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학생선발지침 - 자유화 파탄, 대학 평준화로 뒤집기
하재근 지음 / 포럼 / 200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개천에서 더 이상 용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에는 진보와 보수와 색깔 없는 모든 국민이 다 동의한다. 그래 불과 이십년전만해도 개천에서 용은 나왔다. 하지만 이제 개천에서는 더 이상 용은 나올 수 없다. 왜 일까. 불과 몇년전에 외고를 졸업한 지인도 동의한다. 더이상 외고엔 공부는 잘하지만 가난한 학생은 갈 수 없다는 것에. 지인은 평준화 반대 입장에 서있지만 더이상 공부 잘하면서 가난한 학생이 외고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엔 동의한다. 사실 '공부 잘하면서 가난한 학생'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공부를 잘하려면 가난하지 말아야 한다. 그게 현실이다.

  '학벌없는사회' 사무처장을 맡고 있는 하재근은 444쪽 분량의 <서울대학교 학생선발지침>을 통해 끊임없이 말한다. 지금 이대로는 대한민국의 미래가 없음을. 대한민국의 미래가 지금보다 나아지려면 결국 문제의 해답은 교육에 있고, 입시경쟁이 아닌 제대로 된 교육을 위해서는 고교평준화는 물론 대학평준화까지 이룩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이상적인 교육강국은 프랑스로 보인다. (이 책에선 중부유럽보다는 북부유럽국가를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프랑스처럼 파리1, 파리2, 파리3대학 등 이름을 붙이고 - 이름을 이렇게 붙이든 저렇게 붙이든 그건 중요한게 아니고 - 대학 전체를 평준화시키고 학문을 특성화시키길 바란다. 그건 학벌사회를 비판하는 많은 이들이 이미 내놓은 주장이기도 하다.  

  정부는 일류대를 여럿 만들어서 돈 없는 자식도 그곳에 보낼 수 있도록 한다고 말했다. 수많은 특목고와 지방 입시 명문고, 국제고 등의 이야기가 나왔다. 이미 특목고에 자리잡은 학부모들은 더이상 특목고를 만들기를 거부하고, 아직 특목고에 들어가지 못한 '꿈많은' 학부모들은 더 많이 만들기를 바란다. 어떻게든 제 자식에게 일류딱지를 붙이고 싶어서. 하지만 일류딱지는 그들에게 꿈일 뿐이다. 그들의 자식들 중 다수는 꿈만 꾸다 말 것이고, 운좋은 소수는 많은 특목고 중 한 곳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뿐이다. 일류딱지는 '서울대'딱지를 얻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싸움은 더 치열해진다. 그 과정에서 일부는 자살하고, 다수는 정서불안에 시달린다. (실제로 우리나라 다수의 학생들이 정서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부모들이 알지 못할 뿐. 아니면 알면서 모른척하거나.)

  나이를 먹을수록, 학년이 올라갈수록, 싸움은 치열해진다. 싸움이 치열해짐에 따라 금액도 상승한다. 일부는 열의에 넘치지만 쩐이 없어 포기해야 하고, 일부는 쩐이 없음에도 과도하게 베팅하다 파산하고 만다. 처음에 10만원씩 들어가던 돈이 어느새 200만원이 되어있고, 1000만원을 퍼붓는 자신을 발견한다. 미친 짓이다. 가난한 자는 미친 짓에 동참하지 않으려면 처음부터 깨달았어야했다. 내가 뛰어들 싸움이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싸움에 끼어들수밖에 없는 건 다른 자식들 못지 않게 내 자식에게도 좋은 교육 환경을 마련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남은 것은 은행잔고와 눈물과 패배감 뿐. 부담없이 쩐을 투입한 승자는 서울대 간판을 획득하며 지배계층으로 올라서고, 부담 팍팍 가지며 쩐을 투입하다 만 패자는 지방사립대 간판을 손에 쥐고 앞으로 살 60년의 인생을 받아들여야 한다. 현실을 부정하지 말자. 이게 현실이다.

  하재근은 이 책의 상당 분량을 교육 이야기보다는 자유주의와 시장 이야기에 할애하고 있다. 처음엔 서론격인 이야기려니 하고 읽었는데 이건 읽어도 읽어도 끝이 없는 것이다. 언제 교육 이야기가 나오려나 하고 읽는데 마지막 장을 덮었다. 그러나 처음에 나는 의아해했으나 후반부로 갈수록 그를 이해하게 되었다. 지금의 교육 문제는 사회가 지향하고 있는 가치와 동떨어질수 없고, 시장과 자유주의를 논하지 않고는 교육을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육은 시장과 자유주의의 일부 영역에 불과하므로.

  이명박이 광우병 쇠고기를 거부하는 국민들을 향해 그런 말을 날렸다. "먹기 싫으면 사먹지마." 이 말에 국민은 분노했으나 저 한마디는 이명박 정부가 지향하고자 하는 사회를 한 눈에 보여주었다. 자유주의. 시장주의. 사 먹을 놈은 사먹고, 사먹기 싫은 놈은 사먹지마라. 이것이 지금 대한민국 정부가 국민과 함께 가자고 한 방법이다. 선택지를 마음껏 열어놓을테니 선택은 니들이 알아서 하라는. 그러니까 교육 역시도 이렇게 많은 선택지를 줄테니 가고픈대로 알아서 골라가라는. 썩을. 그것은 '자유로운 거래'라는 이름으로 미화되어 아름답게(?) 이루어진다. 선택지는 널렸다. 근데 선택할 수가 없으니 문제지. 선택지를 많이 주면 뭐하냐. 서민이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 뿐인데. 광우병 걸린 30개월 이상 쇠고기와 지방대, 그리고 앞으로 남은 삼류 인생.

  많은 국민들이 최근 3개월 동안 민주주의의 실종을 말했다. 5공을 넘어 박정희 정권으로까지 회귀하고 있다고 말했다. 민주주의의 실종은 어젯밤 강제연행과 폭력사태뿐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벌어지고 있다. "사익이 아닌 공익을 추구할 때, 자신의 사적 이익을 버리고 공적 이익을 추구할 때에야 인간 정신은 존엄성의 경지에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에겐 이런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일단 존엄하다고 치고, 악독해질 가능성보단 존엄해질 가능성을 끊임없이 조금씩이라도 높여가는 것이 인간사회의 발달입니다. 오직 이런 사회에서만 민주주의가 가능해집니다." 그래 그런때 우리는 민주주의라고 말한다. 그런데, 지금 현실을 보면 그렇지 않다. 고로 민주주의가 실종되었다고 말하는 건 헛소리가 아니다.

  국가는 국민들이 아무런 걱정없이 잘 살 수 있도록, 그 누구로부터도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불평등하게 살지 않도록, 개인의 자유를 억압받지 않도록 도와줘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 국가가 국민에게 해주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국민들 대다수는 매일 같이 애새끼 대학보낼 때까지 들어가는 - 대학 등록금은 차치하고라도 - 비용을 계산하며 한숨쉬고 있다. 이천원짜리 떡볶이 팔아가면서, 새벽까지 택시 운전해가면서, 부잣집 파출부 다니면서, 새벽녁에 일어나 우유배달하면서, 노래방에서 엉덩이 만져지며 애새끼 학원비를 벌고 있다. 왜. 돈이 많이 드니까. 이렇게라도 해야 남들 뒤꽁무니라고 따라가니까. 그게 현실이다. 그게 사실이다.

  나는 적어도 '다양화'만큼은 동의했었다. 다양한 학교를 만들어 학교의 선택지를 늘리는 것에만큼은 적극 동의했었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아이들이 자기 적성대로 학교를 찾아가야 한다고. 그러나 헛된 믿음이었다. 다양한 학교가 만들어져도 아이들은 자기 적성을 따라가지 않는다. 아니 따라가지 '못'한다. 그건 지난 3년간 공교육에 몸담으며 중학교 3학년 학생들의 진로선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고 깨달은 바다. 내가 학생으로서 다닌 10여년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선생으로서 다닌 지난 3년간의 현실 이야기다. 선생짓 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아이들은 자기 적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왜냐면 그들은 자기 적성을 고려해서 학교를 선택할 수 있을 만큼 높은 성적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택은 상위 1%에게나 가능하다. 그러니 다양화는 헛소리다.  

  하재근은 대부분의 사회 문제가 학벌을 없앰으로써 해결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건 이상적으로 보이지만 정말 그럴 수 있을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대학평준화. 그것이 해결방안이다. 정진상이 이미 말한바 있는 국립대 통합네트워크. 그것이 가장 현실적으로 가능한 최소한의 방법이고, 사립대학들은 그 다음 일이다. 국립대가 평준화되면 사립대는 알아서 따라올 수밖에 없다. 서울대와 제주대, 전주대, 전남대, 경북대, 강원대 등이 공동으로 학생을 뽑고, 학생의 선택에 따라 자유롭게 오가게 한다. 이건 하재근의 주장이 아니라 정진상의 주장이다. 하재근의 책엔 큰 그림은 있으나 작은 그림이 없다. 그게 이 책에 아쉬운 점이다. 하지만, 이미 나온 해결방안에 그가 동의하고 이 책을 썼다면 같은 주장을 되풀이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결국 우리가 주장해야 할 바는 학벌을 없애달라는 것이다. 과거처럼 박정희식으로 위에서부터 명령해 모든 체제가 뒤바뀔 수 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 바람직하지도 않다. 하지만, 정부가 교육을 내버려둘 것이 아니라 지금보다 더 쥐어싸고 학벌없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을 하려고만 한다면 충분히 할 수 있다. 중고등학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가지고 깔짝댈게 아니라 대학을 손봐야 한다. 대학을 평준화해 아해들이 단지 학점을 어떻게 하면 잘 받을 수 있을까 따위를 고민하지 않고 제대로 학문에 관심갖고 자유롭게 - 자유롭다는 말은 이때 쓰는 것이다 - 공부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졸업도 좀 까다롭게 하고 말이지. 토익 점수 몇 점, 컴퓨터 자격증 뭐 따야만 졸업시킨다는 짓은 좀 하지 말고.

  하재근은 공화국으로 나아가자 한다.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방향은 봉건시대로 가는 것이라면서. "봉건시대야말로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자유를 누렸던 시대였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힘에 따라 자유롭게 살 수 있었습니다. 강자는 귀족의 삶을, 약자는 노예의 삶을. 그들 사이에 보편규제는 없었습니다. 그런 규제를 강제할 권력주체도 없었습니다. 완벽하게 분권화된 사회였지요. 각 분권화된 단위마다 강력한 리더십 주체(영주)가 있는 상태, 국가 전체로는 분권화 구조이지만 각 단위별로는 독재체제인 상태. 딱 자유화 개혁히 지금 추진하고 있는 자유시장의 구조입니다.공화국은 이런 질서를 거부해야 합니다. 모두에게 자유를 주면 결국 지배자까지 포함해 모두를 노예로 만들테니까요. 왜냐하면 본래적 의미의 공화국이란 예속당하지 않을 자유뿐만 아니라, 남을 예속시키지 않을 자유까지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견 자유롭게 보이는 지배자들마저 진정한 공화국의 시각에선 모두 노예들일 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노예가 되는 길을 선택하고 있다. 막을 수 있다. 연대해야 한다. 연대해 우리의 '머슴'들에게 요구해야 한다. (머슴들에게 '요구'해야 한다는 것이 웃기지만 머슴이 주인을 패기도 하는 현실인데.) 주인이 머슴의 노예가 되는 길을 자발적으로 선택하지 않으려면. 주인의 노예화를 막으려면. 학벌을 없애자. 학벌을 얻기 위해 구덩이 속에서 서로 나가겠다고 싸우며 서로를 할퀴지말고, 서로가 밀어주고 당겨주며 따뜻한 햇빛을 보고,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길을 택하자. 시장의 자유가 아닌 진짜 자유의 길을 택하자. "나 하나만의 자유뿐만 아니라 모두의 자유를 염두에 두는 것은, 나의 정신이 나라는 육체적 유한성, 개체성으로부터 해방되어 모두에게 확장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때 비로소 인간은 자유롭게 됩니다. 부자들이 제 자식만 귀족 만들겠다고 학교 선택권 요구하고, 입시 자율화 요구하는 것은 그들의 정신이 유한성, 개체성, 탐욕이란 감옥에 아직 갇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아무리 부자라 할지라도 그들은 노예입니다."

  "그대는 자유로운가.그렇다면 그대는 행복한 것이다.그대는 행복한가.그렇다해도 나는 그대가 자유로운지 아닌지 모르겠다."(김용석) 그대는 자유롭지 않으면서 그대만 행복한 길을 택하겠는가, 그대와 다른 이가 함께 행복하며 둘 다 자유로운 길을 택하겠는가. 전자라면 난 더이상 그대에게 할 말이 없다. 하지만 후자라면 우리 함께 생각해보자. 우리 함께 자유인의 길을 걷자.  

p.s. 전체적으로 신문짜깁기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이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무턱대고 사면 실망하실 분들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직접 서점에서 열어본 후에 구입하길 권한다. 학벌사회 문제에 깊숙히 들어가기 보다는 신자유주의라는 큰 틀에서 그것을 설명하고 있어, 구체적이지도 깊이있지도 않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amoo 2010-03-14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재밌을거 같은데요...강준만의 <서울대의 나라>와 비스무리 할려나요??

마늘빵 2010-03-15 09:40   좋아요 0 | URL
섣불리 구입하시면 실망하실 수도 있는 책입니다. ^^ 저자의 글쓰기 방식에 좀 문제가 있어요. 그렇다고 드러내고자 하는 메세지가 잘못되었다는 건 아닙니다. 너무 본론을 이야기하기 앞서 한참을 에둘러 가는 경향이 있고, 두서없는 말과 반복이 많습니다.
댓글저장
 
서울대학교 학생선발지침 - 자유화 파탄, 대학 평준화로 뒤집기
하재근 지음 / 포럼 / 2008년 2월
장바구니담기


어떤 서민이 자기 자식을 위해 족집게 사교육을 선택하려 합니다. 족집게 사교육의 가격은 300만 원입니다. 한데 그 서민은 30만 원밖에 여유가 없습니다. 그 서민은 어쩔 수 없이 30만 원짜리 동네 보습학원을 선택해 거래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 서민의 자식은 일류대를 선택하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삼류대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혹은 특목고를 선택하고 싶었음에도 일반고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경우 그 서민의 이익은 증진되었습니까? 이 거래를 자유로운 거래라고 할 수 있습니까? (계속)-93쪽

그런데. 시장주의는 이런 거래조차도 자유로운 거래라고 강변합니다. 그러므로 그 서민의 자식이 삼류대를 선택한 것은 그 서민과 그 자식의 자업자득이 됩니다. 그 서민은 소비자로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했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가난과 특권이 소비자 주권의 이름으로 자업자득이 되어 사회를 양극화하고 불평등이 정당화됩니다. 여기서 대학서열체제는 다수 국민에게 삼류가 아닌 정상적인 고등교육 기회를 박탈하기 위해 작동하는 장치가 됩니다. 주주(학교)는 소비자 선택을 위해 다양한 상품을 만들어 이익(서열)을 취하면 그뿐입니다. 부자 소비자(특목고생)를 위한 귀족상품(일류대), 가난한 소비자를 위한 삼류상품(삼류대)을 진열해 돈을 지불하는(능력이 있는) 소비자에게 팔면 그뿐이지요. -93쪽

사익이 아닌 공익을 추구할 때, 자신의 사적 이익을 버리고 공적 이익을 추구할 때에야 인간 정신은 존엄성의 경지에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에겐 이런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일단 존엄하다고 치고, 악독해질 가능성보단 존엄해질 가능성을 끊임없이 조금씩이라도 높여가는 것이 인간사회의 발달입니다.

오직 이런 사회에서만 민주주의가 가능해집니다. 모든 시민이 자기 욕심만 차리려고 들면 사회는 투견장이 되겠지요. 시민이 사적 이익이 아닌 공적 이익, 개인의 관심사가 아닌 공동의 관심사에 힘을 쏟을수록 그 사회가 민주적으로 성숙해집니다.

또 저마다 자기 욕심만 차리려는 '콩가루 사회'는 경쟁력도 형편없겠지요. 전체를 위해 헌신하는 마음. 내 욕심만 차리려 '삥땅'치지 않는 마음. 나 혼자 편하겠다고 건성건성 일하지 않는 마음. 이런 자세를 가진 사람들의 사회가 훨씬 경쟁력 있고 강한 사회가 됩니다.-137쪽

결국 일류학교를 둘러싼 논란의 본질은 이기적인 욕망입니다. 특목고 증서을 반대하는 학부모들의 주장도 딴에는 일리가 있는 것이, 특목고가 늘어나면 결국엔 경쟁률 하락, 미달, 학력 저하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건 너무나 당연한 말 아닙니까? 여기저기 마구 만들어놓음녀 일률학교는 더 이상 일류학교가 아니라 보통 학교일 뿐입니다. 이 뻔한 사실을 무시하면서 온갖 전문가들과 언론, 정치인들이 여기저기에 일류학교를 마구 만들겠다며 국민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그 학교들은 운영의 자율성을 받아 입시교육에만 열중할 것이므로 이 나라에서 교육은 더더욱 파탄이 나고, 학교 운영의 자율성은 반드시 교원 비정규직화와 연결되므로 우리 아이들은 교사가 아닌 강사들에게 배우게 되며, 등록금만 치솟아 일류학교를 원하는 모든 중하층 학부모의 욕망이 짓밟힐 것입니다. (계속) -177쪽

애초에 중등부문을 '다양화, 자유화, 선택권 확대' 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뒤집어야 합니다. 고교 평준화를 지키면 뒤집히나요? 사교육비 약간 줄어드는 것 말고는 본질적으로 뒤집히는 것 없습니다. 고등교육입시제도를 엎어야 합니다. 대학 평준화나 그에 가까운 조치가 내려지기 전까진 온갖 미사여구를 동반한 교육개혁이 모두 '사기'치는 '쇼쇼쇼'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와중에 각 교육청들은 특목고를 더 많이 만들겠다며 요지부동입니다. 이런! -178쪽

우리가 기업을 주주들에게 탈취당한 것처럼 어느 날 학교를 기업가 정신에 탈취당합니다. 탈취당한 기업이 국민을 '비용'과 '소비자'로만 생각하는 것처럼 학교는 노동자(교사)를 '비용'으로, 학생을 '소비자'로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학교라는 기업가가 추구할 이익이란 무엇일까요? 물론 돈을 벌 수 있겠지요. 학교 입장에선 재벌학교가 되고 싶을 겁니다. 하지만 그건 학교가 추구하는 이익의 본질이 아닙니다. 학교가 추구하는 이익이란 바로, 명성, 지위, 권력 같은 것입니다. 그런 이익이 많이 쌓이면 재벌학교는 사후적으로 됩니다. -181쪽

학교의 명성이란 결국 무엇입니까? 학교의 서열을 말합니다. (중략) 입시경쟁은 학교서열에서부터 발생합니다. 학교에서 기업가 정신을 가지란 것은, 마음껏 입시경쟁을 하여 서열을 따먹으란 소립니다. 당연히 입시 경쟁이 가중됩니다. 그러므로 애초에 내걸었던 입시경쟁 완화란 명분도 새빨간 거짓말 쇼쇼쇼였습니다.

학교가 이렇게 서열이란 이익을 따먹으면, 자기야 일류학교, 귀족학교가 돼서 좋겠지만, 우리 국민은 입시경쟁의 심화를 감수해야 합니다. 게다가 돈 없는 집 자식은 입시경쟁에서 구조적으로 배제당합니다. 결국 신분 대물림 시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또 일류학교가 생김으로써 다수 일반학교들은 삼류학교로 전락합니다. 중소기업처럼 되는 것이지요. -181-182쪽

1. 중등교육까지만 공교육으로 하면 교육의 기회 균등이라는 공교육 본래의 취지가 살아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고등교육도 공교육으로 규정해야 한다.
2. 원칙적으로 교육기관을 경제적 효율성 원리로 운영해선 안 된다. 지나친 경제적 효율성은 경제부문에서조차 폐해를 불러온다. 교육은 경제적 효율성 원리가 아닌 공공성 원리로 운영해야 한다. 경제부문과 공공부문, 교육부문을 분리해 전혀 다른 원리를 적용함으로써 적나라한 자본주의, 스스로를 파괴하는 약육강식 시스템의 폐해를 시정할 수 있다. 그래야만 부강한 나라가 된다. (계속) -217쪽

3. 대한민국의 발전전략이란 측면에서 봤을 때, 지금은 지식, 학문, 교육에 투자를 집중해야 할 단계다. 어차피 땅에서 석유가 나오지 않는다면 사람을 석유로 만들어야 한다. 즉 고부가가치형 국민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산업 전반이 고부가가치형으로 혁신된다. 이 책 전반부에서 살펴봤듯이 우리의 산업 발전사는 시장원리에 대한 지난한 투쟁사라고도 할 수 있다. 박정희는 시장원리를 통제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시장은 호시탐탐 대한민국의 산업성장을 막으려고 했었다. 시장이 저절로 우리의 산업경쟁력을 만들어주지 않았듯이, 지식경쟁력도 만들어 주지 않을 것이다. 국가가 나서서 국립대를 발전의 용광로로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국가는 교육을 자유화, 시장화할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그 결과 첫째 몸통에서 살펴본 경제사회 파탄의 구조가 교육 부문에 그대로 재현된다. 교육시장화의 핵심 고리인 입시시장을 폐쇄하고 시장거래(선택,선발)권을 몰수해야 한다. 고등교육기관을 시장으로부터 철저히 보호해(개방철폐) 공교육화하는 것이 국가 재도약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217-218쪽

대학서열이 존재한다는 건 가치기준이 단 하나라는 말이빈다. 바로 성적입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아이들은 가치기준 하나에 맞춰 획일적인 공부를 합니다. 그 한 줄 서열에 맞는 한 줄 석차를 가리기 위해서지요. 저마다 공부하는 내용이 다르면 한 줄 석차를 가릴 수 없지 않습니까. 정부가 추구하는 대학 특성화도 대학서열체제에선 거짓말일 수밖에 없습니다. 단 하나의 가치와 특성화(다양한 가치)는 공존할 수 없으니까요.

대학서열체제 아래에서 감행된 그 모든 다양성, 창의성 교육개혁들은 교육을 공황상태로 밀어넣었을 뿐입니다. 한 줄 서열과 다양성, 창의성이 충돌하기 때문에 결국 다양성도 창의성도 죽고, 다양성이니 창의성이니 하는 것이 가진 복잡성과 유연함을 파고든 건 부자들의 돈이었습니다. 그래서 교육 개혁이 진행될수록 교육격차가 심해진 것이지요.-271-272쪽

지금처럼 폐쇄적인 대학체제로는 우리나라는 영원히 인간성에 개방될 수 없습니다. 시장에 개방할 것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성에 개방된 교육체제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평준화된 개방 고등 교육체제입니다.

만약 평준화된 국립대가 각 지역에서 지역발전의 심장 역할을 한다면? 양극화, 국민 노예화를 강제하는 입시경쟁이 상당부분 완화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다민족 상황이 신분격차가 아닌 문화적 다양성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습니다. 수직적 위계화가 사라지면 수평적 다양성과 창조성이 만개하는 것이지요.-288쪽

대학 평준화는 소비자가 대학을 선택할 자유를 양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박정희가 소비자들로부터 고등학교를 선택할 자유를 몰수한 것이 고교 평준화입니다. 이것의 본질은 강자가 일류고를 선택할 자유를 몰수한 것입니다. (중략)

자유화 개혁은 자율화란 이름으로 각 대학에게 선발 자율권을 줬습니다. 그러자 대학서열체제가 심화되고 나라가 망국의 상황에 처했습니다. 즉 각 대학의 선발 자율성이 커지면 커질수록 대학서열체제가 심화되고 나라가 망하는 흐름입니다. 선발 자율권을 없앤다는 것은 대학별 커트라인을 없앤다는 겁니다. 대학별 커트라인이 사라지면 이 책에서 열거한 그 수많은 폐해들도 함께 사라집니다.

소비자는 소비자대로 (선택할) 자유를 양도하고, 공급자인 대학은 공급자대로 (선발할) 자유를 양도해 각자의 이기심을 포기하는 겁니다. (중략)

이 모든 것이 모두의 이익을 위해 나의 배타적인 이익 추구를 포기한다는 연대정신으로만 가능합니다. 거꾸로 연대의 제도를 먼저 만들면 없던 연대정신도 생겨납니다. 제도가 사회적 자본과 경쟁력을 배양하는 것입니다. 교육에서 연대의 제도가 평준화입니다. -347-348쪽

한국대학교육협의회는 내신에 의한 학생들 불안을 해소하겠다며 특목고의 상대적 불이익 해소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것은 내신을 안 하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내신강화는 특목고 등 일류고를 향한 창인데, 특목고 불이익 해소라는 것은 그것에 대한 방패를 마련해주겠다는 소립니다. 아니, 방패 수준을 넘어 창 자체를 무력화하겠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지방민, 일반 국민들 자식은 수능, 논술에 내신까지 죽음의 트라이앵글에 갇혀 지옥 같은 고통을 겪어야 하는 데 반해, 특목고의 중상층 자녀들은 내신에서 해당돼 수능, 논술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놀랄 만큼 냉혹하고 잔인한 나라에 우린 살고 있습니다.-369쪽

차등내신
성적이 비슷하게 분포된 학교는 내신 부풀리기 소지가 있다고 판단, 상위등급을 내리고 하위등급을 올린다는 것. 성적이 비슷하게 분포된 학교는 일류학교(특목고, 자사고)이거나 지방 삼류학교일 것. 일류학교와 삼류학교 하위권이 이익을 보고 일류학교와 삼류학교 상위권이 피해를 보게 됨. 그런데 삼류학교 하위권은 어차피 고려대에 지원할 일이 없기 때문에 결국 일류학교 하위권만 이익을 봄. 피해를 보는 일류학교 상위권을 위해 고려대는 우선선발제를 따로 준비하려 했음. 결국 특목고 하위권 학생에게 특혜를 주기 위해 지방 삼류고 상위권 학생을 버리는 정책이었음. 일류대들은 이렇게 복잡한 궁리를 하고 있음. 묘한백출! 눈 뜨고 코 베임 당하는 세상임. -378쪽

공화국은 그런 사태(자유를 주어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느 사태)를 막기 위해 강력한 보편규제를 설정합니다. 그것이 바로 '법에 의한 지배'입니다. 자유화 개혁의 법치는 소극적인 것이지만 공화국의 법치는 적극적입니다. 그것은 충분히 크고 강력한 공화국의 권력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강자는 언제든지 규제를 뛰어넘을 수 있는데, 공공구너력이 약해짐녀 그 강자의 탈주를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마치 후한 황제가 약해지자 제후의 발호를 막을 수 없었던 것처럼). 누군가가 보편규제를 넘어서는 순간 공화국의 질서는 무너집니다. 후한 말의 자유는 강자가 자유롭게 보편규제를 뛰어넘을 자유였을 뿐입니다. 이런 식의 자유는 크면 클수록 시민의 자유가 위축됩니다. (계속)-404쪽

봉건시대야말로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자유를 누렸던 시대였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힘에 따라 자유롭게 살 수 있었습니다. 강자는 귀족의 삶을, 약자는 노예의 삶을. 그들 사이에 보편규제는 없었습니다. 그런 규제를 강제할 권력주체도 없었습니다. 완벽하게 분권화된 사회였지요. 각 분권화된 단위마다 강력한 리더십 주체(영주)가 있는 상태, 국가 전체로는 분권화 구조이지만 각 단위별로는 독재체제인 상태. 딱 자유화 개혁히 지금 추진하고 있는 자유시장의 구조입니다.

공화국은 이런 질서를 거부해야 합니다. 모두에게 자유를 주면 결국 지배자까지 포함해 모두를 노예로 만들테니까요. 왜냐하면 본래적 의미의 공화국이란 예속당하지 않을 자유뿐만 아니라, 남을 예속시키지 않을 자유까지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견 자유롭게 보이는 지배자들마저 진정한 공화국의 시각에선 모두 노예들일 뿐입니다.-405쪽

나 하나만의 자유뿐만 아니라 모두의 자유를 염두에 두는 것은, 나의 정신이 나라는 육체적 유한성, 개체성으로부터 해방되어 모두에게 확장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때 비로소 인간은 자유롭게 됩니다. 부자들이 제 자식만 귀족 만들겠다고 학교 선택권 요구하고, 입시 자율화 요구하는 것은 그들의 정신이 유한성, 개체성, 탐욕이란 감옥에 아직 갇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아무리 부자라 할지라도 그들은 노예입니다.-405-406쪽

원리적으로 공화국은 국민을 시민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국민으로부터 신분을 선택할 자유를 몰수합니다. 이 근원적인 자유를 몰수하지 않는다면 공화국이 아니지요. 그 자유의 구체적인 내용은 첫째, 남에게 예속될만큼 빈곤할 자유. 둘째, 신분이 세습될 만큼 불평등한 교육을 받을 자유. 이 두 가지입니다. 공화국이 나로부터 이 두 가지 자유를 몰수하는 것이 내가 시민이 되는 방식입니다. 그것은 동시에 부자가 남을 예속시킬 자유, 지배신분을 세습할 자유까지 몰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실의 정책에서 그것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첫째, 고용보장, 혹은 사회복지. 소득 격차 조정, 혹은 세금을 통한 부의 재분배. 자산가(소유권자) 이외의 사람들에게도 발언권과 결정권 보장.
둘째, 평준화 무상 공교육(학교선택권 몰수)으로 나타납니다.

이 두 가지를 갖춘 나라만 조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로부터 절대적 자유를 몰수하고 보편규제를 강제하는 것이야말로 공화국이 날 자유인으로 대접하는 방식입니다. 무제약적인 자유를 주는 나라는 공화국이 아닙니다. -408쪽

공화국은 권리에 정의를 더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권리는 각자가 저마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유롭게 놔두며 힘센 사람일수록 큰 권리를 누리겠지요. 정의를 더했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공평한 권리를 누리도록 국가가 관리한다는 뜻입니다. 특히 '양도할 수 없는 천부적 인권'의 경우, 어느 누구도 그 권리를 침해당하지 않도록 국가가 지키는 것이 바로 정의이지요. 또 산업부문에서 현대자동차가 부품을 자유롭게 만들거나 사서 쓸 권리와 중소기업이 생존하고 발전할 권리 사이에 충돌이 생긴다면 주저하지 않고 개입하는 것이 정의이고, 계몽의 빛입니다. 자유화는 이것을 시장에 맞깁니다. 이렇게 되면 자유만 있고 이성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이성이 없는 자유는 공화국의 자유가 아닙니다. 자유화 개혁은 이런 국가 이성을 독재나 부패, 부자유를 초래하는 규제로 인식했습니다. 그 결과 계몽의 빛이 꺼진 자유만 남게 됩니다.-412쪽

"돈이 많다고 해서 고품질의 고가 상품을 구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소비문화에 관한 한 네덜란드는 교과적인 사회주의 사회처럼 느껴질 정도다. ...... 과소비와 사치, 게으름, 거친행동, 이웃의 위급한 상황을 외면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일종의 적대감마저 보이고 있다. 그리고 민주보다는 공화의 가치를 앞세운다. 모든 사람이 화합해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공화이다. ...... 네덜란드인이 누리는 자유와 관용은 공화와 사회정의의 틀 안에 있는 것이지 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돈 갖고 내 마음대로 하는데 누가 잔소리냐" 하는 말이 네덜란드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최병권, <진보에는 나이가 없다>-42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10대와 통하는 정치학 - 고성국 박사가 들려주는 정치와 민주주의 10대를 위한 책도둑 시리즈 1
고성국 지음, 배인완 그림 / 철수와영희 / 2007년 12월
장바구니담기


어떤 것이 좋은 정치고 어떤 것이 나쁜 정치일까요? 좋은 정치는 국민을 편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정치입니다. 국민이 정치의 주인으로 참여하고 활동하도록 해주는 정치입니다. 나쁜 정치는 그 반대겠죠. 국민을 살기 어렵게 만들고 국민을 소외시키고 배제하는 정치가 나쁜 정치입니다.-27쪽

결국 인간의 보편적인 이성과 합리성이냐, 전문성이냐 하는 문제로 귀결되는데, 전문성보다는 인간 이성의 합리성을 우선적인 가치로 보는 정치 원리가 민주주의입니다. 그 바탕에는 우리 인간이 때로는 전문성 부족으로 잘못된 판단을 할 수도 있지만 인간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면 그 잘못을 수정할 능력도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다소의 시행착오는 인간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믿음의 대가로 감당해도 좋다는 것이지요. 전문가들은 자신이 가진 전문성으로 권위나 힘을 얻으려 할 것이 아니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다수의 올바른 판단을 도와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문가의 직업 윤리이고 도덕성입니다.-68-69쪽

사상과 양심의 자유는 자유권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권리입니다. 사상의 자유는 "인간의 정신은 어떤 경우에도 가둘 수 없다"는 정신 해방 선언입니다. 파스칼의 말대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입니다. 인간은 갈대처럼 연약하지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어떤 권력이 인간의 생각에 제한을 가한다면, 그것은 곧 인간의 인간됨을 억압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생각할 자유, 상상할 자유 곧 사상의 자유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제한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상의 자유는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97쪽

대부분의 국가들은 근로권을 보장하기 위해 <근로기준법> 등 근로관계 법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단결권, 단체 교섭권, 단체 행동권의 노동 삼권이 그 핵심 내용입니다.

단결권은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노동조합 등의 조직을 구성할 수 있는 권리고, 단체 교섭권은 노동조합 등의 대표 기구가 노동자들을 대신해 임금, 근로 조건 등을 교섭, 협상할 수 있는 권리지요. 개별 노동자의 교섭력보다는 노동조합 같은 대표 기구의 교섭력이 더 크다고 생각되기 때문이지요. 마지막으로 단체 행동권이 있는데, 이것은 파업, 태업, 집회, 시위 등의 집단 행동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합니다.-107쪽

원래 '지속 가능한 발전'이란 말은 독일의 한 산림청장이 썼던 말입니다. 매년 전체 숲이 유지되는 범위 내에서, 즉 새로운 나무가 자라나 일정한 양만큼 베어내도 전체 숲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벌목할 나무의 양을 정하면서 쓴 것입니다.-108쪽

집회, 시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기본권이란다. 양심, 사상의 자유가 기본권으로 인정된다면 그것을 표현하는 집회, 시위, 출판, 언론의 자유 또한 인정되어야 완전한 기본권이 된다는 생각에서란다. 그러므로 시위는 타인에게 심각한 손해를 끼칠 위험성이 없는 한 허용되어야 하는 거란다. 그것이 민주주의 정신이야.-11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죽음의 밥상 - 농장에서 식탁까지, 그 길고 잔인한 여정에 대한 논쟁적 탐험
피터 싱어.짐 메이슨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08년 4월
장바구니담기


누군가를 '새대가리'라고 부른다면 그를 대채 없는 바보라고 놀리는 것이리라. 그러나 닭은 다른 닭들을 90마리까지 구분할 수 있고, 그에 따라 누가 '쪼는 순서'에서 밑인지 위인지를 구분한다. 연구자들은 닭이 색깔 있는 버튼을 바로 쪼면 소량의 모이를 주고 22초간 기다렸다가 쪼면 더 많은 모이를 주는 실험을 해본 결과, 닭들이 기다렸다 쪼기를 학습했음을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수천 세대 동안 가금으로 길들여져온 닭이지만 아직도 멀리 있는 위험을 위쪽과 아래쪽으로 구분해서 인식할 줄 안다(위쪽 위험이란 가령 매, 또한 아래쪽 위험이란 너구리 같은 것이다). 과학자들이 '위쪽 위험' 신호를 녹음해서 들려주자, 닭들은 '아래쪽 위험'신호를 들을 때와 다르게 행동했다.-40쪽

인공조명은 가장 해가 긴 여름철을 흉내 내는 데 쓰이며, 암탉들이 1년 내내 가장 많은 달걀을 낳도록 한다. 이런 식으로 1년만 지나면 닭들은 지쳐버리며, 낳는 달걀 수가 적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면 대부분의 미국 달걀 제조업자들은 닭들에게 주는 모이를 줄이고, 길게는 2주일 동안이나 모이를 주지 않는다. 그러면 그 닭들은 털갈이를 하게 되는데, 그것은 털이 차차 빠지면서 알을 낳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일부는 이 기간 중 죽어버리며, 나머지는 체중이 30퍼센트 정도 줄어든 채로 살아남는다. 그러면 다시 모이가 주어진다. 그리고 몇 달 동안 다시 알을 낳다가, 마침내 도살된다.-62쪽

유대교식 도살장은 동물들을 날카로운 칼로 목을 단숨에 절단함으로써 바르고 깨끗한 도살을 해야 한다. 피가 급속히 빠져나가면서 뇌는 몇 초 지나지 않아 무의식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비디오를 보면 소들은 목이 잘리고 기관이 끊긴 상태에서도 한참 동안 몸부림을 치다가 죽는다. 어떤 소는 일어서려고 발버둥치며, 심지어 정말로 일어서는 소도 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도살장 일꾼은 단말마가 그치고 소가 쓰러지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뒷발에 체인을 묶고는 마당으로 끌고 나간다. 어떤 소는 놀랄 만큼 오랫동안 쓰러지지 않아서, 비틀거리며 도살장 문을 지나 옆방까지 간뒤에야 숨이 끊어졌다. 그 소가 그렇게 지체하는 동안, 도살 현장에는 소 두 마리가 더 끌려와서 목 잘린 소가 마지막으로 몸부림치는 것을, 그리고 마침내 잠잠해지고 질질 끌려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106쪽

암탉이 자연스럽게 서고, 몸을 돌리고, 날개를 펼 수 있을 만한 공간을 부여할 것. 방해받지 않고 횃대에 앉거나 바닥에 앉을 수 있을 것. 물론 통상적인 닭장은 일체 허용되지 않는다. 또한 암탉들은 산란용 둥우리를 제공받고, 긁으면서 놀 물건이 주변에 있어야 하고, 이른바 '먼지 목욕'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쓰레기 더미 같은 데 뛰어들어 날개를 마구 퍼덕이며 깃털에 먼지가 섞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암탉에게 꼭 필요한 행동처럼 보이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기생충을 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암탉들에게는 매일 모이를 주어야 하며, 따라서 강제적 털갈이를 위한 굶기기는 금지된다. 이 밖에 모이, 마실 물, 공기의 질적 수준에 대한 조항들, 암탉을 살피는 일에 관한 조항들, 암탉의 '보호자'를 양성하는 규칙과 그 행동에 대한 조항들이 있다. -156쪽

그는 자신의 닭들에게 신선한 공기와 햇빛을 접할 기회, 그리고 풀이며 씨앗이며 나무뿌리 따위를 쪼면서 돌아다닐 기회를 뺏으면서까지 달걀 가격을 떨어뜨릴 생각이 없다. 그는 특별히 맛 나는 달걀은 그만큼 가치가 크고, 그것은 개당 70센트라고 해도 아깝지 않은 가치라고 생각한다. '양심적인 달걀'의 시드 자만스키는 12개당 2.99달러에 파는데, 사람들이 달걀값이 비싸다고 불평할 때마다 이렇게 말해준다고 한다. "이봐요, 달걀 하나에 10센트, 아니면 20센트 더 써서, 닭들이 행복하게 살게 해줄 수 있다면 그걸 못해요? 달걀 하나에 20센트 주고는 4.5달러 짜리 카페라테를 마실 건가요? 영양가도 없는 건 그만큼 주고 마시면서!"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리고 카페라테 한 잔 값을 생각할 때, 70센트짜리 달걀이라도 그리 비싸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달걀 하나에 10센트에서 70센트로 가격이 뛴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순순히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닭장 달걀 시스템이 우리 곁에 있는 한, 비록 밖에 나가지는 못하게 한다 해도 달장에 닭을 가두지 않고 얻은 달걀을 파는 사람들이나마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161-162쪽

<'피시포레버' 마크의 조건>

1. 어족 규모의 상태, 어업이 지속 가능할 수 있을 만큼 충부히 물고기가 많은가?

2. 해양 환경에 어로 행위가 미치는 영향, 어업이 해양 환경(비목표 물고기, 해양 포유동물, 바닷새 등 포함)에 즉각적으로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3. 어로 관리 체계, 해당 해역의 어로 규칙과 절차는 무엇이며, 지속 가능한 방식의 어업을 계속하기 위해, 또한 해양 환경에 대한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그런 체계가 어떻게 실행되고 있는가?-169쪽

새우잡이가 불러일으키는 또 다른 중요한 환경 문제는 저인망 그물이다. 무거운 쉿덩이(그물이 바다 밑까지 가라앉게 하기 위해 쓰인다)를 달고 있는 저인망 그물을 암석이 많거나 산호가 많은 해저에서 쓰면, 산호초에 크고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힌다. 또한 다른 해양 생태계에도 큰 악영향을 미치는데, 수십만 년 동안 형성된 산호가 파괴되며, 그에 따라 형성된 여러 물고기 종자, 산호 틈에서 살며 알을 낳던 해양 생물들에게 큰 피해를 입힌다. 저인망 어로법은 해저를 갈아엎음으로써 일부 해양 동물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는다. 따라서 그것을 일정 지역에서 되풀이하면, 바다 밑바닥이 마치 쟁기질을 한 발처럼 변해버린다.-186-187쪽

큰 물고기는 작은 물고기를 위협하며, 때로는 잡아먹는다. 이런 일을 막기 위해서는 물고기가 자라는 정도에 따라 분류를 해서는 빨리 자라는 종자를 천천히 자라는 종자와 분리해서 길러야 한다. 이런 분류는 양식 과정 중 세 번 내지 다섯 번 실시되며, 이때 물고기를 우리에서 그물로 건지거나 펌프로 밀어낸다. 그리하여 물고기들은 몇단계의 통로를 거치며 점점 더 작은 물고기만 통과할 수 있는 좁은 구멍과 만난다. 이런 과정은 연어에게 큰 스트레스를 준다. 일반적으로 빽빽이 들어찬 상태로 사육됨으로써 연어는 스트레스 폭증, 비정상적 행동, 바닷니 감염도 상승, 비늘 벗겨져 나가기, 그리고 높은 사망률 등을 보이고 있다. 살아남은 연어들은 통상 7일 내지 10일 동안 사료를 공급받지 못한 다음에 도살된다. 장을 완전히 비우고, 혹시라도 사료를 통해 감염될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어제껏 빈번하게 풍성한 먹이를 얻다가 별안간 중단된다면, 의식이 있는 존재라면 당연히 고통을 느낄 것이다.-190쪽

우리의 행동이 심각한 피해를 입힐지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일단 우리가 피해를 입힐지도 모르는 대상에게 유리한 쪽으로 상황을 추정해야 한다. 그러나 "유리한 쪽으로 상황을 추정한다"는 것은 그 추정이 얼마나 신뢰성 있는 것인지, 또한 그런 행동이 우리에게 가져올 수 있는 부담이 얼마나 중대한지를 따져봄으로써 정말 우리가 피해를 입힐 가능성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이와 같은 식으로 가재, 게, 새우가 고통을 느끼는지 불확실하다면, 우리는 그들이 고통을 느낀다고 가정하고 상황을 추정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너무 지나친 비용을 부담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들이 고통을 느끼는지 확실하지 않다면, 그들이 고통을 느낄 수도 있는 행동은 무엇이든 피해야 한다. 반면, 그들이 느낄지도 모르는 고통을 유발할 것이냐, 아니면 우리 스스로 큰 고통을 짊어질 것이냐 상에서 선택할 입장이라면, 우리는 더 이상 그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추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초래할지도 모르는 고통의 정도를 최초솨하려는 노력은 필요하겠지만 말이다.-192-193쪽

<사회적 책임 국제연대 SA8000의 인증 조건>

아동노동 : 매우 제한적인 예외를 빼고, 모든 노동자는 최소한 15세여야 한다.
강제노동 : 강제된 노동은 없어야 한다. 그것은 죄수 노동이나 채무 변제를 위한 노동(실제 또는 불합리한 빚을 갚기 위해 강요된 노동)도 포함된다.
건강과 안전 : 고용주는 안전하고 건강을 해치지 않는 작업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여기에는 욕실 이용권과 안심하고 마실 수 있는 식수도 포함된다.
단체 결성권과 집단 교섭권 : 고용주는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가입할 권리와 집단 교섭을 할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
차별 : 인종, 신분, 국적, 종교, 장애, 성, 성적지향성, 가입 노조, 정치적 성향, 연령 등에 따른 어떤 차별도 없어야 하며, 성추행 역시 있어서는 안 된다.
징계 : 기업 측에서 노동자를 심리적 또는 육체적으로 강압하거나 언어폭력을 가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234쪽

(이어서)

근무시간 : 근무시간은 관련 법률에 따라야 한다. 단 어떤 경우에라도(설령 그 나라의 법이 허용한다고 해도 - 옮긴이) 주당 48시간을 넘지 말아야 하며, 최소한 주 1회의 휴일을 보장해야 한다. 초과근무는 반드시 자발적인 것이어야 하며, 적정한 수당 지급을 수반해야 하고, 정규적인 차원에서 주당 12시간을 넘지 말아야 한다.
임금 : 임금은 관련 법률과 업계의 기준에 따라야 하며,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기본적 욕구 충족에 충분한 수준이어야 한다.
관리 체계 : 이 인증을 획득 및 유지하려는 기업은 해당 기준을 그 관리 체계와 운영 방식에 단순히 통합시키는 이상의 자세를 갖춰야 한다.-234쪽

지구온난화와 관련된 두 번째 요인은 기본적으로 소들의 트림과 방귀 문제이다. 소들은 메탄을 방출하며, 이것은 온실가스로서 이산화탄소보다 20배나 위력적이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볼 때 전체 온실가스 방출 효과의 2.5퍼센트 정도 책임이 있다. 소들은 세계의 메탄 방출량 중 절반 정도의 책임이 있을 것이다. 이들은 섬유질이 많은 음식, 즉 목초나 건초를 먹을 경우 더 많은 메탄을 방출한다. 더욱이, 유기농 소들은 10퍼센트 정도 더 많은 젖을 내도록 하는 소 성장호르몬을 맞지 않고 길러진다. 그것은 일정량의 우유를 얻기 위해 유기농 방식으로는 10퍼센트 더 많은 소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렇게 많아진 소는 그만큼 많은 메탄을 방출할 것이다.-292쪽

우리가 곡기, 달걀, 우유를 산다고 할 때, 그것은 수출용 곡물을 심을 땅으로 쓸 수도 있었을 땅에서 자란 사료용 곡물로 만들어진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런 제품을 구입하여 수요를 늘려주는 것이 결국 해외에서 더 많은 땅이 사료 곡물 재배용으로 바뀌게끔 부추기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비록 우리가 미국 땅에서 자란 곡물을 먹은 미국 곡물이 대신 다른 나라로 수출되었더라면, 열대우림을 벌채해 만든 땅에서 나는 곡물의 수요를 대신 채우고, 그래서 그만큼 열대우림 벌채의 필요성을 억제했을지도 모른다.-328-329쪽

(이어서)
따라서 우리 자신이 '열대우림 소고기', 즉 개간된 열대우림 지역에서 사료를 구해 길러진 소의 고기를 먹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는 우리의 먹을거리 선택이 아마존 강 유역이나 그밖의 지역에서 열대우림 파괴에 영햐을 주고 있지 않다고 확신할 수 없다. 물론 우리가 대두, 두유, 두부, 그 밖의 대두 가공품을 소비할 때도 간접적으로 열대우림 파괴에 관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하든 열대우림 파괴와 우리의 먹을거리를 분리할 수 없다고, 고기를 먹든 대두를 먹든 마찬가지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브라질에서 자라는 대두는 대부분 사료용으로 수출된다. 따라서 대두를 동물에게 주는 것은 원래의 식품 가치의 일부만 산출해 사람이 섭취하는 것이며, 육식 위주의 식단은 곡물이나 대두를 직접 먹는 식단보다 열대우림 파괴에 더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329쪽

시카고 대학교의 기든 에셸과 파멜라 마틴은 동물성 식품 생산 과자ㅓㅇ에서 방출되는 온실가스의 양을 조사했으며, 전형적인 미국의 식단(그중 28퍼센트가 동물성인)은 같은 양의 칼로리가 포함된 베건 식단에 비해 한 명이 1년에 약 1.5톤의 이산화탄소를 더 배출시킨다는 결과를 얻었다. 대조적으로, 보통의 운전자가 미국의 전형적인 자동차 대신 좀 더 연비가 좋은 하이브리드 차량으로 바꾸었을 때 1년에 줄일 수 있는 이산화탄소 방출량은 1톤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기후 변화에 미치는 영향을 억제하는 데는 차를 바꾸기보다 베건 식단으로 바꾸는 편이 더 효과적인 것이다.(물론 두 가지 다 하면 더 좋겠지만.)-337-33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책으로 세상을 편집하다 - 기획자노트 릴레이
기획회의 편집부 엮음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 200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살아온 동안 책을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언제부터인가 손에서 놓지 않고 꾸준히 읽고 있다. 책과 가까이 지내다보니 특정 저자에게 반해버려 그가 내놓은 책들을 모조리 사들여 탐독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자 저자에 대한 관심은 출판사에 대한 관심으로, 그리고 이제 출판사에 대한 관심은 편집자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가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책을 구입할 때 일일히 특정 편집자를 찾아다니며 그가 만든 책을 골라 읽는 건 아니다. 유일하게 그런 편집자가 있다면 휴머니스트의 선완규 주간이랄까.

  나는 꽤 오래전부터 휴머니스트의 팬이었다. 타 출판사 모임에 가서도 대놓고 가장 좋아하는 출판사가 휴머니스트라고 말해왔다. 그땐 선완규 주간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었다. 그가 언제부터 휴머니스트에 몸담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휴머니스트에서 나온 책을 좋아하다가 - 그가 책임편집한 책을 애써 찾아 본 건 아니지만 - 속지(?)에 찍힌 그의 이름을 발견했고,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휴머니스트의 책은 신간이 나와도 껍데기 열어보지 않고도 산다. 이 책 괜찮을까 의심스러운데 하면서 오프라인 서점에서 일일히 벗겨(?) 볼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책으로 세상을 편집하다>는 이런 나의 책에 대한 관심, 출판사에 대한 관심, 편집자에 대한 관심에서, 첫 장이 넘어갔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시리즈로 기획한 책 중 하나로 보이는데 - 다른 책으로는 <책으로 세상과 소통하다>, <책으로 세상을 움직이다> 가 있다. - 출판사에서 몇 년씩 책밥을 먹어온, 이제는 어느 정도 '책 좀 만들 줄 아는' 중견(?) 편집자들의 '나의 책 만든 이야기'를 담고 있다. <기획회의>라는 출판잡지에 연재된 글을 한데 모아 묶은 것인데, 이 책에 실린 많은 편집자들이 이 글을 시작할 때 어찌 써야할지,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난감해하는 듯한 표정을 엿볼 수 있었다.

  여기 글을 쓴 편집자 중 아는 이는 하나도 없다. 대신 여기 언급된 책들 중 읽은 책은 꽤 있다. 편집자도 모르고, 읽은 책도 없는 독자라면, 이 책이 그다지 재밌을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순수하게 막연한 책에 대한 관심만으로도 이 책은 기존의 어떤 책에서도 보여주지 않은 출판 비하인드를 선사해 나름의 재미를 제공해주지만. 독자가 이들과 같이 책을 만들고 싶어하는 이들이라면, 더더욱 '재밌는 책 에세이'를 넘어설지도 모르겠다. 

  내가 읽은 책들이 이렇게 만들어졌구나, 아 이런 과정을 거치는구나, 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읽은 책들이 더 애틋하게 다가온다. 그건 아마도 현장에서 책을 직접 만들며 애정을 쏟아부은 '책의 대리모'들이 느끼는 심정이 얼마간이라도 이 글을 통해서 전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소나무에서 나온 <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다>를 읽었고,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에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로서, 느리고 질긴 꼼꼼한 편집자와 저자가 조그만 사무실 공간에서 몇번이고 원고를 거듭 읽으며, 좀 더 좋은 책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책장에 꽂혀있는 '무수히 많은 책들 중 하나' 정도로 치부할 수 없어진다.  

  책 만든 이야기, 꽤나 재밌게 읽었고, 한 권의 책이 탄생하기까지의 보이지 않는 모습들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해 유익했다. 하지만 이런 점은 지적하고 싶다. 출판잡지에 실린 글을 모아 엮은 책이라고는 하지만, 원고를 좀 더 다듬고 보완해 '뒷이야기'뿐 아니라 책과 출판에 대한 그들의 깊이있는 철학까지 체험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물론 이 글 안에도 그들이 책을 대하는, 출판사에서 책밥을 먹으며 생각하고 느낀 점들이 드러나 있지만, 2% 부족했다. 한 가지 더 지적하자면, 중후하고 무게감있는 표지와 꽤 무거운 책 무게는 그 안에 담긴 내용과 어울리지 않는다. 내용은 한결 가볍고 짧은 에세이의 엮음이었지만, 책의 물리적, 시각적 무게감은 뭔가 거창하고 대단한 게 숨어있을 것만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외형과 내용이 언발런스했달까.  

p.s. 책을 만든 편집자가 중심이 아닌, 초판 예상 판매량을 적게 잡았으나 예상 외의 선전을 한 인문서들을 중심으로, 책이 주인이 되어 그 책이 어떻게 기획되었고, 만들어졌으며, 어떻게 많은 독자를 사로잡았는가 등 책의 스토리를 책으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생각해봤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