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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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해가 저물어도 그 빛은 키 큰 나무 우듬지에 걸려 있듯, 꿈은 끝나도 마음은 오랫동안 그 주위를 서성거릴 수밖에 없는 법이다. -32-33쪽

"기억이 존재하는 한,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73쪽

정민과 잠을 자고 난 뒤로 나를 둘러싼 세상은 완전히 바뀌었다. 알고 봤더니 이 세상은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서로 몸을 비벼대며 한 인간에게는 어느 정도의 온기가 필요한지 깨닫게 된 것뿐이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 다음부터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마녀의 오랜 저주에서 풀려난 것처럼 저마다 자신만의 입으로 내게 말을 건넸다. 길거리에 버려진 귤껍질이 방금까지 그 귤을 먹으면서 엄마에게 혼난 마음을 달랜 아이의 하루를 얘기했고, 공중전화부스에 펼쳐진 전화번호부는 길을 가다가 느닷없이 혹시 오래 전에 서울로 떠난 여인의 이름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전화번호부를 펼쳐본 주부의 사연을 들려줬다. -88-89쪽

이야기를 다 들은 후 나의 결론은 그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모든 게 달라졌으리라는 것이었다. 사랑은 입술이고 라디오고 거대한 책이므로. 사랑을 통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내게 말을 건네므로. 그리고 이 세상 모든 것들이 그 입술을 빌려 하는 말은, 바로 지금 여기가 내가 살아가야 할 세계라는 것이므로. 그리하여 우리는 이 세계의 모든 것들과 아름답게, 이토록 아름답게 연결되므로.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으니 사랑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다는 것을, 오직 존재하는 것은 서로 닿는 입술의, 그 손길의, 살갗의, 그 몸의 움직임뿐이라는 것을 그도 알았더라면. -94쪽

"반석 위에 집을 지어라. 그 반석이란 네가 스스로 말살시킨 고유의 천성이며, 자식에 대한 사랑이고, 아내의 사랑에 대한 꿈이며, 네가 열여섯 살 때 가졌던 인생에 대한 꿈이다. 너의 환상들을 약간의 진실과 바꾸어라. 너의 정치인과 외교관들을 짐을 꾸려 떠나보내라. 이웃은 잊어버리고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여라.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인데, 올바르게 생각하고 주의를 부드럽게 환기시키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인생은 자기 자신이 지배하는 것이다. 너의 인생을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맡기지 말라. 무엇보다도 네가 선출한 지도자에게는 맡기지 말라. 자기 자신이 되어라."-123쪽

한국을 떠나오던 날, 공항에서 정민을 껴안은 채 오랫동안 서 있었던 것을 나는 잊지 않고 있었다. 정민은 토요일 저녁이면 외로울 것이라고 내게 말했다. 나도 토요일 저녁이면 외로울 것이라고 말했다. 정민은 히말라야에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나도 히말라야에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정민은 겨울이 오면 나와 결혼하겠다고 말했다. 나도 겨울이 오면 정민과 결혼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정민은 모두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나는 모두 진짜라고 말했다. 안고 있던 팔을 떼고 바라보니 정민의 두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정민은 내 뺨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170-171쪽

"음악은 본질적으로 역설이지. 침묵을 이겨내기 위해 태어났지만, 결국 또다른 침묵으로 끝날 뿐이니까. 삶이 그런 것처럼."-227쪽

"자유란 관념이 아니라 욕망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인간의 욕망보다 강한 권력은 이 세상에 없는 모양입니다."-236쪽

"폭력에 관한 한 제비뽑기를 하는 사회인 거죠."-329쪽

"우리는 지나간 뒤에야 삶에서 일어난 일들이 무슨 의미인지 분명하게 알게 되며, 그 의미를 알게 된 뒤에는 돌이키는 게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3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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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10-03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4쪽 저말. ㅎㅎ 정말 외우고 싶을 정도로 좋아해요.

마늘빵 2008-10-03 00:36   좋아요 0 | URL
저 마지막으로 소설을 읽은게 1년반에서 2년은 된거 같은데, 다시 소설을 읽고픈 욕구가 막 솟구쳐요. 이 책으로 인해서. :) 김연수 처음 접했는데 다른 책도 읽고파지네요.

웽스북스 2008-10-03 01:00   좋아요 0 | URL
어머 정말 1년반에서 2년이요? 어휴
저는 소설책 안읽고 인문학책만 계속 읽으면 막 마음이 닭가슴살처럼 퍽퍽해지는 기분이어서 ㅋㅋㅋ (아, 제가 닭가슴살은 좀 좋아합니다만 ㅋㅋ) 김연수의 친한 친구인 김중혁 책도 읽어보세요 ㅎㅎㅎ

마늘빵 2008-10-03 09:02   좋아요 0 | URL
^^ 소설을 안 읽은지 꽤나 오래되었죠. 아무래도 저는 한 주제에 꽂히거나 한 분야에 꽂히면 계속 그거만 파는지라. 소설에 빠지면 또 소설만 읽게 될지도. -_-

하늘바람 2008-10-03 0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넘 읽고프네요

마늘빵 2008-10-03 09:05   좋아요 0 | URL
^^ 오랫만에 집어든 소설이었는데 좋았습니다.
 
매매춘과 페미니즘, 새로운 담론을 위하여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61
이성숙 지음 / 책세상 / 2002년 4월
구판절판


상업적인 섹스는 인간의 감성적인 욕구와 물질적인 욕구를 동시에 충족시킨다는 인식의 변화가 요구된다. 이는 곧 남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건전하고 바람직한 매매춘" 형태가 될 것이며, 나아가 강요된 여성의 삶의 한 형태인 매춘 여성의 삶의 질 또한 향상될 것이다. -22쪽

도덕적, 종교적 페미니즘은 매매춘에 대한 남성 위주의 도덕과 윤리 중심주의 견해에 머물고 있다. 윤리 중심주의의 페미니즘의 영향으로 매춘 여성들은 구석으로 내몰린다. 도덕적 페미니즘 정책이 매춘 여성이라는 '인간'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도덕과 윤리를 위한 정책이 된 것은 페미니스트 지식인들이 '사려 깊은 척하거나 점잖은 척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31쪽

만약 두 성인남녀가 성적 행위를 위해 경제적 거래에 합의하고, 그들의 행위가 사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진다면 그것을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하거나 부도덕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따라서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잘못되었다는 주장은 다시 한 번 의심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35쪽

자본주의는 여성들로 하여금 성적인 서비스를 파는 매춘 여성이 되도록 강요하는가 하면, 생존을 위해 노동력을 파는 임금 노동자가 되도록 몰아넣기도 한다. 매춘 여성과 임금 노동자 둘 다 비인격적인 사회 제도의 희생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들 각각의 활동에 관해 도덕성을 부여하는 합리적인 가설이 존재할 수 없다. 사회주의는 매춘 여성들을 자본주의에서의 착취가 집약적으로 드러난 실체로 파악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매춘 여성의 상황을 또는 임금 노동자의 비천함을 극명하게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노동자는 계급에 의해 착취당하지만 매춘 여성은 성과 계급에 의해 이중으로 착취당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매춘 여성은 임금 노동자보다 더 심각한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희생자인 것이다. -57쪽

남성 고객이 매춘 여성을 성적 만족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매춘 여성들 역시 남성 고객을 그녀의 경제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매매춘에 관련된 여성과 남성은 서로를 목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85쪽

물론 페미니스트 정치 이론가들은 결혼 제도를 반대하고 있지만, 매매춘 제도에 대한 비난만큼 강도가 높지는 않다. 다만 결혼 제도를 개선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어느 사회에서도 여성은 여성이기 때문에 늘 강요된 직업과 삶을 살고 있다. 정치 이론가들은 규정된 아내 역할과 성 서비스의 제공자가 될 가능성을 최소한 줄일 수 있는 고용 기회의 확대와 평등 임금을 위한 사회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해야 할 것이다. 여성도 아내(부엌데기 남편)를 가질 수 있는 진정한 남녀 평등 사회가 실현된다면, 매춘을 직업으로 선택하는 여성의 수는 줄어들고 아마 매춘 남성의 수가 증가할 것이다. -94쪽

다소 비약하는 측면도 있지만, 섹스는 어떤 특정한 방법으로 획득할 수 없다면 구매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영양분이다. 사먹는 음식이 그렇게 항상 나쁜 것은 아니지 않은가? -96쪽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전 지구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받고 성적인 서비스를 판매하는 것이 나쁘다고만 규정할 수 있는가?-104쪽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위해 음식물을 판매하는 것은 건전한 일로 인식되어왔으나 감성적인 느낌을 판매하는 것은 더러운 것으로 인식되어왔다. 이러한 차이는 문화적, 종교적, 성적 금기의 사회적 영향력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나체는 공격이며, 성기는 방어적이고, 여성의 생리는 더러운 것으로 인식되어온 것은, 인간의 성을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것이라고 규정하고 싶어하는 신경 과민증 환자들의 인식에서 비롯된 금기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이러한 금기에서 자유로워진다면, 간호사가 신체 장애자들의 목욕을 도와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매춘 여성을 남성의 자위 행위 또는 수음을 도와주는 도우미쯤으로 여길 것이다. 간호원의 역할은 환자들의 보건을 만족시켜주는 것이며, 매춘 여성의 역할은 손님들의 감성적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대가로 돈을 받는 것이다. -105-106쪽

매매춘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강제의 형태가 아니라 본인의 의사에 따른 자유로운 선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매춘 여성 역시 매춘을 하나의 승인된 직업으로 간주해야 하고, 매춘이라는 직업을 자율적으로 선택한 성인 여성이어야 한다. 달리 말해 건전한 매매춘이란 강제적이지 않고 자발적인 매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건전한 매매춘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그것을 합법화해야 한다. 매춘 여성이 법률 위반죄로 고발되는 것이 아니라 성적인 불행을 감소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하는,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역할을 수행하는 건전한 시민으로서 권리를 제공받아야 한다. -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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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08-10-01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점이 당혹스러운가요?

마늘빵 2008-10-01 21:44   좋아요 0 | URL
흐음 명확히 설명하기 어려운데, 나름 페미니즘 운동의 새로운 방식을 제안하는 듯 하면서도, 그 연결고리들이나 논리를 보면, 어떤 부분에서는 성매매는 정당하고, 여성들이 남성의 성을 구매할 수 있는 것도 더 쉬워져야한다는 식으로 흘러요. 책을 읽어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니깐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성도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해서 신체를 도구로 이용해 사고 팔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아가니깐 결국은 유럽이나 미국식 성매매 방식으로 가자는건지. 아예 합법화시켜서.

2008-10-02 2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02 2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04 2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05 09: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05 1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05 1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02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02 1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 읽어주는 여자
레몽 장 지음, 김화영 옮김 / 세계사 / 2008년 7월
품절


(전략) 나는 그에게 계속 눈을 뜨고 있으라고, 가능한 한 오랫동안 눈을 뜨고 있으라고 요구한다. 그것은 마치 해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너무 어렵다고 그가 말한다. 그래도 나는 우긴다. 내가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듯이 그가 나를 보고 있었으면 좋겠다. 그는 나를 바라본다. 그 눈길이 다정한 눈길인지 고통스러운 눈길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그와 조용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독서의 장점은 그가 생각하듯이, 사랑의 장점과 그렇게 무관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그에게 설득시키려고 애쓴다. 그는 어쩌면 그게 맞는 얘기일진 모르나 지금 당장은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을 뿐이라고 대답한다. 그는 그걸 알고 있고 확신하고 있따. 나는 내 얼굴 윤곽이 가물가물해지지 않도록, 목소리가 지리멸렬해지지 않도록 애를 쓰고, 바라보는 눈길과 입 밖에 내는 말을 또록또록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엉덩이에 두 손을 대고 있다. 그는 사랑의 저 절망적인 힘으로 나를 압박한다. (후략)-183-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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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10-02 0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저는 의자 그림이 그려진 옛날 판형을 갖고 있는데, 표지가 새롭게 바뀌었군요.

마늘빵 2008-10-02 18:48   좋아요 0 | URL
옷 옛날건 모르는데... ^^ 판권을 보니 98년에 초판 나오고 2008년에 새로 나왔더라고요. 요고 재밌었어요.
 
정의와 정의의 조건 問 라이브러리 1
김우창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절판


법은 여러 사람이 이루는 사회에 없을 수 없는 자유와 그 한계를 밝히는 일을 한다. 법이 특히 중요해지는 것은 합리성과 일관성의 규칙에 입각하여 자유의 테두리를 넘어 경계선을 범하는 사람들에게 제제를 가하는 일에 있어서이다. 이 때의 법률판단에는 일반적 명제만이 아니라 낱낱의 사람의 사정에 대한 검토가 포함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법학의 교육에는 문학과 철학 등의 교육이 필수적이다. -4-5쪽

그러나 여기에서도 인간에 대한 일정한 도덕적 윤리적 이해가 없을 수가 없다. 타협의 제도에도 인간의 삶에 대한 일정한 가치적 선택이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원하든 아니하든 도덕과 윤리의 문제는 사람이 살 만한 사회를 생각하는 데에서 핵심적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아니할 수 없다. (시장과 시장의 규율과 도덕윤리 中)-23쪽

동정심은, 정의의 동력이 되는 데에는 너무나 많은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선 당사자가 아니라 방관자의 심리를 나타낸다. 또 그것은 자기의 이익과 맞부딪치게 될 때, 그것을 넘어서기 어렵고, 또 어떤 경우에나 ‘이익의 공동체’의 경계를 넘어서 작용하기 어렵다. 흑백 인종갈등에서, 근본적으로 백인은 흑인에 대하여 공동체적 관심, 또 그러니만큼, 동정심을 가질 수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동정심이 언제나 차단된 것은 아니었지만, 백인의 동정심은 흑백의 상하질서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동정심은 보이지 않게 흑백 인종차별의 제도를 지속하는 데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몇 가지 연구를 종합한 바발렛의 결론은 백인의 동정심이 흑인의 기본권의 요구에 있어서 분개심에 의하여 대치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억압적 사회제도가 무너질 수 있었다.-53-54쪽

(복수심과 분개심의 차이에 관해)
전자는 권력관계에서의 부당한 불균형을 바로잡아야겠다는 마음 그리고 자존심에 관계되고 후자는 "외적으로 받아들여진 기분과 가치와 규칙의 관점에서의" 부당성을 바로잡고자 하는 감정이다. 앞의 감정은 구체적 개인에 가해진 구체적 상해를 바로잡겠다는 행동에 이어지는 데 반해, 이것을 전체성으로 즉, 보다 넓은 것으로 열어놓는 것이 분개심이다. 바발렛에 의하면, 분개심은 "수긍할 수 있고, 바람직하고, 타당하고, 정당한 결과와 절차를 벗어난 데 대한 감정적 인식"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복수심’을 특정한 상해행위보다는 ‘상해가 일어나게 된, 손상된 권리의 장’, ‘상해의 일반적 형식’을 향하게 된다. 말하자면 분개심이 상해가 일어나게 하는 체제 자체를 문제 삼을 수 있게 하고 행동을 그쪽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54-55쪽

그(바발렛)는 ‘복수’를 ‘복수심’으로, 이것을 다시 ‘분개심’으로 대치한다. 이것은, 개인의 심성에 일어나는 것이면서도, "외적으로 받아들여진 기준과 가치와 규칙의 관점"을 포함하는 복수심이다. 그러나 이 기준과 가치와 규칙이 참으로 인간적인 것이 될지 또 보편적인 것이 될지는 불확실하다. 어떤 인간의 심성적 특징도 그 자체로 사회적 기준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제3자의 관점 또는 더 적극적으로 이성의 여과과정을 거처ㅣ고 그것이 다시 제도화됨으로써만 규범성을 획득한다. -64쪽

분개심은 완전히 정당화될 수 있는 경우에도 그 자체만으로는 삶의 가치를 창조하지 못한다. 거기에 어떤 대중적 가치가 따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분히 사회를 발전시킬 긍정적 가치보다는 부정에 입각해서 성립하는 가치이기 쉽다. -65쪽

‘고귀한 개인’은 그 자신의 값어치, 자신의 존재의 충만함에 대하여 천진하고 무반성적인 의식 - 자신의 존재가 우주에 뿌리하고 있다는 듯, 깨어 있는 매순간을 풍부하게 하는, 막연한 자아의 존재에 대한 천진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자존심’이 아니다. 자존심은 이 ‘천진한’ 자신감이 줄어든 것을 경험하는 데에서 나온다. 자존심은 자신의 값어치를 억지로 ‘부여잡고’ ‘잃지 않으려는’, ‘쥐어 잡음’의 표현이다. 고귀한 사람의 천진한 자신감은, 근육에 그 긴장감이 자연스럽듯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것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장점을 그 실질 그대로 그리고 모양 그대로 받아들인다. (계속)-85-86쪽

(이어서) 그럴 도리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그는 것을 기뻐하고, 그로 인하여 세계가 보다 사랑에 값하는 것이 된다고 느낀다. 그의 천연스러운 자신감은 특정한 자질이나 재능이나 덕성에 기초한 평가에서 나오는 ‘복합물’이 아니다. 그것은 당초부터 그의 본질과 존재를 향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보다 우월한 자격을 가졌거나 타고난 자질을 가졌거나 또는 다른 어떤 점에서 낫다는 것을 쉽게 인정할 수 있다. 그러한 인정은 자신의 값어치에 대한 천진한 의식을 줄어들게 하지 않는다. 그 자신감은 정당화를 필요로 하지 않고 업적이나 능력에 의하여 증명할 필요가 없다. (셸러)-85-86쪽

사과는 일어난 일을 되돌아보는 일이고, 되돌아봄은 반성작용의 일부이고, 자신이 관계된 일이지만, 제 3자적 관찰자 ‘사리에 밝은 관찰자’의 입장에 선다는 것을 말한다. 상징적 사과는 당초부터 과거사에 대한 반성적 회고의 일부를 이룬다. 이 반성에는 처음부터 제 3자 개입의 공간이 존재한다. 그러나 제3자가 할 수 있는 일의 핵심은, 엄밀하게 말하면, 사과라기보다는 당사자들에게 그러한 사과와 화해를 권고하는 일이다. 권고에는 권고자와 당사자들 간의 관계에 의한 정당화가 필요하다. 엄밀한 의미에서 당사자가 아니면서 사과한다고 할 때, 그 근거는 한국과 베트남 간의 문제라면, 권고자가 한국이나 베트남인이 과거의 사건에 책임을 느끼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사과는 사과에 대한 권고이면서 자신의 사과이기도 하다. -1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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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의 시대에 중심잡기 : 지식인과 실천 問 라이브러리 6
윤평중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품절


바람직한 지식인은 스스로의 계층적 이해관계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역동적이고 종합적인 관찰자’로서 실천하려 노력하지만 동시에 지식의 존재구속성이라는 역사적 조건 위에서 활동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20쪽

지식의 존재구속성이라는 본질적 조건을 경시하면서 도덕주의의 색채가 짙은 교조적 종합에 너무 쉽게 빠져든다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지식인의 표상으로 자리 잡아온 계몽적 참여지식인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종종 이들은 거대한 적과 싸우는 자신의 언설이 진리와 정의를 상징한다고 강변한다. 탄압을 무릅쓰고 독재와 싸우던 시절에는 확신에 찬 그들의 태도가 감동을 주면서 일정한 사회적 영향력을 갖기도 했다. 존재구속성의 한계를 시인하는 열린 지식인조차도 자신이 개진하는 담론만은 일반성과 보편성을 지닌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지식이란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며 종국적 진리도 아니다. (중략) 지식은 부분성 및 잠정성이라는 근본적 존재조건을 전제한다. 지식은 ‘끝나지 않을 탐구’의 도정에서 ‘진리에 점차 접근해 감’이라는 지향성과 역동적으로 맞물리는 토론과 검증외의 다른 것을 지칭하지 않는다. 따라서 지식인이란 진리 파지자나 설교자가 아니다. 지식인은 잠정적 담론을 생산, 토의하고 반증하면서 보다 나은 세계를 향해 함께 가는 해석학적 행위자인 것이다. -21-22쪽

나에 대한 반대자도 나만큼 옳을 수 있다는 유연성과 개방성이 배제될 때 남는 것은 진리의 전제와 독단의 횡포뿐이다. 나나 우리 편에 대한 반대나 이의 제기가 진리를 그르치는 악의 음모로 인지될 때 지식사회의 황폐화와 지식인의 타락은 이미 예정된 것이다. -22쪽

신지식인론은 지식인의 임무를 한것된 사회적 효용창출로 환원시킴으로써 오늘날 지식인 위기의 한 연원이 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신지식인론의 지식인상이 전통적 지식인과 전연 관련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은 지식인의 한 측면만을 대대적으로 부풀려 놓았다는 문제가 있었다. -23쪽

명예나 학위, 직위 같은 외면적 조건이 지식인의 자기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으로 오해될 때 지식인 되기의 역동성과 개방성은 사라지고 만다. 지식인은 실체가 아니라, 권력비판과 지식생산의 과정을 육화시킨 ‘항상적 지식인 되기’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지식인 되기를 규정하는 조건이 만약 존재한다면, 그것은 지식담론의 보편적 정당화 가능성과 비판적 실천 외의 다른 것일 수 없다. -37쪽

한 행위자의 진정성(眞正性)이 주관적 덕목으로 왜소화될 때 정치적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다. 현실정치의 지평에서 의도 대신 행위의 결과가 중요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교훈이다. 마찬가지로 진정성도 단순한 내면적 덕목의 표출에 머무르지 말고 상호주관적 검증과 비판의 장 앞에 개방되어야 한다. 나의 진실성과 너의 신실함이 특정한 현안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할 때 서로 자신의 주관적 확신에만 집착한다면 출구는 발견되지 않는다. 유일한 해법은 상대방의 주관적 성실성을 인정한다는 전제 위에서, 현안을 둘러싼 사실에 대한 이해와 공감대를 가능한 한 늘리는 데 있다. 진정성은 주관적 진실성과 상호주관적 검증 가능성을 포괄하는 개념이며, 양자를 잇는 다리는 사실과 비판인 것이다. 양심과 헌신, 주관적 확신과 정의감 등도 그 타당성을 공론장의 지평에 개방해야만 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43쪽

진리는 사실에 대한 엄정한 접근이 아니라 주관적 신념에 대한 복무로 정의되고 만다. 이념의 옳고 그름이 사실에 의해 획정되는 대신, 이념에 부합하지 않는 사실은 ‘제대로 된 사실(진실)’이 아니므로 무시되거나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집합적 삶의 실천인 정치를 객관적 진리의 실현 과정으로 보는 진리의 정치가 극단화할 때 당파성의 해악도 최대화된다. -44쪽

성찰을 결여한 지식은 억견에 불과하며, 겸허함을 잃은 지식인은 독단론자에 지나지 않는다. -46쪽

(송두율을 논하며)
자기정합성이 특히 지식인에게 중요한 이유는 너무나 자명하다. 지식인은 자신의 입론이나 학설을 변론하는 존재며 그 논변에 대한 공론장의 비판과 반비판을 흔쾌히 수용하는 사람이다. 토론의 결과 스스로의 입장에 변화가 있다면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어야 하며, 그런 변화가 자신의 삶의 궤적에서 갖는 의미를 투명하게 설명해야 한다.
물론 자기정합성이라는 규준으로 예전에 요구되었던 이론과 실천의 통합, 즉 학자의 학설과 실존적 삶 사이의 조화까지 요구하는 것은 현대의 기준으로 지나친 것이다. 현대 지식인의 자기정합성은 논변과 학술적 신념의 일관성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다. 자기정합성에 의해 견인되지 않는 지식생산과 권력비판은 공허한 것이거나, 최악의 경우 거짓으로 타락한다. -104-105쪽

김훈이 보기에는 극단화된 진리의 정치야말로 건전한 삶을 위협하는 최악의 추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진리의 정치가 흘러넘치는 한국현대사의 시평에서 ‘반시대적 고찰’에 가까운 김훈 문학의 정치성은 진리정치의 과잉에 대항하는 또 다른 과잉의 수사학이다. -123쪽

헤게모니의 변환과 함께 이 시대의 화두로 부상하고 있는 경제적 실용주의가 김훈이 암시하는 삶의 정치와 친연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한국의 신보수가 내세우는 실용주의가 이념 대신 실용을 강조하고 말보다 일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김훈의 텍스트들은 삶의 실감으로부터 분리된 채 부유하는 진리정치의 기표에 대한 혐오감을 감추지 않는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치세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 공격하는 신보수주의의 논리와 닮아 있는 것이다.(계속)-127-128쪽

그러나 신보수의 실용주의와 김훈의 삶의 정치 사이에는 날카로운 긴장이 존재한다. 요새 주목받는 실용성 담론은 자본주의적 욕망 확산과 충족의 논리에 전념한다. 죽음과 몸, 밥벌이라는 실존의 궁극에 관한 김훈의 천착이 인위와 욕망의 무한확대라는 시대의 대세를 오히려 거스르는 길을 가는 것과 선명하게 대비된다. 삶의 정치가 말하는 소박한 생의 질감과, 화폐의 만능을 고취하는 실용성은 상호대척적이다. 단기간의 돌관방식으로 전시효과를 겨냥하는 부화한 실용주의는 사회를 들뜨게 하고 안온한 일상을 오히려 위협할 수 있다. 평상심을 어지럽히는 ‘스펙터클의 사회’는 삶의 정치에 고유한 감수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127-128쪽

정부의 진단과는 달리 광우병 사태는 민초들의 시각에서 볼 때 ‘나’의 구체적 삶의 현장을 위협하는 데 대한 자연스러운 대응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즉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상에서 먹거나 접하게 되는 물질이 부적절한 정부조치 때문에 직접 나의 건강권과 생명권을 침해할지도 모른다는 데 대한 적절한 분노와 불안감의 표현인 것이다.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자들의 촛불시위가 문화제 형식으로 축제 비슷하게 진행된 것도 말의 자기표현적 특질과 연관해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명박 정부는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작은 기술적 이슈가 특정집단의 이해관계와 정치적 갈등과 얽혀서 과잉 정치화되었다는 음모론적 분석 틀을 구태어 감추지 않았는데 이는 창조적 실용주의의 상상력 빈곤을 예증할 뿐이다. -142쪽

표면적 레토릭과는 달리 이명박 정부의 실용주의에는 실용정신의 보편적 의의에 대한 균형 잡힌 감수성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그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실용적인 것의 내용은 압도적으로 경제적인 것의 지평을 지칭한다. 경제 자체도 아주 포괄적이고 복합적인 외연과 의지평을 담고 있는 개념일 터인데, 이명박 정부의 실용주의가 주목하는 경제에서는 ‘선진화된 세계일류국가’를 이루기 위한 강력한 ‘신발전 체제구축’만이 배타적으로 강조된다. 분배나 복지는 성장의 부가적 요소로 간주될 뿐이다. 실용주의가 경제지상주의로 축소되고, 경제는 성장으로 환원되고 마는 것이다. -149-150쪽

일탈한 국가와 함께 신자유주의 시대에 과대평창한 시장은 공화정을 위협하는 또 다른 주체다. 우리가 ‘삼성 사태’에서 확인한 것처럼 민주 질서에 의해 견제되지 않은 시장은 모든 걸 집어삼키는 불랙홀이 되기 쉽다. 생산력과 개인의 창조력을 극대화하는 시장의 힘은 참으로 위대하지만 그것이 너무 커진 나머지 오히려 시민의 자유를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형해화한 공공성이 경제적 효율성에 의해 잠식되는 정도에 비례해, 자본이 국가와 민주질서를 식민화하게 되는 것이다. -158쪽

한국사회는 지금 극단의 시대를 뜨거운 열병을 앓으면서 통과하는 중이다. 모든 것이 흔들릴 때 지식인의 임무는 성찰적 균형 속에서 중심을 잡는 일이다. 극단의 담론은 맹목적 추수주의를 강요하거나 부화뇌동을 빌미로 우리를 유혹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강요와 유혹은 신념의 견결함이나 취향의 세련됨이라는 미명을 동반해 세상을 미혹한다. 세계를 투명하게 이해하는 것이 지식인의 임무이지만 시류와 유행이라는 것, 즉 ‘세상에의 부역’은 항상 지성의 최대 적이었다. 극단의 시대는 극단의 담론에 의해서는 결코 극복될 수 없는 것이다. -176-177쪽

악은 결코 궁극적으로 해소되거나 척결될 수 없으며 언제든지 재현될 수 있다. 역사에서 가장 나쁜 경우 악은 확대 재생산된다. 가장 좋은 경우에도 악이 축소 재생산되는 경우는 드물다. 역사에 주체적으로 대응하는 하나의 방식은 그것을 부단히 논의하고 반성해 기억의 정치를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이는 역사적 책임규명을 무화시키는 역사허무주의의 발언이 아니며, ‘모두가 모든 것에 책임이 있다’는 역사 도덕주의로의 후퇴도 아니다. 악의 평범성 테제는 선악을 너무 쉽게 전유하려는 정치적 인간의 오만을 꾸짖는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자신의 삶과 집합적 역사 앞에 좀 더 겸허해야 한다고 고언한다. -192-193쪽

진보는 모든 종류의 억압, 차별, 부정의, 불평등에 대한 비판과 극복 시도로 정의된다. 그 비판의 지평은 널리 열려 있으며 비판방법론과 극복 시도의 타당성과 효용성은 오직 실천에 의해서만 증명 가능하다. 이에 비해 보수는 현실에 그런 부정적 요소가 엄존함을 부인하지 않지만, 부정적 요소도 현실의 일부이므로 점진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204쪽

삶의 곤핍함을 보통사람들에게서 완화시켜줄 수 있어야만 진정한 진보다. 미래의 헛된 희망으로 현재의 곤고함을 메우려는 논자들은 사이비진보에 불과하다. 평균적 시민의 생활 세계에서 호소력과 타당성이 입증되지 않은 논설들은 공론일 뿐이다. 긴박한 서민의 구체적 삶과 겉도는 논쟁은 무익한 자기위안의 정열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 진보가 위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는 다음의 요청에서 명쾌하게 압축된다. "그대 진보여,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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