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아 대논쟁 2 - 정의론 & 제도 히스토리아 대논쟁 2
박홍순 글.그림 / 서해문집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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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롤스, 노직, 아도르노, 겔렌이 직접 한 말이 아닌 이 책의 저자가 각 학자의 입장이 되어 새로 쓴 대화체 문장입니다. 각 학자가 직접 한 말은 큰 따옴표로 별도로 표기합니다. 이 책은 두 가지 논쟁-롤스와 노직의 정의론 논쟁, 아도르노와 겔렌의 제도 논쟁-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밑줄그은 이 주)-0쪽

정의는 사회 제도의 제 1덕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법이나 제도가 아무리 효율적이고 정연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정당하지 못하면 개선되거나 폐기되어야 합니다. 정의는 한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해 나가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자 원리여야 합니다. (롤스)-15쪽

어떻게 ‘사회’를 구성할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만으로 인간의 삶이 유지될 수 없다는 건 너무나 상식에 속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므로 사회란 그 구성원 상호간에 구속력을 갖는 어떤 행동 규칙을 인정하고, 대부분 그에 따라서 행동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어느 정도 자족적인 조직체라고 가정해보아야 합니다. 개인을 넘어서는 자족적인 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협동이 필연적입니다. (롤스)-16쪽

이 모든 것을 폭넓은 의미에서 사회 협동적 상황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서로가 얼마만큼 어떻게 기여하였는가를 구분하기 어려운 곤란함이 일차적인 이유겠고요.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가지고 있는 부가 기득권을 비롯한 역사적인 요소와 결합되어 있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생산 결과에 대한 기여도를 측정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요. 그러므로 이러한 복잡하고 확인할 수 없는 변수들을 배제할 때 공정한 사회계약이 도출될 수 있겠죠. 사회계약론이 고도로 추상화된 자연 상태를 상정하여 계약의 원칙을 이끌어내는 작업을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계약론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로크나 루소 같은 사상가들도 ‘자연 상ㅇ태’라는, 공정한 계약을 위한 가상의 상태를 설정했지요. 저도 그들이 말한 ‘자연 상태’에 해당하는 ‘원초적 입장’을 제시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원초적 입장은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원시 상태를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공정한 계약을 이끌어내기 위해 이론적으로 추상화된 상태인거죠. (롤스)-22-23쪽

로크에 의하면 자연은 기본적으로 인간 모두의 공유물이지만 인간 자신, 즉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인 노동력은 그 개인의 배타적인 소유물입니다. (중략) 이러한 소유권이야말로 노동을 통해 얻게 되는 가장 일차적이고 중요한 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독립적인 개인의 생산 활동을 전제로 할 경우 당연히 정의로운 사회란 소유권적 권리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삼을 수밖에 없습니다. (노직)-24쪽

롤스에게 정의로운 국가란, 최소 수혜자를 위한 차등이나 불평등이 공정한 ‘절차’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는 나라를 뜻하며, 한 사회의 불평등한 제도도 최소 수혜자의 이익을 보장하는 것일 때에만 허용될 수 있다. 즉, 최소 수혜자들의 이익을 보장하지 않는 어떠한 제도도 자유의 이름으로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이다. -34쪽

노직은 사회에서 재화의 분배 양식은 모든 것을 분배하는 중앙기관의 활동 결과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재화의 분배는 무수한 개인적 교환의 결과이다. 중앙의 분배가 없는 상태에서는 롤스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분배적 정의의 문제도 있을 수 없다. 그 대신 개인의 소유 형태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노직은 정의의 문제는 소유권적 정의로 정확하게 설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36쪽

마르크스주의적 비판가들은 인간의 본성과 사회에 대한 사회계약론자들의 기본적인 정의가 뿌리 깊은 편견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사회계약론자들은 자유롭고 평등하고 이성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의 개념을 마치 중립적인 개념처럼 여기고 이에 근거하여 사회 원리를 구성하고자 하는데, 이는 첫 단추부터 이미 잘못 끼우고 있는 오류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53쪽

재화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생산 과정의 산물입니다. 생산 과정에 대한 기여도는 개인에 따라 다르고요.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인 이익은 그 기여도에 따라 나뉘어야 합니다. 역사적이고 상대적인 소득 수준만을 고려하는 차등의 원칙은 생산 과정에 대한 기여도라는 중요한 문제를 무시하는 논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노직)-73쪽

노직 선생의 도덕이란, 소유권에 기초한 개인의 권리가 침해되지 않는 한 사회체계가 실제로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 속에서 개인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사회체계가 어떤 불행과 불평등을 낳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결국 사회적인 의미에서 도덕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없어져버립니다. 사회적인 도덕이 사라진 자리에 약육강식의 논리, 강자의 논리가 자리를 잡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롤스)-75쪽

롤스 선생이 나의 논리를 ‘강자의 논리’라고 했는데,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결과의 정당성은 불평등의 규모에 따른 게 아니라 취득 수단과 과정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정의의 원칙은 개인의 소유권에 기초하여 이루어지는 교환의 공정성에서 찾아야 합니다. 저는 이러한 공정한 교환을 보장하는 것이 곧 시장이라고 봅니다. 롤스 선생이 주장하는 차등의 원칙에 대한 재분배는 오히려 개인의 권한에 대한 부당한 간섭이자 사회 정의에 대한 침해에 해당합니다. (노직)-85쪽

시장의 규칙도 사회계약의 적용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선생이 결국 주장하는 것은 소유권과 교환의 절차가 정의 이론의 핵심이라는 것인데요, 소유와 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시장 논리 자체에는 불평등을 완화시키거나 보완해 나갈 수 있는 어떤 장치도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오히려 불평등을 확대하는 역할을 했죠.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교환이 그다지 중립적인 성격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롤스)-86쪽

제도는 이렇게 불안정한 인간이 상호간에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찾아낸 형식이라고 봐야 해요. 외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한계에 의해 내적으로 형성된 것이죠. 그런 점에서 제도는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나온 것이며, 인간은 이 제도들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는 얘깁니다. 문화라는 것도 그렇잖아요. 불안정한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상호관계의 표현물이 문화잖아요. 그러한 문화도 전체적으로 제도들의 구성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겔렌)-132쪽

인간은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실현을 하는 존재입니다. 자기의 의지와 선택에 따라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능동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이 그런 역할을 합니다. 그 이성이 인간을, 단지 상황에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기획하고 만들어 나가는 자율적 존재일 수 있게 만드는 것이죠. (아도르노)-132-133쪽

제도를 인간화하기 위한 근본적인 노력과 별도로, 모든 경우에 제도적인 영역 안에서만 인간이 살아갈 수 있다는 잘못된 상식을 깨는 것도 필요합니다. 현실에서 아웃사이더는 제도 안에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범죄자 취급을 받습니다. 아웃사이더로 낙인이 찍히는 순간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파멸당하지 않기 위해서 제도가 정한 틀 내에서 경솔하지 않게 처신해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개인이 제도에 대해 무저항 상태에 이를 때 사회는 그를 신뢰할 만한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합니다. 개인의 반항을 질식시킨 다음 백기를 든 개인들에게 항구적인 자비를 베푸는 통합의 기적은 바로 파시즘의 논리와 다를 바 없습니다. 제도는 불가피한 범위 내에서만 인간에게 요구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부분에서는 얼마든지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용인되어야 합니다. (아도르노)-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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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과 상처 - 우리 시대 문학의 주요 논쟁에 대한 탐사!
권성우 지음 / 숙명여자대학교출판부 / 2006년 1월
절판


물론 모든 비평가가 논쟁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몇몇 논쟁을 진행하면서, 논쟁을 통한 ‘상처’의 체험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상처받기를 회피하는 이 시대의 비평가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통과제의(通過祭儀)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논쟁은 자신의 편향과 입장,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논쟁의 상처를 통해서 비평가는 진정으로 성장한다고. -8쪽

문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모든 형태의 억압에 대한 비판과 자유라면, 지금 이 시대 문인들에게 가장 크게 다가오는 억압의 기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단연코 정치권력보다는 언론권력이다. -58쪽

이 시대에 진정으로 자유로운 문인은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세계관과 정치적 입장을 지닌 언론에 대해 소신껏 비판할 수 있는 문인, 자신의 정치적, 문학적 입장에 따라 특정한 언론에 대해 투명하게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문인이라고 생각한다. -59쪽

삶과 예술은 분리되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삶의 태도와 예술의 태도는 같아야 한다. 선택을 강요하는 것은 나쁘지만 태도를 밝히라는 요구는 얼마든지 가능해야 한다. 나의 정치적 입장, 그리고 나의 문학적 태도, 나의 삶의 태도에 대해 밝히길 주저한다면, 나는 글을 쓸 이유도 없고, 그림을 그릴 이유도 없는 것이다. 대저 가짜들은 이런 얘기 할 때는 이런 입장, 저런 얘기 할 때는 저런 입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주워 섬긴다. 태도는 속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다 드러난다. (함성호, ‘다시 자유의 이름으로’, <세계의 문학>, 2005년 봄호, 259)-62-63쪽

"비판으로 큰 진보집단이 자기 집단에 대한 비판은 허용하지 않겠다면, 그 집단은 이미 진보가 아니다."(강준만)-116쪽

이 논쟁은 하나의 사안을 바라보는 현격한 입장차이로 인해, 의미 있는 공유나 반듯하게 정릴된 결론, 서로 최소한 수용할 수 있는 합의가 이루어지기에는 엄연한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점을 인정하는 것이 상투적인 의미의 생산적인 대화에 대한 기대보다는 문학권력 논쟁의 핵심을 파악하는 지름길에 연결되는 것이 아닐까. 오히려 문학권력 논쟁의 진정한 존재이유는 문학장과 비평계의 모순을 투명하게 인식해 가는 과정, 그리고 서로의 현격한 입장차이를 면밀하고도 분명하게 인식해 가는 과정 그 자체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문학권력 논쟁을 소모적인 진흙탕 논쟁이라는 식으로 단순한 잣대에 의해서 매도하는 것은 이 논쟁의 심층적인 맥락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지독히 상투적인 발언일 뿐이다. 문학권력 논쟁과 같은 격렬한 논쟁 과정에서는 어설픈 봉합보다는 차라리 서로의 입장 차를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더욱 중요할 수 있다. 그러한 상태가 오히려 ‘생산적’이라는 의미에 진정으로 값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과연 무엇이 생산적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근원적으로 물어야 한다. -120-121쪽

"참된 용기는 밤을 받아들이는 용기, 진흙 수렁을 받아들이는 용기, 고통과 절망과 퇴폐마저도 받아들이는 용기라고"(김지하)-122-123쪽

치열한 논쟁의 과정에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인신공격에 해당되는 발언은 가능한 한 피해야 한다. 피치못하게 혹은 무의식적으로 예민한 논쟁과정에서 그러한 발언을 했다면 당연히 사과해야 할 것이다. -142쪽

적어도 비판적 글쓰기를 수행하는 논자들은 명백한 오류에 대해서는 자기 반성을 수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남진우 역시 준열한 자기 성찰이 전제되어야 그의 비판이 설득력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인간인 이상, 누구나 과오를 저지를 수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분명한 과오나 인신공격을 저질렀을 때, 사과를 할 수 있느냐의 여부일 것이다. -145쪽

논쟁에서 격렬한 비판이 전개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장점이나 한계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봐도 감정적인 비판과 정도 이상의 냉소를 남발하는 경우, 우리는 그 필자가 주장하는 논지의 타당성 이전에 그 필자의 음험한 욕망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147쪽

누구나 특정한 대상을 비판하는 동기는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참으로 공정하고 정당한 동기이든, 개인적 감정에서 연유한 불순한 동기이든 간에. 설사 그 동기가 사적인 감정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비판의 내용이 옳다면, 그 주관적인 동기로 인하여 메시지 자체의 정당성이 훼손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어떤 논의도 일단 텍스트 자체의 옳고 그름을 통해 판별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163쪽

어떠한 비판에 개인적이며 주관적인 동기가 존재한다는 것과, 그 비판의 내용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별개의 차원에서 얘기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실상 어떤 논자가 특정한 주제로 글을 쓰게 된 동기를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가능할 것인가. -163쪽

자신의 주체성과 양심을 억압하는 어떠한 이해관계로부터도 자유로울 때, 진정한 지식인이 될 수 있다면, 마찬가지 의미에서 출판자본의 긴밀한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울 때 공정하고 소신 있는 비평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167쪽

"사적 원한"이라는 개념을 통해 비판 대상자의 논리를 비판하고자 했다면 해당 텍스트와 상대방의 의도에 대한 철저한 의미론적 분석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이런 실체적 규명과 논리적 검증 없이, "사적 원한" 운운하면서 상대방의 의도를 함부로 넘겨짚는 것은 일종의 언어적 폭력일 따름이다. -174쪽

<비평의 희망>을 출간한 후에 필자는 논쟁적 글쓰기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자 했다. 그것은 비판적 글쓰기의 중단이 아니라, 글쓰기 방식의 다양화를 통해 비평적 탄력을 복원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이 시대의 비평은 나에게 치열한 비판적 글쓰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이 내 비평적 운명이라면 기꺼이, 그리고 진지하게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싶다. 내 식으로 표현하자면 ‘비평의 희망’의 싹을 그 근저에서부터 파괴하고 있는, 남진우의 오만한 반론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든지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내 자신의 비평적 자존심과 진정한 ‘비평의 희망’을 위해서. -194쪽

모든 해석이 상대주의와 다양성이라는 미명으로 용인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가령 작품에 대한 지나친 과잉 해석이나 주관적인 엉뚱한 해석을 비평적 시각의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옹호할 수는 없을 것이다. -208쪽

비판이란 상대방의 글에 나타나는 모순과 한계를 지적하는 과정을 통해,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기 갱신과 성찰을 촉구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한편, 비판은 상대방의 잘못된 논리와 행태에 대해서 준열하게 고발하는 차원에서 전개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어느 쪽이건 간에, 비판은 근본적으로 대화적인 게임에 해당된다. -252쪽

물론 이러하 비판에 대해서도 성실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하리라.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비판을 위한 비판’에 대응하는 과정은 피치 못하게 자신의 논리에 대한 근거 없는 모욕과 정면으로 마주치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더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방식의 논쟁이 제 삼자에게는 당연히 진흙탕 논쟁으로 비추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중략) 사람들은 논쟁의 섬세한 맥락이나 세부적 진실, 주장의 차이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그들은 논쟁으로 생성된 표면적인 이미지로 각기 다양한 관점을 지닌 논자들을 일률적으로 판단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애초에 비판적 글쓰기를 수행한 논자들이 비판을 통해서 제기하고자 했던 문제의식은 희석되고, 논쟁에 대한 앙상한 이미지만 남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는가 하는 점이 지금 이 시대의 비판적 글쓰기를 수행하는 논자들의 일대 과제라고 생각된다. -253-254쪽

물론 외국이론가를 글쓰기에 등장시키거나 서구이론을 적용시키는 행위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안될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 절실하게 필요하기도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다양한 이론가와 이론이 어떠한 논리적 필연성을 지닌 채 등장하고 적용되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307쪽

그 복잡미묘하면서도, 너무나 인간적인(?) 감정을 이해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러한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면서 오로지 글의 논리로만 비판하는 것이 그 비판의 효과면에서도 월등히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싶다. 상대방 논자로 인해 형성된 정당한 분노를 간직하되, 그 분노를 글쓰기 자체의 치열성과 면밀한 논리로 승화시켜 나가는 자세가 지금 이 시대의 논객들에게 절실하게 요청되는 글쓰기 덕목이 아닐까 싶다. -332-333쪽

내 생각에는 이 논쟁이 어설프게 수습되는 것보다는, 선의의 논리적 고집을 통해 각자의 논지를 끝간데까지 밀고 감으로써, 주요 논점에 대한 치열하면서도 심화된 토론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들이 정말 제대로 아름답게 싸우게 되기를 기대한다. -369쪽

이 짧은 에세이 형식의 글은 창비 비판을 둘러싼 한 비평가의 사색과 고민의 흔적이다. 그 흔적을 공적인 지면을 통해서 남기려는 내 욕망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이러한 욕망은 때로 내 글쓰기가 그 정확한 의도대로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절망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자신의 입장을 이해받고, 자신이 수행하는 비판의 공적인 대의를 확보하려는 이 집요한 욕망은 과연 없어질 수 있을까. 솔직히 회의적이다. 다만, 모든 사람들에게 내 입장을 이해받고자 하는 어리석은 욕망으로부터 자유롭도록 하자. 타인의 시선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선택한 입장에 대해서 얼마나 투명한 태도로 내 자신을 실존적으로 기투(企投)하고 있는가 하는 점일 터이다. -374-3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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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중지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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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됨이 무엇을 뜻하는지 점점 더 모르게 된다. 『예언의 서』-7쪽

예를 들어 죽음에 관해 더 깊이 생각해 보라.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이미지, 새로운 언어적 영역과 마주치지 않는다면 정말 이상한 일일 것이다. (비트겐슈타인)-9쪽

죽음이 모든 생물, 인간을 포함한 동물이든 네가 밟고 다니는 풀로부터 백 미터에 이르는 세콰이아덴드론 기간테움에 이르는 식물이든 모든 생물에게 똑같다면, 자신이 죽을 것임을 아는 인간을 죽이는 죽음과 그것을 절대 모르는 말의 죽음이 똑같을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 그 질문은 계속 이어졌다. 누에가 고치 안에서 스스로를 가두고 문을 걸어 잠갔을 때, 이 누에는 어느 시점에서 죽는가? 하나의 생명이 다른 것의 죽음에서 태어나는 것, 누에의 죽음에서 나방이 태어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 둘이 같음녀서도 다른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아니면 나방이 아직 살아 있으므로 누에는 죽지 않은 것인가? (어항의 물 위를 움직이는 영이 초보 철학자에게 던진 질문)-95-96쪽

그 말(하나의 죽음에서 다른 것의 생명이 태어난 것을 변태라 부름)이 사물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사물에 붙이는 이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구나, 너는 사물이 진정으로 어떠한지는 절대 모를 것이다, 심지어 그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를 것이다, 네가 사물에 붙이는 이름은 그저 이름, 네가 붙이는 이름에 불과할 뿐이니까. (어항의 물 위를 움직이는 영이 초보 철학자의 대답에 붙이는 말)-96쪽

정말로 죽음이라는 이름값을 할 만한 죽음, 그런 일이 일어날 때 그 이름을 말할 사람은 없겠지만, 그 죽음에 비하면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다른 것들은 아주 작고 하찮은 세목에 불과하지. 그러니까 죽음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거로군요, 초보 철학자가 약간 불필요한 결론을 내렸다. 내가 말한 게 바로 그거다. 그래서 우리의 죽음이었던 것은 작동을 멈추었지만, 다른 죽음들, 동물과 식물의 죽음은 계속 작동을 하는 거다, 따라서 그 죽음들은 독립적인 거다, 각각 자기 영역에서 일을 하는 거다, 그런 말씀이죠. 이제 알아들었구나. 네. 좋아, 이제 가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라, 어항의 물 위를 움직이는 영이 말했다. -98쪽

memento, homo, quia pulvis es in pulverem reverteris (인간이여, 너는 흙이며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임을 기억하라)-2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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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이] 2009-02-22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라마구에 빠지셨군요^^ 정영목씨가 사라마구 책을 많이 옮기는듯. 저도 빨리 입문해야 하는데 ㅠㅠ

마늘빵 2009-02-23 09:08   좋아요 0 | URL
^^ 네, 근데 이제 그만 읽으려고요. 눈뜬자, 눈먼자, 이름없는 자,까지가 제일 좋았고, 동굴, 도플갱어도 괜찮았는데, 죽음의 중지까지 읽으면서 흥미가 조금 떨어진거 같아요. 나중에 읽지 않은 다른 책들을 읽을 기회가 있으면 그때 읽고, 이제 다른 책을 봐야겠어요.
 
도플갱어
주제 사라마구 지음, 김승욱 옮김 / 해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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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한, 숨은 제스처라는 주제가 제기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람들은 예를 들어 톰이나 딕이나 해리가 특정한 상황에서 이런저런 제스처를 했다고 말한다. 아주 간단하게. 마치 의심, 연대감, 경고를 표현하는 이런저런 제스처가 모두 항상 같은 의미인 것처럼. 의심은 항상 신중하고, 지지는 항상 무조건적이며, 경고는 항상 사리사욕 없이 이루어진다는 듯이. -59-60쪽

혼돈은 해석되기를 기다리는 질서일 뿐이다. -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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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09-02-14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라마구에 완전 빠지셨네요.^^


마늘빵 2009-02-16 09:21   좋아요 0 | URL
^^ 네. 새로 나온 책 또 읽고 있어요. 근데, 음, 아무래도 눈 먼자들의 도시, 눈 뜬자들의 도시보다는 못하네요.

[해이] 2009-02-15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사라마구에 입문해야 하는데 돈이 없어서 못사고 있슴다ㅠㅠ

마늘빵 2009-02-16 09:22   좋아요 0 | URL
도서관을... ^^ 해이님도 책을 빌려읽지 않고 사서 읽는 스타일인가요? 그러면, 꾸준히 돈이 많이 들텐데. 저도 매달 책에 나가는 돈이 만만치 않아요.

[해이] 2009-02-16 11:33   좋아요 0 | URL
절판된 책이 아니면 도서관에서 안빌려요ㅋ 돈이 많이 들긴 하는데 그게 공부할땐 훨씬 편하드라고요~
 


 작년 하반기 조금 비싼 녹음기를 하나 샀는데, 이걸 아직 제대로 써먹지를 못했다. 이번에 김상봉 선생님 강연에 가서도 손으로 필기도 했고, 귀로도 열심히 들었지만, 그 울림을 남기고 싶어서, 녹음기를 가져갔다. 한번은 녹음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었고, 한번은 녹음기가 방전된 상태였고, 한번은 야근하느라 못갔고, 한번은 녹음버튼과 정지버튼을 헷갈려서 강의 내내 정지상태로 있다가 쉬는 시간에 녹음버튼이 눌러졌고, 마지막 한번은 가방 속에서 며칠 동안 내내 켜져있어서 결국 또 녹음을 못했다. 그러니까 결론은 한 강도 녹음을 못했다. 다음주에는 선생님께서 베트남에 세미나 가시고, 다담주에 또 씨알재단에 강의를 하러 오시는데, 그때는 모두 녹음을 해야겠다.

  이번 강의는 20세기 한국 철학을 돌아보는 시간이었고, 다음 강의는 그 중 한 분인 함석헌 만을 5회에 걸쳐서 다루신다. 이번에는 함석헌, 유영모, 박동환 세 철학자를 말씀하셨는데, 함석헌 이외에 두 분 유영모와 박동환은 처음 들어보는 철학자였다. 유영모에 관해서는 그래도 여기저기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데, 박동환에 관해서는 전혀 정보가 없다. 개인적으로는 선생님의 학창 시절 스승님이었다고 하는데, 선생님께서 지향하시는 바와는 상반된 철학을 하시는 분이라고. 그치만, 나와 같지 않다고 해서 그를 대단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는 법, 선생님께서는 철학자 박동환을 높게 평가하신다. 인터넷 서점에서 '박동환' 세 글자를 치면 저서가 두 권 나오는데, 구할 수 없는 책들이다. 선생님께서는 세 권 말씀하셨다. 헌책방에 혹시 있을까 해서 고고북으로 검색했는데 없다.  

  강의 시간에, 또 술잔을 기울이며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느낀 바 중 하나는, 우리네 현실에 기반한 철학을 해야 한다는 것. 철학, 사회학, 정치학 등 인문/사회 과학을 공부함에 있어 너무 서양의 지식 흐름을 따라가려는 노력만을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네 현실과 그네들의 현실은 분명히 다른데. 물론! 그네들의 현실에 기반한 말말말들을 우리말로 번역해 전파하면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서구 대가들의 번역서가 꾸준히 나오고, 세미나가 이루어지는 것도, 결국 거기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가끔 우리는 중요한 걸 잊는 듯 하다. 정확히 옮기고 전파하고 그들을 따라가는데 급급한 듯 하다. 이렇게 지금 따라간다고 하지만, 자칫 지금뿐 아니라 평생 따라가기만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네 철학, 우리네 사회학, 우리네 정치학, 우리네 역사학이 필요한 것이다.  

  레비나스의 윤리에 대해 사람들이 찬사를 보낸다. 그런데, 레비나스가 인터뷰에서였는지, 책에서였는지 어떤 말을 했는데 - 아, 정확한 문구가 기억이 안난다. 이런. - 선생님께서 전달해주신 그 말을 듣고서 그의 철학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 기억이 안나서 답답한데 - 저질 기억력은 여기서 또 훼방을 놓는구나. - 레비나스를 읽을 때 그 부분을 잊지 말고 염두에 두고서 읽어야겠다. 또, 촛불집회 시즌1(2008년 5월~9월) 동안에 나왔던 논의 중 프랑스의 68혁명과 비교해서 이로부터 교훈을 얻고, 앞으로의 대응 방안을 모색하려는 시도가 보였는데, 이건 아니라고 하셨다. 나도 머릿속으로 프랑스의 68혁명이 이땅에서 재현될까, 생각했던 사람 중 한 명인데, 우리네 운동은 우리의 과거 역사적 현실과 비교해 이야기를 해야 맞다고 하셨다. 동학운동이나 4.19, 5.18, 6월 항쟁, 그리고 미선이효순이 촛불집회와 관련해서 이야기를 해야지, 외국의 사례를 근본 바탕에 두고 이야기를 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이셨다. 끄덕끄덕.  

  자칫 잘못 들으면 선생님께서 외국의 모든 이론과 역사적 사례들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그건 아니다. 그건 참고사항일뿐 우리가 논의해야 할 기본 바탕이 아니라는 말씀이실 것이다. 현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우리네 과거로부터 그 교훈을 얻고, 문제점과 해결방안, 앞으로의 진행 방향을 고민해야 한다는 말씀일게다. 선생님께서 계속 고민하고 연구하시는 것, 또 그 결과물로 내놓은 <서로주체성의 이념>이나 <나르시스의 꿈>은 모두 여기에 닿아있다. 서구의 철학의 한계점을 넘어서서 우리네 철학을 하기 위한 기초 세우기 작업인 것이다. 작년에 나왔던 <5.18 그리고 역사>는 그 고민을 우리네 역사적 현실에 접목시킨 대표적인 결과물이다. 부끄럽게도 선생님을 마음 속의 스승으로 모시면서 아직까지 선생님의 모든 저작을 읽지는 못했다. 열심히 쫓아다님과 동시에 책읽기도 부지런히 따라가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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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9 1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9 1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라 2009-02-10 0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부럽네요. 김상봉 선생님 강의 한번 들을 기회 있었으면 좋겠어요

마늘빵 2009-02-10 09:02   좋아요 0 | URL
저도 뵌 적은 있어도, 강의를 들은 건 처음이에요. 기회가 잘 없으니. 강의도 강의지만 술자리도 좋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