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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에떼 - 문화와 정치의 주변 풍경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개인적으로 우리말을 구사하는데 있어서 고종석 만큼 뛰어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바 - 아직까지 많은 글을 접해보지 못한 나의 좁은 시야에서 비롯될 수도 있겠지만 - 고종석의 글이라면 무조건 갈무리하고, 고종석의 책이라면 무조건 사모으는 지경에 이르렀다. 또한, 내가 고종석을 좋아하는 다른 이유는, 그의 사회, 사건,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 대개 나의 그것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를 보수, 우파 라고 지칭하기도 하는데, 이는 유럽의 시각에서 봤을 때나 긍정할 수 있을 뿐, 실상 오른쪽으로 편중된 시각이 중간 지점에 위치한 한국땅에서는 옳지 않다. 고종석의 정치, 사회적 발언내용에서 내가 그에게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은, 영어공용어화에 대한 시각 뿐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간 고종석은 꽤 많은 책을 냈고, 그 책들은 많이 팔리기보다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열정적인 사랑을 받았다. 소위 그의 팬들은, 그의 문체 때문이건, 사회정치적 메세지 때문이건, 그 밖의 어떤 이유 때문이건 간에 고종석을, 마음을 다해 사랑해주었다. 그가 낸 모든 책들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그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감염된 언어>이다. 1999년에 나온 이 책은 이후 약 8년 동안 나온 다른 책들보다, 그 이전에 나온 다른 책들보다 뛰어나다. 나로 하여금 다른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게 만들었고, 깊이있는 생각을 하게 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이번 책 <바리에떼>는 실망스럽다.
<바리에떼>에 대한 나의 실망감은, 고종석의 시각이나 글에서보다는 편집구성과 그것이 책으로 엮여졌다는데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다. 개별 글들이 모여 하나의 책으로 묶여졌을 때 상황과 맥락에 의해 빛을 발하는 책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각각의 글의 질적 저하를 불러오는 경우도 있다. 고종석의 이번 책은 후자에 가깝다. 그저 그의 글들을 하나로 묶어 찾기 쉽게, 읽기 쉽게 엮어놨다는 정도의 의미 밖에는 찾기 힘들다. 그의 열성적인(?) 팬인 나는, 일일이 챙기지 못하는 그의 글을 손쉽게 읽어볼 수 있어 좋지만, 그나마 나같은 열성적인 팬에게나 의미를 지닐 뿐이다.
바리에떼. 프랑스어로 다채로움이라는 뜻을 지닌 이 단어를 제목으로 사용한 것에 대해, 고종석은, "'잡다함'이나 '버라이어티'라는 말이 한국어 화자들에게 행사할 정서적 환기력을 조금이라도 눅이고 싶었다"고 밝히고 있다. 나는 이 제목에서 고종석의 프랑스에 대한 사랑을 다시 한번 확인함과 동시에, 그가 글을 쓸 때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다는 점을 읽어낸다. 고종석의 글에서는 비슷한 활동을 하는 강준만이나 진중권의 글보다 조심성이 느껴진다. 가끔 강한 어조로 칼럼을 쓸 때도 있지만, 대개 그의 사회적 메세지는 사안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면서도 에둘러간다. '바리에떼'라는 제목은 그의 글쓰기에 임하는 자세와 관련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책의 목차는 1부 어스름의 감각, 2부 정치의 둘레, 3부 친구의 초상으로 구성되어있으며, 그 안에는 각기 다른 정말 '바리에떼'한, 속되게 말하면, 잡글이 모여있다. 문학동네에 기고했던 옛 글부터 시작해서 한 시인의 책에 쓴 글, 또 고종석 스스로 스승이라 칭하는 복거일의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에 대한 긴 반박문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글들의 집합이다. 그런 만큼 이 책 한권에서 정치, 사회, 시 등의 다양한 주제를 만날 수 있고, 또 다양한 고종석식 글을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역시 앞서 언급한대로 각 글들의 관계성이 느슨하고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단지 '글의 집합' 이상의 의미는 없다.
* 고종석에 관심을 갖고 맨 처음 그를 접하는 이들이라면, 이 책은 피하길. 이전에 나온 <서얼단상>이나 <감염된 언어>, <코드훔치기> 등을 권하고 싶다.