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와 이에 대한 지지, 반박으로 구성된 리스트. 그 외 생물학적 결정론, 사회생물학 등등 이와 관련된 책들을 묶어봤다. 이기적인 유전자가 지배하는 개체로서 우리의 삶을 바라보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이 주장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가.
97년인가부터 소설가 복거일씨에 의해서 시작된 영어공용화 찬반 논쟁은 지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진 않지만, 여전히 중요한 주제거리로 남아있다. 국제어 시대에 영어를 받아들이고, 제2의 모국어로서 역할을 하게 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지금과 같이 제1외국어로서 유지를 할 것인가?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하면 세계의 기아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유전자 변형으로 자양분이 고갈된 토양을 되살리고, 식량을 증산시킬 수 있다는 확실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몬산토, 뒤퐁, 다우, 기타 다국적 기업들이 세계의 종자 공급을 장악해 가고 있는 속도로 볼 때, 유전자 변형의 가장 큰 동기는 금전적인 탐욕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세계의 식량 공급을 특허권으로 통제하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한편, 자연 자원을 고갈시킬 뿐만 아니라 잠재적인 위험마저 도사리고 있는 위험한 농법이 저개발국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저개발 국가의 지도자들은 세계은행이나 국제 통화 기금 등으로부터 다국적 기업과 협조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다. 다국적 기업들은 저개발 국가들을 대상으로 자사의 농경 기술을 팔기 위한 시장을 개척하는 한편, 낮은 비용으로 식품을 생산(종종 노예의 노동력을 동원하기도 한다)함으로써 저개발 국가에 곡물을 팔아 막대한 이윤을 남기고 있다. 결국 저개발 국가들을 대상으로 한 식민지 착취는 지금도 계속 되고 있는 셈이다. -102-103쪽
세계의 기아 문제에 대해 조금이라도 연구를 해 본 사람이라면 지금 지구 어디선가 8억 명의 사람들이 굶고 매일 3만 명의 어린이들이 굶어 죽는 이유가 식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정치 불안, 불안정한 식량 유통 체계, 정부(지방 정부든 중앙 정부든)의 부패, 인구 과밀 또는 과도한 방목으로 인한 토양의 황폐화, 거대 기업의 농토 장악으로 지역적 특색에 맞는 농경이 불가능해진 점, 농민들이 농사를 지어 생계를 이을 수 있는 수단을 잃어버리고 도시로 떠나는 이농 현상 등 그 이유는 다양하다. 이농 현상의 경우 농업으로 생계를 잇던 농부들이 그 수단을 빼앗김으로써 점점 더 가난해지고 인간으로서의 권리마저 누리지 못한다는 점에서 더욱더 비극적이다. 이런 상황에 처한 농부들은 대대로 물려받으며 농사를 짓던 땅을 두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나지만 도시에서 찾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그들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시는 이미 대량 실업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일자리조차 찾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때 자부심을 갖고 농사를 짓던 농부들이 굶주림에 지쳐 거지가 되어간다. -103-104쪽
해바라기 씨앗을 수확한 여인네들은 가까운 곳에는 그 씨앗을 내다 팔 만한 시장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종묘 회사에서 웨일웨일에서 수확한 해바라기 씨앗을 되사겠다고 했다. 그러나 농사를 지은 여인네들에게는 전혀 이익이 남지 않을 만큼 턱없이 낮은 가격이었다. 게다가 더 분통 터지는 일이 있었다. 농부들이 다음에는 더 큰 수확을 거두기를 바라며 거두어들인 해바라기 씨앗 중 일부를 새로 뿌리기 위해 남겨 두었다. 그러나 곧 종묘 회사에서 그들에게 판 씨앗은 열매를 맺지 않는 불임 씨앗임이 밝혀졌다. '터미네이터 종자'라고도 부르는 이런 씨앗은 유전자를 변형해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고 제 자신의 배아를 죽여 재생산을 하지 못하도록 만든 종자다. 종묘 회사는 마을 사람들에게 새로 파종할 해바라기 씨앗을 전보다 더 비싼 값에 팔아먹는 파렴치한 횡포를 저질렀다. -109-110쪽
문제는 '그들도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나 '그들도 말할 수 있는가?'가 아니다. '그들도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 이다. (제레미 벤담) -123쪽
2004년 봄의 어느 날, 로스는 실수로 왼손 가운데 손가락을 칼에 베었다. 상처는 정상적인 경우라면 오래가지 않고 금방 아물만한 정도였다. 그러나 로스의 상처는 크게 부풀어 올라 골프공만 한 크기가 되었다. 로스를 치료했던 의사는 로스의 상처가 항생제 내성이 강한 박테리아에 감염되었으며, 이 박테리아는 공장의 닭으로부터 감염된 것이라고 믿는다. 몇 개월 동안이나 항생제로 치료했지만 감염은 치료되지 않았고 감염에 의해 곪아 버린 손가락을 절단해야했다. 손가락을 절단해야만 하는 상황에 대한 로스의 극단적인 반응과 항생제에 대한 무기력한 반응이 새로운 공중 보건의 연구를 시작하게 하는 촉진제가 되었고, 이 연구에 따라 체사피크 만 지역의 닭가공 공장 근로자들이 항생제 내성 검사를 받았다. -155쪽
한 국가의 위대함과 도덕적 진보는 동물을 대하는 방법을 통해 판단할 수 있다. 나는 저항력이 없는 동물일수록 인간의 잔인함으로부터 인간에 의해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마하트마 간디) -167쪽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육식이 꼭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다. 첫째, 인간의 몸은 해부학적으로 많은 양의 고기를 자주 섭취하는데 적당치 않다. 육식 동물과 초식 동물은 장의 길이부터가 다르다. 육식 동물의 장은 짧아서 (제 몸 길이 정도) 먹이 중에서 소화되지 않는 것도 부패하기 전에 재빨리 몸 밖으로 내보낼 수 있게 되어 있다. 초식 동물은 식물성 먹이로부터 영양분을 흡수하기 위해 더 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장의 길이가 길다. (보통 자기 몸의 네 배 정도) 인간의 장도 길이가 길다. 따라서 육식을 하면 고기 찌꺼기가 장에 너무 오래 머무르게 된다. 다른 측면에서 보아도 인간은 육식에 적합한 신체 구조를 갖고 있지 않다. 고기를 찢거나 베어내기 적합한 이빨도 없고 발톱도 없다. 마지막으로, 유기농 축산물을 섭취하지 않는 한 육식을 하면 공장식 사육장에서 가축을 사육할 때 사용한 항생제와 호르몬이 사람의 몸까지 오염시킨다. -225-226쪽
전 세계에서 수확되는 곡물의 3분의 1에서 거의 절반가량이 사람이 먹을 가축을 살찌우기 위한 사료로 쓰인다는 통계가 있다. 미국에서도 농지의 56퍼센트가 고스란히 쇠고기를 생산하는데 쓰인다. 영국에서는 70퍼센트의 농지가 가축의 사료를 재배하는데 쓰인다. 유럽과 일본에서도 그와 비슷한 정도의 가축들이 식용으로 사육된다. 많은 선진국들이 자기 나라에서 소비될 가축을 자기 영토 안에서 모두 기를 수 없다. 유럽에서 식용으로 쓰일 가축 모두에게 먹일 풀과 곡물을 재배하려면 유럽 연합 전체 면적의 일곱 배에 해당하는 토지가 필요하다. -232-233쪽
1헥타르의 토지에 감자를 심으면 스물 두 명이 1년을 사 수 있다. 같은 면적에 벼를 심으면 열아홉 명, 곡물을 심지 않고 소나 양을 길러 쇠고기와 양고기를 생산하면 단 한 명 내지 두 명 만이 그 고기로 1년을 살 수 있다. 물론 사람이 1년 내내 감자가 옥수수만 먹고 살 수는 없다. 그러나 육류의 생산을 늘리는 방법으로는 굶주린 사람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이 수치로 알 수 있다. 현재와 같은 속도로 육류를 소비하기 위해 지구상의 농지를 파괴해야 한다면 더욱더 그러하다. 육류의 생산을 늘리는 것보다는 육류의 소비가 심한 음식 문화에 변화를 꾀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235-236쪽
희망을 잃는다면 삶을 계속 나아가게 하는 생명력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존재할 용기, 모든 난관에도 불구하고 전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질을 잃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417쪽
우리가 인간 복제의 전망에 대해 반감을 갖는 것은, 이러한 일의 생경함과 진기함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즉각적으로 아무런 논증 없이 알고 느끼는 것으로서, 우리가 정당하고 친근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들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혐오감은, 지나친 인간의 작위에 대한 반감이며, 말할 수 없이 심오한 것들을 범하지 말라는 경고인 것이다. 사실상,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생각하는 이 시대에, 우리의 타고난 본성은 더 이상 존경받지 못하고 우리의 몸 또한 우리의 자율적, 이성적 의지의 단순한 도구로 여겨지는 이 시대에, 혐오감은 우리 인간성의 핵심을 보호하기 위해 외치도록 남겨진 유일한 목소리인지도 모른다. 전율을 잊어버린 영혼은 경박하다. (생명윤리학자 레온 카스, '혐오감의 지혜' 中)-47쪽
무성 생식은 자기 보존 활동의 지속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의 유기체가 두 개로 자라거나 분화되기 시작하면 원래의 것은 (이중으로) 보존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죽지 않는다. 이에 비해 성은 소멸을 의미하며, 대체에 이바지한다. 하나를 낳기 위해 모인 둘은 곧 죽게 된다. 성적 욕망은 인간에게든 동물에게든 자기 보존적인 개체에게 부분적으로는 감추어져 있고 궁극적으로는 모순이 되는 목적을 위한 것이다. 인식하든 않든 간에 성행위를 하면서 우리는 성기를 우리 자신의 소멸을 위해 사용한다. 알을 낳고 죽기 위해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는 보편적인 진리를 이야기해준다. 즉 성은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생식에 부분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이다. (생명윤리학자 레온 카스, '혐오감의 지혜' 中)-55쪽
아이의 동의를 상정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에 관한 반대 의견은 복제 인간이 나중에 질문을 받을 때 결국 복제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화를 낼 것이라는 명백하고도 충분한 점을 간과하기까지 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익과 손해가 아니라 적절한 (비록 시간적으로 지난 것이라 하여도) 동의를 하는데 필요한 독립성, 즉 단지 선택할 자유만이 아니라 자유롭고 바르게 선택할 성향과 능력이 과연 있겠는가 하는 점에 있다. 과연 복제 인간이 어느 정도로 도덕적인 판단을 내릴 만한 주체가 될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복제 자체에 있어서 그리고 복제 인간을 복제된 자로 키우는 사실 자체에서 복제를 시행한 인간이 복제된 아이의 독립을 박탈한다. 이 독립은 그 아이가 한 인간의 인위적 기획에 의해 고안된 결과물이 아니라 세상에 나온 예상치 못한 놀라움, 하나의 산물이라는 사실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생명윤리학자 레온 카스, '혐오감의 지혜' 中)-57-58쪽
그러나 복제의 경우에 있어서는 오직 하나의 '부모'만이 있을 뿐이다. "편부모 가정의 아이"가 처한 일반적인 슬픈 상황이 이 경우에는 고의적으로 그리고 악의를 가지고 계획된 것이다. 자기 복제의 경우 "후손"은 또한 자신의 쌍둥이다. 그래서 결국 근친상간의 무서운 결과가, 즉 자신의 형제의 부모가 되는 사태가 실제로 전혀 성교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모든 인척 관계 또한 복잡해진다. 아버지, 할아버지, 아줌마, 조카, 누이 등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누가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책임을 질 것인가? 아버지나 어머니의 한쪽 가계가 필연적으로 배제된 한 사람의 사회적 정체성은 어떤 것인가? 우리 사회에 이미 만연하고 있는 이혼, 재혼, 양자, 미혼모 등등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고 이로 인해 집단 혈통이 어지럽혀지고 친척 관계와 아이(그리고 그 밖의 사람들)에 대한 책임이 혼란스러워지고 있다는 사실이 변명이 될 수는 없다. 물론 누군가가 이런 현상이 어린아이에게 더 나은 상황을 마련해 준다고 주장하는 경우는 또 다른 문제이기는 하다. (생명윤리학자 레온 카스, '혐오감의 지혜' 中)-61-62쪽
낳는 것(출산)은 만드는 것(제조)과 어떻게 다른가? 자연적인 생식에서 인간 존재는 우리와 같은 다른 인간 존재를 탄생시키기 위하여 상호 보완적인 남자와 여자로서 결합한다. 즉 살아가고, 그래서 소멸하고, 그래서 열정적으로 성애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에 비해서 복제를 통한 생식의 경우 그리고 이 복제에서 발전된 좀더 세련된 형태의 생식의 경우에는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우리의 의도와 계획에 따라 새로운 존재가 태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인간이 만드는 모든 물건들과 마찬가지 그것이 아무리 뛰어난 물건이라고 해도 결국에는 그것을 만든 사람이 주인이 된다. 제작자는 동등한 위치가 아니라 군림하는 자로서 자신의 의지와 창조적 솜씨로 인해 그 제품을 능가한다. 동물을 복제한 과학자는 자신의 도구 제작에 관여한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동물은 처음부터 이성적인 인간의 목적에 수단으로 사용되도록 고안되었다는 것이다. 인간 복제의 경우에는 과학자들과 장래의 "부모들"이 동물의 경우와 마찬가지의 기술 관료적 심리 상태를 인간 아이에게도 적용한다. 인간의 아이들 역시 그들의 작품이 되는 것이다. (생명윤리학자 레온 카스, '혐오감의 지혜' 中)-62-63쪽
마지막으로, 아마도 가장 중요한 점일 것인데, 세포핵 이식을 통한 인간 복제의 관행 - 예상되는 모든 다른 미래 세대의 유전 공학의 형태와 마찬가지로 - 은 아이를 가지는 일과 부모 자식 관계의 의미에 대해 심각하고도 해로운 오해를 야기하고 악화시킨다. 부부가 아이를 낳고자 결심하는 것은 새로운 신생아의 출현을 긍정하는 것인데, 이것은 단순히 아이를 가지는 것뿐 아니라 암묵적으로는 그 아이가 어떤 아이든지 받아들이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유한성을 받아들이고 우리를 대체하는 존재를 수용함으로써 우리는 암암리에 우리의 통제 영역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자연에서는 흔히 통하는 이러한 방법을 통해, 즉 생식을 통해 미래를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 생명과 인간 종의 불멸에 일정 부분 참여하는 행위를 통해 바로 우리의 통제를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명윤리학자 레온 카스, '혐오감의 지혜' 中)-63-64쪽
복제의 옹호자들은 복제의 불법적인 사용과 구분되는 합법적인 사용이 있다고 믿고자 한다. 그러나 바로 그들이 내세우는 원칙 때문에 그러한 경계를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 (현실적으로 그런 경계를 강제로 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복제 옹호자들이 이해한 생식의 자유는 (아이에게 육체적 손상을 가하지 않는 것까지 포함한) 예비 부모들의 주관적 소원에 의해 좌우되는 그런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아이 없는 부부들이 감상적인 호소를 하는 경우와 유명하고 재능 있는 사람 - 그들이 살았건 죽었건 간에 - 을 복제하고 싶어하는 (혼인여부와 무관한) 개인의 경우는 구분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이들이 내세우는 원칙들은 복제 뿐 아니라 사실상 "완전한" 아기를 창조(제조)하려는 미래의 모든 인위적인 시도들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윤리학자 레온 카스, '혐오감의 지혜' 中)-68쪽
복제 인간은 복제 세포를 제공한 사람과 똑같은 모습으로 태어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자라는 환경에 따라 상당히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그에게 인위적으로 원본 인간이 살아온 것과 비슷한 조건의 환경을 만들어준다 할지라도 그 원본 인간이 걸어온 삶을 살지는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복제 인간이 가진 습관이나 말투, 사고 방식 등은 원본 인간과 완전히 다를 것이다. 이런 요소들은 그가 태어난 곳과 자란 곳, 다닌 학교, 가정, 국가, 그 사회와 문화, 과학 기술 문명 등 수많은 외부 조건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제 인간은 원본 인간과 유전자가 같을 뿐 또 하나의 새로운, 완전한 인간인 셈이다. -42쪽
또 인간이 복제 인간을 만들어 자신이 해야 할일을 그에게 맡기고 자신은 편하게 살아갈 때, 반대로 복제 인간은 열심히 일해 문화를 개척하고 인간의 생활을 향상시켰을 때, 복제 인간들이 건설한 문화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그리고 인간이 단순히 쾌락과 편리함만 추구하는 몸뚱이로 전락된다면 어떻게 될까라고 의문을 품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아마 <블레이드 러너>와 같은 영화를 본 뒤 품은 상상인 것 같은데 복제 인간과 보통 인간은 단지 생식 세포의 결합으로 태어났느냐 체세포의 복제로 태어났느냐의 차이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태어난 복제 인간에게 애초부터 복제 인간이란 표시를 하지 않는 이상 그가 복제 인간이란 사실조차 알 수 없다. 그의 세포를 떼어내 게놈 전체를 샅샅이 조사한다 하더라도 보통 인간과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막연한 불안, 비과학적 사고 방식이 빚어낸, 과잉 염려증에 지나지 않는다. -44-45쪽
1995년 미국 클린턴 대통령의 행정명령으로 설치된 미국의 국가생명윤리자문위원회(NBAC)는 동물 복제 연구를 하는 이유로, 1) 연구 목적에 쓰일, 유전적으로 동일한 동물 집단을 만들기 위해, 2) 원하는 가축을 빨리 키우기 위해, 3) 형질 전환한 가축의 발생률과 증식률을 높이기 위해, 4) 가축의 유전자를 바꾸기 위해, 5) 세포 분화에 관한 기초 지식을 얻기 위해서라고 꼽았다. -79-80쪽
선스타인은 인간 복제를 금지하는 것은 미국 헌법에 어긋난다는 판결을 내릴 경우, 아이를 가질 것인지 가지지 않을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개인의 권리는 헌법이 보장하는 프라이버시권의 본질적 부분이라는 논거를 제시할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개인의 자유나 권리도 정부가 제한해야 할 극히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으나, 복제는 그렇게 제한할 타당한 이유가 못된다는 것이다. -198-199쪽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은 인간의 복제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이는 인간을 세상에 출생시키는 고귀한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녀는 자신들의 진정한 부모를 가질 권리가 있으며, 남편과 아내의 결혼을 통한 사랑의 열매로 인정받아야 한다. 자녀는 우리의 설계에 따라서 제작할 수 있는 산물들이 아니다. 그들은 특정하게 요구되는 특성을 소유하려는 사람들의 교묘한 의도의 복사물로 태어나서는 안 된다. (미 가톨릭교회 생명인권위원회의 견해) -218쪽
생명복제는 근본적으로 다르마를 파괴하는 일일 수 있다. 그것은 육상(六相)의 틀 속에 있는 변이가 아니라 인위적인 조작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야기되는 문제는 이 질서 파괴에 다른 업보이다. 이미 생태계 파괴의 심각성은 과학 뿐만 아니라 철학, 종교의 중심 테마가 되고 있지만 생명 복제에 따른 파장은 엄청난 후유증을 잉태할 수 밖에 없다. 오늘날 인류가 겪고 있는 심각한 양상들은 삼독이 낳은 인과응보이다. 그러나 생명 복제의 과보가 안고 있는 문제는 보다 가혹하다고 본다. 더구나 특수한 목적에 악용될 경우에 대한 보완책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그 개발은 중지하는 것이 마땅하다. (정병조 동국대 부총장 '불교 윤리와 생명 복제' 中)-225쪽
언젠가 우리들은 뛰어난 소질을 가진 선량한 시민의 제일의 의무는 자기 자신의 혈연을 후세에 남기는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나아가서 바람직하지 않은 소질을 가진 사람들의 존속을 허용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문명을 발전시키는 데 최대의 과제는,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 가치가 덜한 사람들 또는 해가 되는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많아지도록 노력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 과제는 유전의 거대한 영향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한 해결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소질이 뒤진 사람들이 자손을 전혀 남기지 않도록 배려되기를 절실히 원하는 바이다. 특히 사악한 본성을 가진 경우에는 절대로 자손을 남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범죄인은 단종(斷種)해야 하고 정신박약아에 대해서는 자손을 남기지 못하도록 해야한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26대 前 美 대통령, 1913년 발언)-23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