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이 포 벤데타 - (정식 한국어판) 시공그래픽노블
앨런 무어 지음, 정지욱 옮김 / 시공사(만화) / 2008년 12월
구판절판


당신의 괴롭힘, 당신의 절망, 당신의 두려움, 그리고 당신의 애정을 담아 가꿔 온 편협한 사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횡령자, 사기꾼, 거짓말쟁이들이 끊임없이 등장하여 재앙과 같은 판단을 내리는 상황이 이어져 왔죠. 이것은 단순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누가 그들을 선택했습니까? 바로 당신들이었습니다! 당신이 이 사람들을 뽑았습니다. 당신이 그들에게 당신을 대신해 판단할 권한을 준 것입니다. 물론 누구든지 한번쯤은 실수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똑같은 치명적인 실수들을 수백 년 동안 되풀이한다는 것은 저로서는 의도적인 것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습니다. 당신이 이 사악한 무능력자들을 장려했으며, 이들은 당신의 일과 인생을 위태롭게 만들었습니다. (계속)-116-117쪽

(이어서) 당신은 그들의 지각없는 주문들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고, 그들이 당신의 일터에 위험하고 증명되지 않은 기계들로 가득 채우는 걸 허락했습니다. 당신은 그들을 멈출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그저 "안 돼"라는 말만 하면 됐습니다. 당신에게 기개란 없습니다. 당신은 자존심도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관용을 베풀 것입니다. 난 앞으로 당신이 어떤 식으로든 발전한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당신에게 2년이란 시간을 줄 것입니다. 만약 2년 후, 당신이 여전히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해고될 것입니다. -117-118쪽

침묵하는 대다수에 의존하는 걸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이비. 고요함은 부서지기 쉬운 법이니까... 한번만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면 그 고요함은 사라지지. 하지만 사람들은 겁에 질려 있고 지리멸렬해. 이 기회를 틈타 몇몇은 항의할지 모르지만 그건 그저 누군가가 황야에서 소리를 지르는 꼴과 같은 거야. 소음은 그 앞에 오는 고요함과 연관돼 있어. 그 고요함이 절대적일수록 뇌성은 더욱 충격적으로 들리지. 우리의 주인은 민중의 소리를 몇 세대 동안이나 듣지 못했어, 이비...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기억하고 시은 것보다 훨씬 더 큰 소리지. -193-1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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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으로 들어간 소녀 - 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대필 작가의 독백
배홍진 지음 / 멘토프레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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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이란 타인에게 있을지도 모르는 슬픔에 대한 우리들의 상상력이다. 동정이 계급적 의식을 전제한, 타인의 불행에 대한 제도적이고 고양된 슬픔의 베풂이라면 연민은 너와 내가 같은 인간이란 사실에 대한 슬픔이다. 그러므로 동정엔 실천이 따르지만 연민엔 실천이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연민은 사람을 주저앉게 만든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혐오를 낳기도 한다. 까닭에 연민은 너와 내가 같은 슬픔을 지니고 있다는 비극적 이야기에 끊임없이 경도되고 싶어하는 자아의 상상력이다. -218쪽

타인을 연민하는 건 자기를 이해하는 것이다. 자기 연민은 가장 서글픈 상상력이다. 내가 아닌 것들을 이해하는 동안 나는 따뜻해져 간다. 그리고 나는 이 따뜻함을, 내가 이해한 모든 것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한다. 내가 이해한 타인의 슬픔을 타인에게 보여주는 일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그건 자기 연민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연민하고, 타인의 있을지도 모르는 슬픔을 연민하며, 나와 연민과 타인에 대한 나의 연민 사이에 있는 어떤 벽을 슬퍼한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같은 슬픔으로 괴로워하지만, 우리가 서로 똑같은 어떤 슬픔을 가지고 있다 해도 서로에게 보여줄 순 없다. 우린 우리의 슬픔으로 타인의 슬픔을 상상한다. 같은 것이지만, 우린 같다고 상상해야 타인의 슬픔을 겨우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의 슬픔은 모두 다르다. 난 이렇게 슬픈데, 넌 왜 저렇게 슬픈가? 내 안에 너의 존재에 대한 슬픔이 있어도 넌 왜 모르고 어깨를 스쳐가는가? 내가 상상한 슬픔이 너의 슬픔도, 나의 슬픔도 아니라면 그건 어디에서 온 슬픔인가? 나는 지금 너를 연민하고 있다. -218-219쪽

70년을 살아온 사람이 하나의 행동을 이해받기 위해 70년의 삶을 단 1초 단위의 세밀함까지 모두 설명할 수 있다면 그는 절대 오해받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이해란 결코 단순히 성격에 대한 인정이거나 직관, 분석에 의지하는 판단, 같은 슬픔을 통해 유추된 슬픔에 대한 연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이해, 그 사람이 왜 그 행동을 했고 고통을 받았는가에 대한 정확한 사실적 앎(상상적 사실이 아니라)으로부터 생기는 슬픔에 대한 공감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하나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자신이 살아온 70년의 삶을 모두 설명하는 동안 또다시 70년이 흐른다. 그는 무엇을 이해받았는가? -219쪽

시간이란 누명에 다름 아니다. 인간의 몸을 빌리고 나와 우리가 인식의 탈을 쓰고 견뎌야 하는 누명 같은 것이다. 그 시간으로부터 자신의 생을 오해하지 않기 위해, 인간은 순간의 밀도를 가지고 발버둥을 치면서 자신의 검진록을 만들고 살아간다. 시간을 조금 더 이해하기 위해 어쩌면 오해는 조금 더 우리 곁에 살아야 할지 모른다. 고통은 어디서 오는가에 대한 물음, 왜 우리는 사랑해야 하고 왜 우리는 헤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아련한 질문, 너는 왜 아직도 거기서 가혹한 생태계고 나는 왜 여기서 아직도 참혹한 자연인가에 대한 술회, 너의 눈 속에 담긴 연서들, 너의 종에 살림을 차렸던 수많은 풍경들, 가혹한 삶이여, 너에게 시간이란 누명에 다름 아니다. (김경주 시인 발문 ‘사실 나는 귀신이다. 산목숨으로서 이렇게 외로울 수는 없는 법이다.’ 中)-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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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송필환 옮김 / 해냄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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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가 약간 들어있습니다. 내용을 전혀 모른 채 책을 읽으실 예정이라면 여기 밑줄긋기를 읽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책을 읽을 계획이 없다면, 그러나 이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읽으셔도 상관 없습니다. -0쪽

그들의 삶이란 항상 똑같아요, 왜죠, 생각해 보세요, 그들의 삶이란 항상 똑같아요, 다른 게 없죠, 나타났다가, 얘기하고,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사진사들에게 미소를 짓고, 항상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죠, 우리 모두가 다 그렇죠,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선생님이나 저나, 모든 사람들은, 이곳 저곳에 나타나, 얘기를 하기도 하고, 집을 나섰다간 그곳으로 돌아가죠, 가끔씩 웃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 달라질 뿐이죠, 우리 모두가 유명인이 될 수는 없죠, 다행한 일이네요, 선생님의 수집이 등기소만한 크기가 된다고 생각해 보세요, 더 클 수도 있죠, 등기소는 단지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고, 그런 것에만 관심이 있으니까요, 우리가 결혼을 하든, 이혼을 하든, 홀몸이 되든, 등기소에선 그런 것엔 관심도 없어요, 그런 일들 가운데서 우리가 행복하든 그렇지 않든, 행복과 불행은 마치 유명인들과 같은 거예요, 인기가 왔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그보다 더 끔찍한 사실은, 등기소에선 우리가 누군지조차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들에게 우리는 몇 개의 글자로 된 이름과 날짜 외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206-207쪽

완전한 죽음은 망각의 마지막 열매이고, 삶이란 기억 속에서 영원할 것입니다. -221쪽

공동묘지란 아무 작은 공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도시가 형성되면서 그 주위의 자그마한 공간을 차지하였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불행히도 그 공간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었고, 오늘날에 와서는 엄청난 면적을 차지하게 되었다. 예전엔 그 주위를 빙 돌아가며 담을 쌓았지만, 시간의 흐름으로 인해 담 안쪽의 한정된 공간 속에 죽은 자들의 치열한 자리다툼이 일어나게 되고, 마치 등기소의 경우처럼, 어쩔 수 없이 담을 허물고 조금 더 넓게 새로운 담을 쌓아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사백 년 전, 묘지를 담당했던 한 관리인의 머릿속에, 거리로 향하는 담을 제외하고 다른 방향의 담들은 모두 제거해버리자는 생각이 떠올랐었다, 그것이 담 안쪽과 바깥쪽의 감성적 관계를 새롭게 환기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그는 변론했던 것이었다. 담이 가지는 의미가, 비록 위생적인 면이나 장식적인 면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는 있지만, 그저 빨리,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을 잊혀지게 하는 효과 외엔 그다지 쓸모가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225쪽

생사에 관해 신고를 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그 애절한 망각으로 인해 제때에 사실을 알리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공동묘지는 등기소보다 더 빨리 죽은 자들의 이름을 알고 있게 되었으므로, 이 중앙 공동묘지의 또 다른 명칭은 모든 이름들이라 할 수 있다, 사실 그렇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지만, 등기소에서 그 두 단어란 마치 보자기 같은 것으로, 그 속에서 모든 이름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산 자든 죽은 자든, 공동묘지의 경우엔, 종착지라는 그 본질적 의미로 언제나 사망자의 이름이 적혀 있어야만 했다. -2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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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뜬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7년 3월
품절


* 스포일러가 약간 들어있습니다. 내용을 전혀 모른 채 책을 읽으실 예정이라면 여기 밑줄긋기를 읽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책을 읽을 계획이 없다면, 그러나 이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읽으셔도 상관 없습니다. -0쪽

인간이 가끔 두려움 때문에 또 가끔 자신의 이익 때문에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또 가끔씩은 거짓말이 진실을 방어할 유일한 수단임을 적시에 깨닫는 바람에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61쪽

테러 사흘 뒤인 이른 아침,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굳은 얼굴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백기를 들었다. 모두 왼팔에 하얀 완장을 둘렀다. 장례 예절에 밝은 사람들이 흰색은 애도의 상징이 될 수 없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라. -175쪽

열한 시가 되자 광장은 이미 가득 찼다. 그러나 군중의 커다란 숨소리, 공기가 허파를 들락거리며 내는 둔한 속삭임만 들릴 뿐이었다. 공기는 들락거리며 이 살아 있는 존재들의 피에 산소를 먹이고 있었다. 들어갔다, 나갔다, 들어갔다, 나갔다, 그러다 마침내 갑자기, 이 말은 끝을 맺지 않겠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생존자들에게 그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175쪽

시위대는 대통령궁으로 간다던데요. 조직한 사람들한테 물어보시오. 그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누굽니까. 모두이기도 하고 아무도 아니기도 하고 그런 것 같소. 틀림없이 지도자가 있겠지요. 이런 운동은 저절로 조직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자발적인 세대는 이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이런 규모의 대중 행동인 경우에는, 지금까지는 그랬지, 맞소, 그러니까 백지투표 운동이 자발적이라고 믿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그런 추론을 하다니 언어도단이로군. 이 일과 관련하여 지금 말씀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아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때가 늘 오기 마련이지, (중략) 놀라운 건 아무런 외침도 들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만세 소리 하나, 타도하라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군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구호 하나 없습니다, 그냥 등뼈까지 떨리게 만드는 이 위협적인 전율뿐입니다. -183-184쪽

이자들은 시위도 제대로 할 줄 모르네, 그들은 말했다, 돌이라도 몇 개 던져야 하는 거 아냐, 대통령 인형이라도 태우고, 창문 좀 몇 개 깨고, 낡은 혁명가도 부르고, 자신들이 방금 묻어버린 사람들처럼 죽은 몸이 아니라는 걸 세상에 보여주어야 하는 거 아냐, 시위는 그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사람들이 도착해서 광장을 메웠다. 그들은 말없이 삼십 분 동안 눈앞의 대통령궁을 바라보며 서 있더니, 이윽고 해산했다. 어떤 사람들은 걸어가고, 어떤 사람들은 버스를 타고 갔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씨 좋아 보잉는 낯선 사람에게서 차를 얻어타기도 했다. 그렇게 다들 집에 갔다. -184-185쪽

인간 본성이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여서 이들 사이에서도 이기적인 환상, 거짓된 방심, 헤픈 감상을 향한 변덕스러운 호소, 기만적으로 유혹적인 조작 등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지만, 감탄할 만한 이타심의 사례도 있었다. 우리가 언제나 이런 식으로 훌륭한 포기를 할 수만 있다면, 어쩌면 우리도 창조라는 불멸의 기획에서 우리의 작은 역할을 수행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유지하게 해주는 그런 사례들 말이다. -186-187쪽

진실을 말하면 안 된다는 것뿐 아니라, 필요하면 진실이 하나하나 거짓과 일치하게 해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사물의 틀린 면과 옳은 면이 늘 아주 자연스럽게 함께 발견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258쪽

내가 이 일을 하면서 배운 바로는 정부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말도 안 된다고 판단한 것 앞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고, 외려 그런 말도 안 되는 것을 이용해서 양심을 무디게 하고 이성을 파괴하오.
-377쪽

우리는 태어나는 그 순간 평생 지킬 협정에 서명을 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렇게 자문할 날이 온다, 누가 여기에 나 대신 서명을 했는가. -377쪽

검은 색과 빨간색으로 된 표제만 보더라도 각각의 신문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우리도 대충은 짐작할 수 있다, 조국의 적들의 또 한 번의 전복 행위, 누가 복사기를 돌렸는가, 허위 정보의 위험, 누가 그 복사 값을 냈는가.-419쪽

<옮긴이의 말>에서 옮긴이가 인용한 주제 사라마구의 글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서, 맹목적으로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이 시대에, 나이가 들면서 젊었을 때 꿈꾸던 것과는 달리 돈도 많이 벌며 편안하게 살아가는 남자와 여자를 만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다. 그들도 열여덟 살 때는 단지 유행의 빛나는 횃불이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신의 부모가 지탱하는 체제를 타도하고 그것을 끝내 우애에 기초한 낙원으로 바꾸어놓겠다고 결심한 대담한 혁명가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온건한 보수주의 가운데 어느 것 하나로 몸을 덥히고 근육을 풀었다. 따라서 그들이 과거 혁명에 애착을 갖던 것처럼 지금 애착을 갖고 있는 그 신념과 관행들은 시간이 흐르면 가장 외설적이고 반동적인 종류의 순수한 자기중심주의로 변해갈 것이다. 예의를 약간 걷어내고 말을 하자면, 이런 남자와 이런 여자들은 자신의 인생이라는 거울 앞에 서서 매일 현재의 자신의 모습이라는 가래로 과거의 자기 모습이라는 얼굴에 침을 뱉고 있다. -4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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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살라 인디아]의 서평을 보내주세요.
맛살라 인디아 - 현직 외교관의 생생한 인도 보고서
김승호 지음 / 모시는사람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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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시절, 지금은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 여자 선배 하나가 방학에 인도를 다녀왔다고 했다. 동기 하나도 인도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했다. 그 맘때쯤 나이면 한번씩 해외여행을 꿈꿔보는 시절, 나는 여행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있으면서, 한번도 실천에 옮겨보지 않았다. 여행을 위해 특별히 알바를 하지도 않았고, 돈이 야금야금 생기는 족족 음반과 책을 사거나, 영화를 보거나 하는데 썼다. 만약 내가 여행을 간다면 인도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철학의 나라 독일과 그리스, 예술의 나라 프랑스, 음악의 나라 영국, 그리고 인도와 북유럽 국가 중 한 곳에 가보고 싶었다.  

  인도에 다녀온 선배가 그 때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절대로 가방을 들어주겠다는 호의를 받아들여선 안된다고. 그네들은 사유재산의 개념이 희박해서인지 일단 제 손에 들어간 물건은 자기 것으로 간주한다고 했다. 그래서 살짝 무섭기도 했다. 여행지에서 가방을 잃어버리면 국제 노숙자가 되는 것과 다름이 없는데, 어이쿠. 그러나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에서 삶의 여유를 느꼈고, 참 우리와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그 때 직접 들은 이야기 외에 내가 인도에 대해 알고 있는 건, 별로 없다. 그럼에도 가고픈 여행지 중 하나로 인도를 손꼽은 것은, 인도가 또한 철학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선배가 느꼈던 그들의 삶의 여유란 그로부터 나오는 것이라 생각했다.  

  인도 철학은 동국대 말고는 정규 교과로 개설하지 않는 것 같다. 정규 교과도 아니다보니 접할 기회가 없었고, 한번쯤 접해보고 싶다 막연하게 생각하면서도 늘 주변부에서만 맴돌았던 탓에, 아직까지 인도 철학은 모른다. 인도 철학이 정리되어 나온 단행본 책은 있기는 하다. <인도철학>(민족사)나 <인도 철학 산책>(정우 서적), <인도 철학 입문>(동문선), <인도 철학사>(이문출판), <인도 철학사>(민음사), <인도 철학사>(한길사)와 같은.  

  <맛살라 인디아>는 현직 외교관이 직접 인도에서 보고, 듣고, 느낀 바를 바탕으로 쓴 현장 보고서다. '지금 인도'를 보여주는 가장 현장감있는 책이라고 할까. ('가장'이라는 말은 적절한 표현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관련 서적을 널리 읽어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럼에도 '가장'이라는 말을 붙이는 건 그만큼 오늘의 인도를 생생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 책은 인도의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인도의 고유의 전통 문화와 그들의 삶의 가치관을 빠뜨리지 않으면서 깊이를 더해주고, 더불어 인도 속의 한국, 한국 속의 인도를 가로지르며 보여주기도 한다. 단순히 인도의 역사나 시대적 배경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책이 아닌, 굳이 분류하자면 여행서나 여행 안내서, 혹은 에세이쯤이 되겠다.  

  여기 '맛살라'라는 말은 인도의 향신료에서 나온 말로, "단순한 향신료의 의미를 넘어 인도 문화를 대표하는 용어가 되고 있다." 오늘날의 인도를 지칭하는 용어라고나 할까. 전통 인도 음악과 서구의 팝이 어우러지고, 끊인 우유에 짜이 잎을 우려내 설탕과 생강즙을 적당히 가미한 짜이도 있다고 한다. 그들이 먹는 음식이나 즐기는 음악, 또 건축 공학, 정치 등에 이와 같은 인도 특유의 '맛살라' 문화가 있다는 말이다. 책은 크게 1부 인도를 움직이는 힘, 2부 인도는 지금, 3부 인도 이모저모, 4부 인도에서 한국을 만나다, 로 나누어져 있다.

  '인도를 움직이는 힘'에서는 자동차 시장에서의 인도와 문화 사업, IT와 BT, 우주 산업 등을 이야기 하면서, 왜 인도가 이 분야들에 강세를 보일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한다. 또 더불어 한국 사람들이 가장 관심있어 할 영어 교육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2부에서는 인도의 카스트 계급과, 그들의 연애와 결혼관, 일본과 인도의 외교 관계를 이야기하고, 3부에서는 인도의 영화와 종교, 음식 등에 대해서, 4부에서는 인도에서 자리잡은 한국 기업과 한국 전쟁, 한국 문화를 이야기한다. 각각의 작은 장에서 선명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메시지나 모습이 있어 글 한편, 한편이 흥미롭게 읽힌다.  

  인상적인 부분은, 인도 안에서도 힌두계와 무슬림계가 대립하며 힌두계의 무슬림에 대한 잔인한 학살극이 장기간 지속되었다는 것, 그로 인해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들을 경찰이 모른 척하거나 심지어는 폭도에게 넘겨주었다는 부분이다. 마치 지난 촛불 정국 때 우리네 경찰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단지 죽거나 강간 당한 자가 없었을 뿐. 죽지는 않아도 멀쩡한 대낮에 회칼에 맞아 피 흘렸던 사람은 있었다. 그 잔인한 현장에 경찰들이 있었다고. 그네들은 인종으로, 우리는 당파성 혹은 명령으로 그 같은 일을 겪었다.  

  교육 측면에서는 "2006년에는 인도 정부가 23.5%로 되어 있던 하위 카스트의 대학입학 특례 비율을 49.5%로 확대하려는 과정에서 큰 저항에 부딪히기도 했다"고 한다. 사실상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하위 카스트들에게 그네들이 인도에서 차지하는 비율만큼 대학 입학 비율을 할당해주려고 한 것인데, 상위 카스트들이 크게 반발했던 것이다. 그때 극렬히 반대한 이들은 인도 유명 대학의 의과와 공과 대학생들이었다고. 교육의 정도에 따라 향후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현격히 다르고, 빈부의 격차가 큰 만큼, 그들은 기득권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있는 자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것을 내놓는 데 인색하다. 반면 없는 자들은 내놓을 것이 없고 그들이 의당 받아야 할 것을 받으려 한다. 한편 이 부분에서 부러운 것은 정부가 나서서 그 비율을 할당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상황을 잘은 모르겠다만 개념이 제대로 박힌 정부다. 소위 기득권을 가진 이들이 정부에 몸담고 있을텐데, 그들이 나서서 하위 카스트들을 위해 비율 조정을 하려 했다는 것은 고무적이다. 한국의 공직자들에게서는 절대로 찾아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정부에 서민이 없다보니 서민을 위해 정책을 만들고 현실을 바꾸려 노력하는 이들도 없다. 그들은 그들이 보는 것만이 현실이라고 믿으니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마라톤 경주에서 상위 카스트나 좋은 가문 출신의 자녀들이 이미 반환점에 서 있다고 한다면, 소외계층 자녀들은 출발선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불공정 게임과 같은 이치이다. 인도 교육 불공정 게임의 근저에는 대부분의 부와 사회적 지위를 소수 상류계급이 독점하고, 이를 대를 이어 세습하려는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다. 물론 현재 상황은 과거에 비해 어느 정도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근본적인 대책이나 치유책이 없는 상황이다." 만약 롤즈가 같은 상황에 있었다면 역시 저자와 같이 말했을 것이다. 출발이 다른 불공정 게임에서는, 공정한 게임을 위해 약자들의 출발선을 앞당겨주는 등의 별도의 조치가 필요하다. 무지의 베일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생각해본다면 그들에게 그 정도의 '배려'를 해주는 것을 '혜택'이라고 생각지는 않을 것이다.  

  한편, 또 그 시작점이 다르다고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급제 사회인 인도가 한국보다는 낫다는 생각도 든다. 한국은 계급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계급이 눈으로 보이게끔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시작점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시키는 데에 쓸데 없는 힘을 쏟아부어야 한다. 인식이 되어야 그 다음에 그럼 우리 약자들을 위해 출발선에서 배려를 좀 해주자, 고 이야기를 할 수 있을텐데, 인식조차 못하고 있다. 아니 왜 출발선이 다르냐고 묻는다. 교육의 기회를 똑같이 주었고, 똑같이 공부하는 데 왜 출발선이 문제냐고. 이러니 출발선이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기가 너무나 힘들다. 차라리 인도처럼 계급제였다면 인식 논란은 불필요할텐데 말이다.

  저자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하다. "인도는 물론 한국에서도 교육의 균등한 기회 보장을 위해 국가의 책임, 사회의 책임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교육이라는 중차대한 문제는 국가와 사회라는 큰 틀에서 접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 교육과 대학 발전을 이유로 고등학교까지 서열을 매겨 학생을 선발하겠다는 일부 한국 대학들의 태도는 인도의 비인간적인 교육 양극화를 연상시켜 씁쓸한 심경을 금할 수 없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있는 계급도 모자라 그 계급차를 더 벌이려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정부는 상위 5%가 전체를 지배하는 사회를 바라는 듯 하다. 거기에 그 하위 95%가 적극적으로 동조해주고 있으니 어찌 속 터지지 않으랴.

  다른 나라의 모습을 빌어 우리네 모습을 관찰하는 건 필요하다. 그 나라가 비록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못살거나, 정치적으로 후진 국가라 하더라도 말이다. <100분 토론>에서 진중권이 사이버 모욕죄 이야기를 하면서 짐바브웨 사례를 꺼내려 하자 전원책 변호사가 아니 왜 다른 나라의 예를 비교하려 드느냐고 '호통'을 쳤는데, 납득이 안가더라. 왜 다른 나라의 사례를 들면 안되는건가. 진중권은 한국의 오늘이 짐바브웨의 과거보다 못하다는 걸 말하려는 데, 그게 짐바브웨 국민들을 모욕하는 거란다. 얼마나 기분 나쁘겠냐고. 진중권은 짐바브웨를 칭찬하려 했는데. 비교 국가가 어떤 대상이건 그게 꼭 소위 말하는 OECD 경제 선진국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한국의 교육을 인도와 비교하는 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앞에 인용했듯 인도는 적어도 정부가 나서서 그 격차를 줄이려 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이런 모습을 제발 좀 보고 싶다.

  

* 숙제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  오늘날의 인도를 생생하게 볼 수 있다는 것.
서평 도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한핏줄 도서' : 관련 도서를 안 읽어봐서 패스.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 인도 여행을 계획중인 이들, 오늘날의 인도에 대해 알고픈 이들.
마음에 남는 '책 속에서' 한 구절 :  위 리뷰에 인용했음. (별도로 올린 밑줄긋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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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1-18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민족분쟁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지 인도 하면 힌두교도와 무슬림의 유혈참극이 떠오릅니다.특히 펀잡 지방의 시크교도들이 힌두교도와 사이가 안 좋지요.네루의 딸인 인디라 간디도 시크교도인 자기 경호원에게 암살당했고 그 소식을 듣고 격분한 힌두교도들이 무고한 시크교도들까지 살해했구요.
그리고 우리는 걸핏하면 서구,미국,일본의 사례를 거론하는데 우리가 배울 점이 있다면 제3세계 나라들의 사례도 많이 들었으면 좋겠어요.

마늘빵 2009-01-18 23:02   좋아요 0 | URL
아 인도도 생각보다 민족 분쟁이 심각한 것 같더라고요. 이 책에서도 인도의 정치 상황에 관해서 상당 부분 할애하고 있는데, 그쵸 인디라 간디 얘기도 나왔어요. 간디 얘기는 전에 한겨레21 구독할 때 접했는데... 무섭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