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누가 악법도 법이라고 말했는가
롤스 & 매킨타이어 : 정의로운 삶의 조건 지식인마을 23
이양수 지음 / 김영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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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평생 정의만을 연구했던 한 철학자가 타계했다. 그는 공리주의가 온세상을 지배하고 있던 시기에, 공리주의를 비판하는 이론을 내놓아 세상을 놀래켰고, 철학 분야에 있어 죽어버린 정의의 영역을 부활시켰다는 칭송을 받았다. 1957년에 발표한 논문 <공정으로서의 정의>로 주목을 받기 시작해, 이 논문을 보완하는데 또 한 세월을 쏟아 필생의 역작 <정의론>을 1971년에 펴냈다. 그는 바로 다음해 하버드 대학을 빛낸 교수로 뽑혔고, 이후의 모든 정의론은 그를 가운데 두고 퍼져나갈 만큼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리고 죽기 10년 전 <정의론>에 이어지는 후속 연구 결과인 <정치적 자유주의>와 이 이론의 적용 영역을 세계로 넓힌 <만민법>이 출간되었다. 

  김영사에서 나온 스물 세번째 지식인 마을 시리즈 <롤스&매킨타이어>는 이런 롤즈의 이론과 그의 동료인 매킨타이어의 비판을 담아낸 책이다. 제목은 두 사람을 동등하게 대우했지만 무게는 확실히 롤즈에 쏠릴 수 밖에 없다. 매킨타이어만을 다루는 책이라면 모르겠지만 그와 함께 롤즈를 다룬다면, 자연스레 무게는 롤즈에 실리게 된다. 롤즈는 그의 역작 <정의론>이 출간된 이후 수많은 철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는데, 그들은 모두 '롤즈의 비판자' 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나게 했다. 본래는 주목받지 못하던 철학자들도 롤즈의 비판자가 됨으로써 롤즈와 더불어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롤즈의 비판자로는 대표적으로 샌들, 테일러, 왈쩌, 그리고 이 책에 다루는 매킨타이어가 있다. 롤즈의 이론과 그에 대한 이 네 사람의 비판은 스티븐 뮬홀(표기는 스테판 뮬홀로 되어있으나 스티븐 뮬홀로 부르는게 옳다)과 애덤 스위프트가 지은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한울아카데미)라는 책에 자세히 소개되어있다. 그외에도 로티, 드워킨, 래즈, 노직 등도 롤즈와 관련해서 살펴봐야 할 인물들이다. 앞의 네 명은 공동체주의자로, 뒤의 네 명은 자유주의자로 분류된다. 롤즈가 이렇게 많은 이들로부터 비판을 받는 것은 그의 이론이 바라보기에 따라서 어느 진영으로부터도 못마땅하기 때문이다. 롤즈의 이론은 공동체주의와 자유주의의 양 진영 사이 어디엔가 위치해 있다.

  이 책에서 롤즈와 함께 다뤄지는 매킨타이어는 공동체주의의 대표적 철학자다. 고로 이 책에서 롤즈가 비판을 받는 점 또한 공동체주의의 입장에서 바라본 것이라 할 수 있다. 공동체주의에서도 해당 철학자마다 롤즈를 비판하는 부분이 다 다르다. 매킨타이어의 경우 롤즈의 '원초적 입장'에 처한 당사자들에 주목한다. 공동체주의자들은 이렇게 비판한다.

  "도덕성은 타인의 이익에 대해 무관심하면서도 항상 자기 합리성을 추구할 줄 아는 특정한 인간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자주 마주치는 보통 사람들에게 요구된다. 보통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불완전하다. 그러나 이 불완전함이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보통 사람의 도덕적 함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불완전함이다. 따라서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들을 굳이 도덕적 인간의 대변자라고 볼 이유가 없다. 설령 그들이 도덕적 입장을 대변한다고 해도 그 입장이 반드시 실제의 인간들을 도덕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거센 환경의 변화에도 굳건함을 잃지 않는 덕성이다. 이러한 덕성을 지닌 사람들은 비록 자신의 이해관계를 떠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이해관계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상황을 슬기롭게 대처하고 인류의 평화에 이바지할 줄 아는 구체적인 인간들이다."

  롤즈는 '원초적 입장'과 '무지의 베일'이라는 사고실험을 토대로 이후의 논의를 전개해 나가는데, 이때 원초적 입장에 처한 당사자들은 '합리적'인 존재로 간주된다. 여기서 합리적이란 말은, 남의 것을 빼앗아 가면서까지 욕심을 부리지는 않지만 주어진 여건에서 어떻게 하면 내가 이득을 얻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존재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공동체주의들은 롤즈의 이론에서 제일 첫번째 전제가 되는 '원초적 입장'을 비판함으로써 이후의 논의를 무너뜨린다.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들은 너무나 이상적인 존재이고, 현실적으로 상정할 수 없는 인물들이라는 것이 비판의 요지다.

  매킨타이어는 따라서 그들이 도덕적이라고 간주할 근거가 없으며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들의 도덕적 덕성을 기르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현실의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개인을 굳건히 지켜주는건 오랜 시간 다듬고 가꿔온 길러진 덕성이라는 것이다. 매킨타이어는 공동체주의자 중에서도 테일러와 함께 가장 바깥에 서있는 자이다. 자유주의를 기준으로 하면 매킨타이어와 테일러, 다음이 샌들과 왈쩌가 될 것이고, 롤즈가 다음에 서게 될 것이다.  먼저 언급한 인물이 공동체주의적 경향이 더 강하단 말이다. 고로 저들 중엔 롤즈가 가장 덜 공동체주의적이다.

  롤즈의 이론이 다소 이상적이라는 점은 그의 <정의론>을 읽으면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롤즈는 자신의 이론은 결코 이상적이지 않으며 지극히 현실적이라고 말한다. 이상적으로 보이는건 전제가 되는 원초적 입장에 놓인 당사자들의 조건 때문인데, 현실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인간 유형은 아니어도 충분히 현실을 살아가는 개개인의 머리 속에서 사고 가능하고 사회 구성원 개개인이 스스로에게 적용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 두 사람의 견해 차이를 느껴 볼 수 있을테지만 매킨타이어의 비판은 롤즈와 대립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롤즈가 바라보지 못하는 구멍을 메꾸기 위한 비판이라고 봐야한다. 롤즈의 이론을 무너뜨리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롤즈가 충분히 기존에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공리주의를 뒤엎는 성과를 냈고, 그것을 인정한 채로 더 완벽한 이론으로 만드는데 목적이 있다.

  롤즈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 대표되는 공리주의를 비판하면서 공리주의에서 말하는 선의 극대화는 사회 성원의 희생을 볼모로 잡은 채 전개된다는 점에서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롤즈는 칸트에 자신의 이론적 기초를 의지하고 있는데, 칸트의 관점에서 보아 공리주의는 수단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유린하기에 잘못되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롤즈는 공리주의가 버린 소수자에 대한 배려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받는 사회를 <정의론>을 통해 실현시킨 것이다. 롤즈의 정의 원칙 중 '최소수혜자의 이익 극대화의 원칙'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이 책만으로 롤즈의 이론과 매킨타이어의 비판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저 대략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 정도를 파악하는 정도, 그리고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내용 접근은 하지 않지만, 대략 어떤 관점에서 두 사람이 사회를 바라보고 정의를 논하는지를 파악하는 정도로 책을 활용하면 되겠다. 롤즈와 매킨타이어로 들어가는 입문서 격으로 보면 영양가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철학자고 마찬가지이지만 롤즈는 워낙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는데 있어 새로운 용어과 개념을 등장시키기 때문에 용어에 대해 개념을 잡고 내용접근을 할 필요가 있는데, 입문서격인 책으로는 그것을 수용하기 힘들어보인다. 저자는 맨 뒤에 대표적인 용어들을 간단하게 서술했는데 서비스 차원으로 봐야지, 이 정도 해설로 용어를 파악했다고 보긴 힘들 것이다.

  롤즈는 <정의론> 이후 <정치적 자유주의>라는 책을 통해서 그 사이에 있었던 여러 철학자들의 비판점을 수용하고 이론을 좀 더 현실적이고 완벽하게 만든다. 가장 흔한 비판인 너무나 이상적이라는 주장을 의식한듯이 이후 '중첩적 합의', '공적 이성', '정치적 구성주의'와 같은 개념들을 새롭게 선보이며 완성도를 높였다. 이 책에선 <정치적 자유주의>의 논의는 다루지 않는다. 롤즈에게 가해지는 비판은 <정의론>에 머물러있고, 그에 가해지는 매킨타이어의 비판을 살펴보기 위한 것이니 <정치적 자유주의>의 출간 이전의 논의라고 보면 되겠다.

  참으로 방대한 영역에 걸쳐서 논의를 전개하고, 쉽게 읽히지 않는 롤즈의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 또 롤즈를 둘러싼 여러 철학자들의 논의를 살펴보기 위해 입문서는 중요하다. 한 눈에 그 모든 것이 쉽게 들어오지 않고, 바로 일차서적을 읽는 건 너무 막연한 접근이라 어렵다. 롤즈와 비판자들의 논의를 살펴보려면 이 책 이후에 영역을 조금 더 넓히고, 깊이는 몇 배 더하여,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를 읽는다면 한 눈에 모든 것이 파악될 것이리라 생각한다. 더불어 롤즈의 일차서적을 읽기 전에 롤즈 이론을 개념잡길 원한다면 염수균씨가 정리한 <롤즈의 민주적 자유주의>를 권한다. 이것도 마냥 쉽지는 않겠지만 이것 말고는 일차서적 읽기 전에 마땅히 접근할 만한 텍스트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면 아싸리 무대뽀로 <정의론> 1장부터 차근차근 접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대신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 들 것이다.

p.s. 소크라테스는 "잘못된 법도 법이다"라고 말한 적이 없다. 이 책 18쪽에선 이렇게 전제하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자세한 것은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권창은 저, 고려대학교출판부, 2005) 과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럼 누가?>(김주일 저, 프로네시스, 2006)을 참조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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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07-11-28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예전에 어느 책에선가 롤스의 이론이 잠깐 언급된 부분을 읽었는데, 세 문장인가, 그쯤 되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어서 낑낑댔던 기억이 나요. 번역의 잘못일까, 내가 이해를 못하는 걸까, 하면서요. (내용은 까먹었는데 분배의 정의에 대한 얘기였던 것 같음.) 이런 걸 술술 읽고 술술 써내는 아프님도 얼핏 보면 난해한 분일 것 같지만, 여러분, 그건 오해예요. 저 마지막 부분을 좀 보세요. "아니면 아싸리 무대뽀로~... 맨땅에 헤딩.." 음음음 난 이래서 아프님이 좋다니까!

마늘빵 2007-11-28 09:26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입문서격이고 구체적인 이론적 내용은 많이 나오지 않아서 읽기 한결 수월해요. 롤즈 책을 직접 읽으면 머리 아프죠. -_- 제가 롤즈를 좋아한답니다. 그래서 관심이 많고. 사실상 공리주의 이후에 롤즈의 이론이 사회 전반적인 부문들에 적용이 되고 있어요. '정의'의 영역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이 책의 저자도 역시 현실에서의 문제에 정의론을 적용해서 책의 뒷 부분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수행평가의 공정성, 비정규직 문제를 살펴보고 있답니다.

비로그인 2007-11-28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사람이 공정하게 행동해야 하는가?
왜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왜?'에 관해서는 맥킨타이어의 '길러진 덕성'이 유의미할 것입니다.
제가 공자의 문도인 이유이기도 하지요. 하하


마늘빵 2007-11-28 09:59   좋아요 0 | URL
아직 매킨타이어의 저서를 직접 살펴보지 않은 채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매킨타이어의 입장만을 접한지라 명확히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롤즈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입헌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이 서로가 합의할 수 있는, 동의할 수 있는, 공정한 시스템을 만들고 유지해나갈 것인가, 에 있다고 한다면, 매킨타이어의 그것은 롤즈가 살짝 간과하고 있는 부분을 보완해줌으로써 롤즈의 이론이 좀 더 완전하고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게 해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매킨타이어는 롤즈만큼이나 체계적으로 사회 제도의 문제를 다루지는 못하고, 롤즈 이론의 빈구석을 메꿔주는 정도로 보입니다. 매킨타이어와 공자의 - 두 사람의 이론을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 개인의 덕성을 꾸준히 기르는 것 또한 공정한 사회, 도덕적인 사회를 위해서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조건이라고 볼 수 있겠죠.

yoonta 2007-11-30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롤즈..그렇지 않아도 언젠가 한번 봐야지하고 아직도 못펼쳐들고 있는 사람인데..아프락사스님의 깔끔한 리뷰 잘봤습니다. 서점가서 한권 집어와야겠네요. ^^

마늘빵 2007-11-30 21:45   좋아요 0 | URL
아핫, 윤타님께서 제 서재까지 오시고. :) 요 책을 통해서 뭔가를 많이 기대하시진 않는게 좋겠습니다. 대중적인 입문서격이고, 롤즈의 원초적 입장과 그에 대한 매킨타이어의 비판에 주로 할애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학교에서 평등을 말하다 SERI 연구에세이 51
곽해룡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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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직 윤리 교사로 재직중인 저자는 그동안 그가 보고 느꼈던 바를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 '평등'이라는 기준으로 학교 교육 현장 곳곳을 관찰하고 문제를 제기한다. 교장과 평교사 간의 관계, 교사와 학생 간의 관계, 학생과 학생 간의 관계, 교사와 교사 간의 관계 등 교육 현장의 구성원들 각각의 관계로부터 시작해 평등을 이야기한다.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바를 구체적으로 예로 들면서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서술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그의 개인적인 경험이 대부분이겠지만 '어떤 경험'을 '모든 경험'으로, 까지는 아니어도 '많은 경우'로 다소 보편화시켜 이야기해도 무방할 정도로 교육 현장에서 많이 목격되는 장면들이다. 

  신입 교사의 경우 학교의 전반적인 업무에 관한 노하우가 없어 시행착오를 겪기 마련인데, 선배 교사가 마치 뭐 대단한거 감싸쥐고 있는양 공유하지 않으려 하는 경우나, 교장에게 잘 보이려고 수업에는 소홀하면서 아부하는 교사들, 또 수업은 뒷전이고 부수입 얻으려고 이리저리 머리 굴리는 교사들, 나이가 많다고 혹은 직급이 높다고 혹은 경험이 많다고 으시대며 상대방 위에 군림하려는 경우 등 교사와 교사의 관계에 있어서만도 여러 가지 사례가 나온다.
 
  주로 저자의 시선은 교사와 교사의 관계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위에 언급한 사례와 같은 '학교를 망치는 유형'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교무실에서의 교사들의 왕따를 비롯 공동체의 분열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다. 불합리한 연공서열, 오랜 인습으로 굳어진 연고주의 (학연, 지연, 혈연), 파벌주의, 집단공방체제(공동방어전선 혹은 연합공격전선), 친소의 이합집산과 합종연횡, 비합리적 온정주의, 배타적 개인주의나 패권주의, 유아독존의 중립주의 등이 모두 불평등의 배경이다."  (P43)

  그 어느 곳에도 줄을 서지 않고 독립적으로 서 있는 사람은 결국 왕따 당할 수 밖에 없다. 줄을 서고 아부하고 세력을 형성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 교무실 안도 사회와 다르지 않다. 다만 국공립학교보다는 사립학교에서 특히나 이런 모습이 자주 목격된다는 사실이다. 아무래도 자격을 획득하고 국가에 고용된 국공립 교원과 이사장이나 교장에 의해 고용된 사립교원은 처해있는 상황이 다를 수밖에 없다. 아무렇게나 자를 수는 없겠지만 수업량을 줄이거나 승진을 위해서, 혹은 고3 업무를 맡기 위해서는 이 같은 행동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밖에 없다. 정도의 차이는 이사장과 교장이 어떤 마인드를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한 예로 저자는 이런 경우를 들고 있다. 서울 D고에서는 교사들이 출신대학별 모임을 자발적으로 해산했다고. 출신대학에 따라서 세력이 형성되고, 왕따 당하는 교사들이 있다보니 그들 스스로가 자정노력을 한 것이다. 다른 예로 교장이 동문 회동을 주선하고 동문을 요직에 배정한 경우와는 대비된다. 학교도 일반 기업체 못지 않게 하늘대학 출신들을 선호하고 출신대학에 따라 능력을 평가한다. 어느 재단은 서울대를 10점 만점으로 시작해 수능점수에 따라 서울 중위권이 다음, 지방 국립대학과 서울 중하위권 대학이 다음, 그리고 지방 사립대학 순으로 점수를 매긴다. 최초 지원서류를 내면서부터 차별은 시작된다.

  저자는 교사와 교사 간에도, 교사와 학생 간에도 '수평적 인간 관계'가 이루어져 한다고 말한다. 당연한 말이다. 집단의 모든 구성원이 사람과 사람으로서의 기본적인 매너와 태도를 가질 때 '수평적 인간 관계'는 성립한다. 그러나 관계맺음에 있어 단 한 명이라도 시소게임을 하고자 한다면 수평적 인간 관계는 바로 깨지고 만다. 뉴스를 보면 교사가 학생을 개패듯 팼다는 기사가 나오고, 거꾸로 학부모나 학생이 교사를 패서 입원했다는 기사도 종종 나온다. 뉴스로 전해지지 않고 학교 안에서 조용히 묻혀지는 사례들까지 친다면 영국이나 미국 못지 않을 것이다. 수평적 인간 관계는 상대적으로 위에 있는 사람에 의해 깨지기 쉽지만, 아래에 있는 사람에 의해서도 깨질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교사가 학생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건 당연시 여기면서, 학생이 교사에 대해 기본적으로 인간이 인간에게 지켜야할 것들을 지키지 않는 것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풍토는 분명 잘못 되었다. 한편 교사는 또한 그들이 스스로 인간으로뿐만 아니라 교사로서 본을 보여야 할 것이다. 학부모가 건네주는 돈 십만원에 무너지지 말고, 어떻게 하면 보충수업교재를 채택하면서 부수입을 챙길 수 있을까를 고민하지 말아야 한다. 보잘 것 없는 경제적 수익을 얻고자 교사라는 직함을 팔아넘긴다면 학부모로부터도, 학생으로부터도, 사회로부터도, 그는 경멸의 대상으로 전락할 것이다.

  우리 어머니는 내가 다니던 학교 담임 선생님에게 촌지를 주곤 했다. 나는 그것이 부끄럽고 싫었지만 하지말라고 해도 너를 위한 것이라며 멈추지 않으셨다. 금액은 얼마 되지 않았다. 5만원-10만원 가량이었던걸로 기억하는데, 금액이 문제가 아니다. 촌지를 드리는 엄마도 싫었지만, 촌지를 받는 선생님도 싫었다. 촌지를 드리고 촌지를 받음으로써 나에겐 좋은 선생님 한 분이 사라진 격이 되었다. 고등학교 때도 절대로 받지 않을 거 같던 분이라, 미리 어머니에게 그 선생님에게 드리지 말라고 말했으나, 결국 그 선생님은 받으셨다. 그리고 올곧고 대쪽같으실 것 같은 그 분은 나에겐 믿고 따를 만한 존경스러운 분이셨지만, 받음으로써 더 큰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만약 받지 않으셨다면 나는 그 분을 전적으로 믿고 따랐을 것이고 의지했을 것이다.

  사실 촌지는 지금과 달리 일종의 관행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비리와 부패로부터 벗어나있어야 할 교사들의 촌지관행을 근절시키기 위해 정부와 교육부가 나섰다는건 부끄러운 일이다. 스스로의 자정적인 노력으로서 자신을 단속해야 할 분들이 강제적인 제제와 처벌이 두려워 행위를 그만두었다면 스스로 부끄러워해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남아있는 일부 촌지교사들은 어찌할 것인가. 그들은 부끄러움을 모른단 말인가. 교사로서뿐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포기한 이들이 아직도 적지 않다.  

  한번은 또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 새로 오셨다가 같은 재단 상업고등학교의 여자 선생님과 결혼 후 다른 학교로 가신 분이 계셨는데 이 젊은 선생님 또한 나를 실망시켰다. 젊은 국어교사였던 그 분은 매일같이 실용한복을 입고 다니셨다. 전형적인 대학 운동권의 모습과 생각을 가진 분이었는데, 나의 과외 선생님(나는 당시 그분과 결혼한 여자 영어 선생님 - 이 분은 학교를 그만두셨다 - 한테 과외를 잠깐 받았다)을 통해 국어 과외를 받을 생각이 없는가를 건너 물어오셨다. 그런 분이 아니라 생각했는데 실망스러웠다. 

  이야기가 샜는데 이 책은 곳곳에서 드러나는 모습을 통해 관계에 있어서의 평등을 말한다. 저자 개인의 개인적 경험과 울분으로 쓰여진 인상이지만 비단 그만 경험했을 문제들은 아니고, 보편적으로 논의되고 개선되어야 할 부분을 이야기한다. 읽으면서 자꾸만 나의 개인적 경험이 떠오르는 것은, 그만큼 저자가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교육에 대한 열정이 있고, 교사라는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올곧은 길을 선택한 교사라는 생각이다. 교사지망생으로 그의 열정과 올곧음을 배운다. 같은 공동체를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으로 그의 열정과 올곧음에 희망을 가져본다.


p.s. 이런 열정과 올곧음이 '삼성경제연구소'라는 껍데기로 싸여져있다는게 아이러니하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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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행복 2007-11-27 0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모든 평등 중에서도 학생과 교사의 평등! 을 바래요. 물론 교사간의 평등, 교장과 교사의 평등이 되어야 교사도 기분좋게 학생과 평등을 실현할 기분이 더 들겠지만, 기분따위는 젖혀두고! 그건 필수니까요. 아직도 학생의 가정형편에 따른 차별, 성적에 따른 차별이 횡행하지요. 학생은 나와 동급인 인격을 가진 타자가 아니라 내가 가르치고 명령해야 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문제겠죠. 아, 그러고보니 이건 가정에서도 적용되는 이야기로군요. 저부터 반성하고 민주적인 가정을 위해 노력해야겠네요. 애들은 내가 시키는대로 하는 존재가 아니다!

마늘빵 2007-11-27 08:49   좋아요 0 | URL
네. 교사가 학생을 대할 때도, 학생이 교사를 대할 때도,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기본만 지켜지면 큰 문제는 없다고 봅니다. 하나의 인격체로서 대함에 스스로 잘못한 것이 없는가를 꾸준히 생각해야돼요.
 
한국 교육 거듭나기 SERI 연구에세이 61
박정수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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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 자리가 들어와도 덥썩 하겠다고 쉽게 말할 수 없는 자리가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자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누가 그 자리를 차지하건 교육부 장관 자리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대개는 교육부 장관 개인의 비리나 결점이 드러나 그만두기보다는 자신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커다란 사건으로 인해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던거 같다. 그만큼 한국땅에서 교육은 매우 민감한 영역이다. 무슨 정책을 내놓아도 어디로부터든 욕을 먹는게 '교육' 분야이고, 뭘해도 잘했다 소리 못듣는게 '교육'이다. 지속적으로 안정되게 유지되어야 할 교육 정책이 일 년을 못가서 쉽게 바뀌어버리고 바로 몇 달 뒤 대학입시를 앞 둔 수험생들은 혼란에 휩싸이는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박정수씨는 <한국 교육 거듭나기>에서 한국 교육에 보이는 모든 문제들을 주제별로 분류하고 진단과 처방을 내린다. 고교평준화, 교육자치, 학생평가, 교원임용 및 평가, 학제 개편, 사교육과 공교육, 대학입시, 대학교육의 질적 수준, 지방대학 살리기, 학벌사회 등을 다루는데, 너무 많은 주제를 140쪽 가량 분량에 담다보니 각각의 주제를 그렇게 깊이있게 살펴보지는 못한다. 하지만 교육에 대한 저자의 오랜 고심의 흔적은 엿볼 수 있다. 전반적으로 자신의 전공 분야인 행정학적 관점에서 교육을 바라보고, 정책상의 문제점들, 행정상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해결방안을 제시한다.

  먼저,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픈 것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자율화'라고 할 수 있다. 교육의 커리큘럼이나 학생의 선택에 있어서, 입시에 있어서, 좀 더 자율화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자율화'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흑백논리적 시각이다. 매일 뉴스며 신분이며 보다보니 자연스럽게 자율화 하면, 3불제를 놓고 된다 안된다 치열하게(?) 싸우던 국회의원들이 생각나는데, 그런 시각에서 바라보자면 저자의 입장은 중간이다. 자율화를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협소한 측면에서 접근하지 않는다. 전반적인 교육의 영역에 있어서 자율화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저자는 세계화, 고령화 시대에 평준화 정책은 경쟁력이 없다며 비판하고 나선다. 대학이 대중화되어 대학원이 대학 수준으로 전락해버렸고 그 비용은 학생들이 다 감당해야 하는게 오늘이고, 사회의 수요에 걸맞는 과감한 구조조정으로 대학 갈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분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대학에 가지 않을 사람을 위해서는 실용적인 직업학교를 만들고 그들이 적성을 살려 사회에 나갈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평준화만 붙잡고 늘어지는건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말이다.

  이런 입장이라면 나도 대략 동의한다. 평준화를 붙잡을 것이 아니라 학력에 따른 서열화를 벗어난 다양한 학교들이 생기고 점수에 의해서가 아니라 각자의 흥미와 적성에 의해서 진학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이게 안되니 평준화를 붙잡고 있는 것인데, 방향이 옳고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일단 과감하게 시도해볼 필요가 있다.

  대학 또한 특성화 시켜서 서울대가 모든 학과를 독점하는 현실을 깨야한다. 어느 대학은 의학, 어느 대학은 철학, 어느 대학은 경영학이 커리큘럼도 좋고 교수진도 빵빵하다더라,라는 식으로 분산되어야 한다. 자연스레 그렇게 형성된다면 더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바랄 수 없는 부분이니 인위적으로라도 분산시킬 필요가 있다. 저자 또한 이 책에서 이 같은 주장을 하고 있고, 대학별로 특화된 분야에 집중 투자해야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때 주의할 것은, 각 대학들이 서로 돈되는 학과를 집중양성하려고 할테니, 소외되고 결국 없어지는 학과가 없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 가령 문사철 이라고 불리우는, 국문과, 사학과, 철학과 같은 학과들은 국가차원에서 보호해줘야한다. 이미 내가 대학생이었던 수년전 전국의 몇몇 대학에서는 철학과가 사라졌다. 아예 없애버린 경우도 있고, 문화콘텐츠학과, 교양학부 등으로 이름을 변경해 보존하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사실상 '보존'이 아니라 '소멸'되었다고 보는 게 옳다.

  전에 진중권이 칼럼을 통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되고 우리 애니메이션은 안되는 이유를 아는가, 라면서 그 원인은 기술이 아니라 내용물에 있다고 했다. 어떤 문화산업이고, 드라마고, 영화고, 애니메이션이고 간에 시나리오가 탄탄하고 내용이 좋아야 하는데, 이걸 등한시 한 채 최신 기술만 적용시키려고 하니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먹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국에서 문사철이 사라지거나 소외되고 시대의 부름이라며 업종변경시키는 경우들이 많은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문화콘텐츠가 생겨나고 문화강국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내용의 충실함은 기본 학문과 기본 바탕에서 찾아야지, 변형된 수박껍데기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고등학교 역시 다양한 형태와 다양한 분야의 학교들을 만들어서 선택의 폭을 넓혀주자고 한다. 특목고의 경우 없애려고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대함으로써 들어갈 수 있는 문을 더 열어주자 한다. 저자는 결국 이는 실업학교의 발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 말한다. 현재 실업고 졸업생의 많은 수가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모순된 현실에서 본래의 취지에 맞게 직업교육과 기능인력 양성의 역할을 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사실상 지금의 실업계 학교는 중학교 때 성적이 안되어 어쩔 수 없이 가게 된 아이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그들의 몸이 머물고 있는 곳은 직업학교이지만 머리는 대학을 향해 있다. 이런 모순된 현실에서 실업계 학교가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럴 듯한 주장이지만 전제되어야 할 것은, 특목고는 특목고의 취지에 맞게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특목고가 사실상 하늘대학을 바라보는 학부모와 학생이 머무는 곳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그들이 본래 취지대로 진학치 않고 업종변경(?)해 진학하는 이대로 운영되어서는 안 된다. 진학했으나 중간에 업종을 바꾸고 싶은 사람은 다른 학교로 전학을 시도해야지, 모른 척하고 그곳에 머물며 다른 곳을 바라봐서는 안될 것이다.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애환은 있다. 좋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는 다른 곳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고, 애초 진학할 때부터 꿈꾸던 업종은 해당 특목고와는 상관없는 것이지만 눈감고 머무는 경우가 태반일 것. 그래서 좀 더 다양한 학교들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성적에 따라 줄지어진 학교 등급 시스템이 아니라 취향과 흥미에 따라 구분된 시스템으로. 너무 이상적인 바람일까.

  이 얇은 책에서 저자는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꺼내놓고 있어 일일히 모두 언급하기는 어렵다. 전반적으로 저자의 입장은 자율화에 닿아있고, 그가 주장하는 바에는 대략 큰 틀에서 동의하지만, 자율화의 난점을 너무 언급하지 않는 경향도 보인다. 자율화를 우려하는 건 경쟁 체제를 부추기고 서열화를 더더욱 굳건히 할까봐서다. 본래의 의미대로 자율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신자유주의 체제로 둔갑하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 걱정이다. 그래서 자율화를 말하려거든 예상되는 난점을 모두 언급해야 하고, 온전히 자율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여러 장치를 구비해야 한다.

  교육이 현재 엉망인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어떻게 바꿀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쉽게 답할 수 없다. 그만큼 민감하기 때문이고, 정책 하나가 누군가의 미래를 쉽게 뒤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를 따지고 들면 한도 끝도 없다. 여기에 나온 문제는 그 중 굵직굵직한 몇 가지일 뿐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끝도 없이 나올 것이다. 안 된다고만 고집하지 말고, 잇속 챙길 목적으로 개방하자 하지말고, 우선 터놓고 바람직한 방향 설정에 대한 대화가 오가야 할 것이다. 원초적 입장에서 당사자들간의 최초의 합의를 이루지 못한다면 현 상황을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너무 뻔하고 이상적인 말이긴 하다. 하지만 모든 것은 이상을 꿈꾸는데서부터, 이상에 대한 합의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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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1-27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아이들 세 명을 특목고(한 명은 과학고, 두 명은 외고)에 보냈었습니다.
특목고 선생님들은 참 훌륭하셨지요.
선생님으로서의 자부심과 걸맞는 실력을 갖추고 계시더군요.
각지에서 모인 아이들역시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학습열의가 충만함을 감지할 수 있었답니다.
실력있는 선생님과 역시 뛰어난 아이들이 모인 학교에서 아이들의 실력이 죽죽 신장하더군요.
문제를 놓고 선생님과 학생들이 질문과 토론을 통해 해결하곤 했지요.
참 좋은 교육체제였답니다.
한국의 현실에서 비교적 이상적인 학교들이었답니다.
그런 좋은 학교를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옥죄는 한국의 현실이 서글픕니다.
네째 아이는 특목고에 가해지는, 갈수록 심해지는 핸디캡이 마음에 걸려 일반고등학교를 보냈답니다.

결과적으로 네째 아이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이 아이가 자질면에서는 가장 뛰어난 편이지요..)
특목고에 다녔던 아이들보다 객관적인 실력면에서 처집니다.
현행의 한국 대입평가제도에 맞추느라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으니..
참 안타까운 한국의 현실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아이들에게 국가차원에서 핸디캡을 주는 나라는
아마도 세계에서 한국이 거의 유일한 나라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하

특목고에서는 선생님들의 밸류에 대한 평가가 자율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첫째는 특목고를 지원하는 선생님들을 교육청에서 평가합니다.
그렇게 선정된 선생님들이 특목고에 가게 되면 두번째 평가가 기다립니다.
학생들이 선생님의 실력을 평가합니다.
학생들을 가르칠 능력이 부족한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평가를 견디지 못합니다.
아이들이 자신들의 질문을 감당하지 못하는 선생님은 평가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그 선생님께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습니다.
실력있는 선생님들은 화장실에 갈 시간이 없을 정도로 아이들이 쉬는 시간에
끊임없이 질문합니다.
사실 이 부분이 더 무섭고 가혹하지요.
그렇게 특목고의 선생님들의 수준이 유지됩니다.


마늘빵 2007-11-27 11:10   좋아요 0 | URL
특목고가 본래의 취지대로 운영된다면 괜찮겠지만, 오늘날 현실을 보면 그렇지 못한 것이 사실인지라 핸디캡이 주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똑같이 기회가 주어졌고, 누구는 공부를 잘해서 특목고에 가고, 누구는 공부를 못해서 일반고등학교에 간다고 해서, 공정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특목고가 일반고보다 상대적으로 모든 여건이 나은 상황에서, 학생들은 3년간 더 많은 혜택을 받고, 좋은 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고, 다른 아이들은 비록 그들이 공부를 더 못해서 일반고를 가게 됐지만, 그렇지 못한 환경에서 공부하게 됩니다. 이렇게 3년을 지내고 대학입시에 응하는 두 학생이 같은 선상에 놓여있다고 보기는 힘들 것 입니다. 그래서 특목고에 핸디캡이 주어지는게 아닐까요.

본래 취지대로 과고는 과고의 목적대로, 외고는 외고의 목적대로 운영되고, 학생들이 본래 취지에 맞게 진학할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구분해서 핸디캡이 부여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상 그들은 그들대로 하소연할 수 있습니다. 더 좋은 교육 환경을 원했을 뿐인데 본래 취지대로 진학치 않는다고해서 핸디캡을 주는건 너무 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특목고를 제외하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음'을 이유로 들지만, 그만큼 또 혜택을 받았으니 핸디캡 역시 어쩔 수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는 그들보다 수혜를 받지 못하는 나머지 학생들에 대한 배려차원으로 보여집니다. 물론 공부를 못하는 학생을 대학에 입학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입학하고도 적응하지 못하는 상업고, 공업고 학생들에 대한 배려는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상업고, 공업고는 본래의 취지가 대학입시가 아니라 직업교육에 한정되어야 하는 것이 사실이고요. 그러나 일반고등학교의 경우는 다르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같은 조건에서 생활한 학생이라면 동일하게 취급받아야겠지만, 그렇지 못하니 배려가 필요하단 거겠지요.




비로그인 2007-11-27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부분의 학교를 정상 학업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퇴행시켜놓은 채,
정상적인 교육이 이루어지는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비정상적인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핸디캡을 준다는 것이
과연 교육적인 면에서나 상식적인 면에서 공정한 일일까요?
저는 난센스라고 생각한답니다. 아프락사스님.


마늘빵 2007-11-27 19:50   좋아요 0 | URL
한사님의 심정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시는건 어떨까요. 자녀도 없고, 오로지 나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만 바라봤을 때, 과연 어떤 것을 원할 것인가, 를 생각해보면 달라지지 않을까 합니다. 롤즈의 <정의론>에 등장하는 원초적 입장에 처한 당사자들로 돌아가보는거에요. 저는 항상 어떤 문제를 판단할 때 처음으로 돌아가보려고 하는데 롤즈는 그것을 원초적 입장이라고 말하더군요. 나의 이해관계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떠나서 오로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만 판단을 하는거죠. 그렇지 않더라도 일반고등학교 학생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봐도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합니다.

여건이라는 것 안에는 아마도 공부를 많이한 능력있는 선생님 말고도 열심히 하는 친구들, 또 학교 환경, 토론과 토의 위주의 수업 등등도 포함되겠죠. 이런건 '정상 이상의 것'이라고 보는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일반 고등학교에선 바랄 수 없는 것들이고, 채워줄 수 없는 부분들이죠.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겠지만, 일반고등학교를 제로 기준점에 놓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일반고등학교의 교과과정과 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는 점은 별개로 논의를 해야할거 같아요.
 
한국 교육 거듭나기 SERI 연구에세이 61
박정수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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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정부는 사회의 수요에 걸맞은 과감한 구조조정을 통해 대학에 가야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엄격하게 분류하는 교육 시스템을 마련하여 교육 과잉이 가져오는 비극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는 다른 선진국처럼 실용적인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경쟁력 있는 직업학교를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 반드시 대학 교육이 아니더라도 각자가 적성을 살려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평생교육의 제도적 장치를 구축하고, 이를 정책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19쪽

그러나 일년에 한 번 국가적으로 치루는 시험에서 대대적인 부정이 행해지고, 휴대전화, mp3 소지만으로 다음 해 입시 자격까지 박탈하는 현실은 한번의 대학입시로 한 사람의 인생 행로가 판가름나는 학력만능주의 사회의 폐단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현행 평가제도는 학생에게 능력 신장의 기회를 주기보다는 점수에 따른 우열 가리기, 한 줄 세우기라는 부정적인 인상을 지울 수 없다. -62쪽

수능 본래의 취지는 학생이 대학에서 수학할 능력이 있는가를 진단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능평가체제에는 학생의 적성이나 특성을 들여다볼 수 있는 내용이 결여되고 있고, 본래의 취지와는 다르게 대학에서의 수학능력을 예측하는 기능보다는 학생을 대학에 배치하는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제 7차 교육과정에서는 이러한 수능의 단점을 보완하는 차원에서 각 대학에서 수능 점수에 상관없이 학생을 선발하는 특별전형의 개념이 도입되었다. 평가자에 대한 신뢰만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면, 현재의 획일적인 평가방법에서 벗어나 다양한 평가 능력을 지닌 학생들 각자의 개성과 재능을 제대로 평가하고, 교육을 정상화시키는 제도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정부는 2008년도부터 대학입학 수능평가체제에서 내신의 비중을 높이고, 대학의 논술과 면접 점수 비중을 높이겠다고 발표했다. 고교 3년간 학생을 꾸준히 지켜본 교사의 평가를 중요시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교사의 평가를 중심에 두고, 수능은 본래 목적에 맞게 기본적인 수학능력을 갖췄는가를 진단하는 수준에 머물러야 한다. -64쪽

학교 교육 자체가 대학입시라는 선발 평가에 예속되고, 학생들의 학습목표는 대학입시에 맞춰져 있다. 대학입시에서 수능이 주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한 중고등학교 교육과정은 거기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단위학교는 교육을 위한 평가가 아닌 수능을 위한 평가, 평가를 위한 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시험으로 학생을 평가하려면 지금보다 헐씬 더 구체적이고 세심한 방식의 평가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험에 대한 인식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학과 성적뿐 아니라 적성과 잠재력까지 판단하고 평가할 수 있는 시험, 단순한 선발기제가 아닌 학생에게 능력 신장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시험으로 인식될 수 있어야 한다. -65쪽

우리는 지금의 평가방식에 대수술을 감행해야 한다. 창의력과 문제해결능력, 리더십을 요구하는 지식사회에서 객관성 확보나 성적 처리의 편의를 이유로 낡은 평가 방식만을 고집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고전적인 평가방법에만 매달리지 말고 현실적인 어려움이 따를지라도 이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시험성적만으로 학생을 평가하고, 그것이 입시뿐 아니라 사회적인 성공을 보장하는 현실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시험점수는 점수일뿐인데 그것을 한 사람의 인격, 노력, 실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다. 한 줄 세우기를 위한 시험이 아닌 학생 각자가 스스로를 평가하고 발전의 계기로 삼을 수 있는 시험, 시험을 통해 배움이 가능한 시험이 되어야 한다. -66쪽

교육현장에서 선택형 평가와 같은 선발형을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수행평가와 같은 충고형 평가를 택할 것인가는 주어진 상황에 따라 어느 정도 선택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21세기 지식정보화 시대를 맞이하여 교수 학습의 질을 개선하고, 학생들의 다양한 개성을 존중하며, 창의성이나 문제해결능력 등 고등사고기능을 신장시키고, 학생 개개인의 전인적 성장발달을 돕기 위해서는 수행평가와 같은 충고형 평가제도의 정착이 요구된다. -67쪽

자질 부족 교원에 대한 검증은 필연적인 사회적 요구다. 교원평가체제는 학생의 학습권 보호 차원에서 새롭게 정립되어야 한다. 교원평가체제가 교원의 승진 여부 평가도구롬나 운용되어서는 안 되며, 교원의 저문성 촉진과 발달 기능을 포함한 포괄적이고 적극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현행 교원평가는 정보 제공 경로가 막혀 있어서 학교조직운영의 효과성을 증진하고, 조직을 발전적으로 이끄는 데 활용되지 못하고 행정적, 재정적 낭비만 초래했다. 평가 결과는 학교의 효과성 증진을 통한 교육의 질 개선에 활용되기보다는 과열된 승진 경쟁의 풍토 속에서 발생할지도 모르는 각종 인사관리상의 잡음을 차단하기 위한 통제적 수단으로 이용되어왔다.

이로 인해 교사들 사이에 교원평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확산되었고, 결국 교원들의 의식구조를 왜곡하여 평가 자체를 적대시하는 풍토를 만들어냈다고 하겠다. -71-72쪽

하지만 학교 내신과 대입 준비를 위해 기존의 사교육은 그대로 유지한 채 EBS 수능방송을 플러스알파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고3의 현실이다.

따라서 공교육의 수준을 높여가면서 사교육은 부수적으로 활용되도독 유도하는 게 이상적인 방법일 것이다. 학교교육만으로 충분하다면 자연스레 사교육을 찾는 학생들이 줄어들 것이다. 현재와 같이 단기적 대책만 앞세운다면 학생들의 부담만 가중된다.

지방의 몇몇 학교에서는 원어민 교사, 컴퓨터 강사, 예체능계 전문가를 초빙하는 등 지역 실정에 맞게 프로그램을 개발, 편성하고 있다. 사교육비를 줄이겠다는 학교 경영자의 확고한 의지와 교사와 학부모의 의식전환이 필요하다. 양질의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학생들의 호응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내용이 투여되면 사교육은 차츰 줄어들 것이다. -83-84쪽

중요한 것은 문제해결력을 기르고, 자기주도적인 학습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이에 걸맞게 교육과정의 양을 대폭 줄여 학생들의 부담을 줄이는 쪽으로 교육과정을 개편해야 한다. 이때 교사에게 교육내용과 평가의 재량권을 부여하면 사교육비 경감의 효과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학교 교육의 내실화를 위해서는 교육여건 개선을 통해 모든 학교의 수준을 전반적으로 향상시키면서, 동시에 학교 간 격차도 완화시키는 '상향평준화'를 실현해야 한다. 모든 학교에 동일한 교육과정, 교사 기준, 학생선발방식을 요구하던 기존의 획일화된 평준화정책에서 탈피하여 학교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인정하되 모든 학교에 일정 기준의 책무성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정책 전환을 검토해야 한다. -84-85쪽

수능시험의 변별력을 강조하는 대학 측의 주장에도 타당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변별력은 대학별 전형 과정에서 확보할 수도 있는 것이므로 수능시험은 고등학교에서 배워야 할 내용을 제대로 배웠는가에 대한 기초적인 평가로 이루어져야 한다. -92쪽

입시철마다 입학전형료 수입으로 잔치를 벌이는 사립대학들, 이제 적절한 입시 시스템 마련을 위한 투자에 관심을 기울이자. 지금까지의 대입제도는 학생선발기준으로 성적을 내세웠는데, '성적'이 학력의 순서를 정하고, 상위에서 하위까지 일렬종대로 서열화하는 문제가 파생되면서 이러한 대입제도는 더 이상 합리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신뢰할 만한 현실적인 학생선발기준은 무엇일까? 우선 학생들이 창의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 환경을 고려한 평가 기준, 결과보다 과정을 통해 학생의 자질을 평가하는 기준을 생각해야 한다. -94쪽

학벌이란 특정한 학교를 나오거나 특정한 학파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조성하고 있는 파벌이다. 이 특정 그룹에 속해 있으면 개인의 능력과 무관하게 사회,경제적인 처우가 달라진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며, 이는 현대판 신분제라고 말할 수 있다.

... 중략 ...

여기서 나온 결론을 종합해보면 비명문대 출신 학생들이 사회적 불평등을 겪고 있는데, 이러한 불평등을 겪는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비명문대, 지방대라는 이유로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에 나와서 취업할 때 겪는 문제로부터 학벌문제는 시작된다. 이들이 천신만고 끝에 사회에 진출하더라도 내부에서 승진을 할 때 또 한 번 불이익을 받게 된다. 집단의 능력을 동일시해서 A라는 대학을 나온 학생들은 모두 동일한 능력을 갖고 있다고 간주하는 학벌 내지 학벌주의 현상에서 탈피해야 한다. -111-112쪽

대학이 경쟁력을 가지려면 학생들이 경쟁적으로 공부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전공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 또한 학벌이다. 예컨대, 명문대에 입학한 학생들은 어쨌든 졸업이 보장되기 때문에 학과 공부를 열심히 할 인센티브가 없다.

반면에 하위권 대학 학생들은 졸업을 해도 취업이 어렵기 때문에 입학하자마자 상위권 대학으로의 편입시험을 준비하거나 공무원시험, 토플 등을 준비하므로 대학 강의실이 공동화되어 있다. 대학교육이 공동화되어있는 마당에 기업 움직이듯 대학을 움직인다고 경쟁력이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교육문제는 초중등교육 안에서 혹은 대학 안에서 풀 수 있는 성격이라고 보기 어렵다. 바깥의 힘인 학벌, 학벌주의, 대학 서여레제가 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거 풀어야 보통교육의 정상화나 대학교육의 경쟁력을 얘기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될 것이다. -113쪽

"학생들의 내면에서 최선의 것을 이끌어내는 것, 바로 이것이 진정한 교육이다. 진정한 교육은 별로 필요하지도 않은 정보를 학생들 머릿속에 억지로 채워넣는 방식으로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 그런 식의 교육은 오히려 학생들의 독창성을 파괴하고 학생들을 단순한 기계 부속품으로 전락시키는 참으로 쓸모없는 짓이 될 뿐이다." (마하트마 간디, <간디, 나의 교육철학>. 고병현 역, 문예출판사) -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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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1-26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재 중소도시 기준으로 평준화 고등학교의 내신교육과 그에대한 평가는
딱할 정도로 무의미한 수준입니다. 단편적 지식들을 교육하고 그것을 평가합니다.
수능평가는 그것보다는 조금 낫습니다.
수능과 내신.
"별로 필요하지도 않은 정보를 학생들 머릿속에 억지로 채워넣는 방식"
간디옹의 말씀대로이지요.
아이가 트라이한 한양대의 자연계 논술은 문제가 꽤 좋더군요.
아이의 과학적 소양을 수준별로 제대로 평가할 수준있는 문제가 출제되었습니다.
한양대 이과 교수들의 능력을 다시 보게 되었답니다.
최소한 3년간을 투자한 보람을 느낄 만큼 평가의 방식도 성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늘빵 2007-11-26 17:49   좋아요 0 | URL
저 역시 현행 학교 교육이 단편적 지식을 주입하고 암기토록 한다는데 대략 동의합니다. 그런데 이게 교과서 구성이 그렇게 되어있고, 안에 있는 내용을 가르쳐야만 하는 교사 입장에서는 어쩔 수가 없더라고요.

교과서 자체가 주입식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내신시험은 그 안에서만 낼 수 밖에 없어요. 다른데서 뽑아와서 내거나 생소한 지문을 던져놓으면 아이들의 불평불만이 이어지고, 아마도 열혈 학부모들은 시험문제에 대해 항의를 하거나 하겠죠. 가르치지 않은 내용이 나왔다고.

학교 입장에서도 이런 불만을 접수할 가능성이 있는 쪽을 선택하느니, 그냥 무난하게 '교과서 중심으로' 따를 수 밖에 없고요. 심지어는 수행평가까지도 자율적으로 하기 무섭습니다.

수능은 자격고사로 하고, 내신은 일단 교과서부터 좀 자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해서 암기식, 주입식 수업과 시험을 벗어나야 한다고 봅니다. 근데 수능을 자격고사화했을 때의 문제점이 이번 대입의 상황과 같겠죠. 그것 외에 별다른 판단기준이 없는 상황에서, 등급제 안개 안에 갇혀버린 형국이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논술 고사를 선호합니다. 수행평가에서도. 근데 논술 답안을 평가하는 기준 역시 정해져있다고는 하나 매우 주관적이죠. 그래서 또 문제가 되고. -_- 하다못해 중학교 수행평가로 논술을 보더라도 왜 자기는 이것 밖에 못받느냐고 따지러 오는 애들이 꽤 있습니다. 그럼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죠. 그래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긴 마찬가지에요.

 
학교에서 평등을 말하다 SERI 연구에세이 51
곽해룡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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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연이 강한 학교사회에도 신선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서울 D고에서는 교사들의 출신대학별 모임이 자진 해체됐다. 학연이 직장 분위기를 해친닫는 인식 아래, 1년에 몇 차례씩 모이던 동문 회동을 구성원의 합의하에 해산했다는 소식이다. 학교장이 앞장서 자신의 출신대학 모임을 부추긴 경우와 얼마나 대조되는가. 교사들의 이러한 자정 노력이 확산되었으면 좋겠다.-44쪽

늘 예외적인 특별 대우를 원하는 사회, 공정한 경쟁보다는 불공정한 논리가 일상적으로 적용되는 환경에서 자란 학생들은 공정한 게임에 익숙해지기 어려울 것이다. 준법정신을 말로만 떠들고 실제로 법을 지키는 사람은 바보 취급당하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58쪽

왜냐하면 학교는 교사의 권위에 도전하는 학생에게 실제로 여러 가지 불이익을 줄 수 있는 규율 사회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전보다 학생들의 자기주장이 강해져 교사의 영향력이 다소 약화된 감이 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는 교사가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입시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학생과 학부모에게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때로는 이러한 말들이 부메랑이 되어 학부모나 학생들이 교사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역이용되기도 하고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미명이나 명분을 벗긴 실체는 보잘것없는 경제적 욕심에 불과할 때가 많으며, 이를 눈치 챈 학생들에게 교사는 경멸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62쪽

요즘 아이들은 사람보다는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컴퓨터에 애착을 느낀다. 나와 생각이 다른 친구와 어울리면서 말다툼을 벌이기보다는 내 맘대로 되는 컴퓨터와 친구하는 편이 낫다고 여긴다. 인간 친구의 중요성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학교에서도 친구와의 의견 조정을 통한 협력을 기피하고 각자 자기주장만을 내세워 상호간에 소통이 어려워지고 있다. 게다가 현 입시 제도의 부정적 측면인 개인별 경쟁을 부추기는 경향으로 인해 친구 없는 아이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마음을 털어놓을 친구 하나 없이, 온종일 컴퓨터만 가지고 노는 자폐적인 아이들이 늘어가고 있다. 놀이와 생활을 공유하는 또래집단의 의미가 약화, 변질되고 있다.-75쪽

"만남이 교육에 선행한다"는 볼노의 말처럼 교육 이전에 '어떤 학생'이 '어떤 교사'를 만나 둘 사이에 '어떤 관계'가 형성되었느냐 하는 것이 교육의 수준을 결정하고 인생의 방향을 좌우한다.

사제 간의 인격적 만남은 질적인 교육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필요조건이다. 인성 교육을 배제한 지식교육은 그 효과가 의심스러우며, 지식을 탐욕 추구의 도구로만 사용하는 '불량시민'을 양성할 위험성이 높다-85쪽

학생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거나 자신이 부모의 결정을 무조건 따르는 의존적인 인간이라고 고백한다. 따라서 스스로 판단하여 신중하게 선택한 것을 추구하면서 느끼는 성취감의 진수를 맛보지 못하고 있다. 교사는 학생들이 스스로 선택하고 자신의 선택에 따른 수고를 기꺼이 감당하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86쪽

교사 평가의 궁극적인 목적은 정체와 매너리즘에 빠진 교직 사회를 자극하여 교사의 자질 향상 및 교육에 대한 교사의 적극성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정한 평가 기준과 객관성을 담보하지 않은 상태에서 평가를 강행하는 것은 교육적 목적 보다는 다른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게 한다.-1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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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1-26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생과 학부모들이 바라는 선생님은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아이에게 필요한 기초적 지식을 잘 가르쳐 주는 선생님입니다.
간명하지요. 또 그런 선생님들이 실제로 많이 계십니다.
정치적인 관점은 전혀 관련이 없지요.
부족한 선생님들께서 자위책으로 정치적 관점을 내세우는 것 같습니다.
동문서답인거 같아서 딱하답니다.
아이들이나 부모들이 학교를 선택할 수 있는 체제도 아니고..
군소리 말고 주는대로 받아 먹어라인 것만 같답니다.

하는 수 없이 안되는 학교, 도저히 안되는 선생님들의 교육에 절망하고
학생과 학부모들은 유학을 가거나 학원에 가거나 과외를 받거나 합니다.
한국의 교육 현실은 정말 참담한 지경입니다.
아프락사스님.


마늘빵 2007-11-26 17:58   좋아요 0 | URL
교사평가제에 있어서 여러 문제가 생길 거 같은데, 평가를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상황이 뒤바뀔 수 있기 때문이에요. 교장이 하면 교장에게 아부해야하고, 학부모가 하면 평소 학부모에게 잘 보여야하고, 학생이 하면 학생에게 수업내용과는 상관없이 인기를 받으려고 잘 놀아주는, 또 점수도 막 퍼주는 상황을 피할 수 없어요. 대학에서도 교수평가를 하면서 학점이 짠 교수들은 상대적으로 짠 평가를 받게 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목격하죠. -_- 평가는 참 어렵습니다.

사실상 교사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어디에도 얽매이거나 구속되지 않고. 하지만 영 부실한 교사들이 많다보니 그들을 어떻게든 걸러내고 개선시키고자 이런 평가를 기획하는 것이고, 멀쩡한 다른 교사들과 그렇지 않은 부실한 교사들이 함께 거부권을 행사할 수 밖에 없는 형국을 만들고 있는거죠. -_-

저는 아직 정식 교사도 아니고, 실력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실력있고 인격적으로 괜찮은 교사라 할지라도 이런 평가는 매우 거북스러울 거 같습니다. 내가 멀쩡하니 그래 평가를 받자, 가 아니라, 나를 교단에 세웠으면서 믿지 못하고 평가하려는 것을 거부하는거죠. 어느 쪽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아야 자율적으로 독립적으로 제 스스로가 생각하는 올바른 방식으로 학생들과 관계 맺을 수 있을 거에요.

이와는 별개로 다른 말인데, 저는 학부모와 학생에게 학교를 선택하게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그 이전에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원하는 다양한 학교의 신설이고요. 외고를 원하면 외고에 보내주고, 컴퓨터고를 원하면 컴퓨터고에 보내주는 식으로. 중학교 전체 성적으로 기준을 나눌 것이 아니라, 그쪽에 재능이 있고 간절히 원하는가가 우선시 되어야 할거에요. 가령 외고를 희망하는 학생은 외국어 성적과 국어 성적 등을 기준으로 나누고, 컴퓨터고 쪽은 실기시험을 보거나 컴퓨터 교과 성적을 기준으로 삼으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