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5
이권우 지음 / 그린비 / 2008년 8월
구판절판


"배우고 생각하지 아니하면 어둡고, 생각하고 배우지 아니하면 위태롭다."(<논어>)-31쪽

"지금 배우는 사람들은 기억하지도 못하고 또한 언제나 단지 필묵이나 문자에 기대기 때문에 더욱 잊어버리게 된다."(주자)-35쪽

"마치 과일을 먹는 것과 같다. 처음에 과일을 막 깨물면 맛을 알지 못한 채 삼키게 된다. 그러나 모름지기 잘게 씹어 부서져야 맛이 저절로 우러나고, 이것이 달거나 쓰거나 감미롭거나 맵다는 것을 알게 되니, 비로소 맛을 안다고 할 수 있다."(주자)

"한 번 복용하고 어떻게 병이 나을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복용하고 또 복용하고 여러 번 복용한 뒤에나 약의 효능이 저절로 생기게 된다."(주자)-37쪽

85
"타인을 이해한다, 타자를 이해한다. 우리말로 하면 역지사지, 바꿔서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한다는 건데, 기본적으로 타자를 긍정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죠. 그것은 내가 나의 울타리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울타리를 열어서 타인을 받아들이거나 내가 나를 버리고 타인의 울타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죠.
자본주의 문화는 자아의 문화, 나르시시즘 문화죠.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이해만 따지고, 절대로 문을 열지 않고, 접촉은 이해관계가 통할 때만 하고, 그런 문화 속에서 자아라고 불리는 단단한 문의 폐쇄화가 끊임없이 일어나죠. 이럴 때일수록 껍질을 깨주는 상상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나는 예술이 수행하는 가장 위대한 인문학적 경험은 고통을 이해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도정일, 최재천, <대담>, 휴머니스트, 2005, 31-32쪽)-85쪽

"반면 저는 그곳에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인간의 힘도 볼 수 있었습니다. 안전하고 행복하게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감옥에 갇힌 적도 없고 고문도 받은 일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 어딘가에 있는 알지도 못하고 평생 만날 일도 없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국제사면위원회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지구상의 어떤 생물과도 달리 인간은 경험하지 않고도 배우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의 처지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타인의 아픔 공감하는 상상력이 세상 바꾼다’ <중앙선데이>, 2006.6.8)-87쪽

"나는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읽는다. 다시 말해 굉장히 천천히 읽는다. 나에게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저자와 함께 15일 동안 집을 비우는 일이다."(앙드레 지드)-116쪽

빨리 하는 것은 읽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빨리 보는 것은 책 읽는 행위와 전혀 다른 것이다. 빨리라는 부사는 책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영화나 텔레비전, 그리고 인터넷을 수식하면 몰라도 말이다. 지은이(야마무라 오사무)는 빨리 읽기야말로 인생의 낭비라고 말하며 이런 독서법은 "매일, 매월 다량으로 책을 읽는 것을 경쟁력으로 삼는 평론가나 서평가에게나 유효한 것"이라며, 한 방 먹인다. (중략) 필요가 있어 책 읽는 것은 읽는다가 아니라 살펴본다 혹은 참조한다고 말해야 옳다는 것이다. (중략) 책이란, 읽으며 읽는 이 스스로 이해하게 하고 상상하게 하고 반성하게 해야 한다. -120-121쪽

"세상에는 천천히 읽을 수 없는, 천천히 하는 독서를 견딜 수 없는 책이 있다는 것인가. 물론 그런 책이 있다. 그러나 그런 책은 바로, 결코 읽어서는 안 되는 책이다. ...... 천천히 읽는 것, 이것이 첫 번째 원칙이며 모든 독서에 절대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다." (에밀 파게)-122쪽

"읽는 방식은 중요하다. 글을 쓰는 사람이 전력을 다해, 시간을 들여, 거기에 채워 넣은 풍경이나 울림을 꺼내 보는 것은 바로 잘 익어서 껍질이 팽팽하게 긴장된 포도 한 알을 느긋하게 혀로 느껴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바쁜 일상 속에서 천천히 책을 읽는 것은 의외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포도의 싱싱한 맛은 먹는 방법 하나에 달려 있다. 마찬가지로 읽는 방법 하나에 책 자체가 달라진다. 즐거움으로 변한다."(나쓰메 소세키)

"살아가는 리듬이 다르면 세계관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다."(나쓰메 소세키)-123쪽

"내가 잠정적으로 정답이라고,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상대방과 대화를 하면서 언제든지 수정 가능한 것이어야 합니다. 상대방과 나누는 대화에 의해 내가 가진 정보의 양이 늘어나다 보면 분명히 어느 지점에선가 내 생각을 바꿔야 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대화’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임으로써 내 생각을 발전시켜 나가는 재미있는 작업입니다."(김두식)-138쪽

책 읽는 방법 가운데 기본에 해당하는 것이 ‘깊이 읽기’다. 어떤 계기가 되었든 한 권의 책을 감명 있게 읽었다 치자. 그러고 나면 이름하여 ‘독서의 후폭풍’이라 할 만한 일이 벌어진다. 그 책에 그치지 않고, 그 책을 쓴 지은이의 책을 더 읽고 싶어 하는 경우가 일어나거나, 같은 주제를 다룬 다른 책을 읽고 싶어지는 것이다. 한 권으로 그치지 않고, 관련된 책을 두루 읽으니 정보와 교양, 그리고 지식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깊이 읽기라 한 것이다. 자고로, 좋은 책이란 그 책을 읽고 났더니 다른 책을 더 읽고 싶어 하는 욕심이 생기게 하는 책이다. 그리하여 책읽기에도 족보가 생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하는 식으로, ‘가’를 읽고 났더니 ‘나’가 보고 싶어졌고, 그것을 읽었더니 자연스럽게 ‘다’라는 책을 읽게 되더라는 것이다. -146-147쪽

(책읽기는) "더 적게 이해하는 상태에서 더 많이 이해하는 상태로 스스로를 고양하는 것"(애들러)-173쪽

나는 대단히 좋은 소설이란 밤나무들의 그 바람소리처럼 이뤄진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그 바람소리가 어떧ㄴ지 아주 세세하고도 정확하게 기록해야만 하는 게 소설가가 할 일이라면 그걸 읽고 밤나무 잎사귀들의 움직임이나 바람소리가 아니라 우리 머리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상상해야만 하는 게 독자들이 할 일이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두고 그 기법이나 문체나 구조를 얘기하는 독자를 좀체 상상하지 못한다. 그건 문학관련 종사자들이 해야만 하는 일이다. 좋은 독자라면 소설가가 어떻게 바람소리를 생생하게 묘사했는지보다는 그 바람소리를 통해 자신이 무엇을 상상할 수 있었는지 말할 수 있어야만 한다. 소설은, 가끔 이럴 경우에 삶처럼 위대해진다. (김연수, '꿈이 있기에 자존을 지킨 사람들의 이야기')-187-1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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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의 탄생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4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9월
품절


‘국부론’이라는 제목 자체가, 국가가 부유하거나 잘사는 것은 금을 아무리 많이 가져도 혹은 스페인처럼 식민지에서 금은을 대량으로 가지고 온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즉, 얼마나 국가가 건전하게 경제를 운용할 수 있을 것인가가 이 책의 진짜 관심사였단 말이지요. 전쟁 따위를 해서 다른 나라의 은을 가지고 온다고 국가가 잘살게 되지는 않는다는 게 정말로 애덤 스미스가 하고 싶었던 말입니다. -62쪽

‘국부론’에서 시작된 고전학파의 세계가 ‘참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모든 사람이 엄청나게 부자가 된다’는 생각을 담고 있던 게 아닙니다. 요즘식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의 기술과 지식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해도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 속에서 더 이상 뭘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순간이 온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72-73쪽

이때(박정희)부터 두 가지 정치이념, 즉 한국은 여타 나라와 다르다는 ‘박정희식 민주주의’와 일단 기다려서 압축성장을 끝내고 나면 분배를 하겠다는 ‘한국식 성장 우선주의’의 원형들이 하나의 정치이념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이런 두 가지 정신에 충실한 사람들을 한국식 우파라고 부를 수 있는데, 여기에 ‘미국 없이는 우리 경제가 돌아가지 않는다’라는 약간 변형된 실용적 숭미주의 같은 걸 결합시키면 바로 한국 보수이념의 원형이 됩니다. -123쪽

법조계에서 삼성의 권력이 지나치게 비대해졌다는 점도 그렇습니다. 이 역시 단순히 삼성이 관리를 했기 때문에 한국의 모든 법조인이 동시에 부패했다기보다는 좋은 국민 경제에 대한 시각을 법조인이 가질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생겨난 일이 아닌가 합니다. ‘삼성이 망하면 한국이 망한다’는 시각을 가장 적극적으로 가지고 있는 건, 제가 경험한 바로는 다름 아닌 한국의 관료집단입니다. 이를 김용철 변호사가 해석하는 것처럼 ‘관리에 의한 부패’로 볼 수도 있지만, 제 생각에는 건전한 국민경제에 대한 상식 수준에서의 시각을 한국의 법조계가 가질 기회 없이, 수출경제에 대한 환상이 너무 강해졌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중략) 한국의 자본주의는 불행하게도 삼성이라는 존재로 인해 사법권이라는 최후의 안전장치가 사라지게 된, 아무도 사법부의 결정을 믿지 않는 불행한 시장경제 모델을 가지게 된 셈입니다. -145-146쪽

농지 투기까지 하면서 부자가 된 사람들이 정치권력까지 갖는 건 중남미형 경제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인데, 이것이 전면화된 게 바로 이명박 정권 초기의 모습입니다. -162쪽

기껏해야 자기 집 한 채 정도 가지고 사는 사람들, 혹은 전,월세로 살아가는 세입자들, 즉 국민경제를 구성하는 80% 가까운 사람들과 정상적인 기업에겐 땅값과 농지값이 안정된 상태가 더 좋은 경제입니다. 이건 그야말로 상식인데, 노무현은 지방의 땅값을 올리는 것이 지역경제가 좋아지는 거라고 생각한 것이고, 이명박은 서울과 수도권의 땅값을 올리는 것이 국민경제가 좋아지는 거라고 생각한 것이라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나 저 경우나, 국민경제에는 다 치명적일 뿐입니다. -170쪽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어버린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따스한 자본주의, 혹은 인간적 자본주의, 좀 투박한 용어로 복지국가 등등 자본주의가 나름대로 사람들이 숨이라고 좀 쉴 수 있게 해보자던 노력들이 2005년 어디쯤의 한국에서는 무너져버립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경제’라는 용어 한 마디 외에는 할 줄 모르는 좀비들처럼 변해버립니다. 좀 과하게 표현하자면, 한국의 국민경제는 이 순간에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좀비처럼 경제만을 외쳐대고 있지만, 실제로 철저히 경제적 합리성으로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만을 선택하는, 지독한 경제적 인간과 시장적 원칙만이 지배하는 상황이기라도 했다면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손해 보는데도 지지하는 행위, 예를 들면 세입자가 뉴타운 개발을 지지하거나 땅도 없는 소작농이 지방토호들인 군수들의 땅값 올리기 개발정책을 지지하거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대기업의 노동유연성 정책을 지지하거나 하는 행위들은 ‘경제적 합리성’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것들입니다. -190-1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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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15인 시공초월 맞장 인터뷰
김중현 지음 / 서해문집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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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 자기 스스로가 적일 때 혁명적 미래는 가장 밝다(체 게바라)-169쪽

행복한 혁명가

쿠바를 떠날 때
누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씨를 뿌리고도
열매를 따먹을 줄 모르는
바보 같은 혁명가"라고...
내가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그 열매는
이미 내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난 아직
씨를 뿌려야 할 곳들이 많다.
그래서
난 더욱 행복한 혁명가"라고... -169-1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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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 問 라이브러리 5
강수돌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품절


(국제노동기구는) 노동자 10명 중 1명꼴로 업무에서 비롯된 우울증, 정서불안, 스트레스 내지 신경쇠약 등 각종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고 보고했다. 한국에서는 직장인의 70퍼센트가 스트레스성 정신신체 증상을 경험하고 있으며, 노동자의 50퍼센트가 직장에서 매우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최근 한 조사에서는 직장인의 3분의 2가 이직을 고려한 바 있다는 결과가 나올 정도로 직장생활이 삶의 스트레스를 높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정작 이들은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느낌을 가짐에도 ‘다른 대안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그러한 느낌을 ‘그냥 옆에 제쳐두고’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을 그대로 밀고 나갈 뿐이다. 이것이 일중독의 심각성이다. -19-20쪽

"내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집안일에 묻혀 바삐 지내는 것은 실제 그 일이 꼭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나 스스로 바쁠 필요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A.W.셰프)

"우리는 스스로 자기 내면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것을 두려워해왔다. 속을 들여다보았다가, 거기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A.W.셰프)-21쪽

‘팔꿈치사회’로 표현되는 자본주의 경쟁사회는 마라톤경주와 차원이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마라톤에서는 설사 번번이 일등을 못한다고 하더라도 생존 자체가 위협에 처하는 것은 아닌데 비해, 자본주의 상품경쟁에서는 남보다 계속 뒤처지게 될 때 생존 자체가 큰 위협을 받는다는 점이다. 더욱이 지금과 같은 신자유주의시대에 와서는 생존경쟁이 범지구적 범위에서 치열해지기에 심지어 ‘거지를 동정하지 마라’는 제목의 책이 나오기도 한다. ‘팔꿈치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거지에 대한 동정은커녕 자기 자신에게마저도 냉혹해야만 하는 ‘경제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6-37쪽

생존에 대한 두려움, 강자와의 동일시, 경쟁의 내면화가 초래하는 자기소외나 자기고립을 적극 넘어 ‘관계적 존재’로 다시 서려는 것이 소통이며, 문제상황의 정면 돌파를 위해 힘을 합쳐 해결의 주체로 ‘함께 ,당당히’ 나서는 것이 연대다. (중략)

"만약 당신들이 우리를 도와주러 왔다면 그냥 돌아가시오. 그러나 만약 당신의 문제와 우리의 문제가 뿌리가 같다고 보고 함께 해결하고자 한다면, 그렇다면 함께 일해 봅시다." (사파티스타 농민군 여성의 말) -47-48쪽

자본주의 세계시장에서 서로 경쟁하는 모든 기업들은 서로 일등을 하기 위해 사람과 자연의 생명력을 부단히 경쟁적으로 추출한다. 그러나 이 게임에서 일등을 하든 꼴찌를 하든 자본주의 시스템에 종속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일등과 꼴찌의 차이가 있다면 사람과 자연으로부터 추출한 엑기스를 분배하는 과정에서 누가 좀더 많이 가져 가고 누가 좀더 덜 갖고 가는가 하는 차이일 뿐이다. 심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파산하고 소멸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두려움’으로 인하여 서로 살벌하게 경쟁하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전략이라 믿고 따르는 점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경쟁자로 행위하고 또 그러한 경쟁을 당연시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지배적 시스템에 ‘모두’ 지배당하게 되는 근본원리다. 결국 경쟁은 지배와 동전의 양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쟁만이 살 길’이라며 사람과 자연을 무한경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는 것, 그러면서도 소수의 기득권층은 사치와 향락에 젖어 세상이 얼마나 병들어 가는지 눈치 채지도 못하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 기업체제의 근원적 무책임성이 아니고 무엇인가. -79-80쪽

미국 주도의 군사력이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강제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에 대해 에마뉘엘 토드는 "문제의 근원은 미국이 강해서가 아니라 너무 약해서"라고 말한다. 즉 세계적 무력행사 뒤에는 세계에 대한 미국의 경제 의존이라는 취약함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이를 반영하듯 미국의 무역적자는 1990년에 천억 달러였는데 2000년엔 4천 5백 억 달러, 2005년에 5천억 달러 이상으로 급증했다. 대량소비 위주의 낭비적 생활 양식을 유지하기 위해 세계를 시장화, 세계를 공장화한 결과가 대형적자로 나타나고 또다시 이를 모면하기 위해 더욱 강제적으로 시장자유화를 추진하려 하니, 역설적이게도 세계의 파국과 제국의 몰락을 자초하는 것이다. -140-141쪽

일리치 선생에 따르면 평화에는 두 가지 정의가 있다. 하나는 가진 자, 위로부터의 정의이고 다른 하나는 기층민중, 아래로부터의 정의다. 전자는 ‘평화의 유지’를 강조한다. 즉 온 세상이 자기들 뜻대로 굴러가는 것, 아무도 기존질서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잘 따르는 상태, 바로 이것이 위로부터의 평화 개념이다. 후자는 ‘평화로이 내버려두어져 있기’를 평화로 보는 것이다. 즉, 세상 살림살이를 민중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그대로 제발 그냥 놔두라는 것이다. 풀뿌리 민중에 의한 삶의 자율성, 바로 이것이 아래로부터의 평화다. -154-155쪽

"나라고 하는 존재 자체가 타인에게 선물이 될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는 온전한 인간이 된다." (일리치)-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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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42
홍기빈 지음 / 책세상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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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소성이라는 상황은 "욕망은 무한하고 달성하고픈 목적은 끝이 없는데 수단이 부족할 때"를 말하는 것이었다. 욕망이 무한하지도 않고 달성하고픈 목적이 많지도 않은 사람들, 자우림의 노래 가사처럼 "하고픈 일도 없고 되고픈 것도 없는" 그런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에서도 희소성 공리는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일까. 배를 곯으면서 낮잠을 즐기는 이들의 사회가 하나의 극단이라면 인간의 운명은 희소성과의 투쟁이라고 선언한 뒤 불철주야 경제 행위에 매진하다가 일 중독증이나 과로사에 봉착하고 마는 근대적 인간형도 또 하나의 극단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경제는 희소성에서의 선택이라는 정의의 보편 타당성은 심대하게 타격을 입게 된다.-26쪽

희소성이란 경제나 재화와 관련이 있다기보다는 주로 권력과 관련이 있다. ‘무한한 욕망’과 더불어 희소성을 낳는 또 하나의 축인 ‘한정된 수단’이라는 것도 의심스럽다. 경제학에서 가르치는 재화는, 햇빛이나 엄마의 사랑처럼 공짜로 얻을 수 있어 비용 문제가 생기지 않는 자유재는 극히 드물고 대부분 비용을 치러야 하는 희소재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본질적으로 확연하게 갈라지는 것이 아니다. 몇십 년 전까지 우리 사회에서 전화는 상당히 희소한 사치품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심지어 초등학생들까지 전화를 개인 생필품으로 사용하고 있다. 자유재까지는 아니지만 구입을 위해 치르는 비용 또한 상당히 줄어들었다. 반대로 어떤 일들이 만약 자유재였던 지하수나 공기를 독점하는 기술을 개발한다면 우리는 꼼짝없이 가게에서 물이나 공기를 사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재화 자체에서 희소성이란, 주로 어떤 것을 희소한 것으로 만들 것인가에 대해 그 사회가 집단적으로 내리는 결정에 따라 생겨나는 것이지 그 수단의 본질 자체에서 비롯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28쪽

획득의 기술이 가정생활에 종속되는 하위 기술이라면 물자를 조달하는 행위는 어디까지나 가족 성원들의 행복한 삶이라는 목적에 부합하는 한도 내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만약 마취사가 안전하고 성공적인 수술이라는 상위의 목적을 망각한 채 제 흥에 겨워 "마취술의 한계에 도전한다"면서 극단을 달리면 그야말로 큰일날 것이다. 마찬가지로 획득의 기술도 가정의 행복이라는 상위의 목적을 무시한 채 "돈벌이의 한계에 도전한다"고 굴어서는 안 된다. 혹시라도 두 기술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 "더 많은 부의 획득"을 목적으로 가정생활을 관리한다면, 가정의 행복은 사라지고 가정인지 공장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가족 모두가 혹사당하게 될 것이다. 요컨대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경제 행위에서의 목적 합리성이 독립되어 따로 노는 것을 피하고 철저하게 가치 합리성의 차원에 복무하도록 묶어두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95쪽

"인생은 포이에시스가 아니라 프락시스이다."(아리스토텔레스)-112쪽

자연적인 생활과는 동떨어진 돈벌이를 목적으로 하는 획득의 기술이 독자적으로 생겨나는 과정은 이미 보았다. 만약 행복한 삶의 내용을 구성하면서 자기 스스로를 목적으로 삼던 수많은 종류의 프락시스들이 돈벌이를 목적으로 하는 획득의 기술의 하위 기술이 돼버린다면 이윤이라는 결과를 낳기 위한 포이에시스로 전락해버릴 것이다. 또 기존의 포이에시스에 해당하는 활동들도 일단 이윤을 목적으로 획득의 기술의 하위 기술로 전락하게 되면 원래 목적했던 결과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게 된다. -113쪽

"국가란 본질적으로 개개인의 도덕적 내면이나 일상생활의 영역에 참견하는 도덕적, 윤리적 존재가 아니라, 그들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임의적으로 생겨난 연합에 불과하다."(존 로크)-129쪽

오로지 가장 강하고 효율적인 자들만이 살아남고 대다수의 무능한 자들은 굶어죽거나 지배당하도록 자유방임이 보장되어야 하며, 어떤 이유에서든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는 것은 그러한 자연의 순리를 어기는 짓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사회적 다윈주의)은 공공 교육에 반대하고 아동의 노동금지 법안이나 근로 환경 개선 법안 등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138쪽

그(아리스토텔레스)는 당시 통용되던 경제학 이론(편의상 고전파라고 부를 수 있다)에 따르면, 사람들은 그저 자기가 갖고 싶은 물건에 대한 욕망, 즉 소비에 대한 욕망만을 가질 뿐이며 화폐는 단지 원하는 물건을 얻기 위한 교환의 매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화폐 자체에 대한 욕망이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돈이 생기면 무조건 써버리고 싶어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결국 지금 소비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미래를 위해 남겨두는 희생일뿐인 저축을 장려하려면 어떤 보답이 따라야 한다. 그 보답으로 주어지는 것이 이자이며, 이자율은 궁극적으로는 실물 생산에서의 생산성과 이윤율에 의해서 결정된다. -158쪽

케인스는 기본적으로 권력욕이나 성욕과 같이 독립적인 욕망의 한 종류로서 ‘돈에 대한 욕망’이 존재한다는 관점에서 출발하고 있다. 즉 사람들은 원하는 물건을 얻기 위한 동기로만 돈을 갖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돈 그 자체를 소유하는 것을 즐긴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전파와 달리 저축이라는 행위는 순수한 희생이기는커녕 그 자체로서 즐거운 놀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케인스가 자본주의의 역동을 결정짓는 핵심적인 심리 현상이라고 보았던 유동성 선호 현상이다. 따라서 이자라는 것의 의미도 돈을 모아놓는 것에 맛을 들인 수전노들로 하여금 돈을 풀어 투자로 이끌기 위해 지급되는 유동성에 대한 일종의 웃돈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자율은 화폐 시장에서 독립적으로 결정될 뿐 아니라 고전파와는 반대로 오히려 이것이 자본의 한계 효율과의 비교를 통해 실물 생산의 투자에 영향을 주게 된다. 따라서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국가가 해야 할 일은 이자율을 적당히 낮춰가면서 화폐 보유자들의 유동성 선호를 조절하여 장기적으로는 이 금리생활자들을 ‘안락사’시켜버리는 일이다. -158-159쪽

여기서부터 각주

27) 여기서 교역trade와 시장market은 구별해야 한다. 인간 또는 인간 집단 간 물품의 이동을 전부 교역이라고 한다면, 교역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없을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성격의 교역이 항상 구매자와 판매자 간의 흥정에 의해 자유롭게 가격이 결정되는 시장 형태를 띠는 것은 아니다. 고려와 원나라의 교역처럼 조공 형태를 띨 수도 있고, 또 산간 오지의 미개인들처럼 원정 형태를 띨 수도 있다. 또 요즘 우리가 결혼할 때 겪게 되는 혼수, 예단과 같은 선물의 형태를 띨 수도 있다. 그런데 일부 현대 경제학자들은 교역과 시장을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역사적, 인류학적 지식의 결여에서 온 것이다. 19세기 영국의 웨이틀리 주교는 인간 사이의 모든 물물 이동을 시장 교환과 동일시하고, 그것을 연구하는 학문으로서의 경제학을 아예 교환학이라 부르자고 제안하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동서고금의 모든 인간 사회에는 (교역이 아니라) 시장이 존재해왔다"는 혼동이 나타나게 된다. 이런 용어상의 혼동만 피한다면 시장 없이도 사회의 발전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또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171쪽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렇게 약탈을 자연적인 생계 활동으로 보는 것은 현대인에게는 어처구니없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의 논리는 이렇다. 인간이 먹이를 얻기 위해 동물들과 싸우는 수렵의 기술은 자연적이다. 그렇다면 "수렵은 단지 동물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자연에 의해 타인들에게 지배당하도록 되어 있음에도 그 자연의 뜻을 거부하는 자들에 대해서도 사용할 수 있다. 이런 전쟁은 자연적으로 정당하기 때문이다." (중략)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윤을 남기는 상업을 비자연적인 것이며 일종의 도둑질이라고 비난했다. 같은 도둑질도 용감하게 창칼을 휘두르며 하면 자연적인 것이지만 치사하고 쩨쩨하게 판매자, 구매자를 등치는 식으로 하면 비자연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상업은 그야말로 "강도질만도 못한 도둑질"이 되는 셈이다. -1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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