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제는 정말로 비윤리적인가? 민음 바칼로레아 1
로렝 드고 지음, 김성희 옮김, 최재천 감수 / 민음인 / 2006년 1월
구판절판


1997년 유네스코 186개 회원국이 만장일치로 발표한 '인간유전체와 인권에 관한 일반 선언'은 제11조에서 "인간 존엄성에 반하는 행위, 즉 인간 복제 따위는 결코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같은 해 유럽 평의회 41개 회원국은 "유전자에 근거한 모든 형태의 차별을 금지하고 연구 목적이라고 하더라도 배아의 복제를 금지"하는 '유럽 생명 윤리 협약'을 채택했으며, 2001년 이를 다시 보완하여 "살아 있는(또는 죽은) 인간 생명체와 유전적으로 동일한 인간 생명체를 인위적으로 만들려는 모든 시도"를 금지하는 '인간 복제 금지에 관한 추가 의정서'를 채택했다. -11쪽

독일은 인간 배아에 대한 모든 종류의 실험을 금지한 반면, 영국은 인간 배아에 대한 각종 실험을 허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분야를 연구하라고 학자들을 격려까지 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복제를 무조건 반대하는 자크 시라크 대통령과 치료 목적의 복제 연구는 찬성하는 리오넬 조스팽 총리가 의견대립을 보인 적도 있다.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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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열정 - 지적 열정을 추구한 나의 삶, 나의 길
박이문 지음 / 미다스북스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박이문. 이름 세 자를 하얀백지에 써놓고 보면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들이 떠오른다. 박이문의 책을 두번째 읽는데 그를 직접 만나보거나 대화를 나누지 않았지만, 글에서 그 사람의 냄새가 느껴진다. 박이문의 냄새는 이렇게 설명해볼 수 있다. 신체는 이미 많이 늙었지만 배움에 대한 열정이 가득하고 언제나 사색을 끊지 않는다. 인생의 끝에 거의 다다랐지만 아직까지 나는 누구인가, 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으며, 그간 낸 수많은 저서들은 모두 그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자기'에 대한 고민을 거듭해왔다고. 이 책 역시 2005년의 박이문이 작성한 자서전이다.

  "나는 이미 약 20년 전에 <사물의 언어 - 실존적 자서전> 이라는 책을 펴낸 적이 있다. 그런데 새삼 이러한 자서전적 책자를 또 내는 데에는 그후 나의 외부에서는 꽤 많은 시간이 흘렀고, 나의 삶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생의 황혼을 피부로 실감하면서 나의 삶을 마지막으로 총정리할 실존적 요청을 실감하게 되었고, 덧붙혀 이러한 나의 초상화가 혹시 다른 이들, 특히 젊은이들의 삶에도 참고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설사 그것이 반면교사로서라도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이러한 자기반성을 통해서나마 앞으로 내게 남아 있는 삶을 조금이나마 더 보람 있게 살아보자는데 있다."

  이런 겸손한 노 철학자가 있나. 사실 박이문은 대학에서 불문학을 공부했고, 이후에 불문학 석박사를 취득하고, 젊은 나이에 일찌감치 이화여대 불문과 교수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박이문의 배움에 대한 열정은 교수자리로 충분치 않았고,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느즈막한 나이에 대학생이 된다. 미국의 남가주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석박사를 취득해, 그곳에서 또 25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가 불문학을 공부한 이유는 문학을 하기 위함이었고, 그것은 시였다. 박이문의 시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 - 아마도 내가 시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읽어볼일이 없을 듯 하다 - 그의 시도 그의 다른 글과 마찬가지로 자전적 성격을 띠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그러나 박이문은 시를 쓰면서 관심은 철학에 있었다. 불문학과 시가 해결해주지 않는 존재에 대한 의문과 자기자신에 대한 고민을 철학이 해결해 줄 수 있을거라 믿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미국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프랑스 철학에 심취했고, 여기서 해결되지 않는 갈증을 미국에서 해결해보려 했으나 오히려 실망만이 돌아왔다. 하지만 곧 실망은 기대로 바뀌었고, 열심히 사색을 이어갔다.

  그는 프랑스 문학을 공부했고, 시를 쓰고, 철학을 한다. 오랜 세월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이문에게 있어 갈증은 아직 남아있는 듯 하다. 자서전 성격을 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바는, 박이문이 아직도 고민을 멈추지 않고 있다는 것이며, 갈증을 풀어줄 뭔가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의 갈증은 죽음의 문턱에서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공부를 할수록, 고민을 거듭할수록, 물음을 던질수록, 아는 것은 점점 줄어들 것이고 알고픈 것은 점점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목마름은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직업으로부터, 철학으로부터, 모든 물질적, 사회적, 관념적 속박과 구소으로부터는 물론 애착으로부터도 해방되어 자유분방하면서 충만한 생명체로서 흰 구름처럼, 끊임없이 떠도는 바람처럼 존재하고 싶다. 철학적 사유처럼 투명하고, 예술작품처럼 아름답고, 종교적 삶처럼 열정적으로 살고 싶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모두 '- 싶다'로 끝맺는다. 뭐 그리 하고픈 것이, 되고픈 것이 많을까. 1930년 출생인 박이문의 나이 올해 일흔여덟이다. 지나온 삶을 정리하고 되돌아볼 시기에 그는 아직도 이팔청춘마냥 꿈을 꾸고 있다. 그러나 그 꿈은 헛되지 않다. 꿈이 있다는건, 꿈을 가진다는건, 삶에 대한 열정이 그만큼 크다는 말이다. 이제 늙었으니 집에서 소일하며 책이나 보고 손자손녀나 봐야지, 하는 할아버지 할머니와는 달리 그는 아직도 꿈을 가지고, 꿈을  실현하려 한다. 부럽다. 그의 인생이. 그의 열정이. 그의 삶이. 내 나이의 두 배가 훨씬 넘는 그를 보면서 열정이 식어버린 나를 반성하고, 나를 채찍질한다. 고작 그 정도였더냐 너의 질문과 너의 고민은 이제 해결되었더냐. 미궁에 빠진 채 나오려 발버둥치지 않고 그저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며 살아가려 하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20대의 내가 '우울한 허무주의자'였고, 30-40대의 내가 '철학적  허무주의자'였다면 오늘의 나를 나 스스로 '행복한 허무주의자'라고 자처하게 되었다. 나는 일상생활을 해 가는 과정에서 그 자체로서 무한한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지만, 내 인생 자체를 비롯해서 모든 사람 그리고 모든 존재와 현상들이 그 자체를 초월한 어떤 우주적 목적 즉 의미, 더 나아가서 우주 자체를 떠난 우주의 목적 즉 의미의 존재를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구약의 전도서가 되풀이 말해주듯이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생각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박이문은 허무주의자다. 그의 생각을 읽고 있노라면 허무주의자도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의 눈은 저 멀리 나아가 있다. 보이지 않는 끝없는 곳을 바라보고 있으니 모든 것이 허망하고 허무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20대의 우울한 허무주의자는 아니다. 그의 20대가 우울했던건 그만큼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혼란을 겪었기 때문일게다. 하지만 지금 그는 여전히 허무주의자이지만 적어도 행복하다. 여전히 고민은 남아있지만 그 허무함의 의미를 알기 때문이다. 애써 그 허전함을 메우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철학자라 칭하고 싶다. 그는 불문학자로 시작해 시인을 거쳐 철학자가 되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학위를 땄다는 의미에서 철학자가 아니라, 끊임없는 고민과 사색을 거듭하며 나의 인생을 채워나갔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부르고 싶다. 프랑스 문학도, 시도, 철학도, 박이문의 허무를 채워주지는 못했지만, 지나온 삶의 과정 자체가 그의 허무를 채워나가는 과정이었다. 철학계에 있어 대단한 업적을 남기지도 못했고, 이후 세월이 한참 지난 후 '한국의 철학자 ' 에 그의 이름은 포함되지 않겠지만, 그는 진정 철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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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07-05-23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겸손한 노학자는 저의 로망 중 하나예요. 어떡하죠. 나, 이번 달엔 책 안 사려고 했는데. 했는데. 했는데.... ㅠ_ㅠ

마늘빵 2007-05-23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했는데.. 했는데... 지르셔야죠. :)

비로그인 2007-05-24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중학이후, 평생토록 사숙하고 존경하는 '한국의 철학자'입니다.

 
인간복제의 시대가 온다 살림지식총서 183
김홍재 지음 / 살림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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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동 잉여 배아나 유산된 태아 외에도 인간 배아 줄기세포를 얻을 수 있는 제3의 방법이 있다. '인간 배아복제'로 체세포의 핵을 미리 핵을 제거한 난자와 융합시키는 체세포 복제 기술로 만든 배아에서 줄기세포를 추출하는 것이다.
인간 배아복제를 하면 복제 배아를 다량으로 만들 수 있다. 따라서 복제 배아에서 얻을 수 있는 줄기세포의 양도 엄청나게 많아지게 된다. 반면 냉동 배아나 유산된 태아의 경우에는 수가 한정되기 때문에 치료용으로 사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어왔다.
또 인간 배아복제에는 기존의 배아 줄기세포가 갖고 있는 면역 문제가 전혀 없다. 기존의 냉동 배아에서 추출하는 줄기세포는 만능 세포이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의 세포에서 면역거부반응을 일으킨다는 문제점을 지닌다. 백혈병 환자가 면역거부반응 때문에 자신과 비슷한 가족이나 형제를 찾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인간 배아 복제를 사용하면 이런 문제가 간단히 해결된다. 치료할 환자의 체세포로 복제 배아를 만들면 원본인 환자와 똑같은 유전정보를 갖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추출한 배아 줄기세포를 사용하면 그 환자를 치료할 때 가장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인간 배아복제 역시 윤리적인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40-41쪽

일란성 쌍둥이는 수정란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나뉘어져 두명으로 자란 것이기 때문에 유전정보가 완전히 똑같다. 개체의 발달을 총 지휘하는 유전정보가 같아도 쌍둥이가 완전히 똑같지 않은 이유는 밑바탕이 같아도 유전정보가 발현되는 과정에서 차이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유전정보의 발현 양상은 자라면서 접하는 주변 환경에 의해 많이 결정된다고 한다.
복제인간이 일란성 쌍둥이처럼 유전정보가 똑같다고 하더라도, 복제인간과 원본인 인간과의 차이는 일란성 쌍둥이보다 당연히 더 클 수 밖에 없다. 일란성 쌍둥이와 달리 복제인간은 몇 살이든 나이가 든 사람을 복제한 것이므로 나이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나이 차이는 복제인간을 일란성 쌍둥이보다 더욱 다른 환경에서 자라게 한다. -54쪽

인간복제를 찬성하는 측에서는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아이를 키우기를 원하기 때문에 입양은 그렇게 바람직한 해결책이 아니라고 얘기한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아이를 낳아서 키울 수 있는 자유를 엄연히 보장해줘야 한다면, 그 선택이 다른 사람이나 사회 전체의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인간복제는 당연히 허용돼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63쪽

인간복제를 반대하는 윤리적인 이유는 복제기술의 결과로 태어난 아이는 존엄성을 간직한 하나의 독립된 인간으로 취급되지 못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복제인간은 불임 부부가 됐든 동성애자가 됐든 다른 사람의 특정한 요구에 의해 태어나게 된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복제인간은 '고귀한 생명체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기 쉽다. -72-73쪽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제된 아이의 성과를 별개로 보지 않고 원본과 함께 놓고 볼 가능성이 크다. 복제로 태어난 아이가 밤을 새가면서 열심히 공부해 반에서 1등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뛰어난 원본이 존재하면 복제인간이 거둔 성과는 그의 노력 때문이 아니라 유전자의 덕 때문이라고 폄하될 수 밖에 없다. 즉, 독립적인 별개의 존재로 여겨지지 않는 것이다. -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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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22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인간 복제'라는 말만 보면...17살 때, 등 떠밀려 썼던 허접한 논술이 생각납니다.
'인간 복제의 찬.반론에 대하여'라는 주제를 가지고 절충형을 썼었는데.
등 떠밀려 쓰다 보니, '주관'이 맥주 김 빠진 듯 써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정말 성의없게 썼는데도 작은 상이라도 받은 것이 참 부끄러운 과거입니다...(긁적)
하지만, 지금도 다시 쓰라 하면, 여전히 저는 절충형 논술을 쓸 것입니다.
분명, 그 '장.단점'을 확실히 알고 있으니까요.
문제는 인간이 '지나침의 선'을 넘을까, 넘지 않을까 하는 것이 관건.

마늘빵 2007-05-22 12: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엘신님 이건 자랑댓글인데요? ㅎㅎ
절충형 논술은 위험하죠. 잘못하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게 되어버리기 때문에.
학생들이 많이 선택하는 것이 절충형인데 저는 가급적 한쪽을 선택하라고 말합니다. 안되는건 아니지만 대개는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식이 되기 때문에.

비로그인 2007-05-22 14: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렇습니까. '절충형'에 대한 인식이 다소 다른군요, 저와.
저는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식'의 절충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줏대 없잖아요.
제가 말한 절충형은 찬.반론의 양측 입장을 모두 표현한 것을 말합니다.
어찌 보면 어느 쪽의 입장도 아닌 것 같지만, 사실은 양쪽 모두를 비판함과 동시에 -
양쪽 모두를 밀어주는 형식이랄까요. 사실, 다른 모든 분야에는 거의 한쪽의 주관을
강하게 밀고 나가는 스타일입니다만, '인간 복제'라는 주제에 한해서는 -
그 어느 쪽에도 손을 들어주고 싶은 생각은 없으며, 객관적인 입장을 취하고 싶으니까요.

객관적인 입장을 표현하는 것도 학생들의 '주관'이 될 수 있으므로 -
아프님의 사견대로 어느 한 쪽을 택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이 머리가 굳어지면서 스스로 판단 기준을 자연스럽게 만들어가도록 유도해야지,
어른이 개입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만. (웃음)

혹시, 제 반론에 기분 상하신건 아니시죠? 솔직히, 아프님이니까 이런 논쟁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웃음)

마늘빵 2007-05-22 15: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핫. 아니요. 저는 한쪽으로 밀으라고 하는게 아니라, 음. 뭐랄까. 양시양비를 하게 되면 애매모호하고 주관이 없어보일 수 있으니깐 자신이 없다면 한쪽 입장을 취하는게 낫다라고 하는거죠. :) 물론 하고픈 사람들은 주관이 있다면 뭘하든 상관없다고 이야기합니다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더군요. 확고한 생각이 없으면서 애매모호하게 쓰는 경향이 있어서 경계심을 주기 위해 그리 말한거랍니다. 여러가지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습니다. :)


비로그인 2007-05-22 15: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흐음 - 그렇군요.
하긴, 아프님이 생각없이 그리 할 분이 아니시지. (웃음)
제가 경솔했습니다. (꾸벅)

마늘빵 2007-05-22 2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생각없이 그리 할 분입니다. 크흣. :)

비로그인 2007-05-23 1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후하핫.

302moon 2007-05-23 2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 분, 대단하십니다. 덕분에, 엄청 웃었습니다. / 이 책도 리스트에 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마늘빵 2007-05-23 22: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302moon 님 / 아니 이 은밀한(?) 대화를 보셨군요. :) 요즘 인간복제 관련 책들을 보고 있는데, 음 이 책은 객관적인 입장에서 양쪽 모두를 소개한 종합적인 책입니다. 살림총서라 얇지만 정리는 잘 되어있는듯. 다만. -_- 황우석 박사 이야기가. 음. '거짓말 들통' 이전에 시간이 멈춰있습니다.
 

2007. 5. 22 예스24

http://movie.yes24.com/movie/movie_memwr/view.aspx?s_code=SUB_MEMWR&page=1&no=15668&ref=65&m_type=0




* 스포일러 경고

SF 천재 작가로 불리우는 필립 K. 딕의 원작소설 『골든맨』을 영화화한 <넥스트>는 소재 자체의 신선함에도 불구하고 전형적인 액션영화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실제 소설 속 주인공의 초능력은 유전자 돌연변이로 인해 생겨난 것이며 그 배경은 미래라 하지만, 영화에선 능력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에 대한 언급은 아예 없고, 배경 또한 현재이다. SF는 기본적으로 과학기술의 발전 내지는 변형ㆍ조작을 통해서 미래사회의 모습을 들여다봐야 하는데 이런 기본조건들이 충족되지 않았으니 당연히 SF 느낌이 나지 않을 밖에. "필립 K. 딕" 원작 소설이라는 문구를 보고 영화관에 입장한 관객들은 영화 시작 전 머리 속에서 "필립 K. 딕"을 지워버려야 할 것이다.

라스베이거스의 싸구려 마술무대에 서는 크리스 존슨. 사실 그는 마술사가 아니라 초능력을 가진 특별한 존재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2분 먼저 볼 수 있다는 건 대단한 능력이자 행운이다. 하지만 남들과 똑같은 평범한 삶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숨긴 채 마술쇼로 생계를 이어간다. "내"가 개입된 사건에 대해서는 무엇이든 2분 뒤의 상황을 미리 예측할 수 있고, 이미 조금 뒤의 상황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미래를 바꿔놓을 수 있다. 내가 죽는 순간까지 예측할 수 없다 할지라도 단 2분은 충분히 나의 미래를 바꿔놓을 수 있다. 중국 베이징에서 나비가 날개짓을 하면 다음날 미국 뉴욕에 폭풍을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나비효과처럼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2분이지만 잠깐의 2분은 이후의 모든 것을 바꿔놓을 수 있다.

언젠가 버스 안에서 내 앞에 앉아있던 그 여자 참 마음에 들었는데 어떻게 작업을 할까. 언제 내가 그 여자를 봤던 것도 아니고, 잠깐 버스 안에서의 우연한 스침일 뿐인데 우연을 인연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머리 속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오른다. 어느 광고처럼 "저 지금 내려요" 라고 말하고 내려버릴까, 아니면 막무가내로 "저 연락처 좀 주시겠어요" 하고 대놓고 데이트 신청을 할까, 그도 아니면 그녀가 내리는 정거장에서 같이 내린 다음 "도를 아십니까" 하고 접근할까. 여러 가지 가능한 작업들을 떠올려보고 2분 뒤를 예상한다. "저 지금 내려요" 했더니 대답이 없다, "저 연락처 좀 주시겠어요" 그랬더니 그냥 내려버리더라, 그런데 "도를 아십니까" 했더니 "어머! 저 도에 관심 많아요" 하고 대꾸하더라. 어떤 방식이 그녀에게 먹힐지는 시도하기 전엔 모른다. 하지만 2분 뒤를 예상할 수 있다면 아무리 쑥맥이어도 작업은 통한다.

내 삶의 시작부터 끝이 정해져 있다면, 다시 말해 운명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나는 운명을 바꿀 수 있다. 2분 뒤에 벌어질 일들을 예상하고 나는 정해진 운명을 거부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삶을 개척해나갈 수 있다. 버스 안의 그 여자와 내게 그저 한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을 함께 가는 정도가 정해진 운명의 전부였다면 나는 운명을 거부하고 그녀와의 로맨스를 만들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다.

 

잠깐만 기다려. 좌측 12시 방향을 겨냥해. 자신과 관련된 사건이라면 2분 뒤를 예측할 수 있는 크리스는 여러 목숨 살려냈다. 하지만 이 기이한 능력 때문에 그렇게 바라던 평범한 삶은 떠나갔고, 나는 지금 여기서 이들과 함께 총격전을 벌이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그녀는 또 어디에.

철학자 스피노자(1632~1677)는 그의 책 『에티카』에서 "주어진 일정한 원인에서 필연적으로 결과가 생긴다. 이와 반대로 일정한 원인이 주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어떤 결과도 생길 수 없다."라고 말했다. 세상의 어떤 일도 우연히 일어나는 법이 없으며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은 신에 의해 미리 결정된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신의 변치 않는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된다는 말이다.

"정신 안에는 절대적이거나 자유로운 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신은 이것 또는 저것을 의지하도록 어떤 원인에 의해 결정되며, 이 원인 역시 다른 원인으로 인하여 결정되고, 이것은 다시금 다른 원인에 의해 결정되며, 이렇게 무한히 진행한다." (『에티카』, 스피노자 저, 강영계 역, 서광사, 116쪽)

결국 내가 자유롭게 나의 자유의지에 따라 행위한다고 생각하는 그 어떤 것도 결코 자유롭지 않다. 모든 행위의 원인에는 원인이 있고, 그 앞의 원인이 있고, 무한히 소급해 들어가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크리스가 기다리는 식당으로 리즈가 오게 된 것도, 거기서 그녀를 쫓아온 남자를 만나게 된 것도, 현실에서 오늘 내가 영화 <넥스트>를 혼자 보러 간 것도, 극장을 용산CGV로 택한 것도, 가는 길에 은행에 들러 현금인출을 한 것도 모두 나의 자유의지의 결과가 아니다.

내가 고통에 처했을 때도 그것은 운명이니 그냥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도, 우리집의 가난을 벗어날 길이 없어 보이는 것도, 남들 연봉 3000만원씩 받아가며 차 굴릴 때 학자금 대출 갚아가며 버스 타고 다니는 것도 모두 운명이니 받아들여야 하는가. 고통은 우리가 고통의 원인을 확실히 인식할 때 벗어날 수 있다. 비록 주어진 상황과 현실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것을 객관적인 인과관계 속에서 파악할 때 비로소 마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왜 남들 자가용 끌고 다닐 때 나는 버스를 타야 하는가, 왜 이 좋은 여름날 남들 이쁜 사랑 나누며 데이트할 때 난 방구석에서 타자 치고 있어야 하는가, 기타 등등의 현실 속에서 왜 그것이 필연적인 일인지를 인식할 수 있다면, 우리는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이성의 힘으로 극복 가능하다. 우리가 고통을 겪는 건 정념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오직 이성에 의해서만 산다면 자기존재를 보존하면서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하였다.

 

영화 <매트릭스>는 저리 가라. 네오는 빠른 몸놀림으로 총알을 보고 피했지만 크리스는 저격수의 위치도 모른 채 네오보다 어설픈 동작으로 총알을 피한다. 멋대가리 하나 없지만 총알 피하는 솜씨는 일품이다.

인간의 삶에서 고통을 제거할 수는 없다. 지금 외제 스포츠카 굴려가며 떵떵거리고 살던 사람이 내일 사고로 죽을 수도 있고, 지금 서울역 앞에서 노숙자 생활을 하는 사람이 뛰어난 소설을 써서 작가로 등단할 수도 있다. 고통과 불행은 언제라도 우리를 찾아올 수 있고, 행복 또한 언제라도 우리를 찾아올 수 있다. 불행한 운명은 우리의 2분 후를 예측함으로써만 행복한 운명이 되는 것은 아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면 고통과 불행을 미리 차단할 수 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을 바꿀 수는 없지만 상황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갖느냐에 따라서 "현실의 인식"은 바꿀 수 있다. 똑같은 상황에서 너 없이는 못산다, 차라리 죽겠다, 고 결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래 내가 너 아니면 못사냐, 두고 봐라 너보다 더 좋은 남자 만난다, 고 마음을 다잡는 사람도 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은 나뿐 아니라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불행이다. 함께 겪고 있는 많은 이들을 생각한다면 나의 고통은 한결 가벼워질 것이다.

2분 후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크리스 존슨의 삶은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그는 분명 못난 외모와 허술한 옷차림, 어눌한 말투로,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리즈에게 접근해 작업에 성공하긴 했지만 그의 특별한 능력을 써먹기 위한 FBI와 악당들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모든 사람이 2분 뒤를 예측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특별한 능력도 아니며, 내 인생의 미래를 바꿔주지도 못할 것이고, 나 혼자만 2분 뒤를 예측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시기의 대상이 될 것이다. 나의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은 지금 당장은 유용할지 모르나 장기적으로 보아 내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 같지는 않다. 결국 행복이란 마음먹기에 달려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대학입학을 앞두고 어느 대학을 가야할지, 결혼은 언제쯤 할지, 배우자는 어떤 사람을 만나는 게 좋을지, 어떤 직업에 종사하는 게 적성에 맞는지, 지금 만나는 여자친구와의 궁합은 어떤지, 심지어는 내 성격은 어떻고, 나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묻기 위해 점집을 찾는다. 하지만 그들은 정말 자신의 미래를 알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지금의 내 답답한 심정을 토해내고 들어줄 맞장구쳐 줄 사람이 필요해 점집을 찾는 것이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누군가 시원하게 결정해주고 이 길로 걸어가라고 말해주길 바라면서. 하지만 내 인생은 결국 내가 결정해야만 하는 것이고, 내 결정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져야 한다. 내 인생에 있어 중요한 결정을 남에게 맡기는 건 책임회피에 불과하다. 고통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긍정적으로, 내 인생의 결정은 내가.

"내일 지구가 멸망할지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스피노자는 고통을 고통으로 받아들이기보다 극복하고 깨고 나가야 할 대상으로 인식했으며, 오늘 고통을 겪지만 이후에 다가올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나만 괴롭고 힘든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도 다 괴롭고 힘들다. 다만 처해있는 상황과 현실이 다를 뿐. 미래를 볼 수 있다면 미래를 바꿀 수 있겠지만 우리는 미래를 볼 수 없고 현재의 고통만 느낄 뿐이다. 2분 뒤 미래를 예언하려고 하기보다 지금 처해있는 현실의 고통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생각하라. 그것이 현명하게 현실을 극복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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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채식주의자가 되었는가 - 채식주의자가 된 미국 최대 축산업자의 양심 고백
하워드 F. 리먼 지음, 김이숙 옮김 / 문예출판사 / 2004년 1월
평점 :
절판




  "나는 왜 채식주의자가 되었는가." 

  대놓고 스스로에게 묻는 직설적인 질문은 그만큼 시원스런 대답을 안겨줄 것 같고, 이 책을 읽는 이로 하여금 함께 동참하고픈 욕구 내지는 의지를 불태우도록 할 것 같지만 내용은 그렇지 못하다. 피터 싱어에 대한 관심으로 동물을 함부로 도살하고 먹을 권리가 인간에겐 과연 있는가, 라는 의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었고, 비록 피터 싱어의 저서보다 이 책을 먼저 손에 들었지만, 기대한 만큼은 아니었다.

  이 책이 설득력을 갖는다면 그건 과거 미국의 최대규모의 축산업자였던 하워드 F 리먼이 업계동료들을 등지고 실태를 고발했다는 것이며, 생각끝에 스스로가 채식주의자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 사실만으로 이 책을 보지 않고도 충분히 사람들에게 어필이 되었고,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자신이 몸담았던 분야를 뛰쳐나와 그들의 등에 칼을 꽂고 진실을 고발할 수 있는건 대단한 용기다. 지금까지의 인맥과 친분, 그들의 비판과 욕설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을 내던지지 않고서야 이런 모험을 하기는 힘들다. 결국 그는 '음식물 경멸법'이라는 묘한 법에 의해 최초로 고발당한 사람이 되었다. 

  4대째 이어져온 축산업을 가업으로 물려받으며, 그는 제초제, 화학비료 등으로 길러진 가축들이 인간에게 어떤 해악을 끼칠지에 대해서는 생각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날 이런 고민을 하기 시작하면서 관련된 자료들을 찾아 공부를 하게 되었으며, 실제로 화학비료와 좁아터진 가축의 성장환경이 그들에서 멈추지 않고 도살된 고기를 먹는 인간에게 악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오프라 윈프리 쇼에 나와 실태를 고발했고, 이후에도 이렇게 길러진 가축고기가 인간에게 왜 문제가 되는지, 어떤 나쁜 영향을 끼치는지를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은 하워드 리먼 본인이 대규모 축산업자에서 채식주의자로 변신한 과정을 서술한 자전적 에세이다. 그는 우리가 고기를 먹어서는 안되는 이유에 대해 여러가지를 말한다. 소를 기르는 축사가 매우 좁아 소들에게 스트레스를 주며, 스트레스를 받으며 자라난 소고기를 먹는 인간에게도 그 영향이 미친다는 점, 소 먹이는 이미 죽은 소나 불구가 된 소를 죽여서 모든 부위를 다 갈아만든 사료를 주로 사용하며, 소가 소를 먹게 되면 처음엔 아무 이상이 없지만 시간이 흐르고 누적되며 점차 이상증세가 발생한다는 점, 그것이 광우병이고, 인간에게 옮겨갈수도 있다는 점 등의 근거를 든다.

  또한 좁은 축사에서 기르지 않고 방목해서 기른 소들에게는 문제가 없는가, 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물론 소에게는 문제가 없지만 넓은 목초지에 방목하여 소를 기르게 되면, 목초지의 토양이 훼손되고, 나아가 자연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환경보존을 위하여 소를 대량으로 사육하지 않도록 해야하고, 그러자면 수요를 줄여야하니 우리 인간이 식용으로 소를 먹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친절하게도 '날씬한 몸매를 꿈꾸는 사람들의 희망'으로서 채식을 주장한다. 고기 다이어트라는 것도 있지만 고기만 먹으며 다이어트를 했을 때 생기는 부작용은 뼈가 약해진다는 사실이다. 골다공증의 위험이 있고, 고로 다이어트를 위해서 고기를 먹는 것도 좋지 않다고 말한다. 건강도 챙기고 몸도 날씬해지려면 결국 채식 밖에는 없다는 말이다.

  이런저런 근거를 들어가며 결국 고기를 먹어선 안되고, 모두에게 이로운 채식을 하자고 하는데, 사실 실천하기까지는 매우 힘겹다. 무엇보다 내가 채식을 결심했다고 해도 함께 사는 가족들이 동참해주지 않으면 실천이 힘들고, 더구나 한국같이 개인보다 전체를 중요시하는 집단문화가 강한 사회에서는 왕따 당하기 십상이다. 회식자리는 당연히 삼겹살 집이 되기 마련이고, 나 하나 개인의 의견은 반영되기 힘들다. 그렇담 다수의 의견에 따라 삼겹살 집에 갔다고 치자. 그래도 문제는 남아있다. 모두들 열심히 상추에 고기 싸먹고 소주잔을 들이킬 때 나는 옆에서 젖가락으로 샐러드나 끼적대고 있어야 한다. 내가 괜찮다 해도 남에게 지나치게 관심이 많은 그들은 나를 배려한답시고 그 자리를 불편해할 것이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성을 우선시하느냐, 아니면 나 개인의 소신과 결정, 자연환경, 건강을 중요시하느냐, 의 갈림길에서 선택은 쉽지 않다. 둘 다를 취하기는 힘든 것이 현실이다.

  P.S. 나는 이 책을 읽기전, 저자가 채식주의를 결심한 이유가 건강이나 자연환경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동물의 지위에 대한 고민과 사색 때문이길 바랬다. 하지만 저자의 채식주의 결정은 지극히 인간중심적이었고, 동물에 대한 배려는 털끝만치도 이 책에서 언급되지 않았다. 인간이 동물을 함부로 먹어도 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싶었지만, 육식이 인간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가, 에 대한 답변만을 들어야했다. 같은 채식주의라고 할지라도 저자처럼 육식이 인간에게 해롭기 때문에 채식주의를 결정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약육강식 싸움에서 승리한 인간이 하등한 동물을 잡아먹는 것이 불합리하고 불공정하다고 판단해 채식주의를 결정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결과는 '채식주의' 지만 그 도출과정은 분명 차이가 있겠다. 난 이 책이 후자에 대한 답변이길 기대했으나 책은 전자에 대한 답만을 들려주었고, 이 점이 참 아쉽다. 내가 원하는 대답은 아무래도 철학자 피터 싱어에게서 얻어야 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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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21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리먼의 논리가 양적인 성격이라면 싱어의 이유는 질적인 만큼
육식에 대한 좀더 근원적인 문제 제기라 할 수 있겠지요,
인간에게 이용되기 위해 사육되는 동물들, 자연에서 사는 야생동물들 모두
그들의 현재와 미래의 운명이 인간의 판단(필요성 or 호의)에 속해 있다는 것이..
자연스럽거나, 또는 공정하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상대적으로 무력한 생명체의 생존 권리.. 경제적 가치와 무관한..


전호인 2007-05-21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렵네요. 자연환경은 어차피 약육강식의 논리에 따라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은 모두에게 공통된 논리일 거라고 봅니다. 그러한 체계가 깨지게 되면 파멸로 이르거나 또다른 변종이 발생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저는 그냥 단순한 사람이기에 먹는 문제에만 국한시키고 싶네요. 먹는 것은 육식을 먹든 채식을 먹든 본인의 체질에 따라 적당히 균형을 맞추면서 섭취하면 될 것이고, 이것을 지나치게 따지다보면 살면서 즐길 수 있는 한가지 요소인 맛을 잃어버리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

향기로운 2007-05-21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이 달아두신 PS가 책보다 더 눈에 띄네요..^^

비로그인 2007-05-21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ps에 추천 보냅니다 :)

마늘빵 2007-06-12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님 / 네. 리먼은 아무래도 생각의 범위가 협소합니다. 축산업자였다가 채식주의자로 변신한 자신에 근거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니까요. 싱어가 보는 시각을 넓혀주리라 생각합니다. 조만간 싱어의 책도 읽어봐야겠어요. 제가 육식을 멈춘건 아니지만 고기를 먹더라도 더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전호인님 / 네 자연환경은 약육강식에 의해 지배될 수 밖에 없지만, '자연스러움'을 빌미로 하여 혹 인간이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적어도 소나 닭을 좁은 공간에 가득 밀어넣고 스트레스주며 사육하는 것에 대해서는 문제제기를 할 수 있지 않나 싶어요. 육식을 계속 한다해도요.
향기로운님, 체셔님 / ^^ 감사합니다.

네꼬 2007-05-21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저는 고민이에요. 다 좋은데.... 전 고기가 맛있거든요. 어떡하죠? ㅠ_ㅠ

마늘빵 2007-05-21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냐옹이는 생선을 먹어야지. 고기를 먹음 어떡해!

전자인간 2007-05-21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에서 채식주의자로 살아간다는 것의 어려움은 저와 같은 부서에서 일하던 인도인 채식주의자로 인해 뼈저리게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그가 포함된 회식장소 정하는 것 자체가 채식주의자 되기만큼 힘들었으니까요. 어쨌든 저도 PS에 추천을 드리며, '동물의 입장에서' 채식주의를 옹호하는 글을 보시려면 제인 구달을 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네요.

앨런 2007-05-21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한국에서 채식주의자로 사는 건 너무 어렵습니다.^^ 외식은 거의 불가능하거든요. 메뉴판에 채식위주의 상품들도 많이 등장했음 좋겠어요.

마늘빵 2007-06-12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자인간님 / 제 근무지에도 아일랜드에서 온 젊은 여자분이 계신데, 이 분도 근무지 식당에서 밥먹기 참 힘들거 같더군요. 영어가 안되니 괜찮은지 물어보지도 못했지만, 그녀의 식판에 오르는 것들은, 동물성 지방질이 포함된건 전부 제외됐습니다. 근데 함께 온 남편은 또 고기를 먹더군요. 같이 살기 힘들거같은데. 제인 구달, 본다본다 해놓고 아직 못 봤네요. 피터 싱어와 함께 봐야겠습니다. 추천 감사합니다.
앨런님 / 네 외식이 거의 안돼죠. 주변에 어떤 곳이 있나 잠시 생각해보니, 없군요. 결심하기까지도 힘들지만, 실천하기에는 여건이 안따라줍니다.

의진 2008-02-05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는 완전 채식도 아니고 일부 채식인데도 밖에서 밥 먹기가 넘 힘들어요. 김밥을 먹어도 뭐뭐 빼주세요 이렇게 주문해야 하는데, 귀찮아하더라고요. ㅠㅠ 한국식 식단이 채식에 더 유리할 줄 알았는데...

마늘빵 2008-02-05 18:09   좋아요 0 | URL
네. 사실 그런거 같아요. 부분채식도 하기 힘들죠. 한국에서는 거의 모든 음식에 육수 내지는 고기덩어리 조금이라도 들어가기 때문에. 아예 채식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지 않는 한 불가능할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