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담 & 싱어 : 매사에 공평하라 지식인마을 16
최훈 지음 / 김영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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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관계가 걸려 있는 당사자의 행복을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키는 (또는 촉진시키거나 억누르는) 경향에 따라 모든 각각의 행위를 승인하거나 부인하는 원리를 의미한다. 또한 여기에서 내가 말하는 모든 각각의 행위란 개인의 사적인 모든 행위뿐 아니라 정부의 모든 법령의 작용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다."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 벤담) -63쪽

"옳은 행위의 공리주의적 기준을 성립시키는 행복은, 행위자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관련된 사람 모두의 행복이다. 그 자신의 행복과 다른 행복을 놓고서, 공리주의는 행위자로 하여금 공평무사한 선의의 관망자로서 엄격히 불편부당해지기를 요구한다."
(<공리주의> 2장, 밀) -63-64쪽

노직은 사람들이 이 기계(경험기계)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즐거움 그 자체보다는 즐거움을 만들어 내는 현실의 인간 관계와 사회 및 자연 환경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직은 이런 것을 무시하는 쾌락주의는 틀렸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본다면 공리주의도 옳지 않다. -79쪽

벤담은 감옥이 터무니없이 잔인한 고통을 주는 곳이 아니라 참회하면서 개과천선하게 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의도로 팬옵티콘을 구상했기 때문이다. 당시 감옥은 아주 비인간적이고 비위생적이었는데 벤담이 설계한 팬옵티콘은 위생적인 화장실과 환기, 중앙 냉난방 시설이 갖추어져 있으며, 시민에게 공개되어 시민이 교도소 운영을 감시하도록 되어 있었다. 죄수들은 억압과 굶주림, 질병과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었고, 이 점에서 팬옵티콘은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시설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팬옵티콘은 사람을 가두는 '감옥'이 아니라 교화시키는 '교도소'의 선구적인 모델이었다. -89쪽

"나는 이제, 나 자신의 이익 대신에, 나의 결정에 의해서 영향을 받을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고려해야만 한다. 이러한 고려는 나에게 모든 이익들을 측정해서 영향받는 사람들의 이익을 최대화할 것으로 보이는 행동을 요구한다. 그래서 적어도 어떤 수준에서 도덕적인 추리를 할 때, 나는 영향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최선의 결과를 가져올 행동을 선택해야만 한다." (싱어, <실천윤리학>(33-34쪽)) -99쪽

"공리주의는 최소한의 것이며, 이기적인 의사 결정을 보편화함으로써 도달하게 되는 첫 번째 지점이다. 우리가 윤리적으로 생각하고자 하는 한 이러한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공리주의를 넘어서서 공리주의적이지 않은 도덕적 규칙잉나 이상을 받아들일 수 있기 위해서는, 이렇게 더 나아가야 할 합당한 이유를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러한 이유가 만들어질 때까지, 우리가 공리주의자로 남아 있어야 할 까닭이 있다." (싱어, <실천윤리학>(35쪽)) -100쪽

우리가 말을 하기 전까지 윤리적인 행동이라고는 기껏해야 상대방이 은혜를 갚으면 우호적으로 핥아주고, 갚지 않을 경우 으르렁거리며 위협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말을 하게 되면서 그런 행동 대신에 "왜 그런 일을 했지?" 라고 물을 수 있게 된다. 이유를 묻는단든 것은 곧 이성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102쪽

"윤리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내가 단지 내가 속해 있는 사회의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임을 알게 되었다면, 또한 전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나의 이익이 내가 속해 있는 사회에 살고 있는 타인들의 이익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즉 좀 더 넓은 관점에서 보았을 때 나의 사회가 여러 사회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며, 좀 더 확대된 시각에서 볼 때 내가 소속되어 있는 사회 구성원의 이익이 다른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익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점을 수용하게 될 것이다. 윤리적 추론은 일단 시작되면 당초에 제한되어 있던 윤리적 지평을 밀어내고 좀더 보편적 관점을 취하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싱어, <사회생물학과 윤리>(216쪽))-109쪽

싱어가 공리주의자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모든 사람의 이익을 동등하게 고려하라고 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와는 성격이 다르다. 벤담이나 밀, 싱어 모두 관련된 모든 사람의 이익을 말하지만 그 이익이 약간 다르다. 벤담과 밀에게 이익은 행복이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그들의 슬로건이었고 행복은 즐거움이 있고 고통이 없는 상태를 말했다. 그들도 물론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불행을 최소화하는 행동을 윤리적이라고 생각하지만 행복과 불행의 양을 계산하여 행복의 양이 더 크면 그 행동은 받아들인다. -115쪽

고전적 공리주의에서 가장 윤리적인 행동은 최대 다수의 사람들에게 고통보다 즐거움을 더 많이 산출하는 행동이다. 반면에 싱어와 같은 공리주의에서는 최소한의 고통을 산출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 그래서 이런 공리주의를 부정적 공리주의라고 부른다. 또 싱어가 거론한 이익들은 우리가 바라는 바이기는 하지만 즐거움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들이다. 고통을 피했다고 해서, 남에게 간섭을 안 받는다고 해서 즐겁기까지 하겠는가? 그렇지만 그런 이익들은 분명히 우리가 바라고 선호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즐거움(쾌락)에 주목하는 고전적 공리주의와 달리 싱어와 같은 공리주의는 선호 공리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입장을 취하는 공리주의자는 어떤 행동이 즐거움을 산출하든 안하든 많은 사람의 욕구 또는 선호를 만족한다면 그 행동은 윤리적이라고 주장한다. -116쪽

벤담이나 싱어는 고통의 양이 똑같을 때 인간이라고 해서 우선 고려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 사람의 고통이 더 큰데도 그것을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성적인 사고를 할 줄 몰라서 고통을 더 크게 느끼기도 한다. 동물을 보호하기 위해서 붙잡았을 때 동물은 자신을 지금 보호하기 위해 붙잡았는지 죽이려고 붙잡았는지 구분할 줄 몰라서 훨씬 더 공포를 느낀다. 이성이 있다면 상황을 얼른 파악해서 편안함을 느낄 텐데 말이다. 인간과 동물의 고통의 양을 비교하는 일이 쉽지는 않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동물에게 가해지는 엄청난 고통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만이 도덕적으로 의미 있는 특성이다. -164쪽

공리주의자라면 왜 사람을 죽이는 것이 나쁘다고 대답할까? 공리주의는 즐거움을 극대화하고 고통을 극소화하는 경향에 의해 행위를 평가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사람을 죽이는 것은 비록 고통을 수반하지는 않는 죽임이라고 하더라도 현재 즐기고 있는 행복이 없어지므로 나쁜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 잘 풀리지 않는 일도 있고 고민도 있지만 내 인생을 전체적으로 계산하면 행복하다고 말 할 수 있다. 살아있는 것 자체를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가? 그런데 내가 죽으면 그런 행복을 더 이상 누릴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다시한번 생각해보자. 내가 죽으면 행복을 더 이상 누릴 수 없다는 것이 살인이 나쁜 공리주의적 이유였다. 그런데 내가 죽으면 행복을 누가 누릴 수 없는가? 내가? 나는 더 이상 없는데? 내가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었는데 언니가 먹어버렸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못 먹게 된 것에 대해 안타까워한다. 그런데 '내'가 죽는다면 어떨까? 더 이상 행복을 누릴 수 없게 되었으니까 안타깝다고? 누가?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누군가? 나는 죽어서 없어졌는데. 결국 공리주의는 왜 사람을 죽이는 것이 나쁜지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공리주의는 죽임이 왜 나쁜지 간접적으로는 설명할 수 있다. 나에게 죽음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해보자. 나는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나는 미래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 계획은 대통령이 되겠다는 거창한 것일 수도 있고 친구와 영화를 보기로 했다는 사소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죽는다는 것은 그 계획들을 헛되게 만들고,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은 나의 삶을 덜 행복하게 만든다. 그런 불안이 없다며 나의 삶은 훨씬 더 행복할 수 있었으므로 공리주의에서는 살인이 나쁘다는 것이 간접적으로는 설명이 된다. 물론 사람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실종을 의미하고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는 불안감을 준다.

-187-188쪽

"감각 있는 존재는 가치있는 것을 담는 그릇과 같은 것이며, 그릇이 깨어진다 해도, 내용물이 파손되지 않고 옮겨질 수 있는 다른 그릇이 있는 한, 그릇이 깨어지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 비록 육식가들이 그들이 먹는 동물의 죽음과 그 동물들이 경험했을 쾌락의 상실을 야기시키기도 했지만, 그들은 또한 더 많은 동물의 출생을 야기시키기도 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고기를 먹지 않는다면, 식용으로 사육될 동물은 더 이상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식가가 한 동물에 대하여 가하는 손해는 ...... 그들이 다음 동물에게 부여한 이익에 의하여 균형을 이루게 된다."
(싱어, <실천윤리학>(154쪽)) -193쪽

"단지 먹히는 동물에 대해서라면 먹는 것을 용서받을 매우 좋은 이유가 있다. 우리는 동물을 먹음으로 인해 더 이익을 보고, 동물들도 결코 손해를 보지 않기 때문이다. 동물들은 우리가 갖고 있는 것과 같은 오랫동안 연장되는 미래의 불행에 대한 예감을 갖지 않는다. 그들이 우리의 손에서 공통적으로 감내해야 하는 죽음은, 자연의 불가피한 역정 속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죽음에 비하면 훨씬 신속하고 덜 고통스러운 것이다." (벤담) -194쪽

"다른 존재가 자의식적인가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러나 만약 인격체를 죽이지 않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으려고 생각하고 있는 그 존재가 인격체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실제로 의심이 간다면, 우리는 그 존재에게 의심의 이득을 주어야만 한다."
(싱어, <실천윤리학>(131쪽)) -209쪽

사냥되는 동물이 고통 없이 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동물을 죽이기만 할 뿐 다른 동물로 대체하지 않기 때문이다.

싱어는 이러한 사정 때문에 비록 스스로 대체 가능성 논변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음식을 얻기 위해서 동물을 죽이는 것은 전체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제안한다. 동물의 고기를 먹어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될 때마다 이 동물이 편안하게 사육되었고 고통 없이 죽었는지 알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음식을 얻기 위해 동물을 죽이는 것은 그들을 우리가 원하는대로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생각하도록 만든다. 이러할 때 그들의 삶은 우리의 단순한 욕구에 비해 가벼운 것으로 간주된다. 우리가 동물을 이러한 방식으로 계속 사용하는 한, 동물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마땅한 방식으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한 과제가 될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단지 그들의 즐거움 때문에 동물들을 계속 먹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사람들에게 동물을 존중하고 그들의 이익에 대하여 동일한 관심을 가지라고 고무할 수 있겠는가?" (싱어, <실천윤리학>(167-168쪽))

-211쪽

유인원 프로젝트의 기본 강령은 유인원들에게 이런 기본권을 부여하지 않는 것은 윤리적으로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을 죽이거나 이유 없이 고통을 주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지 않은 것처럼 유인원을 죽이거나 이유 없이 고통을 주는 것은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 지금까지 살펴본 싱어의 논의에 따르면 유인원뿐만 아니라 다른 젖먹이동물에게도 이런 권리를 줘야 하짐나 우선 유인원부터라도 그런 권리를 주자는 것이 이 프로젝트다. -215쪽

한편 개고기 비판에 대한 가장 흔한 반론인 문화상대주의도 올바른 반론은 아니다. 문화상대주의는 우리 문화가 이러이러하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지 우리 문화가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남아 선호 사상이나 노비제가 우리의 문화였다는 사실이 그 문화가 옳음을 보여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언론매체에 종종 보도가 되지만 보신탕용 개는 특히 비참한 환경에서 사육되고 잔인하게 도살된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개는 몽둥이로 패서 잡아야 맛있다고 했다. 지금이야 그렇게 개를 도살하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아직도 '개지옥'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개들을 열악한 환경에서 기르는 모습들이 인터넷에 종종 공개된다. 개의 이익을 평등하게 고려하자는 것은 개를 애지중지 키우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개도 우리처럼 맞으면 아프고 죽지 않고 계속 살고 싶다는 욕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배려해주자는 것이다. 다른 동물도 그렇지만 우선 개에게 실천해보자는 것이다. 이것을 개 프로젝트라고 이름 붙여야 할까. -218-219쪽

사회생물학과 같은 과학은 관찰자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윤리는 참여자의 관점이다. 예를 들어서 과학자로서의 나는, 굶고 있는 사람에게 기부를 할 것인지 아니면 자기 가족을 위해 그 돈을 쓸 것인지 고민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학자들 덕분에 사람들이 내릴 수 있는 선택에 대해 가능한 모든 이론들을 갖추게 되었다고 해보자. 심지어 나와 모든 조건(재산, 가족, 성격 등)에서 비슷한 사람이 그런 상황에서는 기부를 한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면 나도 비슷한 상황에서 똑같은 선택을 할까? 수많은 이론과 자료가 있지만 여전히 갈등할 수 있다. 나와 비슷한 사람이 기부를 한단든 지식이 나에게 도움은 될 수 있지만 그 지식이 영향을 주어 오히려 반대로 선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윤리적 의사 결정 과정에서는 관찰자가 아니라 참여자가 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과학은 '무엇을 하는가'에 대한 이론은 되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말해주는 바가 없다. -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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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03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밀과 벤담을 읽다보면, 결국 흄을 읽게 되더군요..
싱어는 고통받는 존재의 범위를 인간에 한정하지 않고 동물까지 확장했다는 점이
특별합니다.
동정심.. 인간적 감정.. 설령 논리적이지 않더라도 윤리적 판단과 실천의 근원이리리 생각합니다.
현대의 윤리학자 중 싱어의 의견에 많은 부분 공감하고 있답니다.
특히 동물을 대하는인간의 태도 면에서,


마늘빵 2007-05-03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벤담과 밀, 그리고 흄은 뗄 수 없는 관계지요. 곧 저도 흄에 도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읽을게 참 많습니다. 흄까지 관심이 가려면 좀 더 시간이 걸릴 듯 해요.
싱어의 저서를 읽어보려고 합니다. 싱어는 제 관심에서 없던 인물인데, 이번 기회에 깊이 들어왔습니다.
 
한 권으로 읽는 한국철학 - 인물들과 함께 떠나는 한국철학 시간여행
황광욱 외 지음 / 동녘 / 2007년 3월
절판


우리나라에 오묘한 진리(현묘지도 玄妙之道)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고 한다. 그 가르침을 세우게 된 근원은 선사에 자세히 실려있다. 실질적 내용은 곧 유교, 불교, 도교를 포함하고 있고 뭇 생명과 접촉하여 교화한다. 이를테면 집에 들어가 효도하고 밖에 나가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이고, 무위(無爲)의 일에 처하며 불언(不言)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근본이며, 모든 나쁜 것을 짓지 않고 모든 착한 것을 받드는 것은 석가의 교화이다.
(최치원 中)-42쪽

최익현은 의복이 중화와 오랑캐의 문화를 구분하고 귀함과 천함의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는 기본 형식이라고 본다. 최익현은 조선의 의복제도가 비록 옛 제도에 완전히 부합하지는 않지만 중화문물을 상징하는 것이고 동방 풍속의 자랑거리라고 보았다. 그래서 전통식 복제를 회복할 것과 김홍집과 유길준 등 을미개혁의 주도자를 처벌할 것을 요구한다. 개화파가 주장하는 '개화'란 중화의 제도를 오랑캐 제도로 바꾸고, 인류를 짐승으로 타락시키는 행위라고 여긴 것이다.
의복과 두발은 단순히 외양을 꾸민다는 의미가 아니다. 특히 효를 지고의 가치로 여기는 조선사회에서 머리카락을 자른다는 것은 가장 큰 불효였다. 또, 복식은 신분질서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기에 신분에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은 질서를 어그러뜨리는 일이다. 이에 최익현은 전통 의복과 두발을 반드시 보존하려 노력했고, 반대로 개화파는 이를 바꾸는 것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후진성을 탈피하는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최익현 中)-87쪽

초가 하나 타고 있다고 하자. 초가 타는 것은 '고체로서의 기'가 '기체로서의 기'로 변화(운동)하는 과정에서 불꽃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럴 때 기는 있음(有)에서 없음(無)으로 가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서경덕의 생각이다.
... 중략 ...
서경덕은 우리의 감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세계와 감각을 넘어선 세계를 구분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인식할 수 있는 세계다. 우리의 감각 능력과 범위에 드어오지 않는 초음파나 수억 광년 떨어져 있는 행성도 모두 이 세계다. 그것을 서경덕은 '후천(後天)'이라고 부른다. 후천은 기의 운동성이 발휘되어 생극을 통해 전개되는 세계다. 그리고 촛불은 마치 눈앞에서 타서 없어지는 것 같지만 실은 '태허'로 돌아가는 것이다. 태허의 세계는 인식을 넘어서 있는 세계며, '선천(先天)'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후천의 기와 선천의 기가 다른 것이 아니다.
(서경덕 中)-138-139쪽

선악의 문제를 개인의 도덕심으로만 다룰 수는 없다. 사회란 개인들의 단순한 합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는 각 개인의 차원과는 다른 생명력을 갖고 있으며, 그에 따른 운영원리와 조직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개인에 있어서건 사회에 있어서건 선악은 '때(상황)'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예를 들어 초상집에 문상 갔을 때 슬퍼하는 것은 선이지만 친구의 결혼식에 가서 슬퍼하면 악이다. 슬퍼하는 것은 같지만 때에 따라 선악이 갈리는 것이다. 이렇듯 인간의 감정이 '때에 맞으면' 선이고 사단이라고 보는 것이 이이의 견해다. 이황이 사단과 칠정을 분명히 구분한 것과 대비된다. 이이는 마음에 사단이라는 줄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사단은 칠정의 감정이 때와 절도에 맞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이 中)-167쪽

정제두는 '마음과 이치는 하나다'라는 주관적인 측면만을 말한 것이 아니라 천(天)을 끌어들여 주관과 객관을 동시에 만족시키려 했다. 그는 '성이 곧 리이다. 리는 하늘이 조리있게 통하는 것이니, 바로 하늘의 다른 이름이며, 사람 마음의 본체가 이것이다.'라고 말하여 마음만이 아니라 성도 리라고 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정제두가 말하는 '성이 곧 리'는 마음, 리, 성이 분리된 '성즉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성을 매개로 '마음과 이치의 일원적 관계'를 주장한 것이다. 이는 주희의 '성즉리'와 다르다. 주희는 마음과 성을 구분했다. 정제두에게 있어 성은 사람 마음속에 들어있는, 하늘이며 명덕이다. 그러므로 성은 본래 마음을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다. 성은 마음 속에 들어있는, 하늘로부터 받은 리이며 도의 핵심이고 구체적으로는 명덕이다. 따라서 성은 마음속에서 선한 부분 곧 진리를 가리킨다. 정제두는 성이 마음의 본체이고 마음이 성의 작용이라고 하여, 마음의 본체인 성 곧 선이 마음의 작용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근거로 삼았다. 따라서 정제두는 주관적인 심체(心體)와 객관적인 성체(性體)를 합일시킴으로써 임정종욕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논리를 구축했던 것이다.
(정제두 中)-183-184쪽

몇번의 사화를 거치면서 모범을 보여야 할 훈구 지배층이 타락해 정의와 도덕이 문란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두 가지다. 첫째는 '분배의 정의'라는 측면이고, 또 하나는 '사회지도층의 역할'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서로 떨어진 문제라기보다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첫째의 측면과 관련해, '분배'는 결국 의의 실현이고 그것은 가진 자의 책임문제기도 하다. 분배와 정의는 결국 의와 이의 문제다. 의와 이의 관계에 관한 유학의 기본적 관점은 '의주이종'이지만 주종이 서로 상쇄되는 관계가 아니다. 의의 실현은 이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고, 이의 추구는 의를 근본으로 해야 정당성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지함이 의와 이의 관계를 상보로 본 것은 민생과 도덕 두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겨 한 것이다. 의만 강조하면 민생문제를 가볍게 보게 될 것이고, 이에 치중하면 도덕의 타락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지함의 의이상보론(義利相補論)은 지금 사회에서도 여전히 의미가 있다. 이지함의 경제관이 뛰어난 것은 산업진흥책을 제시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이를 추구하면서 도덕적으로 타락할 수 있다는 문제까지 함께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지함 中)-234-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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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 & 버클리 :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 지식인마을 2
최훈 지음 / 김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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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까지 아주 확실하다고 받아들였던 것들은 감각으로부터 또는 감각을 통해서 얻은 것들이다. 그런데 나는 감각이 때때로 우리를 속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를 한번이라도 속인 것은 완전히 믿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데카르트 <성찰> 中)-60쪽

"이런 점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깨어 있는 것과 꿈을 꾸고 있는 것을 구별해줄 수 있는 어떤 징표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는 이런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라게 되고, 그 놀라움이 너무커서 내가 지금 여기 깨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할 정도다."
(데카르트, <성찰> 中)-62쪽

20세기 초반에 버클리와 흄의 철학을 이어간 철학자들을 현상론자라고 한다. 감각 경험을 현상이라고 하고 우리와 독립적인 대상을 본질이라고 할 때, 이들은 확실한 지식은 현상에 대한 지식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물리적 대상이나 과학적 대상에 대한 지식은 현상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정의된다. 밀과 에어가 대표적인 현상론자다.
버클리도 흄도 현상론자도 상식의 견해와는 맞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의 임무가 상식을 보존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과학 이론이 상식과 어긋난다고 해서 잘못된 이론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철학 이론의 장점과 결점도 상식과 부합하느냐에 따라 판단할 것이 아니라 다른 확립된 이론과 충돌하지 않는가, 충돌한다면 더 그럴듯하게 설명해낼 수 있는가, 그 이론 내부에 모순은 없는가 등에 따라 판단해야 할 것이다. -120-121쪽

흄은 인간 이성의 모든 대상이 두 종류로 나뉜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관념들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사실의 내용이다. 관념들의 관계는 순전히 선험적인 지식, 곧 감각에 기대지 않는 지식을 가리킨다. 이런 종류의 지식으로는 수학과 논리학의 진리들이 있다. 수학과 논리학의 진리들은 세계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 수, 도형, 식, 사고들의 관계에 대한 주장일 뿐이다. 반면에 사실의 내용은 관찰 가능한 세계를 직접 다루며 감각에 의해서 알려진다. 대부분의 상식과 과학의 주장들이 여기에 속한다.
... 중략 ...
흄은 세계에 대한 현재의 우리 경험을 과거 또는 미래의 가능한 경험과 묶어주는 구실을 하는 것이 바로 원인과 결과, 곧 인과원리라고 생각한다.
... 중략 ...
흄은 경험론의 원칙에 충실하다면 인과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사건들이 필연적으로 관련되어 있음을 우리가 경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사건 다음에 또 하나의 사건이 뒤따라온다는 사실뿐이다. 그리고 그런 경험의 결과, 두 사건이 인과적 관계에 있다고 우리 머릿속으로 생각할 뿐이다. 흄은 그런 생각이 가능한 것은 순전히 습관 때문이라고 말한다. 두 사건이 항상 함께 일어나는 것을 보고, 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다른 사건이 따라 일어날 것이라고 우리는 예측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두 사건 사이에 필연적인 인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 -149-150쪽

여기 손이 있다는 전제는 증명이 필요 없는 분명한 것이라는 생각은 무어의 생각일 뿐이다. 그 전제 자체가 분명한지 그렇지 않은지 따져보자는 것이 회의론의 의도인데 아무 근거 없이 자신의 전제가 더 분명하다고 말하는 것은 독단적인 태도다. 아닌 게 아니라 회의론자들은 외부 세계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을 독단론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무어의 회의론 반박 논증 中)
-1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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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01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상학은 일종의 인식론이니 갑론을박의 좋은 소재가 되곤 합니다..
사르트르의'존재와 무'를 읽으며 후설의 현상학을 처음 접했는데
저의 이해능력 밖에 있더군요. 저는 얼른 포기했지요. 하하
사실은 현상학 입문서를 몇권 억지로 읽었는데도..
전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답니다. 하하


마늘빵 2007-05-01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상학과 해석학에 관심 많아요. 아직 저도 아는 바는 없습니다. 학부에서 다루지 않은 부분이기 때문에. 인식론의 기본만 대충 훑었지요. 일단 지금 하고 있는 공부를 좀 해놓고 봐야겠어요.
 
기후의 역습
모집 라티프 지음, 이혜경 옮김 / 현암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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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올 여름이 가장 더울 전망입니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아나운서는 이렇게 말한다. 올 여름이 가장 덥습니다. 라고. 아니 왜 매년마다 올 여름이 가장 덥대. 정말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는거다. 매년 지구의 평균 온도는 점점 상승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지구의 평균 온도는 15도 정도라고 하지만 최근의 지구의 평균 온도는 15.6도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0.6도 차이가 뭐 그리 대수일까, 생각도 들겠지만, 감기 걸렸을 때를 생각해보라. 사람 몸의 온도가 38도라고 하는데, 감기 걸렸을 때 39도만 되면 어찌되는지를. 지구도 마찬가지다. 지구가 앓고 있다. 

 제임스 러브룩은 가이아 이론을 통해서 지구를 대지의 여신인 가이아에 비유해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로서 바라봤다. "모든 유기적인 생명체들은 자체의 피드백을 통한 제어가 가능해서 그 복잡한 시스템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데, 지구의 경우도 그렇닫는 것이 가이아 가설의 요지이다. 그래서 주변의 온도가 심하게 변동되어도 인간이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듯 지구시스템도 스스로 자신을 조절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러브룩은 한때 네이처지에 프레온가스가 지구에 무해하다고 발표했다가 이를 후회하기도 했다고 한다. 좀 더 엄밀하게 말했어야 했는데 말이다. 프레온 가스는 물론 지표에서 가까운 대류권에 있을 땐 무해하다. 하지만 이것이 더 높은 성층권으로 올라갔을 땐 심각한 위협을 가한다. 오존층을 파괴해 구멍을 뻥뻥 뚫어놓기 때문이다.

 지구온난화는 모든 것의 주범이다. 북극에서 빙하가 녹아 북극곰들이 익사한단 소식을 들었다. 북극곰은 빙하 위에서만 살지 바닷물에서는 못산다. 그 녀석들은 빙하가 녹으면 다른 빙하를 찾아 바다를 헤엄치다가 바다 속에서 익사해버린다고 한다. 얼마전 신문에는 2050년이 되면 지구의 동식물 30-30% 가량이 멸종한다는 기사가 떴다. 이 정도 수치면 대단히 높은 거다. 북극곰도 어쩌면 그 대상에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흔한 동식물들은 우리가 좀 더 나이를 먹었을 때 볼 수 없게 된다. 이건 현실이다. 지구는 병들고 있고, 우리는 당장 나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하여 무감각하게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영국에서는 5월 정도가 되면 우리나라의 땡볕 날씨가 된다고 한다. 그 나라에서는 7,8월이 되면 사람들이 선그라스에 마스크에 긴팔옷을 입고 돌아다녀야 한다. 여행을 안가봤으니 뭐라 단정지어 말하긴 힘들다. 일부는 시원한 옷차림을 할테고 일부는 긴팔로 피부를 보호하며 다닐 것이다. 사람들이 죽어가는 그 더운 여름에 긴팔 옷을 입고 외출을 해야한다니. 그 정도의 생활의 변화가 와야만  사람들은 아 뭔가 기후에 문제가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엘 고어는 대통령 선거 패배 후 정치인에서 환경운동가로 변신을 했다. 그것이 컨셉이건 아니면 그의 진심이건 간에 상관없이 그는 지구 곳곳을 돌아다니며 1000회 이상의 지구온난화에 대한 강연을 했다고 한다. 그것을 영화로 만든 것이 <불편한 진실>이다. 이 영화는 친절하게 온갖 사진과 도표를 제시해주며, 또 짧은 애니를 보여주며 지구온난화가 얼마나 위험한지, 그 위험이 얼마나 가까이 다가왔는지를 자세히 설명해준다.  <투마로우>는 온난화 이후의 빙하기의 도래를 그려낸 영화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빙하기를 맞이하지는 않겠지만, 빙하기는 생각보다 빨리 다가오고 있다. 영화는 곧 현실이 된다.

  이 책은 온난화에 대한 아주 친절한 해설서는 아니다. 온난화에 관한 많은 책들이 나와있는데 대개가 두껍고 비싸다. 이 책은 정가 8,500원에 171쪽 분량으로 상대적으로 얇은 편에 속하니 부담없이 워밍업 삼아 읽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앎의 욕구를 충족시키기는 힘들 것이다. 그저 이 책은 현재 지구 곳곳에 나타나는 이상기후 현상이 자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한 것임을 자료를 통해 증명해내고 있다. 그것이 인간의 잘못이라는 것을. 인간의 행동을 통해 지연시킬 수 있고, 개선시킬 수 있음을 주장한다. 


 p.s. 이 책은 재생지로 만들어져 매우 가볍다. 얼마전 신문에서 본 지구온난화를 방지하는 일상적인 실천 방안 중 이런 것이 있었다. 넥타이를 하지 말것, 메일은 이메일로 받을 것. 넥타이를 하지 않으면 목이 답답하지 않으니 에어콘을 덜 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종이메일이 왜 문제가 될까. 생각해보면 지구온난화는 이산화탄소가 주범이고, 공기중에는 산소는 많다. 그렇다면 탄소가 산소와 만나지 않게 해야 하는데, 우리가  사용하는 종이에는 탄소 성분이 많이 들어가 있다. 종이의 질이 좋아질수록 더더욱 탄소성분은 많아진다고 한다. 아마도 이 때문에 종이메일보다 이메일을 권장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순전히 나의 추측일 뿐이다. <기후의 역습>은 재생지를 사용함으로써 이에 기여하고 있다. 책의 몸체와 책의 내용이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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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07-05-01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편한 진실>은 읽는 내내 정말 불편했어요. -_-;;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이 긴 이름을 제가 맞게 쓴 건가 몰라요) 엘 고어가 나와서 아주 쉽고도 충격적(!)인 강의를 하더군요. 말씀하신대로 그게 컨셉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는 책에서나 방송에서나 진심을 느꼈답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해보였기 때문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책의 몸체와 책의 내용이 일치한다"는 님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니 이 책이 읽고 싶어졌어요. 고맙습니다. :)

짱꿀라 2007-05-01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부터 덥다는 징후가 여기저기 나오고 있습니다. 참 인간들이 자연을 파괴하더니 이제는 오히려 천천히 역습을 당하는 꼴이 되었네요. 잘 읽고 갑니다. 이제 더 이상 자연을 파괴하는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할텐데........

미미달 2007-05-01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엘 고어의 작품이 상을 받는 것을 보고는
가슴이 뭉클했다는 ...

BRINY 2007-05-01 0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1년에 며칠 편하자고 에어컨 사는 건 참도록 하겠습니다.

마늘빵 2007-05-01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 네. 엘 고어네 집에서 전기를 엄청 소비하더라, 라는 누군가의 발언내용이 있긴 했지만, 그것이 진짜라 하더라도 지명도 높은 인사의 열정적인 강연만으로도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고 바라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매우 의미가 있죠. 영화는 봤는데 책은 아직이에요. 그것도 봐야지요.
산타클로우슬리님 / 네 벌써 많이 덥죠. 전 땀이 많아서 더위에 매우 약한데 큰 일 입니다. 오히려 조금씩 추워졌음 좋겠어요.
미미달 / 음. 그건 아직 모르는데. 그랬군.
브라이니님 / 저도 집엔 에어콘이 없어요. 선풍기만 세 대인데 저도 매우 힘들어요. 땀이 많거든요.

백년고독 2007-05-03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 참으로 덥다는데 벌써부터 고민이네요.
그래도 사람냄새나는 종이메일이 좋은데...^^

마늘빵 2007-05-03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년고독님 / 저도 걱정입니다. 땀 무지 많습니다. 저. 여름엔 윗옷 벗어 짜면 세탁기 탈수물 만큼이나 나옵니다. -_-
 
아테네인 스파르타인 살림지식총서 173
윤진 지음 / 살림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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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그리스의 철학에 관심이 있으니 고대 그리스의 역사적 배경과 사건들에도 관심이 가고, 최근 영화 <300>을 통해 테르모필레 협곡 전투와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에게도 관심이 가서 관련된 책 중 간단하게 볼 수 있는게 없을까 해서 집어든 책이다.

  살림지식총서는 매우 얇고 가벼워 가방을 따로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이거 하나만 들고 다니며 볼 수 있다. 지식총서가 나온지 꽤 오래되었고 그 중 괜찮은 책들도 많이 발견했던지라 그저 믿고 보고 있다. 아마 시리즈로 사놓았다면 보지 않았을 것이고, 관심있는 분야가 새로 생길 때마다 지식총서 중 관련된 것들이 없나 둘러보게 된다. 이번엔 그것이 그리스가 되었고, <아테네인, 스파르타인>이 된 것이다.

  현재 충북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있는 윤진 교수가 쓴 책으로, 그는 이미 이전부터 스파르타와 헬레니즘 시대에 관한 논문과 책들로 이 분야 전문가로 볼 수 있겠다. 저자는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한 쌍으로 같이 다루어져 왔고, 또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를 언급하면 다른 쪽도 같이 떠올리게 된다. ... 중략 ... 이 책은 이 대조적인 면과 공통적인 부분에 대한 이해를 조금이라도 넓혀보고자 쓰기 시작했다. 독자들이 현대 서구 문명의 기반 중의 하나인 고대 그리스 문명에 대해 보다 나은 이해를 얻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다지 썩 훌륭한 책은 아니다. 이 얇고 작은 책자 안에 새로운 뭔가를 담아내는 작업은 힘에 부칠 것이다. 한정된 지면안에 자신이 꾸리고자 했던 바를 모두 나열하는건 힘겹다. 이 책에 대해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저 '아테네와 스파르타에 대한 잘 만들어진 한편의 보고서'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그 이상의 의미를 갖기는 힘들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수호신, 종교, 축제, 경기, 교육, 정치 등의 분야를 통해 비교하고 있지만 썩 선명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얇은 책자이지만 조그만 흑백사진이라도 넣어가며, 전투와 동맹을 설명할 땐 작은 지도라도 있었다면 좋았겠다 싶다. 역사와 문명, 전쟁사를 그냥 글로만 읽자니 텁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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