회는 사회적 지위에서 양극화가 심했다. 상류층 자손이나 부를 향유하는 사람들은 부나 지위 면에서 스스로를 존중했고 타인에게도 존경받기를 기대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현대적 사고방식 때문이 아니라 이들이 자신의 도덕적 자질이 아닌, 타고난 운명으로 획득한 그릇된 기반에서 존경받기를 기대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D.S.허친슨, 조너선 바네스 편집,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캠브리지 동료>)-169-170쪽


댓글(5)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9-03-25 1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25 1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03-26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일단 저 사랑스러운 표지 마음에 들어요.

마늘빵 2009-03-27 09:11   좋아요 0 | URL
근데 책은 아녀요. -_- 제목과 내용이 부합하지 않아요. 미국 흑인인 저자가 보고 듣고 한 주변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들어있어요. 그 이야기 안에서 '자만'이란 주제를 튼튼히 붙잡고 있는 거 같지도 않고.

무해한모리군 2009-03-27 15:41   좋아요 0 | URL
전 심리학책은 잘 안읽어요.
에세이에 가까운 모양이네요.
 
시민 비타 악티바 : 개념사 3
신진욱 지음 / 책세상 / 2008년 11월
장바구니담기


시민들의 자유와 평등, 박애와 연대를 실현하기 위해 정당성을 부여한 국가 권력이 자신의 궁극적인 권력 원천인 시민들을 탄압하는 기구가 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수용될 수 없는 모순이다. 그래서 시민들은 국가에 압력을 가하고자 타인들과 연합했고, 바로 여기서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시민 집단인 '시민 계급'과 이들의 연합체들로 구성된 근대적 '시민 사회'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50쪽

"우리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감행하길 원한다."(브란트)-74쪽

칸트는 토지나 화폐를 얼마만큼 소유하고 있는지가 정치적 권리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면 안 된다는 보편주의적 이상을 주장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프랑스어의 공민 또는 인간은 만인의 보편적 존엄성과 동등한 권리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수한 신생 지배 계급인 부르주아와 구분되는 의미를 가졌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칸트는 1780년대와 1790년대에 쓴 저작들에서 이러한 보편주의적 이념을 표현하기 위해 '국가 시민'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칸트는 그가 살던 당시의 절대주의 국가와 그 통치하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일종의 계약 관계가 성립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정치 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든 국가시민이 한 명의 시민으로서 권리를 인정받ㄴ는 한편 국가의 신민으로서 공적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고 보았다. -84쪽

"인류는 서로 맞대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집합체다. 이들에게 평화 공존은 불가결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항상적인 갈등을 막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들 자신에게서 유래한 법을 서로에게 강제함으로써 '세계시민 사회'로 연합하게 하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진다. 이 연합은 언제나 거기서 이탈하는 자들에게 위협받겠지만 전반적으로는 점차 발전해갈 것이다."(칸트, <실용적 관점에세 본 인간학>)-99-100쪽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길러야 한다."(소로우)-116쪽

"폭군은 순교자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지만, 그가 죽음도 불사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포피츠, <권력 현상>)-11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히스토리아 대논쟁 1 - 도덕 & 지식인 히스토리아 대논쟁 1
박홍순 글.그림 / 서해문집 / 2008년 12월
장바구니담기


아래는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사르트르, 리오타르가 직접 한 말이 아닌 이 책의 저자가 각 학자의 입장이 되어 새로 쓴 대화체 문장입니다. 각 학자가 직접 한 말은 큰 따옴표로 별도로 표기합니다. 이 책은 두 가지 논쟁-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도덕 논쟁, 사르트르와 리오타르의 지식인 논쟁-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밑줄그은 이 주) -0쪽

올바름에 대해 안다는 것은 단지 어떤 것을 이해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올바른 행위를 실천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진정 ‘안다’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안 그러면 안다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말일세.(소크라테스)-19쪽

"우리는 흔히 우리 자신을 넘어선 어떤 것, 우리가 헌신할 수 있는 어떤 것, 우리가 그것을 위해 희생해도 될 어떤 목적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따라서 그와 같은 어떤 것은 바로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임해야 할 집단적인 것임에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우리는 희생하라는 말을 듣게 되며, 동시에 그렇게 하면 훌륭한 거래를 한 것이라고 확신한다."(칼 포퍼,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이것은 극소수 사람들만의 가치가 인정되고 평범한 사람들은 버림받는 시대의 미심쩍은 도덕률이요, 역사 교과서에 한 자리 차지할 기회를 가진 정치적 귀족이나 지적 귀족들의 도덕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도저히 정의와 평등주의를 찬성하는 사람들의 도덕률일 수가 없다."(칼 포퍼, 『열린 사회와 그 적들』)-86쪽

윤리적 의미에서의 복종은 개별적인 인간이 사회를 질서 있게 유지하기 위해 자유 의지로 선택한 자유로운 복종으로 이해해야 하네. 그리고 이를 어길 경우 사회적인 강제력을 행사하는 것도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가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억압적인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되네. 그러니 윤리를 특정 계급이나 집단의 이해관계의 산물로 바라보는 견해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참으로 어리석은 견해라고 할 수 있네.(소크라테스)-88쪽

지식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처한 위치와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사상이 어떻게 지배 계급에 봉사하는지를 인식하고 그러한 자신들의 처지에 불만을 가지며, 스스로가 지배 계급에 기꺼이 복종하려는 태도를 보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반성하며 지금까지 자신이 교육받아온 이데올로기 자체를 문제 삼을 때, 그리하여 자신이 지배 계급의 하수인으로서 일하는 것을 과감히 거부할 때, 바로 그때 전문 기술자인 실용적 지식의 공작요원에서 벗어나 참된 지식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자신만의 안위를 위해 일하지 않고 사회와 민중을 위해 일하는, 그런 지식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르트르)-124-125쪽

지식인으로 불리고 있는 사람들을 학교나 연구소에서 사회적으로 훈련시킬 때 그 목적은 그들의 역량 내에서 보편적 주체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최상의 수행성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여기서 수행성은 최소의 투입으로 최대의 산출을 만들어내는 것, 즉 최대한의 효율성을 실현하는 것으로 규정됩니다. 때문에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그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은 채 재정과 시간상의 이득, 손실, 작동 결과에 따른 평가 등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기술적 기준에 해당하는 지식만을 축적하게 됩니다. 그 결과 더 이상 사르트르 선생이 말한 진정한 지식인은 현실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리오타르)-128-129쪽

"지식인은 우리 시대의 모든 갈등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지식인은 억압당하는 자의 편에 설 수밖에 없다."(사르트르)-161쪽

레비는 대중의 의식에 기초한 집단 지성은 철학적인 인식의 전환이라고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에 따르면 집단 지성은 소크라테스가 말한 "너 자신을 알라"를 "함께 사유할 수 있도록 우리 서로를 아는 법을 배우자"로 확장시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데카르트가 제기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일반화시켜서 "우리는 생각한다, 고로 공동체로 존재한다"로 전환시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17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히스토리아 대논쟁 2 - 정의론 & 제도 히스토리아 대논쟁 2
박홍순 글.그림 / 서해문집 / 2008년 12월
장바구니담기


아래는 롤스, 노직, 아도르노, 겔렌이 직접 한 말이 아닌 이 책의 저자가 각 학자의 입장이 되어 새로 쓴 대화체 문장입니다. 각 학자가 직접 한 말은 큰 따옴표로 별도로 표기합니다. 이 책은 두 가지 논쟁-롤스와 노직의 정의론 논쟁, 아도르노와 겔렌의 제도 논쟁-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밑줄그은 이 주)-0쪽

정의는 사회 제도의 제 1덕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법이나 제도가 아무리 효율적이고 정연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정당하지 못하면 개선되거나 폐기되어야 합니다. 정의는 한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해 나가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자 원리여야 합니다. (롤스)-15쪽

어떻게 ‘사회’를 구성할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만으로 인간의 삶이 유지될 수 없다는 건 너무나 상식에 속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므로 사회란 그 구성원 상호간에 구속력을 갖는 어떤 행동 규칙을 인정하고, 대부분 그에 따라서 행동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어느 정도 자족적인 조직체라고 가정해보아야 합니다. 개인을 넘어서는 자족적인 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협동이 필연적입니다. (롤스)-16쪽

이 모든 것을 폭넓은 의미에서 사회 협동적 상황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서로가 얼마만큼 어떻게 기여하였는가를 구분하기 어려운 곤란함이 일차적인 이유겠고요.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가지고 있는 부가 기득권을 비롯한 역사적인 요소와 결합되어 있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생산 결과에 대한 기여도를 측정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요. 그러므로 이러한 복잡하고 확인할 수 없는 변수들을 배제할 때 공정한 사회계약이 도출될 수 있겠죠. 사회계약론이 고도로 추상화된 자연 상태를 상정하여 계약의 원칙을 이끌어내는 작업을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계약론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로크나 루소 같은 사상가들도 ‘자연 상ㅇ태’라는, 공정한 계약을 위한 가상의 상태를 설정했지요. 저도 그들이 말한 ‘자연 상태’에 해당하는 ‘원초적 입장’을 제시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원초적 입장은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원시 상태를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공정한 계약을 이끌어내기 위해 이론적으로 추상화된 상태인거죠. (롤스)-22-23쪽

로크에 의하면 자연은 기본적으로 인간 모두의 공유물이지만 인간 자신, 즉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인 노동력은 그 개인의 배타적인 소유물입니다. (중략) 이러한 소유권이야말로 노동을 통해 얻게 되는 가장 일차적이고 중요한 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독립적인 개인의 생산 활동을 전제로 할 경우 당연히 정의로운 사회란 소유권적 권리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삼을 수밖에 없습니다. (노직)-24쪽

롤스에게 정의로운 국가란, 최소 수혜자를 위한 차등이나 불평등이 공정한 ‘절차’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는 나라를 뜻하며, 한 사회의 불평등한 제도도 최소 수혜자의 이익을 보장하는 것일 때에만 허용될 수 있다. 즉, 최소 수혜자들의 이익을 보장하지 않는 어떠한 제도도 자유의 이름으로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이다. -34쪽

노직은 사회에서 재화의 분배 양식은 모든 것을 분배하는 중앙기관의 활동 결과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재화의 분배는 무수한 개인적 교환의 결과이다. 중앙의 분배가 없는 상태에서는 롤스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분배적 정의의 문제도 있을 수 없다. 그 대신 개인의 소유 형태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노직은 정의의 문제는 소유권적 정의로 정확하게 설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36쪽

마르크스주의적 비판가들은 인간의 본성과 사회에 대한 사회계약론자들의 기본적인 정의가 뿌리 깊은 편견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사회계약론자들은 자유롭고 평등하고 이성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의 개념을 마치 중립적인 개념처럼 여기고 이에 근거하여 사회 원리를 구성하고자 하는데, 이는 첫 단추부터 이미 잘못 끼우고 있는 오류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53쪽

재화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생산 과정의 산물입니다. 생산 과정에 대한 기여도는 개인에 따라 다르고요.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인 이익은 그 기여도에 따라 나뉘어야 합니다. 역사적이고 상대적인 소득 수준만을 고려하는 차등의 원칙은 생산 과정에 대한 기여도라는 중요한 문제를 무시하는 논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노직)-73쪽

노직 선생의 도덕이란, 소유권에 기초한 개인의 권리가 침해되지 않는 한 사회체계가 실제로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 속에서 개인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사회체계가 어떤 불행과 불평등을 낳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결국 사회적인 의미에서 도덕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없어져버립니다. 사회적인 도덕이 사라진 자리에 약육강식의 논리, 강자의 논리가 자리를 잡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롤스)-75쪽

롤스 선생이 나의 논리를 ‘강자의 논리’라고 했는데,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결과의 정당성은 불평등의 규모에 따른 게 아니라 취득 수단과 과정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정의의 원칙은 개인의 소유권에 기초하여 이루어지는 교환의 공정성에서 찾아야 합니다. 저는 이러한 공정한 교환을 보장하는 것이 곧 시장이라고 봅니다. 롤스 선생이 주장하는 차등의 원칙에 대한 재분배는 오히려 개인의 권한에 대한 부당한 간섭이자 사회 정의에 대한 침해에 해당합니다. (노직)-85쪽

시장의 규칙도 사회계약의 적용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선생이 결국 주장하는 것은 소유권과 교환의 절차가 정의 이론의 핵심이라는 것인데요, 소유와 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시장 논리 자체에는 불평등을 완화시키거나 보완해 나갈 수 있는 어떤 장치도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오히려 불평등을 확대하는 역할을 했죠.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교환이 그다지 중립적인 성격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롤스)-86쪽

제도는 이렇게 불안정한 인간이 상호간에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찾아낸 형식이라고 봐야 해요. 외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한계에 의해 내적으로 형성된 것이죠. 그런 점에서 제도는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나온 것이며, 인간은 이 제도들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는 얘깁니다. 문화라는 것도 그렇잖아요. 불안정한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상호관계의 표현물이 문화잖아요. 그러한 문화도 전체적으로 제도들의 구성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겔렌)-132쪽

인간은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실현을 하는 존재입니다. 자기의 의지와 선택에 따라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능동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이 그런 역할을 합니다. 그 이성이 인간을, 단지 상황에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기획하고 만들어 나가는 자율적 존재일 수 있게 만드는 것이죠. (아도르노)-132-133쪽

제도를 인간화하기 위한 근본적인 노력과 별도로, 모든 경우에 제도적인 영역 안에서만 인간이 살아갈 수 있다는 잘못된 상식을 깨는 것도 필요합니다. 현실에서 아웃사이더는 제도 안에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범죄자 취급을 받습니다. 아웃사이더로 낙인이 찍히는 순간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파멸당하지 않기 위해서 제도가 정한 틀 내에서 경솔하지 않게 처신해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개인이 제도에 대해 무저항 상태에 이를 때 사회는 그를 신뢰할 만한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합니다. 개인의 반항을 질식시킨 다음 백기를 든 개인들에게 항구적인 자비를 베푸는 통합의 기적은 바로 파시즘의 논리와 다를 바 없습니다. 제도는 불가피한 범위 내에서만 인간에게 요구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부분에서는 얼마든지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용인되어야 합니다. (아도르노)-15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논쟁과 상처 - 우리 시대 문학의 주요 논쟁에 대한 탐사!
권성우 지음 / 숙명여자대학교출판부 / 2006년 1월
절판


물론 모든 비평가가 논쟁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몇몇 논쟁을 진행하면서, 논쟁을 통한 ‘상처’의 체험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상처받기를 회피하는 이 시대의 비평가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통과제의(通過祭儀)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논쟁은 자신의 편향과 입장,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논쟁의 상처를 통해서 비평가는 진정으로 성장한다고. -8쪽

문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모든 형태의 억압에 대한 비판과 자유라면, 지금 이 시대 문인들에게 가장 크게 다가오는 억압의 기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단연코 정치권력보다는 언론권력이다. -58쪽

이 시대에 진정으로 자유로운 문인은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세계관과 정치적 입장을 지닌 언론에 대해 소신껏 비판할 수 있는 문인, 자신의 정치적, 문학적 입장에 따라 특정한 언론에 대해 투명하게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문인이라고 생각한다. -59쪽

삶과 예술은 분리되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삶의 태도와 예술의 태도는 같아야 한다. 선택을 강요하는 것은 나쁘지만 태도를 밝히라는 요구는 얼마든지 가능해야 한다. 나의 정치적 입장, 그리고 나의 문학적 태도, 나의 삶의 태도에 대해 밝히길 주저한다면, 나는 글을 쓸 이유도 없고, 그림을 그릴 이유도 없는 것이다. 대저 가짜들은 이런 얘기 할 때는 이런 입장, 저런 얘기 할 때는 저런 입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주워 섬긴다. 태도는 속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다 드러난다. (함성호, ‘다시 자유의 이름으로’, <세계의 문학>, 2005년 봄호, 259)-62-63쪽

"비판으로 큰 진보집단이 자기 집단에 대한 비판은 허용하지 않겠다면, 그 집단은 이미 진보가 아니다."(강준만)-116쪽

이 논쟁은 하나의 사안을 바라보는 현격한 입장차이로 인해, 의미 있는 공유나 반듯하게 정릴된 결론, 서로 최소한 수용할 수 있는 합의가 이루어지기에는 엄연한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점을 인정하는 것이 상투적인 의미의 생산적인 대화에 대한 기대보다는 문학권력 논쟁의 핵심을 파악하는 지름길에 연결되는 것이 아닐까. 오히려 문학권력 논쟁의 진정한 존재이유는 문학장과 비평계의 모순을 투명하게 인식해 가는 과정, 그리고 서로의 현격한 입장차이를 면밀하고도 분명하게 인식해 가는 과정 그 자체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문학권력 논쟁을 소모적인 진흙탕 논쟁이라는 식으로 단순한 잣대에 의해서 매도하는 것은 이 논쟁의 심층적인 맥락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지독히 상투적인 발언일 뿐이다. 문학권력 논쟁과 같은 격렬한 논쟁 과정에서는 어설픈 봉합보다는 차라리 서로의 입장 차를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더욱 중요할 수 있다. 그러한 상태가 오히려 ‘생산적’이라는 의미에 진정으로 값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과연 무엇이 생산적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근원적으로 물어야 한다. -120-121쪽

"참된 용기는 밤을 받아들이는 용기, 진흙 수렁을 받아들이는 용기, 고통과 절망과 퇴폐마저도 받아들이는 용기라고"(김지하)-122-123쪽

치열한 논쟁의 과정에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인신공격에 해당되는 발언은 가능한 한 피해야 한다. 피치못하게 혹은 무의식적으로 예민한 논쟁과정에서 그러한 발언을 했다면 당연히 사과해야 할 것이다. -142쪽

적어도 비판적 글쓰기를 수행하는 논자들은 명백한 오류에 대해서는 자기 반성을 수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남진우 역시 준열한 자기 성찰이 전제되어야 그의 비판이 설득력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인간인 이상, 누구나 과오를 저지를 수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분명한 과오나 인신공격을 저질렀을 때, 사과를 할 수 있느냐의 여부일 것이다. -145쪽

논쟁에서 격렬한 비판이 전개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장점이나 한계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봐도 감정적인 비판과 정도 이상의 냉소를 남발하는 경우, 우리는 그 필자가 주장하는 논지의 타당성 이전에 그 필자의 음험한 욕망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147쪽

누구나 특정한 대상을 비판하는 동기는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참으로 공정하고 정당한 동기이든, 개인적 감정에서 연유한 불순한 동기이든 간에. 설사 그 동기가 사적인 감정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비판의 내용이 옳다면, 그 주관적인 동기로 인하여 메시지 자체의 정당성이 훼손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어떤 논의도 일단 텍스트 자체의 옳고 그름을 통해 판별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163쪽

어떠한 비판에 개인적이며 주관적인 동기가 존재한다는 것과, 그 비판의 내용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별개의 차원에서 얘기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실상 어떤 논자가 특정한 주제로 글을 쓰게 된 동기를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가능할 것인가. -163쪽

자신의 주체성과 양심을 억압하는 어떠한 이해관계로부터도 자유로울 때, 진정한 지식인이 될 수 있다면, 마찬가지 의미에서 출판자본의 긴밀한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울 때 공정하고 소신 있는 비평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167쪽

"사적 원한"이라는 개념을 통해 비판 대상자의 논리를 비판하고자 했다면 해당 텍스트와 상대방의 의도에 대한 철저한 의미론적 분석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이런 실체적 규명과 논리적 검증 없이, "사적 원한" 운운하면서 상대방의 의도를 함부로 넘겨짚는 것은 일종의 언어적 폭력일 따름이다. -174쪽

<비평의 희망>을 출간한 후에 필자는 논쟁적 글쓰기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자 했다. 그것은 비판적 글쓰기의 중단이 아니라, 글쓰기 방식의 다양화를 통해 비평적 탄력을 복원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이 시대의 비평은 나에게 치열한 비판적 글쓰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이 내 비평적 운명이라면 기꺼이, 그리고 진지하게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싶다. 내 식으로 표현하자면 ‘비평의 희망’의 싹을 그 근저에서부터 파괴하고 있는, 남진우의 오만한 반론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든지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내 자신의 비평적 자존심과 진정한 ‘비평의 희망’을 위해서. -194쪽

모든 해석이 상대주의와 다양성이라는 미명으로 용인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가령 작품에 대한 지나친 과잉 해석이나 주관적인 엉뚱한 해석을 비평적 시각의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옹호할 수는 없을 것이다. -208쪽

비판이란 상대방의 글에 나타나는 모순과 한계를 지적하는 과정을 통해,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기 갱신과 성찰을 촉구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한편, 비판은 상대방의 잘못된 논리와 행태에 대해서 준열하게 고발하는 차원에서 전개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어느 쪽이건 간에, 비판은 근본적으로 대화적인 게임에 해당된다. -252쪽

물론 이러하 비판에 대해서도 성실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하리라.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비판을 위한 비판’에 대응하는 과정은 피치 못하게 자신의 논리에 대한 근거 없는 모욕과 정면으로 마주치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더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방식의 논쟁이 제 삼자에게는 당연히 진흙탕 논쟁으로 비추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중략) 사람들은 논쟁의 섬세한 맥락이나 세부적 진실, 주장의 차이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그들은 논쟁으로 생성된 표면적인 이미지로 각기 다양한 관점을 지닌 논자들을 일률적으로 판단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애초에 비판적 글쓰기를 수행한 논자들이 비판을 통해서 제기하고자 했던 문제의식은 희석되고, 논쟁에 대한 앙상한 이미지만 남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는가 하는 점이 지금 이 시대의 비판적 글쓰기를 수행하는 논자들의 일대 과제라고 생각된다. -253-254쪽

물론 외국이론가를 글쓰기에 등장시키거나 서구이론을 적용시키는 행위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안될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 절실하게 필요하기도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다양한 이론가와 이론이 어떠한 논리적 필연성을 지닌 채 등장하고 적용되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307쪽

그 복잡미묘하면서도, 너무나 인간적인(?) 감정을 이해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러한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면서 오로지 글의 논리로만 비판하는 것이 그 비판의 효과면에서도 월등히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싶다. 상대방 논자로 인해 형성된 정당한 분노를 간직하되, 그 분노를 글쓰기 자체의 치열성과 면밀한 논리로 승화시켜 나가는 자세가 지금 이 시대의 논객들에게 절실하게 요청되는 글쓰기 덕목이 아닐까 싶다. -332-333쪽

내 생각에는 이 논쟁이 어설프게 수습되는 것보다는, 선의의 논리적 고집을 통해 각자의 논지를 끝간데까지 밀고 감으로써, 주요 논점에 대한 치열하면서도 심화된 토론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들이 정말 제대로 아름답게 싸우게 되기를 기대한다. -369쪽

이 짧은 에세이 형식의 글은 창비 비판을 둘러싼 한 비평가의 사색과 고민의 흔적이다. 그 흔적을 공적인 지면을 통해서 남기려는 내 욕망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이러한 욕망은 때로 내 글쓰기가 그 정확한 의도대로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절망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자신의 입장을 이해받고, 자신이 수행하는 비판의 공적인 대의를 확보하려는 이 집요한 욕망은 과연 없어질 수 있을까. 솔직히 회의적이다. 다만, 모든 사람들에게 내 입장을 이해받고자 하는 어리석은 욕망으로부터 자유롭도록 하자. 타인의 시선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선택한 입장에 대해서 얼마나 투명한 태도로 내 자신을 실존적으로 기투(企投)하고 있는가 하는 점일 터이다. -374-37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