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이란 어떤 일인가 - 기획의 발상부터 인간관계까지
와시오 켄야 지음, 김성민 옮김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 2005년 2월
품절


편집자의 머리에 떠오른 기획이 저자의 두뇌를 통과한다. 그럼녀 누에가 실을 분비하듯 저자는 글을 뽑아내기 시작한다. 집필을 뜻한다. 그런데 글만으로는 명주실이 될 수 없다. 분비물을 모아 가공하고 처리해야 비로소 명주실이 완성된다. 편집공정이란 저자라는 누에를 발견하고 분비된 것을 명주실로 만들어내는 과정이라 보면 된다. 저자를 누에 취급해서 실례짐나 양질의 누에 없이는 양질의 명주실을 얻을 수 없다. 가공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기획과 저자는 세트다. 한몸이다. 그래서 뛰어난 저자를 발견하는 능력도 기획력에 들어간다. -63-64쪽

인터넷은 과거의 정보를 정리한 데 지나지 않는다. 과거의 지식을 축적한 데 불과하다. 그러나 앞으로 짜내려 하는 누에에서 어떠한 명주실이 나올지는 예상하기 힘들다. 누에에 따라 달라진다. 더군다나 성격도 행동양식도 모두 다르다. 기획이란 그러한 누에를 상대해야만 하는 일이다. 편집자가 발로 뛰는 걸 귀찮아하고, 호기심도 희박하며, 생산 현장을 겁낸다든지, 저자가 오타쿠화하면 기획은 당연히 무미건조해지고 만다. 오늘날 있으나마다g나 책이 홍수를 이루는 배경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72쪽

원고를 읽을 때는 다음 사항을 늘 염두에 두자.

-의미가 있다. 학문적 평가를 받을 만하다. 임팩트가 있다.
-화제성이 충분하다. 사회의 반향을 기대할 수 있다.
-오랫동안 읽힐 만한 근원적 주제를 다룬다.
-신선한 주제, 새로운 접근방식, 새로운 발상.
-저자가 대중성이 있다.
-오랜 세월을 들인 역작이다. 귀중한 자료를 발견했다.
-문장력이 뛰어나다. -125쪽

넘치는 것은 지우고 모자라는 것은 채우도록 요구한다. 말할 것도 없이 어디까지나 편집자의 시점에 서서다. 이미 말했듯이 저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독자를 잊어버리는 존재다. 지갑에서 돈을 꺼내 책을 사주는 독자보다 증정하는 동업자 쪽으로 눈이 가게 마련이다. 넘치는 부분은 동업 경쟁자에 대한 경쟁심에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저자가 말하고 싶은 점(주장)과 독자가 흥미 있는 부분이 다른 사례도 많다. 편집자는 그 양쪽을 볼 줄 안다. 저자의 의견도 이해한다. 동시에 독자가 그 책을 내동댕이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그 균형을 잡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 편집자의 실력이 요구된다. 어느 장은 빼자, 라고 제안하는 경우도 있다. 대개 저자는 한번 완성된 원고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저자의 씁쓸한 얼굴을 보면 편집자도 마음이 약해지지만 타협은 금물이다. -133-1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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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지형 이야기
양희경.장영진.심승희 지음 / 푸른길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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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어느 책에서부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영화와 다른 장르를 결합하는 식의 책은 그 소재 자체가 식상해져버렸다. 그러나 참 꾸준히도 비슷한 컨셉을 가진 책들이 나오는데 새 책이 담아내는 내용에 따라서 어떤 책은 기존에 나온 수많은 비슷한 책들을 놔두고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얻기도 하고, 또 어떤 책은 조용히 나왔다 사라지기도 한다. 이 책은 후자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나쁘지는 않았다. 특별히 새로운 것은 없었지만. 단지 이 책이 기존에 나온 '영화와 무엇의 이종교배'식의 다른 책과 다른 점이 있다면, 교배한 씨가 '지리'라는 것이다.

  영화와 물리학, 영화와 과학, 영화와 사회, 영화와 철학 등은 이미 써먹을대로 써먹어 더 이상 새로운 무엇이 있을까 싶지만, 영화와 지리가 만난 책은 아직까지 본 적이 없어 조금 색다르긴 했다. 물론 물리학이나 철학 대신 같은 자리에 지리가 들어갔을뿐이라는 점에서는 식상하지만. 지리를 공부하고 지리를 가르치는 고등학교 교사, 대학교 교수 세 사람이 대학원 시절부터 만나 박사학위를 받는 시점까지 함께 공부하고 답사를 다니면서 유익하고 재밌는 지리책을 하나 써보자 했고, 이 책은 그 결과물이다. 

  이 책을 쓰게 되기까지 근 5년간 그들은 영화를 오로지 지리학적 관점에서 살펴봤다고 한다. 이거 무지 고통스럽다. 사실 영화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혹은 또다른 문화적 재미를 찾기 위해 보기 마련인데, 5년 간 모든 영화를 지리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리고 각 영화들에서 지리학적 요소를 끄집어내고자 했다면, 이건 저자들에겐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이었을 것이다. 자발적인 작업이었으니 어쩌면 그들에겐 '즐거운 고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재료로 삼아 지리학적 지식을 얹어놓으며 평소 사람들이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간접적으로 보게 해주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리라. 같은 영화라도 어떤 시각을 가지고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달리 보인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해안선>의 경우 군대가 국민을 대하는 태도란 측면에서 바라볼 수도 있고, 사랑하는 남자친구를 사고로 잃어버려 미친 여자의 입장이 되어 감상할 수도 있다. 이 책의 저자들과 같이 영화 내용은 잠시 접어둔 채 먼저 영화에 등장하는 갯벌의 형성과정을 중심으로 바라보는 것도 가능하다. 

  이 책을 읽다보면 단지 지리학적 지식을 안내하기 위해서 영화를 재료로만 삼은 것은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장면, 지역이 물론 저자들이 가장 먼저 관심갖는 부분이긴 하겠지만, 어떤 장면을 찍을 때 왜 감독이 그 지역을 배경으로 했을까, 를 생각해보면서, 감독의 입장이 되어 영화를 찍던 시절로 돌아갈 수도 있다. 영화 감독의 입장이 되어본다는 것은, 감독이 드러내고자 하는 메세지를 표현하기 위한 가장 적합한 장소가 왜 여기일 수밖에 없었는가를 추측해본다는 것이고, 그것은 영화가 담아내고자 하는 메세지와 닿아있다. 지리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만나는 지점이다.

  가령 <폭풍의 언덕>의 배경이 카르스트 지형인 것은 주인공들의 "비극적 운명을 가장 극적으로 상징화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불규칙적으로 갈라진 깊은 틈과 울퉁불퉁한 표면의 회색빛 돌무더기 위로 단 한 그루의 나무가 서 있는 황야. 이 비현실적인 분위기의 장소는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비극적 운명을 예언한다."

  중고등학교 때 배웠지만 지금은 가물가물한 여러 지형의 이름들이 낯설게 느껴지고, 기본 지식에 대한 간단하고 친절한 해설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보지만, 내 상식이 부족하려니 하고 책보다는 나를 탓해본다. 이 책에 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저자 대표가 미안했던지 머리말에 밝히기도 했지만 이 책에 삽입된 영화 사진들이 선명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선명하지도 못할 뿐더러 잘 포착한 장면도 아니고, 게다가 사진 테두리의 검은 띠는 어설픈 사진마저 더 어설퍼보이게 만든다. 완성한 글에 어떻게든 시각적 요소를 집어넣고자 툭툭 던져놓은 듯 했다. 이 책의 기본 컨셉이 '영화와 지리'인데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부분에서 에러가 났다.

   대체로 내가 그동안 영화를 보면서 영화 속 지역이나 지형에 관심가질 일은 별로 없었는데, 이렇게 봤던 영화를 - 이 책의 재료가 된 영화 중 내가 본 영화는 사실 몇 되지 않는다 - 다시 한번 다른 관점에서 보게 해줬다는데에서 독서의 의미를 찾는다. 영화를 재료로 삼아 지리학적 지식을 풀어놨는데, 나아가 이 책으로부터 얻은 영화 속 지리 지식을 토대로 실제 그 지역을 찾아가 본다면 어떨까도 생각해본다. 그땐 이 책이 여행의 재료가 되겠지. 책은 영화를 재료로 삼고, 여행은 책을 재료로 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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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Journey 2008-07-17 0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런 책이었군요. 얼마 전부터 이 책이 눈에 들어 볼까말까 하고 있었거든요. 친절한 리뷰에 감사 드려요~~
다시 보니 저자 중 한 명은 아는 사람이네요. ^^

마늘빵 2008-07-17 08:59   좋아요 0 | URL
엇 저자를 안다구요? 전공영역이 비슷하신가봅니다. 아니면 동종업계? ^^ 별로 기대 안하고 보면 괜찮습니다.
 
영화 속 지형 이야기
양희경.장영진.심승희 지음 / 푸른길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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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모두 살아갈 이유가 필요합니다. 힘든 순간마다 희망은 그 이유가 됩니다. 물론 그건 아주 추상적이죠. 그러나 목마른 자들에게 그건 물이고, 배고픈 자들에게 그건 빵이며, 외로운 자들에게 그건 사랑이고, 철저히 가려진 여자들에게 희망은 언젠간 자신의 존재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영화 <칸다하르>의 사히브)-181쪽

"하늘 위에서 들으면 비는 아무 소리도 없이 내릴 거야. 우리가 듣는 빗소리란 건, 비가 땅에 부딪치고 지붕에 부딪치고 우산에 부딪치고, 그러면서 내는 소리잖아. 그래서 우린 비가 와야지 우리 주위에 잠자고 있던 사물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영화 <가을로>의 민주)-241쪽

"지금 우리 마음은 사막처럼 황량하다. 하지만 이 여행이 끝날 때는 마음 속에 나무숲이 가득할 것이다."(영화 <가을로>의 민주)-2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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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불복종 - 저항과 자유의 길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35
오현철 지음 / 책세상 / 2001년 3월
구판절판


시민불복종은 이론적, 실천적으로 형식적 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며 정의로운 활동방식으로 규정될 수 있다. 시민불복종은 우리 사회에서 진정으로 법률을 존중하고 타인을 배려하며 공동체를 사랑하고 국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숭고한 행동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위한 이론이다.-8쪽

시민불복종은 사회적 분화 과정에서 전문화된 지식에 맹종하지 않고 보편적 인간의 휴머니즘과 상식에 의거하여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표출해내는 저항 의지의 한 형태다.
오늘날 사회제도에 대해 판단해야 할 정당성의 기준은 절차적 완결 상태가 아니라, 과거에 인식할 수 없었던 인간적 가치 또는 이미 인식되었지만 정의롭게 실천되지 않았던 가치를 얼마나 잘 실현시킬 수 있는가에 맞추어야 한다. -9쪽

‘상실이 없는 세상은 없다’는 말은 ‘무조건 참고 살아라’는 것과 같다. 이 말은 상실이란 존재론적으로 주어진 것이므로 모든 인간이 겪어야 하는 죽음처럼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을 품게 한다. 그리고 상실 속에서 자족하며 사는 것이 지혜로운 자세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정의롭지 못한 현실을 체념하고 그러한 삶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에 동의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임무는 상실을 만들어내는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바꾸어가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그러나 죽는 날까지 세상을 좀더 인간적인 곳으로 만드는 일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야 할 도덕적 의무다. 사회 속에서 상실은 생물학적인 한계가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내는 질곡이기 때문에 충분히 치유할 수 있다. -10쪽

사회의 부정의와 부조리를 개혁하는 데에 필요한 제도가 오히려 개혁을 방해하는 완고한 기계 장치가 될 때, 국민들은 그러한 제도에 의해 희생을 강요당한다. 개선의 통로가 막혀 있는 제도는 제도를 유지하고 그 제도 위에서 이익을 얻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일 뿐이다. 민주주의의 가치는 물려 받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합의를 거쳐 형성되는 것인데 우리 사회는 아직 이러한 합의의 단계에 다다른 적이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를 진정 정의로운 민주주의로 발전시키고 민주주의의 참모습을 이 땅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일은 이제야 시작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참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전진하지 않는 곳에서, 민주주의는 후퇴할 수밖에 없다. -11쪽

"불복종의 의미는 이성과 의지에 대한 확증의 행위이다. 이것은 원초적으로 무엇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고자 ‘향하는’ 태도이다. 즉 볼 수 있고 본 것을 말할 수 있고 보지 않은 것은 이야기하기를 거부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향한 행위이다."(에리히 프롬, 『불복종에 관하여』)-17쪽

시민불복종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이미 익숙해져 있는 법과 제도와 관습이 잘못된 것일 수 있으며 그러한 잘못을 타파하기 위해 필요한 자유와 정의, 진리는 결코 권력에 의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현존하는 사회보다 더 인간적인 세상이 있으며 그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자기 희생의 길을 회피하지 않고, 그 길에서 폭력을 행사하지 않음으로써 탄압하는 자까지도 용서할 수 있다는 신념과 실천을 통해서 온 인류가 참된 인간의 삶을 살 수 있다는 불복종의 이념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무조건적인 복종을 거부하고 양심에 의거한 이성적 신념을 견지하며, 진정한 용기를 발휘하여 희생의 길을 가고자 하는 것이다. -22쪽

주권자의 정당한 정치 행위가 행사되고 실천되는 올바른 방식은 주권자의 의지를 제도화하는 것이다. 이 제도화의 핵심은 주권자인 국민이 바라는 바가 실현되도록 법률로써 보장하는 입법화다. 그러나 입법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할 의회가 주권자의 입법 의지를 거스를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를 해결하는 합법적인 방법은 제도적 선거에서 국민의 의지를 거스르는 의원들을 낙선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이 국민을 배반하는 의원들의 방해로 불법적인 행위로 규정되어 금지될 경우, 국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전면적인 불복종 행위뿐이다. -32-33쪽

시민불복종은 비록 법을 거스르긴 하지만 법에 대한 충실성을 표현해야 한다. 시민불복종이 법 경계선 바깥에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 불복종의 정신은 법에 대한 충실한 의무를 전적으로 부인하지는 않는다. 즉 시민불복종은 전반적인 법체계를 인정하지만 특정한 법률이나 법률의 특정 조항에 불복종하는 것이다. 시민불복종이 표현하는 법에 대한 충실성은 불복종 행위의 공공적이고 비폭력적인 성격과 함께, 불복종 행위의 법적인 결과들을 불복종자들이 기꺼이 감수하려는 의지에 의해 표현된다. (중략) 시민불복종은 이미 구제 불가능한 국가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오용이나 남용의 발단을 없앰으로써 예외적인 불법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하는 일상에서의 법 수호 의지로 나타난다. 따라서 시민불복종은 ‘제도화된 저항권’이라 부를 수 있다. -39쪽

공리주의적 관점에 의한 시민불복종의 정당화는 일반적인 원리로는 판별될 수 없고, 구체적인 사안의 전개 과정과 결과에 의해서만 판별되는 단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결함 외에도 사회의 장단기적 이익에 의해 정당성을 판별하는 것은 그 이익이 무엇인지에 따라 정당성 기준이 달라지는 한계를 갖는다. 그리고 시민불복종의 기본 정신은 이익이 아니라 정의와 가치, 신념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공리주의적 정당화는 적절하지 못하다. -85쪽

롤스는 시민불복종이 정당화되는 조건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법률이나 명령이 평등한 자유의 원칙을 심각하게 위반하는 경우, 둘째 공정한 기회 균등의 원칙을 현저하게 위반하는 경우, 셋째 법률이나 명령이 정치적 다수자에게 정상적으로 꾸준히 호소해왔지만 그것이 성공하지 못해, 합법적인 보상 수단이 어떤 효과도 가져오지 않을 경우 들에 한하여 정당한 시민불복종의 조건이 성립하게 된다. 이러한 요건이 충족되었을 경우에, 즉 법률이나 정책 또는 명령이 정의의 원칙에 어긋났을 경우에 시민불복종은 정당하다. 이 경우에 시민불복종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다수자의 정의감에 호소하여 자유로운 협동의 조건이 침해되었다는 것을 정당하게 알리고자 한다. -88쪽

전쟁 중의 양심적인 거부의 경우, 명령에 불복종하는 자가 명령이 전쟁 행위에 적용되는 원칙을 명백히 위반하고 있다고 믿을 경우, 그는 그 명령을 거부할 수 있다. 모든 것을 고려할 때 도덕과 비도덕의 갈림길에서 도덕을 선택해야 한다는 자연적 의무가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의무보다 더 중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90쪽

(하버마스의) 담화윤리론의 핵심은 모든 정치적, 사회적 권력의 원천은 시민들의 의사소통에 의해 합의된 결론에 의해서만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 담화에 의해 도출된 사회적 합의는 일상적인 의사소통 행위에 사회적 도덕성을 결합함으로써, 사회적 행위와 도덕, 법, 권력의 관계를 규율하는 동시에 그 정당성을 판별하는 준거점이 된다. 따라서 담화의 영역은 사회적 정의의 문제를 판별하는 근원적 기준이며, 담화 원리에 의해 구성되는 정당성은 구체적인 실천의 문제에서 다양하게 변용 적용된다. 그러므로 법률조차도 담화윤리를 준수하는 과정에서 도출된 사회적 합의 결과에 복종하게 된다. -91쪽

"시민불복종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된 저항으로서 단지 사적인 신념이나 자기이해만을 토대로 삼아서는 안 된다. 이것은 통상적으로 미리 고지되며 경찰도 그것이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할 수 있다. 또한 개별적 법규를 의도적으로 위반하기도 하지만 전체 법질서에 대한 복종을 문제삼지는 않는다. 그것은 규범 위반의 법적 결과를 책임질 마음 자세를 요구한다. 시민불복종을 표현하고 있는 규칙 위반은 오로지 상징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저항을 비폭력적 수단에만 제한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하버마스, 『새로운 불투명성』)-92-93쪽

합법성이 정당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중략) 합법성이 모든 행위의 정당성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면, 법이란 완전히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사회적 규칙일 뿐이다. 그렇다면 "얼핏 보기에 불복종처럼 보이는 것도 법과 장치가 끊임없이 적응과 수정의 흐름 속에 있는 탓에 이미 시기를 놓친 교정과 개혁을 선도하는 안내인일 수 있다."(하버마스) 이 경우의 시민불복종 행위는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도덕적 근거를 가진 사회적 실험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민불복종에 대한 ‘권리’는 정당성과 합법성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하짐나 "검사나 판사들이 시민불복종이 이러한 가치를 존중하지 않고 규칙 위반자들을 범죄자로 추적하여 통상적인 처벌을 내린다면 그들은 권위주의적 합법주의에 빠지고 만다."(하버마스)-93-94쪽

라츠는 자유로운 국가에서는 정치 참여에 관한 일반 권리에서 발생하는 시민불복종 권리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정치 행위가 권리라면 그것은 법률에 의해 적절하게 보호되어야 마땅하지만, 법률의 존재 이유가 규칙의 준수를 강제하는 데에 있기 때문에 법률을 위반하는 정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따라서 정치 참여 권리를 근거로 ‘비록 그 행위가 법률에 어긋난 것일지라도 시민에게 특정한 행위를 할 수 있는 권리는 부여한다’는 주장은 정당화 될 수 없다.
권리는 법률에 의해 보호되어야 마땅하지만, 법률 위반 행위는 권리가 아니기 때문에 법률에 보호를 요청할 수 없다. 시민이 어떠한 행위를 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면 그 실천 행위는 시민불복종이 아니라 합법적인 정치 행위여야 한다. 왜냐하면 시민불복종이 권리라면 법률에 의해 보호되어야 마땅하고 법률은 그 행위를 처벌할 수 없지만, 현실적으로 시민불복종이 처벌되고 불복종자들이 처벌을 회피하지 않는 이유도 바로 시민불복종 행위가 권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98-99쪽

코헨의 주장은 비록 법을 준수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옳은 일이지만, 모든 경우의 도덕적 고려보다 우선하여 절대적으로 법률을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있다. 도덕적인 시민들은 때로 법률이 도덕적인 고려를 짓밟고 있지 않은지를 판단해야 하며, 그 판단에 따라 특정한 법률에 복종할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그들이 심사숙고한 결과 복종한다면 그 복종은 관습적 행동이 아니라 그들의 결정에 의한 것이다. 이와 같은 심사숙고 후의 결정은 궁극적으로 가치 있는 행위이다. (계속)-122-123쪽

(이어서) 따라서 시민들이 복종, 불복종을 선택할 권리가 없다는 주장은 오류이다. 이러한 주장은 도덕적 생활의 특성을 완전히 잘못 이해하여 인간의 삶에서 법률과 정부당국의 권위에 지나치게 많은 역할을 부여한다. 인간이 복종, 불복종 중에서 자신의 행위를 선택할 수 없다면, 그들은 국가나 입법 기구에 전적으로 종속된다. 그 결과 사회에서 시민들의 심사숙고와 양심과 이성과 도덕에 따르는 자기인내가 전적으로 배제될 것이며, 도덕성에 관한 공공영역을 고갈시킬 것이다. 만약 ‘모든’ 법률 앞에 ‘어떠한’ 경우이든지 ‘예외 없이’ 복종해야 한다면, 사려 깊은 시민의 역할은 생각 없는 노예의 습성으로 대체될 것이다. 시민들은 노예가 아니며, 그들이 그들 스스로의 행위를 선택할 수 있어야만 진정한 시민이 된다.
-122-123쪽

"왜 인간은 그다지도 쉽게 복종하는가? 그리고 불복종하는 것은 왜 그렇게 어려운가? 스스로 국가나 교회 또는 일반적인 여론에 복종하고 있는 동안에는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불복종하기 위해서는 홀로 있을 수 있고 잘못을 저지르고 죄를 지을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대부분 용기가 부족하다." (에리히 프롬, 『불복종에 관하여』)
그들(미국의 대학생들)이 시민불복종을 싫어하는 이유는 시민불복종이라는 단어가 그들에게 고통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시민불복종을 떠올리자마자,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알고 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과 부딪히게 된다. 시민불복종은 사회에서 더욱 비중이 커져가는 자신들의 특권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버려가면서까지 시민불복종에 참여할 용기가 없는 것이다. 자신들은 이미 20대 80의 사회에서 20에 속한 계층이기 때문이다. -141-142쪽

민주주의 국가에서 개인의 의무를 논하는 공정한 관점은, 그 개인이 부당한 것으로 생각하는 법률의 정당성을 적절하게 시험할 수 있는 방법을 포함해야만 한다. 불복종만이 해당 법률의 정당성을 평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남아 있는 경우에, 그에게 의무론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것은 부당한 처사다. 그러므로 해당 법률의 위헌성이 의심스럽고, 의회에서 해당 법률을 개정하기 위한 노력보다 사법적 판단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는 정당하게 시민불복종에 의지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진지하지만 실패할 수도 있는 도전들이 법적 질서의 건전한 토대를 형성한다. -154쪽

특정한 법률의 정당성이 의심스러울 때에 불복종자는 최고 법원의 판결에 대해서도 불복종할 수 있다. "시민은 법률에 충성해야 하는 것이지, 법률에 대한 특정한 사람의 해석에 충성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불복종자가 법률이 원하는 것에 대해 심사숙고하고 합당한 양심적인 판단에 따라 행위한다면, 그는 부적절하거나 불공정하게 행위하는 것이 아니다."(로날드 드워킨)-154-155쪽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대표자, 특히 입법부에 대한 국민의 정치적 위임은 그들의 부도덕한 행위의 정당성에 대한 판단까지 그들에게 위임하는 것이 아니며, 정의를 실현하려는 법정신은 마땅히 존중되어야 하지만 부도덕한 법률을 강제하는 행위에는 단호하게 저항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시민들은 스스로에게 부과한 법질서에 대한 복종의 의무를, 현실의 부도덕한 정치 행위와 부정의한 법조항에 대해서는 정당하게 철회할 수 있다. ‘민주 법치국가는 시민에게 무조건적으로 법에 대한 복종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조건부의 복종을 요구하며, 무엇보다도 동의는 심사권을 박탈당함을 의미하지 않고, 주권자의 자유로운 동의는 한번으로 끝나는 행위가 아니라 지속적인 이해의 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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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7-16 0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생 딸을 위해서 사야겠군요~ 감사 ^^

마늘빵 2008-07-16 08:50   좋아요 0 | URL
^^ 요고 강추입니다.
 
21세기 첫 십년의 한국 - 우리시대 희망을 찾는 7인의 발언록 철수와영희 강연집 모음 2
리영희 외 지음, 박상환 엮음 / 철수와영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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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12월부터 2005년 6월까지 일곱차례에 걸쳐 열린 성균관대학교 양현재 콜로키움의 내용을 엮어, 2008년에 내놨다. 왜 지금인가. 3-4년이나 지난 이야기를 왜 지금 책으로 엮어 내는 것인가. 엮은이 박상환의 말처럼 "당시 제기한 문제는 아직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3년이란 시간을 보내고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된 시점인 2008년에 그 내용이 책으로 엮여진 것은, 책을 팔아먹기 위한 적절한 시점을 제대로 선택하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애초 책으로 낼 의도는 없었는데, 그때 했던 이야기들이 지금 내놓으면 먹힐 것 같자 내놓은 건지도 모르겠다.

  리영희는 "나의 책이 읽히지 않고 또 읽힐 필요가 없는, 그래서 팔릴 필요가 없는 사회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한다. 읽히지 않길 원하고, 팔리지 않길 원하지만, 여전히 내놓으면 팔리고 읽히는 시대이기 때문에, 리영희를 포함한 여기 저자로 이름을 찍은 이들은 여전히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저자로 이름 올린 이들 중 익숙한 이는 손호철과 홍세화 뿐이다. 다른 이들도 이름은 들어봤지만 글은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어 이들 각각에 대해 뭐라 말하긴 어렵다. 이 책에서 이들은 각기 다른 주제를 가지고 각자의 목소리를 낸다.

  여기 실린 글 중 리영희와 홍세화의 글이 인상적이었다. 리영희는 내가 그동안 갖고 있던 국가주의와 반공주의에 대한 반감과 맞물려 가슴에 들어왔고, 홍세화의 똘레랑스는 오래전부터 접해왔지만, (영어식 표현을 빌리자면) 아무리 반복해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여전히 우리 사회에 절실히 필요하다. 두 분 중 리영희의 말을 빌려 말해보자.

  "우리는 시민이어야 합니다. 시민이란 어떤 권위나 권력도 어느 누구도 지배하지 않는 평등 사회인 시민 사회 속에 존재하는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중략)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은 독자성을 가지고 자기 결정적이며 자유로워야 합니다. 진정한 의미의 자유인으로서 시민의 삶은 자유로운 인간의 가치를 부정하고 억압하고 탄압하는 정의롭지 않은 것에 대해 항거하며 싸울 때 보람을 느낍니다. 그런 저항 없이 ‘편안한’ 사회가 이루어진다면 우리에게 소망스런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 개개인의 삶에 있어서 의미랄까 뭐 이런 것이 박탈되거나 퇴색되는 사회라고 볼 수 있지요."

  지금 이 촛불 정국에 다시 '시민'을 생각한다. 우리는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인가. 독자성을 가진 자기 결정적이며 자유로운 인간인가. 우리는 자유인인가. 반은 그렇고 반은 아니다. 한국 땅에 살아가는 한국인의 절반이 그렇고 절반이 그렇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광장에 나가 촛불을 들고 싸우는 이들이 그렇고, 무슨 일이 있냐는 듯이 집과 직장을 왕복하며 매일을 보내는 이들이 그렇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아니. 다시. 이 말도 절반은 그렇고 절반은 아니다. 어느 정도 맞다.

  하지만, 촛불을 들고 촛불을 들지 않고, 촛불을 지지하느냐 촛불을 지지하지 않느냐를 가지고 무 자르듯 싹둑 잘라내어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자유로운 '시민'과 국가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하나의 구성원이고자 하는 '국민'을 나눌 수는 없다. 그러나 타인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고, 부당한 공권력의 폭력을 보고 거리로 나온 그들은 분명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이다.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은, 홀로하지 않는다. 타인에 의해 사고하지 않으며, 타인에 의해 움직이지 않으며, 국가에 의해 조정당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흔들리지 않는 불편부당성을 갖고 세상을 둘러본다. 그리고 판단이 끝나면 행동한다.

  리영희가 읊은 '반지성적이고 반이성적인 대한민국'은 지금을 향한다. 그는 분명 3년 후를 예측하고 이같은 발언을 하진 않았다. 이명박을 염두에 두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메세지는 노무현보다 이명박에게 더 알맞다. 물론 노무현의 과오를 그냥 지나쳐서는 안된다. 하지만 전두환을 연상시키는 이명박의 권력의 횡포와 독재는 '지성적이고 이성적인' 시민을 그때보다 더 강력히 요구한다. 그리고 시민들은 거리로 나가 자신의 분노를 보여줬다. 그들은 진보와 보수의 정치성을 떠나 광장에 나왔다. 이명박과 꼴통들은 어떻게든 색깔론을 뒤집어 씌우며 진보와 보수의 대결로 몰아가려 하지만, 이건 진보와 보수의 싸움이 아니다. 상식과 비상식의 싸움이다. 정의와 부정의의 싸움이다.  

  <21세기 첫 십년의 한국>에 실린 모든 저자와 그들이 쓴 글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잘 몰라서 따라가지 못하는 부분도 있고,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 통독인 동시에 마음을 흔드는 곳에 서서 정독을 하며 전체적으로 발췌독을 했다. 각각의 저자들에게 얼마나 동의하느냐 여부를 가지고 이 책에 평가를 내리긴 힘들 것 같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서로 다른 주제에 관심을 갖고, 자기 이야기를 하는 일곱 저자의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냈기 때문인지 조금 어수선하다. 글도 쉽게 잘 들어오진 않는다. 애초 성균관 양현재 콜로키움에서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이야기한 내용이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썩 친절한 책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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