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분투기
정은숙 지음 / 바다출판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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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는 책을 만들면서 세상의 일부를 만들어가는 사람이다. 물론 오늘날 책의 의미는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그 의미가 더 무거워진 부분도 있고, 가벼워진 부분도 있다. 그런데 책의 의미를 일련의 정영ㄴ한 사고체계 그 자체라고 확대해서 보면 인류가 가진 모든 지혜가 다 이 가운데 내포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책을 만든다는 것은 비단 책만이 아니라 세상을 편집하는 작업 한가운데 있다는 의미도 된다." -43쪽

"요즘은 물음을 던지기보다는 대답을 해야 하는 입장에 서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책, 혹은 편집을 잘 모른다는 생각을 반추하곤 한다. 그것은 책의 의미가 어느 한 가지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이 그러하듯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동적인 상황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43쪽

"편집자로 살기가 어려운 것은 책 만들기의 어려움에서 나온다기보다는 이런 삶의 자세를 유지하면서 살기가 어렵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남들은 어떤 사물이나 상황을 즐기는 데 비해 편집자는 어느새 저걸 어떤 그릇에 어떻게 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전개하고 있다." -43쪽

관찰자가 되자. 편집자는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 관찰은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제 3의 시선을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해 당사자처럼 흥분해서도, 또 국외자처럼 방관해서도 안된다. 편집자에게 가장 타기해야 할 것은 세상에 대한 무관심이다. 관심이란 자신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하는 자의식에서 비롯된다. 편집자는 세상을 관찰하면서 그것을 질료로 새로운 세계를 창출해낸다. 그저 버티거나 견디면서 편집자로 살아서는 안된다. (중략) 관찰을 잘하려면 이해를 해야 한다. 이해를 잘하기 위해서는 역시 앎이 전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출판편집자가 세상 이치를 다 알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해 책을 낸다고 했을 때 출판편집자의 자양분은 어디에서 올 것인가. 그것은 관찰하는 자아에서 온다. 그것이 발아하여 텍스트도 되고 책도 되고 세상의 일부도 된다. -47-48쪽

출판 불황이 더 심각해져도 책이 죽는 일은 없을테고 독자가 사라질리도 없습니다. 인터넷이 출현하기 전까지 최대, 최강의 정보원이었던 책에서 정보나 지혜를 얻었던 행동을 사람들이 쉽게 버릴 수 없을 테니까요. 단, 현재와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책은 살아남겠지만 어쩌면 출판산업은 수년 안에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제 나름대로 희망적 관측을 해보면 앞으로는 저자-출판사-도매상-독자라는 종래의 시스템에서 벗어나 인터넷을 포함한 '팬클럽'같은 조직을 통해 저자와 독자가 직접 연결되어 그 독자들에 의해 작가가 살아남는 시대로 바뀌게 될 겁니다. 출판의 미래는 그곳에 존재하지 않을까요?
-<심각해지는 출판불황과 '해리포터 현상'>[창] 2003년 3월호. 시노키 히로유키 발언) -57쪽

우리가 한 권의 책을 본다고 하자. 어디부터 먼저 볼 것인가 하는 것에서 이미 관점이 작용한다. 표지를 본다고 답을 냈다면 표지의 무엇을 보는가가 또 문제다. 제목을 보고, 비주얼을 보고, 저자를 보고. 그러나 이런 단순한 관점이 진짜 관점일 리는 없다. 이 책이 지향하는 바가 뭐고 편집은 또 어떻게 앞서의 사실을 구현하고 있으며 내용은 부합하는지, 또 저자가 왜 이런 주장을, 어떤 도구와 과정을 통해 실현하는지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때 관점이 생겼다고 할 수 있다. 왜 같은 물을 먹고도 독도 되고 우유도 되는 것인지, 왜 같은 메시지로 만든 책이 악서도 되고 양서도 되는지 등등의 숱한 물음들에 대해 응답하는 과정이 곧 출판 행위의 A to Z이라 할 수 있다. -59쪽

저자란 무엇인가? 저자는, 또는 작가는 세계를 창조하는 이들이다. 편집자는 작가들에게 현실을 매개로 하여 텍스트라는 정거장을 거쳐 세계를 창조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작가를 앞질러 편집자가 먼저 올 수는 없다. 작가가 현실을 지반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데 일정 역할을 하기 위해서 편집자는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다.

편집자는 애초에 독자 편에 서 있도록 프로그래밍된 존재다. 이것은 가치 평가나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다. 즉 우월의 문제가 아니라 개념의 문제인데, 편집자는 독자가 될 수 있을지언정 그 작가 자신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작가와 편집자는 본원적으로 세계관이 다른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너무 단정적이라고 말해도 어쩔 수 없다.-118쪽

전혀 빈틈없는 사람은 편집자가 될 수 없습니다. 작가의 무의식에 있는 것, 엉켜 있는 것을 언어로 만들어내도록 해야 합니다. 마음의 찢어진 상처를 안고 그것을 도려내듯 쓰도록 해야 합니다. 편집자는 그 정신을 상품으로 만들어야 하는 행위에 열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 전체를 건 언어가 상대의 가슴에 닿지 않으면 편집자로서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그 부담을 계속 주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지만요.-122쪽

저자들은 자신의 원고에만 몰두해 그 사회적 의미를 캐내려 하지만, 편집자는 사회적 변화 속에서 저자의 원고가 어떤 의미를 내포하는지를 읽어내려고 한다. 저자와 편집자의 사고의 순서가 다른 것이다.-125쪽

책은 책 현상으로 인간에게 다가오고, 인간은 인간됨으로 책과 섞여 지낸다. 책 현상이 인간됨과 상호 소통의 과정에 있고, 또 둘의 존속 패턴이 상보적인 한, 삶의 세계에서 보다 적실한 실체는 책이나 인간이 아니라 책 현상이나 인간됨, 혹은 둘의 어울림을 통한 상호조건화의 관련성일 것이다. 책의 존폐는 근대 문화의 뒷문 밖을 휩쓸려다니는 낙엽 같은 이슈가 아니다. 그것은 미토콘드리아로부터 이데올로기에 이르는 삶의 관게항들을 통해서 부단히 자신의 존재를 투여하고 또 이를 통해서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인간됨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물음과 깊고 넓게 맞물려 있는 것이다. 책은 죽을 것인가. 이 물음에 관한 한 책도 인간도 전적인 책임을 질 수가 없으리라. 책의 의의와 그 존폐를 묻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책과 만나 함께 살아온 인류의 긴 족적을 오랫동안 굽어본 역사가 그 무거운 입을 열 수밖에.-140쪽

미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경우도 입선전, 혹은 리뷰는 출판물의 흥행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지금 우리나라 인터넷 서점에서도 독자들이 별점을 매겨 출판물의 성과를 따지고 있다. 성실한 독자 리뷰가 있는가 하면 불순한 의도가 숨어 있는 리뷰(가령 아르바이트생을 동원한 자화자찬용 리뷰, 특정작가 특정출판사 안티세력의 의도적 평가절하 리뷰)도 있다. 문제는 많은 독자들이 책을 구입할 때 그 독자서평을 읽어본다는 것이다. 책은 독자에게는 불확실한 상품이다. 수치로 객관적인 평가를 받는 공산품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자동차는 연비, 가속성능 등의 비교가 분명히 제시되지만 책은 읽은 사람의 주관적인 선호도에 따라 큰 차이가 난다. 더구나 책은 구입하기 전에는 다 읽을 수 없다(당연한 이야기다). 이렇게 불확실한 상품으로서의 책을 독자들에게 팔기 위해서는 매체홍보나 서평의 유혹이 필요하다. 독자가 좋아하는 저자의 책, 신뢰받는 출판사의 책인 경우 서평이 크게 개입되지 않지만 주제나 소재에 끌려 책을 구입하려는 독자에게는 다른 사람의 서평이 영향을 미친다. 한 출판사의 충성독자를 늘려가는 일은 그런 점에서 값진 일이다.-242-243쪽

(이어서)

책 표지에 실리는 유명인가 추천글에 대해 '주례사비평'과 더불어 논란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몇 줄의 추천사에 고혹적인 단어들의 나열이 책의 본질을 훼손한다는 것이다. 그 논의의 진정성은 논외로 하고 홍보 측면에서 이 뒤표지글은 여전히 유효하고 중요하다.

독자 리뷰의 중요성 특히 전문가의 리뷰는 독자들에게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책의 구성이나 내용의 아주 세밀한 곳까지는 독자들도 미처 눈치채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전문성의 장벽도 아주 빠른 속도로 허물어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독자들이 책에 대한 리뷰를 올릴 만한 장소가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현재는 온라인 서점 등에서 독자 서평을 우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주요 출판사의 홈페이지에서도 이런 독자 리뷰가 활성화되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243쪽

편집자는 저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편집자는 관리자인가? 그렇지도 않다. 편집자는 출판경영자(시장을 인식한다는 점에서)이며, 출판영업자(독자에게 팔아야 한다는 점에서)이고, 또 독자(원고를 평가한다는 점에서)이며, 그 모든 것이다. 편집자의 정체성은 그 스스로가 자신의 존재감을 찾아내려는 노력 가운데 발생한다. 마치 비온 뒤 잠시 나온 무지개처럼.

편집자는 독특한 잡식성의 동물이다. 뭐든지 취하지만 결국 자신만의 취향에 몰두하니까. 새삼 편집광적인 자질을 가진 사람이 명편집자가 된닫는 식의 말은 하고 싶지 않다. 지적인 호기심과 창의력, 편집적인 몰입과 추구 등등이 편집자에게 요구되는 자질인 것만은 분명하다. -260쪽

책읽기의 방법론도 어떤 강요된 것보다는 스스로 발견하는 가운데 계발되면 그것보다 좋을 수는 없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이 생길리 없으므로 처음부터 비판적으로 읽으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좋다. 배경지식이, 또 앎이 충분하지 않으면 어떠랴. 처음부터 이런 것들이 생길 리가 없지 않겠는가. 누구나 처음이라는 생각으로 비판적 읽기를 시작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학습될 것이다. 또한 비판적 읽기를 하는 과정에라도 저자의 주장에 설복된다면 그것은 또 그것대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버팅겨 읽으려는 적극적 자세가 아니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학습의 가장 빠른 길 중의 하나는 책을 읽고 기록을 남기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조그마한 메모 형식으로라도 독후감을 남기는 것은,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는 것과는 천양지차의 격차가 있다. 그래서 이런 독후감을 남기는 사람이 바로 그 책의 임자라고까지 말한다.-265-2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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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철의 쾌변독설
신해철.지승호 지음 / 부엔리브로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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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기이할 정도로 다뤄지지 않는 것이 '대중의 책임'에 대한 문예요. 대중은 전지전능자 시점에서 좋네 나쁘네를 얘기할 뿐인데요. 자기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고 최후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데 결과에 대한 책임 의식은 가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우리나라 음악이 이렇게 된 것에 대중의 책임은 없느냐고 했을 때, 대중들은 면책이거든요. 그러면서 전능자의 시점에 올라서서 야단만 친다구요. 싸가지 없게도.(웃음) 일단 우리나라 대중들이 싸가지가 없어요. 인터넷 보세요.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뮤지션을 우상으로 떠받들어 달라는 얘기가 아니라, 그저 한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도 안 해준다는 얘기죠. 자꾸 고개를 숙이라고 하니까. (중략) 지금 10대들까지도 그대로 그 악습을 물려받고 있단 말이죠. 뮤지션 같은 경우 대중의 친구이고, 대중의 입이고, 대중을 대신해서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잖아요. 말하자면 인민의 입이고, 인민의 손과 발인데. 그러니 뮤지션들이 그러한 역할을 해주지 못해요.-28-29쪽

상담에 대해서는 저의 원칙이 몇 가지 있는데요. 제가 상담을 전공으로 공부한 사람은 아니니까, 개인적인 원칙이라면 '그 사람들보다 내가 위에 있다고 생각하지 말 것. 눈 높이를 철저히 같은 위치에 맞출 것.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여긴 상담소지 재판소가 아니니까 그들의 잘잘못을 판단하려 들지 말 것'같은 거예요. 어느 것이 옳은 것이다, 그른 것이다는 여기서 할 얘기가 아니라는 거죠. -42쪽

(동반신기를 두고) 문제는, 제가 지극히 싫어하는 것은 가사였단 말이죠. 옛날에 H.O.T. 도 같은 실수를 했다고 보는데요. 남이 써준 사회비판 가사 말이에요. 사회비판 가사란 본인의 생각이 담겨 있어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남이 써준 사회비판 가사를 보면서 눈에 힘을 주고 카메라를 향해서 삿대질을 하면 너무 슬픈 거거든요. H.O.T.가 캔디를 부를 때는 너무 사랑스럽고, 동반신기가 풍선을 부를 때 마이 리틀 프린세스를 부를 때는 "야! 이거 노래 좋다"고 했거든요. 마이 리틀 프린세스 같은 경우는 심지어 인디 전문방송인 우리 방송에서도 나갔거든요. 이거 완성도 높다. 이 정도는 들어줘야 한다구요. 그런데 남이 써준 비판 가사를 그들이 연기에 의해서 눈에 힘을 주고 외칠 때 보는 일각의 사람들은 답답한 거고, 일각의 사람들은 슬픈 거거든요. 저는 오히려 '오! 정반합'같은 가사를 본인들에게 맡겨도 좋지 않은가, 자기들 또래에서 충분히 또래들에게 공감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할 때, 그것이 서툰 점이 있다고 한들 거친 점이 있다고 한들 분명히 팬들이 사랑해줄 텐데, 왜 저러한 방법을 쓰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49-50쪽

그러니까 대마초에 대한 논점은 그게 담배보다 몸에 나쁘다고 한들 국가가 그것을 간섭할 권리가 있느냐, 개인이 알아서 해야 될 일이 아니냐는 문제구요. 또 한 가지 간통과 다른 대마초만의 또다른 논점이 있다면 '국가가 소위 자신들이 생각하는 올바른 목적을 위해서라면 정보를 조작하거나 국민들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해도 되느냐'라는 문제인데요. 군사독재 시절부터 대마초에 대한 정보를 곡해해서 국민들에게 그릇된 정보를 알리고 공포심을 심어주면서 협박을 했거든요.-56쪽

대마초에 관해서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일설이 있어요. 대마관리법이라는 것 자체도 존재하지 않고, 정부에서 대마에 대해 크게 관심도 갖지 않다가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이 대마를 흡연하는 사실이 그 아버지에게 알려지면서 그게 문제가 됐다는 이야기죠. 자신의 아들과 어울리던 일군의 뮤지션 집단들이 있었는데요. 자신의 아들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 그들이 나쁜 물을 들였다는 괘씸죄가 적용되어서 하루 아침에 법이 생기고, 심지어는 소급 적용되어 그 당시 활동하던 모든 뮤지션들이 때려 잡혔습니다. 심지어는 밤무대조차도 올라갈 수 없게 생계를 전부 막아버리는 일이 벌어졌는데요. 음악 전문가들은 70년대에 있었던 대마초 파동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사건을 우리나라 대중음악계가 치명타를 입었던 사건으로 판단하거든요. 그 사건으로 인해 우리나라 대중 음악계가 30년 후퇴했다고 보는 겁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기가 뭘 때려잡는지도 모르면서 잡은 거에요. 향후 이 나라의 대중음악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장르가 분화되어 나가면서 파죽지세로 성장하던 음악의 정상적인 발전 단계를 완전히 퇴행시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겠죠. -67-68쪽

그러니까 본인 혹은 당신의 아들딸이 어느 날 정말 황당한 이유, 예를 들면 청바지를 입었기 때문에 잡혀간다든가 머리카락이 길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두들겨 맞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정말 역겹고 꼴 보기 싫지만, 저 놈을 탄압하도록 국가 권력이 날뛰게 내버려뒀다가는 그 칼이 내 목에 들어올 것이므로, 그렇기 때문에 소수자들을 보호해야 되는 거거든요. 내가 소수자에 해당되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인식들을 국민들이 가지지 못하니까 그 화살을 계속 쏴대고, 알게 모르게 자기도 그 화살을 맞는 거죠. -73쪽

우리나라 기독교의 세계관 자체가 문제에요. 기독교 내부라는 자기네 메이저 세계 이외의 세계를 전혀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 오만불손한 태도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자꾸 실수가 나오는 건데요. 이명박 전 시장의 서울시 봉헌 발언은 얼마나 부적절한 발언이며, 주미대사의 참회 금식 기도는 얼마나 부적절합니까? 해서는 안 되는 발언이잖아요. 종교는 자기 자신의 사적인 영역에 담궈놔야 되는데 공직자들이 그런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배경이 궁금합니다. -81쪽

기독교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경계하는 게 자기들끼리만 모여서 믿으면 상관이 없는데 저 사람들이 내 생활 안으로 파고들어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 생활을 침략하고, 공격해 들어오니까 방어를 해야 되는 거죠. 그건 중학교 2하견 때의 우스운 경험 하나에서 시작하는데요.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손에 맥콜 음료수를 들고 있었어요. 그게 일화에서 나오는거 아닙니까? 통일교 기업이고, 지나가던 한 여자가, 제가 보기에는 뭔가 광기가 들린 듯한 특유의 번쩍거리는 눈동자로 저를 보는데, 정말 무서웠는데요. 제 손에서 음료수를 빼앗가지고 땅바닥에 패대기를 치면서 이게 어디서 나온 건지 알고 먹느냐는 겁니다. 그게 제 사유재산 아닙니까? 제 사유재산을 약탈당했잖아요.(웃음)-82쪽

말하는 기술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질문을 많이 받아요. 심지어는 상담소에서 '어떻게 하면 말을 잘할 수 있어?'라는 질문을 많이 하는데, 그것은 대화를 테크니컬한 차원으로 낮게 보는 수작이거든요. 대화는 그런 테크니컬한 차원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느다구요. 웅변은 테크니컬한 차원으로 이루어질 수 있죠. 그러나 대화는 테크닉으로 가는 게 아니라고 보거든요. 마음이 따라가지 않으면 대화가 따라가지 않는다고 봐요. 그러니까 대화의 기술 중에서 제가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 듣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 말을 차근차근 듣고, 말을 끊는 일이 여간해서는 없어야 하고, 참을성 있게 인내하면서 들어야 되고, 그 다음에 그 말이 마음에 안 들더라도 기분 나쁘지 않게 유도하면서 발언을 끌고 가주고 이래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저에 대해서 제 말만 실컷하고, 그 다음에 '에브리바디 샷다마우스'하면서 내 말은 전부 맞는 말 너는 전무 틀린 말잉라고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웃음) 그것은 굳이 신해철을 얕잡아 봐서 기분 나쁜게 아니라 이 사람들이 정작 대화라는 것을 너무 얕잡아 보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나빠요. (계속)-85쪽

(이어서) 대화라는 건 그런 차원이 아니거든요. 두 번째 대화의 기술은 마음입니다. 그 다음이란 상대방하고 이야기를 해봐서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하느 종류의 용어나 단어들을 피해 간다든가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친구랑 얘기하고 있는데, 유학까지 갔다 온 애라서 영어를 사용하는 애면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영어 섞어가면서 얘기해도 되지만, 상대방이 영어 못하는 사람이란 말이죠. 음악계 선밴데. 그 분한테는 영어로 된 단어들은 피해 가야죠. 이건 상대방에 대한 배려잖아요. 기왕이면 상대방이 좋아하는 소재, 상대방이 이미 알고 있는 소재, 내가 말하면 상대방이 맞받아칠 수 있는 소재, 이런 것들 위주로 대화를 해야겠죠.-85-86쪽

우리나라 사람들의 공포감이 많이 작용하는거죠.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서 검열에 의한 공포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게 바로 그런 건데요. 나에게 직접 피해를 줄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하한 여지만 있으면 겁을 내는 겁니다. 이건 좀 다른 얘기지만, 내가 문신을 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에 '문신을 한 사람들을 내버려두라'고 할 때 입지가 강화되는 겁니다. 그 반면에 제가 대마초를 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해서 발언하면 입지가 약해지는 거죠. 그만큼 소수자를 옹호하는데는 당사자가 아니어야 유리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당사자 아니면 빠지라고 얘기하는데, 소수자들을 옹호하는 데 있어서는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이 짖어줘야 되거든요.(웃음) 마찬가지로 제가 경상도 출신이기 때문에 전라도를 옹호하기가 쉽습니다. 제가 전라도 출신이면 전라도를 옹호하기가 어려울 거 아니에요. 지금은 많은 사람들에게 전라도 사람으로 찍혀 있습니다. 인터넷에 보면 '신해철, 이 전라디안 새끼'하면서 제가 전라도 출신인 줄 알더군요. 노무현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저는 심지어 TK잖아요. -92-93쪽

'실제로 섹스를 하지 않았는데, 열나게 러브레터만 교환하고, 매월 보름달 뜰 때 만나서 아름다운 시간을 가진 두 사람은 간통인가, 아닌가? 정신적 간통은 어떻게 할 것인가, 뭘 간통이라고 할 건데' 하는 거였습니다. 성기의 삽입? 뭐가 기준이냐는 말이죠.

(중략)

성기를 넣었네, 뺐네 그걸 논하고 있어야 되니까. 국가 공권력이 국민들한테 세금을 받아서 유부남, 유부녀가 성기를 넣었다 뺐나 그런 것을 조사해야 되냐구요. 휴지나 줍고. (웃음) 뭐하는 짓이냐고 그게. -100쪽

김규항은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한없이 사나운 얼굴로 말한다. '세상이 바뀌려면 사회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한없이 온유한 얼굴로 말한다. '세상이 바뀌려면 내가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현명한 사람들은 조용히 말한다. '세상이 바뀌려면 사회구조도 바뀌고 나도 바뀌어야 한다. 둘은 본디 하나다.'"
그런 면에서 신해철은 더욱 현명한 사람이다. 그는 '세상이 바뀌려면 사회구조도 바뀌어야 하고, 나도 바뀌어야 한다. 그러니 같이 바꿔나가자'고 끊임없이 말한다. 한국의 교육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은 제도와 함께 남들의 인식이 다 바뀌길 바라면서도 정작 자신을 바꿀 생각은 전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지승호)-107쪽

내 논법 자체가 나의 이미지를 어떻게 하면 최상으로 올릴까를 목표로 두고 있지 않다. 내 논법은 흰색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주위에 까만색을 칠하면 흰색이 더 부각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적이 두터운 외투를 입고 있다면 예의상 주먹으로 한 대 쳐야 맞는데, 외투가 너무 두껍다면 망치로 때려버리는거다. 욕먹더라도 망치로 때려야 주먹으로 때리는 효과가 나타난다는 거고, 그래서 적들에게(?) 많은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는 것이다.-108쪽

오히려 저를 당혹시키는 것은 싸움에서 파생되는 문제가 아니라 남들이 그걸 싸움이라고 규정한다는 점입니다. 그게 오히려 당혹스러워요. 제 가사에 대해서 논하면서 '우리나라에서 드물게 사회참여적이며 사회적인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가사를 쓰는데, 그 이유가 뭐냐?'고 하면 너무너무 당혹스러운 겁니다. 그러니까 제 입장에서는 앨범 한 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 타령으로 도배하는 게 비정상적인거고 힘든 것이고,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는 것이거든요. 10대 시절에 이미 간접적인 스승들로부터 받은 영향으로 '음악은 인생 전체의 반영일 뿐만 아니라 그 한 개인을 포함하고 있는 사회 전체 혹은 세계 전체의 반영이자, 거꾸로 그걸 반사시켜서 세상을 향한 외침이기도 하다'는 기준이 이미 확립됐단 말입니다. 외국에 나가서 외국 청년들이나 뮤지션들하고 얘기를 해보면 제 생각을 스탠다드로 생각하고 그렇게 받아들입니다. '당연하지 않냐, 뭘 그렇게 새삼스럽게 얘기하냐'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걸 너무나 궁금해 하는 기자 분들의 질문을 받으면 제가 얼마나 당혹스럽겠어요.-109-110쪽

"신해철은 음악으로 세상을 바꾸길 꿈꾸고 서태지는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을 하기 위해 세상을 바꾸려 한다. 신해철이 우리가 다 같은 공범이라고 하는 반면 태지는 기성세대만을 탓한다. 이는 신해철이 더 현학적이고 어둡고 세기말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데 반하여 서태지는 신랄한 비판을 가하면서도 사회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고 있다는 차이를 나타내주는 것이다."(김용희, <기호는 힘이 세다>) -134쪽

소중하게 여긴다는 태도를 LP시절에는 LP가 상하지 않게 조심스럽게 바늘을 내려놓는 순간 학습이 되는 것이죠. 뭐, 더 이상 긴 말도 필요 없고, 그런 현장 학습이 없습니다. LP에다가 조심스레 바늘을 내려놓으면서 근육과 신경을 조절하는 과정에서 콘텐츠를 소중히 여기는 태도는 자연스럽게 생겨났습니다. 콘텐츠를 깔보는 태도는 마우스를 함부로 클릭함으로 해서 생겨나고, 소비자들이 음악을 우습게 여기는데 좋은 음악이 나올 수가 없죠. (중략) 뮤지션을 깔보고 핍박하고, 콘텐츠를 우습게 알고, 가급적이면 돈을 쓰지 않고, 문화비를 최대한 절감한 상태에서 콘텐츠를 마구 긁어모으며 함부로 평을 찍찍 갈겨대는 태도 이외에 너네들이 가지고 있는 시대정신이 뭐냐. 저는 없다고 봅니다. 그 슬로건을 초창기에는 굉장히 거창하게 내걸었죠. p2p가 가지고 있는 정신을 과장해서 얘기하고 공유라는 것에 대해서 엄청난 의미를 부여했잖아요. 저는 인민민주주의 혁명이 일어난 줄 알았습니다. 공유를 얘기하는 사람들을 보고.-158-159쪽

그러니까 하이텔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아마추어 문장가들의 전통이 있는데요. 아마추어는 아마추어 안에 머물러 있을 때의 미덕이란게 있잖아요. 아마추어기 때문에 눈여겨볼 만한 점도 있구요. 아마추어들이 프로 평론가가 되고 싶다면 검증 과정을 거쳐야 되지 않습니까? 본인들이 글을 쓸 자격이 있으며, 대중한테 이런저런 얘기를 할 자격이 있느냐를 따져봐야 하는데요. 그걸 뛰어 넘어서 이 사람들이 비평 권력을 손에 넣으려고 하니까요. 그때도 제가 글을 쓰면서 막상 글을 쓴 사람한테는 별 말을 안 했잖아요. 오마이뉴스를 공격했죠. '너네가 얘기하는 시민기자 제도의 허라는 것이 여기서 드러나지 않느냐. 모든 시민이 기자라고는 하지만, 모든 시민이 전문가일수는 없지 않느냐' 하는 거죠. 일반 시민들을 촉각으로 이용해 각 사회의 세세한 부분들의 뉴스를 끌어당기겠다는 기본 콘셉트는 좋았는데요. 문화비평이라든가 하는 것은 전문지식이 필요하고, 또 지식하고 소양은 다르잖아요. 지식+소양이 있어야 비평을 하기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소양하고 담을 쌓은 애들을 평론가로 둔갑시켜주는 구실을 하니까요.-217-218쪽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가는 것은 기성세대가 자신을 정당화하는 멘트들, 그중의 하나가 우리는 입을 것 못 입고 먹을 것 못 먹고 너희들을 기르는 데다가 우리 인생을 희생했다고 하잖아요. 자식들이 입지 말라고 얘기한 적 없고 먹지 말라고 얘기한 적 없거든요. 자기가 좋아서 한 거잖아요. 그게 사실이라고 쳐도 그게 사실이라면 자기 좋아서 한 것을 가지고 아래세대들에게 그것을 인정해달라고 외치는 순간 모든 게 끝나는 거구요. 점잖게 앉아 받아먹는 수밖에 없는 건데, 사실은 입을 것 못 입고 먹을 것 안 먹고 자식들한테 투자한 이유가 나중에 덕 보려고 그런 것 아니냐, 자기 인생으로 쇼부가 안 나는 걸 자기 자식들을 마음대로 조정해서 자식들 꿈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투입해서 최대한의 매출을 올리려는 게 아니냐는 거죠. 그 매출이라는 게 우리 사회 특유의 체면상으로 동네방네 자랑할 수 있는 입신양명의 개념이잖아요. 투자해놓고 투자한 만큼 안 빠지면 절규하고, 그런 기성세대의 위선이 삼풍하고 성수대교에서 산산이 무너진거죠. 사실 노래 제목은 '우리가 만든 세상을 보라'였지만, 솔직히 말하면 '니네가 만든 세상을 보라'거든요. -222-223쪽

사실 제가 사회에 대해서 이런저런 발언을 하는 것에 대해서 저한테 악플다는 새끼들이 웃긴 새끼들인 게 저는 제가 가진 다른 카드를 안 쓰고 있다는 거거든요. 신해철이 가진 다른 카드는 뭐냐, 나 혼자 좋은 세상에서 잘 지내고 싶은 거였다면 이런 멘트 안 하고, 대중들 비위에 맞는 멘트나 찍찍 날리고 평소 소신과는 달리 남이 원하는 대답이나 하고 그러다가 이민 가면 되는 거거든요. 내가 원하는 조건이 되어 있는 나라로. 내숭 떨고 계속 돈 모은 다음에 이민 가면 되는 건데, 남들한테 욕먹어가면서 이건 이런 거고, 저건 저런 거고 이런 얘기 뭐할라고 하겠어요? 다 같이 잘살아보자는 거 아닙니까? 기왕이면 여럿이 잘살아보자는데.-237쪽

미덕이라는 것이 남이 미덕을 갖고 있으면 칭찬을 해주면 되는 거구요. 미덕까지는 안 갖고 있어도 그 사람이 나쁜 사람 아니면 되는 거지, 미덕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해서 손가락질까지 해서야 되겠습니까? 예를 들면 겸손이란 필수 덕목이 아니고 미덕인데, 성공한 누군가가 겸손까지 가지고 있다고 하면 박수를 쳐주면 되지만, 성공한 그 사람이 겸손하지 앙ㄶ다고 해서 욕을 할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겸손하지 않다는 것과 잘난 척한다는 것은 또 다른 얘기구요. 그러니까 연예인이 대부업 광고를 보고 '내가 공인의 성격을 띠고 있으니까 이런 건 하면 안 되지 않겠나'라고 하는 건 미덕이니까 칭찬할 수는 있어도 그렇지 않다고 해도 비난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242쪽

애기가 태어나고 나서 내가 생각하던 것이 강화가 됐지 생각이 바뀐 면은 많지 않아요. 제가 생각할 때 애기를 기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애기를 위해서 부부 생활을 양보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집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우리 부부고 그 사이에서 애가 태어난 거지, 애가 중심이 되고 부부가 부가 되는 이런 일이 절대로 생겨서는 안 되겠다, 아이를 양육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출발점은 엄마, 아빠가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아이한테 보여주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는 거죠. 그런 다음에 애기하고의 문제가 시작되는 거지, 애기한테 열심히 잘하는데 엄마랑 아빠랑 사이가 좆나게 안 좋고, 맨날 '너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산다'고 하면 애가 얼마나 스트레스 받겠어요? 차라리 이혼을 하는게 낫죠. -243쪽

공부는 제가 생각했을 때 아주 특수한 인간들이 하는 거거든요. 이 문구 좋다. 공부는 특별하고 선택받은, 공부에 재능있는 소수의 인간들이 하는 것이다. 나머지 사람들이 하는 공부라는 것은 일상생활을 살아가는데 불편을 안 겪을 정도의 기본적인 지식, 앞으로 살면서 학교를 안 다니더라도 학습할 수 있는 능력과 방법을 배우는 거죠.-244쪽

선정성이 에로티시즘을 얘기하는 거라면 그건 크게 잘못된 얘기가 되겠구요. 마치 집에 고3이 하나 있으면 온 가족이 숨죽여 살고 TV를 치우는 것처럼, 청소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성인들이 금욕적으로 살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 선정성이 무조건적인 자극과 사람들 눈에 띄려고 페어플레이 원칙을 파기하는 거라고 얘기하는 거라면, 어떻게 보면 맞다고 볼 수 있죠. 페어플레이를 포기한다고 하는 건 방송에서 모럴 헤저드가 일어난다는 말이잖아요. 지금 연예인들이 방송에서 아무 말이나 막하고, 없는 얘기 지어내고, 그렇게 튀려고 하고, 그러면 살아남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도를 지나친 것 같아요. -286쪽

"우리는 황혼이 지는 절벽 위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는 자와 같다. 그래서 당장 굴러 떨어질 수 있을 정도로 항상 위험하고 위태위태하고 언제든지 깨질 수 있다. 작품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인생 전체가 파탄 날 위험도 감수해야 되는 놈들이다."(신해철이 후배들에게 자주하는 말)-2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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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돌이 2008-03-05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다 밑줄을 그어두시면 책이 안팔리자나요. 버러럭~~~ 신입사원 생활은 재미있으신가요? ^^

마늘빵 2008-03-05 20:16   좋아요 0 | URL
흐흐흐. 밑줄그은 부분에 필받아서 사는 분들도 많으실듯. :) 신입사원 생활은 재밌습니다. 일도 재밌고, 사람들도 좋고, 복지도 괜찮고.

순오기 2008-03-06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거 다 치느라고 힘드셨겠어요. 가끔 오타도 있어 주시고~^^
'시비돌이'님 책이 나온 거군요. 신해철은 진중권과 같이 100분 토론에도 가끔 나와줘야 하는데...^^

다락방 2008-03-06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1,82 쪽이 제 생각과 같아요. 물론 다른 부분들도 다 맘에 들지만요. 이거 옮기느라 힘드셨겠네요. 살거예요, 산다구욧!!

마늘빵 2008-03-06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오기님 / 치느라 힘들었어요. -_- 오타는... 찾아보면 많겠죠?
다락방님 / 인터뷰집이라 읽는데는 시간이 별로 안 걸리더라고요. 우석훈 인터뷰집도 찜해놨는데 언제 살진 아직.
 
선비답게 산다는 것
안대회 지음 / 푸른역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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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난 일을 날마다 기록하는 것은 고금이 다르지 않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일이 없지 않아 내 한 몸에 모여든 일이 언제고 그치지 않는다. 따라서 날이 다르고 달이 다르다. 무릇 사람의 일이란 가까우면 자세하게 기억하고 조금 멀어지면 헷갈리며, 아주 멀어지면 잊어버린다. 하지만 일기를 쓴다면 가까운 일은 더욱 자세하게 기억하고, 조금 먼 일은 헷갈리지 않으며, 아주 먼 일도 잊지 않는다.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일은 일기로 인해 행하기에 좋고, 법도에 어긋나는 일은 일기로 인해 조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기란 것은 이 한 몸의 역사다. 어찌 소홀히 할 수 있으랴. 나는 글을 배운 이후 지난해에 이르기까지 3,700날 남짓을 살아왔다. 3,700날 동안 있었던 일을 아무 것도 기록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나간 일을 되돌아보면 꿈을 꾸고 깨어나서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번개가 번쩍번쩍하여 돌아보면 빛이 사라진 것과 같다. 날마다 기록하지 않아서 생긴 잘못이다. (유만주 <흠영>) -27쪽

가난한 집에 가진 거라곤 책 다섯 수레뿐
그것을 제외하면 남길 물건이 전혀 없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서책을 못 떠나니
전생에는 틀림없이 좀벌레였나 보다

(하곤 <책을 뒤적이다>(檢書)) -84쪽

동씨가 세 가지 여가에 독서하다
1,2가 나오면 사언의 글을 짓고, 3,4,5,6이 나오면 오언시를 지으랴. 동우는 자신을 찾아와 배우겠다는 사람들을 가르치려 들지 않았다. 그저 "먼저 백 번을 읽어라. 그러면 뜻이 저절로 나타날 것이다"라고 말하기만 했다. 여유가 없어 글 읽기가 힘들다고 말한 제자가 있었다. 동우는 세 가지 여가 시간에 공부하라고 했다. "세 가자ㅣ 여가란 무엇입니까?"라고 누군가 물었다. 동우의 답은 이랬다. "겨울은 한 해의 여가요, 밤은 낮의 여가요, 비바람 치는 때는 시간의 여가다."

(배송지의 삼국지주)-238쪽

전답을 사면 뱃속을 배부르게 하는 데 그치지만, 책을 사면 마음과 몸이 살찐다. 전답을 사면 배부름이 제 몸에 그치지만 책을 사면 나의 자손과 후학, 일가붙이와 마을 사람, 난아가 독서를 좋아하는 천하 사람들이 모두 배를 불리게 된다.

(박규수가 유숙도의 삶에서 본보기가 될 만한 인생의 의의를 찾아내 제시하고 그 의미를 밝힌 글) -243쪽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이 세상의 현인과 벗 삼는 것이 정녕 옳다. 그러나 천고적 사람을 사귀라고 옛사람이 말하지 않았던가? 이 책에서 다룬 천고의 현인은 모두 내가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친구 삼고 싶은 분들이다. 하지만 이 <상고전도> 전체를 샅샅이 뒤적일 필요가 굳이 있겠는가? 가을비 내리고 낙엽 지는 아침이든 대숲으로 난 창가에 큰 눈 내리는 밤이든 한 부를 뽑아 읽는다면 거기에는 속세를 벗어나 숨은 고매한 현자도 있고, 문장에 능한 재사도 있다. 국정을 도와 국사를 꾀하는 선비도 있고, 위대한 업적을 세운 공신도 있으며, 굳세고 방정한 신하도 있고, 찬란하게 의열을 보인 사적도 있다. 이 한 부를 벗어나지 않아도 나의 벗은 충분하다. 내가 날마다 저 여러 현인들과 더불어 노닌다면 그 또한 즐겁지 아니하랴.

(박규수 <상고전도> 中) -244-245쪽

본래 기억하고 암송하는 기송을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지만, 초학자로서는 기송을 버리면 더욱이 기댈 데가 없다. 그러므로 매일 배운 것을 먼저 정확하게 암송하되 음독에 착오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뒤에 비로소 서산을 세우고, 한 번 읽고 나서는 한 번 암송한다. 그 다음에 한 번 보고, 보고 난 다음에는 다시 읽어 모두 3,40번 되풀이하고나서 그만둔다. 한 권이나 반 권을 다 배웠을 때에는 전에 배운 것까지 포함해 먼저 읽고, 그 다음에는 암송하고 보되, 각각 서너너덧번 되풀이하고 그친다.

글을 읽을 때에는 소리 높여 읽어서는 안 된다. 소리가 높으면 기운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눈을 건성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눈을 돌리면 마음이 달아나기 때문이다. 몸을 흔들어서도 안 된다. 정신이 흩어지기 때문이다.

글을 암송할 때 틀려서는 안 되고, 중복해서도 안 된다. 너무 빨라서도 안 되는데 너무 빠르면 조급하고 사나워서 맛이 짧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무 느려도 안 되는데 너무 느리면 늘어지고 방탕해져서 생각이 들뜨기 때문이다. (계속)-266-267쪽

(이어서)

책을 볼 때에는 문장을 마음속으로 암송하면서 뜻을 곰곰히 생각하여 찾되, 주석을 참조하고 마음을 가라앉혀 궁구한다. 한갓 책에 눈을 붙이기만 하고 마음을 두지 않으면 아무 이득이 없다.

위에 말한 세 조목은 나누어 말하면 다르게 보이나, 마음을 한 곳에 집주아여 체득하기를 요구한 점에서는 같다. 모름지기 몸을 거두어 단정히 앉고, 눈은 책을 똑바로 보며, 귀는 거두어들이고, 수족은 함부로 늘리지 말며, 정신을 모아 책에 집중해야 한다. 이러한 방법을 따라 쉼없이 해나가면 뜻과 맛이 날로 새로워져 저절로 무궁한 묘미가 생기게 된다.

(홍대용, <매헌에게 주는 편지>)-267쪽

"글을 송독하고 사유해야 한다. 글을 송독하면 나의 지식을 풍부히 쌓게 만들고, 그 의미를 사유하면 내가 습득한 지식을 견고하게 만든다. 송독하되 사유하지 않으면 잃어버리게 되고, 사유하되 송독하지 않으면 지식이 고갈된다."(홍길주, <사부송유> 中)-271쪽

기사. 자기에게 필요한 중요한 사건의 대강을 기록해 둔다.
찬언. 내 마음에 드는 글이 있으면 한 구절이든 두 구절이든 따로 기록해 둔다.
음의. 알기 어려운 어휘를 분류해 써놓는다.
문필. 외워두면 좋을 문장을 따로 기록해 둔다.
범례. 옛 작가가 쓴 독특한 문투를 사례별로 기록해 둔다.
제서관섭인용. 많은 작품들의 상관관계를 따져보고 그 본문을 적어둔다.
취칙. 인생과 사회생활에 쓸모 있을 옛사람의 행위 가운데 본받고 싶은 것을 따로 기록해 둔다.
시재. 시를 쓸 때 이용할 일화나 말을 분류하여 기록해 둔다.
지론. 선배의 주장과 논리에 불만스러운 것이 있으면 자신의 견해를 첨가해 둔다.
궐문. 내가 모르는 어휘나 옛 일 등을 모두 따로 기록해 둔다.

(금나라의 문인 원호문, <시문자경> 中 <독서십법>) -275-276쪽

내가 스승님께 배운 지 이레 되던 날, 스승님은 문사를 공부하라는 글을 내려주시며 말씀하셨다.
"산석(황상의 아명)아, 문사를 공부하도록 해라!"
나는 머뭇머뭇 부끄러워하며 말씀을 올렸다.
"제게 세 가지 병통이 있습니다. 첫째는 둔하고, 둘째는 꽉 막혔고, 셋째는 미욱합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공부하는 자들이 갖고 있는 세 가지 병통을 너는 하나도 갖고 있지 않구나! 첫째는 기억력이 뛰어난 병통으로 공부를 소홀히 하는 폐단을 낳고, 둘째는 글짓는 재주가 좋은 병통으로 허황한 데 흐르는 폐단을 낳으며, 셋째는 이해력이 빠른 병통으로 거친 데 흐르는 폐단을 낳는다. 둔하지만 공부에 파고드는 사람은 식견이 넓어지고, 막혔지만 잘 뚫는 사람은 흐름이 거세지며, 미욱하지만 잘 닦는 사람은 빛이 난다. 파고드는 방법은 무엇이냐. 근면함이다. 뚫는 방법은 무엇잉냐. 근면함이다. 닦는 방법은 무엇이냐. 근면함이다. 그렇다면 근면함은 어떻게 지속하느냐. 마음가짐을 확고히 갖는 데 있다."

(황상이 정약용을 뵌 날로부터 60주년 되는 날, 75세 노인이 되어 첫 만남을 회상하며 쓴 글, <임술기>) -287-2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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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 Philosophy + Film
이왕주 지음 / 효형출판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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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포스트모던 철학자 들뢰즈는 인류가 선택한 두 종류의 길에 대해서 말했다. 첫째는 영토화, 코등화의 길이다. 이 길에서 사람들은 몸과 욕망의 탈주선을 안정된 형식과 규범과 원칙들에 맞춰 적당히 통제하며 살아간다. 이것을 그는 '붙박이 삶'이라고 불렀다. 대부분의 인류가 지속적으로 선택해 온 가장 보편적인 패턴이다. 문화란 이 붙박이 삶의 세련된 역사 이외의 다른 게 아니다. 문제는 이 문화 코드들이 올가미처럼 그 삶의 주체들을 속수무책으로 묶어놓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 상황을 이용하려는 권력자들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묶인 상태가 행복한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주려고 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문명사에서 국가는 이런 방식으로 탄생되었고 인간은 이런 방식으로 노예가 되는 길을 걸어왔다. (계속) -19쪽

(이어서)

둘째는 탈주와 유목의 길이다. 이 길을 선택한 사람들에게 공간이란 말뚝을 박아 금줄을 치고 기둥을 세워 벽을 만들기 위한 기하학적 조건이 아니다. 몸과 욕망의 탈주선을 자유롭게 터주는 것이다. 역동적으로 솟구치는 야성은 그 공간의 매끄러운 지표면을 가로지르며 탈주한다.

들뢰즈는 이런 패턴의 삶을 사는 주인공들을 유목민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붙박이 문화 안에서 코드화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삶을 살아간다. 그들에게 삶이란 모험이자 도전이고 새로운 경험이자 끝없는 해방 과정이다. 자신들을 옭아매려는 일체의 코드를 거부하는 유목민들의 이 모험과 도전의 충동은 확정된 코드에 길들여진 정착민들에게는 지극히 불온하고 위험한 힘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19-20쪽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양한 맥락들을 보여주는 이 영화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할 매세지는 우선 위반하는 삶의 지혜다. 위반은 바깥에 나서는 것이고, 바깥에서 안의 것들과 맞서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바깥에 나서는 순간, 아니 바깥에 나서려고 마음먹는 순간부터 우리의 몸과 마음은 긴장 상태에 들어선다. 바깥을 이미 보아버린 자는 바깥에 대한 동경을 멈추지 못한다. 바깥은 먼저 안의 윤곽 전부를 드러내준다. 그러므로 바깥에 나선 자는 언제나 안에 있는 것 전부와 상대할 수밖에 없다. 안에 있는 게임의 규칙 한두 개 깨는 것으로는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그는 가둬둘 수 없는 위반의 정열로 안의 것 전부와 맞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34-35쪽

그(베르그송)에 따르면 표층자아는 단순히 의식의 표면에 떠올라 있는 자아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외부의 시선이나 자신의 욕망에 의해 고정시켜 놓거나 박제시켜 놓은 자아이다. 시선이나 욕망은 변하지만 박제된 자아는 변할 수 없다. 결국 필요에 따라 자아가 그때그때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공부하는 자아, 일하는 자아, 사랑하는 자아, 사업하는 자아, 탐구하는 자아, 게임하는 자아 등등으로. ... 중략 ...

그러나 인간은 이렇게 관찰되고 분석되고 판단되는 표층자아의 존재만은 아니다. 그럴 수 있음을 보여주는 타인의 시선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변화되면서 지속되는 진실한 자아이다. 이것은 주문제작 상품처럼 내걸거나 팔기 위해 만들어놓은 자아가 아니라 내 존재의 심층 깊은 곳에서 저절로 솟구쳐오르는 자아이다. ...중략... 표층자아는 단순하다. 그러나 복잡한 욕망의 층위와 다양한 감성의 충동들을 끌어안는 이 심층자아는 결코 단순할 수 없다. 표층자아와 구분되는 심층자아의 결정적 차이는 '자유롭다'는 것이다. 이 자유가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불온한 힘으로 비치게 되는 것이다. -59-60쪽

우리가 누군가로, 어떤 것으로 되는 것은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어떤 인물로 된다는 것, 그것은 단지 그의 신체 안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옷처럼 걸쳐서 살아가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 의식의 자기 정체성과 하나로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의식은 신체가 아니다. 어떻게 그 안으로 들어가거나 나오거나 한다는 말이냐. 결국 이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로 되는 일이 불가능하다. 이는 동시에 자기 정체성을 떠나는 것이 불가능함을 반증한다. -69쪽

가령 나는 나를 대상화시켜서 느끼고 회상하고 분석하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순간에서조차 우리는 각자 자기 자신으로서, 바꿔 말하면 의식의 자기 정체성을 지닌 채로 그런 경험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나 자신을 볼 수 있고 나 자신을 보는 나 자신을 다시 볼 수 있고, 또 이런 상황은 무한히 반복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언제나 바라보는 관점으로 물러서기는 하지만 바라보이는 대상으로 머물지는 않는 자아가 있으니 곧 의식의 자기 정체성이다.비판철학자 칸트는 이것을 '순수자아'라고 말했고, 현상학자 후설은 '선험적 자아'라고 말했다. 이것은 몸처럼 변화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그리고 물체가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우리는 이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69쪽

내가 여기서 '자신이 되라'고 한 것은 자기 존재를 긍정하라는 말이 이외의 다른게 아니다. 잠자(<변신>의 주인공>)는 아직 자기 자신이 되지 못했다. 변신한 몸과 자기 의식을 미처 화해시키지 못했고, 그래서 자신의 존재, 자기의 현실을 긍정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우리는 충분히 우리 자신으로 되어 있는가. 혹시 될 수 없는 것으로 되고자 하는 크레이그처럼 어리석은 욕망에 부대끼며 삶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신의 존재, 자기의 현실을 외면한 채, 타자와의 불가능한 동화만을 꿈꾸며 시간과 기력을 헛되이 소모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내 존재의 가능성을 충분히 헤아리며 살아가고 있는가. 복제라도 하듯이 성형해 내려 일을 꾸미고 있지는 않은가. 어느 영웅이 걸어간 길을 나 자신도 한 치의 착오 없이 따라 걸어가기 위해 내가 갖고 있는 다른 소질과 취향들을 깡그리 부정하고 있지는 않은가. 어느 위인의 삶을 나 자신도 구현하기 위해서 내가 공들여 쌓아온 관계들을 팽개쳐버리고 있지는 않은가.-70쪽

동일자는 이쪽, 타자는 저쪽을 뜻하는 말이었다. 나에게는 당신이 타자고 당신에게는 내가 타자다. 물론 집합적으로도 쓰여서 가령 한국인에게 외국인은 타자이고 외국인에게는 한국인이 타자이며 아시아인에게 유럽인은 타자이고, 유럽인에게 아시아인은 타자다. 이처럼 타자는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마치 동쪽과 서쪽, 왼쪽과 오른쪽이 서 있는 위치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듯이.

...중략...

결국 타자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은 상대의 힘, 가령 유령성 같은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타자성 자체에서 오는 것이라 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타자와의 관계가 우선은 권력 갈등 관계로 맞서게 되는 까닭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요컨대 동일자들의 폭력도 우선은 타자성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인 셈이다.-88-89쪽

미셸 푸코에 따르면 타자 앞에 선 동일자의 전략은 결국 두 가지뿐이다. 타자의 차이를 동일화시키거나 아니면 무화시키는 것이다. 전자를 위해서는 지식이, 후자를 위해서는 권력이 동원된다. 동일자의 궁극 목표는 마침내 타자를 남김 없이 자기 영토에 편입시켜 완전한 동일성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러나 타자가 동일성의 영역에 편입된다고 곧 동일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영토 안의 타자'로 남아 있어야 한다. 같은 영토 안에 남겨진 타자를 우리는 다른 이름으로 '식민'이라 부른다. 타자의 동일화는 어떤 미명 아래 시도되든 결국 이리의 발톱을 감춘 식민화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것이 근세 이후 세계의 동일자로 등장한 유럽이 걸어갔던 역사의 행로라는 것을 안다. -89-90쪽

우리는 흔히 시간이 현재, 과거, 미래의 세 가지 지평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가 있어서 역사와 반성이 있고, 미래가 있어서 이상과 희망이 있으며, 현재가 있어서 현실과 삶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부철학의 완성자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이 세 가지 시간지평은 오로지 문법 안에만 존재한다. 과거는 없고 오직 기억만이 있으며, 미래는 없고 다만 기대가 있을 따름이다. 존재하는 시간은 현재, 이 순간뿐이다. 우리가 사랑하고 미워하고 존경하고 질투하고 선택하고 거부하는 모든 것들이 이 현재의 지평 위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라는 것이다. 즉 삶의 시간은 오직 하나, 현재가 있을 뿐이며, 기억(과거)하고 기대(미래)하는 일들도 모두 이 시간의 지평 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현재형 사건들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131-132쪽

니체는 현재 그리고 지금 살아가는 삶을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 과거에만 집착하거나 미래에만 매달리는 몽유인을 '역사적 인간'이라고 불렀다. 니체는 이 역사적 인간들이 이 지상에서 불행한 삶을 숙명적으로 짊어질 수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우리가 만일 행복해지려 한다면 두 가지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망각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다. 망각해야 하는 것은 이미 없는 과거, 아직 없는 미래요, 사랑해야 하는 것은 현재 그리고 그 지평 위에서의 삶이다.

니체는 바로 이 점에서 '회상하는 것'과 '기다리는 것'을 배우라고 했던 플라톤과 정면으로 대립한다. 플라톤은 완전한 것, 진리, 이데아 등은 과거에 이미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과거, 우리도 무죄하고 순결한 영혼이었을 때는 바로 이러한 진리의 세계 속에 흠과 때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 우리가 죄를 짓게 되었고, 육신이라는 감옥에 갇힌 인간으로 태어나게 되면서 이 모든 완전한 것들에 대한 경험과 지식, 진리들을 깡그리 잊게 되었다고 한다. -137-138쪽

"가장 작은 행복이나 가장 큰 행복에서나, 행복으로 하여 행복이게 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뿐이다. 그것은 망각이다. 좀더 학문적으로 표현하면 그것은 비역사적으로 감각하는 능력이다. 일체의 과거를 망각하고 현재의 순간에 머물러 설 수 없는 사람, 승리의 여신처럼 어지러움도 두려움도 없이 현재의 삶의 지평 위에 설 능력이 없는 사람은 행복이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더욱 나쁜 것은 그런 인간들이 자신만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함께 불행에 빠트린다는 것이다." (니체)-139쪽

기억에 매달려 역사가 과잉되면 인간은 인간이기를 멈춘다고 니체는 경고한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뭔가 올바른 것, 건강한 것, 위대한 것, 뭔가 참으로 인간적인 것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는 어느 정도는 망각할 수 있는 능력 속에 있다. 그런 한에서 우리는 이 능력을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고 근원적인 능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망각을 부정한다면 삶 또한 소멸되고 만다. 이 망각의 힘에 의해서 비로소 인간은 인간이 된다." -147쪽

'있음'은 모든 '있는 것'들보다 우선하는 토대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음'은 반드시 '있는 것'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간혹 이런 착각 속에 빠져들기도 한다. '있는 것'이 사라지면 '있음'도 함께 사라져버린다고. 그러나 '있음'은 '있는 것'처럼 그렇게 부서지거나 흩어지거나 사라지거나 하는 게 아니다. -236-237쪽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먼저 그것은 주관의 감정이다. 아무가 아름다운게 아니라 '아우가 아름답다'고 형이 느낀 것이다. 이 사실을 잊어 버리면 두 가지 잘못된 믿음이 생겨난다. 첫째는 아름다움과 아름다운 대상이 같다는 것이다. 이 둘을 한데 뒤섞어 생각하는 데서 아름다움에 대한 모든 혼란이 시작된다. 쉽게 말하면 '아름다운 것'은 우리가 보거나 듣게 되는 구체적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이것' 혹은 '저것'이라고 지칭할 수 있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다르다. 그것은 보거나 듣거나 만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의 전부란 오직 '생각하는 것'뿐이다.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려면 아름다운 것, 가령 소녀, 꽃, 노을, 단풍, 시, 그림 같은 것을 넘어서서 나아가야 한다. 여기서 '넘어서서 나아간다'는 것은 눈으로 보기를 멈추고 사념의 세계로 들어선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바로 형이상학, 곧 '추상'이다. 결국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려면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것을 넘어서서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세계 안으로 들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261-262쪽

목적 인간 자신은 대체로 불행하다. 원래 목적을 이루는 일이 힘든 과정과 희박한 가능성을 뚫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설령 어쩌다 성공했다 하더라도 목적 인간은 곧장 다른 목적을 찾아 새로운 모험의 길로 나서려 하기 때문이다. 과정이란 그에게는 오직 건너뛰어야 할 정애에 지나지 않는다. 가능하다면 출발점에서 목적지까지 그냥 마술로 훌쩍 뒤어넘거나 비행기 같은 것으로 날아가서 도달하고 싶다. 그래서 그는 평생 시간 없다는 것과 바쁘다는 것을 스스로 혼동한다. 신은 하루 24시간, 1년 365일 공평하게 시간을 주었지만, 그는 자신에게만 유독 시간이 없다고 불평한다. 그에게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그저 스스로 바쁘다고 믿는 것 뿐이다.-283쪽

과정 인간은 삶이 A와 B 사이에 놓이는 과정 가운데 있다고 믿는다. 그는 과정 바깥에 있는 어떤 것들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도중에 멈춰 서서 머뭇거리고 서성거리고 심지어 방황하는 것조차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는 법이 없다. 그것이야말로 삶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도 이런 과정에서 어쩌다 도달하게 되는 지점이 누구나 도달하기를 바라는 지점과 일치할 수 있다. 그때 이 우연의 선물에 고마워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거북해하고 부담스러워한다. -284쪽

세상에 의해 거부된 존재들은 선택 앞에 서야 한다. 쫓겨날 것인가, 나앉을 것인가. 토니 모리슨은 소설 <가장 푸른 눈>에서 '쫓겨나는 것'과 '나앉는 것'을 구분한다. 떠밀려 쫓겨나는 자는 미련을 버리지 못해 다시 세상으로 향하는 닫힌 문 밖에서 서성거리고 배회한다. '두드리라, 열리리라.' 그는 설사 또다시 쫓겨난다 하더라도 정녕 이 문이 다시 열리기를 간절히 기다린다. 그러나 제 발로 나앉은 자는 다르다. 그는 세상을 향한 희망을 스스로 접어버린다. 그는 차라리 다른 곳에 가령 언어, 꿈, 환상 같은 것에 머물고자 한다. 그러나 세상의 힘은 나앉은 자들이 이런 마법의 세계에 오래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들을 분류하고 해석하고 조정하고 판단한다. -321쪽

젊은 시절의 사르트르는 "사랑한다는 말은 의미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혹은 그녀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줄 수 있다는 것 혹은 어떤 행동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이렇게 주장할 때의 사르트르의 견해는 확실히 여자의 입장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새벽에 우유배달 온 토맥과 여자의 짧은 대화로 돌아가보자. 여자는 토맥에게 묻는다. "키스하고 싶어? 껴안고 싶어? 나랑 자고 싶니?" 이것은 물음의 형태를 차용한 사랑에 관한 그녀의 당대적 정의였다. 사랑은 존재하지 않ㅎ는다. 그것은 우리 입의 구강구조를 거쳐서 나오는 바람 소리에 불과하다. 존재하는 것은 키스하고 만지고 껴안고 함께 잠자리에서 성교하는 것뿐이다. 이것을 그녀는 아이스크림집에서 다시 반복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저렇게 피부와 피부를 대서 접촉하고 느끼고 향유하는 것이라고. 여자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녀가 믿는 유일한 것은 신체와 신체의 접촉이다. 이처럼 그 구체적인 확인방식을 떠나서 떠드는 사랑에 관한 모든 논의는 허망하다는 것이다.
-339쪽

아리스토텔레스는 젊은 시절의 사랑이 변덕스레 쉽게 변하는 것은 그 사랑이 쾌락적이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 즐거움을 주는 대상도 달라진다. 이것이 젊은이들이 쉽게 연인이 되었다가 또 쉽게 헤어지는 이유다. 그들의 사랑은 즐거움을 주는 대상의 변화와 더불어 변하며, 그러한 그것이 주는 쾌락도 속절없이 변해버린다. 젊은이들은 또한 성적이다. 그들이 나누는 대부분의 사랑은 정념에 의존하고 또 쾌락을 목적으로 한다. 그들이 금방 사랑에 빠졌다가 하루 만에 헤어지곤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348쪽

에리히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은 기술이다"라는 도발적인 명제를 제시하고 이 기술을 체득하기 위해서는 '인식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부연한다.

그에 따르면 사랑을 위한 불가결의 요소는 다음 다섯이다. 베풂, 보살핌, 책임, 존경, 인식. 프롬은 특히 마지막 요소, 즉 인식에 특별히 긴 해설을 덧붙인다. "사고에 의한 인식, 즉 심리학적 인식은 사랑이라는 행위를 온전히 인식하는 데 필요한 조건이다. 나는 타인의 실체를 알기 위해서, 혹은 내가 그에 대해 가졌던 환상이나 불합리하게 왜곡된 이미지를 극복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과 나 자신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오직 내가 인간 존재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때만 나는 인간을 궁극적 본질에서, 사랑의 행위에서 인식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인식은 나를 알고 상대를 아고 나와 상대가 함께 얽힌 종횡의 맥락들을 아는 것이다. 반성은 특히 그것을 흘러간 시간의 지평 위에 되돌려놓고 보는 것이다. 인식과 반성이 결여될 때 우리의 사랑은 도구적 사랑, 쾌락적 사랑으로 굴러떨어질 위기에 시나브로 내몰린다. -351-3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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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8-02-25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득 마음이 동해서 오래된 정원 다시 보고있었는데.. 이 밑줄긋기가 반갑네요 ㅎㅎ 이 책 보관함에서 몇달째 썩히고 있는데 ㅎㅎ

마늘빵 2008-02-25 08:22   좋아요 0 | URL
소설 <오래된 정원>? :) 나도 그거 오래 전에 읽었는데, 영화는 얼마 전 봤구. 책은 잘 썼어, 재밌고, 내용도 깊고.

Jade 2008-02-25 15:07   좋아요 0 | URL
어제본건 소설말고 영화요 ㅎㅎ 예전엔 안보였던 장면들이 보이더라구요. 영화관에서 두번이나 봤었는데, 역시 난 보고싶은 것만 봤나봐 ㅎㅎ

marr 2008-02-25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멕과 우유배달 여인이 나오는 걸로 보니 키에슬로프스키의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군요. 두 사람이 저렇게 멋진 대화를 주고받았다는 게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그립군요.

마늘빵 2008-02-25 20:38   좋아요 0 | URL
미르님 이 영화를 아시는군요! 저는 아직 못 봤는데. 철학자 김용규씨도 그의 책에서 언급한 바 있는걸로 알고 있는데. 이 책 역시 사놓고 아직 보지 못했다는. 한번 보고픈 영화입니다.

turnleft 2008-02-26 0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는 철학 개념을 생생히 전달하기 위해 발탁된 배우라고 할 수 있는데, 종종 저자의 영화에 대한 애정이 지나쳐 정작 설명하고자 한 철학 개념과는 그닥 어울리지 못하는 사례들이 눈에 띈다. 사랑하는 여자친구를 조연으로 출연시켜놓고 너무 많이 카메라에 담아 주연이 누구인지 헷갈리게하는 감독 같은 느낌이랄까"

예전에 이 책에 대해 이렇게 적어 놓았더군요 ㅋㅋ

마늘빵 2008-02-26 07:55   좋아요 0 | URL
읽고보니 그 말이 잘 맞는 듯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잘 쓴 책이라 생각해요. :) 제가 전에 예스24에 칼럼비스므리하게 시도했던 그런 스타일이라 깜짝 놀랐어요. 제가 썼던 <묵공>과 비슷한 구조였다는.

Kitty 2008-02-26 0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었어요!
저같이 무지몽매한;; 중생도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줘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ㅋㅋ

마늘빵 2008-02-26 07:55   좋아요 0 | URL
이거 재밌습니다. 잘 모르는 영화, 잘 모르는 철학자의 철학도 쉽게 풀어서 잘 엮었어요.

프레이야 2008-02-26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재미나게(^^) 읽었어요.

마늘빵 2008-02-27 00:42   좋아요 0 | URL
네 영화와 철학이 잘 버무려진 책이었어요.
 
나는 고발한다 - 해제ㅣ드레퓌스 사건과 지식인의 양심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7
에밀 졸라 지음, 유기환 옮김 / 책세상 / 2005년 5월
구판절판


사법적 오판은 슬픈 일이지만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사법부가 틀릴 수도 있고, 군부가 틀릴 수도 있다. 여기서 군부의 명예가 실추되었다는 말이 왜 나오는가? 오판이 내려졌을 때 시급한 단 하나의 의무, 그것은 조속히 오판을 시정하는 것이다. 결정적 증거 앞에서도 오류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고집하는 날, 바로 그날 진정한 과오가 시작되리라. 사실 어려운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오판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오판을 인정하는 데 괴로움과 망설임이 있었다는 것을 시인할 결심을 하는 날, 바로 그 날 만사가 형통하리라. 그 점을 인식하는 이는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쉐레르 케스트네르 씨' 中)-28쪽

청년, 청년들이여! 언제나 정의와 함께 있으라. 그대들의 내면에서 정의의 관념이 희미해지는 날, 그대들은 파멸하리라. 지금 나는 사회적 관계의 보장에 지나지 않는 '법전'의 정의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것도 존중해야 하리라. 그러나 좀더 숭고한 관념, 모름지기 인간의 판결이 잘못될 수도 있음을 원칙적으로 인정하는 정의, 심판자들을 모욕하지 않으면서 기결수의 무죄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정의가 있다. 그렇다면 그것 또한 법을 향한 그대들의 불타는 열정을 자극하는 모험이 아닌가? 아직 이해관계나 인간관계가 뒤얽힌 이전투구에 휩싸이지 않은 그대들, 아직 어떤 비열한 사건에도 연루되지 않은 그대들, 순수와 선의로 목청껏 외칠 수 있는 그대들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정의의 완성을 위해 일어날 것인가? (계속)-67쪽

(이어서) 청년, 청년들이여! 인간성을 지켜라. 관용을 잃지 마라. 설령 우리가 틀렸을지라도, 우리와 함께 있으라. 무고한 자가 끔찍한 형벌을 당하고 있고, 분노에 찬 우리의 가슴이 고통으로 찢어졌다고 우리가 그대들에게 말하지 않는가. 비록 한순간일망정 이 한없는 형벌 앞에서 사람들이 오류의 가능성을 인정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가슴이 고통으로 찢어졌다고 우리가 그대들에게 말하지 않는가. 비록 한순간일망정 이 한없는 형벌 앞에서 사람들이 오류의 가능성을 인정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가슴이 미어지고, 두 뺨에 눈물이 흐른다. 물론 간수들은 여전히 무정하고 무감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대들,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고, 온갖 비참과 온갖 연민에 민감한 그대들은 어찌된 일인가! 이 세상 어디엔가 부당한 증오를 받으며 죽어가는 순교자가 있을 때, 그대들이 어떻게 그의 대의를 지키고 그를 해방하기 위해 기사도 정신을 발휘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대들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숭고한 무험을 감행할 것이며, 도대체 누가 위험하지만 훌륭한 대의 속에 몸을 던질 것이며, 도대체 누가 이상적 정의의 이름으로 군중에 대항할 것인가? (계속)-67-68쪽

(이어서) 만일 늙은 기성세대가 그대들의 고귀한 혈기, 고귀한 열정을 대신 불태운다면, 그대들은 얼마나 부끄러울 것인가? 청년들이여, 어디로 가는가, 학생들이여, 어디로 가는가? 거리로 내달리는 그대들, 시위의 물결을 이룬 그대들, 시대의 혼란 속으로 스무 살의 용기와 희망을 던지는 그대들이여...... "이제 우리 함께 가오, 인간과 진실과 정의의 세상을 향하여!" ('청년들에게 보내는 편지' 中)-68쪽

애초에 내가 말한 대로, 진실은 전진하고 있다, 그리고 아무것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 없으리라. 사악한 무리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소중한 전진이 한 걸음 한 걸음 적시에 이루어지리라. 진실은 그 자체로 온갖 장애물을 분쇄할 힘을 지니고 있다. 사람들은 진실이 가는 길을 가로막고, 또 얼마간 진실을 땅속에 묻어두는 데 성공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때에도 진실은 땅속에서 자라며, 땅속에서 엄청난 힘을 얻고, 어느 날 폭발의 굉음과 함께 모든 것을 날려버리리라. 앞으로 몇 달 더 거짓과 밀실 속에 진실을 가두어보리라, 그러면 그대들은 더할 나위 없이 무서운 재앙을 준비했음을 곧 알게 되리라. ('프랑스에게 보내는 편지' 中)-73쪽

대통령 각하, 진실은 이처럼 단순합니다. 그리고 이 무시무시한 진실은 당신의 통치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길 것입니다. 저는 당신이 이 사건에 대해 아무런 권한이 없으며 단지 헌법과 측근의 수인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대로 역시 완수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저는 최후의 승리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더욱 강한 확신으로 거듭 말씀드립니다. 진실이 전진하고 있고, 아무것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에서야 '사건'이 진정으로 시작되고 있는데, 왜냐하면 오늘에서야 각자의 입장이 확실해졌기 때문이빈다. 한쪽에는 햇빛이 비치기를 원치 않는 범죄자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햇빛이 비칠 때까지 목숨마저도 바칠 정의의 수호자들이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진실이 땅 속에 묻히면 그것은 조금씩 자라나 엄청난 폭발력을 획득하며, 마침내 그것이 터지는 날 세상 모든 것을 날려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머지않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 막 가장 멀리까지 울려 퍼질 재앙 중의 재앙을 준비했다는 것을. ('나는 고발한다' 中)-105-1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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