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 에세이 - 개정증보판 동녘선서 70
김교빈.이현구 지음 / 동녘 / 2006년 2월
구판절판


공자의 인은 사람다움을 구현하는 과정입니다. 공자는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면 예절을 갖추어야 무슨 소용이 있으며,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면 음악을 잘 연주해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람답지 못한 사람들을 낮추어 개 같다, 돼지 같다 하는 표현을 씁니다.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면 아무리 겉이 번드르르해도 아무 소용이 없으며,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면 아무리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만들거나 훌륭한 글을 쓴다고 해도 기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제 시대, 훌륭한 글을 쓴 사람들이 한편으로 정신대나 학도병에 지원하라고 열심히 외치고 다녔던 일이 있습니다. 그렇제 좋은 일이고 옳은 일이라면, 남에게 권하기에 앞서 자신이 먼저 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거짓임이 분명하고 사람다운 행동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사람다움을 실천하는 일이 나의 임무이며, 죽은 뒤에나 그만 둘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공자편) -51-52쪽

공자의 자공의 대화

"정치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경제를 풍족하게 하고, 국방을 튼튼히 하고, 백성들이 믿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세 가지 중 어쩔 수 없이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포기하시겠습니까?"
"국방을 포기하겠다"
"둘 가운데 다시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포기하시겠습니까?"
"경제를 포기하겠다. 예부터 사람은 누구나 죽는 법이지만 믿음이 없으면 아예 사회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논어> '안연'편)-58쪽

도는 길입니다. 길은 사람들이 다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다니면 길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사람이 길을 넓히지, 길이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길 아닌 곳으로 가면 가시 덩굴이나 진흙탕에 빠져 고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길로 가야 합니다. 사람이 마땅히 가야 하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도리입니다. 요즈음은 인도보다 차도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사람이 갈 길에 차들이 점점 쳐들어와 인도가 차도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도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 중략 ...

차는 사람이 몰고 가는 것이므로 차도도 결국 인도입니다. 공자는 어진 사람이면 차를 타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바람이 치는 날, 막 뒤집힐 듯한 우산을 요리조리 가누면서 인도로 걸어가는 사람과 자가용 뒷자리에 편안히 앉아 음악을 들으며 차도로 가는 사람을 상상해 봅시다. 얼마나 불공평합니까? 그러나 공자는 차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이 걸어가는 사람에게 흙탕물을 튀기지 않도록 주의하는 정도의 배려만 있다면 이런 불평등은 문제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자는 길을 넓히는 데 반대하지 않으며, 때로는 새 길을 만들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장자는 공자의 말이 그럴듯 하긴 하지만 실제로는 속임수라고 합니다. 사람다운 사람은 차도로 가도 좋고 길을 넓힐 수도 있다는 공자의 말은, '사람다운 사람'의 이름을 빌린 인간들이 길을 넓힌단든 명목으로 이웃 나라를 침략하는 것을 옹호해주고, 가난한 백성이 부역과 전쟁에 동원되어 가족과 떨어져 객지에서 죽고 마는 상황을 합리화한다고 장자는 생각하였습니다. 공자가 군대(군사력, 식량(경제력), 백성들의 신뢰(권력의 정당성) 가운데 정치가가 끝내 잃어서는 안되는 것은 백성들의 신뢰라고 한 것을 생각해보면, 장자의 비난이 지나친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장자는 '부국강병'을 외치는 법가나 '도덕 정치'를 외치는 유가나, 춥고 배고픈 백성들의 눈으로 보면 그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장자편) -119-120쪽

아름다움과 추함이 구분되면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고, 추한 것을 싫어하게 됩니다. 또 좋아함과 싫어함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선택하고, 싫은 것을 버리게 합니다. 이러한 분별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좋은 것을 차지하고 싫은 것을 벗어나려 경쟁하고 싸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물이 연관되어 있고 세계가 하나임을 아는 사람을 지극한 사람, 달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는, 세상에 쓸모없는 존재가 없습니다.

(장자편)-136쪽

장자는 사람들이 미인 대회를 열어 고르고 고른 미인이라도 물고기가 보고는 물속으로 숨고, 새들에게 다가가면 날아가 버리고, 사슴이 보고는 결사적으로 도망칠 것이니, 미인 대회에서 뽑은 미인은 진정한 미의 기준에 맞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편견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과 동물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판단 차이를 비유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장자는 세상에서 소외된, 세상의 기준에서 비정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온전한 덕과 인간미를 가졌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장자의 주장은 우리가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세상의 본래 모습을 볼 수 있고, 이름 모를 풀 한 포기나 벌레 한 마리도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며, 싫어하고 미워하고 싸우던 사람들이 서로를 포용할 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장자편) -137쪽

순자는 인간의 화와 복은 오직 인간 자신의 노력에 달려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순자의 생각은 인간의 지위와 실천을 극대화한 인물 정신의 완성이었습니다.
하늘과의 관계를 끊어버린 순자의 눈에 보인 인간의 참모습은 자신의 욕심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는 존재였을 뿐입니다. 이것이 순자의 성악설입니다. 순자의 성악설은 판도라의 상자인 셈입니다. 그러나 순자의 판도라 상자 속에는 악한 본성을 이겨 나갈 숭고한 인간의 의지가 남아있었습니다. 순자의 철학이 인문 정신의 극치를 보였음에도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본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 순자는 마치 프로메테우스처럼 뒷날 많은 학자들에게 두고두고 비판받는 고통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순자편)-180쪽

"아주 옛날에는 임금도 없고 신하도 없었다. 사람들은 우물 파서 물마시고 밭을 갈아 먹었으며, 해 뜨면 일하고 해 지면 쉬었다. 매이지 않은 배처럼 자유로웠고, 편안하며 만족했다. 경쟁이 없고 영리를 바라지 않았으며, 명예도 없고 치욕도 없었다.
만물이 서로 화합하여 자연의 도에 드렁가므로 역병이 유행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은 완전한 삶을 누릴 수 있었고, 마음이 착해서 욕심이 없었다. 입에 먹을 것을 물고 즐기면서 배를 두드리고 놀았다. 그들의 말은 화려하지 않았고, 그들의 행동에는 꾸밈이 없었다. 이러한 사회에서 어떻게 무거운 세금을 매겨 백성의 재산을 빼앗을 수 있었겠는가? 어떻게 엄한 형벌을 받아 굴에 갇힐 수 있었겠는가? "
(갈홍, <포박자> '힐포'편 : 포경언의 말)

-278-279쪽

"임금과 신하의 신분이 생기면 변화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본래 수달이 많아지면 물고기가 놀라고, 매가 많아지면 작은 새가 근심하는 법이다. 부리는 사람이 늘어나면 인민은 고통스러우며, 위에 바치는 것이 많아지면 아랫사람은 가난해진다."
(갈홍, <포박자> '힐포'편 : 포경언의 말)-2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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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11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교빈의 동양철학 에세이는 "제목에 낚여" 아이들 교육용으로 한권 산적이있지요.
곧바로 쓰레기통..
한국의 고등학생용 교양목록 리스트에서 이 책이 사라지기를 희망합니다.
아프락사스님.

마늘빵 2007-05-11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저랑은 생각이 좀 다르시네요. 저는 한국의 역사적 상황과 관련하여 볼 수 있는 괜찮은 책이라 생각했는데요. 내용이 가독성이 높지는 않고, 문장이 조금 딱딱하기는 하지만, 다른 동양철학 대중서에서 보이지 않는 농가 등의 다른 부류도 넣었다는 점에서도 괜찮았구요.
 
지구 재앙 보고서 - 지구 기후 변화와 온난화의 과거.현재.미래, E Travel 1
엘리자베스 콜버트 지음, 이섬민 옮김 / 여름언덕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지구온난화에 대해 말들이 많다. 그 누구도 우리가 살고 있는 터전이 뜨거워져 동식물이 멸종하고, 삶의 터전이 사라지는 미래가 현실이 되길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 지구온난화의 위험성을 알리는 책들은 꽤 많이 나와있다. 아직 많은 책들을 접해보진 못했지만 어떤 책은 구체적인 통계자료와 수치를 통해 온난화의 위험성을 알리고, 어떤 책은 직접 재앙의 현장을 묘사하며 이렇게 변화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해준다. <지구 재앙 보고서>는 후자에 속한다. 하지만 그 세부묘사와 답사경험이 집 안에서 편히 누워 책을 읽고 있는 나에게 절실히 다가오지는 않는다.

  이 책은 엘리자베스 콜버트라는 미국 뉴욕타임즈의 기자가 쓴 책으로, 글을 읽고 있으면 기자의 필체가 확실히 느껴진다. 대개 전문가가 아닌 기자가 쓴 책은 잘 만들어진 한편의 보고서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하지만 그다지 호소력이 있다거나 행동의 변화를 꿰하지는 못하는 듯 하다. 지구 온난화를 이야기함에 있어 참고할 만한 자료로서는 손색이 없으나 이 책을 통해 아 이만큼이나 위험하구나, 나부터라도 생활 속에서 지구온난화를 지연시킬 수 있는 실천을 해야겠다는 다짐으로까지는 이어지기 힘들다는 말이다.

  오히려 얼마전 읽은 <기후의 역습>이 이 책 보다는 가독성도 높고, 확실한 그래프와 통계를 통한 수치도 제공해주며, 호소력도 강하다. 알래스카 주 데드호스, 레이캬비크 교외, 그린란드 빙상에 위치한 연구 기지인 스위스 기지 등 북극권 이북 지역을 저자가 직접 탐방하고 취재한 기록들을 담았다고 하는데 다소 산만하다.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다가 결국 도달해야 할 곳은 독자의 머리와 마음일텐데 거기까지는 힘겹다.

  온난화는 당면한 현실이고, 지금 이대로라면 암울한 미래를 지켜볼 수 밖에 없다. 지구 라는 행성에 살고 있는 인식가능한 개체라면 당연히 자신이 살고 있는 터전의 환경을 걱정해야 할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동식물의 생존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나의 생존을 위한 이기적인 마음에서라도 지구온난화의 현실에 대해 알아야 한다. 이 책은 그러한 인식에 도달하는데 보탬이 될 것이다. 더불어 <기후의 역습> 도 필히 읽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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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moon 2007-05-09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후의 역습, 서점에서 찾아봐야겠어요. ^^

마늘빵 2007-05-09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302moon 님. 네. 관련된 책들을 계속 살펴보려고 하는데, 아직까진 <기후의 역습>이 낫네요. 한권에 압축적으로 알려줄거 다 알려주고 호소력도 있고. 엘 고어의 <불편한 진실>도 한번 보고 싶습니다. 영화는 좋았는데 책은 어떨지.

네꼬 2007-05-09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히" 읽으라고 하시니 원, 모른 척할 수도 없고. 에잇. 땡스투 누르고 담아가요. 총총.

마늘빵 2007-05-10 0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 ^^ 흐흣.
 
지구 재앙 보고서 - 지구 기후 변화와 온난화의 과거.현재.미래, E Travel 1
엘리자베스 콜버트 지음, 이섬민 옮김 / 여름언덕 / 2007년 2월
절판


"추위가 오고, 더 많은 남쪽 지역이 북극형 생물에 적합한 환경으로 변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온난한 환경에 맞는 기존 생물은 밀려나고 북극형 생물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아울러, 온난한 지역의 생물은 남쪽으로 이동하게 되고 ... 기후가 다시 따뜻해지면 북극형 생물은 북쪽으로 물러가며, 온난한 지역의 종이 이들의 뒤를 바짝 쫓아간다. 그리고 산기슭부터 눈이 녹음에 따라, 북극형 생물은 동족이 북상하고 있는 동안, 해빙된 땅을 장악한 뒤 기온이 상승할수록 더 높은 곳으로 이동한다."
(다윈 <종의 기원> '지리적 분포' 편 中)-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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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 5. 9  예스24

http://movie.yes24.com/movie/movie_memwr/view.aspx?s_code=SUB_MEMWR&page=1&no=15511&ref=61&m_type=0

 

* 스포일러 경고

영화 <극락도 살인사건>을 본 관객들 사이에서 범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혹자는 여선생 장귀남(박솔미 분)이 마지막까지 살아남았으니 그녀가 범인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자는 보건소장 제우성(박해일 분)이 마을주민을 상대로 실험을 했으니 그가 범인이라고 지목하기도 한다. 영화를 이미 본 사람들 사이에서 이렇게 범인 여부가 확실히 가려지지 않고 의견이 나뉘는 것은 그만큼 영화의 결말이 애매하게 마무리되었다는 뜻이다. 감독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작품을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는 대개의 추리소설류에서 볼 수 있는 마무리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명확히 드러나는 것 하나 없는 결말과 미궁에 빠진 채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건, 그 사이에서 극장을 빠져 나온 관객들은 두뇌게임을 즐긴다.

수많은 추리들이 가능하지만 이 글에서는 제우성(박해일 분)이 범인이라고 가정하자. 박해일은 마을 주민들을 상대로 자신이 연구하던 신약 실험을 감행하기 위해 "보건소장"의 신분으로 마을에 잠입했다. 마음씨 좋고 친절하고 똑똑하고 게다가 잘생기기까지 한 보건소장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마을 주민이라고 해봐야 20명도 채 안 되는 작은 섬이지만 그 안에서 사람들은 사람 사는 맛을 즐기며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아간다.

조용한 섬마을에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살인사건. 아니 살인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밤새 고스톱을 치던 세 사람이 엉켜 피범벅이 되어있었다는 사실뿐. 아무 것도 밝혀진 것은 없다. 몇 안 되는 마을 주민들은 모여서 "어떻게 이런 일이!" 라는 놀라움에서 "누가 범인일까?" 라는 의심 품은 의문으로 넘어간다. 범인을 찾자. 분명 이 섬마을 안에 살고 있는 누군가의 짓이고,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누군가이다. 사건 그 날 밤의 일을 떠올리며 목격자를 찾아보자. 그러나 사건발생일로부터 날이 지날수록 사건은 더욱 미궁에 빠져든다.




 

* 하얀 가운 입고 해맑게 웃는 박해일이 범인이란 말인가. 정말로. 마을 사람들에게 더없이 친절하고 헌신적인 이 사람이 정말로 범인이란 말인가. 의심하라. 그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보건소장 제우성은 임상실험의 대상으로 섬마을 주민들을 택했고, 그들에게 처방해주는 약 안에 실험물질을 넣음으로써 장기적으로 그들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관찰하고자 했다. 애초부터 지금과 같은 결과를 예상했던 건 아니었다. 그 실험이 그들 몰래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잘못이라고 할 순 있겠지만, 적어도 그는 좋은 목적을 가지고 실험에 임했다. 그렇다면 애초 좋은 목적을 가지고 행했으나 의도하지 않은 잘못된 결과가 발생했다면 이는 누구의 잘못일까. 마을 주민을 대상으로 실험했던 제우성의 잘못일까.

의무론으로 살펴본 보건소장 제우성의 행동

철학. 그 중에서도 윤리학에는 의무론과 결과론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행동이 윤리적인가 비윤리적인가를 판단할 때 의무론은 우리가 지켜야 할 의무를 중시하는 반면, 결과론은 행위의 결과를 중요하게 여긴다. 길거리에 지갑이 떨어져있다. 열어봤더니 안에는 현금 5만원과 신분증과 전화번호가 있었다. 주인에게 연락해서 직접 돌려줄 것인가, 아니면 현금 5만원만 쏙 빼고 쓰레기통에 내다 버릴 것인가. 많은 이들이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흔히 전자를 착한 행동으로, 후자를 악한 행동으로 규정한다.

여기에는 아무런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에게 돌려줬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착한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행위의 원인에 대해 몇 가지를 생각해보자. 첫째, 신분증 사진을 보아하니 내 또래의 이쁜 여학생의 사진이 들어있다. 그냥 돌려주느니 이렇게라도 인연을 만들어 그녀와 어떻게 잘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 둘째, 5만원 다 가져가고 지갑 버리는 건 양심상 못하겠고, 주인에게 돌려주면 사례비로 조금 떼어주지 않을까. 사례비면 내가 부당하게 취한 이득도 아니니 양심의 가책을 받을 필요도 없다. 셋째, 당연히 사람 된 도리로서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 넷째, 지갑 잃어버리고 슬퍼하고 있을 그 사람이 불쌍하고 갖다 주면 행복해할 거 같아서. 그 외에도 행동의 몇 가지 원인을 더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중에서 셋째 당연히 사람 된 도리로서 그렇게 해야지, 라고 생각해서 지갑을 돌려줬다면 그는 의무론자요, 넷째 지갑을 잃어버리고 슬퍼하고 있을 그 사람에게 행복을 돌려주기 위해 지갑을 줬다면 그는 결과론자다. 의무론은 그 규칙을 지키는 행위가 옳은 행위라고 생각하는 이론이고, 결과론은 행위가 가져올 결과나 목적을 따져봐서 좋은 결과가 나오면 옳은 행위라고 판단하는 이론이다. 의무론에서는 의도만 좋다면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 할지라도 용서가 되지만, 결과론에서는 의도가 좋더라도 나쁜 결과를 가져왔다면 결코 용서되지 않는다. 거꾸로 나쁜 의도로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면 결과론에서는 허용되지만 의무론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제우성이 범인이라고 할 때 -범인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의 실험을 통해 사람들이 죽어나간 것은 사실이다- 그는 애초 신약 개발이라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실험했지만 그 결과는 살인과 자살이었다. 의무론에서 봤을 때 제우성은 좋은 의도를 가지고 실험에 임했으니 잘못한 것이 아니고, 결과론에서 봤을 때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실험에 임했지만 그 결과가 잘못되었으니 잘못을 범했다고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의무론자로 분류되는 칸트의 경우, "해야 함"은 "할 수 있음"을 함축한다. 할 수 없는 것을 해야 한다고 강요할 수 없으므로 할 수 있는 것만을 의무로 부과했고, 따라서 우리는 의무에 따라서 실천하고 행동해야 한다. 나에게 칼을 빌려줬던 친구가 어느 날 찾아와 시일이 됐으니 칼을 돌려달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친구는 굉장히 흥분해있었고 내게 누군가를 죽여버리겠다고 말을 했다. 이 상황에서 나는 친구에게 칼을 돌려줘야 하는가. 칸트에 따르면 그렇다. 내가 친구에게 칼을 빌린 것이 사실이고, 약속한 시일이 다 되었다면, 그와 같은 상황에서 나는 흥분한 친구에게 칼을 돌려줘야 한다. 나의 의무는 거기까지이고, 이후 그 친구가 실제로 그 칼로 누군가를 죽였든 말든 그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칸트에 따르면 그 결과와 상관없이 우리는 주어진 의무에 따라야 한다. 선한 동기, 선한 의도에 따라 의무를 다 했다면 그 결과는 어떻든 괜찮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여기에는 하나의 의무가 더 들어가 있다. "친구에게 칼을 돌려줘야 한다"는 의무도 내가 지켜야 할 의무이지만, "무고한 사람의 희생을 막아야 한다"는 의무도 내가 지켜야 할 의무다. 그러면 우리는 두 가지 지켜야 할 의무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결과를 염두에 두지 않고 동기와 의무만을 우선하는 의무론자들에게는 이러한 문제점이 발생하게 된다. 칸트의 입장에서 봤을 때 보건소장 제우성은 잘못이 없다. 신약을 개발해 앓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치료해야 한다는 의무에 의해서 실험을 했고, 비록 죽음이라는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오긴 했지만 그건 예상하지 못했던 바다. 적어도 그는 자신의 의무에 충실했다.




 

* 혹자는 박해일이 아니라 박솔미를 범인으로 지목하기도 한다. 그녀가 마지막까지 생존했고 박해일의 노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란다. 이미 영화를 본 나로서도 결과가 어찌되었는지는 머리 속에 명확한 기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영화를 보고 혼란을 겪는 사람들은, 그 혼란이 비단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알아두었으면 한다. 영화는 혼란한 틈새에서 홀로 빠져 나왔지만 우리는 아직 그 안에서 혼란을 겪고 있음을. 범인은 해석하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정해진 것은 없다.


결과론으로 살펴본 보건소장 제우성의 행동

정말 잘못이 없을까. 결과론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자. 결과론은 행위하는 사람의 의도가 아니라 결과에 따라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도덕 이론이다.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 의무나 규칙을 지키는 것보다 어떤 행동을 함으로써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를 살펴 더 좋은 결과가 나오는 행동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의도나 의무보다는 결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도덕 원리이다. 결과론에 부합하는 대표적인 도덕이론이 "공리주의"라는 것이다. 많이 들어본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문구는 공리주의의 대표적인 표어다. 엄밀히 들어가면,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는 엄격히 다르지만, 대개 공리주의가 추구하는 공리라는 것은 한 집단 내에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최대한 많은 행복을 누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벤담을 계승해 질적 공리주의를 주장했던 존 스튜어트 밀은 이렇게 말했다.

"옳은 행위의 공리주의적 기준을 성립시키는 행복은, 행위자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관련된 사람 모두의 행복이다. 그 자신의 행복과 다른 행복을 놓고서, 공리주의는 행위자로 하여금 공평무사한 선의의 관망자로서 엄격히 불편부당해지기를 요구한다." (<공리주의> 2장)   

공리주의의 입장에서 봤을 때, 제우성은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까. 20명도 안 되는 섬마을 주민들을 다 희생해서라도 신약 개발에 성공할 수 있다면 고통받는 더 많은 이들의 삶을 구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공리주의의 입장에서도 제우성은 잘못이 없다 하겠다. 그는 그들이 모두 희생될지를 예상하지도 못했지만, 설령 모두 희생되었다 하더라도 신약 개발에 성공했다면 그보다 몇 백배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실험대상이었던 마을 주민이 모두 죽었다면 그건 실험에 성공한 것이 아니므로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가져준다는 것 또한 거짓이다. 이들에게 투여해서 효과를 봤어야만 다른 이들에게도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가져다줄 이익은 이들의 생존을 전제한다. 제우성은 실험에 성공하지도 못했고 실험 결과 더 많은 이들에게 이득을 가져다 주지도 못했으므로 공리주의의 입장에서 봤을 때 그는 유죄다.

마무리 발언

제우성이 무죄이건 유죄이건 영화 속 섬마을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강한 의무감은 때로 도덕적 광신을 불러온다. 제우성은 세상의 고통 받는 사람들을 치료해주고 싶다는 자신에게 부과한 강한 의무감으로 무장했고, 결국 강한 의무감은 도덕적 광신 상태를 불러왔다. 그는 그가 치료하고자 하는 사람과 동일한 사람을 대상으로 무작위 실험을 했고, 실험결과 사람들은 죽음을 맞이했다. 타인에게 살해되건 스스로 자살하건 그도 아니면 미쳐버리건. 세상의 모든 짐을 다 지고 살겠다는 사명감을 지닐 필요도 없고, 누군가에게 그 짐을 지울 필요도 없다. 아무런 의무감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사회부적응자가 되거나 범죄자가 되기 마련이지만, 지나친 의무감을 자신에게 지운 자 역시 자신에게 마찬가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머나먼 이국 땅에서 32명을 살해한 승희-조가 어떤 작은 분노에 의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아보겠다고, 거기에 일조해보겠다고 그랬는지 단정지어 말할 순 없지만, 적어도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뭔가 잘못되어있었고, 자신의 행동으로 조금이나마 정화되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승희-조뿐 아니라 의무와 사명감이 광신으로 나아간 사태는 곳곳에 널려있다.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에 맞게 하라"는 칸트의 명언은 어디까지나 "보편적 입법"에 한해서다. 선을 넘어가는 순간 의무는 광신으로 돌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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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07-05-09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넘 멋쪄! *_*

비로그인 2007-05-09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굳~! ㅡ_ㅡb

마늘빵 2007-05-09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네꼬님과 테츠님께서 좋으시다니 저도 좋습니다.
속마음1 : 니가 좋은거야 당연하지. 니가 쓴건데.
속마음2 : 아니다. 내가 쓴거래도 맘에 드는건 별로 없다.

비로그인 2007-05-09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난 어렵지... ㅠㅠ...

antitheme 2007-05-09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스포일러 경고
이글 때문에 내용은 안봤어요.
담에 영화보고 나서 읽어보겠습니다.

마늘빵 2007-05-09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셔님 / 엄... 익숙한 분야가 아니라 그런가봐욤. 내가 어렵게 썼나? -_-a
안티테마님 / 넵. 스포일러 경고에요. 영화 보실거라면 이후에 보세요. :)

fallin 2007-07-25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멋진 리뷰네요^^의무론과 결과론..쉽고 재밌게 설명 잘하시네요ㅋㅋ 칸트의 칼이야기..과제때문에 읽었던 플라톤의'국가정체'라는 책에서도 나왔던 거 같아요. 철학이란 게 가끔은 말장난 같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또 어떻게 보면 참 재밌는 것도 같고...암튼 영화와 철학을 참 잘 접목시키셨어요..잘 읽고 가요 ^^

마늘빵 2007-07-25 22:28   좋아요 0 | URL
전적으로 제 머리에서 나왔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_- 그간 읽어온 책들에서 영향을 받았겠죠. 칼의 예는 여기저기 많이 나오는 것이고. 이런거 저런거 다 빼고 나면 남는게 없습니다. 크흣.

kitsch78 2009-03-20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에 맞게 하라"는 칸트의 명언은 어디까지나 "보편적 입법"에 한해서다. 선을 넘어가는 순간 의무는 광신으로 돌변한다.

이거 무슨 뜻으로 쓰신 것인지 모르겠네요. 칸트의 정의가 당연히 '보편적 입법 원리'를 준칙으로 삼은 언명인데, 어디까지나 '보편적 입법'에 한해서다라는 말씀은 왜 나오는 건지?
말은 멋있어 보이긴 하는데 알맹이가 없네요.

마늘빵 2009-03-21 11:1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이건 조승희가 어떤 사명감이나 의무감으로 일을 저질렀다면(가정과 추측), 사건을 벌인 조승희의 그 의무는 광신이라는 의미입니다. 칸트의 의무감이 아닌.
 
물리학자는 영화에서 과학을 본다 - 개정증보판 정재승의 시네마 사이언스
정재승 지음 / 동아시아 / 200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저자 정재승씨야 이미 언론에 많이 노출되었고, 그의 다른 책 <과학콘서트>가 티비 책 소개 프로그램에 한번 뜨면서 유명해져, 그의 '책'은 몰라도 그의 '이름'은 한번쯤 다 들어봤을 것이다. <물리학자는 영화에서 과학을 본다>는 정재승씨가 예전에 대학원 시절부터 <과학동아>에 '시네마 사이언스'라는 코너에 연재하던 글들을 기초로 하여 보완/보충하여 엮어낸 책이다. 철학과 영화의 결합은 더 이상 특별한 만남이라 볼 수 없고, 이제는 과학과 영화의 새로운 만남이 시도되고 있다. 이 책은 이러한 다른 분야들간의 이종교배가 이뤄지기 전인 1999년에 이미 만들어져 최근의 추세보다 먼저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 과학기술부인증우수과학도서'라는 마크기 찍혀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다 읽고 난 나로서는 인정하기 힘들다. 내용이 깊이있지도 않으며 무엇보다 영화 속의 실수, 오류 잡아내기에 주력하고 있는 책의 내용들이 썩 유쾌하지 않다. '오류를 잡아내기 위해 잡아내는 글'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399쪽에 달하는 상당한 두께의 책에서 그는 꽤 많은 영화들을 통해서 독자에게 과학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인상을 전해주기보다는 영화 속 과학적 오류 잡아내기에 집중하고 있다. 책의 앞부분에서 뒷부분으로 넘어갈수록 그래도 좀 나아지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그와 같은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대중이 과학에 좀 더 쉽게 다가가기 위해 영화를 매개로 삼아 작업한 것이라면, 프로젝트는 실패했다. 99년부터 17쇄를 찍었다고 하는데 이 책이 인기를 끈 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정재승'이라는 이름의 유명세가 그리 만든 듯 하다.

  글 자체를 놓고 봤을 때도 그다지 질적으로 우수하다고 할 순 없다. 역시 후반부의 글들은 괜찮지만 전반부의 글들이 문제다. 아마도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그 당시 저자가 텀을 두고 작성했을 가능성이 많고 - 연재물이다보니 - 이후에 추가 작성된 글들은 저자 개인의 역량이 좀더 발전한 상태에서 작성되었기 때문에 괜찮겠지만, 초반의 글들은 아니올시다이다. 연재물을 그대로 싣지 않고 다시 한번  손보면서 대거 수정/보완했다면 더 좋은 글들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베스트셀러가 된 그의 <과학콘서트>는 재밌게 봤지만, 이 책은 아니다.

  p.s. 과학과 영화의 교배작으로는, 현재 한국일보에 주일우씨가 과학@영화 라는 제목으로 매주 연재하고 있는 글이 마음에 든다. 아직 10여회 밖에 작성하지 않았고, 또 그가 스스로 책으로 엮어낼 의지가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과학@영화 시리즈가 하나의 완성된 책으로 묶어져 나오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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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넛공주 2007-05-06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추천하신 컬럼부터 읽어봐야겠네요.

마늘빵 2007-05-06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한국일보 주일우씨 칼럼 매주 보고 있습니다. 분량도 많아요.

마늘빵 2007-05-06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일보 사이트에서 문화면 들어가시면 왼쪽에 연재물 메뉴 나올 겁니다. 거기에 과학@영화 로 들어가세요.

책읽기는즐거움 2007-05-11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아프락사스님 제생각과 약간 다른 부분이 있는것 같아서 글을 올려봅니다,
저도 정확히 몰라서요. 물어볼겸 해서요^^
윗글 중에서
'정재승'이라는 이름의 유명세가 그리 만든 듯 하다.
라는 부분이 있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위책이 출판되어 잘팔렸기때문에 정재승이란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게 아닐까요? 물론 2000년대 초반부터는 정재승이란 이름때문에 책이 많이 팔렸겠지만요.
그리고 몇년전부터는 여러곳에서 영화와 과학을 접목시켜 어느 수준이상의 글이 많이 나오기시작했는데 99년 그 당시에는 정재승씨 정도의 수준으로 영화와 과학을 접목시켜 글을 적을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제가 이쪽에 관심이 많아 당시에 열심히 찾아 보았던 기억이 나는데 대부분의 글이 과학적 설득력이나 구성력에서 떨어지는 글이었습니다. (굳이 꼽자면 딴지 일보에서 좀 괜찮게 적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외에는....-_-;;:)

책읽기는즐거움 2007-05-11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정리하여 말해본다면 그 텍스트 자체로만 놓고 본다면 물론 요즘의 기준으로 만족하기 힘든 책일 수도 있지만 시대적 상황과 결부시켜서 생각해보면 이런쪽의 글을 어느정도 대중화시키는데에 공헌했다고는 볼수 없을까 생각해서 글을 올려 봅니다.^^ 뭐든지 첫걸음이 힘든 편이 잖아요ㅋ
대중에게 이책이 끼친영향도 무시할수는 없고요ㅋ
그리고 솔직히말해, 그동안 과학과 영화를 접목시켰다는 미명하에 나온 책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도 10년전의 글에 비해 요즘 신문에 기재되는 생생한 글이 큰 차이를 보이지 못한다면 그거야 말로 글 쓰는 사람들이 통렬히 반성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요?^^

그냥 아프락사스님의 글을 읽으니 여러가지 생각과 궁금증이 나서 끼적끼적ㅋㅋ
거려 봤습니다. 부드럽게 봐주세요^^

책읽기는즐거움 2007-05-11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참, 그리고 덧붇이면 처음시도 되는 분야의 글을 쓰는데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갈수 있으려면 영화에 사용된 과학적 원리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글을 써내려가는것 보다는 오류를 짚어내며 글을 쓰는 게 더 나은 선택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오류만 그렇게 잡아내지도 않는데 초반에 그런 관념이 박혀 있으니 님께서 책을 읽으시면서 계속 그렇게 생각하신게 아닌가 생각도 해봅니다.(물론 아닐수도 있어요^^;;;;) 좀 글의 순서를 잘만 배치했더라면 아프락사스님이 더재밌게 책을 읽으시지 않으셨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제 기억으로는 분명히 한챕터안에 오류도 잡아내고 그 영화의 다른 부분에서의 과학적 원리도 설명했었거든요. 오류만 냅다 잡아낸 부분은 없었던걸로 기억하는데,,,,아무래도 제 기억이 조작된듯 하네요;;; 그리고 제가 보기에는 비전공자는 그 잡아낼수없는 부분들을 잘 잡아 냈었다는 기억도 있는데 오래되어서 책을 봐야지만 그부분이 어딘지 기억해 낼수 있겠군요ㅜ.ㅜ이런 기억력이 점점 쇠퇴하는듯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