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스 & 매킨타이어 : 정의로운 삶의 조건 지식인마을 23
이양수 지음 / 김영사 / 2007년 9월
장바구니담기


원초적 입장은 말하자면 일종의 생각을 통해 각각의 입장의 우열을 가려보자는 것이다. 실제로 현실의 얽히고설킨 이해관계 속에서 어떤 입장이 다른 입장보다 나은지를 가려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우열을 가리기 위한 가장 단순한 방법은 모든 조건을 동일하게 하고, 그 조건하에서 어떤 결정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 결정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우월함을 보여줄 수 있는 기준과 절차이다. 그래서 원초적 입장은 현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 속에서 이루어지는 가상적인 실험일 뿐이다. 그러나 이 가상적인 사유실험이 중요한 이유는 현대의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공리주의 정의원칙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그보다 우월한 정의원칙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35-36쪽

개인마다 삶의 목표와 계획은 다를 수밖에 없고, 그것은 어떤 객관적인 잣대로 그 우열을 가릴 수 없다.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삶의 가치는 모두 나름대로 '합리적이다.' 즉, 각각의 개인들은 모두 상이한 자기 나름대로의 합리성을 지니고 있고, 바로 그 때문에 인격적으로 존엄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합리성의 차이가 인간의 삶에서 근원적인 갈등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인간들은 갈등한다. -51쪽

민주주의 사회란 각자의 의견과 개성을 존중하는 가운데 능률적이고 생산적인 사회관계를 모색하는 체제다. 당연해 보이는 말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모순투성이다. 능률적인 생산체제가 되기 위해선 어느 정도 개인의 희생이 필요하며,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려면 생산적인 사회체제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62-63쪽

정의에 관한 우리의 직관적인 믿음은 무엇인가?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어떤 원칙이든 보편성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보편적이란 자기의 선입견이나 이해관계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과 함께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흔히 이성적으로 말할 때 쓰는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만한'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사회제도의 정의로운 원칙은 무엇보다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사회의 정의원칙은 사회 성원들의 선택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점이다. 도덕적으로 승인할 수 있는 정의원칙은 우리의 도덕적 평가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다만 이때 중요한 것은 도덕적 선택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공정한 상황이다. 굳이 공정한 상황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공정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이미 도덕적인 선택의 기회가 박탈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덕적 평가를 위해서는 공정한 상황 못지 않게 공정한 절차의 수립 또한 중요하다. 공정한 상황에서도 절차가 공정하지 못하면, 얼마든지 잘못된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정의원칙의 도덕적 선택은 원칙적으로 공정한 상황과 공정한 절차를 요구한다. -67쪽

한 사람이 공리적 이유로 윤리적 판단을 했다고 해도 도덕적으로 비난할 근거는 없다. 그 사람의 도덕적 사유의 자율성을 훼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판단이 사회적 판단의 정초라면 상황은 전혀 다르다. 사회적 판단은 한 개인의 동의가 아닌 사회 성원 모두의 동의를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104쪽

롤스의 출발점은 철저히 현대 사회가 당면한 현안들이다. 더욱이 그 해결 방법은 사회의 부당한 관행과 정의롭지 못한 제도를 철폐함으로써 그 사회에 살고 있는 개인들이 진정으로 사회 협동을 이룩하면서 자신의 것을 찾아가도록 제도적 뒷받침을 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 사회가 바람직한 방향, 즉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길을 비춰줄 수 있는 일종의 횃불이었다. 물론 이 횃불이 구체적인 제도와 관행의 문제점을 드러내기엔 역부족일 수 있다. 그러나 롤스는 방향성의 제시만으로도 사회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폭력적인 사회를 혐오하는 것도, 그 절차의 비민주적인 측면을 부정하는 것도, 정의와는 다소 거리감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롤스의 해결책은 유토피아적인 색채가 강하다. 그러나 그는 정의원칙을 구현하는 방향으로 진행하다보면 결국 유토피아가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바로 그 때문에 그는 자신의 이론을 실현 가능한 것이라 생각했다. -109-110쪽

공리주의의 실질적인 문제는 사실 사회가 수많은 개인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혀 다른 개성과 삶에 대한 믿음이 있다는 점을 잠시 잊고 있다는 데 있다. 개인의 개성이 다른 만큼 그 생각의 차이도 크다. 이 같은 차이는 민주주의 사회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다원성의 핵심이며 동시에 그것은 사회생활의 공통전제다. 그러나 공리주의자들은 이 같은 생각의 차이보다는 모두에게 통용될 수 있는 공평하고 불편부당한 개인의 판단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에는 물론 근대 과학적 사유의 전형이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우리의 이성을 통해 자연법칙을 알아낼 수 있듯이, 사회와 인간관계에 관한 법칙도 이성을 통해 알아낼 수 있다는 낙관주의가 깊게 뿌리박혀 있다.

-118-119쪽

(위에 이어서)

그러나 이와 같은 사유는 각 개인들이 상이한 개성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그 개성의 차이가 사회협력 과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보지 못한다.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대우하는 것은 분명 이상적이다. 그러나 이상적인 사횐는 사실 어떤 생산적인 활동도 없다. 모두가 같은 능력,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상상해보라. 아무것도 나아지는 것이 없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롤스는 사회협력을 위해 어느 정도의 불평등은 용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만 이런 불평등을 용인할 수 있는 제한선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제1 정의원칙을 충족시키면서도, 각 개인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공정하게 부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기회가 공정하게 부여되지 않는 경쟁에서 그 자신만의 고유한 능력과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119쪽

매킨타이어의 주장에 따르면 원초적 입장은 일종의 개인의 태도변화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장치다. 이 장치 안에서 각 개인은 자신의 이익이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타인에게 용인받을 수 있는 관점에서 모든 사안을 판단할 것이다. 자신의 이해관계로부터 벗어나 타인의 관점을 이미 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쉽게 동의를 얻을 수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 각종 사회 제도의 근간이 될 분배정의의 원칙을 찾을 수 있다.

... 중략 ... 특히 미완성적 인간이 삶을 통해 자신을 완성시켜가는 '배움의 과정'과 '인격완성'의 시간은 상대적으로 저평가될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삶의 완성은 근대인의 이상과 다르게 오직 타인과 더불어 사는 삶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더불어 사는 것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룩하는 것이고, 공동체 없이 어떤 윤리적 삶도 가능하지 않다. -145쪽

롤스는 분명 이런 형태의 덕(밑줄그은이 주 : 습관적 행동을 통해 가꿔나가는 덕)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인간 행위의 정의로움을 직접적으로 평가하기가 어렵기도 하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제도가 인간의 행위에게 영향을 미치는 파장이 한 개인의 도덕적 삶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제도의 정의로움이 인간 행위의 그것보다 중대하다. 이런 점에서 개인의 행동과 그 실천적 덕을 추종한 덕 철학보다는 개인과 사회제도와의 관계에서 정의문제를 고찰하려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롤스는 정의개념을 결국 개인과 사회제도를 연결시켜주는 핵심 개념으로 본 반면, 매킨타이어는 이러한 연결고리가 매우 추상적인 인간을 전제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결국 그 강조가 서구 근대철학의 전통을 전적으로 수용한 결과라고 말하고 있다. -148쪽

롤스의 가정은 옳음의 관점이 각 개인의 삶의 구체적 내용과 방향을 제어해야 한다는 것이고, 매킨타이어의 가정은 그 옳음의 관점이 보편타당한 영원의 진리라고 할 수 없으며, 오히려 구체적인 가치를 통해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인간들의 삶의 방식 속에서 정당화된 합리성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151쪽

사회 재와의 불평등 문제가 사회악의 근원이라는 생각은 개인의 도덕적 완성보다도 사회제도가 정의로워야 한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 보다 중요한 것은 사횢데도가 정의롭지 않고도 과연 그 사회제도에 얽매여 살아야 할 사람들이 정의롭게 살 수 있는가의 여부이다. 분명한 것은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서 정의로운 인간은 더욱 그리워진다. 그러나 사회 속에서 정의로운 인간이 되기란 쉽지 않다. 때문에 롤스는 만일 사회가 정의로울 수만 있다면, 비록 도덕적으로 완성되지 못한 인간들도 별 다툼없이 사이좋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 나아가 정의로운 사회의 제도가 인간 삶을 제대로 규제할 수 있는 사회를 꿈꾸었다. 사회악을 송두리째 뿌리 뽑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일관된 정책이 필요할지라도 말이다. -153-154쪽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들은 우리 생활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자신과 관련된 모든 조건을 잠시 잊고 오로지 사회가 필요한 이유와 인간에게 필요한 것들을 생각하면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정의원칙에 도달할 수 있다. 좀 더 단순하게 말해, 원초적 입장은 모든 사람들이 돋거적 관점에 들어설 때 가능한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원초적 입장은 도덕적 관점을 대변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롤스의 원초적 입장의 사유실험은 일상생활의 이해관계에 갇혀버린 개인들이 사회생활에 필요한 관점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사실 인간의 도적적 능력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이다. 자기 욕망에 갇혀 타인을 자기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 것을 포기하고, 타인을 진정한 타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도덕적 삶인 것처럼, 원초적 입장은 사회의 필요와 그 효율성을 위해 조정해가는 원칙을 도덕적 관점에서 추론하여 동의를 구하는 과정이다. -154-155쪽

법치주의는 각 개인이 지닌 윤리적 선택의 중요성을 도외사할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법은 인간의 삶에 대한 일반적인 상황을 언급한 것이지 구체적인 인간들이 행해야 할 행동규범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 던지는 의사의 선의의 거짓말을 법으로 금지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엄밀하게 말하면 법은 우리 삶의 일반적인 방향성을 언급할 뿐이지, 특정 상황에서 특정 인간이 다르게 행동할 여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의 윤리적 선택과 행동은 사실 모호한 상황과 이유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점에서 상황에 맞는 윤리적 행위를 하는 습관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160쪽

"과연 원초적 입장의 관점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가?"

이 물음 속에는 강한 거부의 메세지가 담겨있다. 이상적인 인간 관점의 전횡을 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규범으로, 형식으로 보여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규범은 무엇인가? 단순히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지시하고 있지 않을까? 매킨타이어 입장에(서) 보자면 도덕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잘못되었다. 도덕규범을 찾으려는 근대의 도덕적 질문은 '무엇을 해야마 하는가?'였다. 이 물음은 개인의 도덕적 정체성의 물음을 제기하지 않는다. 항상 도덕적 행위의 근간이나 원칙을 묻게 된다. 사회규범이 무엇보다 우선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매킨타이어는 반문한다. 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가? 이 물음을 통해 매킨타이어는 누구나 보편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도덕적 행위의 원칙보다는 도덕적 행위를 할 사람의 도덕적 성품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분명 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 인격적인 성품이고, 이 성품이 그 사람의 유덕함과 어떤 연관이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162-163쪽

매킨타이어에 따르면 지금 우리 상황에서 요구되는 도덕적 논의는 도덕적 성품을 지니고 사회의 가치를 바꾸어가려는 인간들의 육성이다. 서구의 전통에서 보자면, 이러한 도덕적 이상의 완성은 서구 근대성과는 다른 전통에 호소할 때 가능하다. 그 전통에 의하면 도덕적 인간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올바른 행위를 할 수 있는 유덕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다. 도덕적 인간에게 중요한건 구체적인 상황에서도 올바른 행우를 할 수 있는 능력과 관행이지, 단순히 불편부당한 관점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롤스 철학의 문제점은 지나치게 서구 근대성의 합리성을 강조하는 데 있다. 도덕철학에서 잃어버린 전통은 유덕한 성품을 통해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하고, 세상을 바꾸어 나갈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이다. 이러한 전통을 되살리는 것 또한 중요한 도덕 철학의 과업 중 하나다. -165-166쪽

공동체주의자들에 따르면 도덕성은 타인의 이익에 대해 무관심하면서도 항상 자기 합리성을 추구할 줄 아는 특정한 인간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자주 마주치는 보통 사람들에게 요구된다. 보통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불완전하다. 그러나 이 불완전함이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보통 사람의 도덕적 함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불완전함이다. 따라서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들을 굳이 도덕적 인간의 대변자라고 볼 이유가 없다. 설령 그들이 도덕적 입장을 대변한다고 해도 그 입장이 반드시 실제의 인간들을 도덕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거센 환경의 변화에도 굳건함을 잃지 않는 덕성이다. 이러한 덕성을 지닌 사람들은 비록 자신의 이해관계를 떠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이해관계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상황을 슬기롭게 대처하고 인류의 평화에 이바지할 줄 아는 구체적인 인간들이다. -172-173쪽

사회가 생산할 수 있는 총합은 사회 성원들의 협력의 차이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사회 생산의 총합이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면 많은 경우 사회협력은 와해된다. 사회협력이 와해되었다는 것은 그 사회체제 내에서 성원들의 능력의 차이가 차별이나 불평등으로 심화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한 사회체제 내에서의 불평등의 심화는 궁극적으로 사회성립을 위태롭게 한다. 불평등의 심화는 결국 사회구성체의 핵시인 사회 성원의 자발적 차며를 가로막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사회협동이 지속적으로 작동할 수 있기 위해서는 사회체제의 근간을 흔드는 심각한 불평등을 제거해야만 한다. 불평등은 단지 일시적으로 모든 사회 성원들에게 동일한 몫을 제공한다고 해소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협동을 공정한 원리와 절차에 따라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히 요구된다. 정의의 원칙은 각 개인들이 자신의 삶을 영위하면서, 사회에서의 자신의 역할과 임무를 수행하는 조건을 찾는 것이다. 특히 그것이 공정할 수 있는 조건을 찾는 것이다. -190-191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7-11-24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정성, 보편성을 판단하는 능력은 '얼마간' 본능에 내재되어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간'을 위 문장에 삽입합니다. 하하
침팬지 집단의 행동양상을 관찰한 결과를 보면
리더가 공정하지 않으면 다른 침팬지들이 그걸 받아들이지 않더군요.


마늘빵 2007-11-24 11:37   좋아요 0 | URL
음, 롤즈는 공정성의 기준을 사회제도적 차원에서 장치를 만들려고 노력했고, 매킨타이어는 롤즈의 시도에 동의하면서도 롤즈가 바라보지 못한 현실 속의 인간 개개인을 바라본 것이죠. 현실을 사는 개개인들이 원초적 입장에 놓여진 당사자들이라면 롤즈의 공정성은 쉽게 확보되겠지만 그렇지 않아서 문제에요.
 

알라딘 주최 우석훈씨와의 만남에 다녀왔다. 들어오니 아침이다. -_-  아무래도 평일 오후인지라 직장인들이 몇몇 참석하지 못한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강의실은 꽉 찼다. 알라딘에서는 고맙게도 값비싸고 칼로리 높은 크리스피 도넛이랑 - 박스채로 남아서 막 주던데 좋아하지만 살찔까봐 못본척했다 - 음료까지 준비해놓으시고. (근데 우석훈씨의 <88만원 세대>를 읽고 공감한다면 스타벅스나 크리스피 도넛 등의 거대 프란차이즈점은 이용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래도 맛있다고 가끔 한두번 들르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자주 이용하지는 말아야지. 스타벅스는 원래 정치적인 의도로 가지 않았었다. 여태 한 5번 갔나. 만나는 사람이 굳이 원할 때에만.)

일단 우석훈씨는 <88만원 세대>와 이후의 작업들에 대한 전체 얼개와 하고자하는 작업의 목적 등을 설명하셨고, 이후 알라딘 사람들과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내가 가장 물어보고 팠던건, 현재의 경제상황과 원인, 전망은 대략 공감하겠는데, 그럼 여기서 우리가 해야할 것은 무엇인가, 88만원 세대들이 토익책을 덮고 짱돌을 들고 일어나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 책을 읽은 청와대와 대기업 회장을 비롯한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잘못을 깨닫고 그동안 자신들이 꿀꺽한 지분을 88만원 세대들에게 양도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우석훈씨는 이에 대해 10가지 정도 나름의 정답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책에서 제시할 순 없었다고 했다. 그건 정답지를 주고서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주관식으로 문항을 제시하고, 88만원 세대들이 알아서 정답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라 했다. 너희들의 상황이 이렇고 저렇다는걸 지적했고, 충분히 공감했다면 너희들 사이에서 다양한 의견이 오가야하고, 그런 과정 끝에 어떤 하나의 행동으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걸 당사자가 아닌 누군가가 나서서 대신 해줄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프랑스 고교생들이 전국적으로 들고 일어나 대학등록금을 낮추고 대학에 번호를 매기게 한 상황을 염두에 두신 듯 하다. 한국의 88만원 세대들이 이 같은 결집을 보여주기를 원하면서. <88만원 세대>에 대한 비판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이 그것이다. 자 상황은 알겠다, 그런데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석훈씨는 자신이 생각한 해답은 있지만 그걸 당사자들이 찾도록 내버려둔 것이다. 스스로 해답을 찾는 과정 자체에서 이미 88만원 세대들은 그들간의 결집을 하게 될 것이므로. 20대가 20대를 싫어하고 피하는 현재의 최악의 상황은 극복될 것이리라 본다.

하지만 또 한 가지 문제점은, 20대가 과연 뭉칠 것인가, 하는 점인데, 이에 대해선 나는 회의적이다. 절대로 20대는 20대를 배려하거나, 그들끼리 어떤 논의를 통해, 사회에 맞서거나 협의를 하려하지 않을 것이다. 이게 가장 큰 문제라면 문제인데, 당사자들이 당사자들의 상황을 외면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 어떤 세대보다 합리적이고, 자신의 이득에 관심이 많고, 어려운 상황에서 일단 내가 벗어나는 것이 그들 개개인의 첫번째 목적이 될 것이므로. 어제 함께 했던 지승호씨의 말마따나 하나씩 광장에 끌려나와 총살당하는데, 수많은 동료들이 모두 숨죽이고 미동도 하지 않는 꼴인 셈이다. 내가 저들의 선택을 받지만 않는다면 괜찮아, 라고 스스로 위로하고, 그러다 선택받으면 모든 걸 포기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다행인 것은, 현재 88만원 세대 당사자들 사이에서는 뭉치려는 움직임이 안보이지만, '88만원 세대'라는 용어가 언론이나 정계에서 오르내리고 있다는 사실이고, 이 책을 봤을 소수의 88만원 세대들 뿐 아니라 그렇지 않은 이들까지도 신문 기사나 뉴스를 통해서 접할 수 있단 사실이다. (우석훈씨는 이 책이 88만원 세대들 사이에서 많이 읽혔으면 한다. 프랑스의 젊은이들이 모두들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를 읽었던 것처럼. 그렇게해서 그들이 모이길 바라시는 듯 하다. ) 하지만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현재로선 <88만원 세대>를 읽은 소수의 당사자들 간에 움직임이 있다해도 영향력은 매우 작고 미미할 것이다. 최대한 널리 알려서 그들이 자신의 상황을 깨닫도록 할 필요가 있다. 의식있는 4,50대 세대들에서도 이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들이 소유한 지분을 88만원 세대들에게 양보했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본다.

지승호님과의 인연이 있어 참석하게 된 우석훈씨와의 술자리는 매우 즐거웠다. 우석훈씨를, 솔직하고 적나라한 언어구사로 '학자' 로서보다는 함께 모여 이야기하는 한명의 '블로거' 정도로 여기게 됐다는. 11시에 가신다더니 계획된 시간을 훌쩍 넘어 차가 끊긴 늦은 시간까지 함께 해주신 우석훈씨에게 감사드린다.

p.s.

>> 접힌 부분 펼치기 >>



댓글(2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BRINY 2007-11-17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했는데 잘 읽었습니다.

이매지 2007-11-17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악!!!!!!!!!!!!!!!!!!!!!!!!!!!!!!!!!
당첨되놓고도 몰라서 못간 저는 뭡니까 ㅠ_ㅠ
이제사 당첨자 명단을 확인한 -_-;;

마늘빵 2007-11-17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라이니님 / :)
매지님 / 왜 안보이나 했어요. -_-

승주나무 2007-11-17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인의 무한도전에 대해서는 각주가 필요할 듯.. 나만 빼고 다 재미있으면 재미없는 거잖아........요~ㅋㅋ

웽스북스 2007-11-17 23:12   좋아요 0 | URL
웬디양의 각주 - 승주나무님이 제일 재밌어보였어요! ^^

마늘빵 2007-11-18 09:55   좋아요 0 | URL
ㅋㅋㅋ 맞아요. 승주나무님이 제일 재밌어보였어요.

프레이야 2007-11-17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악 잘 다녀오셨군요. 아침에 돌아오시고 ㅎㅎ
사진도 보여주시잖구요..
내용 잘 읽었습니다.

비로그인 2007-11-17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

마늘빵 2007-11-18 10:09   좋아요 0 | URL
엥 G-ego 란 사람말구 하나 더 나타났네. -_-
참 할 일 없으십니다. 점수나 매기고 있고.
에라 기분이다. +7

비로그인 2007-11-18 14:48   좋아요 0 | URL
D+

마늘빵 2007-11-18 22:31   좋아요 0 | URL
댓글을 달려면 정식으로 달고, 아니면 아예 오지를 마세요.
참 할 일도 없구만. 또 달면 삭제하겠습니다. 삭제해도 또 달면 불량 블로거로 신고해드릴게요. :)

자, A+ 로 수정.

Jade 2007-11-17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역시 논문이 끝나자마자 제대로 노시는군요 ㅋㅋ

웽스북스 2007-11-17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다운 후기네요 ㅎㅎ
저도 강연장 들어서자마자 크리스피도넛 보고 좀 놀라긴 했어요- 다른 강의라면 몰라도, 우석훈 박사님 강의에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_-

라주미힌 2007-11-18 0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리스피도넛 유명한건가봐요? 처음먹어봤는데 달기만 하고 맛없던데...

미즈행복 2007-11-18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너무 좋으셨겠어요. 아이구, 부러버라~
값진 시간보내셨으니 이제 기분 충전 100% 되셨겠어요!

마늘빵 2007-11-18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 / 사진은 패스에요. 승주나무님이 그렇게 찍는거 제가 다 피했어요. -_- 제가 상태가 별로 아니라.
제이드님 / 음 그러게말야. '제대로' 논다기엔 너무 작게 노는거같아.
웬디양님 / 크리스피가 우석훈씨 강의랑 안어울리긴했죠. -_- 거대 프랜차이즈 도넛가게와 88만원 세대는.
라주미힌님 / 그거 유명해요. 예전엔 매장에 가면 사람들 줄서있었어요. 저도 두번 사먹어봤는데 칼로리 높고 비싸서 안먹어요. 근데 맛없다면 상자는 통째로 가지고 가셨잖아요. ㅋㅋㅋㅋ 회사분들 드리셨나.
미즈행복님 / :) 기분 업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12월말까지 올해를 기분 좋게 보내야겠습니다.

웽스북스 2007-11-18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리스피 맛있죠- 입에서 사르르 녹고 ^^ 예전에 이홍의 걸프렌즈를 읽고 크리스피 도넛에 비유한 적이 있었어요- 달콤하고 순식간에 먹을 수 있지만 하나 이상은 절대 먹고 싶지 않다. 이게 트렌디한 오늘을 보여주는 척 하지만, 절대 현실이 아니다.
크리스피 매장에서 줄 길게 서있는 건, 가면 하나씩 공짜로 줘서 그럴 거에요- 첨에 마케팅을 그렇게 시작했거든요- 저는 매장엔 한번도 가본 적이 없고, 회사로 종종 거래처에서 보내줘서 그럴 때마다 꼭 하나씩만 먹어요- (그래도 하나 먹을 땐 매우 기뻐하며 먹어요, 쫌 단순해서 ㅋㅋ)

마늘빵 2007-11-18 21:55   좋아요 0 | URL
저는 두 개, 세 개도 먹을 수 있는데, 칼로리 높아서 안먹어요. 근데 사실 술도 칼로리로치면 만만찮은데 술자리는 사양하지 않는다는. -_- 요즘도 하나씩 나눠주나 모르겠네요. 전엔 저도 하나 공짜로 받아먹었는데. 안가야죠.

sapa 2007-11-18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지켜보지만 결국 자신의 운명도 총살뿐이라는 걸 모두가 자각하게 되면 행동으로 옮겨지겠죠. 아직 때가 오지 않은 듯 합니다.

마늘빵 2007-11-18 22:30   좋아요 0 | URL
첨 뵙습니다. 사파님. 음, 네 아직 그 정도로 억눌리지 않은 탓이기도 하겠지만, 그 '때'라는게 올지도 의심이 갑니다. 우석훈씨의 고민에 대해 '알고'있는 이들은 88만원 세대 중 극히 소수일 것이고, 해봐야 그들만의 저항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에요. 제가 너무 비관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나 소수가 저항하는 사이에 나머지 다수는 기회를 엿보고 치고 들어가니까요. 20대가 20대를 배반하는 형국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봐요.

순오기 2007-11-20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기 읽고 분위기도 감지해서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다는 엉뚱한 댓글은, 제 서재에 G-ego 6 이라는 댓글을 보고 도대체 이건 뭔 수수께끼야? 했는데 그분이 매기는 점수였군요. 님 덕분에 수수께끼 하나 풀어서 또 감사드립니다. 넙죽~^^

마늘빵 2007-11-20 14:53   좋아요 0 | URL
그 분 아직도 활동 하나 모르겠네요. 즐찾도 안했고, 다른 분 서재에서도 보이지 않으니, 알아서 혼자 잘 놀으시리라 봅니다만, 다른 사람이 또 나타나는군요.
 
철학 읽어주는 남자 명진 읽어주는 시리즈 4
탁석산 지음 / 명진출판사 / 2003년 2월
평점 :
품절




  철학자 탁석산의 발언은 거침 없다. 잘은 모르지만 그는 철학 학계에서는 다소 왕따스러운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좋다. 어디 얽매이지 않은 - 엄밀히 그는 한국외대 무슨 대학원 소속으로 얽매여있긴 하다 - 자유롭고 명쾌한 철학자 탁석산은 하고픈 말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내가 대학 학부생이었던 때 대학 강단에 선 그의 모습도 그랬다. 특유의 구수한 입담으로 하고픈 말을 다 쏟아내 웃음을 주곤 했다. 그가 쏟아낸 말들 중에는 꽤 깊이 생각해야 할 것들도 많았다.

  나는 그를 통해 조동일을 접했고, 이키유바라 최를 접했다. 서울대학 학부 신입생 시절 조동일과 잠시 맞짱 토론을 했다던 그는, 자신이 언젠가 낸 책을 통해 조동일을 한번 더 공격했음에도 그가 답하지 않은건 자기와 같은 하찮은 존재와 상대해봐야 아무런 이득 볼 게 없다는 조동일의 계산이 아닐까 라고 혼자 추측하곤 했다. 이런 생각을 하고 굳이 또 가르치는 학생을 향해 말로 풀어낸다는 것 자체가 깬다. 학부시절의 잠깐의 토론이 과장됐는지 어쨌는지 나는 모른다. 그의 추측이 사실이건 아니건 나는 이런 털털한 면을 보여주는 솔직한 그가 좋다.

  <철학 읽어주는 남자>는 당연히 철학서다. 하지만 일반적인 철학서에서 볼 수 없는 주제가 함께 버무려있는 해물잡탕과 같은 책이다. 책은 크게 세 파트로 나뉘어져 있는데 파트 1은 철학이 무엇이고, 어떠해야하는지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고, 파트 2는 철학을 현실 생활에 적용하는 다소 실용적인 면을 보여준다. 마지막 파트 3에서는 그의 철학에 대한 고민이 짙게 묻어난다. 파트 3은 논란이 많을 수 있는 부분이다. 한국땅에서 철학하는 한 명의 철학자로서, 탁석산은 신랄하게 한국 철학계와 대학 풍토를 질타하고 어떤 길을 가야하는가를 강하게 서술하고 있다. 한편으로 시원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이 책이 대중에게 선보여진 댓가로 그가 학계에서 더 왕따스러워지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많은 이들이 철학은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한편 철학을 접하고 좋아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철학이 인생에 많은 도움을 준다고 말한다. 앞의 사람들이 말하는 삶에 도움이 되는 것과, 뒤의 사람들이 말하는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의 의미는 분명 다르다. 전자는 철학이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것이고, 후자는 철학이 실용적이진 못하지만 생각을 깊이 있게 만들어준다는 면에서 도움을 준다는 의미이다. 탁석산은 과감히 삶의 지혜로서의 교양주의 시각으로 철학을 바라보는 입장을 거부한다. '교양'이기보다는 '기술'이라고 말한다. 한 마디로 실용적인 학문이라는 것이다.

  그가 그간 선보인 여러 책들은 철학의 실용성을 여지 없이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자신의 철학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입장은 대략 이렇게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필요한 만큼 필요한 곳에 철학을 써먹어라. 하나의 도구로서 활용하라는 의미다. 회사 기획서 작성법이나 보고서 작성법, 토론법에 대해 서술한 <탁석산의 글짓는 도서관> 시리즈는 이런 맥락에서 바라 볼 수 있다. 교양으로서 철학을 접할 수도 있겠지만 기술로서 써먹으라는 그의 주장은, 파트 3에서 이어진다. 한국 철학계의 학문 풍토와 대학 교수들을 비판하면서 이대로는 철학이 아무런 발전도, 사회적 기여도 할 수 없다고 일갈한다.

  그의 비판은 꽤나 날카롭고 직설적이다. 어떻게 보면 누구나 뻔히 알고 있는 문제를 신랄하게 깠다고 볼 수도 있지만, 주장에 담긴 내용이 진부적일지언정 그가 주장을 이끌어내는 사고과정은 결코 진부하지 않다. 철학은 번성기를 가져본 적도 없으므로 위기를 맞이했다고 볼 수 없고 정체되어 있다는 발언, 인문학의 위기를 빌미삼아 정부에서 연구비를 타내 대학 교수들끼리 쓸데없는 프로젝트를 하며 꿍짝꿍짝 타먹고 있다는 발언, - 서울대에서 진행하는 인문학 프로젝트 '토픽맵에 기초한, 철학 고전 텍스트들의 체계적 분석 연구와 디지털 철학 지식지도 구축'은 이런 쓸데없는 곳에 연구비를 투자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사례다. 나는 이걸 왜 하는지 이해가 안간다. - 누가 원전을 정확히 해석했느냐 하는 논쟁 또한 훈고학적인 태도일 뿐, 중요한건 자기철학을 하는 것이다, 라는 발언, 심지어는 한국 철학계에는 합의된 시대정신이니 과제가 없다는 발언 등은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여진다.

 나아가 토론에서, 정책 결정에서, 철학자들을 불러주지 않는 것은, 불러주지 않는 그들을 탓할 것이 아니라 철학자들 자신에게서 잘못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티비 토론 프로그램이나 정부가 진행하는 정책결정에 있어서 철학자가 참여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자주 티비에 비춰주는 진중권씨야 철학자라고는 하지만 철학자라기보다는 그냥 문화 비평가 라는 직함이 더 어울리고, 그를 제외하고는 탁석산씨가 몇번, 동국대 철학과 홍윤기 교수가 몇번 티비에 얼굴을 비췄을 뿐이다. 티비 토론프로그램에 나오는 횟수를 가지고 논할 문제는 아니지만 그만큼 소외되고 있다는 걸 말하고자 이런 예를 들었다. 탁석산의  지적은 철학적 지식과 학문적 내용에만 관심있을 뿐 사회 현실에 문제의식을 갖고  참여하지 않는 철학 교수들 자신에게 책임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쯤에서 그들이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은, 무엇을 위해 철학을 하는가, 이다. 단순히 밥벌이를 위해서, 자신의 학문적 계승자를 위해서, 철학을 한다면, 이는 분명 지극히 협소한 부분만을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좀 더 치열해지고 현실적이 될 필요가 있다. 누군가에게 비판받을까 무서워 몸사리지 말고, 괜히 쓸데없이 더러운 물에 발 담글까 두려워하지 말고, 현실 사회와 부대끼고 싸워야 한다. 옳은 것에는 옳다고, 틀린 것에는 틀리다고 말 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책은 철학을 즐기기 위한 입문서인지라 가볍게 손에 들 수 있지만, 책을 내려놓을 땐 손이 아니라 머리와 마음이 무거워질 것이다.

 p.s.

  대학교 학부과정에서 철학과를 없애고 교양으로 대치하고, 대학원 중심으로 가야한다는 그의 생각에는 반대한다. "전문 기술로서 철학을 활발하고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다른 과에서 대학원에 진학하는 경우를 거의 찾아볼 수 없고 - 알려진 이들 중에 이정우씨 정도가 해당되고, 철학하는 이진경씨, 고병권씨 정도는 전공을 바꿔 활동하지만 엄밀히 전공은 철학이 아닌 사회학 분과다. - 나이 먹을수록 먹고사는 문제에 눈 뜨기 때문이다. 다소 악랄한 발상이긴 하지만 눈뜨기 전에 순수한 마음으로 관심있는 이들은 애초에 20살부터 철학에 퐁당 빠뜨려서 공부시켜야 한다. -_- 하다보면 더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계속 공부하는 놈이 나타난다.

  그러나 철학과는 계속 존속시키되 실용적인 교양과목으로서 철학은 변신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교양과목이라고 개설된 게 동양철학의 이해, 서양고전연구 이런 식이니 살짝 궁금해서 찾아온 애들도 관심없어 떠날 판이다. 철학과의 수업은 빡세게, 교양으로서의 수업은 좀 더 현실적이고 실용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학 교수들과 강사들이 스스로 변신을 해야한다. 이런 점에서는 탁석산의 지적에 동의한다.

  기업에 의한 철학 연구소의 설립도 말하는데, 기업에 기본 정신이 종속되지 않은 채 사회기여 차원에서 물질적인 지원만을 해준다면 이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런데 경제연구소라면 모를까, 철학연구소를 차려줄 기업은 과연 있을까 의문이다. -_-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명명백백 2007-11-12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첫째 문단에 "그는 대학 학부생이었을 무렵 대학 강단에 섰을 때도 그랬다" 이란 구절 있잖아요. 탁석산 씨가 학부생이었을 때 벌써 대학에서 강의도 하셨다는 말씀인가요? 그렇다면 탁석산 씨는 정말 대단한 분인 것 같네요.

마늘빵 2007-11-13 09:32   좋아요 0 | URL
앗, 그게 아니고, 제가 대학 학부생이었을 때. -_- 문장을 좀 손봐야겠군요.

2007-11-12 2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13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이 전하는 말 2008-08-23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탁석산님이 오늘(2008.08.22) ebs에서 '건국 60주년, 역사, 미래를 말하다'의 강사로 강연을 하시더군요. 잘 몰랐던 분인데 흥미로운 발언들을 하시고 명료하고 통쾌한 면도 가지고 계시더군요. 아슬아슬한 재담꾼이기도 하시구요. 해서 알라딘 검색창에서 '탁석산'을 치고 책검색을 하였는데 아프라삭스님의 정성어린 리뷰가 달려있더군요. 독서량이 참 대단하시군요. 즐겨찾는 서재에 처음으로 아프락삭스님을 등록해봤습니다. 건필을 빕니다.

마늘빵 2008-08-23 10:17   좋아요 0 | URL
헉! 아니 탁석산이 건국 60년 어쩌구 하는 강연을 했다고요? 이거 뉴라이트 계열과 같이 행동하시는건가요? 탁석산을 순수한 우파 정도로 생각했던 제가 착각한건가요. 아니면 건국 60년 주제이지만 뉴라이트와는 다른 소리를 내는 강연인가. 아 궁금하군요. 찾아서 보고 판단해야겠습니다.

바람이 전하는 말 2008-08-23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20분동안만 강의를 들어 온전히 판단할 순 없지만 '순수한 우파'라는 표현이 (그러고 보니) 어울릴듯 하군요. 인문학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자라고 계속 강조하시던데...참고로 그동안의 이 기획강연에 참석했던 강사님들로는 (제가 본 바로는) 최재천 교수님, 정재승 교수님 등이 있습니다.

마늘빵 2008-08-23 17:06   좋아요 0 | URL
네 꼭 찾아보겠습니다. 지금까지의 탁석산의 행보는 저와는 입장이 다르지만, 그래도 뉴라이트와는 전혀 다른 '순수한 우파'로서의 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하는데, 그동안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합니다. ^^
 
철학 읽어주는 남자 명진 읽어주는 시리즈 4
탁석산 지음 / 명진출판사 / 2003년 2월
품절


철학은 교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철학은 전문 지식이며 전문 기술이다. 교양이란 없어도 사는데 지장이 없으며, 있으면 조금 더 나아 보이기는 하지만 생활에 꼭 필요하지는 않다. 교양이 있어야봐야 사는 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철학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삶과 사회와 세계에 대한 전문 지식이며 가혹한 훈련을 통해서만 습득할 수 있는 특별한 기술이다. 철학이 우리나라에서 교양과 결부된 것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의 문화주의, 즉 교양주의 영향이 주원인이었다.-16쪽

한국 철학계에는 기본적으로 합의된 시대정신이나 과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의식이나 주제로 철학자들을 분류하지 않고, 어디서 유혹했느냐 아니면 전공하는 철학의 국적에 따라 분류된다. 그리고 이런 분류는 한국 철학계가 외래 철학의 대리전을 하고 있다는 증거다. 철학과 교수 구성에서 중요한 것은 실력이나 문제의식이 아니라 세력 균형이다. 대리전을 충실히 수행하려면 자기편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결국 수 싸움이 되기 때문이다.-240쪽

한국 철학에서 원전 해석이 문제가 되는 까닭은 외래 철학을 바탕으로 자기 철학을 구축하고 전개하는 능력과 자세가 갖추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철학은 자기 철학을 전개하는 데 필요할 뿐이지, 누가 원전을 정확히 해석하느냐를 두고 논쟁하는 것은 전형적인 훈고학적 태도이다. 물론 더 정확한 원전 이해는 필요하다. 하지만 원전을 이해하여 자기 철학을 구축하는 것이 철학자의 기본 임무다. 하지만 현실은 이와 반대다. 한국 철학은 여전히 위의 예에서 본 바와 같이 원전 해석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자존심을 걸고 논쟁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 해석을 지지하는 사람은 예뻐한다. 대신 자기 철학을 전개하려는 사람은 학문적이지 않다고 한마디로 폄하한다.-242쪽

철학은 위기에 처하지 않았다. 철학이 위기에 처하려면 잘나가던 때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 철학은 별로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잘나가던 시절도 없었다. 그저 학과가 존재하고, 학생이 존재하고, 교수가 월급을 받는 일이 반복됐을 뿐이다. 특별히 사회적 역할을 수행한 적도 없고, 한국 지성사에서 토대가 되는 작업을 한 적도 없으므로 새삼스레 위기라고 말할 것도 없다. 있다면 앞서 말한대로 교수의 밥그릇 위기가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요즈음은 외부 환경이 바뀌고 있다. 즉 시대가 격변하며 사회가 너무 거대하고 복잡해졌으므로 철학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늘고 있다. 문제는 대학의 철학과 교수가 이런 임무를 수행할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밥그릇을 지키는 데만 최선을 다하는 교수들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한 철학의 위기, 인문학의 위기는 이들의 밥그릇을 지키는 구실만을 제공할 뿐이다. 이런 구실이 어느 정도 먹혀들어 지금 눈먼 연구 기금이 쓸모없는 프로젝트에 대량으로 투여되고 있다. 이런 것이 진짜 위기다.-251쪽

문제는 철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학생들이 요구하는 지적 호기심과 지적 경외감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즉 철학을 통해 얻고자 하는 바를 철학 과목이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학생들이 등을 돌리는 것이다. 학생들이 실용 영어나 법 관련 과목이나 컴퓨터 관련 과목, 다시 말해서 돈이 되는 과목에 몰린다고 비판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 중략 ... 역사가 과연 진보하는지, 인간 이성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등. 진정 알고 싶은 것들이 무수히 많다. 대학은 이런 욕구를 채워줘야 할 의무가 있다. 물론 학생들은 취직에 필요한 공부를 열심히 한다. 그렇지만 영어는 학원에서도 할 수 있고 취업에 필요한 것들을 가르치는 학원도 많다. 따라서 대학에서는 더욱더 인문학적 지식을 갈구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문제는 가르치는 선생들이 이런 욕구를 충족시킬 만한 지적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253-254쪽

사회적 역할이란 철학이 사회 문제에 얼마만큼 발언권이 있느냐를 말한다. ... 중략 ... 이에 반해 철학자들은 이상할 정도로, 앞서 기술한 철학계 현황에 따르면 이상할 것도 없지만, 침묵해왔고 따라서 별로 사회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 당연히 사회적 발언권도 약화돼 이제는 사회 문제가 있어도 철학자를 별로 찾지 않는다. ... 나는 이런 역할 부재의 원인이 전적으로 철학과 교수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철학과 교수는 자신의 철학 지식을 현실 문제에 적용하고 활용하는 능력도 부족하지만 이보다는 지식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아는 게 없다. 사회 전반에 대해 어느 정도 두루 알아야 하고 역사나 문화에 대한 소양과 상식이 있어야 하는데 너무 미비하다. 한마디로 문학 평론가와 토론하면 말발이 달린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적 역할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258쪽

철학의 사회적 역할을 넓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전문 철학 저술가 양성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에 철학책을 써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김용옥 외에는 없을 것이다. 철학책을 전문으로 쓰는 사람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인데, 철학 저술가가 거의 없다는 점은 철학 대중화에 결정적 장애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철학을 읽으려면 전문기술이자 전문 지식인 철학을 다시 가공하는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학자가 대중적인 철학책을 쓰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학자의 관심은 현실과는 무관한 학문적 세계다. 현대 논리 철학의 창시자인 프레게의 철학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탐구한다면, 그 지식을 일반화할 틈도 마음의 준비도 돼 있지 않은 것이 보통이다. 물론 쓸 수도 있겠지만 성공 가능성은 낮다. 학자는 쉽게 쓰낟고 쓰지만 대중에게 아주 어렵기는 매한가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술 성과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사람들, 즉 저술가가 필요하다.-272쪽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7-11-12 17: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현실적으로,
철학은 교묘한 말재간으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을 가려내는 능력을
갖게 합니다.
한국의 현실에 특히 유용하지요.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72
하승우 지음 / 책세상 / 2003년 6월
구판절판


"우리들은 우리가 억압하려 애쓰는 의견이 잘못된 것이라고 단정할 정도로 확신할 수 없으며 설사 그렇게 확신한다 하더라도 그 의견을 억압하는 일은 여전히 악일 것이다...... 일체의 토론을 억압하려는 것은 자기의 절대무오류성, 즉 절대로 자기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존 스튜어트 밀)-51쪽

똘레랑스는 부정의 논리인 동시에 긍정의 논리다. 완전함을 부정하는 한편 자발성을 긍정한다. 절대적인 완전함이 없다고 해서 진리를 추구하는 자발성과 독창성을 스스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보편적인 진리가 무너졌다고 해서 개인의 자발성이 함께 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똘레랑스는 완전함을 부정하면서도 자발성을 최대한 실현할 것을 요구한다. 절대적 진리라는 것이 없다 하더라도 최대한 진리에 가까이 다가서려는 노력은 소중한 것이다. 그래야 침묵하고 복종하는 사회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52-53쪽

양심이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자유로운 것이기 때문이다.(필리프 사시에)-54쪽

밀은 진리와 관련해 침묵을 강요할 수 없는 이유를 합리적으로 논증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없기에 침묵을 강요하는 의견도 진리일 수 있다는 것, 둘째 침묵을 강요당한 의견이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리의 일부분을 포함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 셋째 대중 사이에서 널리 인정받는 의견이 진리일 뿐만 아니라 진리의 전부라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활발한 논쟁이 허용되지 않거나 실제로 논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의견은 편견처럼 비쳐져 그것을 합리적으로 이해할 기회가 상실되리라는 것, 넷째 자유로운 토론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가르침 그 자체의 의미가 상실되거나 약화되어 그 의견은 사람의 인격과 행위에 미치는 생기발랄한 영향력을 잃어버릴 위험에 빠진다는 것이다. -55-56쪽

'똘레랑스'에 부정하는 의미의 접두어를 붙인 형태인 '앵똘레랑스'는 표면적으로는 똘레랑스와 대립되는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앵똘레랑스는 인종, 피부색, 종교, 성적인 취향을 이유로 타인의 행동이나 신념을 받아들이지 않는, 비이성적이고 정당하지 않은 반대를 가리킨다. 그것은 "네 생각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따라서 네 생각을 파괴하고 네가 쓴 책을 불태우고 나아가 너를 없애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똘레랑스 속에 담긴 앵똘레랑스는 이성적인 반대를 뜻한다. 이때의 앵똘레랑스는 어떤 것은 더 이상 받아들이면 안될 뿐 아니라 그럴 수 없음을 의미하며 특정한 상황에서 도덕적 의무를 뜻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똘레랑스 속에 담긴 앵똘레랑스는 일반적인 앵똘레랑스와 의미가 다르다. -56-57쪽

똘레랑스는 때로 공익을 위해 사적인 이익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지만 거기에 강압을 사용하면 안된다. 아무리 공익을 위한 일이라 하더라도 강제나 차별을 동원하면 강제하는 자나 차별하는 자의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일로 비칠 수 있다. -62쪽

"똘레랑스는 비대칭 불균형의 태도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 우리에게 행해지는 악을 악 그대로 돌려주지 않아야 할 순간이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무장해제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승 작용을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대화를 위해서는 상대방이 용인하지 않는 것을 우리가 먼저 용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환대'의 사상이 있습니다. 화합되지 않는 사람을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항상 적대하던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모험입니다." (필리프 사시에)-67쪽

똘레랑들은 극단을 부정하는 앵똘레랑스를 예로 들며 비폭력을 무조건 고집하지 않는다고 얘기할지 모르지만, 그렇다해도 똘레랑들에게는 폭력이 앵똘레랑스라는 예외적인 경우로 한정되는 반면 힘없는 약자에게는 일상이 폭력이다. 약자의 비폭력은 상대의 압도적인 힘을 감당할 수 없기에 나타나는 무기력일 수 있다. 그리고 현실의 불평등한 모순을 지속시키려는 폭력이 아니라 그 모순을 없애려는 폭력은 야만스러운 폭력과 다르다. 폭력과 대항 폭력은 몸통이 붙어 있지만 머리가 떨어져 있는 샴쌍둥이와 같다. 어느 한쪽이 사라지기 위해서는 다른 한쪽도 같이 소멸해야 한다. 약자에게 일방적으로 폭력을 포기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잘못이다. -93쪽

"참된 철학 운동이란 몇몇 소수의 지식인 집단 사이에 특수한 문화를 창조하는데 그칠 것인가, 아니면 '상식'보다 우월하며 과학적 정합성을 갖는 사상 형식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조차 '순진한' 대중과의 연관성을 결코 잃지 않고 또 바로 그 속에서 실로 자신이 탐구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의 원천을 발견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그람시)-115쪽

똘레랑스는 공적인 토론에서 원칙을 지킬 것을 요구한다. 그 원칙은 상대방의 의견을 냉정하게 듣고 정직하게 진술할 것, 반대자에게 불리한 일을 과장하지 말고 그들에게 유리한 일을 감추지 말 것이다. 좋은 얘기다. 하지만 이런 원칙은 현실에서 잘 지켜지지 않는다. 특히 극단주의자나 권력을 가진 자들이 잘 지키지 않는다. 그들은 토론 자체를 거부하거나 설사 토론을 하더라도 자기들보다 약한 사람의 의견을 들으려하지 않는다. 그들은 상대방을 무시하면서 '무식하다', '교양없다', '부도덕하다' 같은 딱지를 붙인다. 밀은 이런 어려움을 알고 있었기에 "진리와 정의를 위하려면 우세한 편에서 욕설의 남용을 억제하는 것이 반대 의견을 가진 편의 욕설 남용을 억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116쪽

우리는 기득권 세력이 허위 의식을 만들기 시작할 때, 또는 그것을 체계적으로 퍼뜨리기 시작할 때부터 그들을 차별해야 한다. 즉 허위 의식을 기르는 말과 이미지를 쓰려 할 때부터 그들을 차별해야 한다. 그들의 선전을 가만히 놔둔다면 그들은 압도적인 돈과 힘을 바탕으로 사람들의 의식을 마비시킬 것이다. 상황을 지켜보며 적당히 조절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선전을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그들을 차별해야 한다. -120쪽

" '정의'는 벌을 주는 것이 아닐세. '정의'란 각자에게 걸맞는 가치를 되돌려주는 것을 말하네. 각자는 거울이 비추어주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지. 그러므로 정의란 각자에게 자기자신을 되돌려주는 것을 모두가 동등해야 한다고 주장만 하는 것은 허위 의식을 심어줄 뿐이다. 오히려 동등함이 실현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 올바르다. 불평등을 바로잡기 위한 차별은 정당하다. 차별하는 똘레랑스는 똘레랑스를 실천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121-122쪽

우리는 그 존엄을 잊지 말고 기억하며 존엄하게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존엄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 속에 품어야 힘을 가진다. 결탁이 강자들의 추태라면 만남은 약자들의 희망이다. 존엄하게 사는 길은 끊임없이 존엄을 추구하는 것이고, 존엄을 위해 죽을 때 드러나는 것이다. 나는 내 " '정의'는 벌을 주는 것이 아닐세. '정의'란 각자에게 걸맞는 가치를 되돌려주는 것을 말하네. 각자는 거울이 비추어주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지. 그러므로 정의란 각자에게 자기자신을 되돌려주는 것을 뜻하지. 죽음을 주고, 비참한 고통을 주고, 착취하고, 우월하다며 오만하게 굴고,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우쭐대고 잘난 체했던 이들에겐 그에 상응하는 불행과 고통을 주어 그들이 새로이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하고, 생의 활력을 주고, 일을 주고, 저항하게 도와주고, 형제가 되었던 사람은 그에 마즌 대가로 얼굴과 가슴을 환하게 밝혀주고 그가 걸어갈 길을 밝혀줄 빛을 얻게 되는 것이지." (안토니오 할아버지)-135-136쪽

우리는 그 존엄을 잊지 말고 기억하며 존엄하게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존엄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 속에 품어야 힘을 가진다. 결탁이 강자들의 추태라면 만남은 약자들의 희망이다. 존엄하게 사는 길은 끊임없이 존엄을 추구하는 것이고, 존엄을 위해 죽을 때 드러나는 것이다. 나는 내 영역에서, 당신은 당신의 영역에서, 구체적인 삶의 현장과 일상 속에서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때로 힘들어 쓰러질지라도 다시 일어서서 그 길을 가는 것이다. 존엄은 그 길의 끝에 놓여있는 선물이 아니라 길 위에 뿌려지는 바로 그 땀이다.-138쪽

각주98) 조정환은 똘레랑스가 중도를 지향한다고 비판한다. "똘레랑스는 두 개의 앵똘레랑스 극단 사이에 놓여 있다. 그것은 중간의 지대에 놓여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양극단을 배제하는 중도, 중용의 태도를 지향한다. 이 태도에서 양쪽 극단의 질적 차이는 무시된다. 똘레랑스는 오직 앵똘레랑스와의 차이를 통해서만 정의될 뿐이다. 똘레랑스는 앵똘레랑스와 마찬가지로 동일화를 향한 강한 추구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고 다름을 확인하고 다름을 견디는 태도이지 다름 속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생산하려는 태도는 아니다." (조정환, <'똘레랑스'의 윤리 정치학 비판>,[모색] 3호, 122쪽)-159쪽


댓글(0) 먼댓글(1)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읽어볼 만한 구절 : 35절 불관용자에 대한 관용
    from 자유를 찾아서 2007-10-22 21:14 
      "지금부터는 과연 정의가 불관용자들에게도 관용을 베풀 것을 요구하는지,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어떤 조건 아래서 그러한지를 고찰해보기로 하자."   "몇 가지 문제가 구분되어야 한다. 첫째, 불관용하는 종파가 자기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고 해서 불평할 명분이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둘째, 어떤 조건 아래에서 관용적인 종파가 불관용적인 종파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을 권리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언제 그들이 관용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