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케의 눈
금태섭 지음 / 궁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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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늘 한 우물 안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 사실 중요한 지식을 보더라도. 그건 언제나 피상적이라고 믿고 있네. 심원한 것은 진리가 있는 산 정상이 아닌 진리를 찾는 과정에 놓여 있지. 이런 종류의 실수는 천체 관측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나네. 망막 중심보다 약한 빛에 더 민감한 망막 가장자리를 별로 향하게 하여 곁눈으로 별을 보는 것이 별을 분명히 보고 그 빛을 알아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네. 빛은 그것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에 비례해 희미하게 보이는 것이니까. 똑바로 쳐다보면 눈에 들어오는 빛의 양은 매우 많지만 곁눈질을 해서 보면 더 민감해질 수 있지. 지나친 통찰력은 우리를 혼란시키고 사고력을 약화시키지. 금성도 지나치게 오랫동안, 지나치게 집중해서, 지나치게 똑바로 지켜보면 사라지는 법이네." (『모르그 가의 살인』, 에드거 앨런 포)-19쪽

『흠흠신서』의 '흠흠(欽欽)'이란, 삼가고 또 삼간다는 뜻이다. 일체의 편견을 버리고 공정하게 양쪽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 그리고 몇 번이고 돌이켜 생각해서 진실에 보다 가까이 가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라는 것, 그것이야말로 다산 선생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사법의 원리다. -262쪽

"논리적인 사람은, 바다를 보거나 폭포 소리를 듣지 않고도 한 방울의 물에서 대서양이나 나이아가라 폭포의 가능성을 추리해낼 수 있다. 그래서 인생 전체는 하나의 거대한 사슬이 되고, 우리는 그 사슬의 일부를 보고 전체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셜록 홈즈)-2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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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복종
에티엔느 드 라 보에티 지음, 박설호 옮김 / 울력 / 2004년 10월
구판절판


독재자는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부여한 그 이상의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인민들이 그를 참고 견디는 만큼, 독재자는 그들에게 동일한 정도의 해악을 저지른다. 따라서 인민들이 모든 해악을 감수하지 않고, 무조건 참고 견디는 태도를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독재자는 인민들에게 어떠한 해악도 끼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놀라운 것은 인민들이 마땅히 느껴야 할 고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태도이다. 실제로 인민들은 폭정을 묵묵히 참고 견디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고, 이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여긴다. 이러한 태도는 정말로 기이하지 않는가? 수백만의 사람들은 비참한 노예 상태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는 어떤 막강한 권력에 의해서 강요당한 게 아니다. 오히려 인민들은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권력을 휘두르는 절대자의 명성에 홀리거나 그의 마법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독재자는 홀몸이며, 자신에게 주어진 고유한 특권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러한 신비로운 특성을 도외시하면 그는 비인간적이고 잔혹하지 않는가? -14-15쪽

인민이 이와 같은 억압에 이끌리는 태도는 비겁함이고 명명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권력에 아부하는 자들 역시 겁쟁이들이고 졸장부들인가? 만약 두세 명의 사람들이 독재자의 모든 폭력 행위에 대해 저항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를 기이하게 생각하겠지만, 그래도 현실에서 있을 수 있다고 여길 것이다. 이 경우 사람들은 용기의 결핍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참고 견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수백 명, 수천 명의 사람들이 유일한 한 사람에 의해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들이 저항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니라, 저항을 원하지 않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비겁함이 아니라, 굴욕이고 부끄러움이 아니겠는가? -17쪽

인민 가운데 누군가 자유를 획득하기를 원한다면, 그는 권력에 대항하여 싸울 수밖에 없다. 비록 가장 고귀한 목적인 자유의 천부적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려 한다 하더라도, 나는 그에게 그러한 모험을 권유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혼자만의 힘으로는 인민 전체의 동물적 신분이 보편적으로 고유한 신분으로 바뀔 수 없기 때문이다. 개개인 각자에게 커다란 용맹심을 발휘하라고 무리하게 요구할 정도로 나는 욕심을 부리고 싶지는 않다. 인민들은 제각기 고유의 취향에 따라 자유로운 삶에 대한 막연한 희망과 확신을 가지고 불행한 삶을 계속 영위하려고 한다. 나는 이러한 태도를 무조건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권력에 봉사하느냐, 저항하느냐 하는 물음은 결코 개개인이 제각기 선택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24쪽

그러나 사람들은 자유를 그저 "열망"하기만 하였으며, 단순히 그러한 의지만 품는 것으로 만족하고 살아왔다. 실제로 언젠가는 반드시 자유를 쟁취해야 했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 땅의 인민들은 자유가 주어지지 않고 있다는 단 하나의 사실만이라도 깨달아야 했었는데, 그렇지 못했다. 이는 사람들이 자유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다만 우연히 수동적으로 얻으려고 하기 때문이 아닐까? 일단 자유를 느끼면서 누리는 행복감은 엄청난 피를 흘려야 쟁취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가정해보자. 자유에 대한 열망조차 지니지 않은 나라의 경우, 그 나라 사람들은 자유에 대한 행복감을 쟁취하려는 노력을 쉽사리 포기할 것이다. 자유란 오로지 그것을 깨닫는 사람에게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가? (계속)-24-25쪽

그렇다, 폭군은 사람들이 모시고 떠받들기를 그만둔다면, 즉시 스러져버릴 것이다. 폭군으로 하여금 더욱 많이 먹게 하면 해줄수록, 더욱 약탈하여 삼키게 하면 그렇게 해줄수록 그는 더욱더 강력하게 된다. 폭군은 그를 모시는 인민들에 의해서 점점 더 강해지고, 파괴와 약탈을 일삼는다. -25쪽

겁쟁이나 바보는 불행을 간파하거나 행복을 획득하는 방법을 전혀 알지 못한다. 이들이 끝내 성취하는 것은 눈앞에 보이는 개인적 욕망에 불과하다. 이들은 천성적으로 걸핏하면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무엇만을 차지하려고 한다. 근본적으로 고찰할 때 이러한 개인의 욕망이 내면에서 자유를 열망하는 어떤 힘을 배척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 즉 신중한 자와 변덕스러운 자, 용기 있는 자와 비겁한 자들, 누구나 할 것 없이 행복해지고 싶어하며, 선을 바란다. 그러나 많은 선 가운데는 단 하나의 고결한 선이 있다. 그것은 자유이다. -26쪽

동물이라 하더라도 너희가 지금 좋아하고 있는 그따위 짓은 참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차제에 우연히라도 결코 자유를 얻지 못한다. 오로지 자유롭게 되려는 욕구를 마음속에 지녀야만 즉시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이다. 너희에게는 자유에 대한 욕구와 의지만으로도 충분하다. 독재자에게 복종하지 않을 것을 결심하라. 너희들은 자유롭게 되 것이다! 그를 창으로 찌를 필요도 없고, 뒤엎을 필요도 없다. 다만 그를 지지하지 않으면 족하다. 그러면 너희는 조만간 목격하게 될 것이다. 토대가 사라지면, 독재자는 마치 제 무게에 못 이겨 저절로 붕괴되어, 산산조각 나는 거대한 입상처럼 무너지고 말리라는 것을. -29쪽

"참주는 세 가지 사항을 추구한다. 첫째로 그는 인민들을 소심한 사람들로 만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소심한 자는 어느 누구에 대해서 반항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로 참주는 피지배자들 스스로 불신하도록 그들을 이간질시켜야 한다. 몇몇 중요한 사람들이 서로 신뢰하게 되면, 참주 체제는 위태롭게 변한다. 따라서 참주들은 지배에 해를 끼치는 자들보다도 더욱 혹독하게 고결한 지조를 지닌 자들과 싸워야 한다. (...) 셋째로 참주는 누구에게도 권력의 수단을 이양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권력 수단 없이는 주어진 폭정을 사라지게 할 수 없다."(라 보에티, Von der freiwilligen Knechschft)-30-31쪽

자연이 우리 모두에게 고유한 권한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허용했음을 고려한다면, 어느 누구도 자신이 주어진 사회에서 평생 노예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36쪽

자고로 인간은 여태 한번도 가져보지 않은 무엇 때문에 한탄하지는 않는 법이다. 만약 과거에 겪었던 찬란한 기쁨의 삶을 기억한다면, 인간은 주어진 불행을 제대로 의식할 수 있다. 만일 과거로 사라진 즐거움에 대한 기억이 있다면, 현재의 좋지 못한 상태는 그제야 비로소 제대로 인지될 수 있다. 정말 그렇다. 인간은 본성, 기질, 천성에 의해 자유로우며, 자유롭게 되려고 한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붙는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인간이 교육에 의해 배워온 관습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육받고 익숙하게 된 모든 일들은 마치 처음부터 주어져 있는 일감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어느 한 사람의 임의에 의해 정해진 것이다. 인간의 기질이나 본성은 처음부터 상대적인 것인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변하기 어렵고, 천성적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이는 참으로 유감스러운 선입견이 아닐 수 없다. (계속)-56쪽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 인간의 자발적 복종에 대한 첫 번째 근거는 습관이다. 인간의 순응 과정은 말의 태도와 같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고삐를 당기고 물어뜯지만 나중에는 얌전하게 변하는 말과 다를 바 없이 변한다. 안장이 등에 얹힐 때, 말들은 난폭하게 이를 팽개치지만, 길들여진 다음에는 안장을 단 채 경쾌한 걸음으로 걷는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신하로 살아왔으며, 그들의 조상도 그렇게 살아왔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불행한 삶을 하나의 의무로 생각하고, 심지어는 의무를 위한 삶을 자랑하기도 한다. 이로써 독재자의 소유권은 더욱 공고하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장기 집권은 어떠한 부정도 정당화시키지 못한다. 그것은 부도덕하고 부정한 짓거리를 확대시킬 따름이다. -56쪽

역사를 탐구하는 자는 다음의 사실을 분명히 발견할 수 있다. 만약 사람들이 순수한 용기와 곧은 정신으로써 나쁜 지배자로부터 나라를 해방시키려고 한다면, 거사는 항상 성공한다는 사실 말이다. -59쪽

인간이 자유를 잃으면, 용기 또한 상실한다. 노예로 살아가는 인민들에게는 투쟁 욕구도 없고, 강인함도 없다. 독재자는 일반 사람들의 의지와는 반대로 얼마든지 그들을 괴롭힐 수 있다. 일반 사람들은 완전히 경직되어 있으며, 자유의 불길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활활 타오르지 않는다. 원래 자유를 품은 사람은 어떠한 위험도 아랑곳하지 않고, 동지들과 함께 고귀한 명예를 위해서 장렬하게 자신의 몸을 바치려고 생각하지 않는가? 자유로운 인간들은 고결하게 투쟁하며 싸워 나간다. 그들은 가능하다면 만인과 자기 자신의 안녕을 위해서 각자 싸운다. 그리하여 그들은 패배의 불행 혹은 승리의 행복을 서로 나눈다. 이에 반해서 노예들에게는 투쟁의 용기도 없고, 다른 모든 사람들의 안녕을 위한 살아 있는 희생적 충동력도 없다. 노예들은 소심하고, 나약하며, 위대하게 행동할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래, 독재자들은 이를 분명히 꿰뚫어보고 있으리라. 만약 인민이 노예로 변화되는 과정에 있다면, 독재자는 그들을 더욱더 느슨하고 무기력하게 만들기 위해서 온갖 조처를 취할 것이다. -64-65쪽

오늘날에도 권력을 지닌 자들은 마구잡이로 불법을 자행하면서, 이른바 공공의 안녕, 인민을 위한 허울 좋은 "모델"로써 그것을 은폐하고 있다. 이러한 짓거리는 옛날의 그것보다 심했으면 심했지, 결코 나아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71쪽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해악을 가한 자에게 복수하지 않고 그저 참고 살아간다. 이 사실에 대해 독재자 자신도 소스라치게 놀란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종교의 배후에 숨기 때문에, 신성의 끝자락은 교묘하게 감추어진다. 이를 통해서 비열한 압제자들은 마치 어떤 신적 존재로 군림할 수 있었다. -73쪽

독재자는 인간적 기쁨, 우정 그리고 사랑을 누릴 수 없으며, 권력 유지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현명한 철학자를 두려워하고, 양심 있는 자를 증오해야 한다.
(<히에른>에서 크세노폰이 독재자의 입장에서 심적 상황을 묘사한 부분을 라 보에티가 요약)-77쪽

한마디로 말해서 많은 사람들은 독재자의 비호를 받으며 전리품을 챙기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독재를 통해 이윤을 챙기려는 사람들의 수는 마치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대대적으로 확장된다. 자고로 인간의 신체에서 나쁜 피는 항상 곪아가는 상처 부위로 집결하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왕이 전제 정치를 행하면, 그의 주위에는 온갖 쓰레기 내지 거품과 같은 인간들이 모인다. 그들은 대부분의 경우 소인배, 혹은 속물들이 아니다. 그들은 불타는 공명심과 놀라운 탐욕으로 독재자를 도우려고 한다. 그렇게 해야만 그들은 착취한 이득의 일부를 얻을 수 있으며, 거대한 독재자 아래에서 작은 폭군들로 군림할 수 있다. -85-86쪽

오히려 그들은(신하 : 전제 군주의 추종자) 자신과 마찬가지로 고통당하면서도 저항할 줄 모르는 자들만을 골라 불법을 저지르곤 한다. 이들은 인민을 억압하고 불법을 자행함으로써 이득을 창출해 낸다. 이러한 짓거리를 행하기 위해서 그들은 독재자를 향하여 칭송의 목소리를 높인다. 이러한 더러운 인간들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그들의 사악함에 대해 깜짝 놀라곤 한다. -87쪽

배우자,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을 배우자! 위를 향하여 응시하자! 우리의 명예를, 우리의 사랑을, 우리의 선을 위하여! 우리의 행동을 깨닫고, 우리의 오류를 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게 하는 신의 사랑과 영광을 위하여!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해서, 나 자신을 속인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즉 신은 저 아래의 전제 군주와 그 패거리들에게 어떤 특별한 형벌을 내릴 준비가 되어 있다. 즉 선량한 자와 신의 은총을 받는 자라면 누구든지 폭정을 가장 저주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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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키호테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 18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김정우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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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읽고나니 기왕에 읽는거 시공사에서 나온 두꺼운 완역본으로 읽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지만, 쉽고 편하게 재밌게 읽었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듯 하다. 청소년용으로 나온 책이라 완역본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자르고 붙여 편집한 것인지 알 수 없어,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치만, 돈 키호테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딱 최소한 접할 만큼은 접한 듯하니 이 정도로 만족.

  철학자 김용규씨가 얼마전(?) 한겨레신문 토요일자 칼럼란을 통해 - 지금은 연재를 안하신다 - 두 차례에 걸쳐 돈 키호테 이야기를 하신 바 있다. 그만큼 다른 고전작품들보다 돈 키호테를 가지고 하고픈 말이 많으셨던듯 하다. 먼저 김용규는 "돈 키호테는 이상주의자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데, "이상주의를 ‘현실적 가능성을 무시하고 이상의 실현을 삶의 목표로 하는 공상적 또는 광신적 태도’ "라고 규정하면 그렇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가진 이상은 순결한 이상이었다. 돈 키호테를 둘러싼 전자의 해석은 칼 마르크스에 의한 것인데 마르크스는 돈 키호테를 "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과 같이 "추상적 원칙에 의해" 세계를 해석한 "잘못된 의식의 화신" "으로 평가했다고 한다.

  김용규는 그럼에도 돈 키호테에게는 다른 이상주의자들이 가지기 어려운 미덕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자기 희생에 의한 이상 실현"이라고 한다. "더 나은 삶과 세상을 위한 인류의 이상은 숱한 사상가, 혁명가, 종교인에 의해서 시대를 거르지 않고 주장되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온전하게’ 성취되지는 못했다. 각각의 이유야 많다. 그러나 공통적인 원인들 가운데 중요한 하나는 모두들 자신의 이상에 대해서는 열변을 토하면서도, 그 이상을 실현하는 데 요구되는 희생은 떠맡으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역사가 증명하듯이 누구도 “남의 뺨에 흐르는 땀에서 제 먹을 빵을 짜내면서” 더 나은 삶과 세상을 만들 수는 없는 법이다. 이상이란 ‘단지 꿈꾸고 바라기만 하는 공허한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희생을 대가로 이루어가야만 하는 고귀한 어떤 상태’인 것이다."

  돈 키호테는 성직자들이 앉아서 기도나 드리고 있던 시절, 비록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기는 했지만 자신을 희생해가면서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몸으로 노력했다는데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이다. 이 책 곳곳에서는 그런 장면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못생긴 동네처녀를 공주라고 하질 않나, 낡은 여관을 뻑쩍지근한 성이라는둥 엉뚱한 소리, 엉뚱한 짓을 일삼고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놀림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편력기사로서 꿋꿋이 나아간다. 그는 헛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소설 속에서 그렇게 묘사되고 있지만 그는 사람들이 바라는 이상사회를 위해 한발 한발 정진해나가고 있다. 비록 주변 사람들이 그것을 헛된 망상이라고 놀리지만. 

  이상사회는 완전하지만 도달하기 어렵다. 현실이기보단 비현실에 가까우며, 그것은 차라리 꿈꾸지 않느니만 못해 보인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자기 나름의 이상사회를 그리고 그 이상사회로 다가가기 위한 철학을 세웠다. 많은 철학자들이 자신의 철학을 완성시키는 부문은 이상사회였다. 플라톤이 그러했고, 헤겔도 그러했고, 칸트도 그러했다. 이들의 철학을 분야로 나누는 건 우습지만, 그들이 마지막에 자신의 철학을 완성한 곳은 정치철학이었다.

  과거 역사 속에서 수많은 이들이 이상사회를 꿈꿨지만 아무도 그곳에 도달하지 못했다. 실현 불가능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현불가능하다하여 꿈꾸지 말란 법도 없다. 개인의 자아실현은 꿈을 꾸면서부터 시작되고 완성된다. 국가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열망과 노력이야말로 사회를 좀 더 낫게 만드는 변화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이상이란 언제나 ‘아직은’ 실현되지 않음으로써 현실에 안주하려는 우리를 부추기고 불편하게 하고 변화하게 한다. 이것이 이상의 본래적 가치이며 역할이다. 따라서 진정한 이상주의자는 밤마다 희망을 쓸어안고 잠들고 아침마다 길 떠나는 자다."

  우리는 이상사회를 꿈꾸고 있는가. 그리고 있는가. 우리가 꿈꾸는 이상사회는 어떤 모습인가. 현실을 보면 너무나 멀고 암울하기만 하다. 국민으로서 누리고자 하는 기본적인 가치조차 무시당하는 현실에서, 집나간 민주주의를 찾아 길떠난 시점에서, 우리에게 이상사회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있다. 그러나 현실이 암울하다 하여 이상을 접어버릴 순 없다. 이토록 참담한 현실에서도 우리는 이상을 꿈꿔야 한다. 그리고 한 발짝 나아가야 한다. 거꾸로 퇴행하는 역사를 되돌리고, 우리의 권리를 지키며 이상을 실현해야 한다.

  어쩌면 이상사회는 국민 모두가 그들의 기본권을 보장받고 누릴 수 있는 사회인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해본다. 그것이야말로 이상사회가 아닐까하고. 별다른게 없다. 그 옛날 선비들이 꿈꿨던 무릉도원이나 기독교의 천국이 이상사회가 아니다. 우리가 기본권을 보장받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그날이 이상이 실현된 날이 아닐까 싶다. 그 날을 위해 한 발씩 내디디기에도 우리는 갈 길이 멀다. 이상을 위해 함께 가자. 돈 키호테처럼. 돈 키호테는 혼자여서 세상이 그를 비웃었을지 모르나, 우리가 함께 가면 우리가 세상을 비웃는다. 한 두명의 돈 키호테로는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동참해야 한다. 수많은 돈 키호테들이 필요한 시점이다.

p.s. 파란색 인용문은 모두 김용규씨의 한겨레 칼럼을 인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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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8-05-25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키호테 완역본을 사놓고도 보지않고 곱게 책장에 꽂아두기만 했는데....
돈키호테들이 세상을 비웃을 수 있는 그런날이 보고싶네요. 먼저 책을 읽어야할까요?

마늘빵 2008-05-26 00:01   좋아요 0 | URL
시공사 것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 매우 두껍다고 들었는데. 저 역시 수많은 돈 키호테가 거리로 나와 세상을 비웃기를 희망합니다. 그들의 편력을 끝낼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10대와 통하는 정치학 - 고성국 박사가 들려주는 정치와 민주주의 10대를 위한 책도둑 시리즈 1
고성국 지음, 배인완 그림 / 철수와영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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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대들이 거리로 나서고 있다. 광우병 걸린 소를 먹기 싫다며 그들이 직접 거리로 나왔다. 한쪽에서는 좌익반동세력들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다고 말하고, 한쪽에서는 우리 사회의 희망이라 말한다. 나는 후자의 입장이다. 어떤 이는 둘 다 아니고, 소비자가 잘못 산 상품에 대해 리콜 운동을 벌이는 것이라고도 했지만, 그렇게본다 하더라도 희망적이다. 최근 백분토론에 전화참여한 양선생님은 지금 촛불집회와 이명박 대통령 발언 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전 생략) 국민은 소비자인거죠. 국민의 건강과 관련된 서비스를 정부에서 해줘야 하는거죠. (중략) 반대를 하면 어린애들이 몰라서 그런다, 정치세력이 뒤에 있다, 그러면서 국민들을 말 잘 못알아듣는 어린애들 취급을 하지 않았습니까. (중략) 자동차 회사로 예를 들면요, 우리국민인 소비자가 자동차를 샀단 말입니다. 근데 의자가 좀 불편해요, 그게 고소영 강부자 내각에요, 핸들링이 좀 안좋아요, 영어몰입교육이에요, 근데 참았어요, 엔진이 힘이 없어요, 대운하 정책이에요, 그래도 참았단 말이에요, 근데 이 차가 브레이크가 안들어요, 이게 소고기 문제에요, 소비자 입장에서 지금까지는 그래도 다 참겠는데 더 이상은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하자를 발견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소비자인 국민이 이 자동차를 리콜을 시키려는데 회사에서는 뭘 모르는 소비자가 좋은 상품 모른다고 말을 해왔단 말이죠. (이하 생략)"

  대한민국이라는 회사의 CEO(이명박)와 그 직원들(공무원, 한나라당)이 소비자(국민)의 불만을 제대로 듣지 않고, 좋은 상품을 못 알아본다고 큰소리 치는 형국이라는 말인데, 지금 상황을 아주 재밌게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 아닐까 싶다. 십대들을 소비자의 일부로 본다면 상품이 맘에 안들고 심각한 결함이 있다고 해서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하는데 회사는 물대포를 쏘고 강제연행하고 있다. 어제 본 동영상에도 중학생 한 녀석이 경찰에게 맞아 아파하는 모습이 보였다.

  무엇이 십대들을 거리로 나오게 만들었을까. 학생들이 집회에 나와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우리는 학교에서 배운대로 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렇다. 그들은 학교에서 배운대로 하고 있을 뿐이다. 선생님은 그렇게 가르쳤고, 학생들은 그렇게 배웠다. 그런데 선생님은 배운대로 실천하는 학생들을 잡아들인다고 거리로 나왔고, 학생들은 배운 것을 실천하겠다고 거리로 나왔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잘못된 건 그렇게 가르치고도 하지말라고 말하는 선생들이다. 그리고 이 나라 정부다.  

  <10대와 통하는 정치학>은 철수와영희에서 나온 '10대를 위한 책도둑 시리즈' 1권이다. 이 책은 중고생이라면 알고 있을 정치에 관한 기본 상식들을 쉽고 재미나게 친절하게 풀어놓고 있다. 정치가 뭐에요, 좋은 정치와 나쁜 정치 뭐가 다른가요, 좋은 정치 어디서부터 시작하나요, 민주주의가 뭐에요, 민주 정치 어떻게 해야 잘할 수 있어요, 기본권이 뭐에요, 기타 등등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져놓고 저자가 쉽게 답해주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 책은 전혀 정치적이지 않다. 좌편향도 우편향도 아니며, 객관적인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전혀 정치적이지 않은 이 책의 가르침은, 교과서의 그것과도 어긋나지 않아 보이는데, 여기 적혀 있는대로라면 지금의 십대들의 행보는 문제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다. 왜 그들을 문제삼는가. 수능공부해야 할 녀석들이 도서관에 안가고, 야자 빼먹고 거리로 나온 것이 문제인가. 학원다니라고 열심히 벌어다 학원비 매달 채워주고 있는데, 그거 한 번 빼먹어서 문제인건가. 그렇지 않다. 학생들이 두려운게다. 시민단체가 들고일어나면, 노동자가 들고일어나면, 에이 또 이 녀석들이네 하면서 무시하면 되는데, 전혀 나오지도 않던 머리에 피도 안마른 새파란 녀석들이 거리에 나와 "미친소는 너나 쳐드삼" 이러고 있으니 그들이 두려운게다. 그러니 교육청 직원과 교감이 토요일날 자리배치까지 다 짜가면서 거리에 나와있지.  

  이 책의 장점은 매우 친절하고 쉽게 풀어썼다는데 있으며, 단점은 너무 문답형식에 따르려다보니 화면구성이 지루하다는 것이다. 중간중간 만화와 곁들여진 본문 서술이 끝나고 나면 뒤에 문답형식의 장이 계속 나오는데, 계속 단조로운 같은 구성이 반복되어 지루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게 또 이 책의 특징이라면 특징이기도 하다. 알고싶은 질문을 찾아서 해당 부분만 찾아 읽으면 되는. 마치 각종 사이트 고객센터란에 있는 '자주 하는 질문' 코너 같은 느낌이랄까. 왜 그런 코너들 보면 알고 싶은, 궁금한 부분을 깔끔하게 설명해주지 않나.

  청소년용 서적들이 많이 나오고 있지만, 중고생이 읽을 마땅한 정치입문서격인 책이 없는 차에 이 책은 괜찮은 교과서 역할을 해줄 수 있을 듯 하다. 다 알고 있고, 나도 오래전 배운 내용이지만, 읽으면서 머리 속이 말끔하게 정리되는 느낌을 받았다. 청소년뿐 아니라 성인들이 읽어도 신선한 책이다. 당연한 것을 모르고 살면 피해보게 마련이다. 다음은 보너스 밑줄.

 "집회, 시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기본권이란다. 양심, 사상의 자유가 기본권으로 인정된다면 그것을 표현하는 집회, 시위, 출판, 언론의 자유 또한 인정되어야 완전한 기본권이 된다는 생각에서란다. 그러므로 시위는 타인에게 심각한 손해를 끼칠 위험성이 없는 한 허용되어야 하는 거란다. 그것이 민주주의 정신이야." 그렇다면 질문.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일까? 답은 각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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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미로 2008-06-19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태에 딱 맞춰서 잘 나온 책 같네요^^ 어린이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 권해야 겠군요^^

마늘빵 2008-06-19 22:19   좋아요 0 | URL
네 지금 딱 아이들이 읽어야 할 책입니다. 교과서에 뭐라 쓰여있는지 어떻게 배웠는지 기억한다면 그들이 거리로 나오는건 당연한 수순입니다.
 
죽음의 밥상 - 농장에서 식탁까지, 그 길고 잔인한 여정에 대한 논쟁적 탐험
피터 싱어.짐 메이슨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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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초부터 시작된 광우병 수입 반대 촛불집회가 다음주면 한 달이다. 참으로 질기게도 국민의 머슴이기를 자처한 대통령과 정부는 국민들의 재협상 요구를 무시하고 있고, 단지 소통의 문제로 치환해 그간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내가 잘 알려주마 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니들이 잘몰라서 그랬으니깐 내가 알려주겠다고. 근데 내가 보기엔 현실을 잘 파악하고 있는 건 국민들이고, 잘 모르고 - 아니면 모르는 척 하거나 - 있는 건 정부다. 정부가 잘 모르는 내용을 시민단체와 언론, 국민이 제대로 알도록 알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단지 소통의 문제로 치환해 대충 얼버무리겠다는 것에 화가 난다. 

  출판사들은 나날이 새로운 광우병 관련 서적을 내놓고 있다. 벌써 5월 한 달 사이에 신간 소개에서 본 것만 해도 너댓가지는 되는 듯 하다. 그만큼 국가 전체의 관심이 광우병 미국소 수입에 쏠려있다는 것이고, 예전같으면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출판사들이 속속 번역해 내놓는 관련 서적들은 꽤나 잘 팔리고 있는 듯 하다. 광우병 관련 서적과 함께 또 주목받는 것이 채식주의에 관한 책인데, 가장 적절한 시기에 나온 - 예상하고 때를 맞춘 건지는 모르겠지만 - 피터 싱어의 <죽음의 밥상>이다. 피터 싱어는 오래전부터 채식주의와 동물해방을 주장해왔고, 많은 이들에게 익히 그의 주장은 알려져있다. 그런 그가 농부 변호사와 함께 내놓은 <죽음의 밥상>은 전혀 철학책 같지 않게 쉽게 왜 우리가 채식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차근차근 보여준다.

  그래 이것은 철학책이 아니다. 철학자가 쓴 책이라고 다 철학책은 아니다. 매우 쉽다. 왜냐하면 싱어와 메이슨은 최대한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고 자기들과 같은 채식주의자가 되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렵게 쓰면 많은 이들을 동참시키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주장과 그에 이어지는 근거'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그들이 직접 농장에서 경험하고 보고 느낀 바를 풀어놓으며 그냥 보여주기만 한다. 보여주는 모습이 많아질수록, 책장이 뒤로 넘어갈수록, 독자는 육식을 혐오할 수밖에 없게 된다. 결국 채식주의를 선택하게끔 유도하는 것이다. 역자 함규진은 이 책의 '옮긴이의 말'에서 자신은 결국 육식을 포기하지 못했음을 고백했지만, 이 책을 읽은 나는 최소한 육식을 피하려는 노력은 하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타인들보다 육식을 '자주' '많이' '다양하게' 즐기지는 않는 것도 어느 정도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나는 고기를 매우 즐기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어느 정도 즐기는 사람이기는 했고, 소불고기와 돼지갈비, 소갈비, 소시지 안주 등을 즐겨왔다. 닭은 무슨 기억 때문인지 원래 잘 먹지 않았고, 기껏 먹어봐야 계란과 닭갈비 정도다. 닭도리탕이니 삼계탕이니 양념통닭이니 하는 것들은 나에겐 기피대상이었다. 기타 오리나 개 등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AI 때문이 아니라. 그러니 내가 즐기는 육식은 소와 돼지에 국한되는데 이 책을 읽고 난 뒤로 난 식탁에 오르는 반찬 중 소와 돼지에 관한 품목들에도 젓가락을 대지 않고 있다. 나의 이러한 결단은 '육식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되었다기 보다는 - 그랬으면 더 좋겠지만 - 먹거리의 윤리성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이건 자연의 약육강식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의 문제다.  

  피터 싱어는 오래전부터 그렇게 주장해왔다. 윤리의 대상을 인간이 아닌 살아있는 동식물에게까지 적용할 것을. 그것을 생물학적으로 내가 속한 인간종과 가까운 것에서부터 먼 것으로 점차 범위를 넓혀가며 상대적으로 윤리를 적용해가는데 인간, 그리고 인간과 닮은 영장류뿐 아니라 인간과 닮은데라고는 찾아 볼 수 없고, 오래전부터 인간에 의해 먹거리로 간주되어왔던 동물들에게까지도 윤리를 적용해 그들을 함께 살아가는 하나의 개체로서 바라보자는 시각이다. 이 책을 읽고 내가 육식을 멀리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내가 식단을 결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난 육식을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 가령 회사에서 다 같이 고기 먹으러 가자고 했을 때 나의 견해를 피력해가며 모두의 식단을 바꾸어버리기엔 너무 피곤하다. 사실 그래야 하겠지만 나의 충분한 의견 피력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나에게 돌아오는 건 별종취급뿐일 것이다.

  싱어는 오히려 이걸 바라고 있다. 이 책을 읽은 이들이 육식을 멀리하기를 바라고, 그런 이들이 늘어나 다 함께 식사를 해야할 때 육식을 거부하는 이유에 대해 다른 이들에게 설명하고, 그들까지 설득시켜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싱어의 입장에 동의하고 동참하는 나는 친한 이들 사이에서는 그런 견해를 피력할 수 있겠지만, 그 정도로 나를 별종으로 만들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그러기 힘들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그러니까 내가 육식을 멀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나의 일부 사적 영역에서뿐이지 모든 영역에서 실행할 수는 없음을. 이건 마치 내가 정치적인 이유에서 스타벅스를 가지 않는 것과 같다. 친한 이들에겐 간략히 설명해 함께 있는 이들이 최소한 그 자리에서 가지 않도록 할 수는 있지만, 이런 입장을 피력하기 어려운 이들과 있는데 스타벅스를 가자하면 가지 않을 수는 없는.  

  싱어는 이 책 곳곳에서 우리가 심지어 닭대가리라고 놀리는 그 닭이 그만큼 멍청하지도 않다는 것을, 소나 돼지나 기타 동물들이 인간과 같은 이성을 지니지는 못하지만 인간과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우리가 키우는 강아지가 토실토실하게 살쪘다고 그것을 먹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토실토실하게 살찐 돼지와 소를 맛있게 먹는다. 왜일까. 강아지는 나와 함께 세월을 함께 하며 교감을 나누었지만 소나 돼지는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얼굴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먹거리의 대상에 대해 느끼는 감정의 정도 차이에서 먹느냐 마느냐가 결정된다면, 우리가 먹게 될지도 모르는 소나 돼지를 한번씩 농장에서 보고 오는 건 어떨까. 나중에 소나 돼지를 먹을 때 그 소나 돼지가 떠오르도록. 어쩌면 지금 내가 닭을 먹지 못하는 건 - 계란을 먹게 된 것도 고등학생 시절이었던 거 같은데 - 어릴 적 키운 병아리가 떠오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느날 고양이에게 잡혀 먹혀버린.

  수요가 많으면 공급은 자연히 따라온다. 사람들이 육식을 많이 할수록 소나 돼지나 닭은 더 많이 키워지고, 도살되며, 우리의 식탁에 오른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잡기 위해 소나 돼지나 닭은 좁고 더러운 공간에서 생명체가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것들마저 박탈당한 채 한낮 장난감처럼 다루어진다. A4용지 크기도 안되는 공간에 닭들은 부리를 잘린 채 옴싹달싹 못하고 자라며 도살장으로 끌려가고, 돼지는 새끼를 낳고 젖을 드러낸 채 눕혀져 움직이지 못한다. 그들은 서로의 사체로 만들어진 사료를 먹고 자라고, 그렇게 도살된 고기는 우리의 입으로 들어온다.

  AI니 광우병이니 하면서 닭, 오리, 소 등을 잔혹하게 집단학살하는데 그건, 그들이 자초한게 아니라 인간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 내몬 것이다. 인간이 비상식적인 사육방식으로 동물을 키우고, 잘 키워지면 죽여서 먹고, 문제가 생기면 목숨을 끊어 파묻어버리는 방식으로, 그들을 대해왔다. 미친소, 미친소 하면서 나도 소에게 참 미안하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미친소라는 말을 쓰지 말자고도 한다. 나는 '미친소'라는 말이 우리가 처한 현실을 부각시켜주니까 그렇게 계속 쓰고 있는데, 미안하긴 하다. 소에게. 소가 미친게 아니라 사람이 미쳐서 그렇게 된 건데 말이지.

  우리가 육식을 멀리 해야 하는 이유는 이것 말고도 여럿이 있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피해인데, 더 싼 고기를 소비자에게 팔기 위해 월마트 같은 대형 마트에서는 직원 월급을 줄이거나 해고시킴으로써 남아있는 직원들의 노동량을 증가시키고, 그 대신 제품 값을 싸게 매겨 소비자에게 제공하고 있다. 그러니 소비자는 싼 고기를 사는게 아니라 해고된 직원들의 임금을 착취하는 셈이다. 이것을 인식하고 싼 고기를 사는 소비자는 얼마나 될까. (그렇다고 달리 다른 선택이 없는 것이 현실이긴 하다.) 많은 대형 마트들이 그렇다. 미국 뿐만 아니라 한국의 대형 마트에도 나이 많은 아주머니들이 알바로 뛰고 있고, 우리 어머니도 그 중 하나다. 연세가 많으셔서 그나마도 구하기 힘든 형편인데 어떻게 쉬지 않고 옮겨다니면서 일을 계속 하시고 계시다. 월급 정확히 모르지만 100만원이나 될까. 사람에 대한 윤리 문제는 육식에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관련이 없는 것도 아니다. 대형마트뿐 아니라 도살장이나 각종 고기 공장도 마찬가지일테니.

  이 책을 읽고나면 당장 내일 아침에 밥상에 오르는 각종 고기성분이 들어간 반찬들이 달라 보일 것이다. 정말 그랬다 나는. 정말 고기성분이 들어간 반찬을 빼면 먹을 게 없을 정도로 고기는 식료품 곳곳에 숨어 들어가 있다. 하다못해 짜장면이나 볶음밥을 먹으려고 해도 그렇고, 미역국을 먹어도 그렇다. 육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는 힘들다. 그러나 최소한 주재료가 되는 고기반찬들을 멀리함으로써 조금이나마 싱어와 함께 할 수 있다면 나는 그런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참, 싱어는 물고기까지도 윤리의 범주 안에 넣고 있지만, 차마 물고기까지는 내가 어찌 하질 못하겠다. 지금 현실에서 고기 들어간 먹거리를 피하는 것만도 내겐 너무 벅차다. 물고기는 일단 보류하기로 한다. 

  베건 식단은 동물에 대한 기본적인 삶과 윤리뿐 아니라 지구 환경 변화에도 기여할 수 있다. 다음 밑줄은 보너스다.  

  "시카고 대학교의 기든 에셸과 파멜라 마틴은 동물성 식품 생산 과정에서 방출되는 온실가스의 양을 조사했으며, 전형적인 미국의 식단(그중 28퍼센트가 동물성인)은 같은 양의 칼로리가 포함된 베건 식단에 비해 한 명이 1년에 약 1.5톤의 이산화탄소를 더 배출시킨다는 결과를 얻었다. 대조적으로, 보통의 운전자가 미국의 전형적인 자동차 대신 좀 더 연비가 좋은 하이브리드 차량으로 바꾸었을 때 1년에 줄일 수 있는 이산화탄소 방출량은 1톤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기후 변화에 미치는 영향을 억제하는 데는 차를 바꾸기보다 베건 식단으로 바꾸는 편이 더 효과적인 것이다.(물론 두 가지 다 하면 더 좋겠지만.)"

p.s. 이 책의 주장은 엄밀히 말하면 피터 싱어와 짐 메이슨 둘 다의 것이지만, 편의상 저자의 이름을 이야기해야 할 때 싱어만을 언급했음을 알린다. 이건 둘 다 언급하기엔 문장이 너무 난삽해지고 길어지기 때문이며, 하나 더, 싱어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싱어를 좋아함)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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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26 1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5-26 1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여우 2008-05-26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리문제 좋은데요, 저는 동물성을 마치 독약보듯하는 시선은 반댑니다.
축산업자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오니까 마치 내 밥그릇을 옹호하려는 발언으로
왜곡하시는 분들도 있지만(그들 대부분이 도시 월급 생활자들)
대규모의 공장식 농장은 저도 반댑니다. 그건 사육하는 동물과 인간, 자연생태,
사회적 시스템 모두에게 치명적인 악순환만 거듭하는 결과를 낳아요.
실제로 염소를 2백여마리까지 포화상태로 사육했던 2년전 경험에 의하면
염소출산율에 있어 사산되거나 질병에 걸리는 확률이 훨씬 높았답니다.
사료값을 포함한 원가 생산량이 더 높냐면 감가상각비도 별로 기대할 것은 없었지요.
더불어 제 노동량은 과중한 스트레스와 함께 동물을 그저 하나의 물건으로
인식하는 차원까지 진행되었는데 그걸 감지한 어느 날, 저 자신이 충격을 받았어요.
경제적 이유와 체력적 한계로 소규모의 농장으로 전환된 지금은
염소들의 성장과정은 지극히 안정적이며, 저 역시 마음의 진통을 훨씬 적게 경험합니다.
아무래도 숫자가 적다보니 한 마리 한 마리 애정의 손길이 더 가고
관심폭이 넓어지면서 동물들도 저와의 교감을 충분히 느끼고 있는 듯 보입니다.

이런 방식의 소규모 농장이라면 지금처럼 육식을 독약먹듯 대하진 않겠지요.
그런데 이 결론은 다들 알고 있는 사안입니다.
문제는 축산업자들에게 다른 현실적인 대안을 제공해서 그들의 생계기반을
어떤 방식으로 형성해 줄것이며, 사회가 어떤 경제시스템으로 순환되어야 하냐는
난제가 있어요. 생산부터, 유통, 산업까지 모두 아우르는 문제죠.
즉, 종합체계를 더듬고 동물농장에 관한 모색을 시도해야한다는 말입니다.
동물성이 단순히 밥상위에 올라가는 음식만 해당된다고 보는 건 아니시겠죠?
동물성은 공산품과, 의약품, 산업의 전반에 걸쳐 관통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축산업의 문제라거나, 정서의 문제, 음식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기도 해요.
어떤 대안을 마련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치닫는 채식주의 열풍은
반드시 이 사회 구조에서 한 부분을 또 찌그러뜨릴것입니다.

아프님 리뷰는 논의 대상으로 잘 읽었습니다.
댓글 길게 다는 거 싫은 사람인데 오늘은 뭔 일?ㅎㅎㅎ

마늘빵 2008-05-26 19:42   좋아요 0 | URL
동물성을 독약보는듯한 시선은 아니랍니다. 싱어의 입장은. 동물성이 문제가 아니라 비윤리성이 문제입니다. ^^ 싱어가 반대하는 것 역시 대규모의 비윤리적인 가축사육과 도살이고 그런 면에서 파란여우님과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싱어 또한 동물성을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가축을 윤리적으로 길러서 윤리적으로 도살하고, 그 고기를 먹는다면 그건 문제될 것이 없을 겁니다. 싱어가 반대하는 것은, 그런 고기가 아니라 그렇지 못한 고기랍니다. 그가 채식주의를 주장하는 것도, 그렇지 못한 고기들을 전제로 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크게는 동물 전체에 적용할 수 있겠지만. 싱어의 채식주의는 아마도 그것을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채식을 선택함으로써 - 마치 이러니깐 제가 채식주의자 같습니다 흡 - 문제를 널리 알릴 수 있고, 시정할 수 있다 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파란여우님 이렇게 긴 댓글은 처음 받아봅니다. :)

드팀전 2008-05-26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전 파란여우님 생각에 동의합니다.유기농의 근본적 세계관은 '자연과 병행하는 총체적인 순환론'입니다.마이클 폴란이 잘 정리해 놓았던데 유기농의 3가지 버팀목은 '생산방식-유통방식-소비 방식'의 결합이지요. 의외로 생산방식의 친환경요소만 강조하다보니 나머지 두 기둥을 홀대하는 경향이 아주 높습니다. 곧 리뷰를 올리겠지만...여러모로 한살림운동은 그런 면에서 선구적이고 의미있습니다.아...저는 부산 한살림 회원입지요.^^ 이 참에 홍보라도 좀 합시다.

마늘빵 2008-05-26 19:44   좋아요 0 | URL
마이클 폴란은 누구에요? -_-a 검색들어갑니다. 친환경적 윤리적 환경에서 생산된 동물을 먹는 것에 대해서는 아마도 싱어는 관대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가 이 책을 통해서, 그리고 그 전에도 꾸준히 문제제기하고 비판해왔던 것은, 그보다는 비윤리적인 방식의 사육과 도축이었으니까요. 한살림운동은 뭐에요? 처음 듣는건데.

파란여우 2008-05-26 20:45   좋아요 0 | URL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주창하셨던 먹거리 기반 운동입니다.
홈피 한번 들어가 보셔요.

순오기 2008-05-27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탱스투하고 구입했습니다. 꼭 봐야할 책인거 같아서요.

마늘빵 2008-05-27 16:15   좋아요 0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