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뜬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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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고, 후속작으로 보이는 <눈뜬 자들의 도시>를 바로 집어든 독자들 중 상당수는 이 책을 다시 내려놓는 듯 하다. 그건, 사라마구 특유의 쉼표로 이어지는 쉼없는 독특한 문체를 견딜 수 없어서이거나, <눈먼 자들의 도시>만큼이나 인간의 감각을 자극하고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장면을 그려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을 읽었다던 지인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은 아니지만, 후자 때문에 책을 내려놓았다고 했다. 확실히 <눈뜬 자들의 도시>는 <눈먼 자들의 도시>만큼이나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 부족하고, 장면의 전환도 빠르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전작보다 못하다는 말은 아니다. 이 작품은 어떤 면에서 오히려 더 놀랍다.   

  비가 세차게 오는 투표소, 비가 오기 때문인지 사람들은 투표를 하러오지 않는다. 다른 도시는  상황이 어떤가 해서 조사를 해봤더니, 여기보다는 조금 나은 듯 하다. 아마도 날씨 때문이었을 것이다. 투표율이 매우 저조한 것은. 그러나 절반 이상의 유권자가 백지투표를 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여기서부터 소설은 시작된다. 백지투표. 가당키나 한 말인가. 그 험한 날씨를 뚫고 투표에 참여한 이들이 백지를 냈다는 사실을 믿으란 말인가. 그러나 정말 사실이다. 왜 그랬을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장면은 빠르게 전환되지 않지만, 인내심을 갖고 소설을 읽어나가면 점점 의문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궁금해서라도 책장을 넘긴다.  

  정부는 그들을 버리기로 했다. 백지투표를 한 시민들을. 그래 버렸다. 그 말이 정확하다. 행정부와 사법부, 경찰, 군인 등이 모두 빠져나가고 시민들만 덩그러니 도시에 남았다. 정부는 시민을 버렸다. 그리고, 시민들을 일일히 찾아다니며 백지투표를 했는지 여부를 조사하고, 왜 했는지, 배후가 누구인지 캐묻는다. 시민들은 그들의 질문에 아무 것도 대답해줄 수 없다. 아는 바가 없으므로. 배후는 없으므로. 지난 촛불 정국 때 이명박 정부는 없는 배후를 자꾸 캐물었다. 이번 용산 참사에서도 또 배후를 묻는다. 배후가 누구냐. 배후는 없다. 보다 못한 시민들이 배후를 알려주겠다고 했다. 배후는 촛불 공장 사장님이다. 촛불 공장 사장님이 매출을 올려보고자 시민들을 선동했다.  

  급기야 희생량을 찾는다. 처음엔 희생량을 삼을 생각은 아니었다. 단지 그가 배후라고 추정했을 뿐이다. 어느날 갑자기 도시를 지배해버린 백색혁명, 그 때 앞을 볼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 그가 백지투표를 뒤에서 조정했을 것이다. 찾아라. 그리고 심문하라. 원인을 알 수 없는 시민들의 백지투표에 당황한 정부가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범인을 찾는 것 뿐이다. 그는 단지 용의자였다. 하지만 아무리 조사해도 나올 것이 없자 정부는 또다른 계략을 꾸미기 시작했다. 그를 아예 범인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사태를 해결하는 매우 간편한 방법이다. 있으면 색출하면 되고, 없으면 만들면 된다.  

  이명박 정부는 촛불 집회를 주도한(?) 단체를 압수수색하고, 그 구성원을 연행했다. 연행하는 경찰이나 수사하는 검찰을 향해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면, 그도 잡아갔다. 화나 거리로 나오면 물대포를 쐈고, 곤봉을 휘둘렀다. 물대포에 색소까지 넣어 도망가도 지하철역마다 경찰을 배치해 모두 체포했다. 나는 출근길에 봤다. 시위현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하철역에 경찰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돌아다니는 것을. 그들은 색소가 묻은 시위자를 찾고 있었다. 용산 참사에서도 그들은 사과는커녕 오히려 거리로 쫓겨나게 생긴, 말을 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철거민들을 테러범으로 몰았고, 살아남은 자들을 연행했다. 그리고 사건을 마무리짓기 위해 희생량으로 삼을 배후를 물색하고 있다.

 사라마구가 한국의 현상황을 예감이라도 한 것처럼, <눈뜬 자들의 도시>에서 그려지는 모습들은 너무나 지금 우리의 현실과 닮아있다. 그래서 더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다. 그럼 결론은 어떻게 났을까? 희망적인 것은 우리네 상황과 달리 저들의 무리에 속해 있던 한 사람이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고, 절망적인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태를 되돌릴 순 없었다는 사실이다. 양심적인 한 사람의 노력으로는 상황은 개선되지 않는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비관적인 결말로 끝났다면, 그 양심적인 한 사람조차 없는 우리네 현실은 더더욱 비관적이지 않은가? 어쩌면 그리도 국회, 행정공무원, 경찰, 검찰, 법원, 언론까지 한통속이 되어 잘들 뭉치시는지. 말하고 싶어도 말할 곳이 없는, 없는 자들은 너무나 서글프다.

  양심적인 한 사람이 진실을 알리고자 신문사를 찾았다. 용의자를 범인으로 발표하지 않은 두 신문사 중 한 곳을 찾아, 진실을 보도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저들이 범인으로 찍은 이와는 개인적으로 아는 것도 아니고, 그로부터 뭘 받아먹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진실은 알려져야 한다는 생각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음에도 행동했다. 그리고 다음날, 신문은 모두 회수됐다. 길거리에서 시위에 사용된 방송 장비와 차량을 빌려줬다고 업체 관계자를 잡아가고, 유인물을 찍어내는 단체를 수색하고, 찍어낸 유인물을 압수하는, 심지어 대목만났다고 좋아하며 야밤에 포장마차 운영하던 아줌마, 아저씨까지 조사하는 이 정부와 하나도 다를 게 없었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그래도, 작은 희망이나마 있었다. 모두에게 닥친 불행한 사태 속에서도, 상황이 지금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나아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 상황 속에서도 사람들은 서로를 격려하고 보듬었다. 그러나, <눈뜬 자들의 도시>에서 그들이 맞서는 - 아니 맞서지도 못했다 - 정부는 너무나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 힘에 저항하기에 그들은 너무나 약했고,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현실은 전 작품보다는 후 작품에 더 가깝다. 그래서 더 암울하다. 우리네 현실을 보면, 사람들은 모두 눈을 뜨고 있지만, 눈 앞에 놓인 현실을 보지 못하거나 보여도 외면하고 있다. 

  우리는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선거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가 와도 사람들은 또 같은 잘못을 반복한다. 실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수가 반복되면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이 된다. 한번 실수는 5년의 재앙을 부른다. 그 재앙의 현실을 지금 우리는 두 눈으로 보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물리적인 폭력이나 연행 등의 경험이 아니더라도, 이미 충분히 경험하고 있다. 직장에서 퇴직당하고, 고등학교나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은 취직을 못하고,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지, 연봉은 내려가지, 매 끼니마다 밥상에 어떤 음식이 오르는지, 그 음식은 믿고 먹어도 되는지 의심해야 하지, 살고 있던 집에서 쫓겨나 거리에 나앉게 되지, 말해 입만 아프다. 예전에도 없던 일은 아니지만, 지금은 예전보다 훨씬 심해졌다.  

  방법은 하나다. 제정신 못차려서 지금의 화를 불렀다면, 앞으로 남은 4년을 보내고, 두 눈 멀쩡히 뜨고, 자신의 의사를 드러내는 것이다. 힘없는 자들이 막강한 힘을 가지는 유일한 순간이다. 루소가 이런 말을 했다. "국민들은 선거 때에만 자유로울 뿐, 선거가 끝나는 순간 노예로 전락한다." 지금 우리가 그걸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자유로운 순간, 힘을 가지는 순간, 그 힘을 보여주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 그러나 너무 멀다. 그때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없는 힘을 모아 의사표시를 해줘야 한다. 질질 시간 끌다보면 또 자기들이 지쳐 알아서 그만두겠지,라고 생각하는 현 정부에게, 우리는 절대로 쓰러지지 않고, 넘어지면 끊임없이 다시 일어선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아 이놈들 참 끈질기다,하고 생각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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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9-01-29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서운 건... 자본주의는 끝없는 투쟁으로 살아가는 생명체 같은 건데요...
그 안에... '가진자'들이 똘똘 뭉치기는 아주 쉽지만, 못 가진 자들이 똘똘뭉치는 건, 정말 어렵다는 거죠... 더러운 자본주의...

견찰 놈들이 할 짓이 없어서...
사이버 투표 조작질이나 하고...
이 나라도 막장입니다.

http://blog.daum.net/sequncetodispersion/12881800?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sequncetodispersion%2F12881800

마늘빵 2009-01-30 00:00   좋아요 0 | URL
아 저도 방금 기사 뜬거 봤지만, 진짜 경찰이 아니라 용역이네요. -_- 철거민 내리찍은 애들은 불법용역, 얘네는 합법용역. 안그래도 건조기후님이 100분 토론 사이트에서 투표한다고 올려서 가봤는데, 이상하더라고요. 그때부터 눈치는 챘지만, 사실로 드러났군요. 참 쟤네들 할 일 없습니다. 조작이나 하고 있고.

드팀전 2009-01-30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은 눈 뜨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술 한잔 하고 헤롱거리는 제 질문입니다. 햇살을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어느정도...라는 답변일까요?

마늘빵 2009-01-30 00:05   좋아요 0 | URL
^^ 점수화시키거나 비율로 따진다면 자신있게 답하지 못하겠지만, 떴냐 감았냐로 나눈다면 떴다고 말할 수는 있을 듯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 질문은, 사회 현실에 관심을 갖고 있느냐, 약자의 아픔을 느끼는가, 부정의에 분노하는가, 등의 질문과도 닿아있는 듯 합니다. 물론 약자가 누구냐, 부정의가 뭐냐, 아픔은 어떻게 느끼냐, 현실이란 뭐냐, 라는 질문을 던지면, 마치 진보냐 보수냐를 나누는 기준만큼이나 모호해지죠. 눈을 더 크게 뜰 수 있도록 스스로를 채찍질해야겠죠.

드팀전 2009-01-30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눈을 뜬 쪽에 가깝다. 어느 순간 자신이 눈을 뜬 줄 알았더 것조차 눈을 감고 눈을 뜬 것으로 믿었다는 순간이 올 날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눈에 대해 믿으십니까? 저는 술 취한 질문이긴 하지만 제 질문의 무게를 생각보다 쉽게 답변하시는게 용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차라리 '끙' 하셨으면 ..좋았으려면만 하는게 제 바람이었지요.

루소의 질문이 선거에 충실하자로 받아들여지십니까? 아니면 선거가 그런 근원적 한계 밖에 못가지 것이니까 그 밖을 꿈꿀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마늘빵 2009-01-30 00:15   좋아요 0 | URL
쉬운 질문은 아닙니다. 그래서 짧고 간단한 질문에 길게 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글쎄요, 눈을 뜬다는 것에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큰 의미를 부여하고 계신 듯 합니다. 드팀전님께서 물어오시는 '눈을 뜬다'는 것의 무게가 무거운 만큼 답변하기는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면, 그렇다,라고 대답한거랍니다. 그 무게에 따라 눈을 감고 있으면서 뜬 걸로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루소의 서술은 단순히 "투표합시다"를 의미하는건 아니죠.

드팀전 2009-01-30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눈을 감았거나 멀었다라고 말하는 편이 났겠군요.

마늘빵 2009-01-30 00:41   좋아요 0 | URL
간만에 야밤의 댓글을 주고 받습니다. 힘드실 줄 압니다. 어떤 상황인지 안다고는 못하지만, 짐작은 되니까요. 드팀전님이 처하신 현실에서 드팀전님께서 스스로를 감았거나 멀었다고 말씀하시면 그보다 더 나은 상황에 있는, 그보다 더 나은 상황만을 멀리서 보고 있는, 저는 역시 감았거나 멀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범위를 좁히지 마시고, 조금 더 열어두셨으면 합니다. 저는 이만 먼저 잠자리에 들겠습니다.

승주나무 2009-01-30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팀전 님의 음주페이퍼, 아니 음주댓글을 보게 되는군요. (요즘 그런 기술도 있군요^^)저도 기냥 들어왔다가 글들을 주섬주섬 보고 있습니다. 마음만큼은 얼근하게 취했구요.
저는 눈과 입의 관계를 보고 있는데, 요즘 눈을 뜨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입은 좀 닫힌 것 같습니다. 쓸 말도 별로 없고 써야 한다는 생각도 많이 들지는 않습니다. 의무감이 항상 부담을 주는 건 사실이지만 쓰고 싶지 않은 마음도 그에 못지 않게 강해진 것 같습니다. 입이 나의 눈을 표현한다고 할 순 없겠지만 좀 얌전해진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좀 봤다 싶으면 전에 했던 말들이 참 X팔릴 때가 많은 것 같아요...

마늘빵 2009-01-30 00:45   좋아요 0 | URL
승주나무님 오랫만에 뵙네요. 페이퍼 하나 올린건 봤습니다. 요새 몸이 많이 바쁘셔서 그런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안으로 밖으로. 요즘 모든 게 위기 상황이지만, 저들 입장에서는 언론을 손에 쥐어야 편하니 이쪽으로 힘을 쏟겠지요. 이거 막으시느라 고생하십니다. KBS 기자와 피디들도 제작 거부 운동에 돌입했다죠. 참, 말은 그렇습니다. 예전에 내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지만, 훗날 보고 있으면 부끄럽죠. 어떻게보면 그건 그때보다 지금 더 나아졌다,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본지 너무 오래됐습니다.

드팀전 2009-01-30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작 거부 자체로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습니다. 일단 노조가 아닌 협회차원에서 제작 거부를 한다는 것 자체가 한국방송의 힘을 말해줍니다. 제작거부는 곧 철회될 겁니다. 징계 수위를 조절했다고 들었습니다. 파면에서 몇 개월 정직하는 수준으로 말이지요. 회사가 제작 거부라는 액션에 대해 일단 어느 정도 반응을 보였으니 제작거부라는 극단적 수단을 계속 유지하기란 쉽지 않겠지요. 부족함은 있겠지만 그래도 대단한 일입니다.

마늘빵 2009-01-30 09:05   좋아요 0 | URL
날이 밝았네요. 네, 신문 통해서 계속 접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내용이 실렸더라고요. 징계 수위가 조절됐다고. 언론이 무너지면 나머지도 하나씩 차례대로 무너지겠죠. 지금까지는 말씀하신대로 잘 막아내고 있는 듯 합니다. 언론뿐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도 그게 되어야할텐데, 제가 있는 영역에선 거의 일방적으로 지시를 받아야하는 상황이네요. 그렇게 크게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라 대응하기도 쉽지 않고. 또,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이 전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도 일만 하고 있죠. 대화할 소재가 점차 사라지네요. 말해봐야 공감, 동의를 얻지 못하니.

드팀전 2009-01-30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가장 부러운 사람들이 일만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일과 세상을 편안하게 분리시키거나 또는 최소한 그 연결이 없진 않으나 거리가 멀어서 촉수를 곤두세우지 않아도 좋을...또는 먼길을 천천히 준비할 수 있는...

톨스토이가 했던 말 중에 그런게 있답니다.
'부끄러운 일을 하느니 보단 차라리 아무일도 하지 않는게 낫다.'라구 말이지요.

어제부터 내린 비가 오늘 아침까지 오는군요.

마늘빵 2009-01-30 10:32   좋아요 0 | URL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일만 할 수 있으니 편합니다. 그런데, 자꾸 이거저거 눈에 보이는 사람들은 일만 할 수가 없죠. 일을 하면서도 마음이 불편하죠. 다른데 신경쓰이고. 제가 할 수 있는 능력껏 이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막을 수밖에요.

2009-01-30 2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1 1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1 1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1 15: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2 0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2 05: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2 08: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건방진너 2009-01-31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처음에는 <눈뜬자들의 도시>를 보고 <눈먼자들의 도시>후속작인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오랜만에 읽은 사라마구의 문체 때문에 책을 두세장 읽다가 말았습니다
하지만 줄거리를 읽으니 다시읽을 용기사 생기네요
감사합니다

마늘빵 2009-01-31 22:54   좋아요 0 | URL
첨 뵙습니다. 이어지는 건 맞습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 4년 이후를 그리고 있어요. 시간상으로. ^^ 근데 내용은 그때 그 상황이 고스란히 이어지지는 않죠. 저는 오늘부터 <동굴> 읽기 시작했습니다. <눈먼>을 읽고 <눈뜬>을 읽으시는 분들 중 상당수가 책을 내려놓는 거 같더라고요. 그 문체를 다시 견딜 수 없고, 이 책은 장면의 전환이 빠르지 않고 정체되어 있기 때문에요. 지금 시국과 잘 어울리는 책입니다.
 
진중권의 이매진 - 영화와 테크놀로지에 대한 인문학적 상상
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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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영화 비평이 아니다, 담론의 놀이다." 씨네21과의 한 인터뷰에서 진중권이 김혜리 기자에게 했던 말이라고 한다. 별 생각없이 무심코 던진 말이었는데, 그 말이 씨가 되어 씨네21의 연재칼럼이 되었고, 그것이 묶여 책으로 나왔다. 진중권의 말처럼 이 책은 "그림의 밖에 있으면서 그림의 안에 영향을 끼치는 액자처럼, 영화의 바깥에 있으면서도 안쪽으로 간섭을 하는 파레르곤 같은 글쓰기"를 지향한다. 칼럼식으로 쓰여졌던 원고라 각각의 글이 하나의 완결성은 가지지만, 글과 글이 모인 자리에서 (자연스러운) 연관성을 찾기는 힘들다. 그래서 글과 글을 모아 목차를 짜면서 '주제'에 따라 인위를 부여했다고 한다.  

  일반적인 영화 비평과는 다르다. 영화의 내용과 주제 중심의 비평이 아닌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넘어가면서 영화 제작에 도입된 기술과 기법들이 영화 내용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구체적으로는 디지털 기술이 어떻게 영화의 내용과 형식을 변화시켰는가에 촛점이 맞춰진다. "스크린에 비치는 이미지, 내러티브의 구성, 다루어지는 제재와 소재가 달라지고, 제작의 방식과 수용의 모델이 달라지고, 나아가 해석과 비평의 준거까지 달라지고 있다. 그 변화의 다양한 양상을 드러내는 것이 이 책의 목표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여기 소재로 쓰인 영화들이 아니다. 이 영화 목록은 이 책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진중권이 '기술합성시대의 예술작품'을 좀더 수월하게 이야기하기 위해 끌어온 재료에 불과하다. 정작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해당 영화가 아니라, 해당 영화에 들어있는 디지털 기법과 장치, 그리고 이로부터 인문학적 메세지나 상상력을 도출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 자체의 무게감이나 완성도 등을 떠나 <다이하드 4.0>, <슈렉>, <스파이더맨>, <트랜스포머>와 같은 오락 영화들부터 <필로우북>, <시계태엽 오렌지>, <라쇼몽>, <베를린 천사의 시>등의 덜 대중적인 영화들까지 가리지 않고 소재로 삼는다.  

  그는 이야기를 하다가 발터 벤야민을 자주 언급한다. "예술에서 혁신은 내용도 아니고 형식도 아니고, 기술에서 나온다." 라는 발터 벤야민의 말처럼, 진중권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진중권은 발터 벤야민이 이미 말한 바를 자기식으로 소화해, 몇몇 영화를 대상으로 재해석하는건지도 모르겠다. 벤야민을 접하지 않아서 확실히 말하기는 어렵다. 디지털 기법과 기술에 관한 알 수 없는 생소한 용어들이 아무렇지 않게 등장해서 빠르게 읽히진 않는다. 이 부분이 씨네21에 연재할 때 독자들이 이건 영화 비평도 아닌데다 또 왜 이렇게 어려운게냐, 라는 투덜거림으로 나타난 것 같다.

  영화 <300>에 관한 글을 읽는 동안엔 지난 디워 논쟁이 떠올랐다. 진중권이 <디워>를 까던 때, 네티즌들은 그럼 영화 같지도 않은 <300>은 왜 까지 않느냐고 힐난했는데, 거기에 대한 대답이 나와있기 때문이다. 나는 진중권이 <디워>를 까기 전에 그 영화를 봤는데 매우 지루했다. 뭐 이런 영화가 다 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마치 오래전에 아무 생각 없이 고른 <여고생 시집가기>를 봤을 때의 느낌이랄까. 중간중간 건너뛰는 듯한 느낌은 '스토리의 부재' 때문이었다. 왜 진중권이 토론에서 언급해 국민 상식이 되어버린 용어가 있지 않은가. 데우스 엑스 마키나. 

  "<300>이 가진 '서사의 빈곤'은 어쩌면 비난할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라고  말하며, "어차피 시각적 측면과 서사적 측면은 서로 충돌하는 경향이 있"고, "문학성과 조형성을 어설프게 배합려다가는 자칫 둘 다 산만해질 수 있다"는 견해를 내놓으면서, <300>이 서사의 복잡성을 포기하고 시각적 과잉으로 대신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원작이 본래 만화이니 소설과 달리 플롯의 전개가 단순할 수밖에 없고, 소설의 서사를 만화로 재현하기는 힘들다는 말도 덧붙인다. 대사가 많으면 서사가 복잡해고 치밀해질 수는 있지만, 우리가 만화를 볼 때 대사가 많으면 짜증을 내고 지루하는 것과 같달까. "이미지를 설득하지 않는다. 그저 도취시킬 뿐이다. 이성은 마비되고, 그래서 정신은 황홀하다."   

  우리에게 익숙한 영화를 이야기한다고 해서 읽기 편한 건 아니지만, 읽다보면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새롭게 드러내 영화를 다시 보게 만든다. 우리가 웃고 즐겼던 <슈렉>에서는 하이퍼리얼 효과를, 머리 아프게 봤던 <나비효과>와 <메멘토>를 통해서는 공간적으로 평행한 여섯 개의 가능태들과 기억의 조작과 사건의 연속성에 관해,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통해서는 영화의 촉각성을, <다이하드 4.0>을 통해서는 '보기'와 '보여짐'의 권력관계를 읽는다.

  여기 언급된 영화들을 다 봤다면 책을 더 재밌게 읽을 수 있었겠다는 생각도 든다. 모르는 영화를 말할 땐 지루한 감도 없지 않았다. 아직 보지 못한 영화는 챙겨보고, 이미 봤던 영화는 '다시보기'하면서 그 내용을 확인해보면 되겠다. 이 글은 진중권 개인이 자신이 가진 지식과 식견으로 영화와 기술과 인문학을 버무린 결과물이고, 각각의 개개인은 또 제 자신의 지식과 상상력으로 다른 '버무림'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감독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관객에 따라 참 다양하고 많은 해석이 가능하다. 영화는 다른 문화 매체에 비해 훨씬 열려있는 텍스트다. 그래서 어떤 하나의 해석이 정답이라고 단정지을 필요도 없고, 단정지을 수도 없다. 이 책은 진중권의 담론 놀이의 결과물이고, 나머지는 독자, 아니 관객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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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9-01-28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이 책 보다가 필받아서 여기 나온 영화들 다시 봤지 뭐예요 ㅋㅋ

마늘빵 2009-01-28 09:07   좋아요 0 | URL
어헛, 어떤걸 봤길래? ^^ 꼭지별로 읽고서 영화 하나씩 찾아 봐도 좋을듯.

프레이야 2009-01-28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아가요^^

마늘빵 2009-01-28 09:07   좋아요 0 | URL
헙! ^^
 
[그림 속으로 들어간 소녀]의 서평을 써주세요
그림 속으로 들어간 소녀 - 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대필 작가의 독백
배홍진 지음 / 멘토프레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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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주 수요일이면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을 위안부 할머니들. 그들은 모두 꾸미지 않아도 이쁜 소녀에서 주름을 감출 수 없는 할머니가 되었고, 일부는 세상을 떴다. 이 책의 주인공인 강덕경 할머니 또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분이다. 그러나, 그녀의 육신은 떠났을지 모르지만 그녀의 마음은 아직도 수요일이면 일본 대사관 앞을 지키고 있다. 마음 편히 가셨으면 좋으련만 일본의 제대로된 사과조차 받아보지 못하고 그렇게, 한스럽고, 외로운 세월을 보내다 가셨다. 일본 정부뿐 아니라 한국 정부도, 그리고 그 분들의 아픔에 공감해주지는 않고 외면하는 사람들도 많이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몰랐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 집회와 그 분들의 이야기는 뉴스나 기사를 통해서 들어왔지만, 내가 아는 건 딱 거기까지였다. 신문이나 티비 뉴스 등 언론을 통해 알려지는 단편적인 사실, 딱 그만큼만 알고 있었다. 그 분들 개개인이 수십년 걸어온 삶길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아는 바가 없었다. 어쩌면 티비 다큐멘터리나 인생극장과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서 공개됐을지도 모르겠다. 연이 없었던지, 아니, 관심이 없었다고 하는 게 솔직할게다, 그 분들의 삶을 들여다 볼 기회는 없었다.

  몇 해 전 일본계 미국인(?) 하원 의원의 노력으로 위안부 사건이 크게 보도된 적이 있었다. 미국의 행정부가 압박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당시 보도는 일본에게 상당한 부담감을 주었을 것이다. 일본군이 위안부를 운용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곳에 갇힌 여자들은 한국과 동남아 등의 여러 국가에서 강제로 차출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이후에도 일본은 한국의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사과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故 강덕경 할머니. 할머니가 아닌 소녀다. 이제 막 세상을 배울 나이에, 일본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만 믿고 배를 탔고, 그곳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탈출을 시도, 알 수 없는 산길에서 한 일본 헌병대 군인에게 잡혀가 강간을 당했다. 그리고 우리가 '위안소'라고 부르는 그곳으로 끌려갔다. 그녀는 매일밤 문앞에 길게 줄을 선 일본군인들을 제 몸으로 열 명 이상씩 받아내야 했다. 수치심이나 모멸감 등의 감정은 당장 중요하지 않았다. 몸이 너무 아팠다고 한다. 몸이 느끼는 고통은 마음이 느끼는 고통에 앞섰다. 당장 한 명이라도 덜 왔으면 하고 바랐다.  

  이 책은 강덕경 할머니 개인의 삶을 들여다본다.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떻게 위안부가 되었으며, 그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무슨 생각으로 세상 밖으로 나와 자신을 드러내야 했는지, 그리고 왜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을, 정확히는 강덕경 할머니를 포함한 위안부 할머니들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기억해주기를 바랐는지, 글을 읽을 줄 모르고, 글을 쓸 줄 모르는, 안다해도 더 이상 말할 수도, 쓸 수도 없는 할머니를 대신해, 한 대필 작가의 손을 빌려, 말한다. 대필 작가의 손으로 쓰여진 이 글을 통해 할머니의 삶은 당신의 바람대로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었다. 

  얼마 전, 고등학교 근현대사 교과서 논란 때 뉴라이트 진영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을 향해 자발적 매춘을 한 창녀라는 망언을 한 적이 있다. 어디 이런 발언이 한두번 있었던 것도 아니라 새삼스러울 건 없지만, 소위 이름있는 학자라는 사람들이 이따위 막말이나 하고 다니니 할머니들 마음이 어땠을까. 국회의원들과 학자, 정부가 힘을 합쳐 일본에게 사죄를 요청해도 일본이 들어줄까 말까한 마당에 내부에서 이런 말이 나오니, 일본이 어찌 한국 정부를, 위안부 할머니들을 우습게 보지 않을 수 있으랴. 소녀에서 할머니가 된 분들이 점점 나이를 먹고 늙어, 한 분 두 분 세상을 떠나고 있는 시점에서, 이 분들의 작은 목소리는 너무나 외롭다. 현 정부에서는 더더욱.  

  에세이도 소설도 아닌 이 책의 형식은 처음엔 불편했다. 강덕경 할머니가 된 1인칭 시점에서 글을 써내려가다가도 어느 순간 작가 자신으로 돌아와 할머니가 경험한 것들에 대해 작가의 말을 늘어놓는다. 각각의 꼭지들이 각각의 다른 서술 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읽어야 그 불편함으로부터 조금 벗어날 수 있을 듯 하다. 또, 할머니가 경험한 상황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오히려 작가의 감정과 마음이 반영된 어떤 수식어들로 인해 당시의 상황이 고스란히 전달되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할머니가 경험한 것들을 작가의 시각에서 한번 걸러내 전달해주는 듯 했달까.

  작가 배홍진의 첫 책이다. 이 책의 맨 뒤에는 무경계 문화 펄프 연구소 '츄리닝바람'의 또다른 구성원인 김경주 시인의 글이 실려있다. 배홍진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글이다. 주인공은 강덕경 할머니이지만, '유령 대필 작가'가 아닌 '실명 대필 작가'로 '배홍진'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첫 책이라는 점에서, 배홍진 또한 이 책의 또다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지금껏 누군가를 대신해 글을 써왔고, 다른 대필 작가들처럼 제 이름을 밝힐 수 없었다. 대필 작가가 끊임없이 일거리를 받아내기 위해선 '대필'했다는 사실을 드러내선 안됐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한 사람의 인생을 '대필'했다. 그러나 이전과 차이점은 자신을 드러내고 공개적으로 대필했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그는 때로 유령 작가로 제 이름을 숨긴채 누군가를 대신해 글을 써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으로 그는 작가로서 세상에 신고를 마친 셈이며, 앞으로 나올 그의 온전한 작품 <내 슬픈 상대성 이론 저편의 방콕>을 통해 '실명 대필 작가' 딱지 또한 뗄 것이다. 10년간 글을 써왔다고 한다. 글만을 위해서 삶을 살아온 사람 같다. 글이 안써지면 훌쩍 어디론가 떠났다고 한다. 그의 예정작을 읽겠다고 약속할 순 없지만, 작가로서의 첫 작품 괜찮았다고 말해주고 싶다.   


* 숙제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
한 위안부 할머니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자연스럽게 메세지를 전달한 점

서평 도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한핏줄 도서' :
<봉선화가 필 무렵>(윤정모) - 위안부 할머니들의 그림과 함께 쓴 역사 동화
<위안부 리포트1>(정경아) - 위안부 할머니들의 체험을 비롯 피해 사실을 종합적으로 전달한다.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
이명박 이하 행정부, 한나라당 모두, 뉴라이트, 경찰, 검찰, 조중동 기자들+조갑제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 
"연민이란 타인에게 있을지도 모르는 슬픔에 대한 우리들의 상상력이다. 동정이 계급적 의식을 전제한, 타인의 불행에 대한 제도적이고 고양된 슬픔의 베풂이라면 연민은 너와 내가 같은 인간이란 사실에 대한 슬픔이다. 그러므로 동정엔 실천이 따르지만 연민엔 실천이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연민은 사람을 주저앉게 만든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혐오를 낳기도 한다. 까닭에 연민은 너와 내가 같은 슬픔을 지니고 있다는 비극적 이야기에 끊임없이 경도되고 싶어하는 자아의 상상력이다. 나는 지금 강덕경 할머니를 연민하고 있다."(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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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이 포 벤데타 - (정식 한국어판) 시공그래픽노블
앨런 무어 지음, 정지욱 옮김 / 시공사(만화) / 2008년 12월
구판절판


당신의 괴롭힘, 당신의 절망, 당신의 두려움, 그리고 당신의 애정을 담아 가꿔 온 편협한 사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횡령자, 사기꾼, 거짓말쟁이들이 끊임없이 등장하여 재앙과 같은 판단을 내리는 상황이 이어져 왔죠. 이것은 단순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누가 그들을 선택했습니까? 바로 당신들이었습니다! 당신이 이 사람들을 뽑았습니다. 당신이 그들에게 당신을 대신해 판단할 권한을 준 것입니다. 물론 누구든지 한번쯤은 실수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똑같은 치명적인 실수들을 수백 년 동안 되풀이한다는 것은 저로서는 의도적인 것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습니다. 당신이 이 사악한 무능력자들을 장려했으며, 이들은 당신의 일과 인생을 위태롭게 만들었습니다. (계속)-116-117쪽

(이어서) 당신은 그들의 지각없는 주문들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고, 그들이 당신의 일터에 위험하고 증명되지 않은 기계들로 가득 채우는 걸 허락했습니다. 당신은 그들을 멈출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그저 "안 돼"라는 말만 하면 됐습니다. 당신에게 기개란 없습니다. 당신은 자존심도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관용을 베풀 것입니다. 난 앞으로 당신이 어떤 식으로든 발전한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당신에게 2년이란 시간을 줄 것입니다. 만약 2년 후, 당신이 여전히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해고될 것입니다. -117-118쪽

침묵하는 대다수에 의존하는 걸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이비. 고요함은 부서지기 쉬운 법이니까... 한번만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면 그 고요함은 사라지지. 하지만 사람들은 겁에 질려 있고 지리멸렬해. 이 기회를 틈타 몇몇은 항의할지 모르지만 그건 그저 누군가가 황야에서 소리를 지르는 꼴과 같은 거야. 소음은 그 앞에 오는 고요함과 연관돼 있어. 그 고요함이 절대적일수록 뇌성은 더욱 충격적으로 들리지. 우리의 주인은 민중의 소리를 몇 세대 동안이나 듣지 못했어, 이비...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기억하고 시은 것보다 훨씬 더 큰 소리지. -193-1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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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으로 들어간 소녀 - 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대필 작가의 독백
배홍진 지음 / 멘토프레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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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이란 타인에게 있을지도 모르는 슬픔에 대한 우리들의 상상력이다. 동정이 계급적 의식을 전제한, 타인의 불행에 대한 제도적이고 고양된 슬픔의 베풂이라면 연민은 너와 내가 같은 인간이란 사실에 대한 슬픔이다. 그러므로 동정엔 실천이 따르지만 연민엔 실천이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연민은 사람을 주저앉게 만든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혐오를 낳기도 한다. 까닭에 연민은 너와 내가 같은 슬픔을 지니고 있다는 비극적 이야기에 끊임없이 경도되고 싶어하는 자아의 상상력이다. -218쪽

타인을 연민하는 건 자기를 이해하는 것이다. 자기 연민은 가장 서글픈 상상력이다. 내가 아닌 것들을 이해하는 동안 나는 따뜻해져 간다. 그리고 나는 이 따뜻함을, 내가 이해한 모든 것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한다. 내가 이해한 타인의 슬픔을 타인에게 보여주는 일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그건 자기 연민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연민하고, 타인의 있을지도 모르는 슬픔을 연민하며, 나와 연민과 타인에 대한 나의 연민 사이에 있는 어떤 벽을 슬퍼한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같은 슬픔으로 괴로워하지만, 우리가 서로 똑같은 어떤 슬픔을 가지고 있다 해도 서로에게 보여줄 순 없다. 우린 우리의 슬픔으로 타인의 슬픔을 상상한다. 같은 것이지만, 우린 같다고 상상해야 타인의 슬픔을 겨우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의 슬픔은 모두 다르다. 난 이렇게 슬픈데, 넌 왜 저렇게 슬픈가? 내 안에 너의 존재에 대한 슬픔이 있어도 넌 왜 모르고 어깨를 스쳐가는가? 내가 상상한 슬픔이 너의 슬픔도, 나의 슬픔도 아니라면 그건 어디에서 온 슬픔인가? 나는 지금 너를 연민하고 있다. -218-219쪽

70년을 살아온 사람이 하나의 행동을 이해받기 위해 70년의 삶을 단 1초 단위의 세밀함까지 모두 설명할 수 있다면 그는 절대 오해받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이해란 결코 단순히 성격에 대한 인정이거나 직관, 분석에 의지하는 판단, 같은 슬픔을 통해 유추된 슬픔에 대한 연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이해, 그 사람이 왜 그 행동을 했고 고통을 받았는가에 대한 정확한 사실적 앎(상상적 사실이 아니라)으로부터 생기는 슬픔에 대한 공감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하나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자신이 살아온 70년의 삶을 모두 설명하는 동안 또다시 70년이 흐른다. 그는 무엇을 이해받았는가? -219쪽

시간이란 누명에 다름 아니다. 인간의 몸을 빌리고 나와 우리가 인식의 탈을 쓰고 견뎌야 하는 누명 같은 것이다. 그 시간으로부터 자신의 생을 오해하지 않기 위해, 인간은 순간의 밀도를 가지고 발버둥을 치면서 자신의 검진록을 만들고 살아간다. 시간을 조금 더 이해하기 위해 어쩌면 오해는 조금 더 우리 곁에 살아야 할지 모른다. 고통은 어디서 오는가에 대한 물음, 왜 우리는 사랑해야 하고 왜 우리는 헤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아련한 질문, 너는 왜 아직도 거기서 가혹한 생태계고 나는 왜 여기서 아직도 참혹한 자연인가에 대한 술회, 너의 눈 속에 담긴 연서들, 너의 종에 살림을 차렸던 수많은 풍경들, 가혹한 삶이여, 너에게 시간이란 누명에 다름 아니다. (김경주 시인 발문 ‘사실 나는 귀신이다. 산목숨으로서 이렇게 외로울 수는 없는 법이다.’ 中)-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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