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하는 진보
지성사 / 2008년 3월
절판


"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너무나 어리석고 비열하게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그리고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능력이 있는 사람, 이런 사람만이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막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정치>)-17쪽

보수 진보진영이 우리 사회의 발전 방향에 대해 의견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므로 자신의 정치사상을 표현하고 반대 정파에 대해 비판할 자유가 있다. 그리고 사상의 좌우를 떠나 그것을 표현하는 행위가 국가안보나 사회질서에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을 일으키지 않는 한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의 일환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김 의원이나 반공집회를 주도한 인사들도 자신의 정치적 기본권을 행사할 자유가 있다.

하지만 최근 사태를 보면서 현재 우리 사회의 보수세력이 도대체 무엇을 지키려고 하는지 묻고 싶다.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외치지만 그들이 지키는 민주주의는 친미와 반공의 틀에 갇혀 버린 민주주의가 아닌지 의문스럽다. 북한을 타도의 대상으로만 보고 북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비웃는 것이 진정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 전체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일까.

친미와 반공의 틀을 벗어나려는 일체의 사상과 활동에 대해서 무조건 빨갱이, 좌경, 친북주사파라고 낙인을 찍고 비판하는 것은 참으로 품격이 떨어지는 정치선동이다. -53-54쪽

민주화로 '입'은 자유로워졌지만 '배'를 주리는 사람, 희망을 잃은 사람이 상존한다면 민주화는 반 토막의 의미만 가질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래의 사회 분위기는 성장, 경쟁, 효율만 숭앙하는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런 현실은 칼 마르크스가 말한 "공산주의의 유령" 또는 자크 데리다가 말한 "칼 마르스크의 유령들"을 불러내거나, 정반대로 자본과 시장의 논리에 스스로 복속하는 대중에 기초해 운영되는 "대중독재"로 가는 단초를 열지도 모른다. 이런 맥락에서 이제 우리는 민주주의를 말할 때 '사회 경제적 민주주의'를 말해야 한다. -65쪽

인권보호는 반드시 일정한 사회적 비용과 부담, 그리고 다수자의 개인적 손실이 수반된다. 이를 체득하지 않고 인권을 말하는 것은 사탕발림의 '립 서비스'일 뿐이다. 다수자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고 불편함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소수자의 인권이 보장된다면 그것은 결코 인권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다수자의 성찰과 관용이 요구된다. 로널드 드워킨의 표현을 빌리며, 이 점에서 우리는 인권을 "강한 의미로" 파악하고 더욱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105쪽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병역거부에 대한 신념의 진지함과 철저함이 이미 역사적으로 검증된 상황에서, 국가가 병역법이라는 실정법을 이유로 무조건 이들의 신앙과 양심을 포기하라고 강제하는 것이 정당한지 의문스럽다. 이런 '소수자 집단'의 상황을 무시하며 법률을 기계적으로 집행하기보다는 그들의 신앙과 양심을 존중하면서 다른 방식으로 사회에 봉사할 기회를 주는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일 것이다. -120쪽

이들 국가(영국, 덴마크, 네덜란드, 노르웨이 등)는 민주주의는 다수의 지배이지만 다수의 지배라는 이릠하에 소수자의 양심과 신념을 무시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이며, 국가존립을 위한 핵심적 사안인 병역의무를 거부하는 소수자 집단의 양심도 존중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121쪽

(사형제에 관해) 시민을 살해한 범죄인에 대한 피해자와 사회의 분노가 범죄인의 죽음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 '본능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제도로서의 사형은 오판 시 돌이킬 수 없는 오류를 만든다는 점, 사형을 통한 범죄억제 효과가 의심스럽다는 점, 우리 현대사에서 경험했듯이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복수로 사용되기 쉽다는 점 등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본능'의 직접적 표출은 순치되어야 한다. -135쪽

공소시효는 형사정의를 실현하는 데 정의가 법적 안정성에 양보한 결과 생겨난 제도이다. 이 제도의 존재 이유는 범행 후 긴 시간이 지나 증거가 멸실되어 진실 발견이 어려워지고, 범죄인 자신도 그 기간에 형벌 같은 고통을 받았으며, 범인의 법적 사회적 안정도 존중해야 한다는 점 등이다. 그리고 공소시효가 종료된 후 소급적으로 연장하는 법률은 자신의 안전에 대한 시민의 기대를 뒤흔드는 것이므로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법학계 일각에서는 반인권적 국가범죄에 대한 공소시효의 정지,배제를 반대하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국가기관이 살인과 고문 등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뿌리째 부정하는 범죄를 자행하고 은폐한 행위를 처벌하는 데도 정의가 법적 안정성에 양보해야 하는가. 헌법의 기본 이념과 시민의 기본권이 국가권력으로 침해되고 조직적으로 은폐, 조작되는 특단의 사정이 있는 경우에까지 '정의'의 양보를 주장할 수는 없다. -140-141쪽

그러면 도대체 고문은 왜 일어나는 것인가? 먼저 고문은 국가가 특정한 집단의 인간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데서 출발한다. 예컨대 테러리스트, 좌파혁명가, 간첩, 중범죄인 등 의심을 받는 사람은 국가와 사회에 위험을 초래하는 '불순분자'로 간주된다. 그리고 불순분자들의 범죄 혐의와 위험성은 왜곡, 과장되고 이들에 대한 인권존중은 사치스러운 군더더기로 취급된다.

이들에 대한 고문과 가혹 행위는 국가안보나 진실 발견의 명분 아래 행해지며, 인간 본성에 숨겨진 야수성은 고문과 가혹 행위의 강도를 높이게 만든다. 이들이 무고한 시민일 수 있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불순분자들의 인권을 따지는 자는 반국가적 의도를 가진 수사의 훼방꾼이나 범죄인들의 동맹자로 취급된다. 특히 국가 지도자와 정부가 고문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원칙을 슬그머니 방기하고, 고문도 경우에 따라서는 필요하다는 악마적인 말에 귀를 기울일 때 고문은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법이다.
-151-152쪽

주권자는 검찰이 '죽은 권력'을 무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이른바 '성역'으로 뛰어들어가 자신의 외뿔로 '살아 있는 권력'을 치받는 해치일 것을 요청한다. -185쪽

시민사회의 다양한 구성과 이념적 가치를 반영하는 인사원칙이 필요하다. 기존의 법원논리에 충실한 고위 법조 엘리트만으로 최고재판소가 구성된다면 사회분쟁은 특정한 경향에 따라 해결될 소지가 높다. 물론 고위법관 중에는 개방적 자세로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수용하며 소신 있는 판결을 내리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사법부의 중요한 임무가 사회 경제적 약자의 보호라는 점을 고려할 때, 앞으로는 '소수자'의 입장을 일관되게, 전면적으로 대변할 대법관과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많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계급, 계층, 집단의 이해관계의 충돌을 법적으로 종결하는 곳이 최고재판소라고 할 때, 최고재판소의 인적 구성은 이념, 출신배경, 성별 등에서 '다양성'을 갖추어야 한다. -190-191쪽

시민의 재판참여는 재판 과정의 투명성을 높여 법관과 검사의 권한 남용을 견제할 수 있고, '전관예우' 등의 관행이 봉쇄되어 재판 결과에 대한 시민적 신뢰가 높아져 재판의 정당성을 고양시킨다. 특정한 교육과 계층적 배경을 가진 직업법관이 재판을 독점하지 않고 일반 시민의 법의식과 법감정이 판결에 반영되면 참여시민은 재판 과정의 주체가 되어 주권의식이 높아지며, 준법의식도 고양된다. 그리고 배심재판에 참여하는 법률가들은 법률전문가가 아닌 배심원들이 이해할 수 있는 개념과 논리를 사용해 재판을 진행해야 하므로, 배심재판은 현재 법조계에 뿌리 깊게 남아 있는 권위주의 문화를 불식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193-194쪽

재판참여는 민주사회에서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재판참여를 통해 시민은 사법의 주인이 될 수 있으므로 이를 회피하는 것은 주인됨을 스스로 포기하는 셈이다. 시민들의 적극적 참여가 긴요한 시기이다. -194쪽

"불가능한 꿈을 꾸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고,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견디며, 어느 용사도 감히 가려 하지 않는 곳으로 달려가고, 잡을 수 없는 별을 잡으려 하는 것이 진정한 기사의 의무, 아니 특권이다." (돈키호테)-2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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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왕국의 게릴라들 - 삼성은 무엇으로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가
프레시안 엮음, 손문상 그림 / 프레시안북 / 2008년 2월
품절


하긴 '내가 무능한 변호사'라는 지적은 옳다. 사건 의뢰인을 만날 때, 나는 어차피 받아야 할 벌이라면 받으라고 이야기한다. 물론 그런 이야기에 대해 승복하지 않는 의뢰인도 있다. 이걸 두고 "김용철은 형편없는 변호사다"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잘못에 정확히 상응하는 벌을 받을 수 있게끔 하는 것이 진정한 변론이라고 생각한다. 삼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잘못 이상의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게 아니다. 잘못만큼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김용철 변호사) -41쪽

이건희 씨가 저지른 악행은 다른 것이 아니다. 좋은 인재들을 모아 놓고 무뇌아로 만든 것이다. 돈에 홀려서 생각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노동자들에게는 피눈물 나게 만들었다. 돈은 아름다운 노동을 통해서 거룩한 소비 과정을 거쳐야만 건강한 순환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아름답게 일하도록 허락하지도 않고 거룩하게 소비하도록 허락하지도 않는다. 비자금이라는 검은 돈을 만들기 위해서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해고했다. 재투자나 사회복지에 돌아가야 할 이윤에다 빨대를 대서 개인이 착복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착복의 부스러기를 갖고 국가의 인재를 포섭하고 오염시킨 것이다. 그럼 국가 경쟁력은 어디로 가겠나. (문규현 신부)-102쪽

사목은 다른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좋은 일이 있으면 함께 기뻐해주고 축하하며 궂은 일이 있을 때는 함께 슬퍼하고 눈물 흘리고 장례식에서는 장지까지 쫓아가주는 것이다. 그런데 김용철 변호사 일은 궂은 일이기 때문에 간 것이다. 김 변호사가 자신이 털어놓는 진실을 받아주는 데가 없어서 사제단까지 찾아왔는데, 사제단마저 모르쇠해버리면 이 사람을 버리는 것이다. 불쌍하고 슬픈 영혼 찾아왔는데 어찌 외면하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말했다. 앞으로 내가 기쁜 일에만 가길 원하면 그렇게 하겠다. 양탄자 깔린 레스토랑에만 가겠다. 힘들거나 억울하거나 눈물 날 때 날 찾아오지 말라. 나는 희희낙낙하는 사람들과 즐기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하다. 내 사목의 방향을 여러분이 정하라고 했다. (문규현 신부) -106쪽

우리는 지는 데 익숙하다. 외로운 데도 익숙하다. 아무리 소리치고 머리 깎고 굶어도 사회는 꿈쩍도 안 한다. 우리는 열매를 보고 하는 게 아니다. 봄인 됐으니 씨 뿌리고 밭을 가는 것이다. (문규현 신부)-107쪽

사법부, 즉 법원의 구조 개혁도 필요하다. 대법관까지 지내고 변호사 개업을 하면 1-2년 사이에 100억원 이상 돈을 번다고 한다. 아예 대법관을 평생 하도록 하든가, 대법관이 된 이후에는 변호사 개업을 할 수 없게 해서 전관 예우의 뿌리를 뽑게 해야 한다. 사법부의 권력화 배경에는 전관 예우라는 뿌리 깊은 악습이 있다. 전관 예우를 뿌리 뽑아야 이런 떡값 검사니 떡값 판사니 하는 얘기가 안 나올 것이다. 전관 예우를 선호하는 기업들이 있기 때문이다. 삼성이 검사와 판사를 영입하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노회찬)-177쪽

1. <한겨레>신문이 삼성에 대해 악감정을 가지고 쓴 기사를 전부 스크랩해서 다른 신문이 보도한 것과 비교해보고 이것을 <한겨레>측에 보여주고 설명해줄 것. 이런 것을 근거로 광고도 조정하는 것을 검토해볼 것. [2003.10.18(토) 동경]

2. lG가 해외에서 덤핑을 일삼는다 하는데, 제대로 하면 몇조 이익이 날 것이어서 국가적으로 손해고 전부 같이 망할 수도 있다는 여론을 만들어 볼 것. 경제 담당 기자나 교수를 시켜서 삼성, LG 의 이익 등을 비교해 홍보하고 이게 얼마나 손해인지 여론을 조성해볼 것. [2003.12.12(금) 보광]

(이건희 회장 지시사항) -240-241쪽

"(기자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말라. '오프더레코드'란 없다. 언론과의 싸움은 백전백패. 베스트 초이스=홍보팀으로 문의하세요" (삼성전자 신입사원 교육자료)-241쪽

2000년 8월 27일 <한국일보> 가판에 실린 박진도 교수의 칼럼 '아침을 열며 - 재벌 불법 세습은 그만' 이 배달판에서 삭제되었다. 박진도 교수의 칼럼은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부자의 불법 세습을 거론하면서 "재벌들이 적은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좌지우지하면서 변칙적으로 세습하고 있다"는 취지로 쓰여졌다.

당시 <미디어오늘>(2000.8.31)은 박 교수의 칼럼 삭제 배경과 관련해 <한국일보> 안팎에선 광고주인 재벌, 특히 삼성의 입김을 의식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일고 있다고 보도했다. 여름철 광고난을 겪고 있는 상태에서 거대 광고주인 삼성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칼럼을 삭제했다는 것이다. (이상호 기자)-245쪽

그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고발 기사를 쓰면 항상 마지막에 고발 대상이 찾아와서 돈이 든 쇼핑백을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돈을 받고 영원히 우리의 친구가 될래, 아니면 민형사상 소송 등 '우리와 평생 적이 될래?'라고 물으며 거래를 제안한다.

그때 돈보다 더 탐나는 것은 모든 편의를 줄 수 있는 단체가 제공할 유무형의 편익이다. 정말 달콤한 거다.

삼성은 30만 원, 300만 원이 아니라 삼성과 관련해 전화 한 통이면 일이 해결될 수 있을 정도의 편익을 기자들에게 줬을 거다. 사업, 일신상에 관련된 편익을 줬을 거다. 삼성문화재단을 포함해 대한민국에서 모든 편익을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걸 갖고 있는 편의점인 거다. 대한민국에서 모든 편의 시설을 만드는 회사인 거다. 막대한 재화의 공장이 줄 편익을 생각하면 돈은 새 발의 피라고 본다. (이상호 기자)-282쪽

사실 삼성과 맞서 싸우는 노동자들이 삼성과의 싸움을 자조적으로 '계란으로 바위 깨기'에 비유한다. '그래도 바위에 계란 썩은 내라도 나지 않겠나, 바위가 썩었다는 건 알릴 수 있지 않겠나'라며. 그런데 김용철 변호사가 양심선언을 하면서 '이 세상이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양심수 김성환) -322쪽

(이건희 회장에게)

빨리 양심선언 하라. 그게 살 길이다. 우리가 당신을 죽이자고 이러는건 아니니까. 빨리 양심선언을 해서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이정도 되는 재벌이 있었다' 그렇게 긍정적인 얘기를 할 수 있게 하고, 그걸 토대로 새로운 세상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하자.

노사 갈등이 꼭 나쁜 건 아니다. 그런데 삼성에서는 그 자체가 범죄 수준이다. '페어플레이' 하자는 얘기다. 납치하고, 끌고 가고 하지 말고... 그러면서 건설적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힘이 됐으면 좋겠다. (양심수 김성환) -3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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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가는 목소리들 - 그 많던 언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다니엘 네틀·수잔 로메인 지음, 김정화 옮김 / 이제이북스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내가 처음 언어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미 논쟁의 열기가 다 식어버린 시점이었다. 고종석에 대한 관심은 복거일로 옮겨갔고, 복거일에 대한 관심은 그로부터 시작된 영어공용화론으로 옮겨갔으며, 이 논쟁에 참여한 학자와 지식인들이 쓴 책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언어'는 내 안에 들어왔다. 영어공용화론에서 이제는 전 세계 언어의 생성과 사멸에 대해 생각한다. 범위는 넓어졌고 관심은 깊어졌다.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은 이와 같은 관심에서 접하게 되었다. 이 책은 예전에 읽었던 <언어의 죽음>이라는 책과 매우 닮아있다. 논지 전개 방식이며 담아내는 내용까지. 

  <언어의 죽음>에서 데이비드 크리스털은 전 세계의 언어 분포를 보여주면서, 지구상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나라 수와는 별개로, 수많은 부족들이 존재하고, 부족들의 수 만큼이나 많은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는 언어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명백한 사실로 받아들이며, 그 증거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로부터 뻗어나간 호기심은 그렇다면 언어가 어떻게 죽어가고 있는가,에 맞춰진다. 그는 그 원인을 두 가지로 요약하는데, 하나는 자연재해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문화흡수현상 때문이라 한다. 태풍이나 지진, 해일에 의해서 언어사용자가 사라짐으로써 자연스럽게 언어 또한 소멸을 맞이하는 것이 첫번째, "한 문화가 좀 더 지배적인 문화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특성을 잃어 가기 시작하면서, 결과적으로 구성원들이 새로운 행동 양식과 습속을 받아들이"며 언어가 사라지는 것이 두번째에 해당한다.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의 저자 다니엘 네틀과 수잔 로메인이 말하는 언어의 소멸과정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 "과거에는 이러한 멸종이 대개 인간의 개입과 관계없이 발생했지만 이제는 인간의 개입을 통해, 특히 인간이 환경을 바꾸어 놓음으로써 유례 없는 규모의 멸종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p39) 데이비드 크리스털과 마찬가지로 다니엘 네틀과 수잔 로메인은 자연재해에 의한 언어의 소멸보다는 인간의 개입을 통한 환경 변화에 의한 언어 소멸에 주목한다. 자연재해에 의한 언어소멸은 우리가 막을 수 있는 부분이 아니지만, 후자는 분명 누군가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명백한 '언어 살해'다.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의 저자들은 이러한 언어 살해의 원인을 좀더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오독한 것 아니라면, 저자들이 말하는 언어 살해는 분명 후자에 가깝지만, 전자와 무관하지 않다. 자연 재해로 인한 언어 소멸은 환경의 변화가 곧 언어사용자의 감소로, 그것이 또 결국 언어의 소멸로 이어지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그들에 따르면 현재 언어는 환경에 의해, 생태계의 붕괴로 인해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이 말하는 언어의 소멸 과정은 문화흡수현상보다는 자연재해에 의한 소멸과정과 닮아있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순수하게 자연에 의해서 언어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인간이 개입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에 의해 생태계의 붕괴가 일어나고, 생태계의 붕괴는 결국 언어 사용자의 감소와 언어의 소멸로 이어진다.

  "보다 큰 그림에서 볼 때, 언어들의 멸종은 전 세계적인 생태계 붕괴 현상의 일부로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소위 생물언어적 다양성의 위기가 발생하게 된 이면에는, 인간이 지구 생태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오류가 있는 것이다."(p39)

  언어는 분명 죽어가고 있다. 저자가 인용한 <민족담화>에 의하면 "전 세계의 90퍼센트가 가장 많이 쓰이는 백 개의 상위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최소한 6천 개 정도의 언어를 세계 인구의 10퍼센트에 불과한 수가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럼 나머지 언어들은 어디로? 결국 시간을 두고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고종석씨에 따르면, 언어는 감염된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우리말이 신라나 조선시대의 것과는 분명 다르고, 그 당시의 사람들이 살아돌아온다해도 우리와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이다. 말뿐 아니라 글도 안 통한다. 그렇다면 굳이 어떤 언어가 자연스럽게 감염되고, 어떤 언어가 자연스럽게 사라져 가는 현상에 대해서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런 반응은 '언어의 감염'과 '언어의 (인위적인) 소멸'을 동일시 했기 때문이다. 언어는 분명 감염되는 것이 맞다. 몇 십년전의 한글 맞춤법과 지금의 한글 맞춤법이 같지 않듯이, 지금의 한국어는 계속해서 감염되고 변화하고 몇십년 후에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어의 '인위적인 감염'(감염은 엄밀히 인위적일 수 없다는 생각이다. '감염'이라는 말 자체에 자연스러움이 내포되어 있다.)을 자연스러운 감염과 구분해야 할 것이다. 누군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언어가 변화해가고, 사라질 운명이라면, 그것을 막는 것이 도리다.

  분명, 한국어는 세계 10대 언어 중 하나로, 수십년이 지난 뒤에도 생존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언어가 사라질 예정이 아니라고 해서 현재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언어 살해 행위를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과 같은 속도로 언어가 사라진다면 수십 년 뒤에는 한국어가 멀쩡히 살아있을지 몰라도, 수백년 뒤에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지금 당신이 살아있은 동안에는 적어도 소멸할 일은 없다, 고 말하시는 분께는 더 말 할 가치를 못 느낀다. 라디오 프로그램 중 '전통의 소리(?)'에서는 지금은 들어보기 힘든 옛 가락과 옛 소리를 할 줄 아는 분들을 찾아다니며 녹음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걸로 아는데, 먼 미래에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찾아 녹음을 하고 다녀야 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왜 언어를 지켜내야 하는가. 책을 읽다보면 그런 의문이 생긴다. 언어가 소멸되면 다른 언어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한국어를 못하면 영어를 하면 되지 않을까. 영어가 또 세력을 잃으면 중국어나 일본어를 하면 되지 않을까. 그래. 그렇게 쉽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런 맥락과 생각 없이 다양성을 위해서 언어 소멸은 안 된다고 구호를 외치는 것보다는 그래도 낫다. 하지만, 언어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생존과 나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다. 한국어를 사용하지 않는 나를 떠올려보라. 만국 공통어로 쓰이는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면 그게 더 살아가는데 낫지 않냐고.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이 책의 저자의 목소리를 빌어 그 이유를 말한다.

  "인간만의 발명품인 언어는, 하나의 종으로서 인간에게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문화, 기술, 예술, 음악, 그리고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을 가능케 한 것이 언어였다. 모든 인간들이 축적해 놓은 풍요로운 지혜의 원천이 바로 언어이다. 기술은 다른 기술로 대체될 수 있지만, 언어들은 그렇지 않다. 각 언어마다 세계를 보는 자신만의 창이 있다. 모든 언어는 살아 있는 박물관이며, 언어가 스스로 일구어 낸 모든 문화의 기념비와도 같다. 다양성의 상실을 막기 위해 무언가 해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상황에서 다양성의 일부라도 잃게 된다면, 이는 우리 모두에게 손실을 안겨 주는 것이다. 더욱이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언어를 가질 권리, 그 언어를 문화자원으로 보존하고, 자손들에게 물려줄 권리를 갖고 있다."(p34-35)

  사람은 물론 말을 하지 않고도 살 수 있고, 필요하다면 다른 언어를 배워 다른 언어 공동체 내에서 살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단지 '살아갈 수' 있을 뿐이다. '살아있다'는 말에 대해 생각해본다.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 나는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내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와 글이 없어졌을 때, 그것은 비단 언어와 글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향유하고 있는 온갖 문화들, 예술, 책, 음악, 시 등에서 느끼는 모든 감정들까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들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 내가 온전히 나로서 살아갈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자. 아 힘들겠다, 는 생각이 들면, 당신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를 지켜내면 된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그리고 먼 미래에 당신이 처할 그 위기를 지금 겪고 있는 그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주면 된다. 그것이 당신이 '살아있음'을 계속 간직할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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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7년 5월
구판절판


살아 있는 모든 존재들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질문이 없으면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평생 남이 제출한 질문지에 답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건 실로 청춘에 대한 모독이자 삶을 노예화하는 지름길이다. -7쪽

"크게 의심하는 바가 없으며, 큰 깨달음이 없다."(홍대용)-7쪽

"잃을 것은 낡고 병든 지식의 사슬이요, 얻을 것은 세계 전부다."(고미숙)-11쪽

노동과 여가, 정치 활동과 가정생활 등 삶의 모든 것이 공부가 되는 것을 포기하도록 만들고, 나아가 "그것에 필요한 관습이나 지식을 가르쳐주는 것을 모조리 학교에 맡겨"버린다. 결정적으로, 그럼으로써 공부에 대한 모든 생각을 '학교식으로' 재편한다. 그 결과 전 사회를 '학교화'한다는 것. "무슨 소리! 요즘 학생들은 공부를 학교가 아니라, 학원에서 하고 있는 걸." 이런 반문을 할지도 모르겠다. 맞다. 바로 그게 전 사회가 '학교화'되었다는 결정적 증거다. 사교육은 아무리 날고긴다 한들 학교식 공부에서 단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학교의 이념을 가장 순수하게, 가장 극단적으로 실현해주는 것이 바로 학원이다. 따라서 중요한 건 공교육이냐 사교육이냐가 아니라, 어떤 식의 공부가 실현되느냐인 것. 더 끔찍한 건, 학교가 늘어날수록 이런 양상은 한층 심화될 뿐이라고 한다. 즉, 의무교육을 확대하고, 교육기관을 늘리고, 학교에 대한 각종 지원을 늘린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럴수록 학교는 더더욱 공부에 대한 이미지와 표상들을 몽땅 흡입해버리고 만다.-33쪽

공부란 눈앞의 실리를 따라가는 것과는 정반대의 벡터를 지닌다. 오히려 그런 것들과 과감히 결별하고, 아주 낯설고 이질적인 삶을 구성하는 것, 삼과 우주에 대한 원대한 비전을 탐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공부다. 더 간단히 말하면, 공부는 무엇보다 자유에의 도정이어야 한다. 자본과 권력, 나아가 습속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해야 비로소 공부를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대학은 이런 식의 '공부법' 자체를 잊은 지 오래다. 여학생들이 대학의 대세를 이뤘다는 사실을 마냥 기뻐하기가 뭣한 건 이런 연유에서다. 여성들이 오랜 압제에서 벗어나 마침내 지성의 영토를 장악하고는 기껏 '돈과 권력만 밝히는' 짓을 해서야 되겠는가.-40-41쪽

"군자의 아름다운 말 속에는 혹 뉘우칠 만한 것이 있고, 착한 행실 속에도 혹 허물이 될 만한 것이 있다. 그러나 글을 읽는 경우에는 1년 내내 읽어도 뉘우칠 것이 없으며, 백 사람이 따라서 행하더라도 허물이 생기지 않는다."(박지원)-52쪽

아무리 즐거워도 돈이 되지 않으면 '인생에 쓸모없는' 일이 되어버리고, 아무리 싫어하는 것이라도 돈이 되면 '몹시 유용한' 일이 된다. 돈이 깊이 개입하는 순간, 어떤 활동이든 졸지에 타율성이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거기다 남을 이겨야 한다는 강박증까지 작동하기 시작하면, 그 활동 속에 들어 있는 모든 생명력은 완전 잠식되고 만다.-53쪽

학교식 공부법은 애초부터 독서는 그저 개인적 취미나 교양의 영역이고, 공부는 그것과 달리 구체적이고 실요적 지식을 배우는 것이라는 이분법을 유포시켜왔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선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니 입시제도가 아무리 바뀌어도, 또 논술이나 수능에서 좋은 점수를 받으려면 독서를 해야 한다고 아무리 떠들어대도 이 이분법적 통념을 깨기는 무리다. 결국, 지금처럼 '교육민주화'가 엄청 실현되었다고 평가되는 시대에도 학교식 공부에서 독서가 들어설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교과서나 참고서를 읽으며 독서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책의 엑기스를 쏙 빼버린 껍데기에 불과하다. 좋아하던 글도 교과서에 실리는 순간, 영 밥맛이 떨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나마 시험이 끝나자마자, 교과서나 참고서는 쓰레기통에 처박히고, 그와 더불어 책과는 영원히 안녕을 고하게 된다. 이상한 나라의 기이한 책읽기!-55-56쪽

그들(대학생)에게 지식이란 책을 통해 탐구하는 대상이 아니라 인터넷에 떠다니는 검색 다발일 뿐이다. 그러다보니 자기 생각을 뚜렷하게 표현하는 경우도 거의 드물다. 토론 수업이니 자기주도 학습이니 하는 것도 세계와 대상을 해석할 수 있는 눈이 있어야 되는 법이다. 헌데, 대체 독서를 하지 않고서 어떻게 그런 눈을 기를 수 있단 말인가? 실제로 지금 대학생들은 도무지 질문을 할 줄 모른다. 사회에 대해서건 삶에 대해서건 질문이 없다. 왜? 독서를 하지 않으니까. 눈앞의 이익만 좇아가느라 바쁜데, 무슨 질문이 있겠는가. 질문을 하려면 아주 낯설고 이질적인 세계와 마주쳐야 하는 바, 독서를 하지 않고는 그런 마주침 자체가 불가능하다. 질문이 없으니 책을 읽지 않고, 책을 읽지 않으니 질문이 없고, 오, 이 악순환의 고리!-58쪽

좀 웃기는 말이지만, '서울대증후군'이란 게 있다. 수능이나 대학입학 성적을 다 늙어서까지 외고 다니면서 자신을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경우가 그것이다. 공주병에 못지않은 나르시시즘이다. 그런가 하면, 학교 때 성적이 안 좋았던 사람들은 자신은 평생 책과는 인연이 없다고 치부해버린다. 결국 공부를 잘하건 못하건 간에 이래저래 평생을 성적에 발목이 묶여 사는 셈이다.-59-60쪽

여건만 좋으면, 지원만 충분하면 활동은 저절로 굴러가리라는 발상, 이것이 바로 학교가 퍼뜨리고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수락한 거짓말의 덫이다. 즉 창의성에 대해 전혀 '창의적으로' 사유하지 못한 것. 진정한 창의성은 폼나는 공간에 들어앉아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그 공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학습 주체와 공간이 어우러져 전혀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아주 강도 높은 학습의 장을 연출하는 것, 창의성이란 바로 그런 것을 의미한다. 창의적 삶에 대한 상상력은 땅에 묻어둔 채 아무리 시설을 확장하고 서비스를 완비한들 그 안에 있는 주체는 더더욱 창의성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65쪽

"교육의 목적은 현 제도의 추종자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비판하고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다."(콩도르세)-66쪽

"공부하는 사람이 의심할 줄 모르는 것은 크나큰 병통이다. 오직 의심해야만 자주 분석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의심을 깨뜨리면 이것이 바로 깨달음인 것"(이탁오, <분서>) -69쪽

학교가 배움터가 아닌 제도로서 존재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근대 사회에서 학교란 스승이 있고 학문이 있는 곳이 아니라, 어떤 제도나 시스템으로서만 작동한다. 고로, 학교를 들어간다는 건 그 제도적 장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고등학생들이 대학을 선택할 때, 어떤 교수가 있는지 그 학과의 분위기는 어떤지 등을 고려하는 일은 거의 없다. 커트라인과 동급, 장학금 여부, 이런 정보만 있으면 충분하다. 그러니 대학 신입생들이 대학에 대한 모든 기대가 무너지는 아픔(?)을 경험하는 거야 당연지사, 자업자득이다. 머나먼 이국땅으로 유학을 가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떤 선생을 만나 어떤 학문을 터득하겠다는 발상은 전혀 하지 않는다. 학교의 위상, 그 학과의 사회 진출 비율, 그게 선택의 유일한 척도일 뿐이다. 그러기 때문에 학벌이 높아질수록 공부와 삶 사이의 소외와 간극은 더욱 극심해질 수밖에 없다. -80쪽

나는 '인문학의 위기'를 유포하는 교수들에게 이렇게 되묻고 싶다. 과연 교수들이 대학 안에서 능동적인 학습망을 조직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를. 주어진 커리큘럼만 단순 반복하면서, 프로젝트와 외유에 분주한 채 그저 세태만 탓하고 있다면, 다른 게 아니라 그런 행태 자체가 위기의 징후다. 만약 진정 위기를 절박하게 느낀다면 교수들이 먼저 그런 풍토에 맞서 능동적인 지식 활동을 펼쳐야 하지 않을까. 즉, 학교가 부과한 통념들로부터 탈주하여 '앎의 즐거움'을 향유할 수 있는 '운동'을 조직해야 한다는 것이다.-86쪽

"군자는 글로써 벗을 만나고, 벗으로써 어짊을 북돋운다."(<논어>, [안연]편)-88쪽

"시를 노래하도록 인도하는 것은 비단 그들의 뜻을 드러내게 만들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뛰고 소리치고 휘파람 부는 것을 노래를 통해 발산하고, 그 답답하고 억눌리고 막혀 있는 것은 음절을 통해 펼쳐내게 하는 것이고, 글을 읽도록 인도하는 것은 비단 그 지각을 계발시킬 뿐만 아니라, 또한 침잠하고 반복하여 그 마음을 보존하고, 올렸다 내렸다 하며 소리를 내어 글을 읽어서 그 뜻을 펴게 하는 것이다."(왕양명, <전습록>)-91쪽

보통 연구실을 찾아오는 신참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있다. "별로 아는 게 없는데도 배울 수 있을까요?" 중요한 건 지식의 양이 아니다. 자신을 진정 비울 수 있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배움에 있어 가장 불리한 조건은 겸손을 가장한 자기 비하, 혹은 이미 획득한 지식에 갇혀 새로운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직성이다. 그러므로 지식의 양이 많건 적건 '비움'은 배움의 필수적 조건이다. 끊임없이 비울 수 있어야 더 큰 앎이 흘러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135쪽

생각의 지도를 변경하고 삶의 행로를 바꿀 수 있는 글, 그것이 내가 꿈꾸는 글쓰기의 지평이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선 글을 쓰는 나 자신이 끊임없이 바뀌어야 한다. 참으로 놀랍게도 문체는 그 사람과 닮아 있다. 아니, 문체는 얼굴이요 몸이다. (중략) 그러므로,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으면 자신의 문체를 주의 깊게 살펴보라. 거울보다 더 투명하게 자신을 비춰줄 것이다. 아마 탁월한 직관력을 가진 점쟁이라면, 문체만 보고도 그 사람의 운명을 다 점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그러므로 만약 지금과는 다른 존재가 되고 싶다면, 운명의 궤적을 변경하고 싶다면, 문체를 바꾸면 된다. 거꾸로, 문체를 바꾸고 싶으면 모름지기 표정을, 몸을, 삶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139쪽

계몽이 아니라 촉발. 훈계가 아니라 감염. 이것이 동서고금의 위대한 스승들이 취한 최고의 교육법이다. 계몽의 틀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잘 배울 줄 모른다. 그런 이들은 특별한 권위를 가진 사람한테서만 배울 수 있다고 간주하고, 또 자신도 그런 선생이 되고자 한다. 해서, 남보다 많이 알면 금방 교만에 빠지고, 그렇지 않으면 곧 열등감에 젖어든다. 그래서 남보다 잘 모르는 것이 있으면 감추려 든다. 수치스럽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높은 학벌을 취하게 되면, 그 지식은 반드시 특권으로 작용한다. 더 결정적으로 어떤 단계에 이르면 이들은 더이상 배움의 열정을 펼치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계몽의 구조는 배우는 사람도, 가르치는 사람도 다 불행하게 만들어버린다. 스스로 기쁨을 누리지 못하면서 남을 감동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고, 남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면 자기 안의 기쁨 또한 더이상 자라기 어려운 까닭이다. -175-176쪽

"행복해지기 위해 어린아이에게 더 기다리라고, 노인에게 이미 지나갔다고, 노예나 매춘부에게 포기하라고 말해선 안 된다. 누구나 지금, 그 자리에서 함께 행복해야 한다." (에피쿠로스)-193쪽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지금, 당장 그 소외와의 투쟁을 시작해야 한다. 책을 읽고, 삶을 조직하고, 천하를 가슴에 품을 수 있는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 여기에는 그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주자가 말했듯이, "부귀하면 부귀한 대로 공부할 일이요, 빈천하다면 빈천한 대로 공부할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 땅의 청소년들이야말로 가장 억압적이면서 가장 소외된 계급에 해당한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입시를 위한 전쟁터에 내몰리고 거짓된 표상의 덫에 걸려 청춘을 다 바쳐야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201쪽

대인이란 남을 비호하는 사람이요, 소인이란 남에게서 비호를 받는 자입니다. 무릇 대인의 견식과 역량이 보통 사람들과 같지 않은 까닭은 그것이 모두 남을 비호하는 것으로부터 생겨나 날마다 확충되고 자라나며 날마다 번청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남의 그늘에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자신이 죽을 때까지 견식과 역량으로 채워질 날은 없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하나같이 남의 비호나 받을 줄 알지 자신이 남을 비호할 일이 있는 줄은 아예 알지도 못합니다. 집에서는 부모의 보호를 받고, 관리가 되면 상관의 비호를 받으며, 조정에서는 재상의 보호를 받길 원하고, 변방의 장수가 되어서는 중앙 관료가 두둔해주길 바라고, 성현을 자처하는 자들은 공자나 맹자의 비호를 구하며, 문장가를 자처하는 자들은 반고나 사마천의 그늘에 들기를 원합니다. (이탁오, <분서>) -2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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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논술에 딴지걸다
문우일 지음, 한국논술평가원 감수 / 명진출판사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대학에서 철학과 윤리교육을 전공한 현직 교사가 쓴 논술서다. 보기에 따라서 달리보여 평가를 내리기 애매한 책인데, 나름 철학을 쉽게 풀어 써가며 현실의 문제와 연결시키려 한 흔적이 보이고, 예화를 많이 들어가며 설명하려고 애썼다는 점에서는 그 노력을 인정해주고 싶지만, 결과적으로 고등학교 교과서 <윤리와 사상>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점에서는 내용에 크게 신선하거나 새로운 것은 없다고 봐야겠다.

  아무래도 현직 교사인 저자가 수업 시간에 활용했던 예화들을 통해서 <윤리와 사상> 교과서를 자신의 언어로 풀어쓰려 한 것 같은데, 이 책의 내용은 '<윤리와 사상> 더하기 약간의 논리학 이론'이라고 보면 정확하다. 고등학생 입장에서는 대학 논술에 자주 등장하는 철학자들의 이론의 토대가 되는 <윤리와 사상> 교과서를 대략 다시 한번 정리해볼 목적으로 이 책을 빠르게 일독하면, 그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어느 정도 흐름을 타고 정리해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내용은 특별한 것이 없으나 중간중간 들어가 있는 예시는 볼만하고, 각 단원의 뒤에 첨부되어 있는 '철학과 함께 하는 논술'의 문제도 철학적 주제를 현실 사회와 연계해 생각해보도록 유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애쓴 흔적이 보인다. 교양서도 학습서도 아닌 그 중간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 중간성격을 함께 지니지만 훌륭한 책도 있을 수 있다 -, 실질적인 논리훈련을 위해서라면 오히려 오래전 책세상에서 나온 탁석산의 <오류를 알면 논리가 보인다>나 박우현의 <논리를 모르면 웃을 수도 없다>를, 철학교양물을 읽고 싶다면 명진출판사에서 나온 탁석산의 <철학 읽어주는 남자>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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